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하

[스크랩] 열왕기하 (7 : 1~2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8:37
열왕기하 7장

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ㅇ혹자는 본절 이후의 사건을 앞장의 기사와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T.R.Hobbs).
왜냐하면 6:33에는 등장 인물이 '사자'인데 반해 2절에서는 그 등장 인물이 '한 장관'
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상으로 보거나, 사건의 연결상
으로 볼때에 앞장의 사건과 본절에는 긴밀한 연결 관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
냐하면 7:1, 2절은 앞 사건의 한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기사의 절정이기 때문이
다(G.Rawlinson).
ㅇ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예언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고전적인 서론 형식을
엘리사가 이처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서론 형식은 공공의 집회에서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 시키기 위하여 흔히 사용되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렘
2:4;10:1;미 3:1;암 7:16,17). 그리고 '들을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마'
는 단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고(렘 2:4) 혹은 복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는데(미
3:9) 일반적으로는 복수 형태로 사용되는 것이 정상이다(Hobbs). 그러나 이 단어가 단
수로 사용될 때는 '듣는 무리를 하나로 취급할 때'나 '무리 속에 있는 개개인을 하나
하나로 간주해 그 설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이다(렘 22:2).
ㅇ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러한 표현은 사마리아 성이 아람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가라사
대'란 말은 히브리어 '아마르'의 번역으로서 '대답하다', '확인하다', '명하
다'란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여호와의 확신적 선언임을
알 수 있다.
ㅇ내일 이맘때에 -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에트'는 명사 '에
트' 앞에 전치사 '카'가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가 구약에서는
아주 드문 예로서(민 23:23;수 11:6;삼상 4:20;왕하 4:16), 이것은 어떤 특별한 시점
(時點)을 가리킨다. 즉,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
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말한 바로 그 '때'(카이로스)와 같은 의미
를 나타내는 것이다.
ㅇ사마리아 성문에서 - 고대의 성들에는 큰 성문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넓은 뜰이 함
께 있어 그 지역 사회의 공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공적인 연설의 장소(창
34:20), 공무 집행소(왕상 22:10), 재판이 열리는 곳(신 17:5;행 7:58), 사열하는 곳
(삼하 18:4)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렘 17:19,20)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
러나 본장에서는 성문이 곡물을 파는 시장으로 사용된 듯하다(17,18절).
ㅇ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 여기에 언급된 한 '스아'는 한 '에바'의 약
1/3에 해당되는 부피로서 약 7.33l 정도이다. 한편 이것이 평상시보다는 고가에 해당
되지만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는(6:25) 엄청난 가격 절하이다. 즉, 고운 가루 한 스아
의 값이 당시에 거래되던 합분태 사분 일 갑(* ,kab)에 해당하는 가격의 1/5밖에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갑'(약 1.3l)은 한 '스아'의 약 1/6에 해당되므
로 이것을 통해서 고운 가루의 가격 절하 정도가 얼마만한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따
라서 이 예언이 기근으로 허덕이던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로 들
렸을 것이다. 한편 '한 세겔'이 금인지, 혹은 은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
으나, 금 한 세겔은 은 한 세겔의 15배에 해당되고(대상 21:25) 은 한 세겔은 일반 노
동자의 4일에 해당하는 품삯이다(출 30:24;삼하 24:24).

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ㅇ한 장관 - 여기서 '장관'을 뜻하는 히브리어 '솰리쉬'는 '셋'을 의미하
는 '솰라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BDB(F.Brown, S.R.Driver, and C.A.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에서는 '병거에 탄 세번째 사람'으
로 번역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혹자는 이를 '셋째 관리'로 번역하기도 한다
(Thiele, Mysterious Numbers, p.114). 한편, 거니(Gurney)에 따르면 헷족(Hittite)의
전차는 세 사람이 몰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전시에 가능한한 빨리 많은 사람들을 수
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암세스 2세와 가데스에서 전쟁할 때 헷족
(Hittite)은 바로 이러한 삼륜 전차를 이용했다(Yadin, Art of Warfare 1:104-105),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솰리쉬'라는 단어가 군대와 관련해서 번역된 적
은 전혀 없다(T.R. Hobbs). 오히려 출 15:4에서는 '택한 장관'(RSV)으로, 겔 23:23에
서는 '귀인'으로 번역되어 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는 자를 나타낸다(Pulpit
Commentary, Keil & Celitzsch).
ㅇ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 왕의 전속 부관(the kings aide-de-camp,Keil &
Delitzsch, Vol. , p.330), 즉 나아만과 같은 직급에 속한 이 사람은 이스라엘 왕이
신임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ㅇ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 이것은 창 7:11에 기록
된 홍수 사건을 의식한 말로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의 진실성을 의심한 것이다. 그리
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심하게 조롱한 것
이다(K.W.Bahr). 따라서 그는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20절).

