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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잠언(5): 히스기야 신하가 편집한 솔로몬 잠언들 (25-29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5:39

잠언(5): 히스기야 신하가 편집한 솔로몬 잠언들 (25-29장)


  이 부분에는 히스기야와 그 신하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필요한 지혜들을 수집하여 기록한 약 100 개정도의 격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10-22장에 나오는 잠언과 비슷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5:24: 21:9과 비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26:13: 22:13절과 비교)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것이라(1)."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25-29장에 나오는 내용은 솔로몬이 기록한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다.
 2) 솔로몬의 기록을 기초로 했지만 히스기야 왕 때에 그의 신하들이 그 내용을 좀 더 체계적(주제중심)으로 재편집을 했다. 물론 이러한 재편집은 히스기야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25-29장의 내용 구성은 주제 중심으로 재편집이 되어 있다. 예를 들어 2-7절은 왕과 그 신하를 위한 교훈, 26:1, 3-12은 어리석은 자를 위한 교훈, 26:17-28은 악을 행하는 자를 위한 교훈으로 되어있다.


1. 여호와 하나님

 1-1.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27:1)"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동시에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으로 도 생각할 수 있다(약 4:13-16). 우리는 종종 오늘은 부를 많이 축적하고 미래에 선행을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의 재물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기쁘게 살아야 한다(마 6:34).  우리는 미래에 대한 자만을 버리는 동시에 오늘을  최선을 다해 선행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29:26)."

  사람들은 통치자에게 은혜를 구한다. '은혜'(페네)는 원래 '얼굴'이란 뜻이다. 이 말은 어떤 결정권을 가진 자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경쟁하듯 아첨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렇게 아첨하는 자들은 욕심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의 작정이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말은 원래 '모든 사람의 판단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악한 것을 바르게 교정할 판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사회를 세우기 위하여서는 뇌물을 주고 아첨하고 탄원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기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낫다.

 1-2. 연단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27:21)."

  '칭찬'은 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내는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지한 자는 칭찬을 구할 것이고, 귀가 엷은 자는 칭찬에 마음이 부풀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칭찬에 스스로 조심하고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사람을 가려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도가니'나 '풀무'가 원석을 녹여서 순수한 금속을 얻듯이 칭찬도 한 사람의 인격이 순수한 지 알아낼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된다.

 1-3. 겸손과 은혜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27:2)."

  '타인'('자르')은 '낯선 사람'을 말하는데 본문에서는 한 사람의 업적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칭찬은 교만의 일종이다. 랍비들은 어떤 사람에 관한 평가를 할 때 그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제 삼자가 주는 정보에 의존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칭찬이 진정한 칭찬임을 알고 하나님의 칭찬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요 12:43).

 1-4. 하나님을 의뢰함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기 된다. 권력, 명성, 힘 그리고 부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올무에 빠져서 옳은 길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사람의 인기를 중시하여 여론에 민감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평판을 따르기 쉽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갈 수 있다.


2. 왕(지도자)(25:2-7)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25:2-3)."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이다. 하나님은 본성이나 그 깊으신 뜻과 우주의 통치 방법등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신 29:29; 사 45:15). '그 존재의 속성, 의도 등이 모두 알려져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더 이상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McKane). 그러므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이다. '살피다'('하르코')는 말은 '비밀을 밝히는 것', '연구해서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왕은 국사(國事) 전반에 관한 문제들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여 국민들의 뜻과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분명하게 파악해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 특히 재판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왕은 철저히 재판 당사자간의 시비를 밝혀서 공정하게 판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왕은 통찰력이 있어서 항상 한발 앞을 내다보고 전진함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든든히 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25:4-5)."

  은을 비롯한 광물을 제련하면 순순한 물질만 남게 되고 대장장이는 그것을 가지고 유용한 기구들을 만든다. 은에서 찌끼를 제거하듯 왕에게서 악한 자를 제거하면 그 위가 견고해 질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주변에는 사리사욕을 탐하며 아첨하는 간신들이 모여든다. 이때 왕이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신하를 따를 경우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놓칠 수 있다. 반면에 그 같은 신하를 제할 때 왕궁에는 의로운 충신들만이 남게 될 것이고 그 충신들의 조언을 듣는 왕의 통치는  의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Greenstone).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 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라(알 티트 하다르 리프네 멜레크)는 말은 '왕 면전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다. 개인적인 욕망이 강한 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왕에게 드러내려고 힘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이기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어 오히려 왕 엪에서 낮아지게 될 수 있다. 참 지혜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춤으로서 자기의 안전을 도모한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보다 자신을 낮추게 되면 왕은 그를 더 높여 주려고 힘쓰지만, 그가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면, 그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에 그 자리를 내주고 낮은 위치로 가여 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이 교훈은 주님께서 잔칫집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인용하셨다(눅 14:8-11).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25:13)."

  얼음 냉수는 '눈의 냉기'란 말인데, 이는 5-6월의 찌는 듯한 열기를 식히기 위하여 왕궁에서 포도주나 음료에 타서 먹던 레바논이나 헬몬산의 얼음을 말한다. 충성된 사자는 마치 무더운 추수 때에 왕이 먹는 얼음과 같이 능히 그를 부리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28:1-2).....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28:12)....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28:28)."

