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2): 솔로몬의 잠언(2) (16-22장) |
잠언 10-22장에는 솔로몬이 쓴 375개의 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분은 크게 두 부분(10-15장과 16-22장)으로 나눌 수 있다. 10-15장은 지혜 있는 자(의인)와 미련한 자(악인)의 삶을 대조하고 있고, 16장-22:16은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첫 번째 부분(10-15장)을 생각해 보았다. 이 번 주에는 지난 주에 이어서 두 번째 부분(16-22장)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B. "의로운 삶을 찬양함"(16-22장) 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그러나 가끔 뒷부분이 앞부분을 반복해 주는 "동의어적 병행절"도 등장한다. 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 대조나 비교를 통한 표현법 예)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또 사용되는 다른 비교법은 ".......같고 .......같으니라"는 표현이 있다. 예)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 직설법으로 표현된 격언들(경험으로부터 나온 통찰들을 간략히 요약한 것들) 예)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1. 여호와 하나님 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경영'(마아르)은 '제어한다', '다스린다'는 뜻이며, '마음의 경영'은 우리가 하려는 계획이나 일을 말한다. 사람은 자기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자기가 하려는 일을 계획하고 조정하지만, 그가 한 말(계획)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있다. '말의 응답'(문자적으로는 '혀의 응답')은 그가 가진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로 전달한다. 그러나 그 계획이 성사되는 것은 여호와께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할 때에 계획하고 열심히 노력한 후에는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성취되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주셨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 이스라엘에게 있어 '제비'는 하나님의 신탁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이 방법은 모세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 시대의 기업 분배 때에 사용되었으며, 신약의 초대 교회에서도 행해졌다(민 26:55, 수 18:10, 삼상 10:20, 21, 행 1:26).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 제비뽑기를 했다. 그들은 사람의 손으로 제비를 뽑지만 그 일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었다. '일의 작정'(미쉬파트)은 '법률적인 판결', '법적 선언'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되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판결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17:3)....."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 '맡긴다'(골)는 말은 '굴리다', '던지다'는 말로서 이 말은 '전폭적인 의뢰와 위탁'을 의미한다(시 22:8;37:5).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던져버리고(의지하고)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벧전 5:7).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가 행한 모든 일의 결과는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신의 한 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볼 때에는 자기 뜻으로 행동한 것 같아도 이미 그 일은 여호와의 섭리와 계획 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구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7:4)."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각자 고유한 목적과 용도를 위해서 만드셨다(for his own ends). 모든 만물과 모든 상황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Deiitzsch). 하나님께서는 악인조차도 악한 날을 위해 적당하게 만드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완고한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잘 드러낼 수 있었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0-31)." 사람이 아무리 '지혜'와 '명철'과 '모략'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 나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말을 수입했으며 주로 전쟁용으로 사용했다(출 14:9; 삿 5:22; 사 43:17; 나 3:2). 그리고 이 때에는 말의 수효는 군사력을 좌우될 만큼 중요한 군사 장비였다. 사람들은 전쟁을 위해 마병을 예비하고 군사들을 훈련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시20: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말의 수효를 제한하도록 명령하시기도 하셨다(신 17:16). 그러나 여기서 '말'을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궁극적 성공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시 2 0:7; 33:17).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16:11)." 공평한 간칭(펠레스: 무게를 달 때 쓰는 저울)과 '명칭'(모젠: 두 개의 접시가 달린 '저울'(balance)), 그리고 주머니 속에 있는 무게를 다는 추돌들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 당시에는 물건의 무게를 달 때에 추를 주머니 속에 넣어서 무게를 측량하였다(신 25:13, 미 6:11).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사회에서도 상거래를 할 때에 저울이나 추의 무게를 속이는 비도덕적인 상거래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저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상거래의 모든 영역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경제 활동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정직하고 공정한 거래를 해야만 한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을 얻느니라."(18:10) '여호와의 이름'이란 말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이 말은 잠언에서 이 절에서만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고 끝까지 의를 지키며 악인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견고한 망대와 같은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악한 원수들은 큰 힘과 권세를 가지고 힘없는 의인들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때에도 의인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처벌하시고, 의를 지키는 의인들을 높여주신다. 다른 모든 것은 환난 때에 의인을 지켜주지 못하지만 하나님만은 그들을 완전히 지켜주신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16:8)....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19:1)." 가난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은 부유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보다 낫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설사 가난해지는 일이 있다고 해도 신의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윤택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미련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17:13) 남에게 도움을 받고 나중에 그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나발은 다윗의 은혜를 입은 후에 다윗이 도움을 거절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인정할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장하면서 그 죄를 자신들과 자신의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요구했다(마 27:25). 그리고 이로 인해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유대 나라는 로마 나라에 정복되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피를 흘렸으며, 2000년 가까이 나라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행위까지도 선으로 갚음으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마 5:39, 롬 12:17, 살전 5:15, 벧전 3:9).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길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21:12)." 어떤 학자는 '의로우신 자'(차디크)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 즉 재판관 혹은 통치자로 본다(Greenstone). 그는 이 구절이 하나님에 관하여 악인을 감찰하거나 환난에 몰아넣는 분으로 직접 묘사하고 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의로우신 자'를 하나님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이러한 구절이 잠언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욥 6:10; 34:17; 사 40:25; 합 3:3 등).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인을 감찰하시고, 반드시 때가 되면 그를 환난에 넣어 징계를 받게 하신다. "너는 악을 갚겠다 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0:22)." 성도들은 악인을 자기 손으로 처벌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공정하게 악을 심판하시고 보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인에게 분노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기보다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또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고 그 악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악인들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이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를 기쁘게 한다(21:3)...."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21:27)." 의와 공평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다(창 18:19; 삼하 8:15; 욥 37:23; 사 56:1 등). 이 말은 본문에서 생활 가운데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보다 순종을 더 원하신다. 왜냐하면 정직한 삶이 없는 종교 행위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잠 15:8; 삼상 15:22; 시 40:6-8; 사 1:11-17 등). 악한 뜻은 지은 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나, 또는 다른 죄를 짓기 위해서 외면적으로는 경건한 척하며 하나님을 달래려는 망령된 태도를 말한다. 이 같은 의도로 드리는 재물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종교적 뇌물과 다름없는 악한 일이다. 하나님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제물을 미워하신다.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21:18)." '대속'('코페르')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죄수를 방면(放免)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말한다. 의인은 예비된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얻지만,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악인은 의인의 형통을 위해 이용되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을 포로의 신분에서 해방시키는 공헌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징벌을 받고 말았던 고레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사 44:28 참조).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18:5-7)."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은 서로 손을 잡아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손을 잡아도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받는다. '인자와 진리'(3:3 참조)는 하나님 사랑과 긍휼, 그리고 신실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 길은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길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악에서 떠나게 하신다. '악에서 떠난다'(수르)는 말은 '악을 떠나고, 악을 쫓아버린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지나간 죄를 버리고 성령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까지도 우리와 화목하게 만들어 주신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8:18-19)." 교만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거만한 마음은 넘어지게 하는 길잡이(안내자)이다. 역사 이래로 교만하고 거만한 자는 반드시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풍요롭고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만한 자들과는 가깝게 하지 말아야 하며, 재물이 부족하고 가난하게 살아도 겸손한 자들과 동행하며 마음을 낮추는 것이 더욱 복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겸손한 자'(아나임)는 '가난한 자'란 뜻으로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을 가리키며, '낮춘다'(솨팔)는 말은 '내리누르다', '가라앉히다'란 뜻으로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여 마음을 겸손하고 평온하게 가라앉히는 것을 말한다. 고통받고 천대받는 자들과 함께 하여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은 교만한 자와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많은 재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3) 용광로가 광석을 녹여서 순수한 은과 금을 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고난이나 질병과 같은 시련을 통해 사람의 인격을 겸손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을 갖추게 하신다(16:2, 욥 23:10, 사 1:25, 렘 12:13, 말 3:2, 벧전 1:7, 계3:18).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6:25)....