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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상

[스크랩] 열왕기상 (22 : 1~5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16
열왕기상 22장

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내었더라

ㅇ전쟁이 없이...지내었더라 - 20장에 수록된 아벡(Aphek)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로
아람은 약 3년간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자에 의하면, 이 무렵의 아람
은 알만에셀이 이끄는 앗수르와 교전 중이었으며, 아합 역시 아람 동맹군으로 참가하
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간에 다툴 겨를이 없었다 한다(Rawlinson). 일설에 의하면, 아
합은 이때 1만의 병력과 2천대의 병거를 앗수르에 대항하는 아람군에게 제공했다고 한
다. 더구나 이러한 동맹은 공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적인 것일 뿐 양국간의
신뢰에 바탕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20:1 주석 참조. 그 실례로 본장에서 보는
것 처럼 불과 3년만에 양국이 재차 대립 상태에 들어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람이 전에 반환하기로 한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다(3절). 즉 이스라엘은 아벡 조약을 통해 다메섹에서의 교역권은 물론 기타 분쟁
지역들을 할당 받기로 하였던 바 그 지역들 중에는 길르앗 라못도 포함되어 있었다
(20:34). 그런데 아람 왕 벤하닷은 일단 사경(死境)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애초의 조
약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2 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ㅇ제 삼 년에 - 여기서 '제 삼 년'이란 '전쟁 없이 지낸 지 삼 년 만에'란 뜻이다.
즉 이는 20:34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이 서로 화친을 맺은 때를 기점
으로 해서 3년째 되던 해를 가리킨다. 이 말로 미루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휴전(休
戰) 상태로 지낸 기간은 만 3년이 채 못됨을 알 수 있다.
ㅇ유다 왕 여호사밧이...내려가매 - 지금까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대체
적으로 적대 관계를 유지해 왔다(14:30; 15:6,7,16,32). 그런데 그동안의 구체적인 과
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없이 본절에서는 돌연 남북 왕국이 서로 우호(友好) 관계를
누리는 사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추측컨대 이러한 우호 관계는 아합의 딸 아달랴
(Athaliah)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Jehoram)의 혼인을 매개로 이루어진 듯하다(대
하 18:1; 21:6;22:2). 더군다나 당시는 동쪽에서 점점 강성(强盛)해 가는 앗수르의 위
협에 대처키 위해 팔레스틴의 여러 국가들이 곧잘 동맹을 맺던 때이다. 그러므로 본래
외교에 능한 아합이 남왕국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당시의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
해 여호사밧(Jehoshaphat)과 공동 전선을 펼쳤던 것이라 보여진다. 또한 팔레스틴 동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아람에 대해서도 양국은 나란히 견제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의 아합왕에게로 나아가는 것
을 '내려가매'로 표현한 것을 보아 본장은 남왕국을 중심으로 한 기록임을 짐작할 수
있다.
ㅇ여호사밧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이다. 유다의 제 4대 왕인 그는
25년간(B.C.871-847)을 통치하였다. 비록 몇 가지 실책을 저지르기는 하였지만 여호와
를 경외한 여호사밧은 히스기야, 요시야와 더불어 유다의 현왕(賢王) 중 한 명으로 분
류된다.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ㅇ이스라엘왕 - 다른 사람이 아닌 16장 말미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등장한 아합(Ahab)
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이제 본장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하니 이로써 열왕
기상도 끝이 난다.

3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ㅇ길르앗 리못 - 일명 라못 길르앗(Ramoth in Gilead)으로도 불리우는 이 성읍은 길
르앗 지방 동북방의 중요 요새지이다. 혹자는 이곳을 여호수아 13:26에 나오는 라맛
미스베(Ramath Mizpeh)와 동일시하기도 하나(Van de velde) 분명치 않다. 아무튼 길르
앗 라못은 요단 동편에 위치한 세 도피성 중 하나였고 래위인의 성읍이었으며, 솔로몬
시대에는 제 6지역 장관이 거주하던 곳이다(4:13; 신4:43; 수20:8). 그런데 이 지역은
고원(高原) 지대로서 골짜기마다 물이 많고 포도와 올리브가 잘 자라는비옥한 지역이
다. 그러나 타부족과의 접경에 위치한 관계로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서
도 특히 B.C.922년경 르손(Rezon)이 솔로몬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 2세기 동안
이 지역은 아람과 이스라엘 간의 주요 분쟁지역이 되었다(1:23-25).
ㅇ본래 우리의 것인 줄은...알지 못하느냐 - 갈르앗 라못을 아람에게 빼앗긴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은 벤하닷 1세가 바아사
(15:20) 혹은 오므리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아람에 합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
러나 벤하닷 2세가 아합에게 패배한 뒤, 그리고 아합이 앗수르 대항 동맹군에 협력하
는 대가로, 길르앗 라못은 이스라엘에 반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20:34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하닷 2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본장의 전쟁은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Cohen).

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 들과 일반이니이다

ㅇ여호사밧...싸우시겠느뇨 - 여호사밧 통치하의 유다는 제법 강성하였다(대하
17:1,2,10-19). 따라서 아합은 이스라엘 단독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인 아
람에 대하여 여호사밧과 공동 전선을 펴려 하였다. 한편 여호사밧으로서도 당시 유다
주변국들에 대하여 그다지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방 사업으로 내
실을 기하면서 외면적으로는 외교에 치중하는 정책을 펴 나갔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람을 견제하는 일은 여호사밧으로서도 도모해 봄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
과...일반(一般)이니이다 - 원문에는 '와 같이'라는 뜻인 '케모'가 거듭 사용
되었다. 즉 '나나 당신이나 다를 바 없고,내 백성이 곧 당신 백성과 같고, 내 말들이
곧 당신의 말들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현란하리만치 일치를 강조한 의교적 언
사(言辭)는 아람을 공격하는 일에 있어 남북 이스라엘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그러나 그 동기야 어떠했던 간에 여기서 여호사밧은 중대한 과실을 범한
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그는 여호와의 대적자였던 아합을 도운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대하19:2). 사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
원해 주신 하나님(20장)께서 이제 아람을 도구로 사용하사 아합을 징치(懲治) 하고자
하셨으리라고는 여호사밧으로서 깨닫기 힘들었을 것이다.

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ㅇ먼저...물어보소서 - 대하 17:3-4에 의하면, 여호사밧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경건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사밧의 면모가 본절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정치적 판단에 있어 길르앗 라못 공략의 필요성을 공감했더라
도 그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묻자는 태도를 보인다(대하18:4). 이처럼 하나
넘께 의지하는 태도는 훗날 여호사밧이 여호람과 더불어 모압을 정벌하던 때에도 변함
이 없었다(왕하 3:4-12). 그러나 여기서도 굳이 여호사밧의 잘못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즉 여호사밧은 구체적 전투 사항을 여호와께 물어 보기 이전에
아합과의 군사 동맹 여부 자체에 관해 먼저 물어보았어야 옳았다.

