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9장
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ㅇ선지자 엘리사가 - 성경에서 본절과 같이 '선지자'와 '엘리사'틀 함께 묶어서 표
현한 곳은 극히 드물다. 즉 지금까지는 엘리사라는 이름만 언급되거나(3:13;4:1;6:1)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별칭(4:7;5:14;6:10;7:2)이 따로 따로 쓰였다.그러나 여기서 특
별히 선지자 엘리사라고 기술함으로 '선지자'의 신분과 엘리사의 이름을 강조한 것은
새 왕의 옹립(擁立)과 관련된 것이다. 즉 선지자 엘리사라고 표현함으로 인해 예후를
왕으로 세우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엘리
사가 사역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ㅇ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엘리사에게서 사명을 받은 생
도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14:254).
좀 더 자세한 것은 2장 주제 강해, '선지자의 생도들'을 보다 참조하라.
ㅇ너는 허리를 동이고 - '동이다'란 말은 히브리어 '하고르'를 번역한 것
으로 '허리띠로 조르라'는 명령어이다. 히브리인들은 통으로 된 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동에 용이하도록 허리에 띠를 둘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행 차림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임을 나타낸다(4:29).
ㅇ길르앗 라뭇으로 가라 - 본절의 표현 양식으로 보아 당시에 엘리사가 거주하고 있
었던 곳은 사마리아가 틀림없다(Bahr). 그리고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을 경
계선으로 하여 동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즉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의 사이는 약 65km 정도 되는 거리이다. 한편 이때에 예후는 길르앗 라못
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왕 요람은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이스르엘에
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15절). 전투중인 길르앗 라못에 관한 보다 자세한내용에 대해
서는 8 :28 주석을 참고하라.
2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3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지니라
4 그 소년 곧 소년 선지자가 드디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5 저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았는지라 소년이 가로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예후가 가로되 우리 모든 사람중에 뉘게 하려느냐 가로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벧에게 갚아주리라
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ㅇ이스라엘을 다스린 네 왕가는 (1) 여로 보암 왕가(B.C. 930-909 ), (2) 바아사 왕
가(B.C. 909-885), (3) 오므리 왕가(B.C. 885-841), (4) 예후 왕가(B.C. 841-752)이
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가는 여호와의 노를 격동사칸 알로 안하여(왕상 15:30) 바아사
에 의한 멸망을 당했고(왕상 15:29), 바아사 왕가는 7일 동안 왕노릇한 시므리에 의해
서(왕상 16:15) 아합과 같이 그 일족이 몰살됨으로 멸망했다(왕상 16:11, 12). 그리고
시므리도 바아사와 동일하게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범죄함으로(왕상 16:19) 왕궁에 불
을 놓고 그속에서 타죽었다(왕상 16:18). 그와 더불어 아합의 왕가 또는 오므리 왕가
는 예후에 의해서 멸절하게 된다. 한편 이들의 공통점은 '여호아 보시기에 악을 햐했
다'는 점이다. 특히 본절에 언급된 앞의 세 왕조는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 및 여러 우
상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 죄
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 통칭되었다(왕상 12:28;15:26;16:2, 19, 26,
31;22:52).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 숭배죄를 어느 왕조보다도 많이 범한 아합
왕조에 대해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 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러
한 하나님의 형벌은 자신의 배만 위하는 탐욕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탐
욕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엡 5:5). 그 대표적인 예로 아간과(수 7:1-26) 그리스도
를 팔아 넘긴 유다가 있다(행 1:18). 그러므로 재물과 명예, 그리고 방탕한 일에 욕심
을 내는 모든 사람도 본절에 기록된 아합 왕가가 받은 심판 뿐 아니라 아간과 가룟 유
다가 받은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그 길을 돌이켜
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겔 39:9, 11, 18, 19).
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벧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11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ㅇ그 미친 자 -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슈가'는 대단히 광범위하
게 사용된다. 즉 신 28:34에서는 그것을 의학적인 정신적 질병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와 비슷한 정신적 질병이 걸린 것처럼 눈속임을 한적이 있던 것이다(삼상
21:13). 또 호 9:7과 렘 29:26에서는 악한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용어로 즉, 선포적이
고 질타적인 의미의 말로 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미 3:5-8). 한편 혹자는 이것을 선
지자가 무아경에 빠졌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Montgomery). 그래서 삼상 10장
에 나오는 선지자의 무리들의 이상한 행위도 이와 같은 유로 간주한다. 그 뿐만 아니
라 본절에서도 예후의 군대 장관들은 무아 경지에서 예언하는 선지자를 조롱하는 말로
'그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것이다(Keil). 이것은 당시 선지자들에 대한 평판이 대체
적으로 경멸하는 풍조였음을 반영하는 말이다.
