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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욥기

[스크랩] 욥기 (31 : 1~4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1:20
욥기 31장


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ㅇ욥의 마지막 변론의 종결부인 본장은 지금까지의 모든 변호의 말을 집약하고 있다
는 인상을 준다.
ㅇ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 '언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리트'의 어
원은 불확실하나, '만약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제물로 바쳐진 동물이 둘로
쪼개어진 것과 같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상호간의 굳은 피의 맹세를 뜻하는 아카드
어 '비르투'(birtu)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구약 성경에서 이 '베리트'는 민족들
사이의 조약과 함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숙한 계약에 사용되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계약 수행에 대한 축복과 파기에 대한 저주가 동시에 명시된 하나님
의 주도적이고 일방적인 약속이며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종교적 서
원'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이 세운 언약은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하려
는 자기 스스로의 결심을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속마음까지도 철저히 정결하게 살기로 서원한 것을 뜻한다. 그만큼 눈은 마음의 생각
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에(7절) 욥은 인생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
겠다는 언약을 '눈과의 언약'으로 표현한 것이다(Habel).
ㅇ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 '어찌'는 뒤에서도 계속되는 수사 의문의 골자로서 이에
대해서는 당현히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고 있다. '처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잘
섬기던 바알의 배우자인 '아낫 여신'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Ceresko), '성
(性) 관계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처녀를 지칭한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
다. 또한 '주목하다'(빈) '간절히 바라보다'(Habel), '깊이 생각하다'
(KJV), '음탕하게 바라보다'(NIV)는 뜻을 가진 단어로, 본절에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서부터 성적인 욕망이 일어날 만큼 찬찬히 바라보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욥은 자신
이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마음에 음욕을 가지는 정도의 조도 짓지 않았음을 주장하
고 있는 것이다(9절).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ㅇ본절은 엘리바스의 힐문을 떠올리게 한다. 즉, 엘리바스는 세 번째 변론 과정에서
욥이 하나님을 세상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여긴다고 책망한 적이 있는
것이다(22가12-18). 그러나 본절로 미루어 볼때 욥은 하나님이 초월적인 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욥이 고난에 직면
하기 전까지는, 선악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현실적인 보웅을 믿어 의심
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재난에 몰린 상황이 되자, 욥은 자신과 같은 의인
이 고난을 당하고 악행자들이 오히려 번성하는 모순된 현실에 예민한 눈을 뜨게 되었
다. 본절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원칙론적으로는 절대적 공감을 표하고 있
지만, 자신의 현처지와 관련해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욥은 여기서 자
신의 결백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3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ㅇ불의자에게는 환난이 - '불의자'의 '아우알'은 '탈선하다', '돌아서
다', '부정하게 행동하다'의 뜻인 '울'에서 파생된 명사로 '당연히 지켜야 할 올바른
기준이나 옳은 행동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특히 이는 주로 하나
님을 거역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화난'의 '에드는 '멸망', '파멸',
'공포', '재앙'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종말론적인 파멸'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기
도 하다.
ㅇ행악자에게는 재앙이 - '행악자'는 문자적으로 '아웬을 행하는 사람'이
라는 뜻이며 '아웬'은 '고통', '슬픔', '우상 숭배', '허무'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모욕을 주고,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과 슬픔을 주는 행위
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재앙'(네케르)은 맛소라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말이며, '멀어지다', '적대시하다', '미워하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듯하다
(Dhorme). 여기서 욥은 불의와 행악을 용납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언급
함으로써 자신은 그러한 심판 앞에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다.

4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ㅇ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 '감찰하다'의 '라아'는 '바라보
다', '조사하다'의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지만, 특별한 경우엔
하나님이 주시하고 인정하시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내가 네 의로움을 보았다'(창 7:1)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욥은 자신의 모든 행동
을 주목하여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알았으며, 바로 그 '살피시는 눈'(7:8, 17-20;
10:14;13:27)이 자신의 결백을 인정하실 것으로 믿었다. 한편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길과 걸음을 감찰하신다는 주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시 33:13-15;119:168
;139:1-4; 잠 5:21).
ㅇ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 앞 구절보다 한층 더 세심한 표현이다. 즉, 길
대신 걸음을, 보는 대신 이제 세어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서도 욥은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계획까지도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
적 지혜를 고백하면서 바로 이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
고 있다.

