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1장 주석
=====21: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 '해변광야'는 바벧론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9
절) 아라비아 사막의 남단 대평원에 위치한 초기의 바벧론은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댐을 쌓기 전까지는 , 아비데누스(Abydenus)가 '마치 바다 처럼 보인다'고 말했을 정
도로, 범람하는 유브라데 강물에 자주 침수되었다(Alexander). 그러나 '해변 광야'란
상징적인 이름에는 물에 잠겨 있는 바벧론의 지형 조건만이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하여
선지자가 미리 내다본 바, 바벧론의 궁극적인 운명의 불길한 전조까지 내포되어 있다
(14:23;렘 51:13, Delitzsch). 그것이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점점 구체화된다.
적병이...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 왔도다. 바벧론에 임할 재난은 광대한 아바리아
사막에서 급속도로 불어오는 태풍에 비유된다. 이 태풍의 무서움에 대하여는 욥
1:19;37:9;렘 4:11;13:24;호 13:15;슥 9:14 등을 참조하라. 광야 곧 두려운 땅에서 오
리라고 예언된 적병은 다음절에 나오는 엘람과 메대인들을 가리킨다.
=====21:2
혹독한 묵시 - 이는 '묵시'(* ,하주트)의 내용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무겁다
(* ,카솨)는 뜻이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 옛 주석가들은 본문을 포악한 바
벧론 군주들에 대한 묘사로 본다. 이에 따르면, 바벧론이 왜 멸망해야만 하는지 그 이
유를 선지자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
을 바벧론의 침략자들에게 적용시킨다. 두 가지가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나 후자를 취
한다(Alexander).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 '올라가고 에워싸라'는 말은 바벧론에 대한
공격 명령이다. 이 명령은 엘람과 메대에게 주어졌다. '엘람'은 현재의 이란 남부에
해당하며 바사 제국을 가리킨다. '엘람'은 히브리인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창 14:1),
'바사'는 그때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바사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엘람은 후에 바사
에게 합병되었다. 바사와 메대는 B.C. 539년 고레스 왕의 주도하에 바벧론을 정복하였
다. '메대'에 대하여는 13;17 주석을 참조하라. 이사야 선지자 당대에 엘람과 메대가
바벧론의 연합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묵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이러한 혜
안(蕙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영감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21:3,4
전절의 '혹독한 묵시'는 선지자에게 두 가지 신체적인 반응, 즉 극심한 요통(3절)
과 마음의 진동(4절)을 야기시켰다. 포로기의 선지자들이 바벧론의 몰락을 환호한 데
비하면, 본문에 묘사된 선지자의 반응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 카이
저(Kaiser)는, 이 같은 표현은 선지자들이 자기 계시의 엄중함을 부가시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기교라교 설명한다(15:5;16:9, 11;겔 21:6, 7;단 10:2, 3,
Oswalt). 반면에 칼빈(Calvin)은 자기가 본 것을 백성들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기 위
해서 선지자가 자신을 바벧론과 동일시하여 마치 배우처럼 자신을 입을 통해 바벧론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묵시의 혹독함이 간접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 본문의 히브리어 '할할라'(* )는 '춤추
다', '꼬이다'는 뜻의 '훌'(* )에서 파생된 명사로, 몸부림치는 고통을 의미한다
(겔 30:4,9). 선지자는 이 고통을 '임산한 여인의 고통'(* ,치림)으로 비견
한다(13:8).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 '희망의 서광'(네쉐프 히쉐키,*
)은 직역하면 '나의 기쁨의 저녁'이니, 한 날의 근심을 벗고 안식하리라고 기대되었던
저녁 시간조차 두려움의 때로 변한다는 말이다.
=====21:5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먹고 마시도다 - 포위 공격을 당하리라고 선언된(2절) 바
벧론의 자세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 묘사된 상황은 바벧론의 대연회 장면이다.
(적군의 내침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들은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신
다. 루짜토(Luzzatto)는 본절을 대립적으로 이해한다 : '그들은 식탁을 베푼다, 파수
꾼을 세워야 함에도;그들은 먹고 마신다,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발라야 함에도,' '파
숫꾼을 세우고'(* ,차포하차피트)는 언뜻 봐서는 바벧론인들의 허랑
방탕한 연회 모습을 기록하는 있는 본문에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이 때문에 몇
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융단을 깔고'(sperad the carpets)로 번역한다(Hitzig,
Knobel, Leupold, Gray, Alexander). 그러나 '차파'(* )란 '감시하다'는 뜻이며,
더욱이 이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파수꾼을 배치하는 최소한의 예방 조치도 없이 연회를
베푼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본래대로 해석함이 옳다. 본문은 다음과 같
이 이해된다 : '그들은 파수꾼을 세우는 한 가지 예방 조치만으로도 모든 준비를 다했
다는 듯이 안심하고서 아무 걱정없이 연회에 빠져든다.'
