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상

[스크랩] 열왕기상 (21 : 1~29)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16

열왕기상 21장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ㅇ본절은 나봇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과
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합(20장)은 당시 이스라엘에 별궁을 지어 두고 사치와 방
탕 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그 즈음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
신의 유흥지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ㅇ이스라엘 -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
는 성읍이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
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처하였던 듯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
을 참조하라.
ㅇ나붓 - '나봇'(나보트)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왔을 터이니 그
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음직도 하다.
ㅇ포도원 - 팔레스틴의 가장 특징적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
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다(Ross). 신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케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레스틴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신7:13
주석 참조.

2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ㅇ나물 밭 - 여기서 '나물'(야라크)이란 녹색의 풀 종류 일반을 말한다. 그
리고 '밭'(간)은오히려 '뜰' 또는 '정원'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나물 밭'
이란 '푸른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공동 번역). 보통 이러한 정원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장소로 고안되곤 했다. 그리고 또한 종종 우상 숭배의 장소로 이용되기
도 하였다(사1:29;65:3;66:17).
ㅇ만일 합의하면 - 이에 해당하는 원문(토브 베에이네이크)
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한껏 존중하
는 표현이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무작정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데서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빛바랜 것이 되었지만, 백
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된다(레25:23). 그러나 이
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개막된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
톨 확장하려 들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돌조차 이를 흉내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
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한다(삼상8:12,14).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
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거둬 들인 농산물은 더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
들의 손에 넘겨 준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하나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도리어 왕을 위해 존재
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
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합이 나붓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
모로 보아야 한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ㅇ열조의...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나봇(Naboth)의 이 같은 대답은 그가 여호
와 신앙가이며 율법에 충실하려는 인물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물론 아합이 후한 보상
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
야 할 분깃인 선조의 유업을 매각하는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넘께서는 (1)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
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다(레25:23-28). 그러나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과 이상에 충실하려는 인믈이 아합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자못 의문스럽다.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ㅇ근심하고 답답하여 - 이에 앞장에서도 언급된 구절로서 내적 격동으로 인해 속이
타거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20:43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심리
상태에 대해 거듭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 우리는 그의 완악함과 패역(悖逆)함을
엿볼 수 있다.
ㅇ침상(寢狀)에누워...식사를 아니하니 - 본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
처럼 유치하게 나타난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못갖게 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
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
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讀者)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
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
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처럼 줏대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
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
으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
(약1:15)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5 그 아내 이세벧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ㅇ이세벧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 아합의 무기력하고 유치한 면은 도리어 이세벧의
강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을 부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본절에서도 이세벧은 아합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마치 후견인 같은 자세로 등장한다. 즉 그저 드러누워 끙끙앓는 아
합에 비해, 질문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세벧은 훨씬 적극적이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벧의 관계에 있어 늘상 끌려 다니는 쪽은 아합이었던 것이다. 19:1 주석 참조.

6 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

ㅇ아합이 일의 자초 지종(自招至終)을 이세벧에게 고하고 있는 본장면에서 우리는 다
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대체로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전제 군주적(專
制君主的)성격이 강한 두로 출신의 이세벧(더구나 이 여자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 밑에
서 자랐음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아합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 하는 문화적
차이점이다(16:31). (2)아합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시콜콜히
이르는 어린 아이처럼 처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일찍이 자신이 신봉하던 우상 종교 도입을 요청하는 이세벧에게 아합이 여호와 신앙의
바람막이가 되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것이다(16:31-33). 아합이 펼친 종교 정책에
는 언제나 이세벧의 입김이 작용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7 그 아내 이세벧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ㅇ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 본절은 의문문이 아니다. 히브리 원
문상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조의 말이다. Modern
Language Bible은 이를 '당신은 이스라엘에 대해 왕권을 행사하지 않을 겁니까? '(Do
not exercise the kingship over Israel?)로 좀더 풀어 번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
세벧이 가긴 왕권 개념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적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한
다. 즉 이세벧은 고대 근동의 전제군주가 일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본절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왕권은 보다 제한적이다. 2절 주석 참조. 즉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른 백성과 마
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신17:14-20). 이점은 고대 근
동의 거의 무제한적 왕권에 비해 훨씬 행동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합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의 유업 외에 타인의 유업을 함부로 탈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벧의 눈에는 그같은 아합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왕답지 못
한 처사로 비쳤을 것이다.
ㅇ내가...드리리이다 -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
다고 말하는 이세벧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克
明)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이세벧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다.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쳐서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니

