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5장 주석
=====15:1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탄원했
을 때 하나님은 그의 탄원을 들으사 그들을 용서하셨으며(출 32:11-14;민 14:13- 20),
사무엘 역시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을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삼상 7:9).
그러나 이제 이러한 위대한 중보자들이 기도하고 탄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백성들
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죄악은 워낙 뿌리가 깊고,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였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모세와 사무엘에
대한 언급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이 두 선지자들에게서 그의 사역의 모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15:2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 '사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웨트'(*
)는 '멸망', '염병'으로도 번역된다. 본절에서처럼 하나님의 징벌에 따른 재앙이,
'사망', '칼', '기근', '포로', 혹은 '염병' 등으로 묘사되는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
서 발견된다(14:12;43:11;겔 14:21;33:27).
=====15:3
네 가지로 벌하리니 - 이 네 가지 심판의 도구들은 (1) 죽이는 칼 (2) 칼에 맞아
죽은 시체를 찢어 놓을 개들, (3) 죽은 시체를 먹고 사는 새들, (4) 시체를 먹는 새들
이 남기고 간 것을 먹어치울 짐승들 등이다(Clarke).
=====15:4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행한 바를 인하여 - 유다의 반역과 배도를 부채질했던
열왕들 중 대표적 인물로서 므낫세가 지적되고 있다. 왕하의 여러 구절들에는 이 므낫
세 왕의 악행에 대한 내용이 곳곳에 지적되어 있다(왕하 21:10-15;24:3). 므낫세는 다
윗계 열왕들 중에서 종교 혼합주의를 가장 많이 도입한 자였으며, 민족에게 대단히 깊
은 악영향을 끼쳤다(왕하21장). 한편 본절과 앞절의 어투는 신 28:25, 26의 내용을 상
기시키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이 부분은 예레미야의 사상에 동조하던 그의 동료나 신
명기 학파 학자들의 주석인 것으로 가끔 이해되기도 했으나(Nicholson) 다소 지지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15: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물을 자 누구뇨 - 예루살렘의 심각한 운
명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내용이다. 본절의 세 가지 질문 사항들은 예루살렘을 동정하
거나 위로할자가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는 여기서 B.C. 586년의 엄청난 파국을 반영하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서의 절망적인 분
위기를 상기할 수 있다(애 1:1, 12;2:13, 20, Thompson).
=====15:6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 히브리어 원문상 '아호르 텔레키'(* )는
'네가 계속적으로 뒷걸음질 친다(타락해왔다)'는 뜻이다. 또 여호와를 버리고 뒷걸음
질 친 자가 바로 '너'라고 표현하면서 너란 대명사를 강조하고 있다(Thompson). 하나
님은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오래도록 참
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미루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자비로우
신 배려가 아무 쓸모없었기 때문이다(Clarke).
=====15:7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어 - 이런 장면은 타작 마당에 수확한 것을 모아
두고 매년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알기 쉬운 예화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곡식을 키질하여 겨를 날려 보내듯이 이스라엘을 키질하여, 그들을 다 흩어버리실 것
이다. 본절의 예언은 세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유다 침공을 통해 성취되었다.
=====15:8
그들의 과부가...모래보다 - 남자들이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에 과부가 여인들이 많
아졌음을 지적한다(Nicholson).
청년들의 어미를 - 칠십인역(LXX)은 '어머니(와) 청년들'로, 벌게이트역(Vulgate)
은 '청년의 어머니'로, 또 수리아역(Syriac Version)은 '어머니와 청년들이 다 함께'
로 각각 번역한다. 문맥상 '어미'를 수도나 대도시로 이해하여, 본절을 예루살렘 거민
들의 모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Clarke).
=====15:9
일곱 자식을...기절하게 하며 - 아들들이 모두 전쟁에서 몰살당했음을 가리킨다
(Nic holson). 클라크(Clarke)는 이 '여인'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설명하
고 있다: 그녀, 예루살렘은 수많은 자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땅의 수많은
도시들과 마을들, 그리고 가문들의 어미였다. 그리고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를 뜻한
다. 한편, 일곱 아들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룻 4:15; 삼
상2:5) . 그러나 그들이 백주에 몽땅 멸망하고 말 때에는 일곱 자식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만다. 이들 젊은이들은 한창 피어날 나이에 전쟁에서 죽게
되어 대를 상속할 자손마저 없어져 버린다.