ㅇ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개 왔더뇨 - 군대 장관들이 예후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선지자의 생도가 갑작스럽게 출현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
지지 않았나 하는 궁금한 마음과 함께(Pulpit Commentary) 어떤 중대한 소식을 갖고
왔을지 모른다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Keil & Delitzsch).
ㅇ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함 것을 알리라 - 본 구절에 대해 학자들 간에 주장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혹자는 이 말을 예후는 그 사건을 이미 사전에 계획된 일로 생각했
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않느냐고 군대 장관들에게 반문했다고 본다(G.
Rawlinson). 즉, 군대 장관들이 그 선지자 생도와 함께 계획적로 자신을 왕위에 앉히
려고 꾸님 연극이기 때문에 질문한 바를 자신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는 의미로 본다.
또 한편 혹자는 그대들이 그 선지자 생도가 미쳤을 뿐 아니라 정신없이 말한 것을 알
리라. 그래서 선지자가 들어올 때 아무와도 이야기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나갈때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Bahr, Keil & Delitzsch). 이와 달리 어떤 학자는 예후의 대답은
그들도 장차그 젊은 선지자의 신분과 그가 말한 내용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했다고 주
장한다.
12 무리가 가로되 당치 않은 말이라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대답하되 저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ㅇ당치 않은 말이라 - 이것은 예후의 반문에 대한 그들의 분명한 의사 표시이다. 즉,
예후의 추측이 옳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11절에서 '평안이뇨'라고 물었을 때 예후
는 군대 장관들의 심중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심중을 간과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래서 예후는 자신의 왕위에 관한 문제였음을 그들에게 밝히고 있다.
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ㅇ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 겉옷은 수치를 가릴 뿐 아니라(창 3:10,
11) 정숙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에(벧전 3:3) 인격과 권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군대
장관들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평소에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이 간절했
음을 나태낸다. 심지어 그 선지자의 생도를 미친 자라고 경멸했던 그들이 선뜻 선지자
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겉옷을
취하여 바닥에 펴는 군대 장관들의 행위와 마 21:8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
대해 무리들이 옷을 펴는 행위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예우(禮遇)일 뿐만 아니라 왕으
로 인정한다는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후가 서 있던 맨바닥 위에 그들이 옷을
깔고 그를 거기에 세운 후 왕으로 선포한 것(Keil, Kimchi)은 왕의 보좌가 그곳에 없
었기 때문에 임시로 행한 조치였다.
ㅇ나팔을 불며 -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파르'는 '양각'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수양이나 수염소의 뿔로 만든 '신호용 나팔'로서 두 가지 음계 밖
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나팔이 쓰인 용도는 안식일때 시작(레 23:24). 개전(開戰,
수 6:4;삿 3:27;7:18), 왕의 즉위(11:24), 각종 위험에 대한 경고(겔 7:14;33:3-6;
호 8:1;욜 2:1)등이 있다. 그러나 왕상 1:34과 여기서나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왕의 대관식 때 나팔을 불었던 것과 같이 나팔을 분 것이다(E. Werner, "Musical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3, p. 469-476). 즉 예후가 새로운 왕으
로 즉위하였음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ㅇ예후는 왕이라 -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B. C. 859-824)의 비문을 보면 예후의 이
름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예후는 하사엘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
문에 그 대가로 공물을 바쳤다는 것이다(Ancient Near Eastern Texts, p.280; Ancient
Near East in Pictures, p. 351-355). 그리고 이 비문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비문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은
오므리 왕조가 이스라엘 왕조 중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르곤 2세(B. C. 722-705)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로 알려져 있었
다(C. C. Smith).
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ㅇ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 본절은 앞절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
다. 즉, 선지자의 생도가 왔다 간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공개적인 행위를 통해 요람에
대한 배반이 공식화되었다는 의미이다(G Rawlinson). 그렇기 때문에 요람이 부상을 입
기 전,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생도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밀의 약정이 있었다는 견해
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Koster, Lange Commentary).
ㅇ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 요람이 하사엘과 싸운 것은 길
르앗 라못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음이 여기서 판명된다(8:28 주석 참고, Lange
Commentary, Keil & Delitzsch). 그리고 본절의 기사는 예후가 요람을 배반한 사실이
하사엘과의 전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 전투에서 요람은 능
력을 재대로 발휘하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 반면 예후는 이 전투에서 크
게 활약하여 모든 군대 장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Bahr). 더군다나
21절을 보면 요람이 거의 완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시달린 병사들을 위로하러
길르앗 라못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스르엘에서 병 문안을 온 유다의 아하시야 왕과 즐
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장관의 원망을 산 것으로 생각된다(Lange Commentary). 실로
요람에 대한 선임이 이와 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예후가 배반하여 요람을 치러 갈 때
에 모든 병사들이 그의 말에 절대 순종하였던 것이다.