ㅇ아합의 이름으로...그 인(印)을 쳐서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의 용도 역시 다양했다. 즉 인장은 의식서 날인, 재산 증서의 신빙성 보장,
공문서의 권위보증 등 여러 효능을 띠었다. 본절에서 이세벧이 거짓 편지를 쓴 후 아
합의 도장으로 인친 것도 그 내용이 의심할 바 없는 것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세벧은 백성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기 위해 왕의 인장을 도용(盜用)하는 짓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한편 당시의 도장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외에도 굴려서 인을 찍
는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인장 반지도 있었다. 창41:42 주석 참조.
ㅇ쳐서 - 이에 해당하는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봉인하다'는 뜻
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끔 비
밀에 붙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인(貴
人)들에게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ㅇ귀인 - 이에 해당하는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도 번역되어 있다(전
10:17;렘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카일
(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the members of the magistracy)로 보고 있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270)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ㅇ금식을 선포하고 -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공적인 금식 선포는 공동체 내의 악행
및 죄에 대해 집단적 참회를 촉구하는 것이다(삼상7:6;14:24). 즉 한 개인의 죄는 그
사람만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관계 개선이 요구
된다는 사고 방식이 담긴 행위이다. 에스더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그
러나 본절의 금식 선포는 도리어 악행을 짓고자 하는 음모에서 발단된 그릇된 성격의
것이다. 즉 이세벧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성
읍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블러 일으키려고 이스라엘 성읍에
금식을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이란 물론 나봇
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날조된 죄를 의미한다(10,13절).
ㅇ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앉힌 후에 - 즉 나봇을 피고인(被告人)의 신분으로 재판정
에 앉히운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13절 주석 참조.

10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

ㅇ비류(匪類) - 이에 해당하는 '베네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무
가치함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잘못없는 존재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
용은 삿19:22주석과 삼상10:27 주석을 참조하라.
ㅇ두사람을 -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요구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다(신 17:6).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벧은 두 명의 비류를
포섭해 두도록 지시한 것이다.
ㅇ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
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조차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20:7;22:28).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
형에 처해진 사례를 레24:10-1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
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레 24:15). 그런데 이세
벧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ㅇ돌로 처축이라 -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우상 숭배자(신13:10),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27),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레24:14), 간음한 여
인(신22:21)등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
을 묶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 뜨리고 이
어 두번째 중인이 큰 돌로 먼저 쳤다. 그 후 들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
다. 신13:10,11 주석 참조.