3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ㅇ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문둥이들은 게하시의 아들
들이라고 하는데(T.R.Hobbs)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리고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 하여 이스라엘의 공동
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서 살았으며(레 13:46;민 5:3) 친지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
로 연명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당시에는 성 안의 거주자들도 목구멍에 풀칠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음식 공급이 단절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
다. 한편 혹자는 이 문둥이들이 '성문 앞' 혹은 '통로'(hateway)에 있었다고 한다
(Keil & Delitzsch, Vol. ,p.330).

4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 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ㅇ주리니 -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라아브'로서 '시장하다',
'갈망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표현은 약간의 갈증이나 시장기가 아닌
배가 고파서 속이 쓰리며 기운이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ㅇ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 즉, 네 문둥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는 길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했다. 여
기서 '항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탈주하다', '떨어지다',
'눕다'라는 뜻 외에 '넘어가다' 라는 뜻도 지닌다(삼상 29:9;렘 39:9). 이에 따라서
70인역(LXX)에서는 '들어가자'란 뜻이 헬라어 '에이셀데인'으로
번역되어 문둥이 네 사람이 아람에게 항복하러 간것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들어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KJV과 RSV도 70인역(LXX)의 이러한 번역을 지지해 주
고 있다. 그러므로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에 가고자 한 행위를 반드시 항복하러 가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단순히 양식을 구하러 들어갔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5 아람 진으로 가려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ㅇ황혼에 일어나서 - 본절에서 '황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쉐프'는 '해
뜰때' 나 '해 질 무렵'의 엷은 태양빛(twilight)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명', '황혼'등
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의 9절과 12절을 근거로 해서 볼 때 '황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Keil & Delitzsch,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6 이는 주께서 아람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ㅇ이는 주께서...듣게 하셨으므로 -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으로 향해 가는 것과 동시
에 병거 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큰 군대의 소리를 아람 군대에게 듣게 하신 것은 하나
님의 이적적인 역사였다. 그 뿐만 아니라 3:22에서도 아람은 이와 유사한 방법에 의해
속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가 되심을 보
여 주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나아만을 통하여 아람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셨으
나(5:1) 또한 이와같이 패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소리의 근원을 산골
짜기에 밀어닥친 바람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K.W. Bahr, Wycliffe).
그러나 '소리'(soun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로서 '인간의 음성'을 나
타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억측에 불과하다(G.Rawlinson).
ㅇ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 여기서 언급된 '헷 사람의 왕들'을 초기 헷
(Hittite)제국의 제왕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B.C.1200년경 오늘날의 터어
키(Turkey)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헷 제국은 앗수르와 해안에 퍼져있던 소수 민족들에
의해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왕상 9:21에는 솔로몬이 헷
제국이 멸망한 뒤에 남아있던 헷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헷 문화는 아람 북쪽에 남아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헷족의 여러 왕들 또
는 장군들에 의해 전해져 오다가 후에는 점차적으로 셈 문화에 병합되고 말았다. 따라
서 여기서 말하는 '헷 사람의 왕들'은 바로 소규모 집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Gelb,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2:612-615; O.R.
Gurney, The Hittites, 39-46). 그리고 당시에 이들은 소규모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상
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갈그미스 부근의 북 아람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니느웨 왕들에게
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왔었다. 그래서 이들이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왔다고 아람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G.Rawlinson). 또 본절의
'애굽 왕들'이라는 복수 형태의 표현에도 상당한 논란점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은 언
제나 단일 왕 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
능하다. (1) 당시 애굽 왕조의 분열로 부바스티스(Bubastis), 타니스(Tanis), 멤피
스(Memphis) 지역을 각기 다른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들'이라는 복수 표
현을 썼다는 해석이 있다(G.Rawlinson). (2)히브리 본문에서 '애굽'을 뜻하는 '미츠라
임'을 '무스리'(Musri)를 뜻하는 '무츠림'으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T.R.Hobbs, Wycliffe). 왜냐하면 당시 무스리는 소아시아의 실리시아(Cilicia)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수의 왕들이 복수제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Gurney, T
he Hittites, p.42-43). 그리고 앗수르의 기록들을 보면 종종 애굽을 무스리라고 칭
했는데 이렇게 명칭을 서로 바꾸어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무리없이 '
애굽왕들'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무스리가 애굽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
라서 아람은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도와 자신들
을 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니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Herzog and Gichon, Battles of the Bible, p.233).