  나라는 죄가 있으면 지도자가 많아진다. 여기서 '죄'(페솨)는 '반역'또는 '모반'이란 뜻이다. 통치자에 대한 반역이 자주 일어나면 왕조는 자꾸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통치자에게 분별력과 지식이 있는 신하들이 있으면 이러한 사건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 통치자를 보좌하는 지혜로운 신하는 나라의 질서와 안정을 가져온다. 또한 죄가 많을 때에도 나라는 무질서해진다. 그리고 지도자가 의로울 때에 그 나라는 안정과 변영을 가져오게 된다.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나라가 영화롭게 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사람들이 숨는다. 득의한다'(바알로츠)는 말은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악인이 '일어난다'는 말에서 사용된 말('베쿰')은 '권력을 잡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은 둘 다 권력을 잡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 백성은 기쁨을 누리며 살게된다. 솔로몬의 치세 때 그 백성을 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일을 즐거워했을 정도로 평안하고 기쁜 삶을 살았다(왕상 4:20). 그러나 악인이 권력을 잡을 때 그 백성들은 몸을 숨기게 된다고 한다. '몸을 숨긴다'('예후파스')는 말은 '엎드린다',  '극도로 피로하게 되다', 또는 '유린당한다' 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악인의 학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극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이 권좌에 오르면 백성은 학정을 두려워하여 그의 통치 행위에 무관심하거나 비협조적이 된다. 그러나 의인이 권좌에 오르면 그 주변에 지혜롭고 덕망 있는 인재들이 몰려들어 그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가 된다.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29:13-14)."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고 있다. 포학한 자(이쉬 테카킴)는 '고리대금업자', '억압하는 자', '속이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눈에 빛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눈에 빛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에게 똑같이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악인은 가난한 자를 속이거나 압박하여 재산을 모으고 모은 재산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여 더 큰 재산을 축적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가난한 자는 고통을 받고 슬퍼한다. 그러나 악인이든 가난한 자든 간에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부자는 가난한 자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 하면 왕위가 견고해진다. 가난한 자를 신원 한다는 말은 '가난한 자를 신실하게 판단한다'는 말로서, 가난한 자의 억울한 사정을 잘 판결해 주는 것을 말한다. 왕이 이같이 덕치(德治)를 베풀 때에 만 백성의 추앙을 받으며 오래도록 왕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솔로몬은 이러한 통치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하다(시 72:4,1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도다(29:2).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29:4)."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 한다. 여기서 '많아진다'(비르보트)는 말은 권좌에 올라 그 세력을 강화시켜 가는 것을 말한다.  통치자가 악하거나 의로움에 따라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도 하고 도탄에 빠져 신음하기도 한다.  만일 의인이 권좌에 있을 경우 범죄들은 징벌되고 억제되므로 나라에 정의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반면 악인이 권력을 잡을 경우에는 공의를 시행치 않으므로 나라는 혼탁해지고 특히 신앙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Henry). 왕은 공의를 지킬 때에 나라를 견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통치자는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뇌물'('테루모트')은 백성이 관청이나 궁궐에 바치던 '공물'로서 강요된 공물이나 중한 세금을 의미한다. 세금을 정하는 것은 왕의 고유 권한이었다. 이 때에는 왕이 거대한 건물을 지으려는 사치스러운 야욕이나 불필요한 정복 전쟁을 수행하려는 목적 때문에 상식을 넘어선 세금을 거두려는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과도한 세금을 거두려는 어리석은 왕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 악한 통치자(28:15-16)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28:15-16)."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굶주린 곰과 같이 포학하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백성'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백성이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백성을 가리킨다. 이런 형편에 있는 백성을 압제하는 관리는 강압적이고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자라임에 틀림이 없다. 이 구절은 정치적 학정의 위험성과 파괴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무자비한 학정은 종종 우는 사자에 비유된다(렘 4:7; 50:7; 딤후 4:17).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악한 세력은 그 발이 곰의 발에, 그의 입은 사자의 입에 비유된다(계 13:2). 무지한 치리자(治理者)는 포학을 크게 행한다. 이 말은 '이해가 부족한 왕은 큰 압제자와 같다'는 말이다. 이해력이 부족한 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통치에 필요한 지혜와 신중함을 결여하여 그 신하들이나 백성들을 부당하게 취급한다. 이 같은 왕의 특징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항상 반역과 암살 당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반면 사심(私心)이 없는 통치자는 개인적으로 장수(長壽)할뿐 아니라 그 통치기간도 길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시고 보존하기 때문이다.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29:12)."

  일단 지도자가 거짓말을 듣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곧 부패되고 만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은 지배 계급에 적응하도록 애쓰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지배 계급이 속임수를 받아들이고 아첨의 말을 받아들이면 너도 나도 다투어 아첨할 것이며, 그 밑의 사람들도 자기 주인을 본받아 부패를 수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패는 공동체 전체에 파급되게 되고, 마침내 부패와 타락이 가득 차도록 만들게 될 것이다.


3. 지혜와 미련함

 3-1. 지혜(의인)의 길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27:11)."

  지혜자는 자녀(또는 학생)들에게 지혜를 얻어서 자신을 기쁘게 하라고 부탁한다. 자녀(또는 학생)들이 지혜롭게 될 때에 그 부모(또는 교사)는 자신들을 비방하던 자들에게 할 말을 갖게 된다. '비방한다'(하라프)는 말은 '경멸한다'는 말이다. 부모나 교사는 때때로 이웃들에게 무책임한 부모나 거짓 교사라는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키운 자녀 또는 학생들이 지혜롭게 처신하게 되면 그들은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할 말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키운 자녀나 학생은 바로 그 사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나 교사는 사실상 자기가 키운 자녀나 학생들이 바로 자기의 열매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잘되면 교사나 부모는 영광을 받고, 그들이 잘못되면 비방을 받게 된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27:12)."

  슬기로운 자는 '재앙'('라아': '악')을 보면 숨고 그것을 미리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악을 보고도 그것을 피하거나 대비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큰 해를 받게 된다. 슬기로운 자('아룸')는 '신중한 자'를, 어리석은 자(페타임)는 '단순한 자'를 말한다. '아룸'은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며, '페타임'은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성도들은 지혜를 가까이 함으로써 악을 분별하고 거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2. 우매(악인)의 길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25:19).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25:20)."

  환난을 당했을 때에 진실 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자는 마치 불진 이빨과 뼈가 빠진 발과 같다. 부러진 이와 뼈가 빠진 다리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큰 고통만 더해준다. 또한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서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고, 쏘다 위에 초를 붓는 것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마음이 상한 자'는 '마음이 무거운 자'를 말하는데, 이는 큰 근심으로 인해서 낙심한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 가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마치 추운 날에 그의 옷을 벗긴 것과 같이 그를 더욱 곤고하게 만들 것이다. 쏘다(나테르)는 천연 탄산소다를 말하며 세척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물질은 식초를 부으면 부글부글 끊는 현상이 나타난다(Shaw). 이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이 오히려 근심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26:1)."

  팔레스틴에서 여름에 눈이 내리는 적은 없지만 내린다고 해도 금방 녹아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이 못된다. 그리고 이 곳은 봄부터 10월까지 비가 거의 없으며 추수철에는 더 비를 볼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이때에 비가 내리면 익은 곡식에 손상을 주어 도리어 해가 되기 때문에 불길한 징조로 생각되었다(삼상 12:17). "영예"(카보르)는 내적인 가치를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외적인 가치, 즉 높은 지위를 뜻한다.  미련한 자에게 높은 지위가 주어지는 일은 마치 여름의 눈이나 추수철의 비처럼 무익하고 오히려 해롭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지위에 합당한 일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며, 오히려 그 지위를 자신의 욕심을 따라 남용하여 다른 많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않는도다(26:2).

  팔레스틴 전역에서 쉽게 발견되는 참새는 까닭 없이 땅으로 내려오지 않으며 제비 역시 먼 이국 땅을 행해 갈 때는 그 목적지를 분명히 정한다. 참새와 제비 같은 미물(微物)들도 이유나 목적이 없는 행동은 하지 않듯이 인간 세계 속에도 이유 없는 악한 저주는 임하지 않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저주가 공의(公義)에 관계없이 마술 화살처럼 그 목적지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다는 미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발람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민 23:8).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26:3-5)."

  어리석은 사람은 당나귀나 말처럼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둔하고 어두운 사람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징계의 매를 맞고서야 그 길을 돌이킨다. 그리고 미련한 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보면 자신도 그 우매함에 물들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피하는 것이 좋다. 4절은 미련한 자의 수준에로 떨어지지 말라는 소극적인 경고이다. 그러나 5절은 미련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자신이 스스로 옳은 줄로 알게 되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고 교정해서 그의 어리석음을 교정해 주라는 적극적인 권면이다.

  "미련한 자의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미련한 자에게 영에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26:6-9)."

