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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사야 61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43

이사야 61장 주석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벧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

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도리 수도 있다

(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

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

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

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

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

요 1:32).

   기름을 부으사(       ,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

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

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

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가난한 자(          ,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

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

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

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

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

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

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

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

(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

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                              , 쉐나트 라초 라훼) - 문자거

인 뜻은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이다.  이것은 나팔이 올리고 온 이스라엘 땅에  자

유가 선포되었던 희년의 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레 25:9,10).  희년의 때와 마찬가

지로 메시야의 때도 '해방'이란 이미지를 내포한다.  메시야의 도래의 때는  온  세계

인류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때인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로 시작된 해방

의 때는 은혜의 때라고 불리기도 한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

다', 고후 6:2).

   하나님의 신원의 날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다.  1차적으로  이날

은 바벧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날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날을 '복수의 날'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바로앞에 언급된 바 '여호와의 은혜의 해'의

대비적 표현으로 본 표현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에게 '은혜의 해'가 되는  때가  그

대적에게는 '복수', 곧 '심판'의 때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이 대적들을 멸하시는 보응은 곧 성도들에게는 영광을 얻는 결

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요 12:47;고전 15:52;고후 4:17;계 21,22장).


=====61:3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 원문 직역은 '아름다움을 주어 그재를  대신하며'

이다.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페에르'(      )는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

고 화려한 관을 말하며, '희락의 옷', '찬송의 옷'과 함께 즐거운 축제 때를 연상시킨

다(G.W. Grogan).  이제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슬픔의 표로 뒤집어  썼

던 재를(에 4:1,3;렘 6:26) 털어내고 대신 아름다운 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

다.

   희락의 기름 -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 위에 향내나는  값

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다(시 23:5;45:7;암 6:6).  그외 성경은 축제 혹은 기쁨 그  자

체를 뜻할 때 '기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57:9).  공적인 재난 혹은 슬픔의  때

에는 결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삼하 14:2).

   찬송의 옷 - 절망에 빠진 자를 삼베옷을 입은 것에 비유하는 대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있는 자는 밝은 채색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다.

   의의 나무(                  , 엘레 하체데크) - '나무'에 해당하는 '엘레'(   

    )는 팔레스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뜻한다.  이 나무는 굵고 튼튼하

여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다(이런 맥락에서 탈굼역, 제롬역, 시리아역 등은  이을

'강한 것' 혹은 '힘센 것'으로 번역했음).  본문의 '의의 나무'는 한때  죄악으로인해

넘어졌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어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은 정원사가 나무를 심듯이  하나님

이 친히 그들을 구원하여 세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영광을

열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움을 받는 사실은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에도암시도이가 있다 : "예쑤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

나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61:4

   대대로 무녀져 있던 것들 - 유다가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유다  본국

팔레스틴 땅과 성읍이 황폐해졌던 사실을 가리키며(렘 20:6;28:6),  나아가서는  본장

전체의 문맥상 메시야의 도래가 있기 전 혹은 메시야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

낸다.


=====61:5,6

   이는 새로이 회복될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서(추 19:6) 우뚝서게

되며 이방인들로부터 물적 조력을 받을 것을(60:10)가리킨다고 해석되기도 하나, 여기

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더 나을 것 같다.  즉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편

입된 이방인들 가운데서, 마치 아론의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감당했던 것과 같은 위

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Delitzsch).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서도 제사장과 레

위인을 택하리라고 하신 말씀(66:21)이나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벽이 완전히  허

물어질 복음 시대(엡 2:14)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사도 바울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겠다  :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은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61:7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 바벧론에서 당한 고통에 비교해볼 때 메시야 왕국의 도

래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은 더욱더 엄청나게 크고 값진 것이 될 것이라

는 말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과 메시야 사역으로 인한 축복을 단순히  비교

한다는 의미보다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이  그

무엇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1차적으로는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 여기 '능욕'에 해당하는 '켈리마'(

        )의 문자적인 뜻은 '혼돈', '혼란'이지만 바로  앞 구절과 동의적 평행을  이

룸을 고려할 때 '수치', '슬픔' 등으로 번역함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분깃'도  메시

야의 구속 사역으로 얻게 될 구원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원문에 보면

앞 구절과는 달리 본절의 주어는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어 있는데, 이것은 본서 저

자가 자주 사용하는 화법의 일종이므로 큰 의미없이 동일한 주체를 의도하고 있는  화

법으로 보면 되겠다.


=====61: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 '대저'는 '키'(    )로서 앞절에 진술된 바벧

론 포로 생활로고통받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사실의 이유

를 밝히는 접속사이다.  하나님이 그같이 하실 이유는 그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의 손을 빌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도  공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바벧론의 교만과 불의의  강탈에

대한 분노로 나타난다.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 세네 가젤 베올라) -  본문

에 대한 번역은 구구하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견해가 이처럼 둘로 나뉘는 것

은 '베올라'(          )의 '베'(  )를 그대로 두고번역하느냐 아니면 '베'를 빼고 대

신 접속사 '와우'(  )를 삽입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강탈(혹은 약탈)과 범죄를 미워한다'가 된다(시리아역, Lowht,  Noyes). 

그러나 이 번역은 받아들일 수없다.  왜냐하면 본 번역의 경우 필요 이상의 원문 수정

을 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번죄에 수반되는 강탈(혹은

약탈)을 미워한다'가 된다.  이는 바벧론이 유다 백성을 압제하고 강탈하는  등  필요

이상으로, 월권 행사를 도모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그 영적 우매 때문에 하

나님의 징벌을 이방이라는 수단을 통해 받았다.  그러나 수단으로사용된 이방  세력은

본연의 임무인 징벌의 집행 외에 과도한 불의를 저질렀다.  바로 이 사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해 체크되었던 것이다.


=====61:9

   알리리니 - '구별되게 하리니' 혹은 '명예롭게 하리니'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시

67:2;76:1;79:10등의 용례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세상나

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방은 자들임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때는  구원  역사의종말,

곧 재림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기 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께 복  받

은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진다(마 5:16).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

해야 한다(마 5:13-15).


=====61:10

   의의 겉옷 - '겉옷'은 입은 옷 위에 걸쳐 몸 전체를 가리다시피하는  느순한  망토

따뤼를 가리킨다(시 132:9;계19:8).  이 땅토는 추위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해  따위로

부터 몸을 보하하는 구실을 한다.  여기서 이 망토가 의미하는  바는  '의'이다.   이

'의'는 이스라엘의 자격,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덧입히신 그  무엇으로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스스로 영적 파멸로부

터 구원하거나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로 구속 사역을 이루게

하시어서 그 사역을 근거로 그들을 보호하는 영적인 옷을 입히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다.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1:11

   땅이 싹을 내며 - 본서 저자가 여러 차례 사용한 이미지(45:8;55:10,11)로, 의미하

는 바는 적시에 내린 단비로 촉촉해진 땅에서 새싹이 움트듯이, 메시야가 오시면 진리

와의가 돋아 자라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의 택한 백성을 그곳으로 모으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함이

다.  본절에서의 찬양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구별적, 거룩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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