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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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하

[스크랩] 열왕기하 (5 : 1~27)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8:36
열왕기하 5장

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용사나 문둥병자더라

ㅇ아람 - '셈족'의 후예로서 '수리아'라고도 불린다. 유목 민족이었던 그들은 B.C.13
세기 경에 힛타이트의 영토였던 다메섹에 정착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서는 상
황에 따라 우호 관계, 혹은 적대 관계를 맺었다(16:5;왕상 15:18-20). 특별히 상업에
재능을 보여 각지를 돌아 다니며 통상을 벌였기 때문에 그 언어가 동방 무역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18:26;사 36:11;스 4:7;단 2:4).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된 후 신약
시대에는 아람어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었다(마 27:46;막 5:41;7:34).
ㅇ아람 왕의 군대 장군 나아만은 - 여기서 아람 왕이란 직접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지 그 이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6:24과 8:7에 등장하는 벤하닷
I세(Ben Hadad I세, B.C. 900-860)와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다(T.R.Hobbs). 그리고 본
장에 기록된 사건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계속적인 전투중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평화 기
간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한다(K.W.Bahr). 왜냐하면 벤하닷 I세가 생존한 시기에는 이
스라엘과 아람 사이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본장의 중심 인물인 나아
만의 이름은 우가릿어(Ugarit)로서 '공평한', '은혜로운'이라는 뜻(Gray)인데 혹자는
이 이름이 아람인이 섬기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Ewald)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당시의 아람에서 군대 장관이라는 직책은 군대의 총지휘권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것이
며 그 아래에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라는 직위 서열로 군대 조직이 구성
되어 있었다(1:9 주석 참고).
ㅇ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 여기서 '크고'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전장(前章)에서 수넴 여인을 가리킨 단어인 '귀한'(4:8)이라는 말과 동일한 용어 '게
돌'이다(4:8주석 참고). 그리고 '존귀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뜻은 '한 권위자가 스스로 얼굴을 들어 올리는 행위'에서 나온 것(Gray)인데 일반적으
로 존경 스러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다(3:14). 이처럼 나아만은 벤하닷의 군대 장
관으로서 큰 영화를 누렸던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
면 '영예를 얻었다', 혹은 '존경을 받았다'라고 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ㅇ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 본절에서 이방인이 얻은
승리를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한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구약 전반에서 보더라도
참으로 특이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논리
적 결과이다(T.R.Hobbs). 즉 이는 온 천하에 유일한 신(神)이신 여호와께서 이방인의
삶까지도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독특한 히브리적 개념인 것이다(암
9:7;사10:13,Lange Commentary). 그래서 여기에 특별히 언급된 아람의 구원은 이스라
엘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T.R.Hobbs). 한편 요세푸스에
따르면 나아만은 아람의 배반자인 이스라엘의 아합 왕(B.C.874-853)을 살해한 자였다
고 한다. 또한 역대하 18장의 아람어 탈굼(Targum) 역본에도 이와 동일한 사실을 시사
하고 있다.
ㅇ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 나아만은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등
많은 공적을 세운 능력있는 군대 장관으로서 영화를 누렸지만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
리고 만다. 그렇지만 문둥병자를 사회에서 추방하는 이스라엘(레 13장-14:57)과는 달
리 아람에서는 문둥병자라도 왕과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Keil &
Delitzsch, Vol. , p.317).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에까지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을 보
면 그의 문둥병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단한 지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Thenius).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혹자는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앗수르를 치는
데 더이상의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Wycliffe). 한편 본절에서 '큰 용사'라는 표
현은 '좋은 군인'이라는 의미 이상의 아무런 뜻이 아니다(Pulpit Commentary).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ㅇ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 여기서 '전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
는 언제라고 분명히 그 시기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본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의
'때'를 가리킨다. 아합 왕이 라못 길르앗을 원정한 이후로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는
조그만 싸움들이 잦았다. 본절은 그러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떼를 지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르다', '침투하
다'라는 어근 동사 '가다드'의 변형인 '게두딤'으로서 흔히
'몰래 습격하는 비적 떼'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삼상 30:8,15). 또한 헬라어 역본
들에는 '모노조노스'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벧트를 하나 밖
에 차지않은 가벼운 복장 차림을 한 군대의 병사들을 가리킨다(3:21 주석 참고). 그리
고 중세 헬라어 역본들을 보면 '도적 떼'라는 뜻의 단어 '페이라테리온'
이 첨가되어 아람 사람들의 떼가 비적, 혹은 도적 떼임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ㅇ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 고대의 도적 떼들은 보물의 약탈뿐 아니라 종
으로 삼을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성행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본절
에 언급된 작은 계집 아이는 자신을 잡아온 사람들에게까지 탁월한 용기와 자비를 보
이고 있다. 그녀는 고향과 친지들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괴로워하지
않고, 복수 하기보다는 오히려 친절을 베푼다(마 5:44).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본절의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Wycliffe).
ㅇ수종들더니 - 이것을 히브리어 문자대로 직역해 보면 '앞에 있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4:12,15에 기록된 '앞에 서 있다'라는 말의 단축형으로 보기도 하며 '존경'을
표시하기도 하며 심지어 '숭배'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T.R.Hobbs). 그 뿐만 아니
라 이 용어는 맹세를 나타내는 구문에서도 사용된다(5:16 '나의 섬기는').

