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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하

[스크랩] 열왕기하 (2 : 1~25)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8:35
열왕기하 2장

1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ㅇ여호와께서...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 - 선지자 엘리야 (Elijah,
B.C.875-848)가 자신의 공적 사역을 모두 마친 후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통치 초기에 등장, 숱한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역을 완수한 엘리야에게 이제 남은 일이라곤 엘리사
(Elisha, B.C. 848-797, 왕상 19:19-21)를 차기 후계자로 굳건히 세우는 일이었다. 그
리고 나면 그는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터인데 곧 에녹(창 5:24)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昇天)하는 것이었다(11절). 한편 성경상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이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이같은 엘리야 승천 사건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Ahaziah, B.C. 853-852)가 죽고난 뒤에 일어났던 것만은 분명하다
(1:17,18).
ㅇ길갈에서 - 성경에 나오는 길갈(Gilgal)은 두 곳이다. 하나는 여호수아의 정복사에
서 언급된 곳(수 4:19)으로 여리고에서 북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
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질질리아(Jiljiliya) 또는 칼킬리야(Khalkiliya)에 해
당하는 곳(신 11:30)으로 벧엘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다(T.R.Hobbs).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동한 경로(1-11절)와 2절의 '벧
엘로 내려가니'란 말로 미루어 볼 때 본절의 길갈은 후자의 길갈임이 분명하다. 이곳
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엘리사의 중심 활동지이다(4:38). 그러나 후에 이곳은 우
상 숭배지로 변하여 아보스, 호세아등의 선지자에게 규탄을 받았다(암4:4;호
4:15;9:15).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 지도를 참조하라.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ㅇ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 본장에서 세번씩이나 언급
된 말로(2, 4, 6절)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으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처럼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엘리야가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고 마지막 지상 생활을 홀로 지내기 위
해(Pulpit Commintary), 2)자신이 승천하는 영광을 엘리사와 생도들에게 나타내지 않
으려는 겸손에서(Keil & Delitzsch), 3)엘리사의 충성과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Wycliffe)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하기 보다
는 모든 견해를 두루 섭렵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ㅇ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이다(삼상 14:39; 20:3;삼하 11:11). 라기스 문서(Lachish
Letters)에서도 동일한 맹세 형식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의 맹세나 말
의 신실성을 확증, 강조하려 할 때 대개 이같은 표현을 썼다. 이는 곧 하나님과 상대
방의 전인격 및 전존재를 건 것으로 '여호와와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듯-도 확
실하다'는 뜻이다. 삼상 25:26 주석 참조.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ㅇ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 - 구약 성경 중 사무엘서나 열왕기에는 '선지자의 무
리'(삼상 10:5;19:20;왕상 20:35)또는 '선지자의 생도'(5,7,15절; 4:1,38; 5:22; 6:1)
란 말이 종종 나온다. 이들은 영적으로 지극히 암울했던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
적,도덕적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사무엘, 엘리야, 엘리
사의 수하에 몰려든 자들이다. 이런 무리를 가리켜 우리는 소위 원시 형태의 '선지자
학교'라고 부르는데 곧 벧엘, 여리고(5절) 등에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
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ㅇ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직접 엘리야에게 나아가기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권위가 너무 컸다(Pulpit
Commentary). 또 그들은 엘리사를 자신들과 동일한 생도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와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ㅇ여호와께서...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 본절 및 5절과 같은 말로
볼 때 벧엘과 여리고 생도들도 엘리사와 같이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나이까?"라는 질문은 어떤 사실에 대해 확인하려
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취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로
서 '돈을 주고 사다', '결혼하여 데려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수동형
(Niphal)으로는 '포로로 잡혀가다', '죽음에 의해서 옮겨지다'(겔 33:6)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 '라카흐'가 여기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승천에 대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계시해 주고 엘리야가 엘리사와 선지자
들의 생도들에게 그 계시의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Wycliffe) 행 1:9,10에서와 같이 예
수 그리스도가 감람 산에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과 같이 하늘로 올리움을 생생히 나타
낸 것이다(Keil & Delitzsch). 또한 본절의 '머리 위로'라는 구절이 이 의미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메알'은 '...로부터'라는 뜻의
비분리 전치사(메)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알)가 합성된 것으로 엘리야
가 하늘 나라로 옮기게됨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생도들이 본절에서 언급한 말은 엘
리야 선지자의 승천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단
순히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Bahr). 즉 엘
리야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대한 언급으로서 엘리사의 마음에 슬픔을 자극했다는 것
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벧엘에 있는 성도들이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알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K.W.Bahr).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어 '라
카흐'와 전치사 '메알'의 용법, 그리고 당시 상황등을 고려해 이
구절을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질문으로 보고 있다.
ㅇ너희는 잠잠하라 - 이것은 "그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함으로써 백
성들을 소란시켜서는 안 된다"(J. Lange)는 의미가 아니다. 또 "엘리야의 겸손을 위해
서 그의 영광을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Keil)는 의미도 아니다. 즉 이것은 "너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Wycliffe) 내 사랑하는 주를 이별하려고
하는 이 순간에 말을 많이 함으로써 내 마음을 격동시키지 말라"(Bunsen)는 뜻으로 엘
리사 자신의 내적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Matthew Henry) 거룩한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
지 말라는 엄중한 요구이다(Pulpit Commentary).