  소식을 전하는 일에는 두 발이 사용된다. 보냄을 받는 자가 그 목적을 잘 수행치 못할 어리석은 자라면 그를 보내는 일은 두 발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발을 자르는 일은 치명적인 해악을 연상케 하는데 이 사실은 '해를 받느니라'의 원문상의 의미와 잘 조화를 이룬다. '해를 받는다'(하마스 쇼테)는 말은 '폭력을 마신다'는 말이다. 절름발이의 걸음이 무기력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처럼 미련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잠언도 무익하고 어색하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일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 돌을 물매에 맨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라틴역에 근거한 것으로 보석 같은 귀중한 돌을 잡석(雜石)더미 위에 던지는 미련한 행위로 보는 것이다(Perowne, Clark 등). 둘째는 물매를 사용할 줄 모르는 자가 돌을 물매에 묶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는 해석이다(Whybray). 어느 해석을 따르든지 이 행동은 어리석은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영예', 곧 세상적인 지위를 미련한 자에게 부여하는 일은 극히 어리석은 행위이다. 손에 가시나무를 들었을 경우 만취한 사람은 그 움직임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의 경우 잠언의 말씀을 읽거나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익하고 남에게 상처만 준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적절하게 적용하여 이웃에게 유익한 도움을 준다(전 12:11).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26:10)."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궁수(弓手)는 어리석은 자를 고용하고 모든 나그네를 고용하는 자와 같다. '어리석은 자나 나그네를 고용하는 자'는 마치 궁수가 그 활을 생각 없이 자기 멋대로 쏘는 것같이 위험하다. 가진 바 능력이나 지위를 생각 없이 함부로 사용하는 자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Brown, Cook, Toy).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26:11-12)."

   문자 그대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며 어떤 경고에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를 반복한다. 토해 놓은 곳으로 발을 돌이키는 개의 비유는(벧후 2:22) 죄를 반복하는 행위를 꼬집는 대목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스스로 미련함을 인정하는 자는 소망이 있으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구제 불능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통감하는 자는 새 출발할 가능성이 많다.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에서 세리가 바로 그 모범이다. 그러나 자신이 완전하다고 믿는 자는 회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 경우의 예는 바리새인이다(눅 18:9-14). 그러나 자신의 죄를 통감한 세리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고 자기의 의를 자랑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열납받지 못하였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27:3).....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절구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 하느니라(27:22)."

  돌과 모래 덩어리는 무겁다. 이것을 운반해 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하는지를 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분노는 사람을 더욱 지치게 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참기 힘든 영적, 정신적 불쾌감을 안겨준다(McKane). 돌이나 모래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비교 차원에서 상이한 질적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껍데기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곡물을 절구에 넣고 찧는 일은 타락한 사람을 교정하는 일보다 차라리 쉽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는 이러한 교정 작업을 통해서도 교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그에게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온갖 징계, 가르침, 권면이 그에게는 무익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징계 중 가장 큰 징계는 내 버려 두심이다. 그 어떤 징계와 가르침과 권면을 통해서도 그 완고함을 버리지 않는 자는 진정 어리석은 자로 하나님의 유기(遺棄)를 당하고 만다(롬 1:28). 그러므로 징계를 당하는 자는 아직 버림을 당한 단계는 아니니 즉각 회개해야 할 것이다(히 6:1-8).

 3-3. 지혜자와 미련한 자

  "모반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29:8)."

  상반절의 원래 의미는 '조롱하는 자는 도시를 불 위에 올려놓는다'라는 말이다. '조롱하는 자'는 도덕적 의무, 특히 국가가 부여하는 의무를 비웃고 동료 시민들의 감정을 부추겨서 정부를 대항하여 정치적, 종교적인 쿠데타를 일으키는 자를 말한다(사 28:14, Cook, Toy).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구절이 '슬기로운 자'와 대조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영적으로 교만한 자(하나님의 율법을 경멸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자)로 볼 필요가 있다. '슬기로운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지혜를 받고 선행으로 지혜와 온유함을 나타내는 자를 말한다. 그는 이기적 탐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다툼이나 분쟁을 그치게 하고 화평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약 3:13-18).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29:9)."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와 다투면 그 논쟁은 해결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미련한 자는 옳고 그름보다 자기의 주장만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와 더불어 이성적인 논쟁을 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29:10-11)."

  피를 목말라 하는 자는 정직한 자를 미워하나 의인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간구한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였던 사단과 그의 모든 후손들은 정직한 자, 의로운 자를 미워한다. 가장 가까운 아우 아벨을 피 흘려 죽인 가인은 이런 일의 시조이자 표본이다(창 4:5-8). 피에 굶주린 악인들은 의인들을 증오하지만, 의인들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이러한 일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어리석은 자는 분노를 그대로 드러낸다. 분노(루호)는 '바람', 또는 '마음'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격렬한 열정'에 휩싸인 '분과 노'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반절에 사용된 노를 억제한다는 말은 분노나 폭풍 따위를 완전히 가라앉히거나  잠잠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시 65:7;89:9).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에 평정을 계속 유지한다. 이같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하늘로서 임한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약 3:17).


4. 절제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8)."

  지혜자는 우리들에게 '다투기 위하여 급히 나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법정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다투다'는 말('랄리브')이 법정적 용어이기 때문인 것 같다(마 5:25).  소송 건에 급히, 가볍게 뛰어드는 것 예를 들어 쉽게 증인 석에 나서는 일 등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목격한 내용이 신빙성이 없게 처리되는 경우에 여러 가지 난처한 일들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25:16).....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25:27-28)."

  꿀은 모든 일반적으로 쾌락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즐거움을 정도에 지나치지 않게 취하라는 권고로 보여진다. 인간은 타락 이후에 즐거움을 주는 물질 혹은 기호를 적절히 취하여 즐거움을 맛보기보다는 쾌락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꿀이 몸에 좋지만 과용하면 무익하듯이 영예(榮譽)도 귀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추구하면 결국 무익하다. 진정한 영예는 그 자체를 추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고대 세계에서 성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성읍을 방어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벽이 없다는 것은 곧 침략자에게 성(城)을 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구절은 자기의 마음, 곧 자신의 모든 욕망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을 무너진 성벽에다 비유하고 있다. 절제력 없는 방종함은 마치 성벽 없는 성과 같이 위험하다.


5. 화목(평화)의 중요성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5:24).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27:15-16)."