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ㅇ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 이는 엘리사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엘리사는 사마리
아에 집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6:32) 그곳에서 때때로 거주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함을 받은 것같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ㅇ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 하나님은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 잡은
'작은 계집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 땅에도 전파되도록
하셨다. 이 약한 소녀를 통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이방에까지도 하나님의 절대
적인 주권이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벧전 2: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안목으
로 판단했을 때 지극히 비천한 자를 종종 들어 쓰시며(고전 1:28) 그들을 사용하심으
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ㅇ이러이러 하더이다 - 이와 같은 표현은 대화시에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전기 선
지서에 많이 나타난다(9:12;수 7:20등). 이처럼 나아만이 이스라엘에서 온 계집 아이
의 말을 왕에게 전함으로 인해 엘리사 선지자의 명성은 더욱 더 널리 아람 땅에 전파
된다.

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ㅇ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 본절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아람 왕으로
부터 얼마나 많은 총애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K.W.Bahr, Pulpit Commentary).
한편 아람 왕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의 이름을 본문에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
데 엘리사가 활동한것은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4대에 걸친 시기, 즉
B.C.848-797년이었다. 그러나 본장에 등장하는 아람 왕이 8장에 나오는 벤하닷 I세와
동일인이라고 간주할 때 본장의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벤하닷 I세가 암살되기 이전,
즉 B.C. 842년 이전이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때에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은 바
로 여호람이 되는 것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p.63-64).
ㅇ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 -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향해 떠날
때 가지고 간 선물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 달란트는 3,000세겔에 해당되며 무게
로는 약 34.27kg에 해당되므로(출 38:25,27;왕상 16:24;계 16:21) 은 십 달란트는 약
342kg에 해당된다. 그리고 금 육천 개는 두 달란트에 해당되며 무게는 약 68.4kg에 해
당된다. 또한 이것을 카일(Keil)의 계산법에 따라 환산해 보면 은 십 달란트는 옛 독
일의 화폐로 약 25,000탈러(Thaler)이고 금 육천 개는 약 50,000탈러이다. 그러니까
영국 화폐는 약 3,750파운드와 7,500파운드에 각각 해당된다. 한편 그가 선물로 갖고
간 의복 열 벌은 매우 높은 가격의 선물로서 상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었던 근동 지방의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풍속과
습관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방에서는 지속적으로 내려온다(Keil & Delitzsch). 이처럼
나아만이 가지고 간 선물은 상당한 것으로 그 당시 나아만의 권세와 부귀가 어떠했는
지 가히 짐작 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ㅇ본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외교문서에서 쓰는 공식적인 용어이다(T.R.Hobbs). 그
리고 본절에 나타난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엘리사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것은 아람 왕이 엘리사를 일종의 '우두머리 마술사나 이스라엘 종교의 대제사장'
(Menken)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왕에게 부탁하면 왕의 수하에
있는 이 선지자가 병을 고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고쳐
주소서'라는 표현은 '모으다', '회복시키다', '제거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사프
토'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병의 근원을 뿌리채 뽑아 달라는 탄원과 함께
간절한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ㅇ자기 옷을 찢으며 - 본절에서 이스라엘 왕은 극한 슬픔과 분노의 표현으로 옷을 찢
는다(창 37:29; 44:13;민 14:6;수 7:6;삿 11:35).이것으로 보아 당시의 이스라엘이 아
람의 위압에 눌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이 어렇게 분노
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아람 왕의 말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
엘왕은 아람 왕의 말을 왕 자신이 그 문둥병을 고쳐 달라는 말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
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이 병은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과 같이 중한 병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신32:39;삼상2:6).
따라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러한 중대한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
은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K.W.Bahr, Pulp
it Commentary). (2) 엘리사가 이적을 행하는 줄 몰랐던 왕으로서는(8절) 이렇게 오해
한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벤하닷은 아합 왕 때에도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왕상 20:3-6). 한편 히브리 민족은 옷을 찢는 행위 이외에도
슬픔이나 분노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에 티끌을 뿌리거나(수 7:6) 흙이나 재를 뒤집어
쓰기도 하였다(삼하 13:19;에 4:1,3;욥 2:8). 그리고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
거나(렘 7:29) 얼굴과 가슴을 치고 뜯기도 하였다(눅 18:13).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ㅇ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
었을때 그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로 추정된다(G.Rawlinson). 따라서 요단 강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십마일 정도)이었다.
ㅇ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스라
엘 왕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1:6;3:11;8:7-15)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심을 이방인 나아만을 통해 알게 할 것입니다'(K.W.Bahr) 혹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
라고 생각지 마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나아만을 구원하셔서 참 선지자가 이
스라엘에 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Wycliffe)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왕이 근심
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근심하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리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압박만 더욱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근심을 떨쳐 버려야 한다(벧전 5:7).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ㅇ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 애굽으로부터 말과 병거를 수입한 아람은 전쟁 뿐 아
니라 평화적인 용도, 즉 사람과 물건의 운반을 위해서도 말과 병거를 사용하였다(왕상
10:29). 한편 애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일찍 이러한 말과 병거의 사용이 있었다(창
41:43;50:9).
ㅇ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 여기서 나아만이 취한 태도는 4:15에서 수넴 여인이 취한
태도처럼 존경의 표시로 볼 수는 없다. 나아만은 자기의 직책과 부귀 영화로 인한 교
만때문에 말에서 내려 들어가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Pulpit
Commentary)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치려는 간절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만한 나아만을 맞이하러 엘리사 선지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귀 영화로 구원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K.W.Bahr). 그럼에도 불구
하고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민 12:12) 문둥병자 나아만은 오히려 선지자 엘리사를
교만하다고 진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11,12절).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고침이
선지자의 어떤 마술적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겸손함으로 순종한 결과라는 사실을 후에서야 깨닫게 된다
(Keil).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ㅇ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 본절에 나오는 엘리사의 명령은 율법에 준한 것
이지만(레 14:8,9) 그 의미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 몸을
씻는 것은 문둥병이 완전히 고쳐지고 난 이후 깨끗케 되었음을 증거하는 상징적 의식
행위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깨끗하게 되기 위한 예비적 동작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명