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ㅇ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은 길갈-벧엘-여리고-요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험한 여행
에서 스승에 대한 엘리사의 인내와 충성심은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 엘리사는 마침내 스승 엘리야의 반복된 시험
을 통과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스승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불타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엘리사의 고백은 그의 전 인생을 엘리야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7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ㅇ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 여기에 언급된 오십 인이라는 숫자는 1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의 수와 동일하다(1:9). 오십 명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최
후를 목격한 증인들로서 그의 승천을 전파하게 될 사람들이다. 한편 선지자의 생도들
이 50명이라는 것은 그들이 단체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바 이러한 사실
은 암살의 위험에서 도피하는 다윗의 사건 등 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삼상 10:5,6,10; 19:20).

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ㅇ겉옷을 취하여 - '겉옷'은 히브리어로 '에데르'로서 소매없는 외투 또는
양가죽으로 되어 어깨를 감싸는 망토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70인역(LXX)에
는 '톤 멜로텐'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가죽'을
의미한다. 한편 모세의 지팡이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권위의 상징인 것과 비교해서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가 일하는 곳에다 던진 일(왕상 19:19)이 있는데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
를 선택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선지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보인 것은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외투를 말면 모양이 어느 정도 지팡이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ㅇ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 이 사건은 모
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21)과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
3:13)에 상응한다. 또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지도자 위임의 관계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
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다. 왜냐
하면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62:11). 따라서 겉옷을 취하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와 이 이적의 사건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
하심과 그분의 목적을 알게 했을 것이다. 한편 '육지'는 히브리어로 '하라바'
로서 '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영역본들에서는 모두
'마른 땅'(dry ground)이라고 번역했으며 70인역(LXX)도 이와 비슷하게 '에레모스'
즉 '사막', '광야'란 의미로 옮겼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 강을 건널때 '마른 땅'(출 14:21;수 3:17)이라고 말했던 그 표현으로서
성경에서는 드물게 사용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강물과 바닷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분
일 뿐만 아니라 갈라서 드러난 땅을 마르게도 하셔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알고 조처 하
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한편 이 두 선지자가 요단 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모압 땅이
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신 34:6을 보면 "오늘까지 이 묘
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가 없는 엘리야에게도 동일하게 적
용된다. 즉, 17절에서 무리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건이 이를 뒷
받침해 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에녹과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모
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무덤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
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두 기사 뿐이기 때문이다.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ㅇ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 '영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로서
'영', '호흡', '영혼'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선지자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
문의 '갑절'이라는 말은 신 21:1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용어로서 맏아들의 분
깃을 강조한 표현이다(Keil & Delitzsch). 즉 이 말은 일반의 형제 들보다 장자가 받
는 두 몫의 유산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법한 계승자로서 충분한
지도자의 역량을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엘리야보다 두배의 능력
을 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Bahr). 1)실제로 엘
리사가 받은 능력은 엘리야의 두 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산 생애의 길
이나 그가 나타낸 기적의 수나 양은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두 배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인 것이다. 2)그러한 요구는 주인을 모시는 종된 자로서 가장 겸손
치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이 결코 그 주인만 못하다고 했던
것이다(마 10:24). 따라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엘리야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
한 것이다(Matthew Hen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사역자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먼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간구
하는 경건의 훈련이 절실히 요청된다(히4:16).

