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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욥기

[스크랩] 욥기 (32 : 1~22)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1:20
욥기 32장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ㅇ본장에서부터 37장까지는 욥의 마지막 변론 부분과 하나님의 현현(顯現)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는 전환부에 해당한다. 그중 본장과 33장은 네 차례에 걸친 엘리후의
긴 변론 중 첫번째에 속한다.
ㅇ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대답이 그치매 - '스스로'는 직역하면 '그 자신의 눈으
로 보기에'(KJV, NIV, RSV, NASB, in his own eyes)이다. 70인역(LXX)과 수리아 역본
은 '그들의 보기에'(in their eyes)로 읽는다. 그러나 31장이 욥의 마지막 말로 끝나
는 것으로 보아 단수('그의')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Hartley). 따라서 이 구절은
자기 견해에 따라 무죄를 확신하는 욥에 대해 더 이상 변론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
을 깨달은 세 친구들이 그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잠시 침묵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한다.

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ㅇ람 족속...바라겔의 아들 엘리후 - 엘리후의 이름과 함께 그 조상들의 이름이 소개
되고 있는 것은, 엘리후가 다른 세 친구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엘
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며, 또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
라는 의미이다. 그 외에 '람', '부스'등 또한 구약 성경에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다(창
22:20,21;룻 4:19).
ㅇ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 엘리후가 욥에 대하여 분노한 이유이다. 세 친
구들이 욥의 결백 주장에 더 말을 못 하고 침묵했던 것에 반해 엘리후는 욥의 태도가
하나님의 성품과 존위(尊位)를 위태롭게 하는 불경건한 교만임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변호하고자 나선 것이다.

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ㅇ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 유대의 서기관 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여기서의 '욥'을 '하나님'으로 읽어야 합당하다. 이렇게 볼 때 엘리후가 친구들에게
화를 낸 이유는 '그들이 욥의 말에 능히 반박하지 못함으로써 도리어 하나님께 죄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상황이 된 데 대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대체가 문맥
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도록 이끌기는 하지만, 40:8에 따르면 하나님을 정죄한 일에 대
하여 책망을 받는 자가 '친구들'이 아니라 '욥'이므로 인정하기 힘든 독법이다
(Lange). 한편 어떤 학자들은 '와우'(보통 and의 뜻)의 용법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즉 이 구절에서 '정죄함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레시야우'
의 '와우'를 설명형 '와우'로 보고, 엘리후가 세 친구들에게
화를 낸 것은 '그들이 욥의 범과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답변도 마련해 내지 못했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Blommerde).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엘리후의 변론 내용의 성격 등을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엘리후가 노를 발한 것은 세 친구들이 욥을 적절하게 반박하지
못한 사실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욥의 문제나 잘못을 바로 지적하지도 못하
면서 오히려 무리한 언설만 늘어놓은 친구들의 단견과 편견 때문이라고 봄이 무난 하
겠다(Delitzsch, Kamphausen, Lange, Rawlinson).

