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6장
1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ㅇ1-7절까지의 기사는 4장과 마찬가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등장 인
물이 익명의 선지자의 생도들로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기사
를 4:38-44절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K.W.Bahr).
ㅇ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 이 기사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관해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카일(Keil)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장소
를 2:1에 나오는 길갈이라고 주장(Thenius)하는데 그것은 요단 강 근처의 길갈을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카일은 요단 강과 가까운 여리고가 이 기사의 배
경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Vol. ,p.323: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
의 '좁으니'란 말은 히브리어 '차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꺾쇠로 죄다',
'고통을 겪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온 용어다. 이러한 어원적인 의미로 살
펴볼 때 그 장소가 매우 비좁고 불편했던 처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ㅇ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 요단 강변에는 숲과 나무들이 울창하여 버드 나무, 포플라
나무, 석류 나무등 건축물의 목재를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D. Baly, The
Geograply of the Bible, p.92-95;렘 49:19;50:44;슥 11:3).
ㅇ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 이 구절은 선지자의 생도들 모두가 사역에 동참하여 협력
해서 금방 선지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성
도들의 협동 정신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갈6:10).
ㅇ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 이 말은 배움의 장소를 옮기는데 있어서 먼저 스승의 승인
이 있어야 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엘리사는 생도들의 요구가 타당한 것이라고 여겨
졌기 때문에 승락한 것이다.
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ㅇ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 '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벧'은 '노
예', '신복'으로 번역된다. 이처럼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 앞에서 자신들을 '노예'와
같은 뜻의 단어로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엘리사의 위치
와 권위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생도들이 제목을 구하기 위해 요단 강
으로 가면서 엘리사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그들은 자신들이 벌목을 하는 중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엘리사가 자기들과 동행함으로써 그
들은 안심놓고 벌목 작업에 착수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행 20:34). 실제로 그
들이 엘리사와 동행했으므로 하나님의 이적으로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5-7절). (2)
엘리사가 자기들과 동행함으로써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요청은 매사에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한 사실에서 기
인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적용된다. 즉 성도들은 어떤
일을 착수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서 그일을 이루어 주는 분이심을 믿고(잠 16:1)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56:4). 이것이 곧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다(잠 3:6).
ㅇ내가 가리라 하고 - 생도들의 요청을 간단히 응낙한 엘리사의 대답을 통해 그의 성
격을 간파할 수 있다. 즉 그는 말과 행동이 신속하고, 동일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던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Pulpit Commentary).
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5 한 사람이 나무를 벧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ㅇ나무를 베더니...나무를 벨 때에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앞뒤 절이 동일하게 '나
무를 베다'로 번역되었으나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서로 다르다. 즉 4절의 '나무'는
원어로 '에침'으로서 '일반적인 나무'를 가리키는 반면 5절의 '나무'는
'코라'로서 '들보', '서까래'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RSV에서
는 이를 '나무'와 '들보감'(log)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한편 선지 생도 중 한 사람
이 나무를 찍다 도끼를 물에 빠뜨린 것은 큰 나무를 무리하게 찍다가 생긴 일로 생각
된다.
ㅇ도끼가 - 문자적으로는 '그 쇠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애굽으로부
터 쇠를 제련하고 용구를 만드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에 일찍이 모세 때부터 쇠로 도
끼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신 19:5).
ㅇ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 이 비판의 외침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
청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리고 여기서 '빌어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
울'은 '애걸하여 빌리다', '구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도끼를 물
에 빠뜨린 생도는 너무 가난하여 도끼를 살 수 없어 이웃에게 구걸하다시피 애걸하면
서 도끼를 빌어온 것이다(Wycliffe). 한편 율법에 따르면 이웃에게 빌어온 것을 상하
게 하거나 잃어버리면 그에 대한 대가로 적절한 배상을 하게 되어 있었다(출 22:14).
그런데 이렇게 도끼 하나도 살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는 생도가 그 도끼 주인에게 배
상을 해야하니 얼마나 암담하였겠는가!
6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7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ㅇ본절에 기록된 이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자연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
째, 엘리사는 자기 눈으로 물에 있는 도끼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도끼날 밑에 나무
조각을 끼워 수면으로 끌어 올렸다(Von Gerlach)는 것과 둘째, 나무가지를 갖고 도끼
날 구멍에 끼워 건져냈다는 것이다(Thenius). 그러나 '떠오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체프'는 '넘쳐흐르다', '덮다', '수영하다'라는 뜻의 동사 '추프'
의 허필형(Hihpil:사역형 능동)으로서 쇠도끼를 직접 물 위에 떠오르게 만
들었다는 뜻이다(신 11:4). 그래서 선지자의 생도는 떠오른 도끼를 물에서 집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Keil). 한편 엘리사가 행한 이 이적은 예수가 고기의 입에서 금화
를 꺼낸 이적(마 17:27)이나 오병 이어의 이적(눅 9:12-17)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
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의 현세적인 필요들을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극
적으로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본절은 단순하고 사소한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고 있다.(Wycliffe).
8 때에 아람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ㅇ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 본절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연대
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열왕기서 기자가 연대기 순으로 본서를 기록하지 않
고 비슷한 주제들 끼리 묶어 기록하기를 좋아 했다는 증거가 된다(T.R.Hobbs). 한편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전쟁을 여호람과 벤하닷의 전쟁이라고 한다(Antipuities of
the Jesus, , p.51-78). 그러나 2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람보다 국력이 강한 때임
을 암시하고 있어서 요세푸스의 견해는 옳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13:3, 14-19,22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여 본 기사와 대조적
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레이(Gray)는 이기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당
시의 시대적 상황과는 다른 면모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인 B.C.797년에 일어난 것이며 아람 왕 하사엘 때의 전투라고 한다. 그러
나 여호람의 통치 시기에도 이스라엘의 정국이 항상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레이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본절을 여호람 왕과 벤
하닷의 전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Lange Commentary). 한편 나아만 사건이
있은지(5:5,6) 얼마되지 않아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이런 조그만 전쟁이 잦았음을 감안해 볼 때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G.Rawlinson). 그리고 본절에서 언급한 '진을 치리라'는 말은 9절의 말씀을 의거해
볼 때 '복병을 두리라'(Ewald, Wycliffe)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않다',
'진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하나'에서 파생한 '테하노트'
이기 때문에 본 번역이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K.W.Bahr, Keil & Delitzsch).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ㅇ당시에 여호람 왕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3:2) 엘리사는 민족의
재난을 방관하지 않고 여호람 왕을 도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스라엘
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이와 같이 보임으로 인해 왕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고 여호
와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ㅇ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 어떤 학자는 아람의 전략에 대한 엘
리사의 지식이 스파이 정보에 의존한 것처럼 말하나, 그런 것은 엘리사의 이적을 기록
한 저자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특별히 2:19-6:22에 엘리사의 여러 가지
이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알 수 있다. 한
편 본절의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라는 말은 '이곳을 소홀히 하지 마소서'
(Keil & Delitzsch, Clericus), 즉 '이곳을 점령당하지 마소서'라고 해석 할 수도 있
고 적군이 매복하고 있으니 '함부로 다니지 마소서'라고도 해석 할 수 있다(K.W.Bahr,
Pulpit Commentary, Thenius, Wycliffe).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ㅇ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 아람 군사가 이스라엘을 공격하
기 위하여 진을 치고 숨어 있는 곳을 미리 알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
에게 경고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람의 공격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틈타 오히려 기습을 가하여 아람을 패주(敗走) 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있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람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ㅇ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 여기서 '번뇌하여'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
사에르'는 '용기를 잃다', '태풍으로 바닷물이 출렁이다'(욘 1:11), '역경
으로 마음이 흔들리다'라는 뜻의 '싸아르'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
에 이 말은 '몹시 당황하여 안절 부절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엘리사로 인하여 아람 왕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래서 급기야
는 내부의 간첩을 색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엘리사의 명성을 듣지 못한 아람
왕의 우매함은 패배를 자초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는 엘리사의 선지(先知)를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단순한 점술사의 점괘로 알았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12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ㅇ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 엘리사의 명성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 나
라 아람에서도 자자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나 그밖의 다른 이
적적인 사건들이 아람에 전하여졌기 때문일 것이다(G.Rawlinson). 그리고 원문을 보면
'선지자'앞에 정관사 '헤'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전쟁에서 이상한 연유로 자주
패할 뿐만 아니라 엘리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를 특별한 선지자로 인식하
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Pulpit Commentary).
