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상

[스크랩] 열왕기상 (18 : 1~46)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15

열왕기상 18장

1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ㅇ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 '많은날'(야밈 라빔)이란 표현은 어
감상(語感上)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언제로부터 계산해서 세
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하기 시작
한 때(17:8-16)로부터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에서 '제 삼 년에'라는 설
명이 곧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적 시간 계산 방법에 의거할때 '제 삼 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실지로 만 3년이 못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의
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 반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4:25; 약 5:17). 따라
서 본절의 '제 삼 년에'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17:1)를 기점으로 잡
고 계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Prlpit Commentary, Lange, Keil & Delitzsch).
ㅇ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 '보이라'(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폭넓고 깊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
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
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본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된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다(17:1).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받는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계신 분은 바알
(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
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해 보이
러'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ㅇ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 사마리아(Samaria)는 아합에 의해 소위 자연의 풍
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가 된 곳이다(16:29-33).
그런데 바로 그곳이 기근(饑饉)으로 허덕였다는 점은 본서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
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아니라 바로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는 현상이
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심하였더라'(하자크)는 말은 '아주 맹렬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말이다.

3 아합이 궁내 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ㅇ궁내 대신 오바댜 - '오바댜'(오바드야후)는 '여호와를 섬기다'는 뜻
이다. 특히 이 이름 속에 담긴 동사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 그대로 오바댜(Obadiah)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
와를 섬긴 사람이다. 즉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 였음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4절)은 가히 그 신
앙의 열성과 순수함을 짐작케해준다. 한편 '오바댜'는 구약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대상3:21; 7:3; 8:38; 9:16; 대하 17:7; 34:12; 스 8:9). 따라서 동명이인
(同名異人)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다.
ㅇ크게 - '크게'(메오드)는 '대단히', '지극히' 등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
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심
도를 잘 드러내 준다(막 12:30; 눅 10:27).
ㅇ여호와를 경외하는 -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야레'에는 '두려워하다'.
'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
험적 신앙을 은연중 강조해 준다.

4 이세벧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ㅇ이세벧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대에 -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치 않으나 학자들
은 대개 엘리야의 가뭄 선포(17:1) 이후로 본다(Hammond). 그것은 두어 가지 가능한
추측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의 정면 도전(가뭄 선포)에 대한 보복 조처
였으리라는 추정(Hess, Menken)이다. 한편 이세벧(Jezebel)에게 박해를 당한 '선지자
들'이란 아마도 선지다 학교의 생도들일 것이다(Bahr, Hammond, Keil, K. Austel). 이
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ㅇ선지자 일백 인을...굴(窟)애 숨기고 - 사마리아 서북방 약 60km 지점에 위치한 갈
멜산(Mount Carmel)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한다
(Montgomery).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
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바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ㅇ가져 - 원래 '가져'에 해당하는 '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
가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이세벧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
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스릴있는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 성경처럼 '가져'라고 번역하기보다 '빼돌려'라고 번역함이 보다 바람직하다.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ㅇ물 근원(根源) - 이 말은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좀 어색한 표현이다. 그런
데 '근원'에 해당하는 '메에'는 본래 '창자', '생식기' 등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산출해 내는 내부의 근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물 근원'
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곳'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수원지'
(水原地)라는 보다 널리 쓰이는 말로 표헌하는 것이 더 낫다.
ㅇ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
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Hammond),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
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두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ㅇ아합은 홀로 길로 가고 -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써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홀로'(레바드)란 말은
'따로', '별개로'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사막 지대의 군주나 족
장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당시 극심한 가뭄 상황하에서 아합왕이 직접 수원지 탐색에
나선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한다(Pulpit Commentary).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ㅇ저가 알아보고 - 오바댜와 옐리야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러나 서로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바댜 편에서 볼 때 엘리야를 식
별하기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항간에는 엘리야의 명성과 함께 그의
옷차림과 특이한 용모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
ㅇ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이여.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
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 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않았을리 만무하다. 더욱
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
음이 분명혀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
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
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
'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
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8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하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 원문에는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말이 단지 '힌네 엘
리 야후'로 되어 있다. 이때 '힌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
로서 '보라 !'(behold !)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본절은 '보라, 엘리야
다 !'란 단순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된다. 한편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야에게는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던 듯하다. 그런 시점임을 감안할때 본절
은 대단한 박력의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
엘리야가 이 같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합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
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1절,약 5:17).