  큰집에서 다투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움막집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이것은 화목이 재물보다 낫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투는 부녀는 마치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 이 물방울은 지붕이 여러 군데 구멍이 뚫려서 비오는 날이면 비가 새면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발한다. 이 같은 오두막에 사는 사람은 일단 비가 내리면 방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사는 자의 처지도 이와 같다. 다투기 좋아하는 부녀를 가진 남편은 집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게 되어 밖으로 겉돌게 되는데, 이러한 가정은 평화를 바랄 수가 없다.  70인역(LXX)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빗방울들은 썰렁한 날 사람을 그의 집밖으로 몰아낸다. 이와 같이 욕을 퍼붓는 여인은 그의 남편을 추운 날에도 그의 집밖으로 몰아낸다. (27:16)은 이렇게 반역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녀를 숨기는 것은 바람 혹은 그의 오른 손의 기름을 숨기는 것이다.' 우리가 바람을 억제할 수 없듯이 말싸움하기 좋아하는 아내의 다투는 기질도 억제할 수 없다. 우리가 손에 묻은 기름의 냄새를 숨길 수 없듯이 아내의 목소리가 집 담을 타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6. 경제 문제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27:13)....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때에 있으랴(27:24)."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는 말은 나그네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증인으로 나섰을 경우 최대한 주의하라는 권고로 보여진다. 당시는 저당 잡은 것이라 할지라도 옷의 경우는 해가 지기 전까지 본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출 22: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나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 그 옷을 맡아두라고 한 것은 그가 약속을 이행치 않고 도망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Clark). 재물은 영원히 우리 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부유하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재물이란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나태와 방종에 빠지지 말고 재물이나 소득을 있을 때 잘 관리해야 한다.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28:6).....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28:8)....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28:11)."

  사곡(邪曲)히 행한다는 말은 '그 길이 구부러진 자', 또는 '그 길이 이중적인 자'를 말한다. 전자는 재산을 모으는 방법이 부정직한 자를 가리키고, 후자는 그 마음에 정함이 없어 두 주인을 섬기는 자를 가리킨다(약 1:8). 이 구절에서는 전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물질적인 면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한 변리'란 금전을 빌려주고 엄청난 고리(高利)를 받는 것을 말하며, 율법은 이러한 행위를 금하고 있다(출 22:25; 레 25:36-37; 신 23:20; 시 15:5). 이런 행위는 일시적으로는 토지나 재물을 늘리게 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모은 재물은 곧 선행과 구제를 베푸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어차피 고리대금 행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모은 재물은 일찌감치 자선사업으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 부자는 자기 기만적인 반면 가난한 자는 분별력을 가지고 부자를 살핀다. 가난한 자는 영적 통찰력인 '분별력'을 가지고 가식 속에 숨어 있는 부자의 약점을  찾아낸다. 그러나 이 구절이 부자는 절대로 지혜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부자로서 지혜로운 자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지혜는 (1) 사회, 정치, 경제적인 지위와 관계가 없으며, (2) 자기 만족이 지혜로운 삶의 증표가 아니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좆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28:19-20)."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자기의 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어 풍족하게 된다. 방탕을 좆는 자는 쾌락만 추구하고 매사에 게으른 자를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소산이 부족하게 되어 가난하게 살게 된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풍족한 열매를 주시며, 게으른 자를 가난하게 하신다. 충성된 자는 하나님과 이웃에 게 자신의 의무에 성실하게 수행하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일확천금을 노리며 성실하게 일하기보다는 부정직한 행동을 통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자를 말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얻는 데만 급급 하는 자는 부정직한 계획에 빠지게 되어, 결국은 심각한 범죄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28:21-22)."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한 조각의 빵을 위해서 범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절은 특히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교훈이다.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지연, 학연, 혈연, 이해 관계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하기 쉬우며, 이러한 차별 대우는 뇌물을 받는 단계로 발전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큰 액수에 마음이 끌려 차별 대우를 하지만, 그것이 습관화되게 되면 양심이 굳어져서 빵 한 조각 같이 작은 것을 받고도 사람을 차별  대우하게 된다. 악한 눈을 가진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급하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서두르는 자는  악한  눈을 갖고 있고'이다. 여기 '악한 눈'은 '이기적이며 인색한 사람'을 말한다.  빠른 시간 안에 부자가 되려는 자는 인색하며 부정직한 수단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에게 빈곤이 징벌로 임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7. 이웃 사랑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25:21-22)."

  악인에 대한 궁극적 심판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직접 갚는 일을 피해야 한다. 오히려 성도들은 원수 사랑을 통해 선으로써 악을 이겨야 한다(롬 12:21). 엘리사는 소경이 된 채 사마리아성(城)까지 끌려온 이방 아람인들에게 처벌 대신 떡과 물로 대접하였다(왕하 6:17-22). 원수를 갚지 않고 오히려 대접하는 일은 원수들의 머리에 핀 숯을 놓는 것과 같다. 원수에게 예상외의 후한 대접을 받게되면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28:3)....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27)."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마치 곡식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 가는 폭우와 같이 잔인하다. 추수 때가 되어서 내리는 큰비는 여름 내 농사한 모든 곡식을 쓸어가 버린다. 이런 비는 모든 농민들을 낙심하게 만드는 잔인한 비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자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일은 이렇게 잔인하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의 사정은 그래도 가난한 자가 더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두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가 형제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마 18:21-35).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궁핍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부러 못 본 체 하는 자는 결국 자신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가난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사람을 볼 때에 동정심을 느끼거나, 혹은 그를 도와줄 마음이 생길 것을 두려워해서 일부러 눈을 감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무자비한 일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에게 데접을 하지 않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31-46).


8. 일과 열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27:18)."

  무화과나무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잘 자라난다. 그러나 일단 수확 때가 되면 이 나무는 풍성한 소출을 내서 주인에게 재물을 갖다준다. 이 구절은 부지런할 것을 권하고 있으며, 하반절은 사람을 섬길 때에도 부지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종한다'(솨마르)는 말은 극히 세밀하고 자상한 섬김을 의미하며, 이러한 태도로 사람을 섬기는 자는 인정을 받게 되고, 좋은 보상이 주어지게 된다. 보상을 바라기 이전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봉사의 정신이다. 이 교훈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부지런하고 성실한 섬김을 나타내야 할 영역은 말씀 깨달음, 복음 전파, 성도사랑 등 허다하다. 이처럼 봉사와 섬김을 마친 후 우리는 조바심을 내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수고한 자에게 대가가 지불된다고 약속하셨으며(딤후 2:6), 결코 우리의 수고를 간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히 6:10).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어린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27:23,25-27)."

   양과 소를 가진 주인은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소 떼에게도 주의 깊게 신경을 써야 한다. 자신이 소유한 가축을 목동에게만 맡기고 직접 나서서 관찰하지 않는 주인은 자기의 가축 떼가 부실지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인은 종종 자기 가축의 숫자를 세어 보기도 하고 병든 것이 없이 잘 자라고, 각 종류가 증가하고 감소하는 지 등에 대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풀을 거둔 후에 다시 가서 풀을 벨 수가 있다. 땅은 규칙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소산물을 내놓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자주 그것을 거둘 수가 있다. 본문에서 '풀'('데쉐')은 사라져 버리거나 곧 떠나버릴 물질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산야(山野)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을 관심 깊게 주시하고 그 대책을 세우기만 한다면 농부는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게된다. 농부는 자기의 가축을 잘 돌봄으로써 옷감을 얻고, 밭을 살 돈을 얻으며, 집안 사람과 하인들이 먹을 음식을 얻을 수 잇게 된다. 잘 기른 가축은 그 주인과 그 식구들 심지어 그 가정의 종에게까지 음식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땅의 소산을 잘 관리하고 가축을 잘 길러서 안정될 뿐 아니라 번성하는 삶을 사는 평화롭고 풍성한 전원의 한 가정을 연상케 된다.