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1:2)." '자기 보기에는'(베에나: 자신의 눈에는)은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와 판단에 따르면'이란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옳은 것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우리의 숨은 죄와 동기가 모두 드러난다. '심령'(루아흐)은 '행위'와 대조되는 말로 어떤 행동의 근거가 되는 내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감찰한다'(타칸)는 말은 '무게를 달다', '공평하게 평가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 뿐 아니라 우리의 깊은 내면까지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단은 가장 정확하고 또 공정하다. 인간은 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망의 길을 보고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처리할 때에 우리의 지식이나 판단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평가하신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 따위를 보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만 하나님은 그 행위의 동기를 평가하신다. 70인역은 본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의인인 것 같으나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20:27)." '영혼'('네솨마')은 '바람', '호흡', '영혼' 등의 뜻을 가진 말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으신 생기, 영혼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2:7). 이런 맥락에서 볼 때에 '사람의 영혼'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양심'이나 '종교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생령'으로 지음 받았다(고전 15:45). 그리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에 대한 등불이 살아있다. 2.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가. 지혜의 길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16:16-17)." '지혜'와 '명철'을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 '명철'은 '지성', '분별력', '통찰력' 등을 말하며, '지혜'는 사물의 궁극적 실상을 간파하는 능력,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3:14, 8:10 참조). 우리는 물질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에게 있어서 대로와 같다. 여기서 '대로'(메실라)는 '(특별하게 잘 포장된) 넓은 길'을 가리킨다.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올바르게 하는 사람은 그 삶이 형통하게 된다(15:19 참조). 1)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 좋은 것을 얻음 2) 마음이 지혜롭고 입이 선한 자: 남에게 유익을 줌. 3) 명철한 자는 생명을 얻고 미련한 자는 징계를 받는다. 4)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말을 하고 남에게 지식을 더해준다. 5) 선한 말: 마음과 몸에 건강을 준다.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17:2) 지혜를 가진 사람은 명예와 재물과 생명을 얻는다. 비록 종의 신분에 있는 자라고 해도 지혜로운 자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수치를 끼치는 미련한 아들을 주관하게 된다. 그리고 미련한 아들이 재물을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지혜로운 종은 그 아들과 함께 그 주인의 유산을 나눌 수 있게 된다(창 15:3, 삼하 16:1-4, 19:24-30).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18:15) 미련한 자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명철한 자는 마음으로 지혜를 구하고 사모하기 지혜로운 자는 타인이 하는 지혜로운 교훈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명철한 자는 마음으로 참된 교훈과 지식을 얻게 되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얻어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19:8)." "지혜"는 히브리어로 "심장"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 말은 '건전한 판단이나 상식'을 의미한다. 청렴결백한 마음을 추구하고 명철에 마음을 집착하는 것은 참된 평안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여기서 '지혜'와 '명철', 그리고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과 '복을 얻는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 영혼을 지키나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는 죽으리라(19:1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19:23)."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지키는 사람은 그의 영혼을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지키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 행실을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마침내 사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계명(미츠와)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과 사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힘써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을 얻는 지름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죄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으며, 끝까지 의를 지켜 결국 이세상과 내세에서 축복을 받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내느니라(20:5)." 사람의 마음속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깊은 물과 같아서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과 그가 어떤 일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사리분별이 뛰어나다.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21:11)." '어리석은 자'는 너무 단순하여 분별력이 없어서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숙되지 않아서 훈계를 받아들여 소화하지를 못하고, 악인에게 징벌이 임하는 것을 목격하고서야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매가 아닌 '가르침'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가르침'이란 우리를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주는 지혜나 통찰력을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결코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훈계나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사람들이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21:20)." 지혜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다. '귀한 보배와 기름'(오차르 테흐마드 와쉐멘) 은 미래를 위하여 예비한 재물과 귀한 교훈들을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미래를 보는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며, 귀한 것을 분별할 줄 알기 때문에 값진 것들을 모으고 저축해둔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이러한 보배들의 귀중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헐값에 보배를 팔아버린다. '삼켜 버린다'는 말은 물질이나 양식을 소비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21:21)." 영적 미덕은 보상을 받는다. 의와 인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의 축복을 받게 하는 진실한 삶의 양식(life style)을 말한다. 본문에는 '의'('체다카')란 말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온다. 비평적인 학자들은 이 말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을 보고 뒤에 나오는 의는 필사자가 필사를 하다가 실수로 덧붙인 말이라고 생각한다(Whybray). 그러나 이 같은 반복은 잠어서 기자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첫 번째 의는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행위를 말하고, 두 번째 의는 그러한 생활을 한 결과로 주어지는 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6:33 참조).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 그 성이 굳게 의뢰하는 것을 파한다(21:22)." 본문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많은 수의 군대가 지키고 있는 견고한 성을 많은 군사들이 기어올라가 성을 정복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본절이 강조하는 점은 성벽을 기어오른 군사들의 용맹이 아니라 그 성을 정복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 전략가의 지혜이다. 이 구절은 이러한 군사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힘보다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며, 더 위대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21:29)." 악인은 자기의 얼굴을 굳게 한다. '굳게 한다'('헤에즈')는 말은 '표정을 엄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겉치레로 꾸민다', '속인다'는 뜻이다. 악인은 자기의 악한 속마음을 드러내면 안되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의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의인은 그 행동을 삼간다. '행위를 삼간다'(야킨 다르코)는 말은 '그 행위를 숙고한다'는 말이며, 이것은 행동 할 때에 신중히 생각하여 결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속은 악하면서도 겉으로만 경건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신중하고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앞날을 예측하고 미리 재난에 대해 대비한다. 본문에서 사용된 '본다'(라아)는 말은 미래에 있을 위험이나 함정 혹은 유혹 따위를 미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슬기로운 자는 매사에 사려가 깊으며,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재앙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일을 진행하다가 해를 받게 된다. '어리석은 자들'은 앞을 예견하지 못하고 사려 깊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잠언서 저자는 슬기로운 자는 단수를 사용하고 미련한 자들은 복수를 사용했다. 이것은 아마도 세상에 슬기로운 자가 적고 미련한 자가 많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련한 자들은 미래를 대비하지 않기 때문에 해를 만나고 위험을 자초하게 되며 생명을 잃기까지 한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22:9)." 선한 눈을 가진 사람은 복을 받는다. 그는 인색한 자와는 달리 자선을 좋아하고 사회적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가난한 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욕심이 많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오히려 패망하게 되지만, 남을 위해 베풀고 나누어주는 사람은 더 큰 자기 성취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신 15:9,10; 고후 9:7,8 참조).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17:12) 미련한 자가 끼치는 악 영향은 새끼를 빼앗겨 극도로 사나운 암콤이 주는 위험보다(삼하 17:8, 호 13:8) 더 잔인하며 파괴적이다. 예수를 죽이기 위한 헤롯의 유아 학살(마 2:16),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를 해하고자 했던 무리들(눅 6:11)은 이러한 자들에 속한다. 그들이 저질렀던 행위들은 무지와 미련에서 비롯됐기에 더욱 위험하고 잔인했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함은 어찜인고..."(17:16) 미련한 자는 무지하여 도저히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 미련한 자는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것을 재물로 사려고 한다. 미련한 자는 부단한 노력과 마음을 열어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고, 돈으로 지혜를 사려고 흥정하려 하거나, 혹은 수업료를 지불하려고 함으로 스스로 지혜를 얻으려고 열심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쓴다.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17:18)....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17:21)....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17:25)." (17:18)은 (잠 6:1-5)를 참고할 것. '미련'(케실: 지적, 도덕적, 영적인 어리석음)한 자를 낳은 부모는 일평생 걱정과 근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련'(나발: 종교적인 어리석음)한 자는 아버지의 충고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어리석게 행동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서 재물이나 명예보다 지혜롭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하시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17:24) 참된 지혜는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들이 사는 평범한 곳에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바로 옆에 있는 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파랑새란 소설을 보면 주인공은 희망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닌다. 그러나 그는 파랑새를 발견하지 못한다.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그는 집 처마 밑에서 그 파랑새를 발견한다. 이것은 참된 진리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리에게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18:1) '스스로 분리되는 자'(니프라드)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공동체에 불만을 품고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자를 말한다. '니프라드'는 반사회적인 충동을 즐기며 건전한 경책이나 참 지혜를 거부하는 파괴적이며 분리주의 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기 주장을 앞세우고 공동체의 유익을 고려하지 않는다(17:14, 20:3).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18:9) '게을리 하는 자'는 가문을 멸망시키는 자와 동류이다. 이 말은 게으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조상들과 후손들에게까지 수치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말한다. '패가하는 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즐기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고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도 탕진하며, 불법이나 요행을 통해서 재물을 모으려 한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 하느니라.