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ㅇ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 엘리야의 이 말은 엘리사가 요구한 일의 중
요성의 정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9절에서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할
때 엘리야는 자신이 쉽게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닐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Commentary) 자신이 행할
수 없는 하나님께만 속한 일 즉, 신령한 축복을 원한 것이기에 그 일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또 엘리야는 후계자를 임명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의식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
서 치룰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신적인 증거는 자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렇기에
엘리야는 엘리사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엘리사의 신앙심 깊은 요청이 허락되
도록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ㅇ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 신 31:23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도권을 양도받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직접 임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
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곧 엘리사의 선지자적 직분에 대한 증거가 되리라고 했다. 즉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승천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그리고 그 승천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다면(Wycliffe) 그의 요청이 성취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라
고 말했던 것이다(6:17;눅 24:16,31). 그래서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어느 정도 부정
적인 면을 암시하는 말을 첨가해서 엘리야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나타냄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는 오직 하나
님만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였으며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선지자적인 태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ㅇ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이에 그들이 걷기를 계속하면
서 계속해서 말했다'란 의미로 이것은 두 사람이 요단 강을 건너 걸어가고 있을 때
(Wycliffe) 하늘로 부터의 징조를 기다리면서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
킨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무슨 증거를 보이시도록 기도하였을 것
이며 또한 엘리사는 스승의 최후를 맞이하면서 엘리야가 남긴 교훈을 하나라도 더 듣
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유사한 예로서 눅 24:50,51에는 예수께서 하늘
로 올리우시기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서 축복해 주시는 장면이 나
온다.
ㅇ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 이 구절은 1장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연관
됨이 분명하다(1:9-16). 엄밀하게 말하면 실제로 '불수레와 불말'에 관한 언급은 엘리
야의 생애 중에서 불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의 승리를 연상시켜 준다(왕상 18:24-38;왕
하 1:10-12). 실제로 구약에서 말과 병거는 군대의 전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출
14:7; 삿 4:3;욜 2:5;나 3:2), 불이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출 3:2;24:17;신 33:2;합 3:3-5)이 '불수레와 불말'이 하나님의 권능과 의지를 나타
내는 구름을 의미(Lange)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ㅇ회리바람을 타고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회리바람 안에' 또는 '회리바람 가운데'
이다. '회리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아라'로서 검은 구름과 번갯불
을 동반한(Wycliffe) '태풍' 상태를 의미한 말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진노
하심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회리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욥 38:1;행 2:2). 그리고 원문을 보면 엘리야가 불수
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단지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태풍가운데 사라진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말 4:5,6;마 11:14) 폭풍 중에, 즉 주께서 임재하
시는 가운데 승천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Wycliffe). 그래서 17절에서 오십인을 보
내어 엘리야를 찾아오게 한 것도 이와 같이 그의 사라짐이 묘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
고 엘리야가 에녹(창 5:22-24), 예수(눅 24:50-53)와 같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
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일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
(고전 15:51;살전 4:17). 한편 후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지 직전에 먼저 엘리
야가 나타나리라(말 4:5)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 문헌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엘리야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하며, 개들이 즐겁게 짖으면 그것이 엘리야가 오는 소식이라하여 가슴을 두
근거렸다는 것이다(Bahr).
ㅇ승천하더라 - 여기서 히브리 원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알라'인데 이
것은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질문할 때(3,5절) 사용한 단어 '라카흐'
와 다른 뜻이다. 즉 '라카흐'는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심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알
라'는 그 원형인 '번제'라는 뜻의 '올라'에서 보듯이 완전히 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확실히 에녹이 승천한 경
우와 연관되는데(창 5:24)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고 기록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 엘리야의 승천 방법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에녹과
모세와 동일하게 취하셨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
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일부는 본 엘리야의 승천 기사를 하나의 전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그 현장을 목격한 당시의 선