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있다가

ㅇ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 여기서 저자는 엘리후가 논쟁의 처음에는 등장하
지 않고 있다가 끝부분에 와서 갑자기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엘리후는 연장
자가 말을 할 때 연소자는 조용히 듣고 있어야 하는 사회적 전통을 지키며 젊은이다운
겸손을 유지하였던 것이다(6,7절).
ㅇ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 이 구절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엘리후가 '무엇을
기다렸는가'를 문법적으로 분명히 설명해야만 한다. 한편 '말하기를'은 매우 난해한
표현의 하나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드바림'은 히브리어 모
음 독법에 의하면 '그들이 말하는 동안에'(ehile they were speaking)로 읽을 수도 있
다(Hartley). 이렇게 볼 때, 엘리후가 계속 주목해온 대상은 다름 아닌 욥이었으며,
그들이 대화하는 중에는 '욥 개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나 감정을 참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엘리후는 그들의 논쟁을 계속해서 주의 깊게 들었으며, 설령
그들의 주장에 잘못된 점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라도 연소자로서 연장자들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감정과 반론을 억누르며 참아왔음을 알 수 있다.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ㅇ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 엘리후가 노를 발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2
절과 3절 주석을 참조하라.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ㅇ여기서부터 엘리후의 본격적인 연설이 시작된다. 첫 번째 연설은 본절부터 33장 끝
까지 진행되며, 고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고난은 죄에 대한 형
벌-이 견해는 세 친구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주장된 전통적인 고난관이다-외에도 하나
님의 사랑의 원리에 근거를 둔 고난도 있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고난에 의해서 정화되
어야 할 욥의 죄를 '교만'이라고 지적함으로써(33:17) 욥의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ㅇ참고...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 엘리후 자신이 얼마나 연장자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했는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참고' 혹은 '감히'
의 '자할'은 (개역 성경의 번역으로는 '참고'와 '감히'가 각각 원문의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인지 분명치 않음) '움츠러들다', '두려워하다'의 뜻으로 깜짝 놀라
서 움츠러든 모습을 표현한다. 이 단어의 파생형들은 종종 '일정한 위치에서 한쪽에
비켜서거나 물러서는 것'을 의미하며(Delitzsch),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기어가
다' 혹은 '살금살금 걷다'로 표현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아람어의 관습적인 표현으로
'매우 무서워함'을 뜻한다(Habel, Lange). 한편 히브리어 본문 내의 '야레'
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의 뜻으로 앞 단어 '자할'의 의미를 강조하는 반복적 표
현으로 볼 수 있다.

7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ㅇ내가 말하기를(아마르티) - 은 '말하다', '혼자 말하다(생각하다)',
'의도하다', '명령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아마르'의 1인칭형으로, 본
절에서는 '이야기했다'는 뜻보다는 오히려 엘리후가 자신의 할 말을 미리 마음속에 되
뇌어 보았다는 의미에서 '생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NIV,
NASB, I thought).
ㅇ날이 많은 자가...가르칠 것이라 - '가르치다'의 '요디야우'는 '알
다'(야다)의 사역형으로(알게 하다. make known) 쓰였다. 그러나 70인역
(LXX)은 이것을 일반형인 칼(Qal) 동사로 읽어 '알다', '깨닫다'는 의미로 옮기고 있
다. 어느쪽 해석을 취하든 본문상의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엘리후는 그 자
신에 비해 연로한 세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더 지혜롭다고 할 수는 있지만 지금의 상황
에서는 인정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ㅇ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장자인 저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
에게 임한 깨달음 때문임을 주장한다. '심령'의 히브리어 '루아흐'는 사람의
영혼 혹은 전인격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신적(神的)인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ㅇ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 '전능자의 기운'
(니쉬마트 솨다이)은 직역하면 '전능자(하나님)의 호흡'이다. '사람에게'는 원문상으
로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으나(KJV, giveth them), 총체적 복수를 의미하는 단수로 이
해할 수 있다(NIV, RSV, Dhorme, gives him). 여기서 엘리후는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
님이 주시는 통찰력이 인생의 연륜에서 얻어지는 일반적인 지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함과 아울러 그 자신의 진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된 신적 권위가 있는 것임을
주장하는 표현이다(Hartley).

9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ㅇ대인(라빔)은 '많다', '많게 되다'의 뜻을 가진 '라바브'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동사형에서는 종종 '위대하다'란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대장', '두목'을 뜻하는 명사 '라브'가 파생되었다. 개역성경은 이런 점에서
'대인'으로 번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제케님'(개
역성경은 '노인'으로 번역함)과 병행을 이룬다는 점에서 '연장자'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Hartley).
ㅇ깨닫는 것이 아니라 - 엘리후는 나이 많은 연장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지혜
자로서의 판결권을 부정하고 있다. 그 정당성은 8절에서 언급되었다. 즉, 지혜를 깨달
아 공의를 판별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영감에 있기 때문에 단지
나이가 많아 인생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ㅇ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 '의견'에 해당하는 '데이'는 통찰력과 깊은
경험에서 비롯된 앎을 뜻하는 '야다'(알다)의 파생 명사로 본절에서는 '지
식', '깨달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엘리후는 단순히 자신의 '말', '담화', '언설'
을 진술하겠다는(Ginsberg)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영감된 자신의 통찰력을
개진함으로써 욥과 친구들에게 참다운 지혜와 공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겠다고 공언하
는 것이다.