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19:2-3)." 사도 바울은 구원받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알고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이러한 무지한 바울의 소원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강이 무지한 자의 소원은 선하지 못하며 오히려 심각한 해악을 가져온다. 성급하고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항상 실수하고 후회하기 마련이다. 발이 급한 사람은 올바른 판단 없이 성급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분명하게 하고 서두르지 말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그 목표를 향해 가야한다. 또한 우리는 일을 이룰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위급할수록 더욱 더 침착하게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미련한 사람들은 미련하게 일을 하고 나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우리의 무지함과 성급함은 우리를 실패하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실패가 자기의 무지와 미련함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은 잘 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망하게 했다고 원망한다. 우리가 이런 일을 피하려면 말씀에 비추어 신중히 판단하고 일을 결정해야 한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19:25).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19:29)." 거만한 자는 지혜의 교사에게 배우기를 거부하는 자를 말한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인간상(거만한 자: 완고하게 마음이 닫힌 사람; 어리석은 자: 지혜가 없는 자; 명철한 자: 선의의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 나타나고 있다. 거만한 자는 매질을 당해도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징계를 보고 어리석은 자가 자극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명철한 자는 진지하게 타이르는 말만 들어도 곧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개선하려고 애쓴다(McKane). '심판'('쉐파팀')은 일반 법정에서 하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3:34). 거만한 자는 끝까지 지혜의 교훈을 거부하다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고,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는 자는 그의 리면한 행동으로 인해 심한 매질을 당하게 될 것이다.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21: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려 깊음 혹은 지혜의 통찰력을 멸시하고 훈계 받기를 거부하며, 진리의 가르침을 좇아 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결국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 살다가 파멸로 나아가게 된다. '사망의 회중에 거한다'(비크할 레파임 야누아흐)는 말은 '응달(그림자)의 무리 가운데 안식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안식'은 평안히 쉬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응달'(그림자)은 죽음을 상징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Allen P.Ross). 이 구절은 명처의 길(말씀)을 떠난 자는 생명을 얻지 못하고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한다(22:5)." '패역한 자'('에케쉬')는 '완고한 자'를 말한다. '완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은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가시와 올무'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돌연스런 위험과 역경을 의미한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거역하는 자들은 잠시 순탄한 듯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파멸로 몰고 가는 각양의 함정들에 빠지게 된다.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16:27-28)." 불량한 자는 악한 일을 도모하기 때문에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다. 악을 꾀하는 자들은 그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처럼 타인을 파멸시킨다. 그리고 그 교결과로 자신도 해를 입게 된다(26:23, 욥 31:12, 겔 21:3, 약 3:5).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교만한 자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의 생각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싸움을 일으키게 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친한 벗을 이간질한다. '말장이'(니르간)는 '수다장이', '중상자', '남의 말하는 자'란 뜻이다(18:8;26:20, 22).(6:19 참조).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29).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30)." 폭력을 쓰는 악한 자들은 이웃을 유혹해서 악한 길로 인도한다. '눈을 감는 자'는 악한 궤계를 생각해내기 위해 눈을 감고 몰입한 자를 말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입술을 깨문다는 말로서 악한 궤계를 실행할 것을 다짐하는 자를 말한다. 무력과 폭력을 쓰고, 눈을 감고 악한 일을 도모하며, 그 일을 행하려고 입술을 깨무는 사람들은 이웃을 악으로 인도하고, 자신도 악한 길로 가게된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일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한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주님과 그 말씀을 묵상하여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한다(마 5:28). "악한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17:11)." 악한 자는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주인의 권한을 넘어서 주인의 것을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진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 소식을 듣게 되면 무자비한 사자를 보내어 그를 처벌하게 된다.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군주 사회에서 반역 행위는 가장 악한 죄였기 때문에 왕이 보낸 사신에 의해 잔혹한 죽임을 당했다. 또한 날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보낸 폭풍이나 질병,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징계를 받게 된다(시 78:49, 계8:6).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17:20).....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17:23)." 마음이 간사한 자는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가 그에게 임한다. 이러한 사람은 그 혀로 그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악한 말들을 쏟아내어 이웃을 속이고 해친다(8:13, 10:31). 이러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갑자기 위급한 재난을 당하게 된다.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그릇되게 한다. '사람의 품'은 의복의 안쪽을 암시하는 것으로(Delitzsch) 은밀하게 뇌물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공의로워야 할 재판정에서 뇌물로 인해 판결이 불공정하게 내려지는 일은 하나님이 가장 혐오스러워 하시는 일 중의 하나이다(8, 15).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18:3) 정직하고 공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명예와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러나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사람은 멸시를 받게 되며, 부끄러움과 능욕을 받게된다. 그러므로 멸시는 악한 자의 뒤를 따라 다니고, 부끄러운 일을 하는 사람은 남에게 모욕을 받게 된다.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21:7)." 악인의 폭력은 자기를 멸망으로 이끈다. '소멸한다'('예고림')는 말은 '질질 끌고 간다'는 말인데, 이는 악인의 폭력적인 행동은 멸망으로 가기 싫어하는 자신을 강제로 멸명을 향해 끌고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옳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악을 지속적으로 행하기를 선택했던, 그들은 자신들도 강제로 그 책임(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죄를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21: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진다. '죄를 범한 자'('와자르')는 성경에서 이곳에만 사용된 말로서, '거만한'(Gratz), '비열한', '그릇된'(Barth) 등의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죄를 범한', '유죄의'로 번역한다. 그 근거는 이 말과 동의어인 '짐을 싣다' 혹은 '죄를 쌓아놓은' 등을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에 두고 있다. 죄를 지은 자의 길은 공의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심히 구부러지고 회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결한자의 길은 누가 보아도 분명하고 투명할 정도로 곧고 깨끗하다.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21:10)." 악한 사람은 마음으로 남이 재앙 당하기를 원한다. '재앙을 원한다'는 말은 원래 '악을 원한다'는 말이지만 하반절을 고려하여 한글 성경이 '남의 재앙'으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원한다'는 말은 '식욕'(신 12:20)이나 '기타 다른 욕망'(삼하 3:21)과 관계되어 사용되는데, 주로 '열망하다'라는 말로 번역된다. 이 구절은 인간 부패의 중요한 속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타락한 마음을 가진 인간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애쓰되 그것을 열망할 정도로 애쓴다. 이웃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악을 애써 도모하는 자는 하나님께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게 된다. '재앙'('아웬')은 '헛됨', '고통', '악'을 의미하는 말이다. 악을 심는 자는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거나 고통과 악을 그 대가로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한다'는 말은 '분노의 막대기가 넘어진다'는 말이네, 이 말은 무죄한자를 해치려고 했던 분노와 기세가 쓰러질 것을 말한다. 억울하게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압제하던 악인들을 멸망시킬 것임을 알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로 견뎌야 한다. 3. 왕(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으면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않으리라(16: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실 때에 율법 책을 곁에 두고 날마다 그것을 읽고 그 말씀을 따라 나라를 통치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케셈)이 왕의 입에 있다는 것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의 원리대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그는 공의로운 재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 하나님께 세움을 받은 왕은 악을 미워하고 멀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왕권은 공의가 유지될 때에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왕권이 오용될 때에는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하셨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왕권을 박탈하셨다(삼상 13:14). 하나님께 세움을 받은 왕은 의로운 신하들이 진언하는 공의롭고 합당한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언은 왕으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과 통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8:6;, 2:11). "왕의 진노는 살육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느니라(16:14).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 같으니라(16:15)." 왕은 진노하면 엄중한 형벌을 내린다(전 8:4).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왕의 진노와 형벌을 가라앉힌다. '쉬게 한다'(예카프레나)는 말은 '덮는다'는 말인데 이 말은 '덮어서 드러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왕의 분노를 적절하게 대응할 줄 알며 그 분노를 가라앉힌다.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다. '희색'(베오르 페네)은 '얼굴의 빛'이란 뜻으로서 왕의 희색이란 말은 왕의 내적 상태가 평화롭고 만족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왕은 만족할 때에 관대한 은혜를 백성들과 산하들에게 내린다. 이러한 은혜는 마치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아서 백성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준다. '늦은 비'는 팔레스틴에서 3,4월경에 내리는 비로(렘 3:3;5:24) 추수기에 곡식을 잘 여물게 한다(시 72:6).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19:12).....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20:2)....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20:28)." 왕의 말은 권능이 있기 때문에 그의 분노는 마치 사자의 분노와 같이 사람들을 떨게 만든다. 또한 왕은 은혜를 내릴 권한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귀 영화를 내리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 면을 본문은 '왕의 노함'과 '그의 은택'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은 사람들을 향해서 쉽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또한 백성들은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왕은 인자와 진리로 행할 때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이 말은 왕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인자와 진리'란 말은 여호와의 언약에 대해 변함없는 순종을 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쓰였다(삼하 7:11-16). 이러한 인자와 진리는 왕권과 사회의 안전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각자 자기 인자함을 자랑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나랴!