13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ㅇ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 도단은 '두 우물'이란 뜻으로 오늘날 '텔 도단'(Tell
Dothan)으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사마리아에서 동북쪽으로 약 18km
정도 떨어진 도단 계곡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Word Biblical Commentary). 또한 이
곳은 세겜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창 37:14)으로서 요셉이 자기 형들에 의하여 이스라
엘 사람들에게 팔렸던 장소이기도 하다(창 37:17). 한편 본절에서 아람 왕이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잡으려고 한것은 바로 자신들의 비밀 계획이 엘리사에 의해서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K.W.Bahr, G.Rawlinson). 한편 다음 지도는 도단의 위치를 정확
히 나타내고 있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ㅇ많은 군사 -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하일 카베드'는 그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18:17에서는 '보통 군대의 규모'를 가리키고, 왕상 10:2에
서는 '많은 수의 수행원'을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큰 군대', 혹은 '강한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후 문맥과 23절의 내용을 살펴보아 '일반적인
대규모의 군대'로 이해함이 좋을 것 같다(T.R.Hobbs).
ㅇ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 아람 왕은 단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
하여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다 에워살 만큼 많은 군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대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힘으로 잡으려는 것은 무력으로 하나
님께 대항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사40:17).
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ㅇ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 여기서 '수종드는 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
솨레트'는 '예배를 돕는 자'나 '수행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Davidson).
따라서 게하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엘리사와 동행한 선지자 생도들 중의 한 명으로 추
측된다(K.W. Bahr). 그러나 본절에서 수종드는 자가 꼭 게하시가 아니라는 그 어떤 증
거도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 단어는 엘리사가 보다 어릴 때 엘리야를 수종드는 자
로 있을 때 사용되었으며(왕상 19:21), 또한 성전에 있던 어린 사무엘을 지칭할 때도
쓰였던 단어이기도 하다(삼상 2:11).
ㅇ성을 에워쌌는지라 - 도단 성은 계곡 위의 넓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
을 받기가 아주 쉬웠다.
ㅇ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 엘리사의 사환은 군사들이 왜 성을 포위하고 있는
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크게 놀란다. 더욱이 그는 믿음의 눈이 열려있지 않아 눈 앞에
닥친 상황에 대하여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베드로도 믿음의
눈이 닫혀 주와 함께 물 위를 걷다가 덮쳐오는 파도에 놀라 그만 물에 빠져 가면서 소
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마 14:30)라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적음을 꾸짖으셨던 것이다(마 14:31). 이와 같이 모든 일을 인간적인 눈으로
판단하면 낭패를 당하거나 실망하기 쉬우나 하나님 편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두
려울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Wycliffe).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ㅇ본절의 전(前)반부는 신 20:1-4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 취해야 하는 마음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즉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함께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난국을 주의 은혜로 타개해 갈 수 있는 것
이다(시 3:6;27:3;대하 32:7). 한편 앞절(15절)과 본절에는 두 가지 사실이 뚜렷이 대
조되어 있다. (1) 사환의 눈"사환은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만 보고 놀랐
다.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모든 사람은 인간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함으로써 큰 낭패를 당한다(마 16:21-23). (2) 엘리사의 눈: 엘리사는 아람
군대보다 수효가 더 많은 하늘 군대를 보고 있었으므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당당함, 이는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찬 신앙의 소산이라 할 것
이다(출 14:1-14).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때 어려움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있도록 해야하겠다.
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ㅇ눈을 여시매 - '눈이 열려진다'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뜬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을 영혼이 보는', 즉 투시의 황홀한 상태가 됨을 말한
다(Keil & Delitzsch, Vol. , p.325-326).
ㅇ불말과 불병거 - 이것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상
징하는 것이다(창 32:2). 따라서 불말과 불병거가 이 땅에 임재해 있다는 것은 지상의
어떠한 무력이라도 천상(天上)의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엘
리사와 같이 주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힘입어 믿음 안에서
더욱 강건해 질 수 있는 것이다(살전 5:17;벧전 1:4). 더 자세한 내용은 2:11을 참조
하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ㅇ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 도단 성은 계곡 위의 넓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
었기 때문에 아람 군대는 밑에서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K.W.Bahr). 따라서 아람 사람
이 엘리사에게로 내려 왔다는 표현(Keil & Delitzsch)보다는 엘리사의 일행이 아람 군
대에게로 내려왔다고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F.Meyer, G.Rawlinson,
K.W.Bahr, Thenius 등).
ㅇ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 여기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싼웨림'으로서 '맹목', '현혹'(dazzl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창 19:11에서 사용된 바와 같이 눈 앞이 가리워
져 못보게 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나 처지를 전혀 모
르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도단에서 약
20km 정도나 떨어진 곳에 있는 사마리아까지 엘리사를 따라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ㅇ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 아람 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사실
을 이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곡의 언덕 위에 있는 도단 성
을 에워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에 엘리사가 있다는 정보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말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단에서 사마리아까지는 급
경사가 굉장히 많고 바람이 많이 불어 험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길인데
(T.R.Hobbs)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을 잘못 들어 섰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엘리사
의 인도대로 이끌려 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엘리사의 이러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엘리사의 집이 사마리아에 있었고 '너희를 찾는 사람'이 '그의
집'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Thenius). 그러나 도단 성에 엘리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온 아람 군대(15절)가 이러한 말을 믿었다는 생각은 의심을 품게 만든다. 또한
왜 도단 성에서 아람 군대를 물리치지 않고 사마리아까지 그들을 끌고 갔는지에 대해
서도 의심이 간다. 그러나 이것은 도단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하면 조
금은 이해가 간다(Wycliffe).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영적 눈이 어두워져 사단이
유혹하는 대로 따라 가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불을
좋아하는 나방이 불만 보고 날아가다가 불에 타죽는 것과도 일반이다. 예수 당시 바리
새인들은 자신들이 소경이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의 주를 십자가
에 못박고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사망의 길로 인도했다(마23:16,26;요
9:39-41). 이와 반대로 다윗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고 그를 의지했
다(시 23:1-6).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로 다스릴 수 있었다(삼하 8:15).