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ㅇ언제...행위가 허탄하였으며 - '허탄'의 '솨우'는 '공허', '허위'를 가
리키며, 물질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실재(實在)하지 않으며 무가치한 무엇을 뜻한다.
욥이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친구들로부터 '위선자'로 취급받는 것이었
다(4:7-9;8:6, 12;11:4-6;15:30-35;18:5-21;20:5-29). 그것은 곧 욥의 과거의 선행들
마저 모두 거짓된 것으로 돌려버림을 뜻했다.

6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 함을 아시게되기를
원하노라

ㅇ공평한 저울 - '공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테크'는 '규범에서 벗어
나지 않는다'는 의미와 함께, 재판이나 상업 등에서 편견과 속임수 없는 정확함과 정
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거짓 저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정죄되고 있으며
(잠 11:1;20:10), 여기서 공평한 저울이란 눈금이 조작되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저
울과는 달리 인간의 마음을 측정함에 있어 조금의 오차도 없으신 하나님의 판결을 가
리킨다(잠 24:12). 즉,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하
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장담을 공언하는 것이다.
ㅇ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 '정직함'의 히브리어 '투마'
는 '완성되다', '끝나다'의 뜻인 '타맘'에서 파생된 말로 더 이
상 흠잡히거나 비난받을 것이 없는 완전함을 의미한다(아론의 흉패에 넣었던 둠밈도
같은 어근을 가짐. 레 8:8참조). 여기서 욥은 부정직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될 하나님
의 심문이 자신에게는 천사와 영예를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M. Henry).

7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ㅇ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 욥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인생의 행
로를 알았으며, 또 그것을 먼저 깨달은 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29:25).
'떠나다'의 '나타'는 '돌아서다', '왜곡하다', '구부러지다'의 뜻을 가지
고 있다. 대부분의 용례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사람의 마음이 돌아서는, 다시 말
해서 충성의 대상을 옮기는 배교(왕상 11:2-4,9)를 가리킨다.
ㅇ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 갔던가 - 여기서 욥은 사람의 범죄가 행해지는 일반적인
경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욥은 눈으로 봄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속의 음란한
죄조차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생각이 드는 것은 기계
적으로 나눌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지만 욥은 눈을 통해서 마음에 생기는 악한 의
욕을 스스로의 의지로 눌렀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ㅇ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대한 언급을 연상시
킨다(신 13:17). 그러나 단순히 손에 부정한 것이 닿는 소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악
을 범하는 과정이나 결과로 인해 그 손이 부정하게 되는 것과 더 나아가서는 손으로
죄를 짓는 것을 뜻한다.(11:15;16:17). 전체적으로 욥은 자신의 신체를 법죄 가능성
을 지닌 하나의 연합체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몸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
음을 주장하는 것이다(Hartley).

8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ㅇ욥은 자신의 말(7절)이 거짓이라면 자기가 땀흘려 수확한 곡물을 일하지 않은 타인
이 먹는 억울함을 당해도 그것을 거짓에 대한 마땅한 형벌로 생각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ㅇ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리라 - 여기서 욥은 본절 전반절보다 더
강력한 비유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즉, 자기가 심은 농산물이 결실하여 거
두어들여지기도 전에 멸절하여 농사를 망치는 일도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당연한 형
벌로 받겠다는 뜻이다. 농사를 망치는 일은 농부가 수고하고 노동하여 추수를 기다렸
으나 오히려 수확하지 못하고 빛 더미에 쌓이는 곤경을 말하나, 혹자는 단지 곡물의
피해만이 아니라, 욥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저주를 받아 망하는 (신 28:18)것을 가리킨
다고 본다(Hakam).

9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ㅇ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 1절에서 욥은 마음의 음욕에 대해서 철저히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했다. 이제 욥은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음행자의 모습을 묘사하면
서 성적(性的) 범죄에 대해 자신은 무관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여인'
(이솨)은 보통 '여자' 혹은 '아내'를 지칭한다. 이는 1절의 '처녀'보다 육체적, 사회
적으로 성숙한 그리고 쉽게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
한 타인의 아내이기에 더욱 성적으로 경계해야 될 신분임을 암시하기도 한다(잠 6:26,
29;7:4-27).
ㅇ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 '이웃의 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성 관계로
보아도 무난하겠다. 왜냐하면 '문'은 이웃의 딸이나 아내의 순결 혹은 성기를 언급하
기 때문이다(Habel). 또한 그 '문'을 탐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시도는 율법(출
20:14)과 지혜 문학(잠 6:23-25)에서 분명히 금하고 있는 간음을 가리키며, 그것은 필
경 파멸로 이끌 것이다(잠 7:22-27).