=====15:10
나의 모친이여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 깊은 절망감 속에서 내뱉는 부르짖음
이다. 이런 애도는 20:14-18의 날카로운 비명속에서도 나타난다. 이곳의 주제는 자기
동포의 손에 핍박받는 것에 대한 것이다(11:18-12:6 참조, Nicholson). 우리는 여기
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불안과 고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욥 3:3-10). 그러나 그
의 부르심은 어미의 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1:5), 그렇기 때문에 그의 탄생날에 대
한 이 같은 한탄은 맡은 바 사명을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는 '온 땅을 향해 법적인 투쟁과 변론을 벌일 자
로'라고도 번역된다. 그는 아마 자기 민족을 향해 계속 소송을 거는 자로 보였던 것
같다(J. Bright).
내게 뀌이지도 - 또 예레미야는 여기서 자신이 마치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다.
=====15:11
네 대적으로...간구하게 하리라 - '간구하게'의 히브리어 '파가'(* )는 '간
청(요청)하다', '만나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일 수
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동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절
의 해석도 달라진다. (1) '내가 네 대적을 만나 은밀한 영향력으로써 그로 하여금 네
게 선대하도록 만들어 주겠다'(KJV, Calvin). (2) '이제까지는 네 대적이 너를 조롱하
고 대적하였으나 그날에는 오히려 네 대적이 네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NIV). 이 두
견해 중 어느 한 쪽만을 지지하기란 어렵다. 다만 (1)의 견해를 따를 경우 이 예언은
40:1 이하에서 성취되었으며, (2)의 견해를 따를 경우 그 예언은 38:14에서 성취되었
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절과 12-14절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혹자는 11절만을 선지자에게 적용시키고 12-14절은 유다 백성에게 적
용시키는가 하면(Calvin, Grotius, Henry, Scott), 또 어떤 학자는 11-14절 전체가 유
다 백성에게 선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Venema). 그러나 가장 지지받는 견해는 11-14
절 전체를 선지자에게 선포된 말씀으로 보되, 11절은 다분히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으
로, 또 12-14절은 백성들과의 동일선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보는 것이다.
=====15:12
본절은 난해 구절들 중의 하나로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이는 17:1
의 내용이 잘못 표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Rudolf, Bright). 그런가 하면 '유
다의 미력한 군대로 어찌 강대한 갈대아 군대를 맞아 싸울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Clarke). 그러나 이를 우선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이러하다. '철이 북방으로
부터의 철과 놋을 깨뜨릴 수 있는가?' 또한 이를 다른 각도에서 읽으면 '철과 놋이 북
방으로부터의 철을 깨뜨릴 것인가?'로 볼 수도 있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레미야에게
지금 유다에 닥쳐올 적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지 설명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유다로
서는 그 어떤 확신과 자신감도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다음
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 '유다인들의 의지가(혹은 무력이) 아무리 강하더라
도, 그래서 그것이 마치 철이나 놋과 같다 할지라도 북방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적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15:13
유다를 침공할 적군들이 모든 값진 재물들을 노략해 갈 것을 뜻한다.
=====15:14
앞 구절과 본절은 17:3, 4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에 착안하여 어떤 이는 이르게 하
리니에 해당하는 '웨하아바르티'(* )를 '섬기게 하다'는 뜻인 '웨하아
바드티'(* )로 이렇게 수정해도 뜻은 통하지만, 굳이 수정하지 않더라
도 포로로 잡혀가는 것에 대한 본절의 의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15:15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것
을 요구하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이말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데, 특히 여호와께 기억해 주십사 하고 간구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인정하
심을 얻기 원할 때이다(느13:14;시25:7;106:4등). 마지막 어구들을 살펴보면, 예레미
야를 죽이려고 하는 박해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대변자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즉 여기서 예레미
야가 여기서 호소하고 있는 내용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사사로운 이유 때문
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할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Thompson).
