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장 주석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 이사야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 계속된
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이다. 웃기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을 낳았다. 아하스는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하
였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
판'으로 정식화된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아모츠'(* )라고 발음되며,
선지자 아모스(* )와는 다른 사람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표기된 것은 그 역시 선지자였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라고 말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앗수르와 바벧론 등의 주변 열국들까
지도 예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13-27장, 34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어떤 주석
가들은 본절의 표제가 기껏해야 1-12장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
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들 열방들은 유다와 예루살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Alexander), 주제에 있어서 이차적 중요성밖에 갖고 있지 않음(Calvin)을 알
수 있다.
이상(異像)이라 -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 )은 본래 엑스터시
한 상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대
되어 후에는 예언 일반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본서외에 오바댜
와 나훔에서 이와 동일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옵 1:1;나 1:1, '묵시').
=====1:2,3
막(표제)이 오르면 독자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대자연의 법정으
로 인도된다. 대재판관(여호와)이 있고 피고(이스라엘)가 있다. 그리고 증인들(하늘과
땅)이 있다. 이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 먼저 증인이 호출된다:'하늘
이여...땅이여...'(2a절). 이어서 대재판관이 피고에 대한 기소장을 읽는다(2b, 3절).
그 죄명은 반역죄이다. 선지자는 이 광경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4행시로 노래지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세계는 그 앞에
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선지자는 특별히 하늘과 땅을 지목
해서 부른다. 그 까닭은 하늘과 당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걸쳐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과 보살핌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 4:26, 36;30:19;31:28;시 50:4, 5).
내가 지식을 양육하였거늘 -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에 비유
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식이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셨다(출
4:22;호 11:1). 이러한 관계성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
에서 암시되었다(창 15:4). 그 씨앗은 자라서 출애굽의 감격과 더불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탐스러운 결실로 이어진다. 여호와는 갓태어난 이스라엘을 '자
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인도했으며 온갖 향기로운 것들로 먹게 하셨다(신 32:8-14).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장성한 성년이 되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신 26:19;28:1) 이
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시대를 찾는다면 다
윗과 솔로몬 시대, 그리고 웃시야와 요담의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식인 이
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돌보심이 개역 성경에는 '양육하였다'는 한 단어로 되
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우고'(* , 깃달티)와 '향상시켰다'(*
, 로마므티)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깃델'과 '로멤'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된다
(23:4;겔 31:4).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거역하다'로 번역된 '파솨'(* )는 본래 '도망치
다', '달아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의지에서 여
호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은 지각이나 통찰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주어에 종속된 '알다'(* , 야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
러므로써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한 것이 되었다. 70인역(LXX)은 그 뒤에 여호와를 가리
키는 '나를'(* , 메)이라는 목적어를 삽입하였다. 반면에 혹자는 주인을 가리키는
'그를'(him)이라는 목적어를 보충하였다(Gesenius, De Wette). 그러나 본문 그대로가
그 기소를 더욱 통렬한 것이 되게 한다(Leupold). '알다'와 '깨닫다'의 두 동사는 모
두 경험에서 직접 취해진 말이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식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
시는 여호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출 6:7). 그러나 그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는 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있다.
=====1:4
슬프다 - 여호와의 기소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이를 반향(反響)이라고 하
듯 그 뒤를 따르는 화답은 '슬프다'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슬프다'로 번역된 '호'(*
)는 장례식의 애도를 표시하는 비탄의 감탄사(렘 22:18)로서 탄식이나 저주의
표현에 자주 쓰인다(G.E. Wright). 이 말은 다른 곳에서 '화로다' 혹은 '화있을진저'
등으로도 번역되었다(5:8;6:5;10:5;28:1 등등).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 - 이스라엘은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로서 자신을 여호
와의 나라(백성)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약속에 근거하
여 자기를 여호와의 자녀(종자)라고 이해하였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러
한 두 가지 이해는 이스라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항상 작용하
였다. 여호와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룩한 나라'(* , 고이 카
도쉬, 출 19:6)가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
(* , 고이 호테)로 전락하였다. '호테'는 '과녁을 빗나가다'(miss the
mark)는 뜻을 가진 동사 '하타'(* )의 능동 분사형으로, 이스라엘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 , 암 카도쉬, 신 7:6)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
라엘은 '허물 진 백성'(* , 암 케베드 아온)으로 전락하였다. '케
베드 아온'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여호와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씨'
(* , 제라 코데쉬, 6:13)가 되도록 기대되었으나,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
로 '행악의 종자'(* , 제라 메레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말을 속
격으로 받아들여 '행악자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동격의 의미에서 '행
악자들로 구성된 자손'이라고 애해하는 것이 더 낫다(Gesenius' Hebrew Grammar, ed.