10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 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ㅇ타인의 매를 돌리며 - 다른 사람의 맷돌을 돌리는 일은 일반적으로 그의 종이 되어
종살이하는 것을 뜻한다(출 11:5). 이에 대해 혹자는 랍비 전통에 의거하여 이것이
'성적(性的)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Gordis, Habel).
ㅇ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 '동침하다'의 '카라'는 '엎드리다',
'무릎 꿇다'의 뜻이다. 이 단어는 대개 심한 노동이나 성적인 능욕으로 인한 굴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Hartley). 한편 남편의 범죄에 대해 그 아내가 죄의 대가
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1)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었
고 아내의 운명이 남편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었던 고대 사회의 풍습을 반영하는 것
(Habel), 또는 (2) 남편과 아내는 너무도 밀접히 연합되어 있어서 아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곧 남편 자신에 대해 극심한 수치와 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Hartley).

11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ㅇ중죄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짐마'는 '목적하다', '고안하다'에서 파
생된 단어로 '사악함', '책략', '계획' 등을 뜻한다. 본절에서는 사형에 해당할 만큼
추잡하고 의도적이며 극악스러운 범죄를 가리킨다(레 20:14). 간음은 한 사회의 기초
가 되는 가정을 와해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거역한다
는 점에서 중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율법에서도 간음자는 사형의 징벌을 당하도록 규
정되었다(레 20:10; 신 22:22). 욥 시대에는 아직 율법이 주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경
건하게 살았던 욥으로서는 자연히 간음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ㅇ멸망하도록 사르는 불 - 여기서는 간음죄의 파격적인 '힘'이 불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멸망'의 '아바돈'은 '음부', '무저갱'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
로, 본절에서는 간음죄가 죽음 이상의 파멸로 이끄는 죄악임을 강조하고 있다.

13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ㅇ남종이나 여종이...쟁변할 때에...멸시하였던가 - 욥은 또 다른 부분에서의 결백을
언급한다. 종들을 억압하고 혹사시키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흔했다. 앞에서 엘리바
스는 욥 또한 그의 종들에게 횡포를 부렸다고 몰아붙였다(22:5-9). 그러나 욥은 그들
을 학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 말을 충분히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다른 고대 근동 지역에 비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종들도 인간으로서 법적인 권
리를 보장받았다(레 25:42, 43, 55; 신 15:15).

14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ㅇ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 '일어나실' 에 해당하는 '쿰'은 일반적 의
미에서 몸을 세우는 신체적인 행동을 뜻하지만, 거기에는 일어서는 목적도 아울러 고
려될 수 있다. 특별히 법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사건을 논술하거나 판결을 선포할
때 혹은 증거를 제출할 때 법정에서 일어서는 행위를 가리킨다(Hartley). 즉, 욥 자
신이 종들의 권리를 무시하여 공의를 저버렸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변호하시기 위해
일어나셔서 자신을 정죄하실 것인데 어찌 그런 죄를 범하였겠느냐는 주장이다.
ㅇ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 '국문하다'의 '파카드'는 '계산하다', '방
문하다', '징벌하다'의 뜻으로 본절에서는 욥이 그의 가솔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하
나하나 물어보시고 그 정죄 여부를 가리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공의의 심
판자로 이해되고 있으며, 욥은 자신이 만약 종들을 공정하지 못하게 대했으면 하나님
께 어떤 대답으로도 번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ㅇ나를...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 종들에 대해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께서 '일어서시고 국문하시는'(14절)
이유이고도 하다. 그것은 곧 각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창조하신 사실에 기인한
다. '만들다'의 '아사'는 행위자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만듦을 의미하며,
특기할 점은 이 단어가 욥과 종에게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본절
하반절에서는 욥 자신과 종이 하나님의 법 앞에 동등함을 '우리'라는 말로 더욱 분명
히 표현하고 있다.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ㅇ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 본절에서 욥은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보호, 구제의
대상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호의적인 태도를 말하고 있다. '소원'의 '헤페츠'
는 '기뻐하다', '욕망을 가지다'의 '하페츠'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
서 소원을 막는다는 것은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필요를 바라는 마음을 무시하여 기쁨
을 빼앗는 무자비한 태도를 가리킨다.
ㅇ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 욥은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과부의 눈길을
무시하여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음으로써 저들의 생활을 계속 빈궁한 상태에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의 '소원'과 '눈'은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
구되는 생필품을 구하는 울부짖음이었기에 이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
하는 것과 같았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이 문제로 욥을 비난하엿으며(22:6, 7), 또한
욥은 이 비난에 대해 극구 반박한 바 있다(29:12, 16).