우리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
다(엡 4:22;롬 12:2)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ㅇ이 무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 여기서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마리아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이 도단성을 에워쌌던 처음 상황과는 (14절) 완
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리어 이스라엘 군에게 포로가 되어 죽기까지 이르렀
던 것이다. 한편 아람(시리아)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시켜 준
것은 그들의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Keil &
Delitzsch). 그래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매우 관대하게 대했던 것이다(22절).
21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ㅇ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 여기서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향하여 '내 아버지
여'라고 부른 것은 어떤 부자간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존경과 경의
의 표현(13:14)으로 볼 수 있다(G.Rawlinson). 그리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사가 엘
리야를 향하여 그렇게 불렀듯이(2:12) 선지자의 우두머리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도 있다(K.W.Bahr).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 왕 즉, 여호람과 엘리사 선지자와의 관
계가 냉담하고 소원(疏遠)했던 것으로 미루어(3:11-14;5:8) 볼 때 여기에서 사용한 이
호칭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던 특별한 호칭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여호람 왕이 엘리사가 행한 일에 탄복하여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절의 '내가 치리이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에게
행하던 관례 즉, 적군이 포로로 잡히거나 항복해서 잡힌 경우를 막론하고 죽였던 당시
의 관례에 따라 죽일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민 31:7;삼상 15:8;대상 20:3). 그리
고 여호람 왕이 관례대로 포로를 죽이지 않고 엘리사에게 물은 것은 상황이 예외적이
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ㅇ치지 마소서...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 엘리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
람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마리아에까지 유인해 온 것은 이
스라엘에게 전쟁의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참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5:8)이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Vol.
,p.326-327). 만일 엘리사가 그들을 전쟁 포로로 간주해 이스라엘 왕에게 넘겨 주었다
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지 아람 군대와 하늘 군대와의 전쟁은 아닐 것
이다(16절). 애초에 아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
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관대하게 대해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권능을
인식케 한 것이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이 엘리사가 보인 모범의 행위처럼 원수
를 먹이고 마시우게 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일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음
에 대해 핑계치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심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
기 때문이다(롬 12:20;잠 25:21,22).
23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ㅇ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 원수를 굴복시키는 길은 칼과 무력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자비와 사랑이다(요일 3:16;고후 5:14). 그래서 엘리사가 나
타낸 이적과 더불어 그가 보여준 사랑으로 인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던 아람
의 침입(5:2)이 멈추고 평화가 회복될 수 있었다. 한편 아람 군대가 잠시 동안 이스라
엘을 침공하지 않은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
다. 첫째, 침공해 보았자 오히려 자신들이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기 때문이고(K.W.Bahr), 둘째,아람 군대에 대한 여호람의 호의와 석방에 대한 결과 때
문 (G.Rawlinson)이다.
24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ㅇ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 여기서 벤하닷 왕은 아합을 공격했던 바로 그 왕
(Benhadad II)이다(8:7;왕상 20:1). 이것은 요세푸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인데 다른 신
학자들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K.W.Bahr, T.R.Hobbs, Wycliffe). 따라서 23절
이전의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수 년의 세월이 지나간 때(K.W.Bahr), 그러니까 엘리사에
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잊었을
즈음에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G.Rawlinson). 그러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재차
침입한 것(6:24-7:20)은 앞에 언급된 8-23절의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뿐만 아니라 31절에서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즉, 앞
사건에서 아람 군대를 놓아준 것 때문일 것이다.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 이라
ㅇ성중이 크게 주려서 - 사마리아 성이 당한 고통은 두 가지였다. 즉 벤하닷이 사마
리아 성을 포위하므로 성 내외(內外)의 교통이 두절되어 물자의 반입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또 사마리아에 닥친 기근으로 인해 성 안에서도 먹을 식량이 극히 부족했던
것이다.
ㅇ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 레 11:4에 의하면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절대로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 머리는 다른 모든 부위보다도 먹기에
제일 나쁜 부분이라서 가장 값이 싼 고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나귀
의 머리가 은 80세겔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기근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은 1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이기 때문에(출
30:24;삼하 24:24) 은 80세겔은 영국 화폐로 5파운드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G.Rawlinson) 일반 노동자의 320일, 즉 거의 1년치의 품삯에 해당되는 값어치이다.
ㅇ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 여기서 합분태는 히브리어로 '히르이요
님'으로서 '비둘기 똥'이나 여물지 않은 콩과 같이 '영양가가 거
의 없는 음식물 찌꺼기'(Berleb), 혹은 '작은 곡식'(Wycliff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리고 '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브'의 정확한 용량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
진 바가 없으나 요세푸스는 이것을 '제스테', 즉 라틴어로 6분의
1(sextarius)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의 '유대 고대사' 8장에 57페이지에 보면 보다 정
확한 용량을 제시하고 있는데 2/7제스테는 1밧(Bath)과 같고, 1밧은 6/30리터라고 한
다. 따라서 1 제스테는 1/2리터 정도이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와 같이 성이 포위되
고 기근이 극에 달했을 때는 동물이나 사람의 배설물까지 먹었다고 더불어서 전한다.
한편 이와 같은 일은 세계 제 2차 대전 말기에도 있었는데 독일이 유럽을 포위하자 유
럽 사람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서 개와 고양이, 심지어 해충까지도 잡아먹었다는 것이
다(T.R.Hobbs). 이러한 곤경과 환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
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셔서 이같은 고충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레 26:23-26).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주 왕이여
도우소서
ㅇ성 위로 통과할 때에 - 대부분의 고대성들은 요새화된 성벽으로 갖춰져 있었기 때
문에 사륜 마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폭이 넓었다(G.Rawlinson). 또한 그곳은 매우 높아
서 적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그리고 그곳은 보초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
기 위해서 고관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다(Lange Commentary, Pulpit Commintary).
ㅇ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 성 안에 있는 집들 중에는 성벽에 붙어 있는 집들도 있었
기 때문에(수 2:15;삼상 19:12) 성이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을 때는 여자도
성을 방어하는 일에 동참했다(삿 9:53). 그래서 왕이 성벽 위를 통과하는 동안 여인들
을 만날 수가 있었다.
