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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잠언 21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5:46

잠언 21장 주석

 

=====21:1

   본절을 원문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 안에 있다.   그는

수로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것을 조정한다.' 한마디로 왕의 결정은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말이다.  본절은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평행법을 사용

하고 있다.  상반절은 왕의 결정이 여호와의 통제 아래 있음을 진술하고 하반절은  하

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조정하시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사실

은 '마음'이 수로에 비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농부가  원하

는 대로 수로를 통하여 밭에 물을 넣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왕을 다루신다는  것이

다.  한편 왕이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는 진술은 본 잠언       전반에 깔려있는

사상과 조화를 이룬다(16:10).  왕은 하나님의 대리인 혹은 중개자에  불과할  뿐이다

(Whybray).


=====21:2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원어는  '토켄리보트'(*                )로서  직역하면

'마음을 달다'이다.  이것은 마음의 동기를 평가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

나는 행위 따위를 보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행위의 동기

를 평가하신다는 것이 초점이다. 본절은 반의적 평행법을 사용하여 이 사실을 강조한

다.  70인역은 본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의인인 것 같으나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21:3

   의와 공평 - 각각 이 두 단어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특별히 두 단어가 나란히 나

오는 경우는 창 18:19;삼하 8:15;욥 37:23;사 56:1 등이며 여기서는 실제 생활 가운데

율법을 준수하는 것 혹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 정직한 삶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무

난하겠다.  이것을 하나님은 제사보다 더 기꺼이 받으신다고 본절은  확증하고  있다.

물론 본절이 예배의 의식(儀式)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을 아니다. 다만 정직한 삶이

없는 종교 행위는 무가치함을 강조할 뿐이다(15:8;삼상 15:22;시 40:6-8;사 1:11-17).


=====21:4

   본절을 원문 직역하면 이렇다 : '교만한 눈과 자랑하는 마음, 악인의 등불의  죄이

다.'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지만 '등불'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이것은  원어

로 '니르'(*   )인데 어떤 학자는 이것을 '경작한 땅'으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무리

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악인이 경작하는 땅 자체가 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악인의 '경작하는 수고'로 볼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은 일반 은총의 일환으로 악

인과 의인에게 골고루 비를 주시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 한 악인도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이며 그것 자체를 죄로 볼 수는 없다(마 5:45).  따라서 '니르'를 '등불'로 보

는 것이 좋은데 성경에서 '등불'은 종종  번영과  행복을  상징한다(삼하  22:29;왕상

11:36).  죄인의 번영함은 그 출처가 악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덕과 경건에 기초하지

않으므로 죄가 된다고 유추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70인역 그리고 아

람역 등이 이 번역을 지지하고 있다.  결국 본절은 악인의 교만, 자랑뿐 아니라  그의

번영까지도 죄라고 못박고 있다.


=====21:5

   경영(*            , 마흐쉐보트) - 문자적인 뜻은 '생각', '사상'이지만 일반적으

로 '계획'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하반절의  조급

성과의 대조를 고려해야 하므로 이 '계획'은 인내를 동반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인내가 곁들인 '계획성'은 번영으로 인도한다.  조급한 - 아마도 이와 같은 모습은 수

단을 가리지 않고 빨리 부자가 되려는 자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20:21;28:20).  본

절은 반의적 평행법을 사용하여 인내와  계획성이 가미된 부지런함을 권면하고 있다.


=====21:6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 원어는 '헤벧  니다프  메바크쉐

마웨트'(*                                 )로서 직역하면, '몰려가는 증기와  죽음

의 추구자들이다.'  전자는 언제 그 방향을 바꿀지 알 수 없는 변화 무쌍한 존재를 강

조하는 표현이고 후자는 형벌이 이미 예비된 범죄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불의한

방법으로 취한 재물은 언제 다시 잃게 될지 모르며 현재 그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은

공의로운 법에 의해 언제 처벌받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인내와 계획성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조급하게 부자가 되려는(5절) 사람이 맞게 될 운명에 관

한 지적이자 그들을 향한 경고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

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

전6:9).


=====21:7

   소멸하나니 - 원어는 '예고림'(*             )으로 문자적인 뜻은 '질질 끌고  가

다'인데 이것은 더욱 큰 죄에 빠뜨려 종국에는 징벌을 받게 만든다는 뜻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것의 문자적 의미의 수동적인 뉘앙스로 말미암아 본 절을 범죄나 상황의  수

동적 희생물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반절은 분명히 그 주체가 공의 행

하기를 의도적이며 적극적으로 거절한 자들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본절은  옳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악을 지속적으로 행하기를 선택했던, 그래서 모든  비난의  책임이

그들 자신에 있는 자들에게 관해 말하고 있다.