너희 방백들아 일아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 전쟁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이
다. 방패에 기름을 바름은 적군이 내리치는 칼날이 미끄러져 빗겨가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앞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몇 가지 선행 조처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
서 이 시간까지도 방패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의 태만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본문의 전체적인 상황은 바벧론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 단5장과 흡사하다.
바벧론의 마지막 왕 벧사살은 귀인 일천 명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며 놀다가 고레스의
군대에 의해 몰살당하였다.
=====21:6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 다가오는 메대-바사 군대와 바
벧론의 멸망이 선지자 자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파숫군'이라는 제 삼자의 시가으로 보
고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할진데, 이 파수꾼은 선지자에 의해서 객관화된 또 다
른 그의 모습이다. 파수꾼의 표상은 메시지를 보다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도입된 것
이다.
=====21:7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약대 떼 - 파수꾼이 주목해서 봐야 할 내용
이 소개된다. 기병대는 고레스가 자랑하는 바사의 주력 부대였다. 그 외 나귀 떼와 약
대 떼는 군수품과 식량 운반 등에 활용된 듯하다. 그러나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
하면, 고레스가 리다아인들(Lydians)을 물리칠 때는 나귀 떼를 이용했다고 한다
(Gray). 이로 보건대, 나귀떼와 약대 떼는 운송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전쟁 수단으로
도 활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크세노폰(Xenophon)은 바사의 군대가 둘씩 짝을지어
행군했음을 알려준다(Alexander).
=====21:8
파숫군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외친다-사자-파수대 위에
서'이다. 대분분의 주석가들은 '사자'(* , 아르예)가 파수꾼의 보고 내용이 아
니라 보고하는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좋
는 병행구는 계 10:3의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에서 발견된다. 파
수꾼의 보고는 먼저 자신이 성실과 끈기를 다하여 임무에 임했다는 것(8b절)과 바벧론
에서 벌어진 전쟁의 결과(9절)에 대한 것이다.
=====21:9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 6절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사태의 추이가 마침내
'바벧론이 함락되었다'는 파수꾼의 환호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것은 고레스 왕이 주도
하는 메대-바사 군대에 의해 바벧론이 멸망할 것을 선언하는 말인데, 영적인 의미에서
그 참된 성취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벧론이여'(계 18:2)라고 외치는 하늘
천사들의 합창에서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바벧론과 함께
그 우상들의 몰락이 언급된 것은 비록 이일이 직접적으로는 고레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
주려는 의도에서이다.
=====21:10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 바벧론에 대한 경고의 마지막에서
예언의 목적이 제시된다. 그것은 바벧론에 의해 예속되어 고달픔을 겪는 이스라엘 백
성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전하는 큰 기쁨의 소식은 바벧론이 몰
락했다는 것이다. '나의 마당의 곡식'(벤-가르니, * - )은 문자적으로
는 '나의 마당의 아들'인데, '아들'은 어떤 물건에 소속됨(관련성)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Alexander). 이 말은 '나의 타작한 것'과 동의어다. 마치 농부가 알곡과 쭉
정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곡식을 타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바벧론이라는 징계 수단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타작하였으나 그 괴로움의 시간은 이제 곧 끝날 것이다(렘
51:33;미 4:12).
=====21:11
두마에 관한 경고라 - '침묵', '정적', '쓸쓸함'을 뜻하는 '두마'(* )는
에돔의 변형으로서, 에돔의 미래 운명을 상징하는 이름이다(시 94:17;115:17,
Vitringa, Rosenmuller, Delitzch, Knobel). 어떤 이들은 '두마'가 이스마엘을 조상으
로 하는 아랍 족속의 명칭(창 25:14;대상 1:30) 혹은 오늘날 '두마엘얀딜'(Dumah
Eljandil)이라 불리우는 아라비아 북부의 한 지역이라고도 한다(Geseniuss, Hitzig,
Michaelis, Umbreit, Ewald). 그러나 뒤에 나오는 '세일'(Seir) 자체가 에서의 자손
혹은 에돔인들의 거주 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
한다(Alexander).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 파수꾼(선지자)을 부르는 소리는 사해의 남쪽에서 엘란 만
(Elantic gullf)에 미치는 높은 산악 지대인 세일(창 14:6;32:3;36:8, 9)에서 들린다.