15 아람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상한 것을 치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ㅇ본절이 8:28, 29절의 말씀과 중복된 것은 이 두 가지가 동일 저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단순한 반복(Thenius)이 아니다. 앞의 기사는 온전한 역사적 기
술이며 여기서는 1-14절돠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한 추가적 설명인 것이다(Bahr).
ㅇ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 예후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혁명의 정당함을 물음과 동시에
자신의 거사 도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유다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 왔더라
ㅇ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 요람의 조카였던 아하시야는 정치적
인 면으로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요람을 원조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요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8:2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ㅇ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 여기서 파숫꾼은 단순한 성문지기가 아니라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알리는 직무를 맡은 병사를 가리킨다(T.R. Hobbs, 삼상 14:16;
삼하 18:24-27). 한편 본 망대는 이스르엘 망대중에서 길르앗 라못을 향하고 있는 동
남편의 망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ㅇ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 여기서 '무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프아'
는 '풍부함', '넘쳐 흐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신 33:19). 즉 그렇
기 때문에 본절은 예후가 무리들을 이끌고 올 때에 요람을 암살하기에 넉넉한 규모의
군사들을 동반했다는 말이다.
ㅇ평안이냐 묻게 하라 - 요람 왕은 파숫꾼의 보고를 듣고 즉시 사자(使者) 한 명을
그 무리들에게 보냇다. 그런데 요람 왕이 사자를 보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는 상반되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이러한 상반되는 이견(異見)은 '평안이냐'라는 말
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다. 공동 번역과 Living Bible은 이 말을 그 무
리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 보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지
나친 의역이다. 왜냐하면 본절에 쓰인 '평화'라는 말은 '샬롬'으로서 일상적인 인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창 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즉 당시 요람 왕은
다가 오는 무리들을 아군으로 확신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전황에 대한 보고를 듣기
원했던 것이다. 요람은 부상으로 인하여 오랫 동안 전쟁터에서 떠나 있었으므로 전황
에 대해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8:28, 29). 전황을 알아 보기 위해 나갔던 사자들이 돌
아오지 않자 직접 나간 요람이 예후를 보고 동일하게 '평안 이냐'라고 물었던 것도
(22절)마찬가지로 이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되느냐'는 영역 성경(Modern
Lnaguage Bible)의 번역도 이러한해석을 지지한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파수꾼'은 히
브리어 '초페'를 번여한 것이다. 이는 '먼 곳을 응시하다', '몸을 굽힌다
'라는 의미의 '차파'에서 온 말로 성 지키는 자의 행동과 시선에 긴장감이
돌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리게 한다.
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고하여
가로되 사자가 저희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ㅇ요람은 두번씩이나 똑같이 한 명의 사자만을 보내어 평안을 묻게 했다. 이것은 요
람이 붐명 그 무리들을 아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편
으로는 요람이 위험을 감지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둔감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한편 요람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데 더욱 순조롭게 했을 뿐만 아
니라 여호와의 진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Wycliffe).
19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20 파숫군이 또 고하여 가로되 저도 저희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의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ㅇ그 병거 모는 것이 ...미치게 모나이다 - 여기서 '미치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1절의 '미친 자'와 동일한 어근, 즉 '미친듯이 날뛰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를
의미하는 '솨가'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런데 예후의 용맹함이 바로 이와
같은 어구로 수식되고 있다는 것은 요람과는 달리 그가 얼마나 정력적인 사람이었던가
를 말해준다. 한편 요람은 무리들이 미친듯이 급히 말을 몰아쳐 온다는 파수꾼의 보고
를 받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를 맞으러 나간다. 그런데 이때에도 요람은 아무런 위험
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22절에서도 역시요람은 평안을 묻고 있기 때문이
다. 이와는 달리 '미치게 모는' 예후의 모습을 통해 평소에 그가 과격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후의 혁명이 그처럼 광적이었으며 잔인했음을 암시해
준다.
21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ㅇ요람과 아하시야가 예후를 맞은 것은 그와 접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람과 싸우던
그에게서 전시의 상황을 듣고자 함이었던 것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항해 보지도 못
하고 죽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쉽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합 왕실에 대한 하나님
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
ㅇ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 '나봇의 토지'는 아합의 탐욕과 배교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테 우연히 예후와 요람이 이 곳에서 상봉하게 된 것은 아합의
죄값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주권적인 섭리 의해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간적으로 볼 때는 마치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예언의 말씀에 따라
(7-10절) 정확히 성취 되는 것이다.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ㅇ예후야 평안이냐 - 혹자는 이 말을 '길르앗의 완정은 성공적인가?'라는 의미로 해
석하고 있고(Wycilffe) 다른 학자는 이것을 '군대에 이상은 없는가?', '어떤 재난이
발생 했는가라는 뜻으로 이해한다(Rawlinson). 그러나 예후는 이와는 달리 그 질문의
의미를 '너와나 사이에 문제될 것이 없지 ?'라고 받아 들여 부정적인 답변을 한 것이
다.
