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잠언

[스크랩] 잠언 22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5:46

잠언 22장 주석

 

=====22:1

   명예(*   , 쉠) - 문자적인 뜻은 '이름.'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긍정적인 의미

의 명예, 명성을 뜻한다(전 7:1 등).  이 명예, 명성이 부(富)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본절은 말한다. 그러나 이말이 부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다 .  상대적으로 명예가  부

보다 낫다는 뜻이며 부에만 집착함으로 초래될 수 있는 폐단을 결계하는 의미이다. 은

총  -  원어는 '헨'(*     )으로서 다른 사람에서 받는 사랑을 말한다.  진정한  기쁨

은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Kidner).


=====22:2

   본절을 원문 직역하면 이와 같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함께 만난다.  여호와는 그

들 모두를 지으신 분이시다'(The rich and poor meet  together:  the  Lord  is  the

maker of them all, KJV).  그런데 여기서 '함께 만난다'는 말의  의미가  애매하므로

본절 해석이 다소 어려움에 봉착한다.  본절과 같은 혼합적 평행구인 경우 그  핵심이

하반절에 있는 것이 히브리 시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진

다.  즉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인간은 평등한데 그 까닭은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으

로부터 지음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논쟁의 근거를 창조 사실에 두는 것은 이스라엘

지혜 문학의 특성 중 하나이다, Whybray).  영역본 NIV의 경우는 '부자나 빈자나 다음

과 같은 사실에 있어 일치한다: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지으신 분이다'(Rich and  poor

have this in common : The Lord is the Maker of them all)라고 번역하여  위의 해석

을 더욱 분명하게 지지한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그 유례가 깊다.

성경에는 가난한 자의 게으름을 나무라는 부분도 있지만(10:15), 부자에 대한  경고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마 19:23).


=====22:3

   보면(*     , 라아) - 미래에 있을 위험이나 함정 혹은 유혹 따위를 미리 내다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슬기로운 자는 사려 깊다.  사려 깊음은 지혜와  연

단을 통하여 훈련받은 결과적 산물인데 사실 본서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도  슬기로

운 자에게 이 사려 깊음을 심는 것이다(1:4). 어리석은 자들 -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슬기로운 자와는 달리 앞을 예견하지 못하고 사려 깊지도 못한 자들은 어느 시대

에나 많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실수를 범하며 해를 만나고 위험을 자초하여 생명을 잃

기까지 한다.


=====22:4

   본절은 두 개의 영적 조건, 곧 겸손과 경외에 이어 세 가지의 상급, 곧 부,  영예,

생명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  두  문구의  관계성은  '보응'이라고  번역된  '에케브'(

*      )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용어는 '결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상반절이

말하는 겸손과 경외는 영적인 의미상 동격으로 볼 수 있는 속성들이다. 따라서 상반절

을 '겸손,  곧 여호와 경외의 결과는'으로 번역해도 무리는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것,  의지적 복종, 죄의 확신,  이에 따르는 결과들 이

모든 것을 여호와 경외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2:5

   패역한 자 - 원어는 '에케쉬'(*      )로서 '완고한  자'가  그  문자적인 뜻이다.

'완고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또한  가시와  올무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돌연스런 위험과 역경을 각각 뜻한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

기 뜻대로 사는 자의 여정은 때로는 순탄한 듯이 보이기도 하나 결국에는 파멸로 몰고

가는 각양의 함정들이 숨겨져 있다.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 본절의 핵심을 찾기 위해 먼저 살펴볼 단어

는 '가르치라'로 번역된 '하노크'(*     )인데 이것은 그 문자적인 뜻이 '훈련시키다'

이지만 '일생을 바치다'의 의미 역시 포함된 단어임을 고려할때 '그 일생을 바치기 위

하여 훈련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일차적으로 찾아낸 본절의 핵심은 아이를

훈련하는 목적인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 그 아이의 일생을 바치는 일이다.  시작  나이

는 16-24세로 보는 탈무드의 견해와는 달리 훨씬 이른 2-3세로 보는 것이 좋겠다.  왜

냐하면 '아이'(*      , 나아르)는 일반적으로 '젖먹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현대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3-7세의 시기가 한 개인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형성

되는 때라고 한다.  앞서 찾은 핵심 외에 또 다른 핵심을 찾기 위하여 살펴볼  단어는

'길'인데 '마땅히 행할 길을'의 문자적 번역은 '그의(그 아아의) 길을 따라'이다.  이

'길'에 관한 최근의 해석 경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천 여년 전에  동일

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Saadia).  교육에 있어 피교육자의 자질이나  성격

들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지지할 만한다.  물

론 피교육자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이 그의 이기적 자아의 소욕을       배려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본절의 요점은 아이의 능력, 잠재력, 본성, 기질 따위를  잘 고려하되

그 아이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라는 것이다.