령한 것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64). 이와 비근한 예
로 예수께서 한 소경을 치료하실 때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
서 씻으라"(요 9:7)고 하시니 이에 소경이 즉시 순종하여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
게 한 것은 치료를 위한 행위나 치료 후 행하는 의식적 행위에 대한 명령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한 것
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청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인내까지도 포함된 명령인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다', '만족시키다'란 뜻의 히브리어 '솨바'에서 온
말이 '일곱'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을 일명 '완전 수'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여리고 성을 칠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말씀(수
6:3-5)과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 끝에야 엘리야가 자기 사환에게 비 올 증거를 찾도록
명령한 것(왕상 18:43)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곱 번씩이나 같
은 행위를 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소유하지 못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만 치유받
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내용들로 살펴볼
때 이와 같은 엘리사의 명령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1)나아만의 교만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인 반면에 엘리
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에 불과했으므로, 나아만이 교만한 자라면 엘리사의 명령에 순
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결코 당신의 능력과 은총을 베푸
시지 않는다(잠 8:13;16:5;눅 16:15). 2)나아만의 문둥병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치유됨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주술행위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러한 처방은 커녕 아주 평범하게 여
겨 오던 혼탁한 요단 강가에서 씻으라는 처방을 했다(12절).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ㅇ당처(當處) - 이 말은 히브리어 '하마콤'을 번역한 용어인데 이는
'일어 나다'란 뜻의 '쿰'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질병으
로 인해 부어 오른 바로 그곳', 즉 '환부'란 의미이다.
ㅇ손을 흔들어 - 이러한 표현은 흔치 않다. 레 14:12에서 여호와 앞에 요제를 드릴
때에 흔들어 드린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본절과의 연관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선지
서에는(사11:15) 이와 같이 손을 흔드는 행위가 심판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
로 사용되고 있다(T.R.Hobbs).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손을 흔드는 행위는 나아만이 알
고 있는 고대 근동 지방의 주술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도 않고 이러한 주술적 행위도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였던 것이다(Menien). 한편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노를 발한 원인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엘리사가 친히 나와 자기를 맞이하고 '당처'
,즉 헌데 난곳을 손으로 만지고 병을 제거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2)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는 것, 다시 말해서 침례하듯이 몸을 잠기게 하는 것은 자
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이야기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병이 물에
씻어 낫는다면 요단 강같이 적고 더러운 물보다는 차라리 맑고 큰 다메섹의 강들이 더
효력을 나타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ㅇ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 여기에서 '아마나'는 시리아 역본과 아
람어 탐굼 역본에 의한 것이며 히브리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는 '아바나'
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베트'와 '멤'의 혼동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Keil & Celitzsch, Vol. , p.318).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 둘 다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나'는 다메섹의 중심부에 있는 안티레바논(Anti-Lebanon) 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오늘날의 바라다(Barada)와 동일한 강이다(G.A.Smith, The
Historical Geography of the Holy Land, p.429-430). 그리고 '바르발'은 다메섹 지방
에 있는 또하나의 중요한 강으로서 다메섹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오늘
날의 '와디아와이'(Wadi Awaj)와 동일한 강이다. 이 두 강 중에 특히 아마나 강은 대
단히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물이 찬 강으로서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에게는 '크리소
로아스'(Chrysorrhoas), 즉 '황금의 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요단 강은 깊고
서서히 흐를 뿐만 아니라 진흙 색을 띠는 혼탁한 강이다(Robinson). 그래서 나아만이
요단 강보다 자기 나라의 강들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ㅇ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 나아만의 이런 생각은 매우 합
리적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적이 오직 순종함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다(신 30:8;비 11:8).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
게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 불순종했다면 '여호와 이
레'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창 22:12-14).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 본 자는 모두 살았다
(민 21:6-9). 이것은 구원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요 3:14), 즉 하나님께
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
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롬 3:21-24;엡 2:8). 이처럼 하나님
께서는 인간들을 위해 쉬운 방법으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심에
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은 이성(理性)만 고집하여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 어
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구원마저도 거부해 버린다. 그러므로 본절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는 진리가 뚜렷이 부각되
고 있다.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ㅇ본절은 조건을 나타내는 전치사 '임'이 없는 조건문으로서 나아만이 종들이 행
한 지혜로운 구변이 나타나 있다(Keil & Delitzsch).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태도는 주
인을 노하게 하지 않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여'라는 존경과
충성을 포함한 본절의 표현은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공손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6:21;삼상 24:12,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이와 같이 오늘날의 성도
들도 남을 책망하거나 충고할 때는 틀린 점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
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존경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삼하 12:1-15).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ㅇ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 '내려가서'라는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이 내
포되어 있다. 즉, 1)나아만이 요단 강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당시 엘리사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 땅의 고지대이므로 나
아만은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여 요단 강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2)나아만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뜻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65).
ㅇ몸을 잠그니 - 여기서 '잠그다'라는 말은 몸을 물에 완전히 적시거나(왕하 8:15)
물 속에 몸을 전부 집어 넣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10절의 '씻다'라는 단어
와는 뜻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한 모세 오경에서는 이 단어가 '피에 잠그다'라
는 뜻으로 쓰이로 있다(레 14:6;신 33:24;삼상 14:27). 따라서 나아만은 선지자의 명
령(10절)보다 더 철저히 몸을 씻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아만의 병이 치유가 되
고 그 살이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럽게 된 것은 그의 철저한 순종적 행위에 대한 하나
님의 은혜였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일곱 번'은 나아만이 엘리사의 요구에 얼마나 철
저히 순종했는가를 나타냄과 동시에 나아만의 문둥병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기 때문
이다.