6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ㅇ이에 선지자 사백 인쯤 모으고 - 본장에는 아합이 집합시킨 이 화명의 선지자들이
누구인지 징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장의 기록에서 이들은 (1) 왕의 정책
결정에 일종의 자문(諮問) 위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2)권력자의 구미에 맞을
만한 말만 하는 아부형의 인물들로 나타난다. 즉 이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권력의 핵
심에 포진(鋪陣)한 어용(御用) 선지자들이다. 그런데 또한 이들은 외견상 여호와 신앙
에 속하는 선지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참 선지자인 미가야
(Micaiah)와 이들의 차이점은 예언의 진위(眞僞) 여부에 있었지(10-28절) 엘리야와 바
알 선지자의 극명한 대립처럼 근본적인 차이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8:20-40). 어쨌
든 본장에서는 이 400명의 선지자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
는 아합과 이세벧이 한편으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면서(16:31-33) 또 한편으론
형식적이나마 여호와 신앙을 허용하는 종묘 혼합주의 정책을 펼쳤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이세벧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경우에도 그녀는 표면상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에 편승해서 간접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21:9,10). 물론 실제에 있
어 이는 여호와 신앙의 파괴였다. 이처럼 과거 여로보암 당시와 마찬가지로 아합 시대
에도 이스라엘 전통을 완전히 내버리지는 않으면서 이방 사회의 풍습과 종교를 도입하
려는 혼합주의 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12:25-33). 본절의 400명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무리들로 판단된다. 특히 이들이 왕의 정책에 언제나 동조
하는 무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그들은 왕권의 무한한 확대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실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專制的) 왕권의 강화란 이방 국가들
의 특징이지 이스라엘 전통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즉 여호와 신앙이 뒷받침하는 이스
라엘 전통 속의 왕권이란 언제나 제한적이었다. 21:2 주석 참조. 그래서 엘리야 같은
여호와의 선지자는 왕권의 전횡(專橫)에 언제나 비판적이었다(21:17-26). 따라서 여호
와의 이름을 빙자해 왕전 강화와 이방 체제 도입에 공헌한 400인의 선지자들은 실상
여호와 신앙과 그에 뒷받침된 전통 체제를 붕괴시킨 무리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러므로 이들이 참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
이다.
ㅇ길르앗 라못에...올라가소서 - 요단 동편의 길르앗(Gilead) 일대는 대체로 고원 지
대였다. 즉 그곳은 해발 약 210m에서 910m까지 이르는 구릉지대인 것이다. 그래서 본
절과 같이 '올라가소서'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7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ㅇ이 외에...있지 아니하니이까 - '이외에'에 해당하는 '오드'는 '계속해
서','다시'라는 뜻을 가진 부사이다. 즉 여호사밧은400명의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더 물어 볼 선지자가 없는가 묻고 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이들의
예언(달콤한 말임에도 불구하고)에 만족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 신앙
가운데서 살아온 여호사밧은 민감하게도 이 무리들의 예언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모나게 발설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ㅇ오히려 - '오히려'로 번역된 '오드'는 7절에서 '이 외에'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문맥상 본절에서는 '아직'으로 번역하는 게 좋음직하다.
ㅇ이믈라의 아들 이가야 - '미가야'(미카예후)는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
인가'라는 뜻이다. 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활약하던 참선지자로 앨리야, 엘리사의
계열에 들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아합의 주된 비판자로 나타난다. 즉
물론 엘리야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극렬한 역할을 담당하지는 않았으나
(19:2). 미가야 역시 아합이 만나기를 꺼리는 껄끄러운 선지자였다. 본장에서도 그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참된 예언을 대언(代言)하다가 그만 이번 사건에서 옥고(獄苦)를
치루고 만다(24-28절).
ㅇ저는 내게...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 여기서 '흉한 일'(라아)은 본래 '재난
', '불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은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언으로만이 아니라 교
훈과 경고, 권면 등과 같은 보다 폭넓은 '메시지'로서 이해되여야 한다. 한편 본절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미가야는 아합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자주 비판과 미구(未久)에 임
박할 재난들을 경고해 왔던 것 같다.그러기에 병행 구절인 대하 18:7에는 '항상'이라
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ㅇ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 여호사밧의 대꾸에는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좋든 싫든 하나님 말씀 자체로서 존중되어야지, 듣기 싫은말을
한다고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본절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말
가운데서도 여호사밧의 진실한 신앙적 태도를 거듭 엿볼 수 있다.

9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ㅇ내시 - 이에 해당하는 '사리스'는 '거세(去勢)하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
이다. 이는 곧 본 직책을 가진 사람이 고자(鼓子)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원래 근동
세계에서는 고자를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는 관습이 있었긴 해도(J.Austel), 이스라엘
인들은 고자를 언약의 총회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불완전한 존재로 여겼었다(레 22:24;
신 2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아합의 왕궁에서 내시가 상당히 비중있는 역
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이는 두로의 우상과 함께 이방의 사회 체제를 끌
어들이는 데 열심이었던 이세벧의 영향 탓일 것이다(16:31-33).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후의 왕들도 계속 내시를 두게 되기까지에 이르른다(왕하 8:6;9:32).

10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ㅇ본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중대사를 눈앞에 두고 소집된 국가 회의의 면모를 짐작
케 해준다.
ㅇ왕복을 입고 - 원문은 단순히 '그들의 옷을 입고'이다. 물론 '그들'은 왕이므로
'그들의 옷'(베게드)윤 '왕복'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본절이 그들의
의복 착용을 새삼스럽게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의복이란 곧 그 사람의 신분 및 직
무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본서 기자가 아합과 여호사밧의 왕복 착용
사실을 지적한 이유는 저들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강
조하고자 함이라 볼 수 있다. 그만치 본절은 사안(事案)의 중대성을 부각시키는 문구
이다.
ㅇ문 어귀 광장에서 - '광장'에 해당하는 '고렌'은 본래 '타작 마당'을 가
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타작 마당도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R.D.Patterson). 한편 왕이 문 앞에 나와서 회의를 갖는 것은 지도자가 장막 입구에
나와서 재판 등의 직무를 수행하던 이스라엘 족장 시대 이래의 관습이다. 다시 말해
본절의 '문 어귀 광장'이란 현 공동체의 장(長)이 그 구성원들과 만나 의견을 수렴(收
斂)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신 21:19; 수 20:4; 왕하 7:1; 느 13:19; 시
69:12; 잠 1:21). 실상 건강한 공동체라면 이런 자리에서 기탄없는 견해가 만발하여
지도자의 직무 수행에 참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합의 주변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명의를 빌어 권력에 영합하는 정상 모리배(政商謀利輩)들만이 들끓었
다.
ㅇ모든 선지자가...예언을 하는데 - 본절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이 왕의 정치적 결단에
조언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이들은 마치 왕의 정치 자문 위원 같
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정책을 조언하고 뒷받침
하는 이념적 구실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원래 구약에서 정치, 경제 등을 종교와 구분하
는 사고 방식은 낯선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 앞에서는 다만 모든 분야가 통전(通電)
된 삶이 놓여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현실이 하나님 앞에 바르냐 그르냐일뿐이다. 본
장에서도 문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토로하지 않고 거짓 예언을 들려주
었다는 데 있다.