파수꾼이여 - 본무의 '파숫군'(* , 쇼메르)은 6절의 '파숫군'(* ,메차
페)과 같지 않다. 후자가 주로 적의 침략으로부터 성(城)을 방비하는 일을 한다면, 전
자는 밤에 깨어 성을 지키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62:6;시 127:1;130:6;아 5:7). 참다
운 의미에서 선지자는 세계의 밤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는 온 세상이 잠에 취해 있을
때, 홀로 깨어 어둠을 응시한다. 깨어 있는 자로서, 감시하는 자로서, 어둠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진 자로서, 그는 세계의 운명에 대해 말할 것을 강요받는다.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밤'은 재난의 시간이다. 이 밤의
지겨움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어린 물음이 새어 나온다. 그 물음
은 이렇게 풀어 말할 수 있다:'우리는 지금 밤의 어느 지점에 있는가? 밤이 얼마나 남
았는가? 이 고난의 밤은 언제나 끝나는가?' 반복된 물음은 그들의 답답함의 정도를 암
시해준다.
=====21:12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 파수꾼의 대답은 간결하고 모호하다. 탈굼역(Targum)
은 이 말을 '의로운 자에게는 보상의 아침이 밝을 것이나 불의한 자에게는 형벌의 밤
이 임할 것이다'로 해석한다. 노벧(Knobel)은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아침이 돋을 것
이나, 에돔인들에게는 고난의 밤이 계속되라라'로 해석한다. 반면에 그로티우스
(Grotius)는 '비록 아침의 시간이 올지라도 영적인 흑암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로 해
석한다. 그러나 보다 좋은 해석은 아침과 밤의 순환이 여기서 말해지고 있다고 보는
해석이다(Gesenius). 밤이 재난의 사건이라면, 아침은 구원의 시간이다. 비록 구원의
때가 바벧론의 멸망과 더불어 도래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어둠에 삼킴
을 당할 것이니, 즉 바사제국에 의해 그들은 지배될 것이다(Delitzsch).
=====21:13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 바벧론의 파멸은 에돔뿐만 아니라 인접한 아리비아에까
지 영향을 미친다. '아라비아'(* ,아라브)라는 이름에는, '해변광야', '두마'와
같이 그 나라의 운명을 암시하는 '저녁'이라는 상징적 뜻이 담겨 있다. 그의 구성은
대단히 기교적이다. 세일 산지를 뒤덮은 어둠(12절)은 아라비아에도 어어져 뜨거운 태
양 아래 대상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던 나라 아라비아는 이름 그대로 저녁의 땅이 될
것이다.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유숙하리라 - 선지자의 경고는 먼저 사막을 횡단하는 드단
의 대상들에게 향한다. 이들은 에돔과 이웃한 족속들(창 10:7;25:3;렘 49:8;겔
25:13;27:20)로 낙타를 이끌고 두로를 오가는 원거리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평상
시에 통행하던 길에서 쫓겨나 수풀에서 은신처를 찾을 것이라는 말은 심각한 전쟁 상
황을 암시하는 것이요 아라비아 땅이 적에게 유린될 것을 시사한다.
=====21:14
데마 땅의 거민들아...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 선지자의 다음말은 드단 대상들이
숲속으로 도망한 곳 근처에 있는 데마(아라비아 북부에 있음) 주민들에게 주어진다.
도피자들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동정심을 표시하는 행위
이다(신 23:4). 이 말은 데마 주민들의 동정심이나 또는 아라비아 땅의 나머지에는 그
래도 몸을 쉴 곳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피자들의 비참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21:15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도망하였음이니라 - 드단 대상들이 왜 그토록 서둘러 몸을
피해야 했는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한편, 본문은 '앞에서'(* , 미프네)라는 말
을 4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칼날 앞에서...,뺀 칼 앞에서, 당긴 활 앞에서, 전쟁의
무거움 앞에서'(원문)-, 이는 13절에 암시된 전쟁의 참사을 묘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
다.
=====21:16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다 쇠멸하리니 - '게달'(* ,카다르)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창 25:13), 여기서는 아라비아 유목 민족을 대표하는 뜻으로 쓰였다
(42:11;60:7;시 120:5;렘 2:10;49:28;겔 27:21). 지금도 유대 랍비들은 아라비아어를
'게달의 언어'라고 부른다(Alexander). 두로와의 상거래를 통하여 축적된 많은 부(富)
와 풍부한 가축들, 그리고 활달한 용사들로 넘치는 게달의 '영광'(* , 케보
드)은 가까운 장래에 전쟁의 '무거움'(* , 코베드)에 눌려 붕괴되고 말 것이다
(Oswalt). '일 년 내에'란 말은 '품군의 정한 기한같이' 예정된 파멸의 시간이 결코
늦춰지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21:17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 그 조상 이스마엘 이래(창
21:20) 게달 자손들은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시 120:4 참조). 그러나 전쟁
의 참화를 겪은 뒤에 저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 극소수만 남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경고는 아라비아를 징벌하시는 분이 결
국 하나님이시며 그는 무한한 능력으로써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예언된 이 모든 일을 기
필코 이루실 것임을 확인, 공표하는 말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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