(20:6)." 자신의 충성됨과 인자함을 내세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실제로 반석같이 굳은 충성심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매우 힘이 든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충성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참된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20:8)....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20:26)." 의로운 통치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대행하는 자신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정을 받게 된다. 권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공의를 행하여 악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사회의 모든 악을 근절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정부도 이런 통치를 실현시켰던 적은 없었다. 지혜로운 왕이 공의에 따라 악을 찾아내어 체벌하는 과정은 마치 키질 및 탈곡하는 일과도 같다(사 28:27, 28; 암 1:3 참조). 특히 '키질한다'('자라')는 말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른다'(분리해 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국가에서 공의가 왜곡되고 불법이 자행되면 백성들의 원성과 불만이 누적된다. 특히 고대의 군주체제에서는 왕의 공의 집행 능력이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타작하는 바퀴'란 소가 끄는 탈곡기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서너 개의 바퀴가 달려 있었다(Keil & Delitzsch).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21:1)"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수로처럼 자신의 뜻대로 왕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왕의 결정은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결정이 여호와의 통제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조정한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일을 알 때에 왕은 자기의 행동을 조심할 수 있으며, 백성들도 왕에게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것은 '마음'이 수로에 비유되고 있는 점이다. 이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농부가 원하는 대로 수로를 통하여 밭에 물을 넣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왕을 다루신다는 것이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인 혹은 중개자에 불과할 뿐이다(Whybray). 4. 절제와 관용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자)는 용맹한 군사보다도 더 강한 자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에 동요 없이 냉철한 판단력과 평안을 유지한다. 우리는 남과 싸워 이기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절제의 열매를 달라고 성령께 기도해야 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 영광이라(19:11). 맹렬히 노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그를 건져주면 다시 건짐을 받으리라(19:19)."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심각한 해(害)를 입혔을 때 우리는 쉽게 분노하기 쉽다. 미련한 사람은 이런 경우 자기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사람은 실수가 잦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분노의 검정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미련한 사람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후에 칭찬과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잘 절제된 감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술이며, 너그러운 관용은 우리를 명예스럽게 만드는 길이다(마 18:21,35, 빌 4:5).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19:22)." 70인역은 이 구절을 '동정심은 한 사람의 열매요, 의로운 가난한 자는 불성실한 부자보다 더 나으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이 구절은 너그러운 사랑과 인자가 재산이나 부보다 더 낫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자함('헤세드')은 '끊임없는 사람', '변치 않는 사랑', '인자하심', '성실함', '충성됨'을 의미하며, 특히 언약의 주님과 그의 백성 간의 친밀한 유대 관계를 나타내는 종교적 용어이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22:2)."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함께 만난다. 여호와는 그들 모두를 지으신 분이시다'. 여기서 '함께 만난다'는 말의 의미가 애매하여 해석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2절과 같은 혼합적 평행구인 경우 그 핵심은 보통 하반절에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며, 그 이유는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NIV는 이 구절을 '부자나 빈자나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어 일치한다: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지으신 분이다'라고 번역하여 위의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지지해주고 있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그 유례가 깊다. 성경에는 가난한 자의 게으름을 나무라는 부분도 있지만(10:15), 부자에 대한 경고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마 19:23). 5. 가정 가. 노인(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31)."(4:9;20:29 참조)....."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20:29)." 늙은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나름대로 장점과 영광이 있다. 오늘날에는 늙은이가 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향이 허다하지만, 이 당시 사회에서 노인은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노인은 의로운 삶을 살 때에 진정한 연륜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용기와 힘은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통제될 때에 비로소 그의 영광이 될 수 있다(Allen P. Ross). 나. 조상과 후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17:6) '손자'(베네 바님)는 문자적으로 '아들들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후손들'을 말하고, '노인'(제케님)은 '조상들'을 의미한다. 자손들은 그 가문의 왕성함과 지속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조상들에게 기쁨과 영광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부모(또는 조상)는 자손들에게 재산과 명예를 보장하고 강화시켜 준다. 특히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혈통을 중요시하는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 맺어지는 선조와 후손의 연대 의식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성도들은 후손들을 복음 안에서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하며, 믿음의 선조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들의 모범을 따를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20:7)," 성경에서 '완전'이라는 용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에는 '성숙', '정직'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창 6:9; 시 26:1; 고전 2:6).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하신 분이지만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완전히 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의인'('차디크')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려고 하는 신앙 공동체일원을 의미한다. 잠언 기자는 이러한 후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모의 생활 태도가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출 20:4-6), 부모가 의로울 때 그 자손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기 때문이다(Allen P. Ross). 조상의 삶이 자손에게 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깊이 뿌리 박힌 사상이다(창 3:15; 출 20:5,6; 사 14:20). 다. 우정과 형제(17:17)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관계가 쉽게 끊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도 그 관계가 유지되며 서로 도와주고 서로 의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친구를 가진 사람은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형제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외면을 하는 순간에도 형제들은 서로 돕고 형제의 어려움을 자기 어려움처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피와 살을 가진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우정과 형제의 사랑이 많이 식어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우정과 형제간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힘써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을 가진 형제들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라. 아내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18:22) '아내'(이솨)는 문자적으로는 '아내'를 말하지만 본절의 '이솨'는 명철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의미한다(31:10-31). 지혜롭고 덕스런 아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며(19:!4),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의 표징이다(A.P.Ross).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 상속하고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19:14)." 우리는 앞에서 다투는 아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슬기롭고 신중한 아내를 얻을 수 있는가? 잠언서 기자는 이러한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재물을 상속받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슬기로운 아내'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좋은 결혼을 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 점언서는 현숙한 아내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으로 결론을 맺을 정도로(31:10 이하) 이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온전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아내의 역할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마. 가정의 파괴 "미련한 아들은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19:13)." 미련함과 다툼은 가정을 파괴시키는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다. 가정의 미래는 지혜로운 자녀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미련한 아들('미련함의 아들')을 둔 아버지는 더 이상 그 가문이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에게는 '대재앙'과도 같다. 또한 가정은 덕스러운 아내를 통해서 아름답게 가꾸어진다. 그러므로 남편과 항상 다투기를 좋아하는 아내를 둔 남편은 가정을 근심 속으로 몰아넣는다. 잠언 기자는 이런 아내를 지붕에서 새어나와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빗물이 새어 지붕과 벽을 버리게 하듯이 다투는 아내는 가정을 무너뜨리고 근심으로 이끈다. 바. 자녀 교육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19:18)." 18절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엄한 교육이 자녀를 올바르게 만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부모는 자녀를 지혜와 사랑으로 가르쳐야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그릇된 일을 책망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고대의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의 생사 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성경은 자식의 생사 문제를 성읍 장로들을 통해 결정하도록 위임함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방지했다(신 21:!8-21). 부모는 자식을 책망하되 무분별한 책망이 아니라 자식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20).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27)." 70인역은 이를 자녀에게 주는 교훈으로 풀이했다. 자녀들이 교훈을 버리면 그들은 결국 불순종과 파멸에 이르게 된다. NIV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내 아들아 교훈에 귀기울이기를 중단하라, 그러면 너는 잡다한 지식에서 벗어나리라'.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20:11)." 이 구절은 주님께서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하신 말씀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말보다 그 사람의 자질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은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내용으로도 이해된다. 자녀의 올바른 행실에 대해서 부모는 계속 장려하고 칭찬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의 그릇된 행실에 대해서는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훈계나 징책을 통해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20:30)....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버리리라(22:15).". 20장 30절은 육체적 체벌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체벌은 자녀를 깨우치게 만들고 악한 습관을 교정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장 6절의 핵심을 찾기 위해 먼저 살펴볼 단어는 '가르치라'('하노크')는 말이다. 