15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ㅇ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 여기서 '도로 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
쇼브'는 '돌이키다'라는 뜻 이외에 '새롭게 되다', '회개하다'라는 뜻이 있
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에서 엘리사에게 분을 품고 돌아갔던 그가 새롭게 하시는 하나
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다시 엘리사에게로 되돌아 온 것은 그가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회개를 나타낸 표시인 것이다.
ㅇ그 앞에 서서 - 자만과 교만으로 가득차서 선지자가 마중을 나와 영접하기를 기다
렸던 올 때의 모습(9절)과는 완전치 딴판이다. 즉 자기 병거로부터 내려와서 엘리사
앞에 서는 겸손과 겸비의 모습을 갖추는 나아만의 모습이다.
ㅇ내가...아나니다 - 이 말은 8절에서 이미 엘리사가 예견했던 바 그대로였다. 이처
럼 나아만의 깨달음은 본장의 핵심이다. 이스라엘 이외에는 온 천하에 그 어떤 신도
없는 줄 아는것, 즉 다시 말하면 나아만은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통해서만 진정한 치유함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Wycliffe).
ㅇ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 나아만은 이방의 관례대로 은혜를 베푼
신과 선지자에게 최선의 예우를 다하여 예물을 드렸다. 실로 나아만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이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새로운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