17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ㅇ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 계속해서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언급한
다. 욥은 자신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아들에게도 음식을 제공했다. 다시 말해 욥
은 결코 자신의 배만 채우지 않고 자기 논밭의 풍부한 수확물을 불행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었던 것이다.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ㅇ젊었을 때부터...아비처럼 - 직역하면 '나의 젊은 시절부터 나는 아버지처럼 그를
양육하였고'이다. '젊었을 때부터'는 욥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가 어려운 사람
들을 돕는 것을 보고 배우며 자랐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하며, 그때부터 계속된 구제
는 하나의 생활 습관처럼 오래도록 자연스럽게 행해져 왔음을 나타낸다. 한편 혹자는
'나의 젊은 때부터'를 '그의 젊은 때부터'로 바꿔 읽을 수 있다면, 이 구절은 고아가
어렸을 때부터 욥이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보살펴 준 사실을 뜻하는 것이라는 가능성
을 제시하기도 한다(Hartley).
ㅇ모태에서 나온 후로...인도하였었노라 - 이 구절 또한 과부에 대한 긍휼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된 진실한 구제인가를 나타낸다. 즉 이는 욥이 자신의 성품 속에 선천
적으로 온화하고 동정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기억할 능력이 생긴 이후
부터 선을 행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M. Henry).

19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ㅇ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 욥은 단지 음식뿐만 아니라 저들의 의복까지도 세심
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었다. 이것은 욥의 선행이 어느 방면에나 소홀함이 없이
온전하고, 저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일교차가 심했던 근
공 지역에서는 헐벗음으로 인해 동사(凍死)하는 사례도 충분히 있었음직하다.
ㅇ덮을 것(케수트)은 - 밤과 낮의 기온 차가 큰 기후 때문에 생긴 의복
양식의 일종으로, 이 단어는 일반적 의미에서 옷을 입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한편
으로는 밤에 추의를 막기 위해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겉옷을 의미한다.

20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하지
아니하였던가

ㅇ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 19절의 '의복'과 '덮을 것' 에 대한 구체적
인 설명이다. '양털'은 그들의 의복에 대한 욕구를 출분히 만족시켜 줄 만큼 훌륭하
고 따뜻하며 질긴 옷감이었다(M. Henry).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 직역하면 '그의 허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나를 위해
복을 빌게'라는 말이다. '허리'(할라차임;KJV, RSV, loins)는 제유적
표현으로 전인격을 의미한다(Hartley). 따라서 본절은, 욥의 순전한 마음에 의한 선
행이 저들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함께 욥에게 하나님의 축복
이 임하시길 기원했음을 의미한다(NIV는 loins 대신에 heart로 번역함).