E. Kautzsch).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 , 바님)은 어찌되었는가 ? 그는 '행
위가 부패한 자식'(* , 바님 마쉬히팀)이 되었다. '마쉬히팀'은
'타락한'(Gesenius, Henderson), '남들을 부패시키는'(Leupold), '파괴적으로 행동하
는'(Lange), '변질된'(Calvin) 등으로 번역된다. 시적 평행법으로 구성된 이러한 묘사
들은 이스라엘이 상습적이고도 계속적인 범죄 행위로 인하여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악해졌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파괴적인 결과만을 산출하는 지경에까
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물러갔도다 -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나아가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경멸하고 업신여겼다. 병행하는 두 구절에서 각기 '버
리다'와 '경멸하다'로 번역된 '아자브'(* )와 '나아츠'(* )는 동이가어로서,
두 단어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에게 전향하는 행위를 나
타낸다(민 14:11;신 31:16, 20;32:19;삿 2:12 등). 랑게(Lange)는 '버렸다'를 소극적
죄악으로, '경멸하였다'를 적극적 죄악으로 분류하였다.
=====1:5
너희가 어찌하여...패역하느냐 -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할 목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때마다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되었다:'더욱더 패역하느냐.' 실로 극한점에 이른 저들의 죄악 때문에 주의 징계
로써도 돌이키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패역하다'(* , 사라)는 '진실에서
이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불법을 더하다'로 번역하였다.
온 머리는...온 마음은 - '머리'(* , 로쉬)와 '마음'(* , 레바브)이란 명
사에 관사가 수반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머리와 모든 마음'(every head and every
hear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itzig, Lange). 그러나 관사의
생략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자주 허용되었으며(9:12 참조), 또한 이 말이 인간
의 신체에서 취해진 비유임을 고려할 때, '온 머리와 온 마음'(the whole head and
the whole heart)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Alexander). 이것들은 일부 주석가들이 주
장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회적 계층들(Hendewerk)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상태
(Umbreit)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두 부분을 의미한다.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 머리와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스라엘의 내
적인 황폐함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좀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선지자의 의도
에 따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 - 오래된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싸매야 한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주어야 한다(눅 10: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폐함은 심각했다.
=====1:7
선지자의 시선은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그는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에서 율법의 저주를 본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에 대해
서 일찍이 율법은 경고하기를, '그 땅과 성읍이 황폐할 것'(레 26:33)이며, '알지 못
하는 민족이 그 토지 소산을 먹을 것'(신 28:33)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 임한 일이
과연 그러하였다. 선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
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율법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에 다름 아
니었다.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방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파괴'(Caspari, Lange, Knobel).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으며 이방인을 파멸시키는 자로 명시하고 있는 앞 구절
에서 강력한 근거를 얻고 있다. (2)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파괴'
(Delitzsch). 이것은 '파괴됨'(* , 마흐페카)이란 낱말이 옛적에 소돔 성에
임했던 무서운 파멸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
(13:19;신 29:23;암 4:11). 이중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스라엘의 황폐된 모습에서
율법의 저주를 읽으려는 선지자의 시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1:8
딸 시온 - '시온'은 성전의 고귀함 때문에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경에서
'딸'(* , 바트)은 관용적으로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1, '바벧론의
딸';시 45:12, '두로의 딸'). 시온과 이스라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룬다. 선지
자는 '딸 시온'이란 말로써 사랑스럽고 정결한 이미지를 야기시킨 후 바로 뒤에서 정
반대의 비유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충격을 가중시킨다(Oswalt). 이 같은 기법은
3:17;4:4에서도 사용되었다.