ㅇ네 어미 이세벧의 음행과 술수 - 여기서 '이세벧의 음행'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비유적으로해석되어야 한다(Bahr).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이세벧이 직접적으로
음행을 범했다는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빼문이다. 그러나 '음행'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우상 숭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레 20:5;렘 3:2, 9;겔 23:27;호 2:2),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
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22:18;신 18:10, 11). 한편 여기
서 특별히 이세벧의 죄악을 언급하고 있는 첫째 이유는 그녀가 아합이 지은 범죄의 근
본 원인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그녀의 악행과 반대 행위인 예후의 반란의 정당성
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7절).
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ㅇ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 여기서 '손올 돌이켜'라는 표현은 손으로 병거
를 되돌렸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인 왕상 22:34에서는 아합이 병거 모
는 자에게 손을 돌이킬 것을 명령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요람이 직접 자신의 손을 돌이
켜 병거를 몰아 도망하고 있다. 즉 요람은 다른 병사의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병거를
몰았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요람은 예수의 대답을 통해
어떤 모반(謀反)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갈다(Keil & Deltizch, Vol. III, p. 342). 그
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Wycliffe).
ㅇ아하시아여 반역(叛逆)이로다 - '반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르마'
는 모든 종류의 '속임' 또는 '박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을'반역'이라
고도 번역할수 있으나 원문의 본래의 뜻은 반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것을 가리켰음
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후의 행위가 요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의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후는 요람을 주인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었고(7절)요람은 그에게 큰 직권을
맡길만큼 그를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순간 전까지도 요람은 예후의
반란을 전혀 싱싱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후의 행위는 그에게 '속임'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이 오는
것 같이 순식간에 임하는 것이다(마 24:43;눅 12:39).
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ㅇ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 이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예후가
자기 손에 활을 채웠다'이다. 이것은 활을 쏘기 위해 시위에 화살을 장전하는 것을 가
리킨다고 볼 수 있다(삼하 23:7). 한편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
어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일부 영역본(KJV, RSV, Living Bible)과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상황 어구를 첨가한 것이다.
ㅇ두 팥 사이를 쏘니 - KJV가 이를 '두 팔 사이'(between his arms)로 번역한 것과는
달리 RSV, NIV, Living Bible에서는 '어깨 사이'(between the shoulders)라고 번역하
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몸통 부분'을 가리킨다. 또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등'이라고
의역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요람이 도망갈 때 등을 보이고 갔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
롯되었을 것이다. 한편 Vulgate역에서도 예후가 요람의 '어깨 사이'를 쏨으로 인해 화
살 요람의 심장을 비스듬이 관통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bahr, Keil & Delitzsch).
25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ㅇ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 여기서 '장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솰라쇼'
는 '세번째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세번째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
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병거에 타는 세 사람 가운데서 세번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카일(Keil)은 빗갈이 예후와 함께 병거에 탄 부관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특수한 군사적인 용어로서 본래의 이와 같은 의미는 사라지
고 하나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였던 같다(T. R. Hobbs).따라서 이것이 5절에
기록된 군대 장관, 즉 소부대의 지휘자(leader)와 같이 예후보다 직급이 낮은 부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10:25;15:25;대상 12:18) 한편 예후와 행동을 같이한 이
빗관이라는 장교는 아합 시대에도 예후와 함께 아합의 부하였다.
ㅇ네가 기억하려니와 - 대부분의 고대 사본들과 70인여(LXX)은 이를'내가 기억하거니
와' 혹은 '내가 기억하노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재콜'
을 다음에 이어지는 낱말 '아니'라는 1인칭 때문에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해 본절은 '기억하라'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Rawlinson:NIV, "Remember how you").
ㅇ너와 내가...아합을 좇았을 때에 - 본절은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왕에
게 예언할 때 그 자리에 예후도 함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왕상 21:19).
ㅇ저의 일을 예언 하셨느니라 - '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샤'는 '올
리다', '짐을 지다'를 뜻하는 동사 '나샤'로부터 파생된 명사이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짐', '올림'을 의미하나 2차적으로는 '선지자들의 선포나 경고' 혹은 '
위험을 내포하는 예언'(사13:1;14:28;15:1;나 1:1;겔 12:10)등을 뜻한다. 본절의 내용
에 기인해 볼 때 예후는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선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예후
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10:16). 또한 만일 예후가 믿
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진멸하기 위해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기름부으
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왕상 19:16). 더욱 확실한 사실은 이후가 왕이 되어
바알의 당을 헐고 그곳에 변소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후를 칭찬하신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0:27).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밭에 던질지니라
27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성에서 그열조와 함께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십 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가로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가로되 내 펀이 될 자가 누구냐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가로되 저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 피가 담과 말에게 뛰더라 예후가 그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가로되 가서 이 저주 받은 계집을 찾아 장사하라
저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벧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ㅇ선지자 엘리사가 - 성경에서 본절과 같이 '선지자'와 '엘리사'틀 함께 묶어서 표
현한 곳은 극히 드물다. 즉 지금까지는 엘리사라는 이름만 언급되거나(3:13;4:1;6:1)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별칭(4:7;5:14;6:10;7:2)이 따로 따로 쓰였다.그러나 여기서 특
별히 선지자 엘리사라고 기술함으로 '선지자'의 신분과 엘리사의 이름을 강조한 것은
새 왕의 옹립(擁立)과 관련된 것이다. 즉 선지자 엘리사라고 표현함으로 인해 예후를
왕으로 세우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엘리
사가 사역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ㅇ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엘리사에게서 사명을 받은 생
도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14:254).