11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ㅇ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보는 동안에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당신들이
할 말을 찾는 동안에'(NIV, while you were searching for words)이다. 이 친구들의
'할 말'이란 욥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잇을 만한 말(논박)을 가리킨다. 또한 이 말은 세
친구들이 결코 그런 합당한 답변을 찾을 수 없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그들은 당시의 지성을 대표했던 자들로 보이며, 그들의 지혜는 오랜 연구와 조상 때로
부터 물려온 전통(5:27;8:8) 등에 근거한 것이었다.

12 자세히 들은 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ㅇ자세히 들은즉(아디켐 에트보난) - 직역하면 '(내가)
당신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본즉'이라는 뜻이다. '에트보난'은 '이해하
다', '숙고하다', '신중히 하다', '중시하다'의 뜻을 가진 '빈'의 파생형으
로 '주의를 기울이다'(NIV, gave you my full attention)는 의미이다. 특히 이 단어
앞에 있는 '아드'(to)는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강조하는 전치사로서 커레이
(Carey)는 이를 종종 '힘닿는 한'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엘리후가 주의를 기울인 것이
란, 친구들의 대답 속에서 욥을 적절히 논박하고 있는지의 여부라 하겠다. 이 사실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ㅇ욥을 꺾어(모키아흐) - '결정하다', '증명하다', '책망하다', '꾸짖
다'의 뜻을 가진 '야카흐'의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엘리후가 저들
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주된 이유가 무엇이며 또 그가 친구들의 침묵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엘리후는 더 이상 친구들에게서 욥의 주장을 꺽어 하
나님의 정의로움을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Delitzsch).

13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ㅇ그를 이길 자는...사람이 아니라 - '이길 자'의 '이드페누'는 '쫓아
내다'의 뜻을 가진 '나다프'의 파생형으로서, 이 어근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
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델리취(Delitzsch)는 이 단어를 바람이 하찮은 것들이나 마른
잎들을 땅으로부터 쓸어가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악인을 멸하시
는 '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을 볼 때(시 1:4) 세 친구들은 욥의 주장이 잘못되
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을 변명이
라도 하듯 욥의 완고함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심판에다 떠맡기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엘리후는 바로 저들의 이런 속마음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엘리후의 말에 의하면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대신에 '어떤 사람이
라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일'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4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ㅇ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 직역하면 '욥이 나(엘리후)에 대항하여 논쟁
을 벌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이다. '아니하였다'에 따르는 부정사 '로'를 탄
원형 '루'로 읽어 이 구절을 '그가 한 말은 바로 나에 대한 것이었다'라고 번
역하는 학자도 있다(Pope). 이에 대해 앤더슨(Anderson)은 과연 욥이 자신의 진술 내
용 속에서 엘리후를 논쟁의 상대자로 포함시켰느냐의 여부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어
떻든 간에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자신의 논지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를 밝히고 있
는 후반부의 내용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결국 우리는 어떤 단어의 대체 없이 그대로
읽으면서, 욥과 직접 논쟁을 하지 않았던 엘리후가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욥의 고난
에 대해 그에게 교훈해 줄 수 있는 유리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ㅇ그들이 - 여기서 엘리후는 갑자기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3가지 견해로 나뉜다. (1)엘리후가 친구들에게서부터 욥에게로 대화의 상대를 바
꾼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Anderson). (2)엘리후가 친구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
하던 위치에서 자신을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으로 놓은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
(Habel). 이 주장에 따르면 이제 엘리후가 자신의 진술을 보다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
기 위해 마치 법정에서의 선언처럼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3)이 변화를 엘
리후의 독백으로 이해하며, 또한 이를 그의 연설이 그렇듯이 문체에 있어서도 산만한
스타일을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는 견해. 어떤 견해를 취하든 분명한 것은, 엘리
후가 자신이 논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엘
리후가 자신의 진술의 정당성과 시기 적절함을 거듭 주지시키는 내용이다. 엘리후는
친구들이 욥의 마지막 주장에 대해 더 이상 논박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그 '말이 없음'
이 곧 자신의 등장을 요청하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Habel).