=====1:9
7절에서 암시된 '소돔과 고모라와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리고 8절에서 처음 싹을
틔운 '남은 자' 개념에 의해서(4장 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m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본절은 이중적으로 결합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그 죄악의 격심함과
그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었다. 이 비교는 여호와의 선민
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스라엘에는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
와는 구별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희망적인 것이었다. 부정과 긍정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사도 바울이 롬 9:29에서 본문을 인용할 때 전혀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즉 바울은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유전만을 내세우는 유
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혹독한 심판
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소수의 참된 신자들을 남겨두신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 야훼 체바오트). 이는 '하늘과 땅과 별
들과 모든 거민들의 주님'(Alexander)이라는 뜻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 전능하심으
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
엘이 그 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라
고 말할 수밖에 없다.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
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
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
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
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받
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 , 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1:11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 )은 '살해된 동물의 고
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
(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
)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써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
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1:12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
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
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1:13,14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
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아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
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
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
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
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
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1:15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
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 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
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
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
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
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
시되어 있다. 붉은 '피'(* , 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
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
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1:16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
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 , 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
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
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 관계에 대
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1:17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
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1:18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양털같이 되리라 - 평행으로 이루어진 이 두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눈
이나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겠느냐 ?'(Kaiser, Marti, Michaelis 등). 이 해석에 따르
면 하나님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조롱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것을 의문문으
로 해석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전후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 해석을 취한다. (2)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지리라'(Alexander, Delitzsch 등). 죄가 여기
서 붉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피로 물든 손과의 연관성 때문이지만(15절),
종말론적인 표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이
지만 종말론에서 희색의 반대는 붉은색이다. 흰색은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색이며 성
결의 색으로 간주된다(전 9:8;단 7:9;마 17:2;계 1:14;3:4;7:9;19:8). 반면에 붉은색
은 바벧론의 색이며 지상 나라의 색이며 마귀의 고유한 색이다(계 12:3, 9;17:4). 본
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이에 변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에도 불구하고'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사랑이다. 공의
대로만 보자면 이스라엘은 사형을 언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보적 상벌의
법칙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자유로써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시
며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려고 하신다. 이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
에게 하나님의 자유는 진실로 새로운 삶으로 결실한다.
=====1:19,20
수농과 거역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주제는 율법이 선언된 이래 불변의 주제로서 끊
이지 않고 등장한다(레 26장 ;신 28장). 본문은 그 내용의 대조와 발음의 유사가 어우
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절의 '먹다'(* , 토켈루)와 20절의 '삼
키우다'(* , 테우클루)는 언어 유희의 대표적인 예다. 19절과 20절은 두운법
(頭韻法)으로 이루어졌다.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8)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을
때 그는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라'(창 4:12)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땅의 소산을 먹는 것과 인간의 행사가 밀접한 관련
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종종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
되었는데, 이는 참것의 그림자인 현재의 복락을 맛봄으로써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찾
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1:21
신실하던 성읍이...창기가 되었는고 - 원문대로 읽으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
가, 신실하던 성읍이'이다. 2절에서 부자 관계로 표현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
계는 여기서 부부 관계로 표현되었다. 부부 관계의 기초는 '신실함'(* , 네에
마나)이다. '네에마나'는 '받치다', '기초하다', '기대다'는 뜻을 가진 '아만'(*
)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성도들이 기도 끝에 낭송하는 '아멘'이란 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임). 칼빈(Calvin)은 이 말을 '순결함'으로 이해하였다. 부부 관계에
서 순결이 파괴될 때 간음이 되듯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것은 영적 간음이 된다(출 34:15, 16;신 31:16;호 1:2 이하). 그리하여 한때 순결하
였던 신부 이스라엘은 창녀(* , 자나)가 되었다.
어찌하여(* , 예카). 이 말은 애가(elegy)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예
레미야 애가는 이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표제를 삼았다(애 1:1;2:1;4:2). 선지자의
탄식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추함이 '이제는'(* ,
아타)이란 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인자들'(* , 메라츠힘)은 강도나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가장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
람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엠 2:34;요일 3:15). 그 주범은 유다의 지도자
라 자처하는 고관들과 방백들이다.
=====1:22
네 은은...너의 포두주에는 - 비유적으로 표현된 '은'과 '포도주'는 그 고상함과
귀중함에서 볼 때 높은 계급의 관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은 찌끼가 되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이 말은 이전 황금 시대에 고관들에 의해 나타났던 덕과 공
의가 쇠퇴하고 지금은 그 찌꺼기와 그림자만 남았음을 뜻한다(Delitzsch). 비록 찌끼
가 은을 대신하여 아직도 반짝이고 포도주가 불그레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를 상실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럴 듯한 가짜를 싫어
하신다(딤후 3:5).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 '방백들'(* , 사림)과 '패역함'(* , 소레
림)은 두운법에 맞춘 것이다. 선지자는 두운법을 사용함으로써 방백들과 그들의 패역
함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방백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이
다'이다.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 '사랑하며'(* , 오헤브)와 '구하며'
(* , 로데프)는 모두 분사로 쓰여 그들의 행위가 계속 지속되며 습관적으로 자행
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하다'는 동사는 원어상 '따라가다', '열심히 추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들이 그처럼 열심히 추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 그
것은 '뇌물'(* , 솰르모님)이었다. '뇌물'은 '평화'를 뜻하는 '솰롬'(*
)과 발음이 비슷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구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뇌물'이었다.
