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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이사야

[스크랩] 이사야 63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44

이사야 63장 주석

 

=====63:1

   에돔...보스라 - 전자는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

가이며 후자는 위치상으로는 모압에 가까우나 이두매, 곧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

였던 곳이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이다(34:6).

   홍의를 입고...오는 자 - 여기 '홍의를 입고'는 '하무츠 베가딤'(*              

      )이다. 그런데 '하무츠'(*       )는 '(맛이) 신', '(색깔이) 얼룩덜룩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하마츠'(*     )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자줏빛,  주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자줏빛으로 염색한 혹은 피가  그  옷자락에

튀어 피색으로 물든 용사의 망토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

하고 있는 어떤 인물은 이 사실과 뒷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에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

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용사의 정체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의 대표적인 두 견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62장과의 문맥적 연

결 면에서 그리고 본절이 그려내는 용사의 모습이 대적들을 정복한 승리자의 모습이라

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다(Calvin, Delitzsch, Gesenius). 그

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해볼 때, 오히려 전자의 견해가 더 나을 것  같

다. (1)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황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보응의 날과도 관계된다. 이런 점에서 에돔 등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은 물론

이고 나아가 메시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까지 상징한다. (2) 피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한다(계 19:11-14).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다

(골 2:15).

   화려한 의복 -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이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킨다.

   큰 능력으로 걷는 자 -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

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이다.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화자(話者)였다면 본 구절부터

는 메시야 자신이 화자가 되고 있으며, 본 화자는 앞선 화자의 의문에 대답을 주는 모

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 '의'는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

는 용어이다.


=====63:2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

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

다. 한 시간 정도 밟으면 질이 좋지 않은 포도는 맨 위로 떠올랐으며  그후  계속해서

30분 정도를 더 밟으면 향기 좋은 포도즙이 각 송이에서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더 밟으면 신 포도까지 터져  전체  포도즙의  맛은  좋지  않게  된다고  한다

(Burder). 본절은 이같이 포도즙을 짤 때 그 즙이 튀어 옷에 몰은 어떤 사람을 연상하

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해 언급하곤 한다(신 32:14). 어떤 학자는

여기서 저자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고 있는 까닭은 1절에 언급된 '보스라'라는  지역

이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Calvin). 이 경우 '보스라'가  포도

산지인 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 실감나게 본절의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다.


=====63:3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 본절은 2절에 묘사된 바 포도즙 틀을 밟다가 그

즙이 옷에 묻은 것과 같은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63:4

  원수 갚는 날 -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돔 혹은 이두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랫동

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성경은 에돔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까지 파괴할 정

도로 악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진술하고 있다(시 137:7). 이 같은 대적들은 하나

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이다(34:8;61:2 참조).


=====63:5

  도와 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충분하다는  의

미도 내포하고 있다.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 이 표현은 59:16의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를

연상시킨다.


=====63:6

  그들을 취케 하고 - 혹자는 본절을 3절 하반절의 반복적 유사 평행구로 보고  본문

의 히브리어 '아솨크램'(*         )을 '쳐부수다'는 의미의 '아솨브램'(*          )

으로 수정하고자 한다(탈굼역, Whybray). 그러나 굳이 원문 수정을 하지 않더라도, 본

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

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시 75:8 참조).


=====63:7

  내가 - 본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1-6절) 화자가 주로  메시야

이셨다면 이제부터는 대적의 진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이며(7-14절) 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선지자가 직접적 화자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적의 진멸이란 1-6절에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수차례 반복된 이방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

되는 본절로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15절부터 64:12까지의 큰  단락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파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63:8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 이것은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

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킨다.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

대하셨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

역과 거짓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이 회복시키시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63:9

) - 짧지만 번역하기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이 아니다'의 뜻을 지닌 '로'

(*   ) 때문이다. '로'를 생략해버릴 경우,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부합하는

번역이 가능하다:'그들의 모든  고통의  때에  하나님도  고통하였다'(In  all  their

affiction he was afflicted, KJV, LB, RSV). 그러나 원문의 단어 자체를 생략하는 이

같은 번역은 수용하기 어렵다. 반면 '로'를 그대로 두고 문자적 번역을 하면 '모든 그

들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고통하지 않으셨다'라는 다소 애매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뒷문맥을 고려하고 본 구절 자체에 어떤 용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그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모든 그들의 빈

궁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에  있어)  빈궁하지   않으셨다'

(Houbigant). 여기 '빈궁'은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번역

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자기 앞의 사자 -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다

(출 32:34;33:2;민 20:16). 따라서 천사로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 가브리

엘(눅 1:19), 미가엘(단 10:13-21)로 보는 견해가 있다(Clark, Jarchi). 그런데 이 용

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

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14:19;23:20, 21). 따라서 본 용

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다.

   드시며 -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

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19:4;신 32:11, 12).  여기서

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킨다.


=====63:10

 성신(*               , 루아흐 카데쇼) - 어떤 학자는 이것을 '선지자들의  말씀'

(갈대아역 등) 혹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한다(Grotius,  Gesenius,  Rosenmuller).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갱신시키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삼

위(三位) 중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물론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하

나님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성도들과 달리 삼위의 독립된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용어

가 '성령'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인

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동일하게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령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 원문 직역은 '그가 모세와 그의  백성

들, 옛날을 기억하셨다'이다. '기억하셨다'는 '이즈코르'(*       )로서 3인칭 단수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인칭 복수로 바꾸어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는데(NIV), 굳이 그

렇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시도의 이유는 이어지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

원(의문)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백성의 탄원(의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탄원(의문)을 그대로 묘사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의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즈코르'의 인칭  문제는

해결된다. '이즈코르' 곧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

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이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

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신다.

   바다 -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나왔던 애굽을 가리킨다. 홍해  사건

은 12절에 나온다.

   성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다른 민족보

다 승한 거룩한 민족이 되게하기 위함이었다(출 19:4-6). 그런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

끔 역사하는 힘은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성신으로 말미암았다.


=====63:12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

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

국가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을  쉽

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63:13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

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63:14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

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시 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

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한다.


=====63:15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

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간곡한 자비(*                 , 하몬 메에이카) - '하몬'(*       )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왕상 18:41), 노랫소리(겔 26:13), 무리의 떠드는  소리(삼상  4:14;14:19)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

다. 그리고 '메에이카'(*       )는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63:16

  아브라함은...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

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

이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이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한다:"여인이 어찌 그젖 먹는 자식을  잊겠

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

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63:17

  어찌하여...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된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

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64:5).


=====63:18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62:12;신 7:6).


=====63:19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

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 부분을 정확히  규

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

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

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

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

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

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

다. 이상의 소고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서인 사실과 그의 대

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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