7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ㅇ황혼에 일어나서 - 5절과 비교해 볼 때 아람 군대가 달아난 시각과 문둥이들이 아
람진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시간이 거의 일치한다.
ㅇ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 그들이 왜 좋은 말과 나귀를 그대로 버려
두고 달아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은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군장을 꾸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기드온의 300용사의 외침에 놀란
미다안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던 상황과 유사하다(삿 7:19-23). 이처럼 하나
님의 권능은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시 76:12;요 2:11;습
2:11). 그러나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되시고(시
33:20;46:1;121:1;146:5;사 50:7;고후 6:2), 피난처가 되신다(시 14:6;46:1;렘 17:18;
욜 3:16). 또 혹자는 작전상 적으로 하여금 그들이 진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G.Rawlinson). 한편 나귀는 고대의 군대에 있어서 짐과
사람을 운반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동물이었다.

8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9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ㅇ본절에는 네 명의 문둥이가 아람 진영에 들어가서 취한 행동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 식욕을 채움:이 식욕은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문둥이
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목숨까지 건 위험을 감행했다. (2) 재물욕을 채움:일단
식욕이 채워지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문둥
이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위해 온 신경
을 쏟으나, 그럴수록 탐욕으로 인한 공허감과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간다(시 39:6
;합 2:9;딤전 6:9-11).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다. 즉,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기는 들으나 세상의 염려
와 재리(財利)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에 비유된다(마 13:22). 그러나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마 6:25,31).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
은 기본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마 6:32). (3) 뉘우침:문둥이들은 자신
들의 배만 채우는 소위(所爲)를 뉘우치고 성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형제들에 대
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둥이들의 행위는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받은 성도들
에게 적용된다. 우리들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음을 받았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어 두기만 한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마 25:29).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9:16). 한편 9절에 표현된 '아름다운
소식'은 히브리어 '베스라'를 번역한 말로서 항상 좋은 소식을 뜻하는 것
만은 아니다(삼하 18:20). 그러나 여기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문둥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단순한 조국
애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이때에 자기들만의 욕심을 채운
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Word Biblical Commen
tary, Vol. 13, p.91). 그래서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선치 못하다'고 표
현했는데 이는 히브리어 '로켄'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행
위가' 적절치 못하다'는 뜻으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죄라기 보다는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자기 점검을 의미한다.

10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11 저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저희가 왕궁에 있는 자에게 고하니

ㅇ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 여기서 '문지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에르'
(* )는 성문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Keil). 여기서 문
둥이들은 자신들이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당시의 규례(레 13:46;민 5:3) 때문에 성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아람군이 도망했다는 기쁜 소식을 문지기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살리는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여러 단계의 명령 계통을 거
치게 됨으로 시간적으로 상당히 지체되었을 것이다(11절). 한편 10절의 '아람진에...
있더이다'라는 표현은 문둥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결정을 실천에 옮긴 사실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그들은 직접 목격한 사실을 조금도 과장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사실대로 전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도 귀로 듣고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진 바
된 복음을 조금도 변개함이 없이 그대로 전한 것과 같다(요일 1:1-3). 이와 반대로 하
와는 뱀의 유혹시에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자신의 생각으로 바꿔 말했다(창
2:17;3:3). 그래서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
(창 3:16).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단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고 말했다.

12 왕이 밤에 일어나 그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저희가 우리의 주린 것을 아는고로 그 진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저희들이 성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ㅇ이스라엘 왕은 문둥이들이 전한 소식을 즉시 믿지 않고 이것을 아람 사람들의 책략이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장에서는 공직자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공통적으로 보여 주게
된 것이다(2절). 그렇지만 왕의 추측이 전혀 황당 무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스라엘의 공동체와 격리되어 살던, 문둥이에 지나지않은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수 8장)도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했었으며 아비멜렉이 세겜 성을 탈취할 때(삿 9:30
절 이하)도 동일한 책략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왕은 쉽게 그렇게 판단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경험과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되고 있음
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마 15:3;막 7:13;요 11:24). 한편 신약에서
도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인위적인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이 두고 그 전통
으로써 모든것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마 15:3;막 7:13)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도 믿지
않으려고 했다(요 9:1-34). 이와 유사한 예를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와 아주 밀접한 사이였으며 그분의 말씀도 열심히 들었던 자
들이다(눅 10:38-42). 그런데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께서 죽은 나
사로를 살리시리라고는 믿지 못하고 마지막 부활만을 고집하고 있었다(요 11:24). 이
때에 예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꾸짖으셨다(요 11:40).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교리에 집착해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2
절).

