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상

[스크랩] 열왕기상 (19 : 1~2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15

열왕기상 19장


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ㅇ고하니 - 이에 해당하는 '나가드'는 '알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넌지시 알리다'는 뜻의 어감(語感)이들어 있다. 때문에 보통 이 동사로 설명
되는 관계란 마치 공범자(共犯者)들끼리 갖는 동료의식처럼 친밀한 관계이다. 따라서
아합이 어느 정도로 이세벧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아합이 앞장에서 목도한 이적과 바알 선지자 모두를 칼로 죽인 엘리야의 위업
(18:30-467)에 질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국(一國)의 틔치자인 아합은 줏대없
이 그 모든 사실을 왕후 이세벧(Jezebel)에게 고하고 만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면
은 본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이세벧의 과단성(果斷性)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1:7).

2 이세벧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ㅇ내일 이맘때에는 - 본절은 우리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해준다.즉 진노한 이세벧은
왜 오늘 당장 엘리야를 처단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세벧
이 엘리야를 위협하여 멀리 쫓아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Bahr, Keil
& Delitzschk, Matthew Henry, Wordsworth). 왜냐하면 갈멜 산상의 승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환호에 싸인 엘리야(18:30-40)를 직접적으로 처단하기는 어렵다고 이세벧이
판단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세벧의 잔인하고 과감한 성격을 감안할때 그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적어 보인다. 도리어 이세벧은 엘리야를 공개 처형할 의사를 전했다
고 봐야 한다. 즉 이세벧은 다음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를 처형함으로써 전날
백성들이 받은 충격을 무효화하려 한 것이다. 아무튼 본장은 적어도 이세벧의 위협이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3, 10, 14절).
ㅇ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성명 같게 하리라 -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
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킨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세밸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다. 그녀가
아합으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강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ㅇ신들이...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 이세벧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 심장
하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를 두고 맹세한 것과 비교하면 그 부정적이고 잡다
한 인상은 두드러진다(18:15). 그런데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
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것들을 신격화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인간은 두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
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할 것이다.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ㅇ이 형편(形便)을 보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단순히 '바라보
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문맥상 본절과 같이 번역했을 따름이다.
한편 어떤 영역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엘리야가 띠었을 정서적 반응에 주목하여 이
를 '두려워했다'(he was afraid)로 번역하였다(Modern Language, RSV). 한글 공동 번
역도 같은 경우로써 이와 비슷하게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고 있다.
ㅇ그 생명을 위하여...브엘세바에 이르러 - 이세벧의 단호한 경고에 부딪친 엘리야는
할 수 없이도 도피길에 오른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떨쳐
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길에 오르는 모습은 실
로 아이로니칼(ironical)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
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네
rpq(Negeb) 지방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팔레스틴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서남
쪽 55km 지점이다. 삼상 3:20 주석 참조.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벧의 권세가 미치지 못
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ㅇ사환을...어물게 하고 - 엘리야가 행한 이 조치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좌절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온 위협은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낳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되기 쉬운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Lange).
한편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의 피신 경로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ㅇ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 이스라엘 역사상 '광야'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 영향을 받아
야 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와 달리,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절(민 33가1-49)은
그들 역사에 있어 가장 순수한 신앙을 보존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
에게는 혼히 도시 문화에 대한 협오와 함께 광야에 대한 동경이 발견된다고 한다
(Talmon). 더구나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의 산 호롑'으로 나아가는 첫 문
턱이다. 즉 처음부터 엘리야는 호렙 산을 목적으로 하고 여정을 출발하였던 것이다
(Hammond).
ㅇ하룻길 -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이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Day's Joumey)은 약 32-40km이다.성경총론,'성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ㅇ로뎀나무 - 로뎀나무(broom tree,NIV, RSV)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KM의 높이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나무를 '금작화'(genista Retem 또는
genista Monoserma)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
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Lange, Robinson,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
p. 254).
ㅇ여호와여...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 불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
입어 큰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ㅇ넉넉하오니 - 이에 해당하는 '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이다. 그러
나 본절은 문자대로의 뜻과는 달리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율 표현하는 말이다. 그
러므로 공동 번역은 그러한 뜻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고
있다.
ㅇ내 열조(列祖)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낫다'에 해당하는 '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
리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선조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임을 명확히 하자.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
오도륵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
한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
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선조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
다는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ㅇ천사가...먹으라 하는지라 - 70인역(LXX)에는 '천사'가 '어떤 이'로 나와 있다. 그
러나 7절에서 다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 언급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 곧 구약
시대 당시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앞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
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더 살도록 격려하
며 기적적으로 음식물을 공급해 주셨다(6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긍휼과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ㅇ어루만지며 - 이에 해당하는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단 8:18;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하
게 하며 새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주기도 한다(7절).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ㅇ숯불에 구운 떡 - 이에 해당하는 '우가트 레차핌'은 한글 개
역 성경의 번역과는 달리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이란 뜻이다. 당시 초장(草場)을
찾아 이리저리 유랑 생활을 하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떡을 구워
내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떡이 엘리야에게 제공된 것이다.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ㅇ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 원문상으로는 '네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크다'
는 말이다. 이는 곧 엘리야가 여행해야 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러
한 표현에서 엘리야의 광야행은 처음부터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었음이 다시금 암시된
다. 4절 주석참조. 아마도 엘리야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의 전개에 실망한 나머지 하
나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길을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호렙 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과 비탄에지친 엘리야는 여행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없었다. 천
사의 도움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엘리야가 침체를 이겨내도록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
는 것이었다. 5절 주석 참조.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ㅇ사십 주(晝) 사십 야(夜) -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km으서 정상적으
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일 정도면 당도 가능한 거리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
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
나님의 인도하심에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침익(沈溺)하기도 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곧장 모세와 예
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준다(신 9:9;마4:2).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
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페하고 여호와앞에 엎드려 있었다(신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즉
일대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레케 하는 수이
다. 사실 여호와의 진놀고 멸망 받야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케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 기도 덕분이다(신 9:18, 19).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더이상 손쓸 수 없
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
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
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절의 사십 주야인 것이다.
ㅇ하나님의 산 호렙 - 호렙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산 시내(Mount Sinai)와 동일
시된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벧 무사(Jebel Musa)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3:1주석까 참조하라. 여하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
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로 실의에 빠진 채 오르고 있는 것이다.