=====22:7

   본절은 우선 통시대적인 교훈을 준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땅이 존재하는 한  그

위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주는  교훈이

있다면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면하라는 것이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자칫 비굴해질

수 있고 그 마음을 위축시킨다.  더구나 믿지 않는 자에게 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가운데 현실적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

며 심지어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예외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 '재앙'에 해당하는 '아웬'(*     )은 '헛됨',

'고통', '악'등의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악을 심는 자는 아무것도 거두는 것이 없다

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성경 유사 부분, 곧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

들을 고려할 때 개역 성격의 번역은 적절하다(욥 4:8;호 8:7;10:13;갈 6:7-9).  그 분

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  문자적인  뜻은  '분노의  막대기가  넘어지리라.'  무죄한

자를 해치려고 했던 강포가 헛되이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하반절의  사

상을 고려할 때 본절은 아마도 억압 당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주 목적인 것 같

다(Kinder).


=====22:9

   선한 눈을 가진 자 - 욕심많고 인색한 자와 대조를 이루는 이 사람은 자선을  좋아

하고 예민한 사회적 양심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소유한 자이다.  아이러니컬하게

도 이기적인 욕심에 포로가 되지 않은 자는 최고 수준의 자기 성취를  이룬다.   그는

잃은 자 같으나 얻은 자이다(신 15:9, 10;고후 9:7,8 참조).


=====22:10

   불화나 다툼이 어떤 조악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악한 태도를 가진 사람 때문에  발

생할 때가 많음을 지적하는 구절이다.  이럴 경우에 필요한 것은 제도 따위를  개혁하

는 것이 아니라 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 사람(troublemaker)을 쫓아내는 일이다

(마 8:16).  또한 본절의 의미 속에서 '거만한 자'란 어떤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

된 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같은 성향은 결국 그가  하나님

과의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자는 회의가 진행되기 전에 쫓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과 화합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창

21:9-14).  70인역은 원문과는 다르지만 이런 측면을 지지하는 번역을 하고 있다: '거

만한 자가 회의장에 않아 있으면 그는 모든 사람을 모욕한다.'


=====22:11

   본절의 구문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한

가장 원문적인 의역은 이와 같겠다 : '마음의 정결을 사랑하여 그 입술이 덕스러운 자

는 왕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마음이 정결한 자는 덕스러운  말을

낸다는 것이다. '정결'이란 정직을 뜻한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누구에게도 덕을 끼

치는 말을 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대화시 깍듯한 예의와 덕스러운 말로써 신분이

높은 자의 호감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본절이 문자 그대로 왕의 친구가 되는  비결

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직한 마음에 따른 덕스러운 언어 예법을 나타내

는 사람은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구절 정도로 보면 되겠다.


=====22:12

   지식있는 자 - 다아트(*      )로서 문자적인 뜻은 '지식, '어떤 학자는 한 아라비

아 동의어에 기초하여 '지식'을 '소송'으로 번역한다(Winton). 그러나 이번역은  문맥

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바로 앞절의 경우 마음이 정결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이

곁든 덕스러운 말에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은 법정적 관점이 아닌 진리-비진리

의 구도에서 보아야 바람직하겠다. 많은 학자들이 본 구절의 대조 사항을  두  부류의

사람들로 보지 않고 진리와 비진리로 보고 있다(Kidner, Whybray). 이런 사실을  고려

할 때 '디아트'는 '지식'보다는 '진리'로 번역함이 좋고 그 대비가 되는 '궤사한 자의

말'은 '비진리'(거짓)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은 진리를 보존하시고 거짓, 비진

리는 폐하신다.