지 학교 학생들과 엘리사의 증언에 의해 또는 승천 전에 언급된 사실(3,5절)을 미루어
볼 때 그리고 변화 산상에서 모세와 같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엘리야의 기사
를 살펴볼 때 그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과 객관적 사실성은 충분히 입증 되었다고 할
수 있다(마 17:3,4;눅 9:30).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
님이 계신 곳에 대한 확실성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멸성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 수 있
다. 그리고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고,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가 승천하신 것에 대한 한 상징인 것이다(Matthew Henry Commintary).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ㅇ엘리사가 보고 - 10절과 비교해 볼 때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엘리사가 목격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엘리사가 제시해 주었던 상황(3, 5절)이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엘리사는 자신이 요청한 '갑절의 영감'이 응락된 것
을 알았다.
ㅇ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 엘리사의
이 외침은 2장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3:14에서 요아스 왕의 입을 통
하여 이 문구가 다시 말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 자체가 갖는 독특한 의미를 해
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요아스 왕 이외에는 없기 때
문에 이 구절을 문맥과 독립시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버지
여'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존경을 나타
낸다. 즉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5:13), 또는 젊은 생도들이 나이든 선지자에게 이와
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둘째, 이것은 선지자들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외에도 혹자는 이것을 '엄마,마마' 등과 같이 어린 아이의 근심된 표현
으로 해석하기도 한다(T. H. Gaster).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
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는 외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 보호자가 된 것을 의미한
다(Wycliffe). 왜냐하면 특히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
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증명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또 엘리사의 이러
한 외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요아스 왕이 엘리
사에 대하여 이 구절의 내용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 것(3:14)도 엘리사를 엘리야와 같
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병거와 마병은 그당시 최고로
강력한 병기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안전을 의존했던 것(Keil &
Delitzsch, Vol. . p.296-297)으로 싸울때(욜 2:5;나3:2), 물건을 나를 때(9:28),
여행할 때(행 8:29)등에 사용된 것이다.
ㅇ엘리사 - 히브리어로 '엘리솨'로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
와 '그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솨'가 합쳐진 말이며 '나의 하나님
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
는 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 아합(B.C. 874-853)의 통치 말년이거나(왕상 19:1-7), 또
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B.C.853-841)의 통치 초반으로 본다(3:1). 이때부터 제 12대
왕 요아스(B.C.798-782) 통치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 활동을 하였다(13:14-19).
ㅇ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둘로 찢고'라고 해야 바른 번역이 된다. 여기서 엘
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스승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낸 행동이었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던
엘리야가 사라진 것은 엘리사에게 큰 슬픔과 더불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의 이러한 심적 상태가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5:7;수 7:6). 이밖에도 재를 뒤집어
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행위(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
리는 것(렘 7:29)등은 모두 극도의 애통을 표시하는 관례적인 행동들이다.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ㅇ이제 엘리사는 다른 생도들, 즉 위의 모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에게로 되돌아 오기
시작한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줍는 후계자 계승의 상징적 행위는 왕상
19:19에서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처음 부름을 받던 행위와 서로 연관된다. 한편 엘리야
의 떨어진 겉옷은 엘리사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하나의 증표(Keil & Delitzsch)임과
동시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외적 증거이
다(15절, Wycliffe)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ㅇ물을 치며...물을 치매 - 여기서 '물을 치다'라는 표현이 두번 거듭해서 언급된 것
은 스승 엘리야가 행했던 능력을 상기시켜 줌(8절, The Bible Knowledh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과 동시에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출
14:21,22;수 3:17).
ㅇ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 히브리어 원문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더욱이 그는?'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지막의 두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했던 기도였다(Wycliffe). 그러나 이것을 엘
리야와 함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닐까하는 근심의 표현으로 해
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질문의 강조 형식을 빌어서 엘리
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
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게 하셨고 엘리사가 엘리야
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확증시켜 주셨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3 ,
p. 297).