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ㅇ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 굴에 해당하는 원어 '메아라'앞에는 정관사 '하'
가 붙어 있으므로 '그 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엘리야가 들어가 유(留)
한 굴은 호렙산에서 흔히 발견되어지는 일반적인 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가 피해 있었던 반석 틈(출 33:22)일 가능성도 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 p.682).
ㅇ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 말(마 렉카 포)은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는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르르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
냐'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도 그러하다(What are you doing here?
NIV, RSV, Living Bible). 그런데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
어 질문받는 자를 일깨우는 물음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케 하는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ㅇ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18:15 주석참조.
ㅇ열심(熱心)이 특심(特甚)하오니 - 이 말(칸느 키느티)은 '질
투하다'는 뜻의 '카나'가 두번 반복된 말이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
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
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이다(출 20:5).
ㅇ오직 나만 남았거늘 -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곧 엘
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이다. 더군다나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인 '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이
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당사 이세벧의 박해 가운데
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
결한 자가 남아 있었다(18절).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ㅇ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 본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공
동 번역의 경우 이를 "야훼(여호와)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문장의 전후 관계상 "여호와의 앞에서"는 나가서 산 위에 서는 행
동 진체를 받는다. 즉 엘리야가 산 위에 서는 행동이 곧 여호와 앞에 서는 행동과 동
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은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출 33:17-23) 이번에는 엘리야에게도 당신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엘리야의
주목(主目)을 촉구하는 말임에 분명하다.
ㅇ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
한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출 33:19). 즉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지나가다'는 뜻
의 '아바르'는 움직이의 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물을 관
찰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바람은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으되 형상을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요 3:8).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
을 알리시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수중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포하신다.
ㅇ강한바람...지진 - 비단 이것들 뿐 아니라 다음절에 나오는 '불' 등은 여호와께서
현현(顯現)하실때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출 19:16-20). 그러나 정작 본절에
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다. 그러기에 바람, 지진,불 따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굉장한 중거임에 틀림없었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한 것은 그러한 현
상들 다음에 들려온 '세미한 소리'(12절)였다. 즉 이것이야말로 엘리야에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통해 들려 주시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시 119:105)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ㅇ세미(細微)한 소리 - '세미한'에 해당하는 '데마마 다카'는'고
요하다'(다맘)와 '곱다'(다크)의 결합어이다. 즉 섬세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 둘이 동원되어 이는 대단히 미세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군다나 강한 바람과 지
진, 불이 있은 후의 '세미함'이란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준다. 한편 '소리'(콜)
는 신약에서의 '포네'와 마찬가지로 '음성'이라 함이 더욱 적절하다(계
1:10;4:1 등).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로서 사용되는 경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한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란 외적인 것이기보다 성령에 의해 듣는
자의 의식에 각인(刻印)되는 내적 감화(感化)이다(고전 2:10-14).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Pope).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ㅇ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 이것은 엘리야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식
별하고 취하는 행동이다.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경우 살 수 없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나마 자신의 얼굴을 가리운 것이다. 출 33:20 주석 참조. 한편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지나가심을 경험할 때는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모세를 가리우셨다
(출 33:22, 23).