=====15:1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에스겔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겔2:8-3:3). 예레미야나 에스겔
은 공히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는 것 같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예레미야는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였고 에스겔은 '꿀처럼 달게' 받아들였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말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
하실 그곳'(신 12:11)이란 어구와 같은 맥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다 하나님의 소유권
에 대한 천명이다.
=====15:17
기뻐하는 자의 회(會)에 앉지 아니하며 - 원문상의 직역은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
과 한 자리에 앉지 않았으며'이다(J. Bright).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서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것도 누릴 수가 없었다. 본절에서는
그의 사명에 대한 이 같은 헌신적인 성실성이 상세히 지적되고 있다(Thompson).
=====15: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시내 같으시리이까 - 여기에는 박해받는 중
에 있는 하나님의 종이 터뜨리는 애절한 탄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질문에는 하나님으
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토로하는 울부짖음이 들어 있다(시 22:1 참조). 예레미야
에게는 그의 고통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며 그의 상처는 절망적이어서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참기 어려운 고난으로 인해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께
서(2:13) 마치 '물이 말라 속이는 시내'인 것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속이는 시내'란
여름철에는 말라버려 물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시내를 말한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많은
비가 왔을 때만 물이 흘렀던 수많은 와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 예화
였을 것이다. 여행자들은 물을 찾기 위해 종종 와디에 다가가지만 대부분 물을 찾지
못하고 만다.
=====15:19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 앞에 세울것이며 - 클라크(Clarke)는 본 문구를, '만일 네
가 회개하면 다시 유다 따응로 돌려 보내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선지자 직분에 관련된 내용으로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께
서 예레미야를 불러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네가 돌
아오면 나는 너에게 선지자의 직무를 돌려주겠다'란 의미로 볼 수 있겠다(Feinberg,
Thompson). 여기서도 '돌아오다'(* , 슈브)란 동사의 언어 유희가 쓰이고 있
다. 예레미야의 쓰라린 경험은 선지자로서의 그의 입을 거의 봉해 버렸으며 자기를 보
낸 이에 대한 확신과 신적 소명에 거의 눈을 감아버리게 했다(20:7-9 참조). 이런 상
황이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의 반응에 개의치 말고 다시 돌아
와서 오직 당신만 신뢰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불평을 비난하
면서도 우선 천한 것에서부터 귀한 것을 취할 것을 권면하신다. 즉 백성들의 속이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라는 것이
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에게로 돌아서
라고 만든다. 그렇게 할 경우 그는 하나님의 입 같이(출 4:16)됨 것이며, 그의 말은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 역시 그 말씀을 그러
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5:20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구하여 건짐이니라 - '네가 나에게 충실한 이상,
그 어느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Clarke). 이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
를 다시 부르시는 재확인 절차이다(Nicholson). 이 내용의 어투는 1:8, 18, 19 의 내
용을 강하게 상기시켜 준다. 본절의 약속은 구약에서 구원과 관련해서 흔히 등장하는
세 동사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본절의 '구하다'(* , 야솨), '건지다'(*
, 나찰)와 다음 절의 '구속하다'(* , 파다)이다, 이 동사들은 모두 출애굽 사
건을 묘사하는 상당히 비중있는 구절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때때로 보다 일반적인
상황에도 적용되었다. 이들 각 동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제작기 다름 면을 강조
하고 있다. '구하다'에 해당하는 '야솨'와 그 관련 명사들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압
제받고 있는 자들은 구해낸다는 점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그리고 '건지다'에 해당하는
'나찰'은 강한 자가 자기 먹이를 빼앗아 가려고 할 때 그것을 와락 붙잡는 자의 적극
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본절에서는 특히 죽음, 무덤, 죄악, 고통, 공포 등으로부터 건
짐받는 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동사인 '파다'는 대부분 어
떤 사람의 소유에서 속전을 지불하고 그를 해방시켜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Thompso
n).
=====15:21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 이 악한 백성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 '갈대아 군대의 손에서'의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취
되었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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