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4): 지혜자의 말씀들 (22:17-24:34) |
* (22:17-24:22) * (24:23-24:34) 이 부분에 나오는 격언들은 비교적 앞의 것들보다 길며, "동의어적 병행절", "점층(종합) 법적 병행절들이 많이 나온다. 이 곳에 기록된 격언들의 주제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22:22,27), 왕에 대한 존경(23:1-3, 24:21-22), 부모에 대한 순종(22-25), 도덕적인 정결(26-28)등을 비롯하여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며, 종교적인 강조(22;19,23, 24:18,21)에 대한 내용도 나타난다. 표현법으로는 주로 ".........지어다"라는 표현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 "너 낳은 어미에게 청종하고 권면을 하는 격언에는 부가적으로 스승의 경험으로 얻은 진리가 첨가되어 있다. 예) "술을 즐겨 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 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1. 지혜자들의 말씀 30개(22:17-24:22) 1-1. 서론(22:17-21)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게 하려 함이라."(17-21) 지혜자는 앞으로 전해줄 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자가 전해주는 지식에 마음을 두라고 부탁한다. 이제 지혜자의 말씀을 듣는 학생들은 지혜자가 전해 주는 말씀을 마음에 보존하고 그것을 입술에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야 한다. 본문은 앞으로 제시될 지혜자의 말씀들이 기록된 목적 세 가지를 제시해 준다.
2)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함. 3) 지혜를 원하는 자에게 지혜의 말씀을 말해줌.
1.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22-23)." '약한 자'란 도움 받을 곳이 없는 무방비 상태의 사회적 약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의 소유는 쉽게 빼앗을 수 있다. 그래서 그를 보는 자는 탈취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일한 자들을 탈취하거나 압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고소를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의 '고소'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에 기도나 간구 등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의지할 데 없는 약자 층을 예컨대 과부나 고아 등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라고 명령하신다(출 22:22; 신 24:17; 26:12; 사 1:17; 약 1:27). 2.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 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24-25)." 노를 품는 자는 자기의 감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하는 자를 말하며, 울분한 자(이쉬 헤모트: 열기의 사람)는 쉽게 분노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기질의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자들과 동행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를 배우게 되어 파괴적이고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분노에 익숙해져 버린 자는 공동체의 고민거리가 될 뿐 아니라 이웃에게 진정한 신뢰를 주기 못하고 실질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만다. 한편 '올무'를 치명적인 약점을 의미한다. 3.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지니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26-27)" 이 당시에는 손을 잡는 것은 한편이 상대편의 보증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6:1; 11:15; 17:18; 20:16). 빚 보증을 선 경우 잘못되면 누운 침상마저 빼앗기게 된다(이 말은 원래 '네 침대가 네 아래서 낚아챔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채주는 채무자의 빚을 받지 못하게 되면 마침내는 보증인의 마지막 소유물인 침대마저 빼앗아 갈 것이다. 율법은 이런 잔인한 행위를 금하지만(출 22:25-27; 신 24:12,13) 악한 채주들은 이러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느 5:5; 겔 18:12).
우리는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초대를 받을 때에 처신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고대 군주제에서는 궁중에 초대받은 자는 초대한 통치자의 성품과 기질을 부지런히 탐색하고 그에 맞는 최선의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통치 구조 속에서 통치자의 권력이란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쾌한 것이 발견되면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식자는 이러한 경우에 목에 칼을 두어야 한다. 이 말은 '식욕을 억제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고관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초대했을 때에는 어떤 중요한 문제를 협의하거나 승진의 기회를 주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먹는 일에 집착하면 신임을 잃게 되고 만다. 성도들은 고관과 함께 하는 자리가 아니라도, 일상 생활 중에 먹고 마시는 일을 지나치게 탐해서는 안된다. '간사하다'('케자빔')는 말은 '속이다'는 말로서 이 말은 초대자가 악한 목적을 가지고 만찬을 베풀었다고 추측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피 초청자를 관찰하기 위해서 만찬을 베풀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본 절 경고의 핵심은 '케자빔'의 문자적인 뜻과는 달리 음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정당한 노력과 정당한 방법으로 버는 재물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너무나 물질을 중요시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재물만을 모으기 위해서 꾀를 내는 이러한 지혜를 우리는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재물은 한 번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은 한 번 사라지면 마치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재빨리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는 새는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의 노예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눅 12:20),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7-10).