16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ㅇ저가 고사한지라 - '고사(固辭)하다'란 말은 '거절하다', '굳이 사양하다'라는 뜻
이다.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기근이 횡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두고 볼 때에
(4:38;7:1-20) 엘리사가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즉, 엘리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아만의 마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임
을 확신시켜 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
방의 제사장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을 은혜와 자비로
치유해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였다(Lange).
이와 비슷한 예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않은뱅이를 걷게 했을 때 모든 사
람이 놀란 눈으로 두 사도를 주목하였다. 이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
께 돌리면서 겸손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고 말했
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이 그 은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내세워
욕심을 채우며 자랑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된다.

17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ㅇ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흙을 요구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이 흙으로 제단을 쌓기 위해서라는 해석(K.W.Bahr,T.R.
Hobbs). 출 20:24에 보면 흙으로 만든 토단이 나오는데 나아만은 모세 율법을 따라서
번제단을 쌓아 여호와께 희생물을 드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2) 흙을 아람 땅 중 적당
한곳에 뿌리고 그곳을 성역화하려고 했다는 해석(Thenius, Vom Gerlach, G.Rawlinson).
이는 유대인들도 바벨론 포로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흙을 나른적이 있었다는
(G.Rawlinson)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해석이다. 이 해석에 의거해보면 나아만의 이
러한 요구는 과거에 그가 가지고 있던 다신론에 근거한 요청으로 볼 수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
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시 139:7-10). (3)자신이 받은 축복에 대한 기념
물로 가져가려고 했다는 해석(Wycliffe)이다.

18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때에 여호와께서 이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ㅇ림몬의 당 - '림몬'은 아람의 최고신으로서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
던 폭풍의 신 '하닷'과 동일한 신이다(T.R.Hobbs). 왜냐하면 이 림몬은 하닷 림몬이
요약된 말이기 때문이다(Lange Commentary). 그리고 이 신은 후에 희랍 신화에서 전능
한 신으로 등장하는 제우스(Zeus)와 동일한 신으로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었다(H.
Ringgren, Religions of the Ancient Near East, p.154-156). 한편 아람 왕들의 이름
이 '벤하닷'으로 기록된 것은 아람의 민족 신인 하닷을 숭배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Word Biblical Commentary).
ㅇ내 손을 의지하시매 - 당시 근동 지방의 궁중 안에서 흔히 행하던 궁중의 예법으로
서 왕이 총애하는 신하의 손에 기대는 것을 말한다(7:2,17). 이 경우는 자기도 왕과
함께 림몬의 당에 들어가 몸을 굽혀 예배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일만은 여호와께서
관대히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ㅇ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본절에서 나아만은 자신의 직무로 인해 어
쩔 수 없이 우상 앞에 절하게 되는 애로점을 토로하고 있다.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아만이 걱정하고 있는 염려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한편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만을 생각하겠다는 신앙(17
절)과 현실 상황적으로 실천의 어려움이 맞물려 있다. 세속의 세계에서 신앙을 지켜가
는 문제, 즉 상황 속에서 신앙으로 대처하는 자세는 언제나 모든 신앙인에게 있어서
난제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삶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0:38) 헌신하는 삶이지 우왕 좌왕하며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성과 속(俗)을
넘나드는 이중 인격자의 모습이어서는 안된다.