좀 더 자세한 것은 2장 주제 강해, '선지자의 생도들'을 보다 참조하라.
ㅇ너는 허리를 동이고 - '동이다'란 말은 히브리어 '하고르'를 번역한 것
으로 '허리띠로 조르라'는 명령어이다. 히브리인들은 통으로 된 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동에 용이하도록 허리에 띠를 둘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행 차림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임을 나타낸다(4:29).
ㅇ길르앗 라뭇으로 가라 - 본절의 표현 양식으로 보아 당시에 엘리사가 거주하고 있
었던 곳은 사마리아가 틀림없다(Bahr). 그리고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을 경
계선으로 하여 동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즉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의 사이는 약 65km 정도 되는 거리이다. 한편 이때에 예후는 길르앗 라못
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왕 요람은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이스르엘에
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15절). 전투중인 길르앗 라못에 관한 보다 자세한내용에 대해
서는 8 :28 주석을 참고하라.
2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3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지니라
4 그 소년 곧 소년 선지자가 드디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5 저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았는지라 소년이 가로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예후가 가로되 우리 모든 사람중에 뉘게 하려느냐 가로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벧에게 갚아주리라
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ㅇ이스라엘을 다스린 네 왕가는 (1) 여로 보암 왕가(B.C. 930-909 ), (2) 바아사 왕
가(B.C. 909-885), (3) 오므리 왕가(B.C. 885-841), (4) 예후 왕가(B.C. 841-752)이
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가는 여호와의 노를 격동사칸 알로 안하여(왕상 15:30) 바아사
에 의한 멸망을 당했고(왕상 15:29), 바아사 왕가는 7일 동안 왕노릇한 시므리에 의해
서(왕상 16:15) 아합과 같이 그 일족이 몰살됨으로 멸망했다(왕상 16:11, 12). 그리고
시므리도 바아사와 동일하게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범죄함으로(왕상 16:19) 왕궁에 불
을 놓고 그속에서 타죽었다(왕상 16:18). 그와 더불어 아합의 왕가 또는 오므리 왕가
는 예후에 의해서 멸절하게 된다. 한편 이들의 공통점은 '여호아 보시기에 악을 햐했
다'는 점이다. 특히 본절에 언급된 앞의 세 왕조는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 및 여러 우
상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 죄
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 통칭되었다(왕상 12:28;15:26;16:2, 19, 26,
31;22:52).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 숭배죄를 어느 왕조보다도 많이 범한 아합
왕조에 대해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 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러
한 하나님의 형벌은 자신의 배만 위하는 탐욕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탐
욕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엡 5:5). 그 대표적인 예로 아간과(수 7:1-26) 그리스도
를 팔아 넘긴 유다가 있다(행 1:18). 그러므로 재물과 명예, 그리고 방탕한 일에 욕심
을 내는 모든 사람도 본절에 기록된 아합 왕가가 받은 심판 뿐 아니라 아간과 가룟 유
다가 받은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그 길을 돌이켜
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겔 39:9, 11, 18, 19).
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벧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11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ㅇ그 미친 자 -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슈가'는 대단히 광범위하
게 사용된다. 즉 신 28:34에서는 그것을 의학적인 정신적 질병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와 비슷한 정신적 질병이 걸린 것처럼 눈속임을 한적이 있던 것이다(삼상
21:13). 또 호 9:7과 렘 29:26에서는 악한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용어로 즉, 선포적이
고 질타적인 의미의 말로 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미 3:5-8). 한편 혹자는 이것을 선
지자가 무아경에 빠졌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Montgomery). 그래서 삼상 10장
에 나오는 선지자의 무리들의 이상한 행위도 이와 같은 유로 간주한다. 그 뿐만 아니
라 본절에서도 예후의 군대 장관들은 무아 경지에서 예언하는 선지자를 조롱하는 말로
'그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것이다(Keil). 이것은 당시 선지자들에 대한 평판이 대체
적으로 경멸하는 풍조였음을 반영하는 말이다.
