예레미야 26장 주석
=====26;1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 맛소라 사본의 본절 서두에는 '레쉬트 맘레
쿠트'(* )란 어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의 등극과 다
음 연도가 시작되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연대 계
산의 체계상 어떤 방식에서는 이 부분을 일년으로 계산하고 있으면 또 다른 방식에서
는 무시되거나 또는 왕의 통치 전(前)시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
에서는 즉위 연도를 빼버리는 체계를 사용했고 유다에서도 이런 계수법을 주로 사용했
으나 여러 방식이 혼용되기도 했다. 여호야김의 즉위 연도는 B.C. 609년 9월경에서
B.C. 608년 4월경 곧 니산월 사이가 된다. 한편, 혹자는 이 예언이 전달된 때가 이상
과 같이 여호야김 치세 초였기 때문에, 이 예언이 이곳에 위치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
고 설명한다(Blayney, Clarke, Dahler). 그러나 본서는 기록 의도상 연대순에 충실히
따르지 않고 있으므로 그러한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26:2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한 말도 감(減)하지 말라 - 7절까지에서 언급된 성
전 설교의 개요는 만약 이 백성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언약의 율법을 준수한다면 그
들에게 임할 심판을 여호와께서 중지시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철저한 파멸을 당
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서서 예언을 선포한 '여호와의 집 뜰'
이란 성전 내부의 마당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7:2에는 그가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설교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그는 금식일이나 절기에 백성들이 모여들었던 바깥
뜰과 안뜰의 경계 지역 근처에 서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 말도
감하지 말라'고 하는 표현은 예언의 엄중성을 시사함과 아울러 그 예언 선포에 따르는
핍박을 암시한다. '감하다'에 해당하는 '가라'(* )는 종종 수염을 깎아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48:37;사 15:2 참조).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적대감을 보일 것이고 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랬기 때믄에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 중 어떤 부분을 가감하려는 유혹을 받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Thompson).
=====26:3
그들이 듣고...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 여기서는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고 있다. '뜻을 돌이키다'라는 뜻의 동사 '나함'
(* )은 '뉘우치다', '동정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로서 18:8에서도 쓰였다. 그
리고 '재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 )는 재앙과 그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악행
이란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26:4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 이 부분과 그 다음에 이
어지는 절들은 7:13의 내용과 거의 같다(Clarke). 여기서 잠시 본장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여호야김의 등극은 B.C. 609년 가을이나 늦은 여름
으로서,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붙잡혀 감으로써(왕하 23:32-34) 가능했었
다. 유다에서는 대체로 왕의 치세를 왕의 통치 원년이 다 채워지고 난 다음의 니산월
부터 계수하였다. 따라서 이 기사는 예레미야의 전기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중에
첫번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본장은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전 설교와 예레미야
의 체포 등의 사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
씀이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또 그렇게 거부됨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불가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본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에
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지
만, 포로기가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26:5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백성들
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참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알리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귀는 달콤한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에서 현혹
되었다. 27-29장에는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뚜렷한 대조가 잘 제시되어
있다. 한편, 언약의 요구 사항은 율법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7:5,6에는 특
정 율법들이 명시되고 있으며, 백성들을 향하여 순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왕하
17:15 참조). 여호와께서 자기 종들, 곧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필경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6:6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 성전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실로의 옛 성소가 파괴된 것과 같이 파괴되고 말것이란 내용이다(삼상 4장).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이 심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법궤
가 있던 실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라 하더라도 파괴될 수 있음
을 말하는 것이다. 실로는 B.C. 1075년경 블레셋의 침입으로 무너졌던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삼상 4장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시
78:60, 61 참조). 실로는 훗날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시 무너졌다. 예레미야 당
시에는 그 폐허만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파멸을 예상시켜 주는
생생한 본보기였던 셈이다.
저줏거리-로 번역된 '켈랄라'(* )는 '가볍다'는 뜻의형용사'칼랄'(* )
에서 유래한 말로서 '비방', '조소' 혹은 '저주'를 뜻한다. 한편, 성전을 가리켜 저줏
거리가 된다고 하는 설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언사여씌며,
신성 모독이나 참람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선지자의 말은 총체적 반발을 불러일으
켰으며, 신성 모독으로 고소받기에 이르렀다.