19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ㅇ평안히 가라 - 나아만의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에 대해서 엘리사는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고 다만 평안히 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한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나아만은 자기가 어떻
게 헤야 할바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고 단지 현실적인 난제에 대해 여호와께 용서를
바랬을 뿐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특별히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Rawlinson).이
러한 해석은 대단히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에 엘리사는 단순히 떠나가는 나아만을 향해
복을 빌어 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Bahr). (2) 나아만과 같은 경우에 대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었기에 엘리사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Keil).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옛 언약의 시대였기 때문에 이방인이 여호와에 대한 진실한 신
앙을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자기 나라에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대한 배척을 요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이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는 것이
카일(Keil)의 주장이다(Keil & Delitzsch, Vol. , p.321). 한편 본절의 이러한 표현
이 나아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이해했다는 긍정적인 확신의 인식이라는 혹자의 해석
(Wycliffe)을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 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ㅇ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 여기서 엘리사의 이타(利他)적
인 참된 마음과 게하시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의 대조가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뒤쫓아간 것은 그가 갖고 온 재물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Keil & Delitzsch) 외국 사람에게 당연히 어떤 보수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Lange Commentary).
ㅇ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것은 형식상으로 볼 때 분명히 맹세의 말
이다. 그러나 이 맹세의 말 속에 숨겨진 게하시의 의도는 16절의 엘리사의 맹세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으로서 신성 모독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Lange Commentary). 물론
게하시의 이 말을 습관적으로 튀어 나온 상투적인 말로 볼 수도 있지만(G.Rawlinson)
습관적이든 이기심에 가득찬 탐욕의 표현이든 간에 마찬가지로 이러한 게하시의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인 것이다(출 20:7).
ㅇ내가 저를 쫓아가서...취하리라 - 본절에는 게하시의 죄가 두 가지로 암시되어 있
다. (1) 육신에 속한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탐욕(골3:5)으로 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하고,
결국 사망의 종노릇하게 되기 때문이다(롬 8:5-7). (2) 고의적인 범죄로서 게하시는 '
쫓아 가서 하리라'고 하면서 범죄를 위한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 기회를 찾던 것과 유사하다(마 26:15,16). 즉 가룟 유다나(히
10:26) 게하시의 범죄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계획적이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처럼 악한 자는 패역을 품으며, 악한 계교를 꾀하고 악으로 달려간다(잠 6:14,18).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 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ㅇ수레에 내려서 맞아 -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드리는 존경의 표시로 근동 지방
뿐 아니라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예의 범절이다. 여기서 '내린다'는 말의 히
브리어는 '나팔'로서 '병거 같은 데서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새가
땅에 급히 내리는 것(암 3:5), 리브가가 이삭을 보고 약대에서 갑자기 내리는 것(창
24:64)등에 이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내린다는 표현은 급히 내린다는
뜻이다. 또한 나아만은 자기 수레로부터 급히 내림으로 사환에게 자기가 엘리사 선지
자를 존경하고 곤경한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냈다. 그러나 이같은 예는 당시 흔치 않았
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Pulpit Commentary).
ㅇ평안이냐 -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20절)는 탐욕스런 마음으로
급하게 뒤쫓아 온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이상하게 보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
아만은 그에게 "평안이냐"고 물은 것이다. 나아만이 이렇게 평안이냐고 물은 것은 게
하시의 서두르는 행동으로 인해서 엘리사에게 어떤 불상사가 발생하지는 않았나
(Thenius, Wycliffe), 혹은 무엇인가 잘못되지는 않았는가(Pulpit Commentary)하는 추
측에 의한 것이다.