11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ㅇ시드기야 - '시드기야'(치드키야)란 '여호와는 나의 의로움이시다'
는 뜻이다. 그러나 그처럼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본문에서 거짓 영에 감동
된 선지자라는 부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그의 이름이 지닌 뜻에서도 나타
나듯 당시 400명의 선지자들은 철저히 여호와의 선지자로 행세하는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ㅇ철로 뿔들을 만들어 - 성경에서 뿔(Horn)은 상징적으로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삼상
2:1,10; 삼하 22:3; 시89:24; 92:10; 단7:21; 8:8). 게다가 철은 당대로서는 가장 강
력한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금속으로서 '강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철로 뿔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당할자가 없는 막강한 힘을 상징한다. 즉 시드기야는
아합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철 뿔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 예
언자들의 과장된 부추김은 가뜩이나 어린애 같은 아합의 불붙는 만용(蠻勇)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ㅇ여호와의 말씀이...하셨다 하고 - 시드기야(Zedekiah)의 이 같은 예언 역시 초자연
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시드기야를 포함한 거짓
선지자들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22절). 그러나 본문이 제시하는 문제의 초점은 어
디까지나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거짓 영의 감동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
는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 문제와 직결된다(Szikszai).
한편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 영이라는 초자연적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12
절) 그들이 윤리적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 미혹에 빠지게 되는 자
들의 마음 바탕에는 욕심과 탐심이 감춰져 있게 마련이다. 마치 세균의 감염은 깨끗치
못한 부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듯 말이다(잠12:36; 렘 23:32; 사44:20; 고후11:3; 약
1:14). 그러므로 이 직업적 선지자들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기보다
는 권력 주변에서 곡언(曲言)을 일삼는 무리였음에 분명하다. 즉 그들이 거짓 영의 노
리개가 되었던 것도 그들안에 거짓의 바탕이 상응(相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가야
가 거짓 영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그가 정직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14절).

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ㅇ승리를 얻으소서 - 이에 해당하는 '차라흐'는 '번영하다' 또는 '형통
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의도했던 바를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서 우리는 길르앗 라못 공략이 아합의 숙원(宿願)이었으므로 선지자들이 왕이 원하는
대로 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합의 의도에 거침없이 반발할 인물은 처음부
터 회의에서 제외되었다(8절).

13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ㅇ여출 일구(如出一口) - '여출 일구'란 '이구 동성'(異口同聲)과 같은 말이다. 원
문의 '페 에하드' 역시 '한 목소리로' 또는 '한 입으로'라는 뜻이다.
ㅇ청컨대...길하게 하소서 - '청컨대'에 해당하는 '나'는 '제발','바라건대
'(please혹은 I pray)와 같은 간곡함이 담긴 말이다. 아마도 아합은 사자(使者)에게
어떻게든 미가야를 회유, 설득하도록 당부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예언에
대한 여호사밧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아합은 깊이 인식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
다(7-10절). 따라서 사자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들어 미가야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
다. (1)모든 선지자들의 의견이 하나같이 일치한다는 점(11,12절)이다. 따라서 그러한
마당에 홀로 하나님 말씀의 참된 대언자로 서야 했던 미가야의 심경은 처절한 고립감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2)저주의 예언을 할 경우에는 모종의 단호한 조처가 강
구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길하게 하소서'라는 말 속에는 은근한 협박이 내포되어
있었음이 후에 입증되었다(27절).

14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ㅇ여호와께서...말하리라 - 미가야의 이같은 대답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
의 요청에 답변하는 발람(Balaam)의 말과 유사하다(민22:38). 그런데 발람의 경우에서
도 주목할것은,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선포할 때는 이전에 쓰던 사술(邪術)과
는 다른, 여호와의 영(靈)에 사로잡혀 예언하였다는 점이다(민 24:1). 여기서 우리는
미가야의 예언과 다른 긍정 선지자들의 예언(11,12절)의 구별점을 시사(示唆)받을 수
있다. 즉 우선 미가야와 발람의 참된 예언은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대상께 압도당해 발
설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긍정 선지자들과 발람의 사술은 인간의 의도를 관철하
기 위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엮어지는 듯한 특징이 있다(13절; 민 22:11; 24:1).
아무튼 미가야는 사자의 청(請)에 대해 직접적 답변을 회피한 채 오직 여호와께서 게
시해 주시는 대로만 예언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실상 그 같은 답
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계시를 주시고 또
한 그것을 성취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미가야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대언자 노릇
을 할 수 있을 뿐이다. (2)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함부로 거짓 예언을 일삼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15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저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ㅇ저가 왕께 이르되...붙이시리이다 - 미가야의 본 대답은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11,12절)과 똑같다. 그런데 미가야가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음에도 블구하고(17
절)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아합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비꼬기 위해서였다. 사실 아합
의 질문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 하면 순종하겠다는 진지함이 결여된 것이었다. 그러
므로 미가야도 '당신이 듣고 싶은 게 이 말 아닙니까? '하는 식의 역시 진지하지 못한
답변을 한 것이다(Lange, Mathew Henry).