11 그 성 사람 곧 그 성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이 이세벧의 분부 곧 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ㅇ장로(長老)와 귀인(貴人)들이...쓴대로 하여 - 이스라엘의 장로와 귀인들이란 무
엇보다도 백성들의 권익 수호와 율법 준수를 위해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할 위치에 있
는 계층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세벧이 율법을 악용하는 범죄에 별 저항없이 동조하
였다. 이는 곧 법관이 법을 악용(惡用)하는 것과 같은 형국인바 아합 시대 수뇌부들의
타락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ㅇ이세벧의 분부 - 본절은 장로와 귀인들이 받은 밀서(密書)가 비록 아합의 명의와
낙인으로 되어 있지만(8절), 그 모의 주체는 이세벧임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런 사
실은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인들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벧의 잔혹
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니면 이 장로와 귀인들은 왕비 이세벧에 영합하여 기왕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이익
을 보존하려던자들 일지도 모른다. 즉 이런 부류들은 세태의 흐름에 영합하여 이세벧
에 협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변화(사실은 변질이라 해야 할)를 가져오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ㅇ시대를 막론하고 금식은 개인적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신앙 훈련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성, 윤리성이 결여된 종교적 의무로서의 재반 의식(儀式)은 본
래의 취지와 순수성이 왜곡당하기 쉽다. 즉 알맹이가 빠진 형식이란 불의와 거짓을
가리워주는 잘못된 도구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금식의 오용(誤用) 역시 자주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던 주제 중 하나이다(사 58:4-6). 본절 역시 금식의 순수
성을 해쳤던 역사적 사건 중 일례(一例)이다. 9절 주석 참조.

13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

ㅇ본절에 나오는 재판은 무엇인가 졸속(拙速) 진행의 냄새가 난다. 정상적인 재판절
차에서는 피고의 유죄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뿐만 아니라 피고의 혐의를 벗겨 줄 증인
도 동석하는 게 보통이다(시 109:31;잠14:25). 그러므로 나봇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
졌다면 무뢰배들의 무고(無告)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
이다. 또한 통상있게 마련인 원고(고발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따라서
나봇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순전히 형식적인 재판 끝에 희생된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 절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소송
사건은 고발자(원고)로 등장한 어느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신25:7), 고발은 대부
분의 경우 구두로 하였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서류상으로도 가능하였다(사 65:6;단
7:10). 그리고 법정에는 재판관과 원고외에도 피고와 중인들이 동석하였다. 한편 재판
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원고와 피고는 각각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품들을 제시했으며
(출22:13;신 22:13-17), 재판관은 그것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타 고발 사항 및 변호
사항들을 모두 심리(審理)한 후 최종적으로 중인들을 세웠다. 이때 형(刑)의 확정, 선
고를 위해서는 최소한 2명의 증인이 요구되었으며, 거짓 증인으로 판명된 자는 도리
어 피고에게 뒤집어 쐬우려고 했던 만큼의 형벌을 대신 받아야 했다(신19:15-21).

14 이세벧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ㅇ이세벧에게 통보하기를 -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비록 아합의 명의로 편지는
왔지만 나봇 살해 음모는 이세벧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장로와 귀인들은 알고 있었다.
11절 주석참조. 그래서 그 결과는 이처럼 이세벧에게 통보된 것이다.
ㅇ나봇이...죽었나이다 - 왕하 9:26에는 본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피
'가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나봇의 처형 당시 아들들도 함께 몰살당했음
이 틀림없다. 사실 이때 나봇만 죽였다면 그 아들들이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
장했을 것이다(민16:27; 수 7:24,25).

15 이세벧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ㅇ그 이스르엘 사람...포도원을 취하소서 - 혹자는 이 말에서 이세벧의 득의 만만하
고 표독(慓毒)한 감정을 읽어낸다(Hammond). 즉 '그 멍청이가 돈을 준대도 거절하더니
고스란히 뺏기게 되었다'는 이세벧의 고소해 하는 표정을 연상해 내는 것이다. 또 한
편으로 이 말에는 '당신이 돈을 제안하고도 갖지 못한 것을 나는 거저 뺏을 수 있었다
'는 악한 자랑도 들어 있는 것이다. 한편 '취하소서'는 '이어받다', '상속하다'는 뜻
의 '야라쉬'에서 온 말이다. 당시 우상 숭배자의 성읍이나 뒤로부터의 탈취
들은 모두 여호와께 바쳐졌듯이(신 13:16) 피정복자나 범죄자의 소유는 모두 왕의 재
산으로 귀속되었다(Lange, Keil & Delitzsch). 그러므로 아합은 이제 외견상 합법적
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상속(?)하게 된 것이다.