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

ㅇ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사의 기적을 목격하고서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
로서 그의 권능을 이어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요 17:18;행 14:23). 그래서 그들은 엘
리사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뜻에서 그의 발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다. 한
편, 엘리야가 요단 강을 건넌 후 얼마되지 않아 승천하였고 이것을 목격한 이후 엘리
사도 겉옷을 취하여 곧바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요단 서편 언덕에서는 여리
고의 선지 생도들이 엘리야의 일을 궁금하게 여기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고 16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 모두 확신케 되며 이제부
터는 새로운 선지자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한편, 본절에서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
사의 위에 머물렀다는 말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받았다고 하
는 선지 생도들의 고백이다(Wycliffe).

16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ㅇ용사 오십 인 - 문자적으로 '용사'라는 단어는 '힘의 아들'이란 뜻으로(Pulpit
Commentary) 주로 군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치만은 않다. 여기서 '용
사'는 사흘 밤낮 엘리야를 찾아 험하고 가파른 산중을 헤매어 다닐 수 있는 건장한 사
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색한 결과 엘리야의 시체를 찾지 못하므로(17절)
엘리사의 말에 더욱 더 큰 신임을 갖게 되었다.
ㅇ청컨대...던지셨을까 하나이다 - 여리고에 있던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혼
만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야의 육체가 어느 높이만큼 올라
간 후에 필연적으로 지상 어디엔가에 떨어졌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동안 선지자로
서의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육체를 찾으려 하였다.
ㅇ여호와의 신 - 여기서 회리 바람과 여호와의 신에 대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즉 11
절에서 엘리야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은 여호와의 신이 그를 인도해 가신 것으
로 볼 수있다. 왜냐하면 회리 바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인 것
이다(H. W. Robinson). 한편 왕상 18:12에도 여호와의 신이 엘리야 선지자를 인도하심
으로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즉 선지자의 생도들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신이 엘리야의 영을 인도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엘리야
의 영육 전부가 아니라 육신과 분리된 영이라고 선지 생도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편 이러한 사상은 유대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난다(Ascension of
Isaiah 6:14).
ㅇ보내지 말라 - 히브리 원문은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엘리사의 확신에
찬 신앙을 나타낸다.

17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 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ㅇ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强請)하매 - '부끄러워하도록'은 '...까지'를 뜻
하는 '아드'와 '실망하다'를 의미하는 '부쉬'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히
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이 그가 부끄러워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Gesenius, Keil &
Delitzsch). 그러나 70인역(LXX)은 이것을 '그가 자기의 거절을 더이상 고집하기 어려
울 때까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8:11에도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선지
생도들의 강청에 못이겨 엘리사가 "보내라"고 말했을 때는 그는 단지 그들의 불신 때
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엘리사의 충고 대로였다. 이러한 것을 살펴
볼 때 본절은 단지 엘리사가 '만일 너희가 그것을 고집한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의 민족을 위해서 보내라'라는 의미로 허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18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ㅇ본절은 다른 선지자의 생도들보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난 엘리사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
다. 영적 능력과 더불어(14,15절) 이같은 통찰력을 구비함으로써 엘리사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본절에서는 엘리야의 사라짐
에 대한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과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 수단으
로 공식화되고 있다.

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ㅇ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 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구체적으로 어느 성읍을 가리
키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여리고 성 일것이라고 생각한다(Hobbs). 왜냐하면 여
리고는 광활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경치가 좋고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뿐
만 아니라 여리고에는 유대 산지에서 저지대로 흐르는 강이 있었으며, 종려 나무(신
34:3)와 무화과 나무(눅 13:6-9)가 있었고 방향(芳香)의 관목들과 향기로운 수지를 내
는 나무 등이 많아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이 이
야기는 텔 에스술탄(Tell es-Sultan)의 서쪽에 위치한 '엘리사의 샘'의 전설로서 오늘
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ㅇ물이 좋지 못하므로 - 본절에서는 물에 독소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사람들은 물이 나쁘기 때문에 토산물(土産物)이 익지 못하
고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Wycliffe). 한편 혹자는 이러한 환상이 여리고성에
대한 여호수아의 저주(수 6:26)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Blake).
ㅇ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 여기서 '토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아레
츠'인데, 이것은 '땅', '육지', '나라', '주민'등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땅'을 의미(Keil & Delitzsch)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주민들'도 함
께 의미(The Interpreter's Bible)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레 19:29). 또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솨켈레트'로서 사람이나 동물
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라는 뜻의 동사 '솨콜'의 분사형이다. 또 이 단어
는 특별히 비유적으로 포도원에 '결실이 없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
한 비유적인 의미는 결국 자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호 9:14). 그래서 루시니안 헬
라어 역본은 이를 '아이가 없는'(be childless)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
양한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본절을 원문에 따라 해석하면 1)'그 땅에는 소산이 없다',
2)'그 거민은 유산한다'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과 Living Bible은 70인역
(LXX)과 마찬가지로 '주민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란 의미로 해석한 반면 대부분의 영
역본들(KJV, RSV, NIV)은 '그 땅에 소산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물과 직접적
인 관련이 있는 것은 땅의 소산이므로 본절에서는 1)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토산을 맺지 못하던 땅이 변화된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에 비
유될 수 있다. 즉 토산을 맺지 못하던 여리고 성읍과 같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
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
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하겠다(마 13:23).