21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ㅇ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 '도와주는 자'(에즈라
티)는 문자적으로 '나의 도움'이라는 뜻이다. 또한 '성문'의 '솨아르'는
재판이 행해지는 법정을 의미하는 '성문'을 가리킨다(29:7). 따라서 본절은 욥이 공
회의 일원이었던 탓에 재판에 있어서 판결을 임의로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
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즉, 욥은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을 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ㅇ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 여기서 '고아'는 자기를 보호할 힘이나 법정에 영향력
을 행사할 만한 아무런 방법도 없는 무력한 사람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Hartley).
'손을 드는' 행위는 책망이나 징벌을 하는 공적인 행동을 언급하는 것이나(사 19:16),
여기서는 전반부와 연결시켜 볼 때 공적인 힘을 가장하여 약한 자를 늑탈하는 권력의
남용을 뜻한다. 욥은 당시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던 이런 악행을 그 자신은 결
코 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22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ㅇ어깨가...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 공의를 집행해야 할 권력을 남용했다면
그 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징벌이 모두 팔과 관련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은 21절의 '손을 들어...쳤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매우 희화적(戱畵的)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부러진 팔'은, 구약
성경에서 한 사람의 힘이 완전히 파멸되었다는 것과 종종 하나님이 팔의 힘을 꺾으시
는 분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시 10:15;37:17;렘 48:25), 욥의 말이 거짓인 경우 그의
모든 힘이 꺾여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Hartley).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ㅇ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 하고 - 여기서 욥은 자신이 불우한 자들을 끊임없이
돕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단지 사람들과의 관계만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재앙'의 '에
드'는 겔 35:5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시적(詩的)인 부분에서 사용되었으
며, 보통 환난, 몰락, 위험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관련되어 있
기 때문에 재앙에 대한 이 두려움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결에 대한 순복
을 내포하는 경외를 뜻한다. 결국 욥의 선행은 결코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행한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어 그 경외로 인해 맏당히 자신의 행할 바가 무엇
인지 깨닫고 자발적으로 실천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ㅇ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 이제 욥은 재물과 관련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
나간다. 즉, 세속적 부(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의
'키실라'는 '어리석게 되다'의 '카살'에서 파생된 명사로
'신뢰'와 '어리석음'을 뜻한다. 그런데 신뢰와 어리석음이라는 뜻이 같은 단어 속에
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의미는 날카롭다. 이것은 그 대상에 따라 참다운 신
뢰와 의지가 될 수도 있는 반면에(4:6), 우매자의 어리석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금으로 자기의 소망을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ㅇ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하였던가 - '의뢰'의 '미브타흐'는
'신뢰하다', '확신하다', '마음이 편하다'의 '바타흐'에서 파생된 명사로
주로 시적 표현에서 사용되고 있다. 금과 정금에 대한 고대 사회의 인식은 현대와 마
찬가지로 한 개인의 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
향력을 끼치는 힘이 되었기에 그것을 통해 사회적 신분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
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욥은 결코 자신의 삶을 물질적 부에 의탁하거나, 그 힘을
빌어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5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ㅇ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재산 특히 자신
의 능력으로 축적한 재물에 대해 인생의 보람을 삼으며 축적한 재물에 대해 인생의 보
람을 삼으며 자랑하지만 욥은 자기의 재물이 풍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힘과 지혜로
인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 이 점은 그가 갑작스런 재난으로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1:21)라고 고백했던 사실과 맥
을 같이 한다. 한편으로 욥은 24절과 본절을 통하여 하나님 대신 재물에 의지한다고
말한 엘리바스의 비난(22:24, 25)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26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ㅇ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 본절에서부터 28절까지에서 욥
은 우상 숭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24,25절도 같은 주제의 구절로
볼 수 있지만(Anderson), 태양, 달, 별을 섬기는 고대 근동의 이교적 제사 의식에 대
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 부분만 따로 분리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태양'의
찬란한 광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다스린다고 생각케 할 만큼 위엄이 있었을
것이다(Hartley). 한편 혹자는 '빛'의 의미를 강조하여' 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해하지만(Hakam), 뒤 이어지는 '달의...'와의 병행구임을 생각해 볼 때 호소력이 약하
다. 결국 태양과 달에 대한 이러한 표현들은 이것들을 신(神)으로 섬겼던 당시 근동의
상황을 보여주는 한편, 욥 자신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그토록 금했던(신 4:19;
렘8:2) 이런 죄악들을 결코 범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27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ㅇ손에 입맞추었던가 -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내 손을 내 입에 댔다' 혹은 '내 손이
내 입에 입을 맞추었다'(MT, EBC)이다(개역 성경은 my mouth has kissed my hand로 번
역하고 있는 KJV, RSV의 변역과 일치함). '손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신성시하는 대
상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Pope, 와상 19:18;호 13:2), 본절에서는 분명히
'우상 숭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숭배의 대상이 멀리 하늘에 있어서 직
접 그것에 입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손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이
기 때문이다. 욥은 태양과 달의 위용에 자기의 마음이 압도되어 은근히 그것을 숭배
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신성시함으로써 자연물 이상의 마음을 품는 영
적인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28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ㅇ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 본절을 하나의 삽입구로 보는 견해(Hanh,
Schlottman)도 있다. 그러나 11절이 9,10절과 직결된 내용인 점을 고려할 때 오히려
본절이 26,27절 다음에 오는 것이 더 타당하다(Keil, Delitzsch). 신 17:2-5에 의하
면 우상 숭배는 돌로 쳐 죽일만큼 중죄였다. 이미 욥은 11절에서 '육체적인 간음' 에
대해 동일한 형벌을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구약 성경에 보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하나님에 대해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호 9:1,2). 이
로써 우리는 욥이 우상 숭배와 간음죄를 동일한 맥락의 중죄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욥은 여자를 바라보거나(11절), 천체를 바라봄으로써 짓는 그 어떤 죄도 범하
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눈'과 언약을(1절) 세웠기 때문이었다.(Habel).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30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아니하였느니라

