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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욥기

[스크랩] 욥기 (33 : 1~3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1:20
욥기 (33 : 1~33)


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ㅇ그런즉...원하노라 - 엘리후가 자신의 연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욥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한 잠시 욥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하던 방식(32장)
을 버리고 욥을 향해 직접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엘리후가 욥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서두를 시작한 것은 친밀감을 나타내는 태도로 이해된다.

2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ㅇ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 직역하면 '나의 혀가 입 속에서 말하는구나'이다. 이 표
현은 '혀'가 주체가 되어 마치 입 밖으로 말을 쏟아내듯 하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즉, 엘리후가 욥에 대해 반론을 펼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가를 강조하는 말인 것이
다.

3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ㅇ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 직역하면 '(내 말은) 마음의 정직함에서 나오고'이다.
이는 욥이 세 친구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고 지적한 사실(6:25 등)을 염두에 둔 표현으
로 보인다(Delitzsch).
ㅇ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 앞 부분과 평행구를 이루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제부터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지식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잠
8:7,8과 유사한 내용으로 이해된다(Habel).

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ㅇ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를 통해 엘리후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욥을 비교하고 있다.
즉, 여기서 그는 자신 역시 욥과 조금도 다름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인간적
인 권위로는 욥에게 어떤 권고나 교훈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반
어적으로 자신의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감동된 것이기에 능히 욥
을 가르칠 수 있다는 뜻으로서 자신의 변론에 신적(神的)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
이다.
ㅇ전능자의 기운(* , 니쉬마트 솨다이) - 직역하면 '전능하신 자(하나
님의 또다른 이름)의 숨결, 호흡'으로서 앞 구절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반복한 평행 구
절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다름아닌 인간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의 숨결이 주
어져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함으로써 한편으로 욥과 동일한 피조물로서의 자신
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능자의 기운'으로 영감된 자신의 말을 꼭 주의해서 들어
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5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ㅇ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 앞에 '할 수 있거든'이 조건으로 달린 것은 적어도 엘리
후는 욥이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본절의 표현
'일어서서',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등은 모두 법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즉, 자신의 말에 이의가 있거든(나의 말에 대항해서) 반론을 펼쳐보라는 당당
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혹자는 이러한 태도를 엘리후의 교만으로 보기도 한
다(Schlottmann).

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ㅇ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 원문상에는 '나'가 강조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헨
아니'(* - )는 직역하면 '보라, 나도'이고, 이 말로 시작한 구절이 끝에서도
'감 아니'(* - , 나 또한)로 종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반이니'의 히
브리어 '케피크'(* )에 대해서는 '용기', '병'을 뜻하는 '파크'(* )와 연결
시켜 '작은 단지와 같이'로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Blommerde).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입'을 의미하는 단어 '페'(* )로 부터 어근을 삼아 '조화' 내지는 '방법'으로 번역
하는 것이 더 무난하다(Gordis). 개역 성경도 이러한 번역을 따르고 있다.

7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ㅇ권세로는...누르지 못하느니라 - '권세'의 '아케피'(* )는 '누르다', '촉구
하다'를 뜻하는 '아카프'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단어가 잠 16:26에서는 '박해하
다', '내몰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개역 성경엔 '독촉하다'로 번역됨). 한편, '누
르다'(* , 이크바드)는 원래 '무겁다', '슬픈', '모진', '명예로운'의 뜻을 가
진 '카베드'(* )의 파생형이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내가 눌러도 너는 무겁
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말은 아무런 힘도, 권위도 가지지 못
하 것이라는 뜻이다. 즉, 만약 엘리후 자신의 말이 그릇된 진술이라면 욥은 아무런 두
려움이나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게 될 것이지만 결코 자신은 인간적인 지식에 의존하
지 않고 하나님의 영감에 의지하여 말할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인 것이다(6절).