ㅇ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개 왔더뇨 - 군대 장관들이 예후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선지자의 생도가 갑작스럽게 출현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
지지 않았나 하는 궁금한 마음과 함께(Pulpit Commentary) 어떤 중대한 소식을 갖고
왔을지 모른다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Keil & Delitzsch).
ㅇ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함 것을 알리라 - 본 구절에 대해 학자들 간에 주장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혹자는 이 말을 예후는 그 사건을 이미 사전에 계획된 일로 생각했
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않느냐고 군대 장관들에게 반문했다고 본다(G.
Rawlinson). 즉, 군대 장관들이 그 선지자 생도와 함께 계획적로 자신을 왕위에 앉히
려고 꾸님 연극이기 때문에 질문한 바를 자신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는 의미로 본다.
또 한편 혹자는 그대들이 그 선지자 생도가 미쳤을 뿐 아니라 정신없이 말한 것을 알
리라. 그래서 선지자가 들어올 때 아무와도 이야기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나갈때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Bahr, Keil & Delitzsch). 이와 달리 어떤 학자는 예후의 대답은
그들도 장차그 젊은 선지자의 신분과 그가 말한 내용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했다고 주
장한다.
12 무리가 가로되 당치 않은 말이라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대답하되 저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ㅇ당치 않은 말이라 - 이것은 예후의 반문에 대한 그들의 분명한 의사 표시이다. 즉,
예후의 추측이 옳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11절에서 '평안이뇨'라고 물었을 때 예후
는 군대 장관들의 심중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심중을 간과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래서 예후는 자신의 왕위에 관한 문제였음을 그들에게 밝히고 있다.
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ㅇ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 겉옷은 수치를 가릴 뿐 아니라(창 3:10,
11) 정숙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에(벧전 3:3) 인격과 권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군대
장관들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평소에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이 간절했
음을 나태낸다. 심지어 그 선지자의 생도를 미친 자라고 경멸했던 그들이 선뜻 선지자
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겉옷을
취하여 바닥에 펴는 군대 장관들의 행위와 마 21:8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
대해 무리들이 옷을 펴는 행위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예우(禮遇)일 뿐만 아니라 왕으
로 인정한다는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후가 서 있던 맨바닥 위에 그들이 옷을
깔고 그를 거기에 세운 후 왕으로 선포한 것(Keil, Kimchi)은 왕의 보좌가 그곳에 없
었기 때문에 임시로 행한 조치였다.
ㅇ나팔을 불며 -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파르'는 '양각'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수양이나 수염소의 뿔로 만든 '신호용 나팔'로서 두 가지 음계 밖
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나팔이 쓰인 용도는 안식일때 시작(레 23:24). 개전(開戰,
수 6:4;삿 3:27;7:18), 왕의 즉위(11:24), 각종 위험에 대한 경고(겔 7:14;33:3-6;
호 8:1;욜 2:1)등이 있다. 그러나 왕상 1:34과 여기서나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왕의 대관식 때 나팔을 불었던 것과 같이 나팔을 분 것이다(E. Werner, "Musical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3, p. 469-476). 즉 예후가 새로운 왕으
로 즉위하였음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ㅇ예후는 왕이라 -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B. C. 859-824)의 비문을 보면 예후의 이
름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예후는 하사엘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
문에 그 대가로 공물을 바쳤다는 것이다(Ancient Near Eastern Texts, p.280; Ancient
Near East in Pictures, p. 351-355). 그리고 이 비문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비문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은
오므리 왕조가 이스라엘 왕조 중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르곤 2세(B. C. 722-705)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로 알려져 있었
다(C. C. Smith).
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ㅇ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 본절은 앞절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
다. 즉, 선지자의 생도가 왔다 간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공개적인 행위를 통해 요람에
대한 배반이 공식화되었다는 의미이다(G Rawlinson). 그렇기 때문에 요람이 부상을 입
기 전,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생도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밀의 약정이 있었다는 견해
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Koster, Lange Commentary).
ㅇ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 요람이 하사엘과 싸운 것은 길
르앗 라못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음이 여기서 판명된다(8:28 주석 참고, Lange
Commentary, Keil & Delitzsch). 그리고 본절의 기사는 예후가 요람을 배반한 사실이
하사엘과의 전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 전투에서 요람은 능
력을 재대로 발휘하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 반면 예후는 이 전투에서 크
게 활약하여 모든 군대 장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Bahr). 더군다나
21절을 보면 요람이 거의 완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시달린 병사들을 위로하러
길르앗 라못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스르엘에서 병 문안을 온 유다의 아하시야 왕과 즐
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장관의 원망을 산 것으로 생각된다(Lange Commentary). 실로
요람에 대한 선임이 이와 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예후가 배반하여 요람을 치러 갈 때
에 모든 병사들이 그의 말에 절대 순종하였던 것이다.