=====22:13

   본절에서 일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며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게

으른 자가 우수꽝스럽게도 마치 선지자라도 되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대

격언에는 '게으른 자는 선지자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구절은 불과  몇  단어로

의도한 내용 전체를 그려내는 본서 저자의 놀라운 작가적 재능을 엿보게  한다.  물론

그 당시 사자는 존재했고 노소를 가리지않고 잡아먹는 식인 동물로서 공포의 대상이었

다(렘 49:19;50:44). 그러나 이 동물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마을 밖 교외에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거리에 사자가 있는 것처럼 엄살을 부리고 있다.


=====22:14

   음녀의 입 - 본서에서 이 표현은 흔히 우상 숭배에로 이끌기 위한  우상       숭배자의

유혹하는 말을 뜻한다(2:16-22;5, 7장).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                 ,

제움 예화).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의 싫음을 당한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로 볼

수 있는데 '제움'이 수동태로 되어있는 것이 그 근거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고

멋대로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여 우상 숭배자의 유혹에 빠지도록  하나

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 있다(롬 1:24).


=====22:15

   미련한 것 - 발달 심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악습에 빠지기 쉬운 아이들의 기질, 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성질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아담의 타락 이후, 누구나 태어나

면서부터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다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

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

라"(창 8:21).  이 미련한 것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릴 때 엄한 징계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년이 되면 이미 행동 양식이 굳어져 버려 변화와 교정의  가능

성이 적어지기 떠문이다.  어떤 학자는 진정한 교육은 피교육자의 잠재력을       계발시켜

주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어리석음을 끊어내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Whybray).


=====22:16

   본절의 해석 관건은 '이' 곧 '유익'의 소유주를 누구로 보느냐에 있다.  문법상 이

소유주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 혹은 '가난한 자 자신'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

다.  둘중 후자로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는  가

난한 자의 유익이 되고 부자에게 주는 자는 손해를 볼 것이다.'  이 같은 직역에 의존

할 때 본절이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악한 의도와 그에 따른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에 의하여 역전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겠다. 말하자면 가난한 자, 곧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가해진 억압은 신비스럽게도 그가 얻을 승리로 바뀌게 되고  부

자의 축적된 재물은 부자 자신의 몰락의 원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의 영역본들은, 개역 성경처럼 전자로 해석하며 또 '이를...학대하는 자'와  '부자...

주는 자'가 모두  '가난하여질  뿐이라'는  말에  걸리는  것으로  번역했다(He  that

oppresseth the poor to increase his riches, and he  that  giveth  to  the  rich,

shall surely come to want, KJV).


=====22:17

   본절로부터 22:34까지는 익명의 지혜자(들)에 의해 쓰여진 독립된 한 부분을  형성

한다.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이 이집트 작가 아메네몹(Amenemop, B.C 2300년 경)의  격

언을 모방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양자의 구성 형식이나 내용이 유사한 것은 사

실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22:18

   개역 성경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본절 서두에       이유나 목적을 나타내는

'키'(*    )가 있다. 이 접속사를 중시할 때 본절은 17절의 권고적 명령에 이은 그 명

령의 목적을 보여 주는 구절이라 볼 수 있다.  목적의 첫째는 앞으로  진술할  계시적

진리를 마음속에 새기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다.


=====22:19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 이것은 앞으로 진술할 계시적 진리를 들으라는  명

령의(17절) 또 다른 목적이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알고  깨닫는

대로,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어떤 어려움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지

키며 사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 먼저 '네게'는 어떤 공

동체 전체보다는 개인 하나하나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는 앞으로 진술될 계시적 진

리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아야 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이란 표현은  진술된 진리가 이제 막 베풀어질 뿐 아니라  당장 현실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성질의 것임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히 3:7, 13).  개인 하나 하나가 오늘

말씀에 충실하여  살  때 그 공동체는 날마다 작은 천국일 것이다.