8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ㅇ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 직역하면 '너는 내 귀에 말했다'로서, 부정할 수 없는 분
명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는 앞 단어 '실로'(* , 에크, but,
surely)와 연결하여 '어처구니없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구나'로 해석하기도 한다
(Delitzsch). 한편 9절 이하에 언급되는 내용은 욥의 말(특히 13:24-27)을 염두에 둔
것이긴 하지만, 축어적인 인용은 아니다. 따라서 이 속에는 엘리후의 주관적 판단도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9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ㅇ허물이 없으며(* , 하프 아니) - 개역 성경은 '나는'(* , 아니)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앞의 '깨끗하며'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병행구이다. 한
편 '하프'(* )는 전체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이는 욥이 결코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비난받을 것이 없는 도덕적 순결
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도덕적 완전을 주장하였던 것을 이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비록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신실하게 견지해 왔노라고
자부하고는 있었지만(23:11,12;27:4,5) 죄와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은 그토록 큰 징벌을 당할 정도로 심각한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다는 것일 따름이
었다.

10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ㅇ칠 틈을 찾으시며 - '칠 틈'의 '테누오트'(* )는 '거절하다', '낙담시
키다'는 뜻의 '누'(*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이간', '적의', '기회'등을 뜻한
다. 이렇게 볼 때 이 단어는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 엿보는(삿 14:4) '기회'를 의미한
다(Duhm, Driver & Gray). 따라서 이 구절은 욥이 한 말을 간접 인용한 것으로
(16:12,13 등), 하나님이 자신의 허물을 노리고 그것으로 인해 공격할 기회를 엿보시
는 것으로 이해한 표현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후반부에 나타나는 '대적
으로 여기사'(NIV, he considers me his enemy)이다. 즉, 욥은 자신의 환난이 마치 자
기가 하나님의 원수나 된 것처럼 닥쳐왔다고 불평했던 것이다.

11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ㅇ착고(* , 사드)는 죄인들의 발을 묶어 놓기 위한 족쇄를 말한다. 나무로 된 것
도 있으나 보통은 발목 주위를 묶는 쇠고랑을 뜻한다.
ㅇ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눈여겨보시고 계산하시는 하나
님의 집요한 감시를 표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개입 때문이라고
욥이 느끼고 말한 것을,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와 위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하고 있
는 것이다.

12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ㅇ네가 의롭지 못하니 - 지금까지 욥의 말을 인용한 엘리후가 이제 그러한 욥의 주장
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판별이 아니라, 검사의 논고처럼 무
게 있고 공식적인 하나님의 선고를 연상시킨다.
ㅇ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 이는 인간과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비교한 것이라
기 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성격을 분명한 명제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70인
역(LXX)은 이 부분을 '영원하신 분은 유한한 인간을 초월하신다'로 번역했다(Pope).
이 위대하심에 비추어 볼 때 욥의 말은 그릇되었고 불의하다는 것이다. 13절부터는 이
명제에 근거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엘리후의 변론이 이어진다.

13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ㅇ행하시는 것을...아니하시나니 - '행하시는 것'으로 번역된 이 말은 직역하면 '(누
구의) 말들'이다. 여기서 말의 주체가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혹자는 이것을
'데바라이우'(* , 그의 말들)로 읽어 12절 하반절의 '사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Gordis). 반면에 다후드(Dahood) 같은 학자는 맛소라 사본으로부터 모음을
변화시켜 '그(사람)에게 말하는 자의 말'로 읽는다. 그런가 하면 포르(Fohrer)는 맛소
라 독본을 수정하여 '나의 말들'로 읽는다. 이것은 욥의 말들을 인용하는 입장에서의
'나'를 가리킨다. 한편 이 구절의 인칭 대명사를 '하나님'으로 보면서, 하나님은 자신
의 행동(말들) 속에 감추인 모든 신비스러운 것들에 대해 대답지 않으신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Delitzsch). 결국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논쟁에 경박스럽게
끼여들어 대답을 주고 받을 분이 아니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욥이 하나님
과 논쟁하려고 시도하는 태도에 대해 공박하는 말이기도 하다.