27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ㅇ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 여기서 왕이 말한 여호와의 이름은 마음 중심
에서 나온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31-33절) 왕 자신의 탄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습관적
으로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5:20).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왕의 표현은 사마리아
성 안에 기근이 심하여서 누구든지, 심지어는 왕조차도 백성을 도울 수 없다는 당시의
한계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ㅇ타작 마당...포도주 틀 - 본절에는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이 나란히 언급되어 있는
데 이러한 특수한 표현의 구문에 대하여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1)이것은 생산의
원천인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을 언급한 것이다(민 18:27,30;신 14:14;16:13). 왕이
이와 같은 단순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당시에 굶주린 백성들의 아사(餓死)를 막을 수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그래서 호 9:1,2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심
판의 표시라고 보고 있다. 한편 당시 사마리아의 타작 마당은 성문 앞에 있었는데(왕
상 22:10) 아람 군이 이곳을 포위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2)
이것은 후기 예언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왕이 타작마당을 심판의 장소
로 언급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호 13:3;미 4:12;렘 51:33). 3)이것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막막한 상태를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이다. 즉 왕은 여인의 간절한
외침을 듣고 그 여인의 어려움 또한 현재의 상황으로 인해 왕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대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Word Blblical
Commentary, Vol. 13, p.79-80).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ㅇ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 문자적으로 '너의 불평거리는 무엇이냐'라는 의미이다.
27절에서 왕이 여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 없는 대답을 하자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
으나 여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어떤 보충의 설명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자의
해석처럼 여인은 아마 자신이 왕에게 음식을 구한 것이 아니라 어떤 판결을 요구한 것
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K.W.Bahr). 그렇기 때문에 왕은 그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다시 질문한 것이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ㅇ본절의 사건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 하였던 바 그대로 성취되었다(레 26:29;신
28:56,57).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그 당시 사마리아 성이 당한 기근이 얼마나 비참하
였는가를 말해준다. 한편 성경에 나타난 이 같은 예언의 성취를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이 1)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애 4:10)와, 2)디도(Titus)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Josephus)였다. 그리고 죽은 아들에 대해서 전혀 비애하지 않고
그 시신(屍身)을 먹는 본절의 기사를 통해 한계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죄악된 인
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극도에까지 다다른 상황에서도 인
간은 결코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음부에 있
는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
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눅 16:3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ㅇ왕이...자기 옷을 찢으니 - 이처럼 여호람 왕이 자기 옷을 찢는 몸짓을 한 것은 이
번이 두번째이다(5:7). 그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의 참혹한 상황에 경악하여 백
성의 지도자로서 느끼는 비통을 외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왕의 이러한 분노
는 자기 백성의 참상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시키는 심히 악한 격분이었다.
ㅇ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 '굵은 베'는 회개, 슬픔을 표시할 때 입는 거친
옷이다(19:1;창 37:34;삼하 3:31;대상 21:16;에 4:1;욥 16:15;사 15:3;단 9:3;욘 3:8;
마 11:21;계11: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이 공식적인 왕복(王服)속에 이 굵은 베
옷을 걸쳐 입었다는 것은 사마리아 성에 닥친 재난으로 인해 회개하는 행동인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겸손해진 행위라기보다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경문(經文)을 넓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재난의 원인을 엘리사에게로 돌리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31절). 그리고 혹자가 말한 것처럼 왕은 이런 형식적인 옷차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Bahr). 그러나 진실된 회개의 신앙이 없이 슬
픔과 회개의 표시로만 굵은 베옷을 입는 것은 외식적으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
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딤전 4:7).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외식을 회개하지 않아 외식하는 자가 받는 율(律)에 처해짐 같이(막 7:1-27), 여호람
왕도 결국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외식하는 자 뿐 아니
라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모든 자에게도 해당된다(마5:20).
31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ㅇ여기서 여호람 왕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은 8-23절의 사건과 24절에서 벤하닷이 재 침
입한 서건을 서로 연관시켜서 이해할 때 보다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나 카일(Keil)이나
기타 다른 신학자들(Bahr,Rawlinson)은 이 두 기사를 서로 연관시키지 않고 해석하기
때문에 약간의 억지스런 추측을 했다. 즉 그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항복하지 말고 여호
와를 의지할 것을 묵시적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왕이 엘리사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그
러나 벤하닷은 엘리사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못해서 사마리아를 다시 공격했고 이스라
엘 왕은 그때 아람 군대를 죽이지않고(22절) 놓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T.R. Hobbs). 그래서 여호람 왕은 엘리사를 저주
한 것이다. 또한 왕이 엘리사에게 저주를 한 직접적인 이유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
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여호와의 도움을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8-23절의 사건과 24절의 사건을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바
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왕이 엘리사의 목을 치겠다고 한 것은 율법의 어느 곳에
도 그러한 행위를 용납한 곳은 없으나(Pulpit Commentary) 애굽과 바벨론과 앗수르 등
의 이방에서는 흔히 행하던 참형(斬刑)이다.
32 그때에 엘리사가 그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사자가 이르기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안에 들이지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아니?
ㅇ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 엘리사의 거처에 대해서는 여러 곳이 언급되었
지만 여기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본래의 집으로 추측된다.
ㅇ장로들이 - 이들은 성의 관리들(Lange Commentary)이라기 보다는 사마리아 성에 있
는 백성들의 대표자들이다. 한편 그레이(Gray)처럼 여기에 언급된 모임을 정규적인 또
는 습관적인 모임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사마리아 성이 직면
해 있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 백성의 대표자들과 상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Hobbs).
ㅇ사람들 보내었더니 -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신하 중 한 사람
(왕상 10:8;단 1:4,5)을 여호람은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ㅇ살인한 자의 자식 - 이것은 물론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의 나쁜 의도를 파악했기 때
문에 한 말이다. 그래서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표현이 '아합의 아들 여호람'을 가리킨
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호람이야말로 혈통적으로나 기질면에서나 광폭한 살인자 아합
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이다(왕상 21:19). 그러나 본문의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말은
족보상의 어떤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살인자와 같은 인간',
'포악한 인간'등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삼상 20:30). 비근한 예로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에 대하여 '마귀' 즉, '살인한 자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셨다(요 8:44).
ㅇ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호람 왕이 엘
리사를 죽이기 위해 사자를 보낸 성급한 행위를 후회하고 즉시 사자를 뒤따라 왔다고
본다(G.Rawlinson, Keil & Delitzsch, Wycliffe). 그래서 엘리사는 문을 닫게 하고 왕
이 도착할 때까지 사자들을 들이지 말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33절에
기록된 말을 왕이 직접 언급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한글 개역 성경도
왕의 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일부 극소수의 학자는 이것을 왕이 뒤따라 온 것이 아니
라 왕이 보낸 사자의 발소리라고 한다(T.R.Hobbs).
33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ㅇ왕이 가로되 - 원문에는 '와요메르'로서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
명히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왕의 사자가 말한 것
(T.R.Hobbs)이 아니라 '왕자신'이 와서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 RSV와 NEB
는 말하는 주어를 왕으로 간주해서 번역한 것이다. 한편 KJV는 그 주체를 왕의 사자로
번역해서 그 뜻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ㅇ어찌 더...기다리리요 - 이 모든 재앙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시인하는 여호람 왕은
이제 여호와께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갖는다. 그가 왜 이처럼 갑자기 변했는
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왕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바른 길로 돌
아왔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p.329-330; Wycliffe). 한편 7장 1절부터는
여호와의 재앙이 끝나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1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ㅇ1-7절까지의 기사는 4장과 마찬가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등장 인
물이 익명의 선지자의 생도들로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기사
를 4:38-44절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K.W.Bahr).