9. 이웃 생활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여 미워할까 두려우니라(25:17).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자는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25:18)."

  이 구절을 직접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너의 이웃의 집에 너의 발이 좀처럼 있게 하지 말라.'  이웃과의 만남은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그를 자주 찾아서 그에게 폐를 끼치게 되면 그 만남은 오히려 미움을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분별하게 '너무 이웃과 친하는 일이 오히려 경멸을 낳을 수도 잇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Clark).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예의와 삼가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는 방망이와 칼,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화살과 같이 해롭다. '방망이'(메피츠)는 무거운 나무 망치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곤봉을 뜻할 것이다. 이것은 달려드는 적을 한 방에 기절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무기이다. 그리고 칼과 살은 멀리에 있는  적을 찌르고 죽이기 위한 치명적인 무기이다. 이처럼 거짓 증거는 무죄한 이웃을 죽이는 치명적인 도구가 된다(잠 14:5; 출 20:16; 신 5:20 참조).


10. 언어 생활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것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25:9-10)."

  우리는 이웃과 논쟁이 생겼을 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변론을 하되, 타인에게 상대자의 개인적 인 단점이나 비리 등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분쟁은 분쟁 상대자끼리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로 인해 더 큰 일로 확대되는 일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25:10)은 이렇게 번역된다. '그것을 듣는 자가 너를 모욕하고 악한 평판이 따르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다른 사람의 비밀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말한 자를 멸시하고, 그 일을 말한 자에게 해가 돌아가게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입이 가볍고 신실하지 못한 자로 소문이 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친구마저 잃을 수도 있다. 외경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이 있다. '비밀을 누설하는 자는 신용을 잃게 되고 진실한 친구를  얻을 수 없다. 친구를 사랑하고 그 친구에게 신의를 지켜라. 그의 비밀을 폭로하였거든 더 이상  그와 사귀지 말라. 사람이 자기 원수를 죽인 것같이 너도 네 이웃의 사랑을 상실하였느니라'(집회서 27:16-18).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정금 장식이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25:11-12)."

  경우에 합당한 말은 상황에 꼭 필요한 지혜롭고 시기 적절한 말을 말한다. 이러한 말은 마치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와 같이 아름답고 유익하다. 은 쟁반에 있는 금 사과는 '은 그림 속에 금 사과'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은빛을 바탕색으로 하는 접시같은 주방 용품에 그림으로 새겨진 신선한 금색 과일 모양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건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가치 있는 물건으로 취급된 일종의 세공품으로서 상황에 맞게 구사되는 언어의 가치를 좀더 생생히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지혜로운 자가 말해주는 선의의 책망과 충고는 그 말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금고리와 정금 장식과 같은 역할을 한다. '청종하는 귀'는 사제지간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참 제자는 스승의 좋은 꾸지람에 그의 귀를 기울인다.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25:14).....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25:23)."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거짓 선물로 자신을 자랑하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것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이러한 사람은 마치 여름 가뭄 때 한바탕 쏟아지는 비와 서늘한 바람을 고대하는 자들 앞에 그냥 지나가 버리는 비 없는 구름과 같은 존재이다. 신약에서는 죄악과 파멸로 인도하는 거짓 선생들을 이러한 존재로 비유하고 있다(벧후 2:19; 유 12절).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남을 참소하는 자의 말은 사람의 얼굴에 분노가 일어나게 만든다. 북풍은 팔레스틴 지방 북쪽에 위치한 바다에서 생겨난 것으로 수증기를 동반하기 때문에 많은 비를 내릴 수 있다(Clark). 이와 같이 남을 거짓으로 헐뜯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26:17-19)."

  이 구절은 길 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싸움에 말려드는 자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 간섭한다(미트아베르)는 말은 '간섭한다'는 말 외에 '격노하게 한다', '흥분한다' 는 뜯이 있다. 이 구절은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목격하게 된 싸움을 보고 그 당사자들보다 더 흥분하고 격분하여 그 싸움에 끼어드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행인은 마치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다. 고대 사회에서 개는 오늘날처럼 가정에서 길들여진 개가 아니라 들개나 여우와 같이 들에서 멋대로 자한 개이기 때문에 사납기가 짝이 없었다. 따라서 이 같은 특성을 지닌 개의 귀를 잡았다는 것은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상관없는 싸움에 분을 내고 흥분하여 끼어 든 자는 바로 이러한 위험한 상태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툼, 분쟁을 그치게 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마땅하지만(마 5:9), 중요한 사실은 그 분쟁에 개입할 때 흥분하거나 격노한 상태에서 개입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다. 이 구절은 '불덩이, 화살, 죽음을 던지는 미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화살에 불을 달아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인명(人命)을 가볍게 보고 살인을 도모하는 미친 사람을 의미한다.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하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미친 사람이다. '내가 희롱하였다'는 말은 '농담 삼아 한 번 해봤을 뿐이야'라든지, '심심풀이로 한 번 해봤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남을 속여서 큰 상처를 입혀 놓고나서 '나는 손해 입히려는 마음이 없었어. 재미 삼아 그래본거야'라고 말한다면, 이는 뻔뻔스럽고 경솔한 자임에 틀립이 없다. 이러한 자는 불화살을 가지고 심심풀이 삼아 사람에게 쏘는 미친 자와 같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내뱉는 농담은 때로 살인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농담에 불과한 것이 상대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을 의도적으로 속여 놓고 그 행위를 농담 한마디 한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26:20-21)."

  나무가 다하면 불리 꺼지듯이 말 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그치게 된다. '말장이'(니르간)은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나 '고자질장이'를 말한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악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에 맞장구치며 받아주는 사람도 악하다. 만일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의 입에서 남을 중상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 맞장구치는 사람이 없다면 문제는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도둑질한 물건을 받아주는 사람은 도둑만큼이나 악하다'는 격언에 공감하게 된다(Clark). 한편 본 절에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자와 분쟁의 관계는 땔감과 불의 관계에 비유되고 있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잠언의 소재를 끌어옴으로써 설득력을  더해준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숯불 위에 숯을 더 얹어서 불을 더 크게 하듯이 한번 일어난 싸움을 계속 하게 하거나 더 확산되게 만든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궤휼로 그 감정을 숨길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26:22-26)."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마치 특별한 음식과 같다. 별식(미틀라하밈)은 '한입거리 맛있는 음식'이나, '상처'란 의미이다.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말은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간편하고도 맛있는 음식과 같지만, 남에게 큰 상처를 남길 수 잇다는 것을 동시에 암시해주고 있다. 70인역(LXX)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자의 말은 부드러우나 그 말은 뱃속 깊은 곳을 치느니라.' 악한 마음을 가지고 온유한 척 꾸며대는 말은 은을 도금한 ㅌ기와 같이 가증되다. 온유한 입술(세파타임 돌레킴)은 '불타는 입술'이란 말이며, 이는 형식적으로만 애정이 넘치고 따뜻한 태도로 하는 말을 의미한다. 이런 입술을 가진 자가 악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면 그는 위선자임에 분명하다. 이런 자는 낮은 은을 입힌 곧 '은 찌끼를 입힌' 토기와 같다. 토기에 은 찌끼를 입히는 것을 밝은 광채를 내게 하기 위함일 뿐 그것 자체가 토기를 고가품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애정이 넘치는 말과 행동 이면에 악한 음모를 숨긴 대표적인 사례는 가룟 유다가 로마 군병을 이끌고 주님을 만났을 때의 장면이다(마 26:47-49). 성도들은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자를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은 부드럽고 매력적인 말투로 치장했더라고 악인의 마음은 가증한 것, 곧 혐오감을 주는 것으로 충만해 있다는 말이다. 한편 이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힌 자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마 12:45; 막 16:9). 다른 사람을 속이고 모함하는 일은 처음에는 쥐도 새도 모르는 것처럼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결국 시일이 지나면 그 흑막이 반드시 벗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외식적인 말을 극히 삼가야 한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26:27-28)."