16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

ㅇ내가 몇 번이나...고하겠느냐 - 아합은 이내 미가야의 대답이 진지하지 못한 조롱
끼의 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합은 평소부터 다수의 견해에 영향받음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을 전달하는 미가야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한편 여기서 '몇 번이나'(아드 카메 페아밈)는
'몇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도의 뜻이다. 즉 이는 맹세를 몇 번이나 거듭해야 진
심을 실토하겠느냐는 다그침이다. 그러나 이런 거듭됨이 이미 미가야가 여러 번 맹세
시킴을 받고서도 조롱을 계속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는 '정말 사실을 털어
놓지 않겠느냐'는 다그침을 강조하는 수사적(修辭的) 표현일 따름이다. 이러한 아합
의 다그침 속에서 우리는 그가 미리부터 미가야에게 긍정적 답변을 기대하고 있지 않
았음을 느낄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심 아합 자신의 의도가 진정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자신이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7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ㅇ내가 보니 - 여기서 '보다'에 해당하는 '라아'는 원래 보되, 이해하여 깨
닫는 응시(凝視)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동사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
를 보는 선지자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데 종종 사용되기도 한다(겔 8:4;37:8; 단 8:4;
슥 1:8). 사실 선지자는 '보는 자'(로에)로 불리운다(민 12:6; 삼상 3:15;
9:9; 겔 1:1; 8:3). 따라서 미가야는 참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체험을 가진
사람임을 이 동사에서 엿볼 수 있다.
ㅇ목자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 이 같은 표현은 모세에 의해 그대로 사용된바
있다(민27:17). 그리고 그 외에 성경 여러곳에서도 백성들과 지도자(왕)와의 관계를
이처럼 양과 목자와의 관계로 표현하였다(시78:70,71; 렘 23:1,2). 따라서 본절이 이
스라엘 군대의 패주 및 그 지휘자의 사망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한편 선한 목자되시는 예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이리 저리로 인도하며
물을 먹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목슴까지 버리셨다(요 10:1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
도 해를 두려워 아니하고 늘 풍족한 기쁨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이다(시 23편).
ㅇ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과는 달리 일견 대단히
모순된 듯이 보일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지도자의 죽음이 무리의 와해(瓦解)를
불러오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
아가는 광경을 '평안히'라는 말로 수식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아
합의 출정(3절)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괴로움을 주는 결정이
었다는 강한 암시를 받는다. 사실 36절은 본절의 예언이 이루어져 백성들이 '각기 성
읍으로, 각기 본향으로'를 외치며 흩어지는 모습을 전한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아합
의 야심에 찬 출정계획은 농업적 전통이 강한 북왕국 백성들에게는 생산을 중단하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괴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아
합의 죽음으로 인해 전쟁을 중단하고 귀향하게 된 것은 백성들 편에서는 평안을 주는
결과로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ㅇ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본절은 '그것 보시오 내가 애초부터 얘기한
대로가 아닙니까'라며 여호사밧의 마음을 돌이키려 애쓰는 아합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
다. 그리고 이는 또한 아합의 닫힌 마음에 대해서도 알게해 준다. 본래 회의(會議)란
상대방의 의견에 자신을 수정할 수도 있다는 개방성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아합은 미
가야의 예언이 자신의 선입견(8절)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그예언 자체를 신
중히 고려하고 있지 않다. 즉 아합은 미가야를 마치 훼방만을 목적으로 하는 말썽꾼
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미가야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아합의 선입견은
도리어 그로 하여금 진실을 경청하는 데서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사례를 신약에서
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님 역시 그를 안다고 생각하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인
정받지 못하였다(마 13:53-58; 막 6:1-6; 눅 4:16-30)

19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ㅇ내가 보니...보좌에 앝으셨고...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 미가야의 환상 속에
서 하나님은 섬기는 천군 천사(天軍天使)들에 둘러싸인 만왕의 왕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여호와를 단순히 민족신, 즉 제신(諸神)중 하나로 간주하는 관념에 정
면으로 상치(相馳)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념은 주변 세계의 영향에 항상
노출되어 온 이스라엘로서는 부단히 씨름해야 하는 문제였다. 심지어 이스라엘 내부에
서조차도 그러한 관념에 바탕하여 이방신들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타협적 경향이 있어
왔다. 설상 아합 시대의 다수는 여호와를 아주 내동댕이 치지는 않으면서 이방신들을
끌어들여 함께 섬기겠다는 부류들이 있었다. 6절 주석 참조. 물론 이런 태도는 여호와
를 다른 이방신들 중 하나로 격을 떨어뜨려 결국에는 유일신(唯一神) 신앙을 훼손시키
는 치명적 행위였다. 그러나 미가야의 환상은 오직 여호와만이 한분 참된 신이자 만왕
의 왕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대하 20:6; 시24:10)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ㅇ누가 아합의 꾀어 - '꾀다'에 해당하는 '파타'는 '속이다', '유혹하다
'설득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유혹이란 언제나 유혹자 못지 않게 유혹받는 자
에게 전제된 탐심과 욕망을 간과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에게 하필 전쟁터
로 끌어 내어죽게 하는 유혹이 닥친 것은 그의 내면에 군사적 세력 확장의 탐욕이 충
일(充溢)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ㅇ죽게 할고 - 세상 만사와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달
려있음을 새삼 증거해 주는 부분이다(눅12:20).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인(惡人)을 무
조건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죄
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신다(겔 33:11). 그런데도 불구하고 악인들이 사
망의 길에 이르는 까닭은 다만 그들이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당하기 때문이다(약
1:13-15).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ㅇ한 영 - 여기서 '한 영'은 '어떤 영'과 같은 막연한 지칭이 아니고 정관사 '하'가
붙어 있어 '그 영'(하루아흐)이란 뜻이다. 혹자는 이 영(靈)의 정체를 하나
님의 천사로 이해하기도 하나 그렇지는 않다. 즉 본절에서 뚜렷하게 하나님께 대적하
는 사탄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다음절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부정적 역할을 하는 악
령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령과 사탄조차도 당신의 섭리 가운데
서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욥 1:6-2:6)

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ㅇ거짓말하는 영 - 이 영은 분명 사단(Satan)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할이 미혹자, 속
이는 자이기 때문이다(창 3:13; 대상 21:1; 요 8:44). 한편 구약에서 초인적 존재이면
서 독특한 하나의 인격체인 사단이 등장하는 부분은 별로 많지 않다. 다만 본절에서
처럼 특정 상황에서 톡정 역할을 맡게 되는 익명의 한 영적 존재로서 언급되는 정도이
다(Gaster). 이상과 관련해서는 욥 2장 강해, '사단의 정체와 그활동'을 보다 참조
하라.
ㅇ모든 선지지의 입에 있겠나이다 - 사단과 악령은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요10:10) 하나님께 인간의 죄악을 송사하는 이간자요 고소자이다
(욥1:9-11; 2:4,5). 본절 역시 사단과 악령의 그러한 본질을 증거하는 바 저들이 곧
아합을 꾀어 멸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을 주장(主掌)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ㅇ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넣으셨고 -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령의 활동을 허락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넘을 악의 원인
자(原因者)나 방치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20절주석 참조.
ㅇ화를 말씀하셨나이다 - 이 말에는 법정의 판결문처럼 그 효력의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할 뿐만 아니
라 헛되이 스러지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이다(시 33:4; 사55:11; 렘 23:29). 그런 여호
와의 말씀이 아합에 대해 '화'(라아), 즉 재난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
리는 이러한 선포를 단지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경고란 그 엄중함과 함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양면성을 지니고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미가야의 재난 선포 역시 아합으로 하여금 결정을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21:29).

24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 하더냐

ㅇ시드기야가...빵을 치며 - 시드기야는 400인 선지자 무리(6절)의 공식적인 지도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내세우는 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아합이
숭리하리라는 예언을 쇠뿔 상징을 통해 열정적으로 대변한 인물이다(11절). 그러므로
그는 미가야의 반대 예언(17-23절)에 누구보다도 격노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미가야의 예언은 자신의 권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모욕과 같이 들렸을 것이다. 이러
한 심정적 반응이 이제 미가야의 뺨을 치는 격한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한편 이처
럼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친 장면은 예수께서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에게 수난당하
신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마26:67).
ㅇ여호와의 영이...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 '말미암아 가서'에 해당하는 '아바르
'는 '통과하다'(pass over)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통과하다'는 말을 통해 시
드기야가 대단한 자만심의 소유자였음 하나님의 영을 자신의 올타리에 가두어 둔 것처
럼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를 떠나'란 말 역시 그의 독점 의식을 또렷이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실상 이처럼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머문 것처럼 생
각하는 착각과 독선(獨善)이 불행하게도 시드기야로 하여금 진실을 경청하는 데 실패
케 했다.