ㅇ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 이 기사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관해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카일(Keil)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장소
를 2:1에 나오는 길갈이라고 주장(Thenius)하는데 그것은 요단 강 근처의 길갈을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카일은 요단 강과 가까운 여리고가 이 기사의 배
경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Vol. ,p.323: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
의 '좁으니'란 말은 히브리어 '차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꺾쇠로 죄다',
'고통을 겪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온 용어다. 이러한 어원적인 의미로 살
펴볼 때 그 장소가 매우 비좁고 불편했던 처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ㅇ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 요단 강변에는 숲과 나무들이 울창하여 버드 나무, 포플라
나무, 석류 나무등 건축물의 목재를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D. Baly, The
Geograply of the Bible, p.92-95;렘 49:19;50:44;슥 11:3).
ㅇ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 이 구절은 선지자의 생도들 모두가 사역에 동참하여 협력
해서 금방 선지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성
도들의 협동 정신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갈6:10).
ㅇ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 이 말은 배움의 장소를 옮기는데 있어서 먼저 스승의 승인
이 있어야 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엘리사는 생도들의 요구가 타당한 것이라고 여겨
졌기 때문에 승락한 것이다.
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ㅇ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 '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벧'은 '노
예', '신복'으로 번역된다. 이처럼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 앞에서 자신들을 '노예'와
같은 뜻의 단어로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엘리사의 위치
와 권위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생도들이 제목을 구하기 위해 요단 강
으로 가면서 엘리사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그들은 자신들이 벌목을 하는 중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엘리사가 자기들과 동행함으로써 그
들은 안심놓고 벌목 작업에 착수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행 20:34). 실제로 그
들이 엘리사와 동행했으므로 하나님의 이적으로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5-7절). (2)
엘리사가 자기들과 동행함으로써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요청은 매사에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한 사실에서 기
인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적용된다. 즉 성도들은 어떤
일을 착수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서 그일을 이루어 주는 분이심을 믿고(잠 16:1)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56:4). 이것이 곧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다(잠 3:6).
ㅇ내가 가리라 하고 - 생도들의 요청을 간단히 응낙한 엘리사의 대답을 통해 그의 성
격을 간파할 수 있다. 즉 그는 말과 행동이 신속하고, 동일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던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Pulpit Commentary).
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5 한 사람이 나무를 벧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ㅇ나무를 베더니...나무를 벨 때에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앞뒤 절이 동일하게 '나
무를 베다'로 번역되었으나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서로 다르다. 즉 4절의 '나무'는
원어로 '에침'으로서 '일반적인 나무'를 가리키는 반면 5절의 '나무'는
'코라'로서 '들보', '서까래'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RSV에서
는 이를 '나무'와 '들보감'(log)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한편 선지 생도 중 한 사람
이 나무를 찍다 도끼를 물에 빠뜨린 것은 큰 나무를 무리하게 찍다가 생긴 일로 생각
된다.
ㅇ도끼가 - 문자적으로는 '그 쇠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애굽으로부
터 쇠를 제련하고 용구를 만드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에 일찍이 모세 때부터 쇠로 도
끼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신 19:5).
ㅇ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 이 비판의 외침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
청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리고 여기서 '빌어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
울'은 '애걸하여 빌리다', '구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도끼를 물
에 빠뜨린 생도는 너무 가난하여 도끼를 살 수 없어 이웃에게 구걸하다시피 애걸하면
서 도끼를 빌어온 것이다(Wycliffe). 한편 율법에 따르면 이웃에게 빌어온 것을 상하
게 하거나 잃어버리면 그에 대한 대가로 적절한 배상을 하게 되어 있었다(출 22:14).
그런데 이렇게 도끼 하나도 살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는 생도가 그 도끼 주인에게 배
상을 해야하니 얼마나 암담하였겠는가!
6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7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ㅇ본절에 기록된 이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자연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
째, 엘리사는 자기 눈으로 물에 있는 도끼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도끼날 밑에 나무
조각을 끼워 수면으로 끌어 올렸다(Von Gerlach)는 것과 둘째, 나무가지를 갖고 도끼
날 구멍에 끼워 건져냈다는 것이다(Thenius). 그러나 '떠오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체프'는 '넘쳐흐르다', '덮다', '수영하다'라는 뜻의 동사 '추프'
의 허필형(Hihpil:사역형 능동)으로서 쇠도끼를 직접 물 위에 떠오르게 만
들었다는 뜻이다(신 11:4). 그래서 선지자의 생도는 떠오른 도끼를 물에서 집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Keil). 한편 엘리사가 행한 이 이적은 예수가 고기의 입에서 금화
를 꺼낸 이적(마 17:27)이나 오병 이어의 이적(눅 9:12-17)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
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의 현세적인 필요들을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극
적으로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본절은 단순하고 사소한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고 있다.(Wycliffe).
8 때에 아람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ㅇ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 본절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연대
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열왕기서 기자가 연대기 순으로 본서를 기록하지 않
고 비슷한 주제들 끼리 묶어 기록하기를 좋아 했다는 증거가 된다(T.R.Hobbs). 한편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전쟁을 여호람과 벤하닷의 전쟁이라고 한다(Antipuities of
the Jesus, , p.51-78). 그러나 2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람보다 국력이 강한 때임
을 암시하고 있어서 요세푸스의 견해는 옳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13:3, 14-19,22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여 본 기사와 대조적
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레이(Gray)는 이기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당
시의 시대적 상황과는 다른 면모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인 B.C.797년에 일어난 것이며 아람 왕 하사엘 때의 전투라고 한다. 그러
나 여호람의 통치 시기에도 이스라엘의 정국이 항상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레이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본절을 여호람 왕과 벤
하닷의 전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Lange Commentary). 한편 나아만 사건이
있은지(5:5,6) 얼마되지 않아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이런 조그만 전쟁이 잦았음을 감안해 볼 때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G.Rawlinson). 그리고 본절에서 언급한 '진을 치리라'는 말은 9절의 말씀을 의거해
볼 때 '복병을 두리라'(Ewald, Wycliffe)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않다',
'진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하나'에서 파생한 '테하노트'
이기 때문에 본 번역이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K.W.Bahr, Keil & Delitzsch).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ㅇ당시에 여호람 왕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3:2) 엘리사는 민족의
재난을 방관하지 않고 여호람 왕을 도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스라엘
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이와 같이 보임으로 인해 왕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고 여호
와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ㅇ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 어떤 학자는 아람의 전략에 대한 엘
리사의 지식이 스파이 정보에 의존한 것처럼 말하나, 그런 것은 엘리사의 이적을 기록
한 저자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특별히 2:19-6:22에 엘리사의 여러 가지
이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알 수 있다. 한
편 본절의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라는 말은 '이곳을 소홀히 하지 마소서'
(Keil & Delitzsch, Clericus), 즉 '이곳을 점령당하지 마소서'라고 해석 할 수도 있
고 적군이 매복하고 있으니 '함부로 다니지 마소서'라고도 해석 할 수 있다(K.W.Bahr,
Pulpit Commentary, Thenius, Wycliffe).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ㅇ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 아람 군사가 이스라엘을 공격하
기 위하여 진을 치고 숨어 있는 곳을 미리 알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
에게 경고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람의 공격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틈타 오히려 기습을 가하여 아람을 패주(敗走) 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있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람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ㅇ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 여기서 '번뇌하여'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
사에르'는 '용기를 잃다', '태풍으로 바닷물이 출렁이다'(욘 1:11), '역경
으로 마음이 흔들리다'라는 뜻의 '싸아르'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
에 이 말은 '몹시 당황하여 안절 부절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엘리사로 인하여 아람 왕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래서 급기야
는 내부의 간첩을 색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엘리사의 명성을 듣지 못한 아람
왕의 우매함은 패배를 자초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는 엘리사의 선지(先知)를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단순한 점술사의 점괘로 알았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12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ㅇ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 엘리사의 명성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 나
라 아람에서도 자자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나 그밖의 다른 이
적적인 사건들이 아람에 전하여졌기 때문일 것이다(G.Rawlinson). 그리고 원문을 보면
'선지자'앞에 정관사 '헤'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전쟁에서 이상한 연유로 자주
패할 뿐만 아니라 엘리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를 특별한 선지자로 인식하
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Pulpit Commentary).