=====22:20

   아름다운 것(*         , 솰리숌) - 이 용어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해석 경향

은 학자의 주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세  가지  정도이

다.  (1) '세 가지'로 번역하는 데 그 셋을 잠언, 전도서, 아가 혹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등으로 보는 경향이다.  이 해석 경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21절에

언급된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잠

언, 전도서, 아가의 집필 목적과 연결시키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2) 본 용어를

'솰리쉼'(*          )으로 수정하여 해석하는 경향이다.  '솰리쉼'은  군사 용어로서

병사 혹은 군대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우두머리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해석자들은  특

히 후자를 취하고 본 히브리어의 중성의 의미인 '우수한', '정선된' 등에 초점을 맞춰

'정선된 잠언들', '가장 우수한 잠언들'로 이 용어를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앞으

로 진술하게 될 내용(22:22-24:34)은 잠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잠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W.J. Deane, S.T. Taylor - Taswell).  그러나 이 견해도  받

아들이기 어렵다.  첫째는 원어를 변형시켜 얻은 의미를 해석의 토대로 삼았고 둘째는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성경의 특정한 부분만 우수하고 정선되었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  본  용어를  '삼십'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22:22-24:24의 내용 중 첨언적 성격을 띠고 있는 24:23-34을 제외하면 삼십       개의  소

주제절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삼십'이 바로 그 형식상의 절 구분을  암사한다고  보고

있다(Whybray, Kidner).  이 해석은 수용할 만하다.  첫째는 사실 24:33-34을  제외한

22:22-24:34은 하난의 커다란 주제하에 삼십개의 소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둘째는  21

절처럼 그 집필 목적을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는 것에 두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

는 아메네모프 지혜서의 내용도 역시 그러한 진술전에 삼십 가지의 소 주제를  언급하

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이 잠언 저자가 아메네모프 지혜서의 내용을  그대로

모방했다거나 혹은 그 번역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 문학 형식은  빌렸

거나 빌려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2:21

   너를 보내는 자 - 이는 교훈이나 충고를 얻기 위해 찾아오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

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묵상을 통하여 마음에 새길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행에

옮기는 자만이, 영적 교훈과 충고가 필요하여 방문한 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22:22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 '약한 자'란 도움받을 데도 없이 무방비 상태

에 있는 것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의미한다.  이런 사람의 소유는 쉽게 빼앗을 수  있

다.  그래서 그를 보는 자는 탈취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어떤 역본은  본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 '가난한 자의 도움얻을 때 없는 형편 때문에 그에게 악을  행

하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


=====22: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 원문 직역은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고소를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의 '고소'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 기도, 간구 등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의지할 데 없는 약자 층을 예컨대 과부나 고아 등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줄 것을 명령하신 바 있다(출 22:22;신 24:17;26:12;사 1:17;약

1:27).


=====22:24

   울분한 자(*               , 이쉬 헤모트) - 문자적인 뜻은 '열기의  사람.  쉽게

분노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기질의 사람을 뜻한다.


=====22:25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 이는 분노하기를 배운  자가  파괴적이고

불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우려하는 표현이다.  분노에 익숙해져 버린 자는  공동체의

고민거리가 될 뿐 아니라 이웃에게 진정한 신뢰를 주기 못하고  실질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만다.  한편 '올무'를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하겠다.


=====22:26

   손을 잡지 말며 - 고대 개념으로 손을 잡는다는 것은 쌍방 중 한편이 반대편  사람

의 보증인이 되는 표식을 의미한다(6:1;11:15;17:18;20:16).  결국 본절은 빚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22:27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 원문 직역을 따르면 '네 침대가 네 아래서 낚아챔

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채주가 채무자의 마지막 소유물인 침대마저 신속하게  빼앗

아  갈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율법은  이것을  금하고  있다(출  22:25-27;신

24:12,13).  그러나 악하고 성미급한 채주들은 그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느 5:5;

겔 18:12).


=====22:28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 '옛 지계석'은 조상 시대 때 정해진 경계선을 말한

다.  특히 이스라엘게게 있어서 '경계선'이란 성스러운 것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 경계

선을 정한 존재는 다름아닌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 사람이 자신의

땅의 영역을 다른 사람의 것에로 확장시키는 일은 중요한 언약 파괴 행위였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경계선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신 19:14;27:17;왕상 21:16-19;사 5:8;호

5:10).


=====22:29

   사업에 근실한 사람 - 여기 '근실한'은 '마히르'(*        )로서 민첩함과 솜씨 있

음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본 구절은 어떤 일을 할 때  재빠르게       하면서도

솜씨있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일의 결과에       집착하기  이전에

되어가는 매 과정에 최선을 다하며, 기대만 잔뜩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과는  달리

자신의 실력과 기량을 연마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메모 :

'구약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잠언 24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잠언 23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잠언 21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잠언 20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잠언 19장 주석  (0) 2015.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