이 말은 '훈련시키다'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일생을 바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라는 말은 '일생을 바치기 위하여 훈련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아이를 훈련하는 것이 그 목적인데 이 것은 하나님께 그 아이의 일생을 바치는 일과 관계가 있다. 자녀 교육을 시작 할 나이는 탈무드는 16-24세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훨씬 이른 때부터 자녀의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나아르)는 일반적으로 '젖먹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3-7세의 시기가 개인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형성되는 때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핵심적인 단어는 '길'인데 '마땅히 행할 길을'이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 아이의 길을 따라'라는 말이다. 이 '길'에 관한 최근의 해석 경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천 여년 전에 동일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Saadia). 교육에 있어 피교육자의 자질이나 성격들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 해석은 지지될 만하다. 피교육자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은 그의 이기적 욕심을 배려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능력, 잠재력, 본성, 기질 따위를 잘 고려하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녀들이 그 특성에 맞도록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훈련시켜주어야 한다. 또한 22장 15절은 아이들 안에 있는 미련한 것들이 징계를 통해 교정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미련하다는 말은 발달 심리적으로 볼 때 악습에 빠지기 쉬운 아이들의 기질, 제 마음대로 하려는 성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것들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이 미련한 것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부모는 어릴 때부터 엄한 징계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년이 되면 이미 행동 양식이 굳어져 버려 변화와 교정의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진정한 교육은 피교육자의 잠재력을 계발시켜 주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어리석음을 끊어내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Whybray). 사. 부모공경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수치와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라(19:26)....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20:20)." 자기 부모를 구박하는 배은 망덕한 사람은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상속받을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서 부친의 토지를 인수받으려고 부모를 쫓아내는 자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되고,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율법에서는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고 있다(출 21:17; 레 20:9). 그러나 여기서는 율법 조항에 명시된 어떤 형 집행에 대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서 야기될 끔찍한 결과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모를 구타하고 구박하는 자녀는 영광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30:17). 그는 캄캄한 중에 겨우 남아 있던 등불마저도 꺼져버리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6. 화목와 화평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1:9).....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1:19)." 가난하게 살아도 서로 사랑하며 화목한 집이 외형적으로 요란하고 온갖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살면서 싸우며 사는 것보다 낫다(15:17). '육선'은 원래 '희생 제물'이란 말로서 감사제사나 화목 제사를 드리고 남은 재물을 의미한다(레 7:16, 신 12:11-12,, 삼상 20:6). 서로 다투며 사는 사람은 제단에 아무리 많은 화목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려도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며 화평을 실천하는 가정은 마른 떡 한 개를 제단에 드려도 기쁘게 열납될 수 있다(신 12:15, 사 34:6, 겔 39:24-30).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먹고 마시는 것(외형적인 것)보다 의와 희락과 평강(내면적인 것)에 있다. 다투며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차리라 낫다. '광야'는 일반적으로 쫓기는 자가 도망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9절의 반복이기 때문에 이 말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호전적인 아내와는 이혼하여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권하는 이혼 권고 구절로 해석하지 말고, 미혼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항상 평안과 화목이 넘치는 가정을 꾸미기 원하는 미혼자는 그 상대를 선택함에 있어서 늘 호전적이고 성내는 배우자를 맞지 않도록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신부를 고르는 예비 신랑과 신랑을 고르는 예비 신부가 반드시 받아야 할 교훈이다.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17:14) 댐에서 새는 물은 처음에는 조금씩 새지만 얼마 안 있어서 그 틈이 커져서 모든 댐을 무너뜨리게 만든다. 이와 같이 다툼도 처음에는 작은 일로 인해 시작되지만 그것이 계속되면 그 결과는 크나큰 파국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서 그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는 법적인 소송을 암시한다. 우리의 싸움은 법적인 소송으로 가기 전에 중단해야 한다. 일단 소송이 시작되면 서로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고 그 결과 큰 수치와 손해를 당하기 때문이(고전 6:1-6).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17: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쉽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29:22, 약 1:20).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스스로의 파멸하게 된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싸우기 위해서 성을 쌓는 자나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인간 관계를 멀리하는 자, 또는 자기를 높이는 거만한 자를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시비가 붙게 되기 때문에 스스로 파괴와 파멸을 부르게 된다. '움막'(베이트 하베르)은 '동무의 방'이란 말인데 대부분의 역본들은 '지붕 꼭대기의 한 구석'으로 번역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평평한 지붕 한 귀퉁이에 손님을 위한 침실을 자그마하게 짓는 것이 보통인데 아마 이것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으로 보인다(왕상 17:19; 왕하 4:10).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18:19)....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20:3)." 18장 19절의 '다툼'(미드와님)은 18절의 '다툼'과 동일한 것으로 법정 소송을 의미한다. 이것은 형제 사이의 불화로 인해 생겨난 일이 법정 소송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송의 문제는 서로간에 자기의 입장을 주장하기 때문에 해결되기가 매우 어렵다. 친밀한 형제 사이에서 법정으로 갈 정도까지 심각하게 형성된 반목은 싸워서 견고한 성을 얻는 일보다 더 어렵다. 이러한 경우 형제들은 그 마음을 서로를 향해 마치 산성의 문을 가로지른 문빗장과 같이 굳게 닫기 때문에 그 마음의 문을 열기가 매우 어렵다. 격렬한 논쟁이나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을 쓰는 것이 그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행위란 점을 말해 주다(17:14, 18:1 참조). 극한 다툼을 야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제하거나 또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능력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제심이 있고 온화한 사람이라면, 그런 다툼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McKane). 7. 경제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해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16:26)." '식욕'(네페쉬)은 '영혼', '호흡', '욕구' 등의 뜻인데, 여기서는 이 말이 종교적, 도덕적인 것과 대조되는 본능적인 욕구를 의미하고 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독촉한다'('아카프')는 말은 '무거운 짐을 싣다', '강요하다', '압박하다'란 뜻으로서 먹고사는 문제가 일을 하도록 압박하고 구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람들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노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결과로 주신 것을 기뻐할 수 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18:11).....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18:23)." 의인들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기가 가진 재물을 피난처로 삼는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재물을 높은 성벽으로 생각하여 재물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환난에서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에서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여러 가지 유익과 편리함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재물을 의지하게 되면 그 재물이 우상이 되어 도리어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 있다(딤전 6:10).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올바르게 사용하되 지나치게 물질에 매여서는 안된다. 18장 23절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결정된 사회적 지위가 가져다주는 비참함과 냉혹함을 나타낸다. 가난한 자는 선택의 권한이 없기 때문에 늘 자비를 구하는 탄원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부자들은 무자비하고 냉혹한 요구만을 할뿐이다. 그러나 (눅 18:10-14)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처럼 하나님은 자비를 구하는 자의 음성을 들으시며 자신의 공적이나 재물을 의지하는 자를 외면하신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19:4-7)." 부와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그를 가까이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남에게 나누어주며 살아야 한다. '너그러운 사람'(나디브')은 '관대한 사람', '고관이나 귀족'을 말한다. 아량과 권세를 가진 자에게는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은총을 구한다. 부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를 칭송하만, 그들이 부자를 찾는 것은 그가 주는 재물이나 권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비록 형제들일지라도 자기의 것을 주어야 하는 형제는 별로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라도 가난한 자를 다가와 하지 않는 다면 그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형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가난을 벗어나라는 권면과 동시에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20:10)....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20:23)....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20:14)." 여호와는 저울을 속여서 장사하는 부정직한 행위를 미워하신다. 이것은 신 25:13-16의 율법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저울추와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돌과 돌'이며 이는 이중 저울에 관해 암시한다. 그 당시에는 상거래가 주로 저울과 말로 이루어졌는데, 팔 때는 작은 말을 사용하여 적게 주고 살 때는 큰말을 주어 많이 받아서 이중적인 이(利)를 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20장 14절은 우스꽝스럽지만 상거래에서 실제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즉 사기전에는 물건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만 자기 수중에 들어오면 그것을 자랑하는 구매자의 이중적 심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바 있는 속이는 저울과 말의 교훈과 일맥 상통하는 셈이다(10절). 이러한 이중 심리는 비단 상거래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심성에 깃 들어 있는 보편적 요소이기도 하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의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20:16)." 섣불리 보증서는 일에 대한 경계는 잠언서에 여러 번 나온다(6:1,2; 11:15; 17:18; 22:26; 27:13 등). 특히 이 구절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자의 빚 보증을 선 사람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본절의 '타인'(자르)과 '외인'(나케리얌)은 각각 '(공동체 밖의)낯선 자', '행실이 나쁜 여자'를 뜻한다. 다후드(Dahood)는 후자를 '창녀'로 이해하기도 한다.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 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20:17).....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20:21).....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21:6)." 20장 17절은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쉽게 버는 것이 결국에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됨을 말하고 있다. 속임수로 혹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얻은 빵이 처음에는 맛이 좋은 듯하지만 결국 그것은 입 속에 가득 담긴 모래와 같이 해독만 끼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를 연상시키나,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모든 것에 적용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20장 21절은 (13:11)과 (15:27)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 구절은 우리들에게 성급하게 부자가 되려고 하는 부당한 행동을 경계하고 있다. '산업'('나할라')이란 말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유산'이나 '상속'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절제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섣부르게 재산을 모으려는 사람을 비난하며, 때가 되기도 전에 가족의 재산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을 향해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로스는 느닷없이 횡재한 재물이란 결코 만족감을 줄 수 없다고 이 구절을 해석한다. 