=====21: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

하파크파크 데레크 이쉬 와자르) - 본 구절 해석은 '와자르'와 '하파크파크'가 관건이

다.  우선 '하파크파크'의 뜻은 분명한데 '곡해되었다'를 의미한다.  하반절의  '곧으

니라'와 대조되는 의미에서 이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구부러지고'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와자르'의 의미 규정은 쉽지 않은데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발견

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거만한'(Gratz), '비열한', '그릇된'(Barth) 등의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죄를 범한', '유죄의'로 번역하

는데 그 근거는 본 용어와 동의어인 '짐을 싣다' 혹은 '죄를 쌓아놓은'  등을  뜻하는

아라비아어에 두고 있다.


=====21:9

   움막(*             , 베이트 하베르) - 문자적인 뜻은 '동무의 방'인데  대부분의

역본들은 '지붕 꼭대기의 한 구석'(a corner of the housetop, KJV)으로 번역하고  있

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평평한 지붕 한 귀퉁이에 손님을 위한 침실을 자그마하게 짓는

것이 보통인데 아마도 이것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다(왕상 17:19; 왕하 4:10).


=====21;10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 원문으로는 '악을 원하나니'이지만 하반절을 고려하여 '남

의 재앙'을 첨가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의 '원하나니'는 식욕(신 12:20)이나 기타 욕

망(삼하 3:21)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주로 '열망하다'로  번역된

다.  본절은 인간 부패의 중요한 속성 한가지를 가르쳐 준다.  즉 인간은 이웃에게 자

비를 베풀기는 커녕 해롭게 할 목적으로 애쓰되 열망할 정도로 애쓴다는 것이다.   이

웃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악을 애써 도모하는 자는 예외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철저

한 이기주의자들이다.


=====21:11

   본절은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비교하고 있는데 '어리석은  자'란  너무

단순하여 잘 깨닫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성

숙되지 않아서 훈계를 받아들여 소화하지를 못하며, 다만 악인에게 징벌이 임하는  것

을 목격하고서야 이를 경고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가르침'을  통하여

지식을 얻는데(C.H. Toy) '가르침'이란 그로 하여금 삶의 구체적인  영역들을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지혜 혹은 통찰력을 뜻한다.  지혜로운 자는 결코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다.  반대로 어리석은 자는 말로는 가르칠 수 없는 존재이다.  본절의 초점은  어리석

은 자에 있지 않고 지혜로운 자에 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성숙한  자인데  성숙한

자란 얼마나 쉽게 훈계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느냐를 보고 결정할 수 있다.


=====21:12

   의로우신 자(*       , 차디크) - 어떤 학자는 이것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 본

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재판관 혹은 통치자로 본다(Greenstone).  그는 이

견해의 근거로서, 본 잠언이 하나님에 관하여 악인을 감찰하거나 환난에 몰아넣는  분

으로 직접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제시한다.  또 다른 견해는 이를 하나님으로 본

다.  그 근거는 본 용어의 품사가 형용사인데 이 형용사 형태로 하나님에 관하여 언급

하되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거의 그 대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잠언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욥 6:10;34:17;사 40:25;합 3:3).   우리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본다.  쉽게는 인간인 의인이 악인을 감찰, 징벌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

는 성경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며 문맥을 봐도 주체는 하나님이시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1:13

   자비를 나타내지 않는 자는 자비를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 그리고 재림 심판 장면의 일부를 연상케  한

다(마 25:31-46).


=====21:14

   뇌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하드'(*      )는  부정적  의미로는  '뇌물'

(bribe)을 뜻하고(15:27;17:23) 긍정적 의미로는 '선물'(gift)을 뜻한다(17:8;18:16).

외관상으로 볼 때 본절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는 뇌물을  긍

정적으로 본다기보다는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자에게 뇌물을 바치던 당시의 관행을 객

관적으로 묘사하는 실례인것 같다.  앞절과 연결시켜 볼 때 본절은 비천한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풀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잘 보이기 위해 예물을  바

쳤던 당시의 악습을 꼬집는 구절로 보여진다.


=====21:15

   패망(*        , 메히타) - '공포', '두려움', '당황'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공

포', '두려움'으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대비를 이루는 '즐거움'(*        , 심

하)이 상반절에 있기 때문이다.  공의가 실행될 때 보이는 반응에 따라서  그  사람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공법을 준수하던 의인이라면 공의 실행을 즐거워하겠으나 공

법을 조롱하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악인은 공의 실행을 두려워하기 마련

이다.