성도들은 악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베푼 만찬을 탐내서는 안된다. '악한 눈이 있는 자'('안드리 바스카노이')는 '유혹하는 눈을 가진 자 '란 말로서, 자신의 행복과 번영만을 중시하고 이웃의 행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신 15:9; 마20:15). 이런 사람은 남을 대접하면서도 항상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계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초대한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권하면서도 그 마음은 이 잔치를 통해서 내가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를 계산하는 데 몰두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계산을 알게 되면 조금 먹은 음식도 토하고 싶어질 것이며, 감사와 인사로 그에게 한 말들도 쓸모 없는 9.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9)." 여기서 '미련한 자'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혜를 멸시하려고 애쓰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자를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런 사람은 훈계와 가르침을 베푸는 자에 대해 냉소적인 자세를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옛 경계선을 옮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경계선을 옮기는 일은 하나님의 언약을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믈로 그들은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해서는 안되었다. '외로운 자식'('예토밈')은 '아버지가 없는 자'를 말한다.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일 뿐 아니라 그 가정의 법적 대표자였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재산상의 법적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 구절은 다시 한번 경계선을 함부로 바꾸는 일과 법적인 약점을 가진 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일을 금하도록 경고하고 있다(22:22, 23, 28). 그 이유는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기 때문이다. '구속자'(고알람)는원래 한 사람이 살해당했을 때 그 사람의 원한을 복수하는 책임을 맡은, 친척 중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써, 이 말은 '보복자', '보수자'로 번역되기도 한다(민 35:19). 그러나 이 말은 좀더 넓게 사용되어 재정상의 불이익을 당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 그 위기를 처리하기 위해서 개입한 가장 가까운 친척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레 25:25; 룻 3:6-13, '기업 무를 자'). 이 구절에서는 아버지가 없는 자의 권리를 보호해 줄 친척으로 이 말이 사용되었다. 연약한 자가 피해를 당했을 경우에 피해자의 법적 지위와 재산을 회복시켜줄 친척이 없을 경우 하나님은 피해자의 '고엘'이 되어주신다(창 48:16; 출 6:6 ;욥 19:25; 사 41-63장).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자로 삼는 일과 같다.
* 서론: 훈계에 착심 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23;12) 지혜자는 또 다시 학생들에게 지혜자들이 가르치는 훈계에 마음을 두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부탁한다.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은 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신중하게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말한다. 참 지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쉽게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23절 참조). 1. "아이를 훈계하는 일을 금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13-14)." 부모는 자녀들을 훈계하는 일에 무신해서는 안된다. 부모는 자녀들이 그릇 행동하면 징계의 채찍을 들어서라도 그를 훈계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이 상처를 입을까 하여 채찍을 대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어린 자녀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 잡지 않으면 더 큰 범죄에 방치되어 결국 육체는 물론, 그의 영혼마저 타락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2.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15-16)." 앞 절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채찍을 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육체의 징계의 결과로 자녀들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녀가 지혜롭게 행동하고 정직한 말을 하게 될 때에 부모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정직한 것'('메이솨림')은 속으로 품은 생각과 겉으로 드러난 행실이 같은 것을 말한다. 자녀가 그 행실의 모범을 보일 때 부모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성도들은 마음으로라도 죄인이 형통한 것을 보고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부러워하다'('예카네)는 말은 악행자의 번영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은 비록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중단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진정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장래'('아하리트')라는 말은 어떤 행실에 따른 결과(결말)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응, 아름다운 결실이 있게 마련이다. 구약적 배경에서 볼 때 이러한 결말은 장수, 물질적 번영을 말하기도 하지만, 미래의 영원한 생명이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성도들은 지혜자의 말을 듣고 지혜를 얻어서 자기의 마음을 정로로 인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술을 즐겨하고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 사귀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연락과 탐식에 빠져서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연락에 빠져서 술 취하고 탐식 하는 사람은 가난해지게 되고, 게을러져서 잠자기를 좋아하면 헤어진 옷을 입게 된다. 술취함과 탐식에 빠지면 무기력해지게 되고 게을러져서 결국 이로 인해 궁핍해지게 된다.
자녀가 부모의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삶의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생명을 낳아준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문 성경에는 '너 낳은 아비'가 아니라 '네게 생명을 준 아비'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부모를 통하여 자식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진리를 얻고 그것을 팔지 말며, 계속해서 지혜, 훈계 및 통찰력을 얻고 팔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최고의 가치가 있으니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희생과 가치를 지불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진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4:5,7; 16:16). '명철'은 진리를 삶의 구체적 영역 속에서 적용해서 얻은 교훈이나, 그 과정을 통해서 습득한 지각력을 의미한다.
