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8장 주석
=====18:1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 이 설교는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 그 어느
때, 아마 그의 첫 통치 삼 년 이내의 어느 때에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Clarke).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토기
파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에서 판단하건대, 토기는 많은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기들은 디자인이나 형태 면에서 시대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유적
지에 대한 연대를 추측케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기 또한 이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토기를 소재로 사용한 비유는 19장에도 기록되어 있다(Nicholson).
한편, 이 예화는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다루심을 보여준
다. 인생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
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Clarke).
=====18:3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 여기서 '녹로로'란 말을 직역하면, '돌 두 개를 가지
고'가 된다. 이것은 수직으로 된 굴대 위에 두 개의 돌로 된 바퀴가 놓여 있는 장치를
말한다. 밑의 바퀴를 발로 돌리면 위의 바퀴도 돌아가는데, 이때 토기장이는 이 윗바
퀴에서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리 토기장이의 바퀴는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Bright, Clarke).
=====18:4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 본절과 7절 이하의 보다 특정적인 적용 내용
에서 유추하건대, 그 당시 바퀴 위에 있던 그 특정한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토기장이
가 만들고자 의도하였던 그릇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진흙의 질이 좋지 않아 그가 만들고자 하는 그 그릇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흙은 토기장이의 원래의 의도를 좌절시켜 버리
고 말았으며,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
는 지기 목적에 저항하는 이 진흙을 그에 맞게 처리하실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진
흙에 대한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능력이 초점으로 부각되며(사 64:8;룸 9:19-24), 아울
러 자신이 원했던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인내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사항이
다(Feinberg, Harrison).
=====18:5
본절 이하에서는 앞의 상징적 내용에 대한 해설이 상세히 설명된다.
=====18:6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 여호와는 인간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진흙
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절대 주권을 지
니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존귀하고 부유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기도 하시고 반대로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도 한다(시 113:7).
따라서 장래사에 관한 한 아무도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다(Calvin).
=====18:7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민족적,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언급하는데, 이는 1:10에 표현된 사상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 구
절은 용어면에서도 1:10의 내용과 유사하다.
=====18:8
그 악에서 돌이키면 뜻을 돌이키겠고 - 한글 개역 성경에 똑같이 '돌이키다'로 번
역된 원어는 각각, '슈브'(* )와 '나함'(* )이다. 본문에서 전자는 인
간의 회개를, 후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돌이킴심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악'으로 번역된 말과 '재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일하게 '라' (* )이다.
=====18:9
한 국가의 흥망 성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보
여주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여호와께
서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사 시
대로부터 유다왕국의 멸망 때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질병, 사망, 기근 등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셨으며(삿
2:11-15;3:7,8;6:11;왕상16:7;왕하24:9-20 등 참조),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유다는
패망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18:11
이제 - '아타'(* )란 표현은 어떤 변론의 결말 부분을 도입할 때 종종 쓰였
던 말이다(신4:1등). 문맥상 본절은 1-10절에서 진행되어 왔던 내용의 논리적 귀결점
이 되고 있다.
재앙을 내리며 선하게 하라 - 유다 백성은 거듭되는 회개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
완악한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당할
일만 남겨 놓고 있었다. 그들의 패역한 생활은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을 요청하는
그런 것이었다. 오직 근본적인 변화만이 그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나, 그러한 변화
에의 기대는 어렵게 되었다.
=====18:12
그들은 패역의 길을 너무도 멀리 걸어가 버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
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토기장이에게 소용도 없는 거칠고 뻣뻣한 진흙과 같은 것이
되어 더이상 토기장이가 의도했던 고귀한 형태로 빚어질수가 없었다. 오직 심판의 과
정을 통해서만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알맞는 진흙으로 다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온갖 악한 행위와 계속 되어온 언약 파기가 어떤 결말로 인도되
고 있는가 하는 슬픈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18:13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 '처녀 이스라엘'이란 말은 영적으
로 하나님의 신부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그에 합당하게 순결해야 된다는 의미를
암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남편 맞을 준비를 하는 처녀와 같이 영적 순결을 지켰어
야 했지만, 이방 종교 관습에 빠져 자기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사 다른 어떤 민족보다 사랑스런 존재로 여기고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셨으나(호2:16참조),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배도의 길로 가버렸다. 이스라엘의
외도행각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고 열방중에서도 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는
2:10-13의 내용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18: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 여기에는 유다 민족의 신이 없는 행
실이 자연의 불변성과 대조를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Bright). 한편,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하기도 한다:'레바논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로
농작하던 땅을 버리고 메마른 돌짝 밭을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은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레바논을 버리고 박토를 택하였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몰두해 있는 것이다.' 이는 '떠나겠으며'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 '아자브(* )의 주어를 지나치게 의식한 듯한 인상을 주는 해석
이나, 이 동사는 '버리다', '거절하다' 등의 뜻 외에도 '떨어지다', '늦추다' 등의 의
미도 지닌다. 그러므로 본절은 자연의 불변성을 들어 이스라엘의 변덕스러움과 대조시
키는 내용으로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겠다(Feinberg).
=====18:15
여기서는 배도의 내용이 자세히 설명된다. 여호와의 백성은 이미 여호와를 잊어버
리고 말았으며 허무한 것에 분향하였다. 이 허무한 것(* , 솨웨)이란 어떤 우
상을 가리키며 아마 바알을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
의 결과로서, 또는 이런 짓을 하는 도중에 우상과 더불어 그들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
게 되었다. 여기서 옛길이란 6:16에서 '선한 길'로도 표현되었는데, 여호와를 순종함
으로써 얻어지는 축복의 길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따랐어야 할 길은 우상에게 분향
하는 길이 아니라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고 그의 언약에 순종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유
다 백성은 이방인들조차 의아하게 샹각할 정도로 쉽게 여호와를 거역하고 배신하였다
(2:10, 11).