14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ㅇ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 직역하면 '사람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이다. 이말
은 원문상 앞 부분에 있는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되'를 받는다. 즉, 사람은 하나
님의 계속되는 계시를 듣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어떤 주석가는 부정어
'로'(* )대신 '만약'을 뜻하는 '루'(* )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하면서, 이를
'사람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가정법 문장으로 읽고 있다(Gordis).
ㅇ한번... 다시 말씀하시되 - 문자적으로는 '한 번 두 번(계속) 말씀하신다'이다. 이
는 다음 15절의 내용과 연결되어 방황하는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막는 모든 방해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셔서라도 자신의 뜻
을 전달하시려는 하나님의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Hartley).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ㅇ엘리후는 14절에서 암시한 하나님의 의사 전달 방식 중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
것은 곧 꿈이나 꿈 같은 이상을 통한 계시이다. 고대에는 종종 꿈이 신(神)의 메시지
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특히 왕이나 고위 관료들이나 제사장 등의 꿈은 더
욱 그러했다. 인접한 이방 나라들에 비해 이스라엘에서는 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었
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서 꿈을 사용하신 적이 있음은 분명
하다(창 20:3-7;31:11,24;41:1-7;왕상 3:5;단 2:9,28;4:5-18).

16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ㅇ인치듯 교훈하시나니 - '인치듯'의 '야흐톰'(* )은 '봉인을 찍다', '봉하
다'등을 뜻하는 '하탐'(* )의 파생형이다. 이 단어는 중요한 서류나 문건의 신빙
성을 확증하는 의미로 사용된다(왕상 21:8;단 6:17,18).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 틀림없도록 하셨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교훈하시나니'는 '징계하다', '징책
하다'의 '야사르'(* )의 파생형으로 보는 견해와 '넘겨주다', '제공하다' 혹은
'묶다'의 뜻을 가진 '마사르'(* )의 파생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후자를 취
하면 '족쇄'로 봉인한다는 뜻이 되고(MT), 전자를 취하면 '경고하다', '두렵게 하다'
가 되어 '하나님께서 두려운 경고로 봉인하셨다'는 뜻이 된다. 결국 양자는 모두 '하
나님의 강력한 경고를 담은 교훈이나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17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막으려 하심이라

ㅇ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 고난에 대한 세 친구들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다른 엘리
후의 새롭고 독특한 고난의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고난에 교훈과 훈계의 의미
가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죄에 대한 형벌로만 고난을 이해했던 세 친구들과는 달리
엘리후는 때로 고난이 사람의 교만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석하고 있
다.

18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않게 하시느니라

ㅇ칼에 멸망치 않게 - 본절 전반절의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병행을 이루는, 보다 강력한 의미를 가지는 표현이다. 이것이
사람의 교만을 막고, 자기 꾀에 빠지지 않게 하시는(17절) 이유인 것이다. '칼'(*
, 솰라흐)은 '무기', '병기'를 의미한다. 이 무기가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투르 시나이(Tur-Sinai)에 의하면 그 무기는 죽음의 신에 의해 사용되는
'죽음의 칼'을 뜻한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무덤에서부터 나와 스올에로 이끌어가
는 긴 지하 터널이나 협곡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Dhorme, Gordis). 그 외에 많
은 근동의 자료들을 참고해서 종합해 볼 때, 이 단어는 분명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교만으로 인한 이러한 패망 곧 죽음은 잠 16:18의 교훈과도 상통한다.

19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ㅇ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훈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ㅇ뼈가 늘 쑤심의 징계 - 직역하면 '뼈들이 서로 다투는 것에 의한 징계'이다. '쑤
심'의 '리브'(* )는 '논쟁하다', '다투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여기서 히브리
어의 표현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뼈의 다툼'을 델리취
(Delitzsch)는 '그의 뼈가 늘 산란한 상태'로 이해한다. 이 표현은 전반부의 '병상의
고통'을 보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한편 본절 이하에서도 엘리후는,
욥의 질병이 특별한 죄악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단정한 세 친구들과는 달리 그 질병의
원인과 회복 방도에 대해 보다 신중한 판단을 내려가고 있다.