=====21: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 - 이 사람은 사려깊음 혹은 지혜의 통찰력을 멸시하고 훈계

받기를 거부하는 자요, 진리의 가르침을 좇아 살지 않는 자이다.  결국  그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 살다가 파멸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

라(*                          , 비크할 레파임 야누아흐) - 문자적인 뜻은 '응달(그

림자)의 무리 가운데 안식하리라.'  여기의 '안식'은 평안히 쉬는 것이 아니라 단지 '

머무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응달'(그림자)이 죽음을 상징하는 용어이

기 때문이다(Allen P.Ross).  즉 육체적 죽음이 죄를 지은 어리석은 자가 받는 징벌로

다시 한번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의 길을떠난 자를 죄 지은 자로 보는 것

은, 지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21:17

   연락 - 문자적으로는 '즐거움'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안락한 삶을 암시한다.   인생

이 안락한 삶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삶을  위하

여 과도하게 혹은 무절제하게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배만 채우는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기름 - 유대 사회에 있어서 기름

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 비싼 것은 한 병의 값이  일반 노동자 일당 300일분과

맞먹을 정도였다(마 20:2).  본절이 말하는  기름은 바로 이런 기름이며 이 같은 기름

은 대체로 사치스럽고 지나치게 소모적인 삶을  상징할 때 사용된다(시 23:5;104:15;암 6:6).


=====21:18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 '대속'은 '코페르'(*      )로서 일반적으로 '죄수를

방면(放免)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이란 뜻을 지닌다.  일반적 개념을 그대로 적용

시켜 악인이 의인을 위하여 선한 의미의 희생양이 된다고 해석한다면 이 해석은  성경

전체의 사상과 조화되지 않는다. 반면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의 견해처럼, 의인은

예비된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얻지만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며  결과

적으로는 도리어 의인의 형통을 위해 이용되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면 우선은 본서 전체와(11:8) 그리고 넓게는 성경 전체의 사상과 조화를 이룬다고  하

겠다.  이스라엘을 포로의 신분에서 해방시키는 공헌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징벌을  받

고 말았던 고레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사 44:28 참조).


=====21;19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광야'는 일반적으로 쫓기는  자가  도망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W. J. Deane, S.T Taylor-Taswell). 그러나 본절이 9절의 반복

임을 고려할 때 인적이 드문 곳, 조용한 곳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본절을  호전

적인 아내와는 이혼하여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권하는 이혼 권고 구절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본절은 미혼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항

상 평안과 화목이 넘치는 가정을 꾸미기 원하는 미혼자는 그 상대를 선택함에  있어서

늘 호전적이고 성내는 배우자를 맞지 않도록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훈

은 신부감을 고르는 예비 신랑뿐 아니라 신랑감을 고르는 예비 신부도 받아야 할 교훈

이다.


=====21:20

   귀한 보배와 기름(*                          , 오차르 테흐마드 와쉐멘) - 문자

적인 뜻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동일하다. 이 두 용어를 물질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

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데 특히 후자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경우, 해석상 약간의 껄

끄러운 '기름'은 생략하고 '귀한 보배'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 등의 영적인  그 무

엇으로 해석한다(Cook).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지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반절에

'삼켜 버리느니라'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이 동사는 어떤 물질 양식 따위를 소비해버리

는 것을 가리킬때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름'의 경우 값진 보배  못

지 않게 귀히 여겨지던 물질이었음을 고려할 때(17절 주석 참조)  생략해서는  곤란하

다.  그러므로 본절은 지혜자의 경우 미래를 보는 날카로운 판단력과  아울러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귀한 보배와 기름 따위의 소유물을 저축하는 반면 미련한 자는 아주 쉽

게 그 소유물을 탕진해 버린다는 의미이다.


=====21:21

   영적 미덕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본절의 핵심이다.  의와 인자는 하나님을  기쁘

게 하고 이웃에게 축복스러운 존재인 진실한 성도의 삶의 양식(life style)을  함축하

는 말이다.  한편 본절에 두 번 나오는 명사가 있는데 그것은 '의'로 번역된 '체다카'

(*        )이다.  비평적인 학자들은 두 번 반복되는 것 중에 뒤에 나오는 것을 필사

자의 오류로 보고 생략한다(Whybray).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인간의 기준을 놓고 사본을 임의로 수정하는 일은       결국 성경 자체의 권위를 추락시키

기 때문이다. 반복 사용에 관한 문제는 언어의 유희(word play)로 보면 풀린다.  저자

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연관성 있는 두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면 된다는

뜻이다. 첫 번째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행위의 기본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면

두 번째 것은 그 같은 의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본절의 교훈은  산상

보훈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

임이요"(마 5:6;6:33 참조).