의인은 진리, 지혜, 훈계, 통찰력 등을 갖추고서 구체적 삶 속에 적용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은 부모뿐 아니라 하나님도 기쁘게 한다.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고대 근동에서 부모 경외는 가장 중요한 의무로 알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식에 대한 자부심은 오늘날 보다 훨씬 컸는데 그 까닭은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자녀의 생명을 통하여 계속된다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Whybray). 그 같은 부모에 대한 경외의 가장 좋은 방법은 다름 아닌 진리를 얻고 그 진리를 통하여 지혜, 훈계, 통찰력을 구비하는 일이었다.
마음을 달라는 말은 학생이 지혜 선생에게 주의를 집중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혜 선생이 원하는 것은 생도가 지혜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은 지혜에 마음을 두라는 권고라고 말할 수 있다. 내 길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자신의 행실을 따를 것을 권하는 지혜 선생의 권고이다. 음녀('조나')는 결혼하지 않은 매춘부를, 이방여인(나크라야)은 결혼했으나 성적인 면에 있어 행실이 비뚤어진 여인을 말한다. 그리고 '깊은 구렁'이나 '좁은 함정'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든 것으로써, 음란한 여인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은녀는 강도같이 매복하여 사람을 기다린다. 원문은 '먹이를 위하여 누워 기다린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매춘부가 행인을 유혹하기 위하여 온갖 음란한 교태를 부리며 손짓하는 모습을 말한다(7:12). 이러한 음녀는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한다. '궤사한 자'('보그딤')는 '속이다', '약탈하다', '범죄하다'의 뜻인 '바가드'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신실하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 음란한 매춘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멀리하는 패역한 범죄자의 수를 증가시킨다.
술은 사람들에게 재앙과 근심과 분쟁과 원망과, 이유 없는 싸움과 술취한 눈을 가져다준다. '뉘게 있느뇨'('레미')란 말은 감탄사로서 슬픔이나 고통의 내용이 그 뒤를 따른다. 이 구절에서 이 말이 6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술취함의 악한 결과를 강조하여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혼합한 술'은 너무 독해서 물을 탄 술로 볼 수도 있으나(9:2), 향기가 나는 향료를 넣은 술로 보는 것이 좋다. 당시 술 제조자들은 미각을 돋우기 위하여 술에 향료를 넣었다(사 5:22). '구하러 다니는 자'는 이곳 저곳 술집을 다니면서 술맛을 보고 평가하는 애주가를 말한다. 포도주가 붉다는 말은 포도주가 충분히 발효되었을 때의 상태를 묘사한 내용이다. 이러한 포도주를 유리잔에 담으면 아주 매혹적인 향취를 발하며 목에도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래서 폭주를 하게되면 겉잡을 수 없이 취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뱀이나 독사를 언급한 이유는 이들은 한번 물리면 치명적이고도 신속한 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술취함은 마치 뱀이나 독사에 물리듯이 사람들에게 심한 해악을 미치게 된다. 술에 취하면 괴이한 것이 보인다. '괴이한 것'('자로트')의 기본형인 '주르'는 '곁길로 돌다', '간음하다', '이상한 것' 혹은 '매춘부' 등의 뜻이다. '자로트'를 '이상한 것'으로 보면 이 구절은 술취한 자의 감각과 판단력이 마비된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를 '매춘부'로 보면 (strange women, KJV), 음란한 정욕에 휩싸이기 쉬운 술취한 자의 방탕한 모습을 나타낸다. 술취한 자는 마치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은 기붕이 된다. 술취한 자는 마치 파도가 있는 물결 위에 누운 듯 계속 울렁거림을 느낀다. 또는 이것은 감각이 마비되어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술취한 자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이 된다. 돛대 위는 누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그 위에 누었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태로운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술취한 자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술취한 자는 술에서 깨자마자 또 다시 술을 찾겠다고 말한다. 이는 무서운 알콜 중독 증세를 말한다. 이쯤 되면 이제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는 형편이 된다.
성도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부러워한다'(테카네)는 말은 상대의 성품이나 인격보다는 그가 가진 소유나 번영을 질투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악인의 물질적 형통을 질투하지 않으며 그들과 동행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마음으로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강포를 품는다"('쇼드 예흐게 리밤')는 말은 '그들의 마음은 파괴(강도, 살인 등)를 연구한다(=구체적 조직적으로 음모를 꾸밈)'는 말이다. 악인의 형통은 합법적인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 축재(蓄財)의 결과이다. '잔해를 말한다'는 말은 '해악을 말한다.'는 말이다. 악인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거짓, 중상, 그리고 온갖 범죄를 일삼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따라서 참 지혜 자는 이런 사람을 시기하지 않는다.