ㅇ29-34절은 앞 구절들과는 조금 다른 구조를 갖는다. 죄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그
에 따르는 형벌이나 저주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이 삽입된 것으
로는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본장의 문맥 구조의 특징인 'If절'(임;개역 성
경은 '내가 언제'로 번역함)이 여기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ㅇ기운을 뽐내었던가(히테아라르)는 - '분발하다', '깨우다', '자극
시키다'의 뜻을 가지는 '우르'의 파생어이다. 본절에서는 자기의 원수에
게 재앙이 닥친 모습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쾌감과 흥분을 표현하는 말
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쾌감'임에도 욥이 그것
을 부인한 것은 그이 윤리 의식이 실로 높은 경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Anderson).
한편 성경에서 원수에 대한 태도는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시편의 저주 시(58,
109, 137편)는 신앙의 정도(正道)를 훼방하는 무리들에 대한 미움을 굳이 배제하지 않
으며 다른 곳에서도 공공연히 자기를 해하려는 자에 대한 미움과 저주를 언급하고 있
다(8:22;12:5;27:7). 또 하나의 태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출 23:4, 5;레 19:18;
잠 24:17,18). 본절에 나타난 욥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표
준(마 5:43-48;눅 6:27-36)에까지 연결되는 높은 도덕적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다
(Hartley). 한편 욥은 이를 통해 자신을 원수로 대하시는 듯한(13:24, 25) 하나님의
태도(16:9-14)와 대조하고 있다(Habel).

31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ㅇ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뇨 - 혹자는 이 부분을 '우리가 그의
몸을 먹을 때에 우리 배가 부르지 않았던가'로 읽음으로써 본절을 30절에 속하는 것으
로 주장한다(Arnheim). 즉, '누구의 몸을 먹는다'는 표현은 19:22과 같은 수사적인
의미이며, 따라서 본문은 악인의 멸망을 즐기지 않았던 욥 자신의 순결한 마음을 증명
하는 구절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은 32절과 함께 욥의 자선에 관한 언급으로 보
는 것이 문맥상 더 옳다고 하겠다(Keil & Delitzsch). 여기서 '장막 사람'은 어원상
'천막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외지에서 온 친족 내지는 부인, 자녀 등 가족을 포함하
며, 특히 욥의 하인들을 언급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인과 친척, 가솔들
을 후히 대접하였으며, 그로 인해 욥에 대한 저들의 칭송이 자자했음을 보여준다.

32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ㅇ욥의 손님 대접의 모습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은 나그네를 극진히 접대한
아브라함과 롯(창 18:1-5;19:1-3)을 연상케 한다. 욥은 여행객들이 도시의 광장이나
넓은 공지에서 쉴 곳을 찾을 때,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머물도록 했다. 때문
에 욥은 집 대문은 나그네들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었던'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투르 시나이(Tur-Sinai)의 해석에 동조하여 31절의 '고기'에 관한 업급을 '사람의 육
체' 즉 '음경'(겔 16:25;23:20)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이 구절을 욥이 동성 연애와
같은 융악한 범죄를 예방하였음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
절의 분위기가 창 19장의 소돔 성과 동일함을 주장하며, 거리에서 나그네를 재우는 것
은 그 도시의 부랑자들에게 성적인 풍기 문란의 기회를 주는 것임을 알고 있던 욥이
그러한 성적인 탈선으로부터 나그네들을 구하려고 특별히 노력하였음을 뜻하는 부분으
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것을 31절의 '고기'라는 말에 너무 집착한 유추
에 불과할 뿐이라고 본다(Anderson).