25 미가야가 가로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ㅇ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 골방에 숨는 행위는 목숨의 위협에 직면해 깊숙이
피신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골방'은 유사시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은밀한 내실(inner
chamber)을 가리킨다. 20:30 주석 참조. 그렇다면 시드기야는 언제, 무엇 때문에 그러
한 피신을 감행하게 되는가? 본문은 이에 대해 알려 주는 바가 없다. 다만 추측컨대,
아합의 죽음으로 인해(29-40절) 격분한 이세벧이 책임을 물어 선지자들을 처형하려 들
었을 때 그 같은 도피행을 감행하였을 것이다(Hammond).
ㅇ보리라 - 이에 해당하는 '라아'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경위(經緯)
와 전말(顚末)을 이해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17절 주석 참조.

26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미가야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ㅇ부윤(府尹) - '부윤'(사르 하이르)이란 '한 성읍의 지도자'(the
ruler of the city)를 말한다. 그런데 본절의 '이르'(성읍)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
있어 '그 성'이란 뜻이니 이는 곧 미가야가 거주하던 성읍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부윤은 오늘날의 시장어(市長)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ㅇ왕자 요아스 - 부윤 아몬(Amon)은 물론 그와 함께 언급된 왕자 요아스(Joash)에 대
해서는 성경상에 특별히 알려진바 없다. 다만 추측컨대 요아스와 아몬은 함께국 가적
죄인을 다루는 형사(刑事) 책임자였던 것 같다.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ㅇ옥에 가두고 - '옥에 가두고'(베이트 하켈레)는 문자적으로는 '집에 가
두고'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 고대 이스라엘에는 감옥이 따로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미가야 역시 어느 개인의 집에 투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 감시를
미가야 거주지역의 책임자인 아몬과 형사 책임자 요아스가 담당하였을 것이다(대하
18:25,26). 한편 감금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때도 반국가적 인물이나 질서를 문
란케 하는 자에게 가해진 처벌이었다(Greenberg). 그러나 미가야는 양심수(良心囚)였
으니 부당한 감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남유다의 선지자 중에서도 미가야와 비
슷한 수난을 겪은 자가 있으니 곧 시드기야 왕때 활약한 예레미야이다. 즉 예레미야
역시 당시의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예언에 반대하다가 투옥당하였었다(렘28장;
32:1-5).
ㅇ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 - 이는 곧 감옥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비
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옥중에서 떡과 물을 마신다는 것 가혹한 시련과 고통 가
운데서 먹고 마시는 것을 말한다. 더군다나 옥중에서 주는 식사란 그 양이 적고 질이
조악(粗惡)할 터이니 그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본절을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떡과 물로 번역하고 있다.

28 미가야가 가로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가로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ㅇ왕이...돌아오시게 될진대...아니하셨으리이다 - 이 말은 곧 '만약 왕께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신다면 나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이
와 같이 미가야에게는 왕의 지위나 권력, 그리고 다수의 주장이나 눈앞에 닥친 위험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優位)에 있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
씀, 그것보다 더 강하게 자신을 붙들어 맬 확실성은 없었던 것이다.
ㅇ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 당시 사마리아 문 어귀광장에 있던 백성들은 지금
까지 아합 및 궁중 선지자들과 미가야 간에 있었던 사건의 전개와 오고간 대화 내용을
쭉 지켜 보아 잘 알고 있었다(10-2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미가야가 '백성들아
들어라'하고 외친 것은 저들을 일종의 증인으로서 호출하는 행위이다. 즉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의 아합의 패배 소식을 듣거든 그 결과가 이미 하나님의 작정대로임을 증거하
도록 미가야는 백성들을 각성(覺醒)시키고 있는 것이다.

2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ㅇ이스라엘 왕과...올라가니라 - 미가야의 예언을 묵살한 채 아합은 '길르앗 라못'
정벌(征伐)을 단행한다. 이처럼 스스로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아합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악인이 패망의 길로 행하는 것을 '내버려
둠'이 곧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이다. 실상 아합의 그릇된 결정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원인은 아합 자신의 과욕과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말하는 영 등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악령의 미혹이 서로 결합되어 패망으로 향하는 것조차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용 아래 있다는 것이 본문의 주 요지(要旨)이다. 물론 앞에서도 이를 언급한 바이
지만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과 악령의 활동을 단지 내버려 두실 뿐이지 악을 주재
(主宰)하시는 것은 아니다. 20, 23절 주석 참조. 한편 유다 왕 여호사밧은 비록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혹을 품었다 할지라도 아합과의 동맹에서 몸을 뺄수는 없었을 것
이다.

30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ㅇ변장(變裝)하고 - 비록 미가야의 예언을 묵살하고 출정(出征)하기는 하나 아합은
내심 미가야의 예언이 적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눈을 속여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죽음을 방지하려 했는데 곧 왕복을 벗고 일개 군사로
변장하는 것이었다.
ㅇ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 아합은 일견 매우 약삭빠른 제안을 여호사밧에게 하고
있다. 어느 전투에서나 지휘관은 집중 공격의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즉 그만큼 위험
부담이 많은 것이 곧 지휘관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게 하고
자신은 변장하겠다는 아합의 본 제안은 매우 비겁하게 보인다. 그러나 혹자는 아람
(Aram)과 특별한 원한이 없는 여호사밧은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에 이 같
은 제안이 가능했다고도 설명한다(Bahr).

31 아람 왕이 그 병거의 장관 삼십 이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ㅇ병거의 장관 삼십 이인 - 이들은 아람왕 밴하닷이 이스라엘과의 1차 교전(交戰)에
서 패배한 후 새롭게 일선 지휘관으로 세운 32명의 장관들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4,25 주석을 참조하라.
ㅇ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 즉 말단 병졸이든 좀더 신분 높은 장군이
든 일절 상대치 말라는 말이다. 이는 곧 오직 전력을 총집중하여 적군의 우두머리인
아합을 상대케 하기 위한 명령이다.
ㅇ오직 이스리엘왕과 싸우라 - 아벡 조약 당시 벤하닷이 아합에게 당했던 수모와 굴
욕이 매우 컸음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다(20:34). 그러기에 벤하닷은 아합에게 보복하
기 위한 날만을 학수 고대해 왔을 것이다. 한편 벤하닷의 이 명령 때문에 여호사밧은
행운을 얻게 된다. 즉 아합과 여호사밧은 둘 다 적군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벤하닷의
명령은 오로지 '이스라엘 왕'만을 지목하였다. 때문에 여호사밧은 체포당하거나 살
해당할 위기에서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32,33절). 이 역시 악인은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나 의인은 굳건히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결과
임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시1:4-6).