16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더라

ㅇ곧 일어나 - 70인역(LXX)은 이 같은 행동에 앞서 아합이 옷을 찢고 베를 두르는 동
작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세벧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합법적으
로 탈취할 수 있도록 보다 교묘히 일을 꾸몄음을 알수 있다. 즉 나봇의 죽음은 외견상
일국의 통치자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한 백성의 비극으로 꾸며질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이세벧은 아합이 공식석상에서는 그같은 제스처를 취하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은 항상 이율 배반적인 양면성을 노출하게 마련이다. 즉 옷을 찢
으면서 애통해 하는 척하던 인물이 서둘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일어서는 행위는
아무래도 조화되지 않는다. 여하튼 이제 아합은 원하던 것을 갖게 된 어린아이처럼 얼
씨구나 하고 일어나 이스라엘로 내려 간 것이다.

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나니

ㅇ사마리아에 거하는...아합 - 이 말은 독자들에게 좀 홀란스러음을 안겨 준다. 왜
냐하면 아합은 현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이스르엘로 내려갔다고 해놓고(16절) 다
시금 '사마리아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인간이 한 장소에 머
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다론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흑자는 이 말을
그저 '사마리아에 보좌가 있는...아합' 식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Hammond). 그러나
본절과 관련 우리는 우선 현재 엘리야가 있는 장소가 사마리아 아닌 다른 곳임을 기억
하자. 또한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은 불과 3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임을 기억하
자. 18:45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먼 데 떨어진 엘리야에게 '사마리아에 사는 아합
에게 가봐라. 그가 지금 나봇의 포도원에 가 있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에 거하는'이라는 말이 삽입되므로써 19절의 예언의
정확성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19절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는
곳'(즉 이스라엘)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2:38에 의하
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는 곳은 '사마리아 못'이다. 이러한 차이는 외견상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기록으로 미루건대, 아합의 왕궁이 위치한 곳과 나봇의 포도원
이 위치한 곳을 통틀어 '사마리아'라 불러도 무방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
로 19절의 예언의 신빙성은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19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ㅇ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 이 말속에는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비분(悲
憤)과 탄식의 어감이 어려 있다. 즉 이는 아합의 범죄에 통탄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
다. 즉 살인과 탈취를 거듭해 온 아합의 계속적인 악행을 비난하는 말같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네가 살인을 하였고 거기다 탈취까지 하였다'는 뜻이
다. Living Bible은 이를 '나봇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강
도짓까지 해야 했는가?'(Isn't killing Naboth bad enough? Must you rob him, too?)
로 옮기고 있다. 한편 참고로 나봇 살혜사건 외에도 아합이 저지른 죄상들을 나열해
보면 우상 숭버(16:32), 음란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16:31), 여호와 선지자들 핍박
(19:1-3),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놓아줌(20:42) 등을 들 수 있다. 응당
여호와 신앙의 수호자였어야 할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도리어 이같이 참람한 죄악들만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더 컸음은 지극히 당연하다(20-26절).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ㅇ나의 대적(對敵)이여 - '대적'이란 '적의가 있다'는 뜻인 '아야브'
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서로 중오와 적의를 품는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아합이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엘리야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
는지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것
으로 업(業)을 삼는 최악의 인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갈멜
산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는것은 놀랄 만하다(18:17).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은 셈이니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향
하여 표출되기 마련이다.
ㅇ네가 나를 찾았느냐 -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엘리야가 마치 점잖게 아합에게
알현을 요청한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찾았느냐'에 해당하는 '마차'
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
린 말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이 말은 '아이구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
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ㅇ네가 스스로 팔려 - '스스로 팔려'(히트마케르카)란 '스스로 자신
을...의 노예 상태가 되게하다'는 뜻이다. 즉 아합은 죄를 범하는 일에 완전혀 몰두하
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
하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이세벧의 층동질과 계교를 통해 저질러졌으나 아합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합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살인과 탈취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고 말할수 있다(롬 7:14).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ㅇ매인 자나 놓인 자 - 종이든 자유인이든을 막론하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를 가
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4:10 주석을 참조하라.