=====26:7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 예레미야의 말이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바로 성전 경내에서 그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었던 제사
장들은 성전의 제사 업무를 관장하던 자들이었으며, 그곳에 참석했던 백성들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Thompson).
=====26:8
제사장들과...그를 붙잡고 이르되 - 맛소라 사본에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본절
에 '모든 백성'이란 말이 있으나 70인역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브라이트(Bright)는
이 말이 7절에서부터 삽입된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이를 빠뜨려야 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9절에 근거해서 보면, 백성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의
선동에 의해 예레미야에게 달려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자신의 발언 내용
으로 인해서 중대한 범법 행위로 체포되고 고소당하였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 고 하는 표현은 원어로 '모트 타무트'(* )인
데, 출 21-23장 내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모트 유마트'(* )란 말을 상기시
킨다. 그것은 어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말이다. 이로 볼
때 예레미야는 자신을 체포한 자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26:9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 고소의 내용이 제시되고 있
다. 즉 성전이 실로와 같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황무지처럼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이 예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다고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죄명이었다. 고소자들은 예레미야가 말한 예언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실
하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예레미야는 이중의 범죄를 범한 것이
된다. 즉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서 참람한 것을 말했으며, 또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거짓된 유언 비어를 퍼뜨렸던 셈이다.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 '모여드니라'에 해당하는 '카할'(* )은 보통 종
교적인 목적을 위해 의례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때로는 전쟁 때문에 소
집되는 것과 또 어떤 공통의 적이 있어 그를 응징하기 위해 군중이 에워싸는 것을 의
미할 때도 쓰였다. 성전 경내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군중들이 대단히 분노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Bright).
=====26:10
유다 방백들이 이 일을 듣고 - 유다 방백들이라 함은 왕의 궁정 관리들이나 측근
참모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Clarke). 왕궁은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이들은 소요 소식
을 듣고 급히 조사하러 나왔으며, 그들 스스로 재판관의 위치에 앉아 심문하였다
(Bright).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적절한 재판
과정을 거치게 되었드며, 분노한 군중의 손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 문어귀에 - 재판은 보통 성문에서 열렸다(창 23:10-20;룻 4:1;잠 31:23). 왕의
관리들은 새문 어귀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이 문이 어떤 문인지를 정확히 알 길은
없고 다만 그것이 윗문에 있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20:2, Thompson).
=====26:11
이 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니 - 기소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
들은 재판관으로 행사하던 방백들에게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
은 틀림없이 고소의 내용을 자세히 고하였을 것이고 예레미야에게서 들은 말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말했을 것이다(Thompson).
=====26:12
예레미야가...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예언은 스스로 꾸며댄 것이 아니라 여호
와께서 주신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직접적이고도 가장 적절
하게 변호한 담대성을 보여준다.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미 선포한 바 있는 메
시지를 수정하거나 기소자들에게 동정을 구하려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을 거역하려는 자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26:13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뜻을 돌이키시리라 -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
은 그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심판이 중지될 수도 있다는 조건적인 요소이다. 오직
회개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회개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보내려
고 작정하셨던 심판과 재앙을 돌이킬 것이다. 18:1-12에도 이런 조건적 원리가 선언되
어 있는 바, 이런 원리는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돌이킬 생각을 하지않았다. 한편'고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야타브'(* )
는 '선을 행하다', '은총을 입다'는 뜻도 내포한다.
=====26:14,15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극한 위기의 순간에 예레미야의 담대한 신앙은 더욱 돋보이고
있다. 그는 범죄자들과 타협하거나 그들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여호와의 말씀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길을 택하고자 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자신의 생명이 대적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가 반드시 치르어질 것
또한 분명히 믿고 있었다(마 27:24, 25;행 5:28).
=====26:16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 왕의 관리들은 분노한 군중들
을 뒤로 물리치고 선지자의 변호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와 반대
되는 위치에 섰다. 이 같은 평결을 얻어낸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될 몇몇 장로들의
예레미야 지지 발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거침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에 감
명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종교적인 일에 가장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반면, 오히려 정부 고관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진리를 두
둔하고 나서는 광경은 매우 역설적이라 하겠다(Feinberg).