32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필연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지르는지라

ㅇ여호사밧이 소리 지르는 지라 - 아람 병거대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향해 집중 공격을
가해 오자 여호사밧은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여호사밧이 기겁
을 하여 소리치자'로 옮기고 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단순히 겁에 질려 소리친 것만
은 아니다. 그는 은연 중 자신이 아합이 아님을 공격자들에게 알리려 하였던 것이다.
다음절에서 아람 장관들이 공격을 멈춘 것만 보더라도 이 점은 입증된다. 그러기에
Living Bible은 본절을 '여호사밧은 (적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소리를 질렀다
'(Jehoshabat shouted to identify himself)로 풀이하여 번역하고 있다.

33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ㅇ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 여기서 '보다'에 해당하는 단어 역시 '잘 주목하여
알아내다'는 뜻인 동사 '라아'이다. 17,25절 주석 참조. 즉 아람 장관들은
여호사밧이 아합이 아닌 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꼭 얼굴이나 기타 외
양을 봄으로 해서 알아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맥상 아람 장관들이 공격하려던
대상이 아합이 아닌 줄알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여호사밧의 소리침과 관련된다. 혹자
는 이와 관련해서 여호사밧이 큰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Bahr)

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ㅇ우연히 - '우연히'(레투모)는 문자적으로 '그의 단순함으로'(inhis
simplicity)라는 뜻이다. '되는대로' 또는 '별 생각없이'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난전(亂戰)중에 누가 맞아도 맞겠거니 하고 아무렇게나 화살을 날린
것을 말한다.
ㅇ갑옷 솔기 - 당시 쇠로 만들어진 갑옷은 가슴과 갈빗대 부분을 덮도록 되어 있었고
여기에 하복부를 가리기 위해 금속조각들을 매어 달았다. 그런데 본절에서 '갑옷 솔
기'란 바로 이 연결 부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원어 '벤 하드바킴 우벤하쉬른'
은 '연결부위와 가슴막이 사이'(between the
joints and the breastlate)란 뜻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람 병정이 아무렇게나 날린
화살 하나가 하필이면 변장하고 숨은 아람의 갑옷 솔기를 파고 들었다는 점은 이 일이
단순히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감지(感知)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미가야의 예언(17-23,
28절)에 입각해 볼 때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신 결과인 것이다.
ㅇ내가 부상하였으니...나가게 하라 - 지휘관의 부상이나 전사(戰死)는 군대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치명상을 입은 아합은 군사들 몰래 진영 밖으
로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35 이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ㅇ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 '맹렬하다'에 해당하는 '알라'는 '고조되다'
(increased), '타오르다'는 뜻이다. 즉 일단 맞붙은 전투는 점점 열기를 더함으로써
혼전(混戰)에 혼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ㅇ붙들려 서서 - 이에 해당하는 '아마드'는 '계속해서 서 있다'는 뜻이다.
즉 아합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치열한전투 때문에 아합의 병거는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이것은 아합의 거듭되는 불운을 설명해 준다. 즉 아합은 제때에 부상을 치
료받지 못해 결국 과도한 출혈로 죽고 만 것이다.

36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

ㅇ각기 성읍으로, 간기 본향으로 - 이말은 전투 중지와 귀향을 촉구하는 말이다. 분
명 아합의 죽음은 벡성들의 전의(戰意) 상실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처음부
터 이번 전쟁은 아합의 욕심으로 시작된 것일 뿐 백성들에겐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17절 주석참조. 그러므로 그 날의 전투가 수그러들고 아합의 죽음이 알려지자
진중(陳中)에는 이심 전심(以心傳心)으로 귀향의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본절의 외침, 그 이면에는 반가움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Gesenius).

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 하니라

ㅇ본절을 28절과 대비해 보면, 그 극적 인상이 한결 뚜렷해진다. 아합은 죽은 채로
사마리아로 돌아 온다. 이 침울한 장면 위에 미가야가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
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하던 말이 겹쳐지게 되면 모든
것의 의미가 밝히 드러난다. 즉 여호와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던자는 진정 400명의 선
지자가 아닌 미가야였던것이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제 그
증인이 된 것이다. 또한 본절은 20:42 예언의 성취이다. 즉 벤하닷을 풀어 줌으로 인
해 아합의 목숨으로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리라는 예언은 이제 본장에서 마침내 이루
어진 것이다.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ㅇ그 병거를...핥았으니 - 본절은 21:19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히 성취되었는지 알려
준다. 즉 아합의 시신 자체는 왕의 예우로 장례 지내어졌다(37절). 그러나 아합이 전
쟁터에서 흘린 피는 병거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못에서 병거를 세척할
때 개들이 그피를 핥을 수 있었던 것이다.
ㅇ사마리아 못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성읍들마다 각기 저수지를 하나 이
상씩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성읍 문 밖에 위치하였다(삼하 2:13). 본
절의 '못' 역시 바로 그러한 저수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는 '사마리아
못'을 '이스라엘 못'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21:19의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은
아무래도 이스라엘 어느 장소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르엘 역시 넓게는 사마리아
지경(地境)의 한 성읍으로 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21:18주
석>.
ㅇ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 혹자(Bahr)는 본절의 창기들을 아세라와 바알 신
전에 소속되어 있어 음란한 제의(祭儀)와 매음(賣淫)행위에 종사하던 창녀들로 이해한
다. 아무튼 이들이 목욕하던 곳에서 아합의 피가 씻기웠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매
우 치욕스러운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281)

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룻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그 건축한 상아궁 - 열왕기는 아합을 대단히 나약하고 우유 부단한 인물로 인상짓
게한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을 제외하고 보면 아합은 제법 군사적 성공과 활발한 건축
사업의 성과를 거둔 강력한 왕이었다. 그러한 면모의 일단(一端)이 상아궁 건축 사실
을 특별히 언급하는 아합의 결말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부강을 상징하는 상아궁 건축
은 아합 치세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인상깊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추측컨대
아마도 이 같은 상아궁은 아합과 이세벧이 결혼한 기념으로 지은 사치스런 별장이었을
것이다. 그린데 홋날 아모스는 사치와 향락의 표상이었던 이러한 상아궁들과 관련, 하
나님의 심판이 임할 패때 그 궁들 역시 파괴되리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암3:15).

40 아합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아하시야 - '아하시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는
뜻이다. 아합의 대를 이어 이스라엘 제 8대 왕으로 즉위한 아하시야(Ahaziah)는 불과
2년(B.C.853-852)밖에 재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는 난간에서 떨어져 병을
얻은 뒤에 영영 회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왕하1:1-4). 그런데 그는 아들
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 동생 여호람이 차기(次期) 왕위에 올랐다(왕하
8:24-9:29).