지혜는 좋은 집을 짓는 건축가이다. 악인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지혜로운 자의 슬기로운 처신은 건설적인 결과를 낳고 특히 한 가정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한다. 지식 있는 자는 방마다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가득 채우게 만들어 준다. '집'이 외형을 암시한다면 '방'은 내면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Cook). 어떤 학자는 내면보다는 외형, 특히 물질적인 요소에 치중하는 현대를 이렇게 꼬집고 있다 : '오늘날 가정을 보면 책꽂이가 TV에 의해서, 그리고 책상은 침대가 있는 방으로부터 쫓겨나고 있다'. 그러나 지혜 자의 가정은 풍성한 내적 요소로 가득하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이 있는 자도 힘을 더한다. 본문에서 '강하다'(바오즈)는 말은 '힘 안에'란 말로서 어떤 힘에 뿌리를 박고, 확고히 선 것 가리킨다. 비록 외관상 약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를 가진 자는 깊은 진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목적과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그 행동이 거리낌이 없다. 승리는 모사에 달려 있기 때문에 힘보다는 모략으로 싸울 줄 알아야 한다. '모략'은 싸움에 필요한 '전략'을 말하고, '모사'는 전략을 짜는 '전략가들'을 말한다. 승리를 위해 서는 힘이나 완력보다는 전략이 중요하며, 진정한 전략은 지혜에서 비롯된다.
'너무 높다'(라모트)는 말은 원래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다에서 나는 보석산호를 말한다(욥 28:18; 겔 27:16). 우매자에게 지혜는 너무 값이 비싸서 손에 넣을 수 없는 보석산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라모트'가 형용사로 사용되면 '높은'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한글 성경에서는 이러한 형용사적 의미로 번역해서 "지혜는 너무 높아서..."라고 번역을 했다. 미련한 자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한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중요한 재판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은 재판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고 형벌을 받게된다는 뜻이다. 지혜가 없는 우매자에게 이런 일은 당연하다. 당시에는 지혜 있는 자가 사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지혜를 습득하지 못한 자는 사회 속에서 그 어떤 공직에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악을 행하기를 도모하는 자를 사탁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사특하다'(메짐모트)는 말은 불법적이고 음란한 음모를 말하는데(레 18:17; 삿 20:6), 여기서는 냉혹하고, 계산적이고, 사악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특한 자는' 겉으로 볼 때에는 수완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이웃들이 속기 쉽다. 그러나 그는 윤리를 멸시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의 사악한 마음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가 되고 거만한 자는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복과 용서와 간밖에 없다. 그러나 우매자는 그 방법을 알 수가 없고, 또 안다고 해도 실행치 않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혐오거리가 된다.
이 구절은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재앙의 날에 연약함을 보인다면 너의 힘은 작다.' 모든 일이 평탄할 때에는 누구나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겉으로 보기에도 강해 보인다. 그러나 막상 큰 역경을 만나게 되면 그 반응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과 용기의 여부는 역경의 때에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시련과 역경의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로 극복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 구절은 이렇게 바꾸면 더 효과적인 번역이 될 수 있다. '만일 재앙의 날에 연약해진다면 너의 힘은 과연 강한 것이겠는가!'
성도들은 치명적인 위험 중에 빠진 자들을 구출해야 한다.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 나 '살륙을 당하게 된 자'는 거의 죽게된 자를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1) 자신들의 악이나 무지로 인해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들,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보았을 때 무관심이나, 이기심으로 인해서 그를 구출하는 일을 피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눅 10:30-36). 만일 그들을 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나는 그 일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을 해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가 이웃의 생명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과 같다(마 25:31-46).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더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위급함을 보고도 모른 체 하고 도망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꿀'은 지혜를 상징한다(14절). 그러므로 꿀을 먹으라는 것은 지혜를 얻으라는 권고이다. 이스라엘에서 꿀은 건강식품이며 어린이들의 성장과 발육을 돕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사 7:15). 그러므로 꿀을 먹는 것이 우리 몸에 유익을 주는 것처럼 지혜도 그것을 얻는 자에게 유익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를 얻고 그대로 실행하게 될 때에 장래가 밝아지게 될 것이며, 이 세상과 내세에서도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악인은 의로운 자의 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엿보는 일을 금해야 한다. 의인의 집과 그 쉬는 처소는 한 의인의 가정으로 볼 수도 있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로 볼 수도 있다. 의인의 가정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는 하나님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다. 왜냐하면 의인의 가정과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마 16:18). 악인이 의인의 가정이나 교회를 공격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의인의 궁극적 승리 때문이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을 상징한다(잠 6:31; 26:16; 창 4:24; 욥 5:19; 마 18:22). 따라서 '일곱 번 넘어짐'은 완전한 멸망을 말한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악인이 승리하고 의인이 완전한 멸망한 것으로 보여도 의인은 반드시 다시 재기(再起)하게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악인은 파멸에 처하면 회생할 수 없다. 왜나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된 지혜 자는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않고 그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않는다. '즐거워한다'(티스마흐)는 말은 상대의 고통을 보고 비웃는 것을 말하며, '마음에 기뻐한다'는 말은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비록 자신을 치고 공격하였던 원수라도 그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 성도들의 자세이다. 왜냐하면 그 상대방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기뻐하면 그 진노를 옮겨서 남의 고통을 보고 기뻐하는 자에게 내리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참된 지혜자는 악을 행하는 자가 잘되는 것을 보고 분을 품지 않으며, 악인의 형통한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는다. '행악자의 득의(得意)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라'는 말은 원래 '악인들 때문에 스스로 분노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악인으로 인하여 분노할 수 있는 경우는 많다. 우리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온갖 부귀 권세를 누리며 사는 사람을 보면 참기 어려운 분노가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때에도 분노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악인은 장래가 없고 악인의 등불은 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에게는 장기적인 혹은 궁극적인 면에서 보면 땅 위에서든지 하늘에서든지 누릴 축복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잠시 축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나 금방 끝이 나고 그의 등불은 꺼져 버릴 것이다.