그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적인 유익이 없으며 도리어 삶의 자세만 흩뜨려 놓게 된다. 또한 '속히 잡았다'는 말은 법을 어기거나 또는 정당하지 않게 재물을 취득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눅 15:12)에 언급되고 있는 탕자의 재산 분할 요구와 같은 불법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재산은 속히 낭비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21장 6절은 거짓말로 재물을 구하는 일이 죽음을 구하는 일이며, 바람에 불려 다니는 안개와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직역하하면 '거짓으로 재물을 구하는 것은 몰려가는 증기와 죽음을 추구하는 자들이다.'라고 할 수 있다. 바람에 불려 다니는 수증기는 언제 그 방향이 바뀔지 알 수 없는 변화 무쌍한 것을 말하고, 죽음을 구한다는 말은 형벌이 이미 예비된 범죄자를 의미한다. 불의한 방법으로 취한 재물은 언제 다시 잃게 될지 모르며 현재 그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은 공의로운 법에 의해 언제 처벌받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인내와 계획성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조급하게 부자가 되려는(5절) 사람이 맞게 될 운명에 관한 지적이자 그들을 향한 경고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유효 적절한 생각과 성취 가능성 있는 계획은 건전한 비판과 조언이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본절은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반절의 '전쟁하라'는 말은 상반절의 '의논하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는 '의논'과 '모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곳의 '전쟁'이란 말은 일상 생활 속에서의 악과의 투쟁이나 재판정에서의 소송 등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영(마흐쉐보트)이란 말은 '생각', '사상'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계획'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하반절의 조급한 성과의 대조를 고려해야 하므로 이 '계획'은 인내를 동반한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인내가 곁들인 '계획성'은 우리를 번영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조급하다는 말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빨리 부자가 되려는 자를 말한다(20:21; 28:20 참조).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22:7).....이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22:16)." 22장 7절은 통시대적인 교훈을 주고있다. 땅이 존재하는 한 그 위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주는 교훈이 있다면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면하라는 것이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자칫 비굴해질 수 있으며 마음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게으름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 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가운데 현실적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예외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2장 16절의 해석의 열쇠는 '이' 곧 '유익'의 소유주를 누구로 보느냐에 있다. 문법상 이 소유주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 혹은 '가난한 자 자신'의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둘 중 후자로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는 가난한 자의 유익이 되고 부자에게 주는 자는 손해를 볼 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인간의 악한 의도와 그에 따른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에 의해 역전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가난한 자, 곧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가해진 억압은 신비스럽게도 그를 승리하게 만들어주고, 부자의 축적된 재물은 부자 자신에게 몰락의 원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8. 인권 존중과 긍휼(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다. '이를 지으신 주'는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은 빈부 귀천을 막론한 모든 인생을 창조하셨고 또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을 대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만물을 잘 관리하는 일은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만물을 파괴하고 함부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다. 특히 우리는 가난한 자를 함부로 대하고 멸시하기 쉬운데 이러한 행위는 그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14:31, Toy). 또 우리들은 이웃이 재앙을 당할 때에 기뻐할 때가 많은데 이러한 자는 반드시 형벌을 받게된다. 우리가 연약한 사람을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하듯이 대하는 것처럼 재앙을 당해서 어려움에 바진 이웃도 하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타인의 가난과 멸시 당함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즐기는 자들에게 그들이 행한 것처럼 무자비한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마 5: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선행을 갚으시리라(19:17)." 여호와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친히 보상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지 말라고 하시는 동시에(소극적 행동),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해 구제를 베풀 것을 명령하셨다(17:5;22:16;28:3). 가난한 자는 구제를 받아도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을 돕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선행을 갚아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에게 더 풍족한 삶과 토지, 또는 재산 등을 허락해 주신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21:13).....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21:26)." 자비가 없는 사람은 자비를 얻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부자의 행위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적은 소자에게 베푼 것을 자신에게 베푼 것처럼 받아주시고, 소자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자기에게 베풀지 않을 것으로 간주하신다(마 25:31-46). 21장 26절은 탐욕을 가진 자와 관대하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는 의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지만 롯은 멸망하였고 아브라함은 튼 축복을 받게 되었다(창 13장). 아브람이 이러한 관대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22:1)." '명예'(쉠)는 '이름.'을 말하는 데 성경에서 '이름'은 명예나 명성을 뜻한다(전 7:1). 잠언 기자는 명예와 명성이 부(富)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명예가 부보다 낫다는 뜻이며 부에만 집착함으로 초래될 수 있는 폐단을 경계하기 위해 주는 교훈이다. '은총'('헨')은 다른 사람에게 받는 사랑을 말한다. 진정한 기쁨은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Kidner). 9. 선물과 뇌물 "선물은 임자의 보기에 은총의 돌과 같은즉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느니라(17:8).....선물은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고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18:16)....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명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21:14)." 순수한 애정과 존경의 표시로 주는 선물(하쇼하드: 우리말에는 이 말이 뇌물로 번역되었다)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은총을 받게 한다. '은총의 돌'(아벤 헨; 보석)은 '좋아하는 돌' 혹은 '매력적인 돌'이란 의미이다.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선물은 받는 자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며, 사랑과 은총으로 대하게 만든다. 18장 16절에서 사용된 선물(마탄)이란 말은 (17:8,23)에서 사용된 '뇌물'(쇼하드)과는 달리 '사심 없이 애정과 존경의 표시로 드리는 예물을 말한다(창 32:20; 43:11; 삼상 17:18). 이러한 선물은 선물을 받는 상대반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그를 존귀한 자의 앞으로 인도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우리는 선물을 잘 사용하지 못하면 뇌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21장 14절에서 말하는 뇌물('쇼하드')는 부정적 의미로는 '뇌물'을 뜻하고(15:27; 17:23) 긍정적 의미로는 '선물'(gift)을 뜻한다(17:8; 18:16). 외관상으로 볼 때 본절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는 뇌물을 긍정적으로 본다기보다는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자에게 뇌물을 바치던 당시의 관행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실례인것 같다. 앞절과 연결시켜 볼 때 본절은 비천한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풀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잘 보이기 위해 예물을 바쳤던 당시의 악습을 풍자하기 위해서 한 말로 보인다. 10. 사랑과 징계(17:9-10)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17:9).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17:11)."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때로 허물을 덮어주어야 할 때도 있고, 사랑으로 책망하여 돌이키게 해주어야 할 때도 있다. 허물을 덮어주어야 할 때 친구의 허물을 덮고 이웃의 허물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사람은 사랑과 화평을 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웃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은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이웃의 잘못을 책망해야 할 때도 있다. '지혜로운 자'는 단 한 마디의 책망만 들어도 그것을 달게 받고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돌이킨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매를 백 번 맞아도 자기의 잘못을 돌이키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이웃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용서와 책망을 적절히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라는 말이 무작정 죄에 대해 묵인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징계는 독선적으로 정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1. 감정의 중심: 마음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17:22) '양약'(게하)은 치유나 건강을 의미한다. 즐거운 마음은 우리 몸을 치료해주며, 육체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유지해 준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온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약속해 주셨다(요 14:27). 그러나 심령에 있는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마른 뼈는 건강하지 못한 몸을 의미한다(겔 37:1-14). 선한 일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지만, 악을 행하면 마음에 근심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게 사는 것은 몸을 건강하게 하고 악하게 사는 것은 몸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심령이 병을 능히 이기게 하나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랴(18:14)." 사람의 심령은 능히 병을 이기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나 건강한 정신력은 육체의 병을 극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루아흐 네케아: 의지가 꺾이거나 절망, 또는 감정적인 상처를 받은 것) 연약해진 건강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육체가 연약해진다고 해도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곧 회복될 수 있지만, 심령이 상한 사람은 회복되기가 매우 어렵다. 본문에서 병을 이기는 심령은 남성형으로 사용되어 적극적인 마음을 의미하고 있고, 상한 심령은 여성형으로 사용되어 수동적이고 상하기 쉬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12. 언어 생활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않고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18:2)" 미련한 사람은 지혜로운 자의 충고나 훈계를 멸시하고 자기의 의사만을 주장한다. 여기서 '명철'(테부나)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미련한 자는 '테부나'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 주장한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멀리하며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교만하게 행동한다(Kidner).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18:6-7)" 지혜로운 사람은 다투던 사람도 화목하게 만든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쓸데 없는 일에 참견하다가 다툼에 휘말리게 되고, 또 아무 생각 없이 미련하게 말을 하여 가만히 있던 사람을 싸우게 만든다. 미련한 자는 어리석은 말로 상대를 분노하게 만들어서 형벌과 매를 자청하게 되고 그로 인해 쓸데없는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멸망을 하게 되고, 그의 영혼을 악과 파멸로 이끄는 도구가 된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18:8).....