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ㅇ본절에서 악을 도모하는 게하시의 생각은 대단히 기발한 것이었다. 당시에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4:38) 게하시의 편에서 볼 때 이 같은 자기
합리화적인 방법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아만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는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 만을 요구하는 간교함을 보이기도 한
다. 한편 본절 상반부에는 자기 주인의 권위를 이용하는 악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
고, 하반부에서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는 간악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ㅇ저를 억제하여 - 여기서 게하시는 엘리사의 입장에 서서 어느 정도 체면을 부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15절) 게하
시에게 선물을 받도록 강권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의 '억제하여'라는 말은 히브리어
'이페라츠'로서 '강요하다', '누르다', '촉구하다'는 뜻의 어근에서 파생
한 용어이다. 이것은 나아만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강력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ㅇ언덕에 이르러는 - 여기서 '언덕'이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오펠'
인데 '어두움'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도 '오펠'이어서 서로 동음 이의어이다.
그래서 이 두 단어의 발음이 서로 동일함을 이용하여 본절에서 게하시의 '비밀스러운
행동'(dark deed)을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볼 수 있다(T.R.Hobbs).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와 같은 의도를 전혀 발견할 수 없으며 '오펠'앞에 정관사 '헤'가 있
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언덕을 가리키고 있는 것같다(Keil &
Delitzsch, Vol. ,p.322;Pulpit Commentary).

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ㅇ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 한번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것과 관련해서
연쇄적으로 또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호 12:1). 본절에서도 나아만을 속였던 게하시
는 이제 또 한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도 거짓을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죄의 덫인데 이 죄는 또다른 죄를 불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 거짓말
하는 동기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탐심에 의해(삼상 15:15;요 8:44), 핑계로, 두려움
으로(창 3:10), 자랑함으로(눅 18:11), 교만함으로(시 119:69), 양심이 화인 맞아 외
식함으로(딤전 4:2), 마귀의 자녀가 되어 사단의 영향으로(요 8:44)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은 백성을 부패시킬 뿐 아니라(겔 13:19) 멸망을 초래하고(렘
9:8), 진리를 와해시키기 때문에(롬 1:25) 악의 세력이 주로 쓰는 방법이다.

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ㅇ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 본절은 매우 난해한 문장으로서 그 해석도 또
한 다양하다. (1) 히브리어 본문: '내 마음이 나가지 않았느냐' (2) 70인역(LXX): '내
마음이 너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 대부분의 영역본들의 해석은 70인역과 일치한다.(3)
벌게이트 역: '내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 (4) 아람어 탈굼 역: '예언의 영을 통해 나
에게 그것이 보여졌다' (5)시리아 페쉬타 역: '내 마음이 나에게 보여 주었다' 이상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된 역본들을 종합해 보면 본절의 의미는 '내 마음이 너와 함께 같
이 있었다'로 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사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인해 게하시의
잘못을 다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본문은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엘리사와 늘 함께 다
닌 게하시가 엘리사의 그러한 능력을 알지 못하고 속이는 것을 책망한 것이다. 한편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
는 함께 있어서'라고 말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고전5:3). 또한 본절에는 온 이스라엘
을 대표하는 선지자답게 영안이 밝은 엘리사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
님의 양무리를 맡은 목자는 각 양들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영안을
소유한 자라야 하겠다. 그래야만 그는 양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수 있기 때
문이다(마24:45).
ㅇ지금이 어찌...받을 때냐 - '때'에 대한 엘리사의 강조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능히
짐작케 한다. 즉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기심과 탐욕으로 백성들 앞에서 본이 되지
못하는 이때에 게하시까지도 그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하는것
이다(Keil).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ㅇ본절에 나타난 것에 의하면 탐욕으로 인하여 게하시가 받은 형벌은 두 가지이다. 하나
는 게하시 자신이 나아만과 같은 문둥병자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병이 자손 대
대로 유전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내린 형벌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선지자의 직분을 남용하는 당시의 많은 거짓 선지자와 지도자들
에게 경종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본절의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는 말은
출 4:6과 민 12:10과 동일한 표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속인 죄 뿐만 아니라 탐심으
로 지은 죄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Keil & Delitzsch, Vol. ,p.322-323).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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