41 이스라엘 왕 아합 제 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니

ㅇ아합 제 사 년에 - 아합의 즉위 연대를 B.C. 874년으로 잡는다면, 이해는 B.C. 871
년이다. 이 해에 41년간 선정(善政)으로 유다를 통치하던 아사(Asa)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를 잇게 된다(15:9-24; 대하16:11-14).
ㅇ여호사밧 - '여호사밧'(예호솨파트)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는
뜻이다. 그의 치적에 대해서는 역대기가 상세한 정보를 전해 준다. 그중에서도 그의 3
대 업적을 들자면 (1)신앙 부흥 운동(대하17:7-9), (2)군사적 업적(대하17:12-19),
(3)재판 제도의 체계화(대하 19:4-11)등을 들 수 있다. 이런점들로 미루어 보아 여호
사밧은 매우 유능한 통치자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열왕기는 이 가운데서도
오직 주된 관심사 한 가지, 곧 여호사밧이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점만을 지적할 뿐
이다(43a절). 그리고 그 외에는 도리어 아합과의 군사 동맹(1-36절과 산당을 남겨둔
일(43b절)등 부정적 요소들만을 들추어 내고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열왕기 기
자의 독특한 사관(史觀)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열왕들의 모든 행적을 '여호와 앞
에서'(Coram Deo)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점이다.

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삼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ㅇ이십 오 년을 처리하니라 - 여호사밧은 B.C. 871-847에 걸쳐 통치하였다. 그가 35
세에 즉위하여 25년가 통치하였으니 59세까지 수(壽)를 누린 셈이다. 따라서 북왕국의
왕들이 비교적 단명하고 짧은 기간밖에 재위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여호사밧과
그의 부친 아사는 오랜 재위 기간과 장수를 누린 셈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베푼
선정(善政)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곧 본문의 암묵적(暗黙的)인 교훈이다.
ㅇ실히 - '실히'(쉴히)란 이름의 뜻은 '창던지는 자'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실히(Shilhi)는 명성 높은 무장(武將) 가문 출신인 것 같다. 실상 그러한 가문이었기
에 그는 자신의 딸 아수바(Azubah)를 왕가로 시집보낼수 있었을 것이다.

43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ㅇ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여 - 아사는 열왕기가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으로 평가한 선왕(善王)이다(15:11). 그의 지극한 신앙 열정은 모친
조차도 우상 숭배를 범하자 태후의 위를 폐할 정도였다(15:11). 이러한 아사의 곧은
신앙은 아들 여호사밧에게도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심지어 실책이라 할 산당의 잔존
허용까지도 여호사밧은 부친의 전철(15:8)을 되밟고 있다. 여기서 부친의 교육적 책임
을 강조하는 신명기의 교훈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신 6:2,7). 즉 부친의 신실된 삶
은 그대로 자녀에게 축복을 마련하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수24:14-28 강해, '기독
교 가정에서의 부모의 책임' 참조.
ㅇ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러한 현상은 아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바
(15:14) 다음의 사실을 일깨워 준다. 즉 사사 시대 이후로부터 산당 예배는 이스라엘
의 종교 생활과 깊이 결부되어 왔다. 그리고 산당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산당을 단번에 없애기란 힘들었을 터인데 특히 분
열 왕국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에 관한보다 자세한 사항은 15:14 주석
을 참조하라.

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으로 더불어 평화하니라

ㅇ여호사밧이...더불어 평화하니라 - 대하 18:1에 의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평화상
태는 양국 왕가의 혼인이 중요한 작용을한다. 즉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와 여
호사밧의 아듸 여호람(Jehoram)을 서로 결혼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정략적 결혼
은 남북 분열 이래 60여년간 지속되어온 분쟁의 종식을 가져왔다. 이러한 결혼 동맹은
당시 외세의 침입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던 정세에서 촉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이 결혼은 결국 남왕국에 우상
숭배와 정쟁(政爭)을 초래하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왕하 11:18; 대하 22:3, 10). 그
분 아니라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군사 동맹에 대해서도 선견자 예후(Jeehu)로부터 '악
한 자를 돕는' 행위로 비난을 받았다(대하 19:2). 물론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민족주의자 여호사밧의 뜨거운 열정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즉 그는 비단 주변 세력
의 위협에 대한 공동대처의 필요성을 통감하였기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남북 분단 이래
로 점점 짙어져 갈 우려가 있었던 상호 이질화의 경향에 대해 개탄을 금치못하였던 관
개로 민족 단합을 자신에게 부과된 주요 지상 과제들 중의 하나로 여긴 듯하다. 하지
만 남북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그의 노력들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을 유발하고
말았다. (1)너무 성급했음 : 애초에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던 것인 만
큼(12:24), 여호사밧은 단합 의지를 실행에 옮기기 이건에 하나님의 뜻을 보다 진지하
게 물어 보았어야 했다. (2)피상적, 인위적 노력에 치중됨 : 북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음에도, 여호사밧은 군사적, 경제적 동맹이나 연혼(連婚)정책
등만을 강구해 나갔던 것이다.

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와 그 어떻게 전쟁한 것은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그 베푼 권세 - '권세'에 해당하는 '게부라'는 '힘' 또는 '세력'을 의미
한다. 이는 열왕기에서 비교적 강력한 통치를 폈던 왕들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
이다(15:23; 16:5,27; 왕하 10:34; 13:8; 14:15,28; 20:20). 그러므로 여호사밧 역시
군사적으로도 제법 강력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호사밧은 에돔을 장악하여
아라비아의 무역로를 관리하였다. 이것이 여호사밧에게 풍부한 재정 원천이 되어 주었
다(대하 17:5; 18:1). 그 외에 유다 성읍의 요새화, 에브라임에 수비대를 주둔시킨
일, 강한 군대의 보유 등이 기록에 등장한다(대하 17:1,2,10-13,14-19). 그밖에도
엔게디(Engedi)에서 모압.암몬.마온의 연합군을 격파한 사실 역시 여호사밧의 힘을
실증해 주는 기록 중 하나이다(대하 20:1-30).

46 저가 그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ㅇ여호사밧의 통치 일반에 대해 상세한 언급을 생략하는 열왕기가 남색자(男色者) 추
방 사실만은 각별히 지적한 점이 이채롭다. 그만치 남색(Sodomy)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혐오스럽고 제거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9:1-11 강해, '성 범죄의 제 유형'을 보다 참조하라.
ㅇ남색하는자 - 이에 해당하는 '카데쉬는 특별히 우상 신전의 남창(男娼)
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 23:17 주석 참조. 이야말로 부패한 욕정의 대명사로서 우상
숭배의 악마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주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금지된 이 존재
들을 제거하는 조치는 유다에 경건한 왕들이 등극할 때마다 거듭 취해졌다(15:11,12;
왕하 23:7)

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왕이 있었더라

ㅇ에돔에는...섭접왕이 있었더라 - '섭정왕'(나차브 멜렉)이란
원어상 '세운 왕'이란 뜻이다. 즉 이는 여호사밧이 에돔에 세운 대리 통치자를 가리킨
다. 여호사밧 통치 당시 에돔(Edom)은 유다의 지배하에 있었다. 45절 주석 참조. 그런
데 유다의 에돔 장악은 곧 솔로몬 이래로 부진했던 아라비아와의 대상(隊商) 및 해상
무역의 재개(再開)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임명한 섭정왕의 에돔통치는 유
다에 엄청난 부를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한편 왕하 3:4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모압
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라엘, 유다 그리고 에돔의 세 왕이 출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의 에돔 왕 역시 여호사밧이 세운 섭정왕일 가능성이 높다(Maclean).