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20:19)." 18장 8절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중상 모략하는 말은 잘 요리된 특별한 음식과 같이 사람들에게 매력을 준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악한 중상에 대한 말을 들으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허기진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달려든다.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는 말은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즐기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 20장 19절은 말많은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는 내용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험담하는 자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충고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가 말을 많이 하게 될 경우 그의 입에서는 어리석은 말만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자를 아예 피하는 것이 최상 책이다. 이런 자는 가는 곳곳마다 유언비어와 중상모략을 일삼아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분주하다. "악을 행하는 자는 괴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17:4)....."분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 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17:7)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즐겨 듣고 '악한 자'와 '거짓말하는 자'는 비정상적이고 간사한 말과 악한 말을 즐겨 듣는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과 그의 언어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외의 말'은 '거만한 말'이나 '주제 넘는 말'을 의미하고, '미련한 자'는 신앙심이 없고 부도덕한 자를 말한다(30:22, 삼상 25:25, 시 14:1). 거만하고 주제 넘는 말은 미련한 자가 해도 불편해 보인다. 하물며 존귀한 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존귀한 자'는 도덕적으로 신실하고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W. McKane, A.P. Ross).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이 주제넘고 거만한 말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이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17:27).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17:28)." 우리의 혀는 실수할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조심한다. 그러므로 명철한 자는 '성품이 안존하다'(카르 루아흐: 자제력이 있고 조용하고 침착하다). 명철이 잇는 사람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급하게 대답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한 후에 말을 한다. 침묵은 지혜로운 자의 특징이다. 미련한 자도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 자신의 무지나 어리석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지혜로운 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침묵은 사람들이 실수하거나 자기의 무지를 드러나지 않게 해 준다(Plaut, A.P. Ross). "명철한 사람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18:4) '명철한 사람'('이쉬')이란 말은 원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볼 때 이 말은 그냥 '사람'이라기보다는 '지혜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10:11; 13:14; 16:22; 20:5). 지혜로운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과 같이 심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참신한 유익을 준다. 이러한 지혜로운 사람의 말과 생각은 마치 '샘'과 '깊은 땅속에서 솟구쳐 내리는 시내 물과 같다. 지혜로운 자의 말과 생각은 참신하고 유익하여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깨달음을 주고 갈증을 느끼는 마음에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참된 지혜의 출처가 되신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18:13)....여호와께서는 지식 있는 자를 그 눈으로 지키시나 궤사한 자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22:12)." 미련한 사람은 일의 정황에 대해서 진지하게 알아보고 그에 적당한 대책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각만을 옳게 생각하고 타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 말을 끊고 자신의 견해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타인의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적절하지 못한 말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지도록 만든다. 그리고 심하면 이러한 말은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서 다툼과 분쟁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야보고의 말과 같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할 줄 알아야 한다(약 1:19). 여호와께서는 '지식 있는 자를 그 눈으로 지켜 주신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다아트)는 '진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궤사한 자의 말'폐하신다. 여기서 '궤세한 자의 말'은 비진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을 보존하시고, 비진리를 폐하신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인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18:20-21).....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20:15)." 이 절은 동의적 병행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절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와 '입술에서 나는 것', '배가 부르게 되나니'와 '만족하게 되느니라'는 동일한 뜻의 말을 반복하여 그 뜻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열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통해서 수치와 멸시를 거두게 되지만,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말을 통해 지식을 전하고, 남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며, 낙심한 심령을 살려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의 말을 통해서 명예와 영광을 얻게 된다. 혀의 효과는 매우 커서 때로는 사람의 생사를 결정지을 때도 있다. 길들여지지 못한 혀는 자신과 남을 해치는 독이 될 수 있으며, 길들여진 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과 남에게 힘을 주고 생명을 얻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 입술이 성령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혀는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동시에 하게 되기 때문이다(약 3:8-10).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 듣기를 원하고 꼭 필요한 말을 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심판의 날에 우리는 자신이 한 말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마 12:36, 37). 지혜로운 말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지혜로운 입술'을 '귀한 보배'와 비교하여 그 소중함을 강조한다. 금과 재물에 의지해 사는 자보다는 지혜에 의지해서 사는 자가 더욱 더 내실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한편 지혜의 소중함과 유익함에 대해서는 3:1;8:11 등에서도 역설된 바 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20:12)....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22:11)." 20장 12절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권적으로 통치하고 계심과, 하나님께 지음 받은 귀와 눈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교훈은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사양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언급하신 내용과 유사하다. 귀와 눈, 그리고 입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여호와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주실 것이다. 22장 11절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한 가장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정결을 사랑하여 그 입술이 덕스러운 자는 왕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마음이 정결한 자는 덕스러운 말을 낸다는 것이다. '정결'은 정직을 의미한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누구에게든지 덕을 끼치는 말을 하기 마련이며, 대화할 때에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분이 높은 자의 호감을 사게된다. 그러나 이 구절이 왕의 친구가 되는 비결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며, 그보다 정직한 마음에서 나오는 덕스러운 말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20:25).....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21:23)." 여기서는 성급한 수원이나 맹세를 금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룻 3:6-13, 주제 강해, '맹세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성급하게 맹세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지키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는데, 이때 그 맹세는 그에게 함정과 굴레가 되고 마는 것이다(Allen P. Ross).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 입과 혀는 동일한 단어이다. '환난'('차로트')은 부주의한 대화가 초래하게 될 사회적, 법적 곤경을 의미한다(13:3; 18:21). 혀 사용을 잘한다는 것은 할 말은 하고 해서는 안될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진실하고 남에게 유익과 기쁨, 친절을 베푸는 말은 하되 거짓되고, 파괴적이고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입히는 말은 해서는 안된다. 13. 교만과 겸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8:12) '교만'은 맨 앞에서 서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선봉장과 같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겸손은 맨 앞에 서서 사람들을 존귀하게 만드는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와 같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게되어 그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된다. 그리고 겸손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이웃을 대하기 때문에 이웃들에게도 놈임을 받게 된다. 이러한 겸손에 대한 최상의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간이 되셔서(요 1:1,2; 빌 2:1-11) 죽기까지 순종하고(히 5:8) 존귀하게 되셨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21:4)....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21:24)." 이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다. '교만한 눈과 자랑하는 마음, 악인의 등불은 죄이다.' 이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지만 '등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이 말은 '니르'인데 어떤 학자는 이것을 '경작한 땅'으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무리해 보인다. 왜냐하면 악인이 경작하는 땅 자체가 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악인의 '경작하는 수고'로 볼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은 일반 은총의 일환으로 악인과 의인에게 골고루 비를 주시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 한 악인도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이며 그것 자체를 죄로 볼 수는 없다(마 5:45). 따라서 '니르'를 '등불'로 보는 것이 좋은데 성경에서 '등불'은 종종 번영과 행복을 상징한다(삼하 22:29; 왕상 11:36). 죄인의 번영함은 그 출처가 악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덕과 경건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유추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70인 역과 아람 역 등이 이 번역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악인의 교만, 자랑뿐 아니라 그의 번영까지도 죄라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망령된 자('레츠')는 '조롱하는 자'를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경거 망동(輕擧妄動)하게 행하고 말하는 자에를 의미하며, 당시에는 이러한 자들을 저주스럽게 여겼다(Kidner).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22:4).....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22:10)." 22장 4절은 두 개의 영적 조건, 곧 겸손과 경외에 이어 세 가지의 상급, 곧 부, 영예, 생명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 두 문구의 관계성은 '보응'이라고 번역된 '에케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용어는 '결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상반절이 말하는 겸손과 경외는 영적인 의미상 동격으로 볼 수 있는 속성들이다. 따라서 상반절을 '겸손, 곧 여호와 경외의 결과는'으로 번역해도 무리는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것, 의지적 복종, 죄의 확신, 이에 따르는 결과들이 모든 것을 여호와 경외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2장 10절은 불화나 다툼이 어떤 조악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악한 태도를 가진 사람 때문에 발생할 때가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럴 경우에 필요한 것은 제도 따위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 사람(troublemaker)을 쫓아내는 일이다(마 8:16). 