22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ㅇ네 집으로...되게 하리니 - 여로보암(Jeroboam)과 바아사(Baasha)는 각각 자신의
왕조를 열었으나 불과 2대째에 가서 부하의 모반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인물
들이다(15:25-31; 16:8-14). 그런데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걸어야 헹던 이유는 한 국
가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로 이끄는 동일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
렇다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방의 우상을 도입한 아합이(16:31-33)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온 일이 아니다. 한편 훗날 실제로 아합의 아들 여호
람(흑은 요람)은 부하 예후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고, 아합의 가문은 모두
무참한 참살(慘殺)을 당하고 만다(왕하 99:21-26; 10:1-17; 대하 22:8).
ㅇ나의 노(怒)를 격동(激動)하고 - '격동하다'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점
차로 격분에 이르도록 자극한다는 뜻이 있다. 즉 참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거듭자
극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분노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인간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
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츨
20:3-6).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
과 다름없다. 출 20:5 주석 참조.

23 이세벧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벧을 먹을지라

ㅇ개들이...먹을지라 - 임종을 평안히 맞이하여 조상들의 무덤에 같이 묻힌다는 것
은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죽음의 방식이다. 반면 객사(客死)를 당해 시체가
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으로 여겨졌다. 14:11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세벧에게 예고된 죽음의 방식은 이보다 처참하다. 즉 생전에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
누리던 이세벧에게 이스라엘 성 곁에서 개들의 먹이가 되는 죽음이 예고된 것이다. 그
것은 곧 이세벧의 전 삶을 송두리째 저주 아래 둔다는 부정적 상징성이 강하게 암시된
죽음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생전의 삶의 방식과
모든 행적이 저주받아 마땅한 그릇된 것임을 생각케 할 것이다. 사실 이세벧은 아합을
층동질하여 온갖 죄악 가운데 놀아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그 삶이 욕된 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수 없다(25절). 한편 이세벧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훗날 정확하
게 성취되었는바 그녀는 예후(Jehu)의 반역시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이 으깨지고 개에게
뜯어 먹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왕하 9:30-37).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ㅇ개들이 먹고...새가 먹으리라 - 아합 가문에 속한 자들이 당할 치욕스러운 죽음과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해 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
한 내용은 14:11 주석을 참조하라.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벧에게 충동되었음이라