=====18:16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머리를 흔들리라 - 이곳에는 배도의 결과를 중에 하나
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민족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이 화유가화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암 4:6-10 등). 이런 재앙으로 그 땅은 영영한 치소가 되고 말 것
이다. '치소'(* , 쉐레카)란 '휘파람이나 휘유하고 내뱉는 소리'를 말하는
데, 여기에는 이 땅이 너무나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하여서 지나가는 자들이 두려움 속
에서 긴 한숨을 내뱉게 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19:8, Thompson). 한편 클라크
(Clarke)는 이를 조소와 멸시의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8:17
간결하지만 대단히 힘있는 어투로 언약을 유기한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말
씀이 선언되고 있다. 동풍이라고 하는 것은 동쪽 광야 또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열풍*4:11;13:24 참조)을 말하는데, 여호와의 심판이 바로 이 열풍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동쪽 바벨론의 침략을 상징적으로 동풍이라 표현하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했으며 또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서 다 흩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은 구속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18:18
본절은 백성들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완악한 자세가 한결같아서 개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13;23:9-40). 백성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하였다. 더욱이 여호
와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짓되고 참람한 언행을 하지
못하도록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이곳에 지적되어 있는 세
계층, 즉 제사장과 지혜로운 자, 그리고 선지자에 대해서 무자비하고 산랄한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음모를 선동하고 일을 꾸몄던
자들이 바로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추측된다. 그들의 이와
같은 지가 만족적 응답이나, 눈이 감겨버린 의식의 마비,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려
드는 모습(마 15:14)은 12절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지도자나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현 처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계속 그대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지도자들이나 오도된 길을 가고 있는
백성들의 의식을 뒤집어 놓으려는 시도는 오직 심각한 반발만을 초래할 뿐이었다. 진
리에 대한 비진리의 핍박 양상은 왜곡되고 부패한 사회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가 진리 족에 확고히 보장되어 있음을 맏는 자는 이러한 핍박을 오히려 기
쁨으로 수용할 수 있다(마 5:10-12).
=====18: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들어보옵소서 - 예레미야의 반응은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
입과 돌보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순되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 공의로운 판단
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반응이다(시 5:3;10:
17;17:1;55:2;61:1;66:19;86:6;142:6 참조), 그런데 앞 구절의 해석 문제를 잠시 언급
하고 넘어가자면, 70인역(LXX)은 18절의 끝 구문을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의 번역과 70인역의 번역은 본문의 의미 전달에
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만약 70인역의 번역을 따를 경우,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
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란 다름 아니라 그의 말을 책잡기 위함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러한 상황을 여호와께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18: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 예레미야의 딜레마가 대단히 깊은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동족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내려는 뜨거운 열정, 바로 그것 때문에 핍박
을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악으로써 선을 갚는 잔인 무도한 행태는 시
35:12;109:5 등에서도 폭로된 바 있다.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 자기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 우리는 이 내용과 17:16에서 보여준 선지자의 항의를 함께 상고해보는 것이
좋겠다(Nicholson).
=====18:21
이 구절의 저주 조항은 예레미야의 악의에 찬 저주라기보다는 앞으로 그들에게 임
할 심판에 대한 선지자적 선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Clarke). 주석
가들은 이 구절의 저주를 보고서 대단히 충격을 받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
이 예레미야의 다른 말들과 대단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 어떤 이
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다른 저자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보복에 대한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은 본서 내내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
것을 그의 어록에서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Thompson). 기근과 전쟁의 칼에서의 죽
음, 남편과의 사별 등 계속적인 공포는 모두 적의 침략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이었다. 예레미야는 북방으로부터 닥쳐올 적에 대해 종종 언급하여 왔었다. 그리고 시
간이 지남에 따라 이 북방의 작은 점차 더 분명한 윤곽을 띠게 되었다.
=====18:22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 파멸에 대한 전체 양상 중에 그 일부
를 구성하는 내용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 이제 살육당하는 곳이 전쟁터(21절)가 아
니라 집이다. 집 속에 피신한 자들조차 침략군에 의해 색출, 처형당하는 살벌한 장면
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같은 재앙 역시 단순한 선지자 자신의 사사로운 보복이 아니
라 예레미야 자신이 여호와의 메시지와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핍박하였
기 때문이며, 또한 언약 요구 사항을 무시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선지자를 조롱하며
핍박하였던 적들의 태도는 여호와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던 셈이다.
=====18:23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아시오니 -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
다(15:15 참조). 여기서 '알다'(* , 야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지식적인 앎보다
뜻을 전달한다. 자신에 대한 여호와의 지식이 대단히 깊은 것이며, 그래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경험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에서 예레미야는 소망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한편 11:20;12:1-4;15:14-18 등에는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
나님의 응답이 있었던 반면에, 이곳과 17:14-18에는 구체적인 응답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종의 모든 말에 일일이 다 대답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
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살펴보면, 때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던 반면
에(11:21-23), 때로는 책망의 말씀을 주셨다(12:5, 6;15:19).
'구약 >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예레미야 20장 주석 (0) | 2015.02.08 |
---|---|
[스크랩] 예레미야 19장 주석 (0) | 2015.02.08 |
[스크랩] 예레미야 17장 주석 (0) | 2015.02.08 |
[스크랩] 예레미야 16장 주석 (0) | 2015.02.08 |
[스크랩] 예레미야 15장 주석 (0) | 2015.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