20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ㅇ식물...별미를 싫어하며 -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사람의 모든 즐거움을 앗
아가 버린다. 심지어 생명의 유지를 위한 음식과 식욕을 돋구기 위한 특별한 음식조차
도 먹을 의욕을 잃게 만든다. '싫어하며'(* , 지하마투)는 '사악하다', '가
증스럽다'를 뜻하는 '자함'(* )의 피엘형 파생어이다. 아랍어에서 이 단어는 '고
약한 냄새가 나다'를 의미하며, 아람어로는 '되찌르다', '억누르다'는 뜻이 된다
(Delitzsch). 여기에 착안하여 이 구절을 '그의 영혼이 양식과 삶의 모든 방도들을 되
찌르고 있다'로 번역하기도 한다(Pinsker). 즉, 건강한 몸은 식욕을 일으키지만 육체
의 질병은 식물에 대해 오히려 메스꺼움을 야기시켜 병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ㅇ살은...보이지 아니하고...뼈가 드러나서 - 육체의 질병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겉에 있는 살이 바짝 말라붙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로 인해 뼈들
이 앙상하게 드러나 보인다. 결국 이 표현은 병자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할 정도로 중한 병의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다(Anderson). 이러한 마지막 결과가 22절
에서 이어지고 있다.

22 그의 혼이 구덩이에,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와지느니라

ㅇ이 구절은 18절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ㅇ구덩이 - 이는 후반부의 '죽음'(개역 성경은 '멸하는 자'로 번역)과 함께 죽은 사
람을 끌어들이는 음부의 권세를 표현하는 말이다(Habel, 30:23;33:18).
ㅇ멸하는 자(* , 메미팀)는 MT에 의존한 독본으로 '죽음을 전하는 사신'(천
사)을 듯한다(Gordis, Smick). 이에 대해서는 삼하 24:16;왕하 19:35;대상 21:15;시
78:49 등을 참조하라. 한편 포우프(Pope)는 18절과의 병행구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리
고 '메미팀'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전접어 '멤'의 용법을 가정하여 모음 변화를 시
킴으로써 이를 '죽음의 물결'로 번역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이 분법적으로 명료할
경우에는 구태여 모음 변화를 시키거나 기타 본문 수정을 가하는 일을 삼가야 마땅하
다. 결국 본문은 하나님의 징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으면 끝내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23절은 이러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23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

ㅇ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 하늘에 있는 많은 천사 중의 하나가 죽게 될 사
람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는 해석자가 된다면 그는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
다. 여기서 '해석자'(* , 말라크 멜리츠)는 '천사'의 뜻을 가진 '말
라크'(* )와 '비웃다'란 뜻의 '루츠'(* ) 혹은 '리츠'(* )에서 파생
된 '멜리츠'(* )가 연결된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말을 전달하는 자들의 조롱
하는 듯한 태도를 암시한다(창 42:33;사 43:27).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이 해석자
가 19:25의 '구속자'와는 다르며 단지 하나님의 편에서 그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생각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 '해석자'는, 연단의 목적으
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천사로 이해됨이 더 자연스럽다(Gordis,
Hartley). 이 중보 천사의 역할은 이미 욥 자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9:32-35;16:18-22;19:21-27)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의를 변호해 주는 것이다
(Habel). 이러한 중보 사상은 구속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ㅇ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시는 근거가 언급된다. 영원한
사망의 '구덩이'(22절)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대속물을 보시고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속물'(*
, 코페르)에 대해서는 '덮다', '화해하다', '대속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파르'
(* )에서 파생되었으며, '구속하다'를 뜻하는 '파다'(* , 개역성경은 '건져
서'로 번역함. 시 49:7 참조)와 연관된 속량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대속의 개념
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사 의식과 관련이 깊다(레 1:4;4:4;16:21).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범죄에 의한 처형이 있기 전에 그 몸값을 지불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수단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놓아주라'(개역 성경은 '건지라'로 번역함)는 하
나님의 명령이 '대속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
는 빛이 된다.