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ㅇ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 '소금'은 음식물의 양념으로(욥 6:6), 제사용품으로(레
2:13;겔 43:24), 그리고 신생아의 소독제와(겔 16:4), 방부제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런 다양한 용도와 관련하여 '페허'(삿 9:45;신29:23), '생명'(마5:13), '언약'(민
18:19;대하 13:5)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사가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출
15:23)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러한 확신하에 하나님의 능력
을 표현한 기적을 연출해 냈던 것이다(4:41;출 16:25;요 9:6).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
서 소경을 치료하실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든 다음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서
낫게 하신 사실과 비교될 수 있다. 한편 본절에서 새 그릇은 전적으로 깨끗하고 정결
한 수단, 즉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Matthew Henry, Vol. , p. 717) 소금은
정결을 상징한다(Pulpit Commentary, The Bible Knowledge Commintary).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ㅇ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이 말은 본서의 저자가 열왕기서에 관한 사료를 편집해 기
록할 그 당시까지 여리고의 물이 청결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뿐 아니라 소산에 대해 아
무런 어려움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엘리사의 이적에 대한 기록을
실증해 줌과 동시에 21절에 예언했던 엘리사의 말에 대한 권위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ㅇ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 여기서 '젊은 아이들'이란 히브리어로 '나아르'
로서 십 이 세부터 십 오 세의 '소년들'을 가리킨다(G.Rawlinson). 이들은
선악에 대한 충분한 인식력을 지니고서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 할 자들이었
다(Wycliffe).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낯선 나그네인 엘리사를 보고서 도움을 베풀
기는 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는 짖궂은 짓을 일삼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엘리
사가 그들에게 그렇게 잔인한 저주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ㅇ대머리여 올라가라 - 율법에는 인공적으로 머리를 깍아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다(신 14:1). 또 대머리는 문둥병에 의한 것으로(레 13:42-44) 하나
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의 표징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천민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엘리사의 대머리는 자연적인 특징으로서 결코 사람들의 조롱이나 비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사의 외모는 스승 엘리야의 외모와 대
조를 이루고 있다(1:8). 한편 본절의 '올라가라'는 히브리어 '아래'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높이 오르다', '도약하다', '능가하다'는 뜻으로 '네 길을 계속 가라'라
고 이해할 수도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는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
가라'는 의미로(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엘리야의 승천을 비꼬는 말이다
(Matthew Henry, Vol. , p. 718).

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ㅇ본절에 기록된 저주와 그에 대한 성취 방법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
리의 윤리 기준을 가지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당시 여호와를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엘
리사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을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엘리사는 간주했던 것이다
(대하 36:16;눅 23:36).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젊은 아이들에게 저주를 선포
했는데 이는 율법하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불순종하는 자에게 저주하도록 하는 모세
오경에 근거한 것이다(신 27:14-26). 그리고 아이들 중에 사십 이 명을 찢었다는 본절
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데 이
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롱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그 조롱의 행위가 미리 의도된 것이었
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Wycliffe).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ㅇ갈멜 산으로 가고 - 갈멜 산은 휴양과 명상에 적합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엘리야의 주된 활동지였기 때문에(Ewald) 그곳은 특별히 선지자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리사가 갈멜 산으로 간것은 그곳에 있는 엘리야의 친
지들이나 선지자의 생도들에게 그가 승천한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G.
Rawlinson, Pulpit Commentary).
ㅇ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 엘리사는 은둔 생활을 한 자기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에서 살았다. 거기서 사람들과 사귀고 교제하며(5:9;6:32),
왕의 친밀한 상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6:9). 그리고 그는 왕에게로부터 상당한 존경
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8:4). 한편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엘리사가 사
역한 중심지이다(Wycliffe).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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