또한 본절의 의미 속에서 '거만한 자'란 어떤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같은 성향은 결국 그가 하나님과의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자는 회의가 진행되기 전에 쫓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과 화합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창21:9-14). 70인역은 원문과는 다르지만 이런 측면을 지지하는 번역을 하고 있다: '거만한 자가 회의장에 않아 있으면 그는 모든 사람을 모욕한다.' 14. 우정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나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18:23)." '해를 당한다'(레히트로에아)는 말은 산산조각 난다'는 의미이다(사 24:19). 도움이 되지 않는 불량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면 재산을 허비하고 많은 시간을 탕진하게 만든다. 이것은 탕자가 나가서 불량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로 인해 모든 재산을 탕진한 것과 같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어려운 때에 친형제보다도 더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친구를 얻고 또 자신이 남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친밀한 친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우리를 버릴 때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며 도와주신다. 15. 재판과 공의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19:9)....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28)." '거짓 증인'은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거짓말을 내는 자도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불법과 불순종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하신다. 거짓은 잠시 동안은 승리하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진실이 승리하게 된다. 70인 역은 9절을 '악으로 불장난하는 자는 그것으로 망할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5절이 거짓말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면, 9절은 이러한 자의 운명이 결국 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 이 구절은 '망령된 증인'과 '악인의 입'을 대조하고 있다.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은 곧 공의를 조롱하는 것이요 위증을 엄금하는 율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이다(출 20:16; 레 5:1). 또한 죄악을 삼킨다는 것을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그의 입에는 달아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Keil & Delitzsch).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으니라(17:15)....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17:26)....악인의 편을 드는 것과 재판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18:5)."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18:17) 우리는 논쟁 사건에서 경솔하게 한 쪽 편만의 이야기를 듣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그러나 원고나 피고는 각각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실수할 확률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의 진위를 가릴 때에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들어야만 있다. 그러므로 재판관은 원고와 피고의 진술을 다 경청한 후 공의롭고 신중하게 판결을 내려서 쌍방이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18:18) '제비를 뽑는 것'은 중대한 일이나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판결할 때에 시행된다(민 26:52-56). 이것은 다툼의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불확실하여 분명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때에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도록 사용된 판결 수단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판결이나 일을 결정할 때, 그리고 땅을 분배할 때 등에 이러한 수단을 사용했다. 그들은 제비를 뽑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일의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 일을 시행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결과에 순복했다.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21:28).....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21:15)." 21장 28절은 직역하면 '듣는 자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인데, 이 번역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듣는 자'가 상반절의 '거짓증인'과 연관된 자인지 대조를 이루는 자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이 계속해서 상반된 두 존재를 대조시켜온 사실을 고려할 때 '듣는 자'란 거짓 증언을 하지 않는 진실된 증인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 증인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이 목도한 진실을 끝까지 증언할 것이다. '패망'(메히타)은 '공포', '두려움', '당황'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공포'나 '두려움'으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대비를 이루는 '즐거움'(심하)이 상반절에 있기 때문이다. 공의가 실행될 때 보이는 반응에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공법을 준수하던 의인이라면 공의 실행을 즐거워하겠으나 공법을 조롱하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악인은 공의 실행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16. 하극상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19:10)." 재물과 권세는 그것을 잘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지면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이것을 가지면 재물은 사치로, 권세는 남용으로 흐르게 된다. 미련한 자가 재물을 얻으면 그는 자기만을 위해서 흥청망청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권세를 사용할 줄 모르는 종이 권세를 얻게 되면 그는 그 동안 눌려 살던 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주인을 박해하려 든다. 사치는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지만 권력 남용은 남에게도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사치보다 권력 남용이 더 위험하다. 그러므로 토이(Toy)는 '부와 권세는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 사회의 불행은 부와 권세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 부와 권세를 누리고, 부와 권세를 가져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부와 재물을 가지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물질은 적절한 곳에 사용되어야 하며 권력은 정의를 위해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17. 게으름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19:15)." 게으른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고 돈을 낭비해 버린다. 15절은 게으름과 해태함, 그리고 깊은 잠과 굶주림이라는 동의어의 반복을 통해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해태하다'('타르뎀마')는 말은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깊은 잠'이나 '혼수 상태'를 의미한다(창 2:21). 게으름은 사람을 일찍 일어나서 일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깊은잠에 빠진(나태한 사람은 일을 하지못해서 결국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된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9:24).....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20:4)." 게으른 자는 너무나 게으른 나머지 음식을 주어도 그것을 먹기 위해서 손을 그릇에 넣었다가 그것을 먹기 위해 들어올리는 일도 하기 싫어한다. 이것은 게으른 자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나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모습을 과장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자기에게 마땅히 돌아올 것조차도 게을러서 취하지 못하고 만다. 반대로 근면한 자는 남의 것이 될 것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20장 4절에서 '가을'('호레프'_이란 말은 '가을', '겨울' 혹은 '추운'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따라서 영역본들은 '가을에'를 '추위 때문에', '계절에 맞게', '가을에'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10, 11월에 이른 비가 내리는데, 이 때에 팔레스틴의 농사는 파종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이른비는 건기동안에 메말랐던 땅을 경작하기 좋도록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또한 이른비가 오는 시기에는 쌀쌀하고 습하여 기동하기에 불편하기 마련이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크게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20:13).....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21:17).....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21:25).....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22:13)." 20장 13절은 근면하고 부지런할 때에 우리에게 번영과 축복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 구절은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이 대조를 이루는 반의법적 평행구로 구성되어 있다. 눈을 뜨라고 하는 것은 활기 있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다. 원문상 하반절은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개의 명령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눈을 뜨라, 그리고 만족해져라'이다(Allen P. Ross). 21장 7절의 '연락'은 '즐거움'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안락한 삶을 의미한다. 인생이 안락한 삶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삶을 위하여 과도하게 혹은 무절제하게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배만 채우는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 있어서 기름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 비싼 것은 한 병의 값이 일반 노동자 일당 300일 분과 맞먹을 정도였다(마 20:2). 이 구절이 말하는 기름은 바로 이런 기름이며 이런 기름은 사치스럽고 지나치게 소모적인 삶을 상징할 때 사용된다(시 23:5; 104:15; 암 6:6). 21장 25절은 우리에게 게으른 자의 정욕이 우리를 죽인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하반절이 설명하듯이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정욕'은 '소원'이나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맥상 '정욕'이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욕심만 앞서 지레 설정해 놓은 큰 목표나 목적을 말한다. 손으로 일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아무리 큰 목표를 설정했다고 해도 진만 빠지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이다. 22장 13절은 일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며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게으른 자가 마치 선지자라도 되는 듯이 말하고 있다. 유대 격언에는 '게으른 자는 선지자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구절은 불과 몇 단어로 의도한 내용 전체를 그려내는 저자의 놀라운 재능을 엿보게 한다. 물론 그 당시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로서 공포의 대상이었다(렘 49:19;50:44). 그러나 이 동물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마을 밖 교외에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거리에 사자가 있는 것처럼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18. 모든 사람은 죄인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20:9)."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욥 14:4) 혹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는 말씀을 연상시켜며,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란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스스로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염격한 판단에서 볼 때 그의 결백은 함량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McKane). 19. 음주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20:1)." 원문에서 '포도주'는 의인화되어 거만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술에 취하면 흔히 아무나 조롱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하반절의 내용은, 술에 취하는 것 자체가 현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사람은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특히 상반절이 술에 취한 자의 어리석은 행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반절 역시 술취함과 지혜에의 탐구는 서로 상반될 수밖에 없는 태도임을 나타낸다(McKane). 20. 유혹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22:14)." '음녀의 입'은 우상 숭배에로 이끌기 위한 우상숭배자의 유혹하는 말을 의미한다(2:16-22;5, 7장).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제움 예화)는 '여호와의 싫음을 당한 자'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제움'이 수동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고 멋대로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여 우상 숭배자의 유혹에 빠지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 있다(롬 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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