25 그런즉 그 살이 어린 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ㅇ고난에서 자유케 된 자의 기쁨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 회복이 얼마나 극적인
것인가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적인 징계의 의미를 욥이 발견하도록 유
도하고 있다.
ㅇ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 '연한 살'에 대한 언급은 21절의 '파리해진
살'과의 비교속에서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연하여져서'의 '루타파쉬'(* )
는 '도로 찾다', '신선해지다', '생기 발랄해 지다'의 뜻을 내포한다.

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ㅇ엘리후는 단지 육체의 회복뿐만 아니라 지위와 명예 그리고 영적인 상태의 회복까
지도 언급하고 있다.
ㅇ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얻기 위한 제의적 행위이다(시 24:6;27:7-9).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얼굴은 완악한 범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나타내기도 하지만(렘
44:11), 대개의 경우 경배자들에게 빛과 생명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민 6:24-26).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의 존전에 나아가 그의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창 33:10;시 17:15).

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ㅇ앞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3중적 회복이 언급되었거니와, 여기서는 고
난에서 벗어난 자의 3중적 고백이 나타난다. 그것은 곧 과거의 범죄에 대한 것과 의를
왜곡시켰던 사실에 대한 고백 그리고 그것들이 무익했다는 깨달음 등이다.

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ㅇ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 본절 역시 고대 문학에서 보통 사용되는 병행구이다.
전반부의 '영혼이 구덩이(18,22,24절)에 내려가지 않게'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노래한 구절이다. '빛'(* , 오르)은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발산되는 생
명의 빛이다(30절). 또한 이 노래의 의미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부
르는 찬송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고난 당한 자가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이스라
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짐을 뜻하는 것이다(Hartley). 이것으로써 그의 모든
법적, 제의적 신분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것이다.

29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ㅇ여기서 엘리후는 욥에게 다시 한번 고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상기시키며,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와 교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교훈을 겸허히 수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요약'으로 이해될 수 있다.
ㅇ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 '이 모든 일'은 위에서 제시된 '꿈과 이상을 통한
교훈'과 '육체의 질병을 통한 징계', 그리고 그것으로써 인생들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
내시려는 하나님의 모든 적극적 사역을 말한다. 여기서는 특히 '고난의 이유'에 초점
이 맞춰진 언급이다. '재삼 행하심'을 직역하면 '두번 세 번 계속 반복하심'이다. 이
렇게 끈질기에 되풀이하시는 이유가 30절에서 나타나고 있다.

31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ㅇ귀를 기울여...들으라 - 혹자는 본절에서부터 33절까지를 '욥의 대답을 요구하는
말'로 분류했으나(Hartley), 엘리후가 사실 욥의 반론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서 적절치 못한 이해인 듯하다. 오히려 이는 자신의 변론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형식적인 답변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엘리후가 욥에게 '조용히 침묵하면
서'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에 순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Lange). 한
편 욥으로서도 이미 자신의 최후의 진술을 끝내고 사람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답
변을 기다리고 있기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라

ㅇ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 NIV는 이 구절을 '(내가) 너에게 깨닫게 해주겠다'(I
want you to be cleared)로 번역하였다. 즉, 만약 욥이 엘리후 자신의 주장에 대해 어
떠한 반박을 해도 기꺼이 대답을 해줌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한편 랑게(Lange)는 이를 '나(엘리후)는 네가 의롭게 말한 것을 보
기를 원한다'로 이해하고 있다. 이 경우는 욥의 주장이 '자칭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
임'에 비해 자신은 철저히 객관적 입장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대조시키는 표현으
로 이해된다.

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ㅇ지혜로...가르치리라 - 처음의 태도와는 달리 당당하고 높은 위치에서 말하고 있
다. 이제 엘리후는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진술해 보겠다(32:10)는 소극적이고 저자
세의 입장이 아님을 보여 준다. 또한 이 구절은 자신의 두번째 변론을 시작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혹자는 젊은 엘리후의 이 말에서 건방진 태도를
추론하며 이런 관점에서 욥이 엘리후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이 곧 '비난의 침
묵'이라고 보기도 한다(Rawlinso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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