33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 물을 가리었었던가

34 상동

ㅇ개역 성경은 이 두 절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
은 '내가 언제(임)타인처럼 내 죄악을...가리었었던가'를 33절로, '그 이유
는(키)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나가지 아니하여'를 34절로 나타내고 있다
(KJV, NIV, RSV도 원문과 같음).
ㅇ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 '타인처럼'은 문자적으로 '아담처럼'
(케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히브리
어 '아담'을 보통 명사로 보아 '일반적인 사람'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Hartley, NIV).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사람들이 보통 (죄를 숨기기 위해) 하는
방법처럼'이 된다. 그리고 로린슨(Rawlinson) 같은 학자는 갈대아인들의 고대 전승에
창 3장의 아담기사와 유사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욥이 아담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
었으며, 따라서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처럼'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두 번째 해석은 '아담'을, 자신의 죄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낯을 피
해 숨었던(창 3:8) 아담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보는 견해이다(Anderson, Gordis,
Habel, Lange, KIV).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6:7을 평행 구절로 제시하며
그것이 '이스라엘의 범죄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야기된 구속사의 발전 단계 중의 한
사실임을 의미'하는 것처럼, 욥의 이 말도 '내가 만약 아담처럼 내 죄악을 숨겼다면'
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 이 구절을 통해 욥이 의도하려는 바는
'자신의 조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숨기는' 일반적인 경향을 지적하려는 데 있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욥은 자신의 마음속에 죄를 숨기고,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위선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행동이 당당했던 것은 결국 죄에 대해 떳떳하다는 사실, 즉 자신의 결
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5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ㅇ본절에서부터 37절까지는, 욥이 자신은 결코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죄의 목록
들을 모두 열거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결백을 제시하는 '공식적인 탄원'의 부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역 성경의 본장의 배열을 다
소 바꿔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학자는 38-40절을 8절 뒤에 놓음으로써 이 문제
를 해결하고 있으며(Habel, Pope), 하틀리(Hartley) 같은 주석가는 38-40절을 34절 뒤
에 이어지는 마지막 죄의 목록으로 이해함으로써 35-37절을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38-40절이 8절과 유사한 주제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38-40절은 욥의 모든 진술을 요약해 주고 의미를 강조해 주는 재반복의 부분이기 때문
에 본장의 결론이 되기에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Anderson).
ㅇ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 원문대로 직역하면 '누가 듣는 자를 나에게 주
겠느냐 ?'이다(Pope). '듣는 자'의 '쇼메아'는 '듣다', '경청하다', '순
종하다'의 뜻을 가진 '솨마'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절에서는 억울한 사정
을 듣고 그것을 해결해 주는 공정한 재판관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
에 대해 모두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고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일이다. 그래서 욥은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그러한 판단자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 사
람은 본절 중에 이미 나타나듯 다름 아닌 하나님(솨다이, 전능자)이시다.
욥은 하나님의 판결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ㅇ내대적의 기록한 소송장 - 욥이 하나님의 판결을 단지 개인적인 말로 요구하지 않
고,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번째 표현이다(첫 번째 표현은 '나
의 서명'임). '소송장'의 '세페르'는 '보내다', '쓰다'라는 뜻을 가진 아
카드어 '사파루'의 파생 명사로서 보통 '글',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고소장'
혹은 '사면장'을 뜻하는 법적인 문서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며, 양자 중에 어떤 것이냐
는 욥의 '대적'에 대한 해석과 36절의 의미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문자적으로 '대
적'(아쉬리비)은 '법적 대상자'(adversary at law), 즉 '고소
자'(NIV, accuser)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욥의 '세 친구'라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랑게(Lange)는 그것을 문맥에 반대되는 해석이라고 하며 포우프
(Pope)와 마찬가지로 '적대자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하벧(Habel)은 이에 대
해 좀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그의 이 고소자는 '전능자'일 수도 있으나,
일반적인 중재자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그는 고소자에 의해서
제출되는 '서류'의 성격에 더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결백에 대한 주장
들이 하늘로부터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보며, 따라서 욥의
대적에 의해 제출된 서류는 바로 '사면장'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36절
에서 욥이 그 소송장을 어떤 태도로 취급하고 있는가를 볼 때 보다 타당성이 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36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ㅇ어깨에 메기도 하고 - 어떤 것을 어깨에 걸치는 것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것을 의미한다(Pope). 왜냐하면 통치자는 자신의 어께에 권위와 다스림을 메는 것으
로 표현되기 때문이다(Hartley, 사 9:6;22:22).
ㅇ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 전자와 유사한 표현으로, '면류관'은 지혜 문학
에서도 명예, 아름다움 및 축복을 상징한다(잠 4:9;12:4;17:6). 이처럼 욥은 자신의
무죄를 통해, 의의 옷을 입고 정의를 수행하는 지도자(29:14)로서 또한 머리에 면류관
을 쓴 치리자로서의 이전 지위와 명예를 회복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37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ㅇ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 '걸음의 수효'는 자신의 삶과 관련된 모든 행동 하
나하나를 대유하는 표현이다. 또한 이것은 외형적인 행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생활 방식 등 내면의 모습까지도 포함하는 인생의 총체적인 내용을 의미한다. 이는
아무것도 꺼릴 것 없을만큼 자신의 행위는 결백하기 때문에 자기를 고소하는 자에게도
오히려 대담하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다는 욥의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다.
ㅇ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 '왕족처럼'의 주체는 욥 자신이다. 성경에서
'왕족'(나기드)은 보통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여호와와 왕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Hartley). 그러나 문맥상으로 '왕족'에 대한 언급은 자
신의 고소자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섭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욥은 자신의 대적이
고소하는 그 앞으로 위엄있고 당당하게(마치 왕족의 태도처럼) 걸어서 다가갈 것이다.
왜냐하면 욥 자신은 결백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죄에 대한 이토록 확고한 주장은
욥의 진술에 있어서 최고 절정을 이루고 있다.