=====21:22

   본절은 전쟁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본절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많은 수의 군대

가 지키고 있는 견고하게 잘 지은 성을 또 다른 많은 수의 군사가 기어올라가 그 성을

정복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본절이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그 성벽을 기어오른 군사들

의 용맹이 아니라 그 성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던  전략가의  지혜이다.

또한 본절은 전쟁 전략을 가르치는 목적을 위해 언급된 것이 아니다.  군사적  이미지

를 빌어 본절이 교훈하는 바는 힘보다는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며 더 위대

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전쟁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24:5, 6; 전 9:13-16; 고후 10:4).


=====21:23

   지키는 ... 보전하는니라 - 이 두 용어는  원문상  동일한  단어이다.   '쇼메르'(

*      )가 바로 그것인데  계속적 동작에 따른 계속되는 결과를 암시하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 한편 '환난'에 해당하는 '차로트 '(*       )는 부주의한 대화가 초래하게

될 사회적, 법적 곤궁을 암시한다(13:3;18:21).  혀 사용을 잘한다는 말은 할 말은 하

고 해서는 안될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진실하고 남에게 유익과 기쁨,  친절을

베푸는 말은 하되 거짓되고,  파괴적이고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입히는 말은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21:24

   망령된 자 - '레츠'(*    )로서 문자적인 뜻은 '조롱하는 자'이다. 이 용어는 하나

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경거 망동(輕擧妄動)하게 행하고 말하는 자에게 붙이는 말로서

당시 메우 저주시럽게 여겨졌다(Kidner).


=====21:25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 '게으른 자'란 하반절이 설명하듯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이다.  그런데 '정욕'이란 '소원', '바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렇다면 문맥상 '정욕'이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욕심만 앞서 지레 설정해 놓은 큰 목표

나 목적을 의미하겠다.  손으로 일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아무리 큰 목표를 설정했다고

해도 진만 빠지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이다.


=====21:26

   본절은 탐하는 자와 관대하게 베풀어 주는 의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본절의  예에

해당하는 성경상의 인물로서는 아브람과 롯을 들수 있다(창 13장). 롯은 자신을 위하

여 자신이 갈망했던 땅을 선택했고 아브람은 그의 선택을 기꺼이 수용하였다.  아브람

이 그 같은 관대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따라

사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21:27

   악한 뜻 - 이것은 지은 죄를 정당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혹은 또 다른 죄를 짓기 위

하여 외면적으로는 경건한 척하며 마치 하나님을 달래려는 듯한 망령된 의도를 가리킨

다.  이 같은 의도로 드리는 재물이라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종교적 뇌물에 다름  아

니다.  하나님은 회개가 없는 제물은 미워하신다.


=====21:28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 원어는 '이쉬 쇼메아 라네차흐 예다베르'(

*                                 )로서 직역하면 '듣는 자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

다.' 문자적인 이 번역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듣는 자'가 상반절의 '거짓  증인'과

연관된 자인지 대조를 이루는 자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이 계속해

서 상반된 두 존재를 대조시켜온 사실을 고려할 때 '듣는 자'란 거짓 증언을 하지  않

는 진실된 증인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참 증인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이

목도한 진실을 끝까지 증언할 것이다.


=====21:29

   그 얼굴을 굳게 하나(*          ...        , 헤에즈...베파나) -  '굳게 하나'로

번역된 '헤에즈'는 '표정을 엄하게 하다'란 뜻이 아니라 '겉치레 하다', '속이다'라는

뜻이다.  반면 행위를 삼가느니라는 '야킨 다르코'(*                   )로서 문자적

인 뜻은 '그 행위를 숙고하다'이며 행동 하나하나를 신중히 결정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적인 근실한 행위들임

을 교훈한다.


=====21:30

   본절이 교훈하는 바는 인간의 '지혜', '통찰력', '계획' 등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하지 않고서는 성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를 신약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

항하거나 비교해서 이기거나 승할 것은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가장 간결하게

는 행 2:23에, 가장 풍성하게는 고전 1-3장에 잘 나와 있다.


=====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 당시 이스라엘은 말을       수입해서  부렸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도로는 잘 쓰지 않고 주로 전쟁시에 이용했다(출 14:9;삿  5:22;사

43:17;나 3:2).   그리고 말의 수효에 따라 군사력이 좌우될 만큼 말은 중요한  군장비

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시

20:7),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만 의존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의 수효를 제한했

던 사례까지 있다(신 17:16).  한편 여기서 '말'을 좀더 포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

의 계획에 따른 노력을 암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하고  노력

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하나님께 있다. 궁극적 성공은 안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시 20:7;33:17).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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