13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ㅇ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 도단은 '두 우물'이란 뜻으로 오늘날 '텔 도단'(Tell
Dothan)으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사마리아에서 동북쪽으로 약 18km
정도 떨어진 도단 계곡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Word Biblical Commentary). 또한 이
곳은 세겜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창 37:14)으로서 요셉이 자기 형들에 의하여 이스라
엘 사람들에게 팔렸던 장소이기도 하다(창 37:17). 한편 본절에서 아람 왕이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잡으려고 한것은 바로 자신들의 비밀 계획이 엘리사에 의해서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K.W.Bahr, G.Rawlinson). 한편 다음 지도는 도단의 위치를 정확
히 나타내고 있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ㅇ많은 군사 -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하일 카베드'는 그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18:17에서는 '보통 군대의 규모'를 가리키고, 왕상 10:2에
서는 '많은 수의 수행원'을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큰 군대', 혹은 '강한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후 문맥과 23절의 내용을 살펴보아 '일반적인
대규모의 군대'로 이해함이 좋을 것 같다(T.R.Hobbs).
ㅇ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 아람 왕은 단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
하여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다 에워살 만큼 많은 군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대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힘으로 잡으려는 것은 무력으로 하나
님께 대항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사40:17).
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ㅇ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 여기서 '수종드는 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
솨레트'는 '예배를 돕는 자'나 '수행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Davidson).
따라서 게하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엘리사와 동행한 선지자 생도들 중의 한 명으로 추
측된다(K.W. Bahr). 그러나 본절에서 수종드는 자가 꼭 게하시가 아니라는 그 어떤 증
거도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 단어는 엘리사가 보다 어릴 때 엘리야를 수종드는 자
로 있을 때 사용되었으며(왕상 19:21), 또한 성전에 있던 어린 사무엘을 지칭할 때도
쓰였던 단어이기도 하다(삼상 2:11).
ㅇ성을 에워쌌는지라 - 도단 성은 계곡 위의 넓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
을 받기가 아주 쉬웠다.
ㅇ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 엘리사의 사환은 군사들이 왜 성을 포위하고 있는
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크게 놀란다. 더욱이 그는 믿음의 눈이 열려있지 않아 눈 앞에
닥친 상황에 대하여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베드로도 믿음의
눈이 닫혀 주와 함께 물 위를 걷다가 덮쳐오는 파도에 놀라 그만 물에 빠져 가면서 소
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마 14:30)라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적음을 꾸짖으셨던 것이다(마 14:31). 이와 같이 모든 일을 인간적인 눈으로
판단하면 낭패를 당하거나 실망하기 쉬우나 하나님 편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두
려울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Wycliffe).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ㅇ본절의 전(前)반부는 신 20:1-4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 취해야 하는 마음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즉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함께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난국을 주의 은혜로 타개해 갈 수 있는 것
이다(시 3:6;27:3;대하 32:7). 한편 앞절(15절)과 본절에는 두 가지 사실이 뚜렷이 대
조되어 있다. (1) 사환의 눈"사환은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만 보고 놀랐
다.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모든 사람은 인간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함으로써 큰 낭패를 당한다(마 16:21-23). (2) 엘리사의 눈: 엘리사는 아람
군대보다 수효가 더 많은 하늘 군대를 보고 있었으므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당당함, 이는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찬 신앙의 소산이라 할 것
이다(출 14:1-14).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때 어려움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있도록 해야하겠다.
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ㅇ눈을 여시매 - '눈이 열려진다'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뜬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을 영혼이 보는', 즉 투시의 황홀한 상태가 됨을 말한
다(Keil & Delitzsch, Vol. , p.325-326).
ㅇ불말과 불병거 - 이것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상
징하는 것이다(창 32:2). 따라서 불말과 불병거가 이 땅에 임재해 있다는 것은 지상의
어떠한 무력이라도 천상(天上)의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엘
리사와 같이 주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힘입어 믿음 안에서
더욱 강건해 질 수 있는 것이다(살전 5:17;벧전 1:4). 더 자세한 내용은 2:11을 참조
하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ㅇ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 도단 성은 계곡 위의 넓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
었기 때문에 아람 군대는 밑에서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K.W.Bahr). 따라서 아람 사람
이 엘리사에게로 내려 왔다는 표현(Keil & Delitzsch)보다는 엘리사의 일행이 아람 군
대에게로 내려왔다고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F.Meyer, G.Rawlinson,
K.W.Bahr, Thenius 등).
ㅇ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 여기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싼웨림'으로서 '맹목', '현혹'(dazzl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창 19:11에서 사용된 바와 같이 눈 앞이 가리워
져 못보게 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나 처지를 전혀 모
르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도단에서 약
20km 정도나 떨어진 곳에 있는 사마리아까지 엘리사를 따라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ㅇ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 아람 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사실
을 이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곡의 언덕 위에 있는 도단 성
을 에워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에 엘리사가 있다는 정보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말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단에서 사마리아까지는 급
경사가 굉장히 많고 바람이 많이 불어 험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길인데
(T.R.Hobbs)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을 잘못 들어 섰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엘리사
의 인도대로 이끌려 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엘리사의 이러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엘리사의 집이 사마리아에 있었고 '너희를 찾는 사람'이 '그의
집'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Thenius). 그러나 도단 성에 엘리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온 아람 군대(15절)가 이러한 말을 믿었다는 생각은 의심을 품게 만든다. 또한
왜 도단 성에서 아람 군대를 물리치지 않고 사마리아까지 그들을 끌고 갔는지에 대해
서도 의심이 간다. 그러나 이것은 도단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하면 조
금은 이해가 간다(Wycliffe).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영적 눈이 어두워져 사단이
유혹하는 대로 따라 가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불을
좋아하는 나방이 불만 보고 날아가다가 불에 타죽는 것과도 일반이다. 예수 당시 바리
새인들은 자신들이 소경이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의 주를 십자가
에 못박고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사망의 길로 인도했다(마23:16,26;요
9:39-41). 이와 반대로 다윗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고 그를 의지했
다(시 23:1-6).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로 다스릴 수 있었다(삼하 8:15).