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ㅇ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엘리야의 답변은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두려움
과 절망의 심경을 역력히 반영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를 체험하
고서도(11,12절) 여전히 부정적인 심경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구체적 사명에 대하여 일러주셨다(15-18
절). 그러자 비로소 엘리야는 용기를 회복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19-21절)
인간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사례틀 보여 주는 한 표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ㅇ네 길을 돌이켜 - 이 말은 단순히 왔던 경로를 되밟아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야가 명령받은 행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여기서 '돌이키라'는 말은 보다 내적인 태도와 의식의 전환을 지시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즉 이는 실망과 낙담을 안고 왔던 길을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받아 들고
돌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에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의식이야말로 낙담과
무의미를 극복케 하는 첩경이다.
ㅇ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 하사엘(Hazael)자은 본래 아람 왕 벤하닷(Benhadad)의
군대장관이다. 그러나 그는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후 줄곧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다(왕하 8:13-29;13:1-3).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이스
라엘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계획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문제
는 엘리야가 언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실상 16절까지에서 언급되는 하
사엘, 예후, 엘리사 중 그 누구도 엘리야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왕하
8:12-15;9:1-10). 그러나 이 난점은 '기름부음'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폭넓게 해석 할 때 해결된다. 즉 여기서 '기름 붓다'라는 말은 꼭 문자적으로만 해석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 것(시
105:15;사 45:1)이나 따로 구별하는 것(출 30:26)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견해이다.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ㅇ님시의 아들 예후 - 사실 예후(jehu)는 님시의 손자이고 여호사밧의 아들이다(왕하
9:2). 본절과 같은 오역(誤譯)은 히브리어의 '아들'(벤)이 '자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서 온 실수이다. 따라서 정확히는 '님시의 자손 예후'가 옳다. 한편 본래 이스
라엘 군대장관 중 하나였던 예후는 훗날 라못 길르앗 출정시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
조를 무너뜨린다(왕하 9:1-10"17), 이때 예후는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으로 아합 가문
을 진멸(盡滅)하였으니 이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다.
ㅇ아벧므홀라 - 이 지명의 뜻은 '춤추는 초장'이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벧산 남쪽 16km 지점의 한 유
적지를 아벧므홀라(Abel-meholah)로 추정하고 있다. 삿7:22주석 참조.
ㅇ엘리사 - '엘리사'란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농
부긴 해도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열 두 겨리 소를 부릴 수 있었던 그는 엘
리야의 부름에 즉각 호응하여 예언자가 되었다(19-21절). 그리하여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왕하 2장) 엘리사는 약50년간(B.C. 848-797년경) 북왕국에서 활약하게 된다. 한
편 학자들은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이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
다고 본다(Stek). 특히 한 사역이 대를 이어 성취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 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ㅇ본절에 보이는 하사엘-예후-엘리사의 연결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고 입장이 상충되는 세사람이 마치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서로 대립하는 국가의 왕들인 하사엘과
예후가 의식적으로 같은 목적을 품고 활동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
에서든 북왕국에 재난과 죽음을 가져다 준 인물들이다. 15, 16절 주석참조. 따라서 그
러한 그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과 연결될
때, 본절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한편 본절에서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는 표현은 앞서 '기름부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취할 바가 못
된다. 15절 주석 참조. 즉 이는 엘리사가 직접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결
과적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심판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ㅇ칠천 인을 남기리니 - '남기리니'에 해당하는 '솨알'은 대단히 의미 심
장한 말이다. 원래 신정 국가(神政國家)인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에 좌우되기 마련이다(출 19:5,6). 따라서 극도로 타락하고 혼미한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불러 올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
도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미래를 지속케 할 소수의 무리를 항상남겨 놓으신다. 이때
남은 자들(remnants)은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하심 안에서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은총적 의미가 있다. 즉 이경우 심판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자를 남기셔서 역
사를 지속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Stark, Jenni). 한편 본절에
서 '칠천 인'은 실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Keil
등).즉 이는 완전수인 7의 배수로서 미래의 역사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남아 있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ㅇ말하기도 하고, 그 한 쌍의 소가 하루 종일 갈만한 토지 단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런데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 엘리사는 24마리의 소를 앞세워 밭을 간 셈이다.그렇다면
아마도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일꾼들이 그와함께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
다. 한편 토지 단위로서의 한 겨리는 8분의 5에이커, 즉 약 2,520m2에 해당한다고 한
다(Sellers).
ㅇ열 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 이 말 역시 열 둘째 쌍의 소를 부린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열 둘째 밭을 맡아 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절 초반을 참고할 때 열 두
번째 쌍의 소를 맡아 부렸다는 뜻이 옳다.
ㅇ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
다.특히 엘리야의 경우 그의 외모와 함께 톡이한 복장은 항간(巷間)에 널리 알려진 사
실이다. 이렇개 볼 때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
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다(Hammond, Keil & Delitzsch). 그러기
에 엘fl사 역시 이 동작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렸다(20, 21절).