참된 지혜자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사회의 질서를 위해 세워진 왕에게 복종하고 반역하는 자와 교제하지 않는다. '반역자'('쇼님')는 '정치 선동가', '어리석은 자들', '딴 길을 가는 자들', '다른 성향의 사람', '달리 생각하는 자', '불 찬성자'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런데 이 구절의 강조점이 하나님과 왕에 대한 경외에 있기 때문에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하는 자와 함께 하지 말라는 해석이 자연스럽다(벧전 2:17). 하나님과 왕을 거역하는 자는 즉시 재앙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그와 함께 한 자도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악한 왕도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2. 추가된 지혜자의 말씀들(24:23-34):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1.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23-25)." 재판할 때에 판사가 특정한 사람을 편을 드는 일은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악인을 옳다고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백성들에게 저주와 미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민들은 건전한 윤리관을 가지고 공의로 통치하는 정부를 믿고 따른다. 그러나 불의와 불평등이 조장되는 사회에서는 불평과 원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죄인에게 공의를 시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악인의 죄를 지적하여 견책해야 한다.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자는 결국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을 얻게 된다. 법관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길은 맡은 책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편파성 없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일이다.
이 구절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바른 대답을 하는 자에게는 모든 사람이 그 입술에 키스할 것이다.' 바른 대답을 한다는 것은 법정에서 판사가 공정한 판결을 선고하고, 증인이 자기가 본 그대로 증언하며,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진실한 교제를 나누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애정과 존경과 신뢰와 우정 어린 키스를 받게 될 것이다(창 27:26, 27:33; 삼상 20:41). 페르시아 시대에 키스는 진정한 우정의 표시였다. 사람들이 키스한다는 것은 우정어린 친구를 많이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롬 16:16; 고전 16:20).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밖에서 너의 일을 하되 밭에서 준비하라. 그리고 그 후에 너의 집을 세우라.' '집을 세우다'는 말이 가정을 형성한다는 의미로서 이해하는 경우에 이 말은 급하고 신중하지 못한 결혼을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구매 혼인(購買婚姻)의 풍습이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본절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질 수 있다. 이스라엘의 남자는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 그 여자의 부모에게 상당한 양의 빙폐(聘幣)를 내야만 했다(창 34:12; 출 22:16.17; 룻 4:5; 삼상 18:25). 이 구절의 핵심은 어떤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잘 구별하여 그 우선 순위에 따라 일을 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암 이유 없이 이웃을 쳐서 거짓 증언을 결코 해서는 안된다. 여기의 '증인'은 반드시 법정 용어로만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은 개인이나 정부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 비난의 중지에 대해서도 금지하고 있다.
밭과 포도원은 인간의 소유물을 말한다. 게으른 자의 소유물은 점점 부실해지게 되어있다. 거친 풀('하룰림')은 그 표면이 가시로 가득한 아칸더스(acanthus),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쐐기풀'을 가리키는 데 이 식물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어디서나 신속히 퍼져나간다(Deane).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소유물이 부실해진 것을 보면서 참된 훈계를 받는다. 좀더 자자 그리 좀더 눕자 고 하는 게으른 자는 땀흘려 일하기를 싫어하고 육신의 안락을 추구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빈궁함이 여행자처럼 불쑥 찾아올 것이며, 부족함이 군사처럼 강제적으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계속해서 게으른 자는 가난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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