우리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
다(엡 4:22;롬 12:2)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ㅇ이 무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 여기서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마리아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이 도단성을 에워쌌던 처음 상황과는 (14절) 완
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리어 이스라엘 군에게 포로가 되어 죽기까지 이르렀
던 것이다. 한편 아람(시리아)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시켜 준
것은 그들의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Keil &
Delitzsch). 그래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매우 관대하게 대했던 것이다(22절).
21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ㅇ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 여기서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향하여 '내 아버지
여'라고 부른 것은 어떤 부자간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존경과 경의
의 표현(13:14)으로 볼 수 있다(G.Rawlinson). 그리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사가 엘
리야를 향하여 그렇게 불렀듯이(2:12) 선지자의 우두머리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도 있다(K.W.Bahr).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 왕 즉, 여호람과 엘리사 선지자와의 관
계가 냉담하고 소원(疏遠)했던 것으로 미루어(3:11-14;5:8) 볼 때 여기에서 사용한 이
호칭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던 특별한 호칭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여호람 왕이 엘리사가 행한 일에 탄복하여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절의 '내가 치리이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에게
행하던 관례 즉, 적군이 포로로 잡히거나 항복해서 잡힌 경우를 막론하고 죽였던 당시
의 관례에 따라 죽일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민 31:7;삼상 15:8;대상 20:3). 그리
고 여호람 왕이 관례대로 포로를 죽이지 않고 엘리사에게 물은 것은 상황이 예외적이
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ㅇ치지 마소서...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 엘리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
람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마리아에까지 유인해 온 것은 이
스라엘에게 전쟁의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참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5:8)이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Vol.
,p.326-327). 만일 엘리사가 그들을 전쟁 포로로 간주해 이스라엘 왕에게 넘겨 주었다
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지 아람 군대와 하늘 군대와의 전쟁은 아닐 것
이다(16절). 애초에 아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
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관대하게 대해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권능을
인식케 한 것이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이 엘리사가 보인 모범의 행위처럼 원수
를 먹이고 마시우게 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일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음
에 대해 핑계치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심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
기 때문이다(롬 12:20;잠 25:21,22).
23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ㅇ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 원수를 굴복시키는 길은 칼과 무력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자비와 사랑이다(요일 3:16;고후 5:14). 그래서 엘리사가 나
타낸 이적과 더불어 그가 보여준 사랑으로 인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던 아람
의 침입(5:2)이 멈추고 평화가 회복될 수 있었다. 한편 아람 군대가 잠시 동안 이스라
엘을 침공하지 않은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
다. 첫째, 침공해 보았자 오히려 자신들이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기 때문이고(K.W.Bahr), 둘째,아람 군대에 대한 여호람의 호의와 석방에 대한 결과 때
문 (G.Rawlinson)이다.
24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ㅇ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 여기서 벤하닷 왕은 아합을 공격했던 바로 그 왕
(Benhadad II)이다(8:7;왕상 20:1). 이것은 요세푸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인데 다른 신
학자들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K.W.Bahr, T.R.Hobbs, Wycliffe). 따라서 23절
이전의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수 년의 세월이 지나간 때(K.W.Bahr), 그러니까 엘리사에
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잊었을
즈음에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G.Rawlinson). 그러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재차
침입한 것(6:24-7:20)은 앞에 언급된 8-23절의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뿐만 아니라 31절에서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즉, 앞
사건에서 아람 군대를 놓아준 것 때문일 것이다.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 이라
ㅇ성중이 크게 주려서 - 사마리아 성이 당한 고통은 두 가지였다. 즉 벤하닷이 사마
리아 성을 포위하므로 성 내외(內外)의 교통이 두절되어 물자의 반입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또 사마리아에 닥친 기근으로 인해 성 안에서도 먹을 식량이 극히 부족했던
것이다.
ㅇ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 레 11:4에 의하면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절대로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 머리는 다른 모든 부위보다도 먹기에
제일 나쁜 부분이라서 가장 값이 싼 고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나귀
의 머리가 은 80세겔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기근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은 1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이기 때문에(출
30:24;삼하 24:24) 은 80세겔은 영국 화폐로 5파운드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G.Rawlinson) 일반 노동자의 320일, 즉 거의 1년치의 품삯에 해당되는 값어치이다.
ㅇ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 여기서 합분태는 히브리어로 '히르이요
님'으로서 '비둘기 똥'이나 여물지 않은 콩과 같이 '영양가가 거
의 없는 음식물 찌꺼기'(Berleb), 혹은 '작은 곡식'(Wycliff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리고 '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브'의 정확한 용량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
진 바가 없으나 요세푸스는 이것을 '제스테', 즉 라틴어로 6분의
1(sextarius)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의 '유대 고대사' 8장에 57페이지에 보면 보다 정
확한 용량을 제시하고 있는데 2/7제스테는 1밧(Bath)과 같고, 1밧은 6/30리터라고 한
다. 따라서 1 제스테는 1/2리터 정도이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와 같이 성이 포위되
고 기근이 극에 달했을 때는 동물이나 사람의 배설물까지 먹었다고 더불어서 전한다.
한편 이와 같은 일은 세계 제 2차 대전 말기에도 있었는데 독일이 유럽을 포위하자 유
럽 사람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서 개와 고양이, 심지어 해충까지도 잡아먹었다는 것이
다(T.R.Hobbs). 이러한 곤경과 환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
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셔서 이같은 고충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레 26:23-26).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주 왕이여
도우소서
ㅇ성 위로 통과할 때에 - 대부분의 고대성들은 요새화된 성벽으로 갖춰져 있었기 때
문에 사륜 마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폭이 넓었다(G.Rawlinson). 또한 그곳은 매우 높아
서 적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그리고 그곳은 보초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
기 위해서 고관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다(Lange Commentary, Pulpit Commintary).
ㅇ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 성 안에 있는 집들 중에는 성벽에 붙어 있는 집들도 있었
기 때문에(수 2:15;삼상 19:12) 성이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을 때는 여자도
성을 방어하는 일에 동참했다(삿 9:53). 그래서 왕이 성벽 위를 통과하는 동안 여인들
을 만날 수가 있었다.