=====26:17
그 땅 장로중 몇 사람이 - 19절까지는 이 사건을 지켜보던 장로(왕하 23:1-3 주제
강해, '장로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 참조) 몇 사람이 예레미야를 웅호하는 장면
이 기록되어 있는데, 훌륭한 변호였다. 변론은 이들의 지지발언으로 인해서 완벽하게
결말지어진다. 어떤 이는 선지자의 변호를 맡았던 자가 아히감(24절)이라고 생각한다
(Clarke).
=====26:18
모세렛 사람 미가 - 장로들은 유사한 판례로서 모레셋 사람 미가의 경우를 제시하
였다(미 1:1;3:12). 그 당시 왕이었던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과 비슷
한 메시지를 미가 선지자로부터 들었지만, 그의 말을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호와
를 두려워하였으며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였다. 아마 미가는 이사야와 더불어 히스기야
의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짐작된다(왕하 18:3-6). 한편, '모레셋'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예루살렘 남동쪽 37Km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였다고 한
다.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 이는 미 3:12의 인용인데, 미가 선지자의 말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선지자들의 신탁들이 보존되고 있었으며 또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시온이 밭같이 경작함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밭을 경
작할때 땅을 뒤집어 엎듯이 시온이 철저히 유린 될 것임을 뜻한다(Thompson).
=====26: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 맛소라는 '그들'을 단수로 기록하고
있으나 70인역은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번역이나 문맥의 흐름상 복수로 표현되는 것
이 더 적적하다. 그러나 이를 단수로 표현하게 되면 히스기야를 백성의 공식적인 대표
로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26:20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 선지자 우리야의 경우가 소개되고 있다. 그도
역시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다소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선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적
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야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의 멸망을 전한 선지자가 예레미야 혼자뿐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8마일 가량 떨어진 기럇여아림 출신이었
다.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아살(Tellel-Azhar)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
는 기브온 네 성읍들 중의 하나였고(수 9:17), 기럇바알(수 18:14) 또는 바알라로도
알려져 있다(수 15:9). 법궤가 블레셋에서부터 되돌려졌을 때 그것은 기럇여아림에 보
존되었으며 그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었다(삼상 7:1, 2;삼하 6장).
=====26:21
우리야는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으로 달아났다. 이는 담대히
대적들 앞에 나선 예레미야에 비해 나약한 선지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예레미야
와는 달리 애굽으로 쫓아온 자객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26:22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 엘라단이란 사람이 애굽으로 달아난 우리야를
인도(引導)받기 위해 애굽으로 파견되었다. B.C. 2천년대의 조약문에는 정치적 망명자
를 인도하는 협정이 종종 삽입되곤 하였다. 느고가 B.C.609년에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
혔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과 유다 사이에 군주-봉신 조약같은 것이 맺어졌으리라 추측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느고는 여호야김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왕하 23:34, 35). 어쨌든 정치적 망명자를 인도하는 것은 상호간에 협조하도록 되어
있으며 국제법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한편, 애굽으로 파견된 악볼의 아들 엘라단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가 읽혀질 때 그것을 들은 관리들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여호야김
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워 없애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기도 했다(36:11-26).
엘라단은 또한 유다왕 여호야긴의 모친인 느후스다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왕하 24:8).
아마도 그는 우리야 문제에 대해서는 왕의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6:23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 오매...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 우리야가 예루살렘으
로 호송되자 여호야김은 그를 칼로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선지자가 처형되는 장면이
구약에는 우리야 외에 스가랴 선지자의 경우가 한 번 더 기록되어 있다(대하
24:20-22).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보낸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또 예
레미야 같은 사람을 핍박하였던 것 등으로 볼 때 비록 구약의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수많은 선지자들이 순교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렇게 순교하였
을 것이다. 한편 우리야의 시체는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골짜기의 평민의 묘실에 던져
졌다(왕하 23:6 참조, Thompson). '평민의 묘실'이란 일종의 공동 묘지와 같은 곳으로
짐작된다. 부유한 자들이나 명망있는 자들은 자신의 개인 무덤에 묻혔으나 빈천한 자
들은 후미진 곳의 공동 무덤에 묻혔던 것 같다(Calvin). 그렇다면 우리야는 죽은 후에
도 수치를 당하였던 셈이 된다.
=====26:24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 아마 예레미야는 아히감의 영향력으
로 인해서 우리야의 운명과 같은 끔찍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언
급되고 있는 아히감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곳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40:5). 예레미야가 비록 최고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
고 석방되었긴하나 여전히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예레미야에 대한
편견은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히감의 보호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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