16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ㅇ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 욥과 변론할 만한 가장 적절한 인물이 바로 자신임을 거
듭강조하는 말이다. 이제껏 침묵을 지켜온 엘리후가 이렇듯 같은 뜻의 말을 거듭 반복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컬하다. 한편 본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웨호할티'
는 '기다리다', '소망하다'의 뜻을 가진 '야할'의 파생형
에 등위 접속사 '웨'와 1인칭 접미사 '티'가 연결된 단어이다. 이 단어의
'기다림'은 '확신에 찬 기대, 신뢰'를 의미한다. 따라서 저들이 욥의 주장에 대해 반
박할 것을 엘리후가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가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해야 본절의 의미
를 제대로 이해한것이 된다.

17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ㅇ본분대로 - 직역하면 '나의 분깃대로', '나의 몫에 따라'이다. 이것은 엘리후가 신
적 진리에 의한 통찰력과(8-10절), 진행되었던 논쟁들의 세밀한 분석에 의한 판단으로
서(11,12절) 욥에 대해 세 친구들보다 훌륭한 답변을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공식
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18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ㅇ내게 말이 가득하고 -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접속사 '키'가 있어 이 구절이
엘리후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
다. 세 친구들은 할 말이 없었던 것에 반해, 엘리후는 온통 하고 싶은 말과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해야만하는 말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ㅇ심령이...강박함이니라 - '강박하다'의 '추크'는 '강요하다', '괴롭히
다', '곤경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보통 강력한 내적 동기나 엄청난 외부적
인 압박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심령에 있어서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19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ㅇ보라 내 가슴은...터지게 됨 같구나 - 엘리후는 자신이 반드시 말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번에는 비유를 들어 반복하고 있다. '보라'(히네)는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강한 권고로서, 마치 엘리후 자신이 정말 터지기 일보 직전에 있는 포도주
가죽 부대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표현을 연출해 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가슴은 마치 부대 속에 가득 채워져 봉해진 포도주가 발효됨에 따라 터져 나올 것 같
은,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곧잘 '마음속에 붙은 불'로도 표현된다(렘
20:9).

20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ㅇ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 '시원하다'의 '라와흐'(* )는 '넓다', '광활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 단어는 막힘이 없는 광활한 대지 속에서 느낄 수 있
는 상쾌함을 연상케 한다(삼상 16:23). 엘리후는 욥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
진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멍에를 벗어 산뜻한 자유를 맛보는 것임
을 말하고 있다.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ㅇ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 '보다'의 '나사'는 '올리다', '운반하다',
'가지고 가다'의 뜻으로 22절에서도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취하시리로다'로 번역
함). 이 단어가 '얼굴'(페니)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면 특별히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는 것과 아울러 받아들임의 표시로서 '얼굴을 대한다'(삼하 2:22)는 의
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불공평한 행동을 누구에게도
행하지 않겠다'(NIV, show partiality to no one; RSV, show partiality to any
person)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한 뜻의 표현이 바로 뒤이어 나타난다.
ㅇ아첨하지(아카네)는 '재미 있는 별명으로 불리다'의 '카나'에
서 비롯된 단어로서, 본절에서는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다', 즉 '아첨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 역시 22절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엘리후는 논쟁을 통해서
어느 쪽-친구들이든 욥이든-을 편들어서 사람의 호감을 사는 데 있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말함으로써(G.L.Archer),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만 자신을 맡길 것임을 분명
히 하고 있는 것이다.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ㅇ나를...취하시리로다 - 엘리후가 자신의 행동 기준을 오직 하나님께 두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취하다'는 21절과 같은 단어 '나사'가 사용되었다. 본 문맥에
서는 '열풍과 같이 그를 내몰다'(30:22)로 해석된다(Pope). 이런 표현은 엘리후가 자
신의 연설이 하나님의 명예를 변호하기 위한 신성한 사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엘리후는 '하나님이 자신을 벌하실 것이 분명하기에 그는 결코 세 친구들처럼 욥에게
아첨하듯 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공포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변호자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편 21절과 본절은 a:b-b:a의 형식으로 구성된
교차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학적 기교는 욥기서에서 매우 빈번히 등장하며, 고대 근
동 문학의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의중을 보다 분명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
는 일종의 반복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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