  악인들은 타인에게 불행을 안기기 위하여 깊은 구덩이를 파고 돌을 굴리는 것처럼 열심히 일을 한다. 전자는 덫을 설치하고 후자는 밑으로 굴리기 위하여 꼭대기에 돌을 굴려 올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삿 9:53; 삼하 11:21). 덫을 설치하는 일이나 산 혹은 성벽 꼭대기로 돌을 끌어올리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악인들은 이렇게 어렵게 남을 해치려고 모의를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치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고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하만(에 7:10)과 다니엘의 대적들(단 6:24-28)을 들 수 있다.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술은 패망을 일으킨다. 거짓말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상처를 입힌 만큼 자신도 상처를 입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해치는 자가 된다. 그리고 남에게 악을 행한 일은 도리어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27:14)...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29:20)."

  이른 아침에 큰 목소리로 축복하거나 혹은 인사하면 그 듣는 자로 하여금 오히려 성가시게 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멍청한 사람에 대한 묘사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침에 큰소리로 하는 축복의 말 혹은 인사를  겉으로는 요란하지만 진심은 결여된 가식적인 아첨으로 해석한다. 참 지혜자는 가식적인 아첨의 축복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어에 조급한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미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급하다'('아츠')는 말은 '서두르다'는 뜻이다. 신중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큰 상처를 입히거나 크게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을 조심해서 할 수 잇도록 기도해야 한다.


11. 면책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27:5-6)...사람을 경책 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28:23)."

  공개적으로 하는 꾸짖음이 숨어서 하는 사랑보다 나을 때가 있다. '공개적인 꾸짖음'은 솔직한 말로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숨어서 하는 사랑'은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을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꾸짖음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책망하다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것을 두려워해서 그냥 덮어두려 하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 또한 진실한 친구가 준 상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처는 외상(外傷)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친구의 강한 꾸지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역본은 이 말을 '한번 뻗은 펀치'로 번역하고 있다(NEB). 그것이 강한 펀치와 같이 손상을 입히는 것이었더라도 진정한 친구의 꾸지람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 꾸지람은 그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친구의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25:12; 신 17:9; 욥 12:20). 그러나 원수는 친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의 잘못을 입맞춤으로 대처한다. 그는 친구가 잘못할 때에도 그에게 아첨하거나 칭찬함으로써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악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간사한 의도에서 행하는 것이다. 아첨하는 혀는 잠시 자아 도취에 빠지게 만들지만 '경책'만큼 건설적인 도움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아프더라도 진실을 듣기 원하는 자는 진실한 친구를 얻을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진리에서 떠난 자를 야단을 쳐서라도 돌이키게  해야한다(약 5:19,20).


12. 온유와 겸손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25:15)."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기보다는 참을성 있게 진지한 자세로 건의(建議)를 올릴 때 설득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부드러운 혀가 강한 뼈를 꺾기 때문이다. 관대하고 호감을 주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속의 장벽을 헐어주며, 심지어 적의(適意)마저 없애주는 위력을 지닌다. 한편 부드러운 인내의 말투는 복음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신약 성도가 준비해야할 덕목이기다(벧전 3:15, 16).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23)."

  인간의 자랑은 그를 낮은 곳으로 데려가고 그 마음이 낮은 자는 영예를 얻는다. 자기 자랑은 자신을 수치로 인도하고 겸손을 영예로 이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16:18)는 말씀과 같이 교만한 자는 수치를 당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큰 경멸을 당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결국에는 영화로운 자리에 앉게 된다(눅 14:11; 18:14).


13. 우정과 이웃 사촌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27:9)."

  당시에는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기 전에 향료와 장미, 향나무 등을 이용하여 제조한 향 집안에 뿌렸다. 그리고 이 향은 더운 날씨에 손님으로 하여금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친구가 해주는 진실한 권면은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준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권고는 비록 책망이 섞여 있을지라도 그것을 듣는 자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유익한 것이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27:10)."

  고대의 관습상 아버지의 친구는 자기 가족 어른과 같이 대접을 받았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하는 말은 이웃 어른들을 잘 대접하고 그들은 자기 부모처럼 대하라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의 핵심은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라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가까운 이웃이 때로는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보다 더욱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상시에 이웃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27:17).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27:19)."

  두 친구 사이의 건설적인 토론이나 인격적인 친교는 사로 상대방의 인격에 성장을 가져온다. 본문에서 '얼굴'은 양쪽의 인격이나 지적 능력 등을 나타낸다. 우리가 쇠로 연장을 만들 때에 쇠망치로 두들겨서 만든다. 그러므로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일도 다른 사람이 사용된다. 사람들은 서로 사귀고 돕고 싸우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서로의 인격을 형성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 관계는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에 얼굴이 비취는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췬다. 본문에서는  두 번 언급되고 있는 '한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느냐 다른 인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1) 동일 인물로 볼 경우: 맑은 물에 얼굴이 비추이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비추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려면 자기의 마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경우 사림들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깊이 성찰함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된다.

 2) 다른 인물로 볼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태도를 관찰할 때에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알고 있는 내 모습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객관적인 내 모습은 큰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서 나 자신의 객관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14. 재판과 공의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25:26)."

  의인이 악인 앞에서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지고 샘의 더러워지는 것같이 큰 해를 가져온다. 죄의 유혹을 이기고 의롭게 사는 사람은 그가 사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이 악인의 위협을 받고 그 의로움을 상실할 때에 그가 속한 공동체는 혼란과 좌절, 실망, 그리고 타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의인은 혼탁해진 사회에서 맑은 물을 내는 우물과 샘과 같기 때문에 그가 넘어짐은 사회를 정화할 샘과 우물이 더러워지는 것과도 같다.


15. 게으름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르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26:13-16)."