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ㅇ저가 소를 버리고...달려가서 -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소명
자들의 비교적 공통된 특징이다(마4"18-22;눅 5:27-29). 아마도 엘리사는 민족의 우상
숭배에 대하여 깊이 탄식해 왔던 인물로서 평소부터 엘리야의 활약에 마음깊이 동조하
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는 엘리의 부름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떨치고 일
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ㅇ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입맞추게 하소서 -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
법이다. 창 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한편 본절에서의 엘리사의 청
원은 눅 9:59의 경우와는 다르다. 즉 눅 9:59에 나오는 사람은, 부친의 생존 기간 동
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그러나 반면에 엘리사는 자
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응당 드려야 할 인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ㅇ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 혹자는 이 말을 약간 힐난조의 말로 본다
(Rawlinson, Wordsworth).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은 긍정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뜻이다. 사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행한
것은 선지자적 직무에의 초대이다. 그런데 이 초대는 곧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모에게 입맞추고 오겠다는 엘리사의 요청은 어떤 주저함도 아니다. 도리어
이는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지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이
다. 그러므로 엘리야 역시 기꺼운 수락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Lange).

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ㅇ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 이 경우는 당연히 '한 쌍의 소'를 도축(屠畜)하였다는
뜻이다. 19절 주석 참조.
ㅇ소의 기구(器具를 불살라 -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를 불사른 것은 하나
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
식(儀式)이라 할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
이 없었을 것이다.
ㅇ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먹게 하고 - 여기서 '백성'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
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읏 모두를 의미한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惜別)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Pulpit Xommentary).
ㅇ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 열왕기에서는 엘리야->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
려는 의도가 있다 한다(Stek). 그렇다면 본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요소라 하겠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수종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수종을 든 것이다.(출
24:13;수 1:1). 한편 왕하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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