27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ㅇ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 여기서 왕이 말한 여호와의 이름은 마음 중심
에서 나온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31-33절) 왕 자신의 탄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습관적
으로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5:20).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왕의 표현은 사마리아
성 안에 기근이 심하여서 누구든지, 심지어는 왕조차도 백성을 도울 수 없다는 당시의
한계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ㅇ타작 마당...포도주 틀 - 본절에는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이 나란히 언급되어 있는
데 이러한 특수한 표현의 구문에 대하여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1)이것은 생산의
원천인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을 언급한 것이다(민 18:27,30;신 14:14;16:13). 왕이
이와 같은 단순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당시에 굶주린 백성들의 아사(餓死)를 막을 수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그래서 호 9:1,2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심
판의 표시라고 보고 있다. 한편 당시 사마리아의 타작 마당은 성문 앞에 있었는데(왕
상 22:10) 아람 군이 이곳을 포위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2)
이것은 후기 예언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왕이 타작마당을 심판의 장소
로 언급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호 13:3;미 4:12;렘 51:33). 3)이것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막막한 상태를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이다. 즉 왕은 여인의 간절한
외침을 듣고 그 여인의 어려움 또한 현재의 상황으로 인해 왕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대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Word Blblical
Commentary, Vol. 13, p.79-80).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ㅇ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 문자적으로 '너의 불평거리는 무엇이냐'라는 의미이다.
27절에서 왕이 여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 없는 대답을 하자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
으나 여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어떤 보충의 설명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자의
해석처럼 여인은 아마 자신이 왕에게 음식을 구한 것이 아니라 어떤 판결을 요구한 것
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K.W.Bahr). 그렇기 때문에 왕은 그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다시 질문한 것이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ㅇ본절의 사건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 하였던 바 그대로 성취되었다(레 26:29;신
28:56,57).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그 당시 사마리아 성이 당한 기근이 얼마나 비참하
였는가를 말해준다. 한편 성경에 나타난 이 같은 예언의 성취를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이 1)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애 4:10)와, 2)디도(Titus)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Josephus)였다. 그리고 죽은 아들에 대해서 전혀 비애하지 않고
그 시신(屍身)을 먹는 본절의 기사를 통해 한계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죄악된 인
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극도에까지 다다른 상황에서도 인
간은 결코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음부에 있
는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
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눅 16:3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ㅇ왕이...자기 옷을 찢으니 - 이처럼 여호람 왕이 자기 옷을 찢는 몸짓을 한 것은 이
번이 두번째이다(5:7). 그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의 참혹한 상황에 경악하여 백
성의 지도자로서 느끼는 비통을 외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왕의 이러한 분노
는 자기 백성의 참상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시키는 심히 악한 격분이었다.
ㅇ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 '굵은 베'는 회개, 슬픔을 표시할 때 입는 거친
옷이다(19:1;창 37:34;삼하 3:31;대상 21:16;에 4:1;욥 16:15;사 15:3;단 9:3;욘 3:8;
마 11:21;계11: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이 공식적인 왕복(王服)속에 이 굵은 베
옷을 걸쳐 입었다는 것은 사마리아 성에 닥친 재난으로 인해 회개하는 행동인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겸손해진 행위라기보다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경문(經文)을 넓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재난의 원인을 엘리사에게로 돌리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31절). 그리고 혹자가 말한 것처럼 왕은 이런 형식적인 옷차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Bahr). 그러나 진실된 회개의 신앙이 없이 슬
픔과 회개의 표시로만 굵은 베옷을 입는 것은 외식적으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
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딤전 4:7).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외식을 회개하지 않아 외식하는 자가 받는 율(律)에 처해짐 같이(막 7:1-27), 여호람
왕도 결국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외식하는 자 뿐 아니
라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모든 자에게도 해당된다(마5:20).
31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ㅇ여기서 여호람 왕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은 8-23절의 사건과 24절에서 벤하닷이 재 침
입한 서건을 서로 연관시켜서 이해할 때 보다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나 카일(Keil)이나
기타 다른 신학자들(Bahr,Rawlinson)은 이 두 기사를 서로 연관시키지 않고 해석하기
때문에 약간의 억지스런 추측을 했다. 즉 그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항복하지 말고 여호
와를 의지할 것을 묵시적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왕이 엘리사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그
러나 벤하닷은 엘리사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못해서 사마리아를 다시 공격했고 이스라
엘 왕은 그때 아람 군대를 죽이지않고(22절) 놓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T.R. Hobbs). 그래서 여호람 왕은 엘리사를 저주
한 것이다. 또한 왕이 엘리사에게 저주를 한 직접적인 이유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
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여호와의 도움을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8-23절의 사건과 24절의 사건을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바
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왕이 엘리사의 목을 치겠다고 한 것은 율법의 어느 곳에
도 그러한 행위를 용납한 곳은 없으나(Pulpit Commentary) 애굽과 바벨론과 앗수르 등
의 이방에서는 흔히 행하던 참형(斬刑)이다.
32 그때에 엘리사가 그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사자가 이르기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안에 들이지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아니?
ㅇ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 엘리사의 거처에 대해서는 여러 곳이 언급되었
지만 여기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본래의 집으로 추측된다.
ㅇ장로들이 - 이들은 성의 관리들(Lange Commentary)이라기 보다는 사마리아 성에 있
는 백성들의 대표자들이다. 한편 그레이(Gray)처럼 여기에 언급된 모임을 정규적인 또
는 습관적인 모임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사마리아 성이 직면
해 있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 백성의 대표자들과 상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Hobbs).
ㅇ사람들 보내었더니 -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신하 중 한 사람
(왕상 10:8;단 1:4,5)을 여호람은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ㅇ살인한 자의 자식 - 이것은 물론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의 나쁜 의도를 파악했기 때
문에 한 말이다. 그래서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표현이 '아합의 아들 여호람'을 가리킨
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호람이야말로 혈통적으로나 기질면에서나 광폭한 살인자 아합
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이다(왕상 21:19). 그러나 본문의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말은
족보상의 어떤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살인자와 같은 인간',
'포악한 인간'등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삼상 20:30). 비근한 예로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에 대하여 '마귀' 즉, '살인한 자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셨다(요 8:44).
ㅇ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호람 왕이 엘
리사를 죽이기 위해 사자를 보낸 성급한 행위를 후회하고 즉시 사자를 뒤따라 왔다고
본다(G.Rawlinson, Keil & Delitzsch, Wycliffe). 그래서 엘리사는 문을 닫게 하고 왕
이 도착할 때까지 사자들을 들이지 말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33절에
기록된 말을 왕이 직접 언급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한글 개역 성경도
왕의 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일부 극소수의 학자는 이것을 왕이 뒤따라 온 것이 아니
라 왕이 보낸 사자의 발소리라고 한다(T.R.Hobbs).
33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ㅇ왕이 가로되 - 원문에는 '와요메르'로서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
명히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왕의 사자가 말한 것
(T.R.Hobbs)이 아니라 '왕자신'이 와서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 RSV와 NEB
는 말하는 주어를 왕으로 간주해서 번역한 것이다. 한편 KJV는 그 주체를 왕의 사자로
번역해서 그 뜻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ㅇ어찌 더...기다리리요 - 이 모든 재앙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시인하는 여호람 왕은
이제 여호와께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갖는다. 그가 왜 이처럼 갑자기 변했는
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왕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바른 길로 돌
아왔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p.329-330; Wycliffe). 한편 7장 1절부터는
여호와의 재앙이 끝나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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