15 아람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상한 것을 치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ㅇ본절이 8:28, 29절의 말씀과 중복된 것은 이 두 가지가 동일 저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단순한 반복(Thenius)이 아니다. 앞의 기사는 온전한 역사적 기
술이며 여기서는 1-14절돠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한 추가적 설명인 것이다(Bahr).
ㅇ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 예후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혁명의 정당함을 물음과 동시에
자신의 거사 도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유다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 왔더라
ㅇ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 요람의 조카였던 아하시야는 정치적
인 면으로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요람을 원조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요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8:2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ㅇ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 여기서 파숫꾼은 단순한 성문지기가 아니라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알리는 직무를 맡은 병사를 가리킨다(T.R. Hobbs, 삼상 14:16;
삼하 18:24-27). 한편 본 망대는 이스르엘 망대중에서 길르앗 라못을 향하고 있는 동
남편의 망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ㅇ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 여기서 '무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프아'
는 '풍부함', '넘쳐 흐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신 33:19). 즉 그렇
기 때문에 본절은 예후가 무리들을 이끌고 올 때에 요람을 암살하기에 넉넉한 규모의
군사들을 동반했다는 말이다.
ㅇ평안이냐 묻게 하라 - 요람 왕은 파숫꾼의 보고를 듣고 즉시 사자(使者) 한 명을
그 무리들에게 보냇다. 그런데 요람 왕이 사자를 보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는 상반되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이러한 상반되는 이견(異見)은 '평안이냐'라는 말
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다. 공동 번역과 Living Bible은 이 말을 그 무
리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 보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지
나친 의역이다. 왜냐하면 본절에 쓰인 '평화'라는 말은 '샬롬'으로서 일상적인 인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창 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즉 당시 요람 왕은
다가 오는 무리들을 아군으로 확신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전황에 대한 보고를 듣기
원했던 것이다. 요람은 부상으로 인하여 오랫 동안 전쟁터에서 떠나 있었으므로 전황
에 대해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8:28, 29). 전황을 알아 보기 위해 나갔던 사자들이 돌
아오지 않자 직접 나간 요람이 예후를 보고 동일하게 '평안 이냐'라고 물었던 것도
(22절)마찬가지로 이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되느냐'는 영역 성경(Modern
Lnaguage Bible)의 번역도 이러한해석을 지지한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파수꾼'은 히
브리어 '초페'를 번여한 것이다. 이는 '먼 곳을 응시하다', '몸을 굽힌다
'라는 의미의 '차파'에서 온 말로 성 지키는 자의 행동과 시선에 긴장감이
돌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리게 한다.
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고하여
가로되 사자가 저희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ㅇ요람은 두번씩이나 똑같이 한 명의 사자만을 보내어 평안을 묻게 했다. 이것은 요
람이 붐명 그 무리들을 아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편
으로는 요람이 위험을 감지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둔감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한편 요람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데 더욱 순조롭게 했을 뿐만 아
니라 여호와의 진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Wycliffe).
19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20 파숫군이 또 고하여 가로되 저도 저희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의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ㅇ그 병거 모는 것이 ...미치게 모나이다 - 여기서 '미치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1절의 '미친 자'와 동일한 어근, 즉 '미친듯이 날뛰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를
의미하는 '솨가'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런데 예후의 용맹함이 바로 이와
같은 어구로 수식되고 있다는 것은 요람과는 달리 그가 얼마나 정력적인 사람이었던가
를 말해준다. 한편 요람은 무리들이 미친듯이 급히 말을 몰아쳐 온다는 파수꾼의 보고
를 받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를 맞으러 나간다. 그런데 이때에도 요람은 아무런 위험
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22절에서도 역시요람은 평안을 묻고 있기 때문이
다. 이와는 달리 '미치게 모는' 예후의 모습을 통해 평소에 그가 과격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후의 혁명이 그처럼 광적이었으며 잔인했음을 암시해
준다.
21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ㅇ요람과 아하시야가 예후를 맞은 것은 그와 접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람과 싸우던
그에게서 전시의 상황을 듣고자 함이었던 것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항해 보지도 못
하고 죽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쉽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합 왕실에 대한 하나님
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
ㅇ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 '나봇의 토지'는 아합의 탐욕과 배교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테 우연히 예후와 요람이 이 곳에서 상봉하게 된 것은 아합의
죄값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주권적인 섭리 의해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간적으로 볼 때는 마치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예언의 말씀에 따라
(7-10절) 정확히 성취 되는 것이다.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ㅇ예후야 평안이냐 - 혹자는 이 말을 '길르앗의 완정은 성공적인가?'라는 의미로 해
석하고 있고(Wycilffe) 다른 학자는 이것을 '군대에 이상은 없는가?', '어떤 재난이
발생 했는가라는 뜻으로 이해한다(Rawlinson). 그러나 예후는 이와는 달리 그 질문의
의미를 '너와나 사이에 문제될 것이 없지 ?'라고 받아 들여 부정적인 답변을 한 것이
다.