  우리말 성경에는 둘 다 '사자'로 되어있으나 원래 이 말은 서로 다른 용어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사자는 '솨할'(일반적인 사자)이고, 두 번째의 사자는 '아리'(특정한 포악한 사자)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을 좀더 실감나게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게으른 사람은 '거리에 사자가 있으며, 아주 포악한 사자가 거리를 누비고 있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가능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 내고,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염려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문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처럼 게으른 자도 침상에서 일어나기를 싫어하여 침상에서 뒹굴기를 좋아한다. 어떤 학자는 '게으른 자가 침대 위에서 몸을 한 번 뒤집었다면 그에게는 그 일이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고 비꼰다(McKane). 게으른 자는 밥그릇에 손을 넣고도 그 음식을 입에 넣는 일조차 힘들어한다. 이러한 게을러서 마땅히 자기의 소유가 될 것도 놓쳐버린다. 게으른 자는 선하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 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생각한다. '선히 대답하는 사람'은 바른 판단을 가지고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말하고, '일곱'이란 완전을 의미한다. 게으른 자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참된 지혜를 얻고자 하는 진지한 토론을 거부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본능을 좇아 안락한 삶을 사는데 있기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는 일을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라 매도한다.


16. 투기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으나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27:4)."

  '노함은 잔인하고 분노도 잔혹하지만, 그러나 질투는 그보다 더 잔인하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질투란 사르는 불과 같이 파괴적인 폭력성을 띤다(욥 38:25; 사 32:6; 나 1:8). 질투는 그 무엇으로도 화해하기 어려우며 그 보복은 가장 극한 형태로 나타난다.


17. 방황

  "본향을 떠나 유리 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27:8)."

  자기 집을 떠나 방황하는 자는 비참한 삶을 살게된다. 특히 이 구절은 공동체를 떠난 사람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공동체의 결속력은 매우 강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나거나 떠난 사람은 생존 자체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며, 도망자나 방랑자가 되는 일은 가장 혹독한 징벌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창 4:12,13). 그러나 성도들에게 무엇보다 위험하고 절망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떠나는 일이다.


18. 좋은 소식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25:25)."

  중요한 소식을 오랫동안 기다리는 사람에게 먼 땅에서 오는 기별은 마치 목 바른 사람에게 시원한 냉수와 같다. 당시에는 우편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소식을 전해 듣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사람이 좋은 소식을 받았을 경우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새 힘을 회복하게 된다. 영적인 범주에서 볼 때 우리는 '좋은 기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good news)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요 4:13, 14;7:37).


19. 환경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27:7)."

  배부른 자는 꿀을 주어도 싫어한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은 쓴 음식이라도 달게 받고 감사하게 그것을 먹는다. 이미 쾌락에 탐닉해 있는 사람은 웬만한 기쁨에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자기를 잘 절제하는 사람은 작은 기쁨에도 큰 감사를 느낄 수가 있다(Cook). 이를 복음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자신의 영적인 빈곤을 뼈저리게 느끼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음을 큰 은혜와 감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이 미련해 보인다(마 5:6).


20. 탐심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27:20)."

  '지옥과 멸망은 아물 사람이 많이 와도 가득 차지 않는다. '지옥'은 죽음의 세계를, '멸망'은 파괴적인 힘인 죽음을 가리킨다. 이 둘은 역사 이래로 모든 시대 모든 나라 민족들을 삼켜왔지만,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여 더 달라고 버티고 서 있다. 지옥이나 멸망 못지 않게 만족을 모르는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끝없는 이 욕망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없다. 그러나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욕망은 누그러지며 따라서 그분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맛볼 수 있다(요 4:13, 14;빌 4:11-13).


21. 의인과 악인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28:1)."

  악인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이 행한 악한 일로 인해 항상 죄의식이나 공포를 느끼 때문에 그는 항상 사람을 의심하고 또 두려워한다(민 32:23).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은총 안에서 살며 의를 행하는 의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사자처럼 담대하다. 이처럼 죄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의는 사람을 담대하게 만든다.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29:5-7)."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과 같다. '아첨하는 것(마할리크)은 '매끄럽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아첨꾼의 말이 부드럽고 매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첨은 사악한 행위를 덮기 위한 치장이요 속임수에 불과하다(McKane). 그러므로 아첨을 듣는 자는 아첨꾼의 말을 듣고 잘못 판단하여 죄를 짓거나 멸망에 빠질 수 있다. 또한 아첨꾼의 음모는 후에 모든 일이 드러나게 때문에 결국 아첨은 스스로 파멸을 부르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악인의 범죄는 스스로 자기 앞에 올무를 놓는 것과 같다. 고질적인 악의 습관으로 인한 범죄는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올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말씀대로 행한 의로운 사람들은 멸망의 올무를 벗어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의로운 자는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알아준다. 그러나 악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아 줄만한 지식이 없다. 본문에서 말하는 '자식'('요데아', '다아트')은 깊은 개인적 관심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궁핍의 절정에 있는 가난한 자나 도움 받을 길이 없는 고아를 구체적으로 돕는 것, 멸망 직전에 있는 자를 회복시키는 것, 법정에 나가 억울한 피고인을 위해 증언하는 것, 신체 장애자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는 것 등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욥 29:12-17). 이와 같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지만(시 41:1), 악인은 이런 일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그 사정을 알아 줄만한 통찰력도 결여되어 있다.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하지 아니하느니라(29:24)."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直告)하지 아니하느니라 - 문자적인 뜻은 '맹세 아래 있지만 감히 증언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적의 공모자가 도적의 범죄를 밝히는 증언대에 서서 진실만을 증언할 것을 맹세한 후에도 거짓말을 늘어놓기에 전전 긍긍함을 가리킨다. 진실을 증언하지 않을 경우 율법은 모든 죄가 증언하지 않는 그에게 돌아가도록 명령하고 있다(레 5:1). 이같이 무서운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증언하지 않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도적에 대한 사사로운 인정(人情) 때문이다. 모든 죄의 대가를 뒤집어쓰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미워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소한 인정 중 한 길을 따라야 할 경우 성도가 택해야 할 길은 명백하다(행 4:19).


22. 율법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28:4-5)...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28:7).....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28:9)."