38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ㅇ토지가 부르짖어...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 욥의 마지막 죄목이며 그것자에 대한
결백을 표현하는 부분이다(38-40절). 내용은 경작지의 합법적인 사용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땅자체에 관한 법으로 안식년의 구례와 관련되며(레 25장), 다른 하나는 땅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사람에 관한 법으로 면제의 규례(신 15장)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한편 따을 의인화하고 있는 이 표현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할 때에 땅이
그 죄로 인하여 탄식하리라는 구약의 표현과 일치한다(사 24:1-3;호 4:1-3).

39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ㅇ값을 내지 않고...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 '값'의 '케세프'
'열망하다','부끄러움을 모르다'의 뜻을 가진 '카사프'에서 파생된 명사
로 본절에서는 일꾼의 '품삯'을 의미한다. 흥미있는 것은 이 단어의 어원이 '재물'
을 향한 인간의 욕심을 표현하는 뜻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먹고'의 '아칼'
은 '소멸하다', '게걸스럽게 먹다', '다태워버리다'를 뜻한다. 즉, 이 표
현은 수확을 위해 일한 품삯도 주지 않은 채 그 소산물을 독차지하는 소유주의 탐욕스
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본절에서 욥은 땅의 소유주로서 자신으 의무
에 충실하였기에 그 어떤 착취나 인색함(레 19:9, 10)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0 그리하였으면 말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ㅇ밀 대신에 찔레가...보리 때신에 잡풀이 - 만약 욥이 땅을 그릇되게 사용했다면 그
에 따른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찔레와 잡풀'은 선지자들이 선
포한 바에 의하면, 제멋대로 행하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들이
다(사 5:6;34:13;호 9:6). 경작지에서 이런 것들이 자라는 것은 곧 경제적인 기반을
잃게 됨으로 삶이 패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뜻한다. 한편 땅과 관련된 이 마지
막 결백의 맹세는 욥이 서두에서 언급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1-3절)과 연결됨으로
본장의 주제가 '언약'임을 재삼 상기시키고 있다(Habel). 욥은 하나님과 서약한 모든
것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다 수행했기 때문에 자신은 이 고난에 대해 결백하다는 사
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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