ㅇ네 어미 이세벧의 음행과 술수 - 여기서 '이세벧의 음행'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비유적으로해석되어야 한다(Bahr).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이세벧이 직접적으로
음행을 범했다는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빼문이다. 그러나 '음행'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우상 숭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레 20:5;렘 3:2, 9;겔 23:27;호 2:2),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
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22:18;신 18:10, 11). 한편 여기
서 특별히 이세벧의 죄악을 언급하고 있는 첫째 이유는 그녀가 아합이 지은 범죄의 근
본 원인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그녀의 악행과 반대 행위인 예후의 반란의 정당성
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7절).
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ㅇ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 여기서 '손올 돌이켜'라는 표현은 손으로 병거
를 되돌렸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인 왕상 22:34에서는 아합이 병거 모
는 자에게 손을 돌이킬 것을 명령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요람이 직접 자신의 손을 돌이
켜 병거를 몰아 도망하고 있다. 즉 요람은 다른 병사의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병거를
몰았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요람은 예수의 대답을 통해
어떤 모반(謀反)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갈다(Keil & Deltizch, Vol. III, p. 342). 그
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Wycliffe).
ㅇ아하시아여 반역(叛逆)이로다 - '반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르마'
는 모든 종류의 '속임' 또는 '박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을'반역'이라
고도 번역할수 있으나 원문의 본래의 뜻은 반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것을 가리켰음
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후의 행위가 요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의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후는 요람을 주인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었고(7절)요람은 그에게 큰 직권을
맡길만큼 그를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순간 전까지도 요람은 예후의
반란을 전혀 싱싱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후의 행위는 그에게 '속임'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이 오는
것 같이 순식간에 임하는 것이다(마 24:43;눅 12:39).
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ㅇ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 이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예후가
자기 손에 활을 채웠다'이다. 이것은 활을 쏘기 위해 시위에 화살을 장전하는 것을 가
리킨다고 볼 수 있다(삼하 23:7). 한편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
어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일부 영역본(KJV, RSV, Living Bible)과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상황 어구를 첨가한 것이다.
ㅇ두 팥 사이를 쏘니 - KJV가 이를 '두 팔 사이'(between his arms)로 번역한 것과는
달리 RSV, NIV, Living Bible에서는 '어깨 사이'(between the shoulders)라고 번역하
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몸통 부분'을 가리킨다. 또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등'이라고
의역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요람이 도망갈 때 등을 보이고 갔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
롯되었을 것이다. 한편 Vulgate역에서도 예후가 요람의 '어깨 사이'를 쏨으로 인해 화
살 요람의 심장을 비스듬이 관통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bahr, Keil & Delitzsch).
25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ㅇ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 여기서 '장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솰라쇼'
는 '세번째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세번째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
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병거에 타는 세 사람 가운데서 세번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카일(Keil)은 빗갈이 예후와 함께 병거에 탄 부관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특수한 군사적인 용어로서 본래의 이와 같은 의미는 사라지
고 하나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였던 같다(T. R. Hobbs).따라서 이것이 5절에
기록된 군대 장관, 즉 소부대의 지휘자(leader)와 같이 예후보다 직급이 낮은 부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10:25;15:25;대상 12:18) 한편 예후와 행동을 같이한 이
빗관이라는 장교는 아합 시대에도 예후와 함께 아합의 부하였다.
ㅇ네가 기억하려니와 - 대부분의 고대 사본들과 70인여(LXX)은 이를'내가 기억하거니
와' 혹은 '내가 기억하노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재콜'
을 다음에 이어지는 낱말 '아니'라는 1인칭 때문에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해 본절은 '기억하라'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Rawlinson:NIV, "Remember how you").
ㅇ너와 내가...아합을 좇았을 때에 - 본절은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왕에
게 예언할 때 그 자리에 예후도 함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왕상 21:19).
ㅇ저의 일을 예언 하셨느니라 - '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샤'는 '올
리다', '짐을 지다'를 뜻하는 동사 '나샤'로부터 파생된 명사이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짐', '올림'을 의미하나 2차적으로는 '선지자들의 선포나 경고' 혹은 '
위험을 내포하는 예언'(사13:1;14:28;15:1;나 1:1;겔 12:10)등을 뜻한다. 본절의 내용
에 기인해 볼 때 예후는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선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예후
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10:16). 또한 만일 예후가 믿
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진멸하기 위해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기름부으
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왕상 19:16). 더욱 확실한 사실은 이후가 왕이 되어
바알의 당을 헐고 그곳에 변소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후를 칭찬하신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0:27).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밭에 던질지니라
27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성에서 그열조와 함께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십 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가로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가로되 내 펀이 될 자가 누구냐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가로되 저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 피가 담과 말에게 뛰더라 예후가 그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가로되 가서 이 저주 받은 계집을 찾아 장사하라
저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벧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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