13 그 신복중 하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필을
취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소서 이 말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ㅇ나아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5:13) 본절에서 왕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신하에 의해
문제의 해결점을 모색하게 된다(3:11;6:12). 즉, 한 신복의 제안은 네 명의 문둥병자
와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리자는 것으로 결국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ㅇ이 말들이...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 이것은 '이 마병들이 성중에서 이미 죽었거
나, 아니면 아직 생존해 있는 모든 이스라엘 무리와 같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
시 말해서 그 마병들은 성중에 남아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사(餓死)를
당하게 될 것이며, 설혹 적진에 들어가 붙잡히더라도, 싸울 힘이 없어 점령당할 사마
리아 성민과 같이 죽게될 것이니,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14 저희가 병거 둘과 그 말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ㅇ저희가 병거 둘과 그 말을 취한지라 - 여기서 왕이 아람을 정탐하러 보내면서 마병
이 아닌 병거를 보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리고 병거 둘에 말 다섯 마리
(13,14절)를 취한 것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 병거에 두 마
리의 말이 쓰인 경우가 있고 세 마리가 쓰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후자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 즉, 왜 마병 대신에 병거를 보냈는지에 대
해서는 여전히 어색한 점으로 남는다. 한편 히브리 성경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에는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켑'을 '리
케비'로 수정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이 단어는 분명히 '마병'이라는 뜻
이 된다(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p.91). 그러나 그렇게 본문을 수정할 필
요는 없다. 왜냐하면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켑'은 다양하게 번역되
기 때문이다(13:7;신 24:6;삿 9:53;삼하 8:4). 그리고 왕이 두 병거를 동시에 보낸것
은 하나가 적에 잡히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급히 돌아와 보고를 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
로 추측할 수 있다(Lange Commentary).

15 저희가 그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고하매

ㅇ저희가 그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 아람이 요단을 통과하여 자신들의 본국으로
도망간 것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경로를 통해서였다. 실제로 아람의 퇴각로는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와디 파리아(Wadi Faria) 사막을 통과하여 '아담의 다리'(Bridge of
Adam)가 있는 요단 강쪽을 지나 얍복 강으로 도망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6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로 왔던 길, 즉 도단 계곡(the Valley of
Dothan)의 북쪽 제닌(Jenin)을 지나 야무크(Yarmuk)로 도망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외
의 길은 모두 적지를 통과하는 길이므로 퇴각로서는 부적합한 길이었다(T.R.Hobbs).
한편 요단 강까지 따라간 정찰병들은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에 대한 공격 의지를 완전
히 버리고 도망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ㅇ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 이것을 볼 때 12절에서 왕이 의심한 것과
같이 아람 군대가 도망간 것처럼 꾸민 책략으로 보기에는 너무 실제적이다. 한편 여기
서 '군물'(軍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림'은 일반적으로 '그릇'
(Vessel)으로 번역되지만 본절에서는 '무기'나 군인들이 사용하던 '물건'으로 번역해
도 좋은 것 같다(T.R.Hobbs).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아람 군대가 얼마나 황급히 도망했
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16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ㅇ본문에는 두 가지 예언의 성취가 기록되어 있다. (1)경제의 회복:엘리사는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1절)고 왕에게 예언했던
바, 이것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자기 아들을 삶아 먹을 정도로 기근이 심했던 사마
리아 성의 경제가 하룻밤 사이 이렇게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이적이었다. (2) 장관의 죽음:엘리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장
관에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2절)고 심판적인 예
언을 했다. 이 예언도 정확하게 이루어졌으니, 곧 그가 성문의 출입을 통제하던 중 백
성들의 발에 밟혀 죽음으로써 그 곡식들을 맛보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무
시 했던 장관은 사마리아 성이 구원되는 그 순간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출애굽 노정에서 여호
수아와 갈렙 외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
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반역했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
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히 3:17-19;4:5,6). 이와 마찬가
지로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롬 11:11). 하나님께서는 본절에 기록된 것
보다 더 큰 이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을 믿
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밟혀 죽은 장관과 같이 구원의 소식만 듣고 그것에 참예하지
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한편 엘리사의 예언에 대해 불신앙을 나타냈던 한 장관을
백성이 '밟으매'라는 말은 매우 엄격하고 잔인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히브리어 '이르메수후'를 번역한 것으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기기 위해 짓밟은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18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20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ㅇ본문은 본장 전체의 요약으로 볼수도 있고 단순한 부차적인 설명으로 볼 수도 있다
(Montgomery). 그러나 그레이(Gray)의 말처럼 본문을 통해서 열왕기서 기자는 하나님
의 약속과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강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부가시켜
준다. 또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문둥이 네 사람과 아람 군대를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가장 미천한 것을 들어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을 주관하심으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
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