  '율법'은 유대인의 믿음과 삶의 기초가 되었던 모세 오경을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버린 자'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버린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격려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는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설정한 가치를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공의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에 대해서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좆는 사람들은 악한 행위를 강하게 반대할 수 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공의를 깨닫지 못한다. '공의'(미쉬파트)는 '재판','심판'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나 여기서는 정치적, 도덕적인 의미의 '정의' 혹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공의로운 길을 분별할 수 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진정한 정의가 무엇이며, 선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자녀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모세오경과 경건한 삶의 경험을 담은 조상들의 교훈 및 명령을 말한다. '지혜로운 아들'('벤 메빈')은 '분별력 있는 아들'을 말하는데, 이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사는 길을 아는 아들을 말한다. 그러나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탐식자'는 '방탕한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물질적, 도덕적으로 방탕한 자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친구를 닮아서 방탕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로 인해 가정에 불명예를 끼침으로써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만든다. 이는 '방탕함'은 신앙적, 도덕적으로 죄악을 유발하며 반사회적인 일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기도도 가증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기를 거절하는 자의 기도는 적절한 기도를 할 수가 없으며,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욕망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게 된다. '묵시'('하존')는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사 1:1; 나 1:1).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제 멋대로 행동하게 된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이파라')은 '벌거숭이가 되다', '멸망하다', '사라진다' 는 뜻이다.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은 소유물뿐 아니라 입은 의복까지 벗기움을 당한다. 우리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입으로 그 소유물을 빼앗기고 결박당한 채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례를 통해 이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율법을 멸시하는 자는 결국 멸망을 당하고 사라지게 된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른 나라에 멸망을 당하고 흩어지게 된 걱도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멸시했기 때문이었다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23. 무고한 자를 해친 결과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28:10)...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나 그를 막지 말지니라(28:17)."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질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으라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구나"(마 23:15). 그들은 자신의 견해에 대해 자만했으며(골 2:18), 남을 지배하고 싶어했고(딤후 3:6),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벧후 2:15, 18, Kidner).  악인들은 이러한 동기를 가지고 의인을 유혹한다. 일시적으로 그들이 성공하는 듯이 보이지만, 후에 그 유혹한 자는 반드시 스스로 자기 꾀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의인들은 그 유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큰 영적 힘을 얻고 성숙해진다(약 1:12-13; 벧전 1:6,7). 다른 사람에게 피의 폭력을 행한 자는 구덩이로 도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아무도 그를 막아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렸거나 방관한 자는 결국 징벌을 당하게 된다. 그때에 징벌 받을 자를 도우려고 하는 행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도리어 해(害)만 당하게 된다.  이 경고는 무고한 백성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악한  왕에게 주는 경고로 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통치자는 무고한 백성들의 피를 흘리고 후에 이로 인해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되는 아픔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24. 회개와 용서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13).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14)....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18)....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29:1)."

  죄를 숨기고 자백하지 않는 자는 형통할 수가 없지만, 스스로 자기 죄를 자백하고 그 죄를 떠나는 사람은 은총을 받게 된다. 이러한 주제는 (시 32:1-4, 요일 1:6-9)에도 나타난다. 죄를 숨긴다는 것은 죄에 탐닉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변명하거나 부인하고, 그로 인한 비난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재앙에 빠진다. '마음을 강퍅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죄를 자백하거나 돌이키지 않는 자를 말한다.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간사한 자는 곧 넘어지게 된다. 성실히 행하는 자(흘레크 타밈)는 '순결한  자', 또는 '흠이 없이 걷는 자'란 말인데,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성실하게 사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기 때문에 큰 역경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구원을 얻게된다. 사곡히 행하는 자는 '사특한  길들로 행하는 자'란 말인데 본문에서는 '이중적인 길을 가는 자'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 또는 쾌락과 하니님을 통시에 섬기려고 한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돌이키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웃, 부모, 복음 일꾼들, 하나님의 말씀 등에 의하여 제시되는 권고, 충고, 징책 등을 멸시하고 거절하는 마비된 양심을 소유한 자이다(Gill). 목이 곧다는 것은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목을 흔드는 완고한 황소로부터 따온 이미지이다. 패망을 당한다는 말(이솨베르)은 '부서지다', '깨뜨러진다'는 말이다. 경고를 들으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자는 쇠방망이로  맞아 산산조각이 난 사기 항아리와 같이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징벌은 그가 생각지 않았을 때 갑자기 그에게 임한다. 그가 징벌을 피하지 못한다는 말은 용서받지 못하고 끔찍한 징벌의 상황에서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은 되풀이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하던 엘리의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이러한  교훈의 실례를 보여주셨다(삼상 2:25).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얻을 자니라(3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마음이 철저하게 타락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믿고 자만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며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지혜로운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의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를 성경은 심령의 가난한 자, 겸손한 자, 어린아이와 같은 자로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천국을 소유하게 해 주신다(마 5장; 눅 10:21).


25. 부모와 자녀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28:24-25)."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자는 억지 고집과 횡포를 부려서 부모의 재산을 자기 소유로 삼는 악한 행위를 말한다. 이런 자는 누가 물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내 재산이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부모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이 행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녀는 너무도 잔인하기 때문에 파괴자의 동류라고 취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공경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고 있다(막 7:11-13; 딤전 5:4-8). 마음이 탐하는 자(레하브 네페쉬)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이기적이고 무법한 자를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다투며 이로 인해 그 마음에 평안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 자신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는 마침내 물질적인 풍성함과 영적인 축복과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Cook).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나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애도다(29:3)."

  지혜를 찾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 축복을 받고 그 부모를 기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방탕하여 창기를 사귀는 자는 부모가 애써 모은 재물을 소비해 버린다. '사귄다'는 것은 계속해서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며, 창기와 계속 가까이 짝하는 자에 관해서는 (잠 1-9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창기를 사귀는 자는 당연히 쓸데없이 재물을 소비하게 되며,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으로도 미련한 행동이며, 가정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불효가 되었다. 합리적인 경제운영을 통해 가정에 기쁨과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26. 자녀 교육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29:15-17)."

  부모가 자녀를 채찍과 책망으로 적절하게 교육하면 자녀를 지혜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자녀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그 자녀는 마침내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녀가 될 것이다. 임의로 하게 버려 둔다(메슐라흐)는 말은 자기 멋대로 하도록 두어서 악한 습관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자녀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을 경우에 그 부모가 방관하여 그대로 두면 마침내 그 자녀는 그 가정에 수치와 불명예를 안겨주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윗의 넷째 아들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자라났던 아도니야는 결국 솔로몬의 왕위를 찬탈하려다가 죽음을 당하여(왕상 2:24, 25) 다윗 가문의 큰 수치가 되었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진다.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수가 증가할수록 세상은 타락하고 부패되었고, 죄가 많아질수록 엄중한 심판이 시행되었다. 부모가 자녀들을 징계하고 가르치면 부모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쁨을 주는 자녀가 된다. 훈계와 질책을 통해 잘 교육된 자녀를 둔 부모가 누리게 될 정신적 축복들을 가리킨다. 전자는 '이니헤카'로서 문자적인 뜻은 '근심에서 구조되다'인데 이것은 비뚤어진 성격과 악습이 몸에 밴 자녀들로 인한 염려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후자 '이텐 마아다님'은 적극적인 의미의 기쁨, 곧 자식의 성공  따위로 얻는 만족과 평안을 말한다. 징계를 통해 엄한 교육을 받은 자녀는 성공하여 부모의 마음에 평안을 준다.


26. 종과 주인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29:9). 종은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 하리라(29:22) "

  종은 말로만 하면 그 행동을 고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종은 원래 양심이나 마음보다 마지못해서 눈가림만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종을 키울 때에 어린 시절부터 멋대로 하도록 키우면 그 종은 주인의 아들의 권리(상속권)마저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종이 주인의 몫을 가로채는 비행(非行)의 예는 므비보셋의 사환인 시바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삼하 16:1-4).


27. 절제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29:22)."

  노(아프)와 분(헤마)은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고질화될 성향이나 기질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하반절을 이렇게 의역한다. '성마른 기질은 많은 죄의 원인이다'(Moffatt). 특히 '헤마'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일삼는 자들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 분을 품고 노를 발동하는 것이 일종의 기질이나 습관처럼 되어버린 자는 항상 다투고 죄악을 행하게 마련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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