ㅇ본절은 죄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절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
간을 그 아래 노예처럼 두려 하는 죄의 권세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죄에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
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약 1:13-15), 다음으로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판별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달려 있음을 확인케 된다.
사실 죄에 대해 주관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 죄짓는 자의 일
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할 때
죄인은 자신의 처지를 죄로 자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짓도록 권
유하는 자기 외부의 객관적 조건 또한 무시할 수 어사싸다. 사실 아합의 새애가 하나
님을 거스리는 것을 일관하게 된 주유요 원인은 악독한 이사벧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
(16:31)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죄의 주관적, 객
관적 조건들은 서로 맞물려 그 열매를 산출해 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반 요소들을
함께 경계해 나가는 것이 죄의 예방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성경은
우리들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비라"(살전 5:22)고 충고하고 있다.
ㅇ그 아내 이세벧에게 충동되었음이라 - '충동하다'에 해당하는 '수트'는 '
꾀다', '유혹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부
추기고 선동(煽動)하는 교활한 행위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
히 요약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음란한 계집의 호림에 넘어간, 그리고 권력욕에 사
로잡힌 여인의 간교한 치맛자락에 놀아난 전형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합도 우
매한 결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이세벧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듯 비
참한 말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ㅇ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 '아모리 사람'(Amorites)은 이스라엘이 팔레스
틴에 이주하기 전의 거민을 가리킨다(창10:16; 출 3:8; 따상 1:14; 겔 16:3). 수9: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참조. 그런데 '아모리 사람'이라는 종족적 호칭만 갖고
는 팔레스틴 역사에서 명멸(明滅)한 여러 족속, 국가들과의 관계를 밝혀내기란 어렵
다. 아마도 성경 밖의 역사자료들을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
과 관련하여 '아모리 사람'이 던져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즉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다(수24:15; 삿 6:10; 레 18:28; 20:22,23).
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틴을 이스라엘에 내줘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견해이다(창 15:16). 그렇다면 '아모리 사람'의 땅을 인수한 이스라엘은 적
어도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지금까지 일삼아
온 아합의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축출당한 아모리인들의 운명에 이스라엘
마저 동일하게 몰아놓은 행위라는 것이 본절의 준론(峻論)이다.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ㅇ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17-26절)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악
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자세를 취한다. 본절과 29절을 통해 판단하건
대 아합의 회개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가식적
이거나 표면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
하신 재앙을 아합 당대에서 그의 아들대에로 연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
는 아합이 이처럼 회개하고 나서도 다시금 악을 행했다는 데 있다(22:8, 26,27). 즉
아합은 일시적으로는 회개하였으나 지속적으로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개는 다윗의 회개(시 51편)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하겠다.
ㅇ옷을 찢고...굵은 베에 누우며 - 본절에 열거된 행위는 모두 회개와 겸손 또는 극
한 슬픔을 표시하는 것들이다(스9:3; 에4:1). 29절은 이 모든 행위의 성격을 '겸비함'
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겉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의
훼손을 통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리고 '베'(사크)
로 만든 옷은 종종 슬픔과 자기 비하(卑下)의 표시로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시신(屍身)
을 베로 감싸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창37:34; 사37:1; 막 15:46; 눅 23:53),
그 뿐 아니라 금식 역시 생명 현상을 지속케 하는 음식을 끊음으로써 자신을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기는 자기 부인(否認)의 행위이다.
ㅇ행보(行步)도 천천히 한지라 - '천천히'에 해당하는 '아트' 는 '부드럽게'
또는 '상냥하게'라는 뜻이다. 원래 걸음걸이란 그 사람의 성격과 마음자세를 드러내
준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부드럽게 걸었다는 것은 곧 겸손의 자세를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음을 뜻한다.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ㅇ겸비함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나'는 '꺾이다', '복종하게 되다'는 뜻
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새가 날개를 접다'이다. 여기서 새가 날개를 접
는다는 것은 곧 사신의 최대 강점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대개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
의 강한 면모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전의(戰義) 상실과 굴복을 표시하
곤 한다. 그러므로 아합이 겸비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적하기를 멈추
고 할복을 표하였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블 수 없었던 모습이긴 해도 아합의 이러한
태도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타락에 끼친 이세벧의 영향에 눈을 돌리게끔 한다. 즉 비
록 우매(愚昧)한 자로 묘사되긴 해도 이세벧과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아합도 그토록 배
도(背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본문을 통해 암묵리(暗黙裡)에 독자들에
게 주는 인상이다.
ㅇ그 아들의 시대에야 ...내리리라 - 여기서 그 아들이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
의 형제인 여호람(또는 요람)을 가리킨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기주의적, 논리
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본절은 당혹감을 안겨 준다. 즉 왜 첵임있는 당사자를
비껴간 징벌이 애꿎은(?) 타자에게 떨어져야 하는가 하는 난제(難題)가 떠오르는 것이
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죄, 기질, 성향의 유전, 교육적 환경, 즉 가치
및 태도의 후천적 습득 등 여러 가지 합리적 설명의 노력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대성(連帶性), 즉 서로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인
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돌리는 신앙적 사고 방식
에 입각해 본절을 대한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
20:5,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