=====1:24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처
럼 한데 모아 놓은 곳은 이곳 외에 없다. '주'(* , 하아돈)라는 명칭은 본서
에서 '만군의 여호와'와 결합되어 위협과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 쓰인다(3:1;10:16,
33;19: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하여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전능자'라
는 이름은 하나님의 권위있는 통치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창 49:24;시 132:2, 5 등에
서는 '야곱의 전능자'라고도 표현되었다(49:26;60:16). 70인역(LXX)에서는 이것 대신
'야곱의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지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을 한데 묶음으로
써 여호와의 무한한 엄위와 전능하심을 최고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
씀하시되'(* , 네움)라는 동사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말씀하시되 - '네움'은 비밀스럽고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창 22:16에서 처음 나오고 렘, 겔에서 자주 등장함).
=====1:25
나의 손을 내게 돌려 - '손을 되돌린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개입, 간섭하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렘 6:9;겔 38:12;암 1:8). 하나님의 간
섭은 찌끼를 태우고 혼잡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징벌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그러나 '아쉬바'(* )라는 동일한 동사로 시작되
는 26절과 비교해 볼 때 회복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 문자적으로는 '잿물처럼 너의 찌끼를 녹이
고'이다. 하나님은 마치 잿물을 가지고 은에서 납 성분을 녹이듯이, 예루살렘의 경건
치 못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1:26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본래와 같이 - '사사들'과 '모사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관원들과 방백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정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예루살렘은 21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화의 구현기요 메시아적 통
치의 예표로서 상징된다. 그러면 이러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
가까운 미래에 있어서 어쩌면 그것은 유다 민족이 바벧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틴에
귀환할 때 이들을 지도한 스룹바벧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이
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실현되는 미
래에 이루어질 것이다(24:23).
=====1:27
귀정(歸正)한 자 - KJV는 이것을 범죄로부터 돌아선 자라는 뜻의 '개종자들
(converts)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랑게(Lange)는 '포로에서 귀환하느 자들'에게 이것
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을 이중적 전망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서는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 그리고 먼 미래에서는
'죄로부터 구속된 성도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1:28
그러나 패역한 자와...멸망할 것이라 - 25절과 관련하여 정련 과정의 반대 측면,
즉 찌끼와 혼잡물의 운명이 제시된다(Lange). 그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듯이 '패망'
(* , 쉐베르)이란 명사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
과 같다:'파멸,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종말에 이르리라.'
=====1:29
상수리나무...동산 - 선지자는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상수리나
무'(* , 엘림)와 '동산'(* , 가노트)을 들어 당시에 편만해 있던 모든 유
(類)의 거짓된 우상 숭배를 표현한다. 류폴드(Leupold)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이것들은 두 가지 방식의 우상 숭배, 즉 나무 숭배 의식(tree-cult)과 동산 숭배 의식
(garden-cult)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에 관하여는 57:5;왕하 16:4;렘
2:20;3:6;17:2;겔 6:13;호 4:13을, 동산에 관하여는 65:3;66:17을 참조하라.
=====1:30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물 없는 동산 - 늘 푸른 나무와 물기 어린 동산처럼 그
렇게 번성하기를 꿈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간 그들은 허무한 우상의 결
국만큼이나 자신들도 헛되이 비참함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Alexander).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택하고 그로 즐거워하는 자들의 운명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
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할'(시
1:3) 것이다. 선지자가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관련하여 동산에서 물이 넘칠 것을 노
래한 구절로는 35:6, 7;41:18;44:3;48:21;66:12 등이 있다.
=====1:31
강한 자는...그의 행위는 - '강한 자'(* , 헤하손)는 불법한 통치자(아마도
'우상 숭배를 조성한 지도자', Leupold)이며, '그의 행위'(* , 포알로)는 인간
의 손으로 빚어진 우상(혹은 '안녕을 도모하는 그 수단과 고안물', Vitringa;'우상 숭
배하는 행위', Lange)을 의미한다. 우상은 불티와 같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에게 재
앙만을 야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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