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벧에게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ㅇ본서 10:22에 언급된 것과 같은 솔로몬 시대의 해상 무역(에시온게벧을 거점으로
한 다시스 선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은 남북 분열 이래로 중단되었다. 아마도 그
까닭은 남북 왕국 분열이 상대적으로 국력의 반감(半減)을 초래했고, 또한 유다가 북
왕국과의 경쟁에 힘을 쏟는 동안 이전 만큼의 지배력을 주변국가에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본절은 여호사밧이 솔로몬 시대의 영화(榮華)를 재현
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전해준다. 따라서 앞절의 에돔 장악은 그러한 시도를 가능케 했
던 배경 설명이라 하겠다.
ㅇ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 이 말은 단지 '다시스의 배를 건조하였다'는 뜻이 아
니다. 단지 여기서는 '다시스의 선단(船團)을 조직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NIV, 공동 번역).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22 주석을 참조하라.
ㅇ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 오빌(Ophir)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곳이 고대에는 금의 산지로 유명했던 것만은 분명하다(대상 29:4), 9:28 주석 참조.
ㅇ에시온게벧 - 홍해의 한 지류인 아카바 만(Gulf of Aqabah)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이다. 과거 솔로몬은 이곳을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삼아 많은 부(富)를 축적하였다.
9:26 주석 참조.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ㅇ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 대하 20:35-37에 의하면, 다시스 선단의 파선
(48절)은 아하시야 같은 악한 자와 교제하는 여호사밧에 대한 여호와의 징계이다. 그
런데 그 사건이 있는 후에도 다시금 아하시야가 다시스 선단 조직을 제의해 오자 여호
사밧은 이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의 협력 제의를 거
절한 까닭은 여호와의 징계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아하시야의
제안을 불순한 것으로 판단햇 때문에 거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즉 대하20:35이 '심히
악을 행하는 자'로 지적한 아하시야의 제안은 여호사밧의 이권(利權)에 한몫 끼어들려
는 흑심(黑心)이 깔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를 두려워한 여호사밧은 배를 보
내 주겠다는 아하시야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여호사밧이 아합과 맺은 동맹 관계(1-4절)는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Ahaziah,
B.C.853-852) 대(代)까지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50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여호람 - '여호람'(또는 ,요람)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름의 뜻과는 달리 여호람(Jehoram)은 별로 긍정
적이지 못한 통치를 펴게 된다. 즉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여호람은 경건했던
부친과는 달리 '이스라엘 왕들의 길', 즉 우상 숭배를 행한다. 아마도 여기에는 그의
아내인 이세벧의 딸 아달랴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대하 21:6). 아무튼 이렇게 정도(正
道)에서 이미 빗나간 여호람의 통치는 (1)불과 약 8년 (B.C.847-841)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왕하 8:17; 대하 21:5) (2)자신의 모든 아우(6명)와 몇몇 방백을 살해한 일(대하
21:4), (3)에돔의 반란 및 블레셋, 아라비아의 유다 침공(대하 21:8-10,16,17)등 험
난한 시대로서의 특성을 고루 갖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그의 죽음 역시 그를 '아
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나는 침울한 것이었다. 즉 아무도 그들 애도하지도 않았고 그
의 시체는 열조의 묘실에 장사되지도 못했다(대하 21:20).

51 유다 왕 여호사밧 제 십 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ㅇ아하시야는 약 2년간(B.C.853-852)에 걸쳐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그는
부왕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전사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게 되었다(34-40절). 또한 그의 치세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의 국내 행정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아하시야는 블행스럽게도 그의 궁전 이층의 격자가 무너
지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져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아하시야는 이
세벧의 혈통답게 자신의 부상에 관해 율법이 정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문의하는 대
신에 블레셋 땅 에그론의 신바알세불에게 문의하도록 했다. 당시 노령에 이른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사자들을 가로막고 아하시야 왕에게 돌아가서 그의
죽음이 임밖했음을 알리도록 했다(왕하 1:5-8).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0절
주석을 참조하라.

52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아비의 길과 그 어미의 길과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ㅇ그 어미의 길과 - 아하시야에 대한 열왕기의 평가문은 독특하게도 '그 어미의 길
'(베데레크 임모)이란 문구롤 추가하였다. 이는 아하시야가 그 어미 이
세벧(Jezebel)에게 받은 악영향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
전이라는 각도에서 열왕의 역사를 바라보는 열왕기의 관점으로서는 이세벧의 출현은
차라리 전염 병균의 침투였다. 그렇잖아도 북왕국은 출발부터가 '여로보암의 길'이라
는 그릇된 모본(12:25-33)으로 인해 비틀거렸다. 그런데 여기에 아합과 이세벧의 두
존재가 나란히 등장한 아합 시대는 가히 악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시대라 하겠다. 즉
내용상으로는 우상 숭배라 해도 표면상 여호와 종교의 연장(延長)을 자처하던 송아지
숭배(12:28,29)에다, 그들은 아예 이방 종교의 도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북왕국의 타
락을 촉진시켰던 것이다(16:31-33). 한편 이세벧의 영향은 아들 뿐 아니라 딸 아달랴
를 통해서도 남왕국에 우상 숭배와 정쟁(政爭)의 씨앗으로 전파되었다(왕하 11:1-16;
대하 21:6; 22:1-3,10-12; 23:1-15)

53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기를 그 아비의 온갖
행위같이 하였더라

ㅇ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 '숭배하다'(아쉐타 헤에)는 본래 '엎드
리다'는 뜻이다. 사실 이스라엘에 있어 여호와 신앙이란 백성의 종교적 측면 뿐 아니
라 사회, 정치적 측면의 모든 질서를 규제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규범이 곧 율범인
데 왕은 백성을 위한 봉사자이면서 동시에 율법의 모범적 준수를 위임받은 자이다. 그
런데 그러한 신정(神政) 국가의 왕인 아하시야가 노골적으로 바알 앞에 엎드렸다는 것
은 곧 그의 틔치의 출발 자체가 이미 파탄을 예견하고 있다는 엄청난 신앙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 아하시야의 통치 서론에 속하는 본절은 자신의 운명을 이방의 신에 의뢰
하는 아하시야의 그릇된 신앙을 알려 주는 열왕기하 1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준다.
즉 520절과 함께 본절이 아하시야에 대한 신앙적 평가라면 열왕기하의 첫머리는 그 예
중(例證)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본래 히브리 성경에서 열왕기는 분리되지 않은 한편의
책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열왕기를 상권과 하권으로 분리시키는 방식은 1516년 베니
스에서 출간된 봄베르크 성경 초판 때 처음 사용되었다 한다(Sxhultz). 그러므로 이러
한 구분은 편의상 그렇게 한 것일 뿐 의미상의 필연적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와 관련
해서는 성경 총론, '성경의 사본과 역본'을 보다 참조하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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