9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ㅇ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붙여 - 여기서 '붙여'로 번역된 '나탄'은 '주다'
(give)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되는 이 동사는 의
미 또한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즉 이는 '만들다', '지불하다', '놓아 두다' 등
번역상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띨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은 '무슨 죄를 범하였기
에'라는 문구가 이미 의미 파악의 열쇠로 주어져 있다. 즉 여기서 '붙여'는 죄의 대가
로 인한 응징, 형벌의 개념으로 사용된것이다(8:32 등). 한편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엘리야 발견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곧 죽음과 동일시된 까닭은 10절이하, 특히 12절에
서 발견된다. 즉 오바댜는 자신이 엘리야를 찾았다고 아합에게 알린 때에 만약 엘리야
가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ㅇ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는 앞서 사르밧 과부의 맹
세와 동일한 표현이다(17:12). 그러나 이는 당시 아직 여호와 신앙에로 개종하지 아니
하였던 사르밧 과부의 말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고 여호와 역시 오바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서는 보다 특별한 의미
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왕하 2:14).
ㅇ당신을...나라가 없었는데 -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적 표현이다. 비록 아합 통치하
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온통 거머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다. 16:29 주석
참조. 여하튼 본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를 잘 보여준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한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
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듯하다(Hammond, 17절). 그러므로 그 저주fmf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fl야롤 수배했을 것이다.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ㅇ네 주 - 여기서 '주'라는 말은 '아돈'으로 일반적인 군주(君主)나 주인
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7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오바댜가 섬기던 당시의 이스라엘
왕 아합(Ahab. B.C. 874-853)을 지칭한다.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ㅇ여호와의 신이...이끌어 가시니라 - 오바댜가 '여호와의 신', 즉 하나님께서 돌연
하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엘리야를 그 어느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
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바댜의 염려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초자
연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약 시대
에도 하나님의 영(靈)이 이와 같은 돌연하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빌립(Philip)을 옮
긴 사실을 볼 수 있다(행 8:39).
ㅇ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
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폭넓
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
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
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
해볼 수 있다.

13 이세벧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ㅇ내가...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 오바댜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
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바댜가 선지자들에게 피신처와 음
식을 공급한 것은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지 않은기(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
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엘리야와 한 편에 속하는 사람임을 밝히려는 것
이다. 또한 이는 엘리야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오바댜
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임아 그러한 비밀스러은 일조차도 알고 있으리라 생
각했던 것이다.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ㅇ이제 당신의 말씀이...나를 죽이리이다 - 이러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오바댜의 당
혹감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시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과 맞닥뜨
리는 죽음의 위협에서 분명히 빼돌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2).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바댜의 그 같은 염려는 아직 하나
님의 계획과 목적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빚어진 기우(杞憂)임(15절)이 이내 드러나
고 만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673).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ㅇ모시는 - 이에 해당하는 '아마드'는 문자적으로 '...앞에 서다'(stand
before)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처럼 '여호와앞에 서다'와 같이 쓰이는 경우. 신학적
으로 (1) 중보 기도를 위해 선다는 의미와 (2) 헌신과 충성의 표시로 선다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 중 (2)의 의미를 채택하여 '모시다'로
번역한 것이다. 기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이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는 의식(意識)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ㅇ만군(萬軍)의 여호와 - 여기서 '만군'(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
(armies)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된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
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
로 본절에 등장하였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사
1:9; 2:12; 8:13; 렘 6:6; 20:12; 32:14).
ㅇ오늘날 -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날'(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
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ba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
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
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이를 '오늘'(today)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Living Bible 등).
ㅇ보이리라 - 1절 주석 참조.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가다가

ㅇ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 여기서 '만나다'에 해당하는 '카라'는 의도
적인 만남을 말한다. 이는 곧 7절의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과 같이 분명한 목적을 지
닌 만남을 의미한다.
ㅇ고하매 아합이...만나려 하여 - 아합이 만만찮은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
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
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
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troubler of Israel)로 부른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Hammond).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
겠는가 !

17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ㅇ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는 자 -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아카르'는 대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합은 지금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국적(國賊)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동은 오로지 아합 편에서의 논리만을 반영한 것이다.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펴 나
가는 아합 왕조(16:29-33)에 대한 엘리야의 평소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
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아합이 보기
엔) 이후에 시작되었다(17:1).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길하고 눈
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자기 바깥의 척도(즉 하나님)로 비쳐 볼 수 있었다
면, 문책의 대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
난받을 자는 엘리야가 아닌 바로 아합 자신인 것이다(18절).

18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ㅇ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
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이처럼 똑같이 '아카르'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을 힐난한다.
17절 주석 참조.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에 책임이 있는 편은 자신이 아닌 바로 아
합과 그의 왕조라는 반박이다. 여기서 '당신의 아비의 짐'은 곧 오므리(아합의 아버
지) 왕조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 가문은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 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
켰다(16:25, 26, 30-33). 따라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민족사의 정도(正道)를 가르
치는 오므리 왕조에 대하여 호평(好評)할리 만무하다. 본절에서 엘리야가 단지 아합
개인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비의 집'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음도 그 같
은 연유에서이다(Matthew Henry).
ㅇ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조)이
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
석을 보다 참조하라.

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벧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ㅇ그런즉 - 원문은 '왜 잇타'(and now)이다. 그 뉘앙스는 이렇다. 지금 서
로를 재난의 원인으로 비난하니(17, 18절) '이제 기필코'(앗타, now) 시비를
가리도록 하자! 그런즉 이는 대단한 박력의 도전이 행간(行間)에 넘쳐 흐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ㅇ이세벧의 상에서 먹는 -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
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Pulip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
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있음직 하지 못하기 때
문다. 사실 '상'(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
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절로 미루어
이세벧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이식을 위
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
ㅇ갈멜산 - 갈멜산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한편 '갈멜'
(카르멜)은 '정원' 또는 '과수원'을 의미한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 산
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곳이
다. 4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
택된 이유는 다음과같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
인돌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
한 때문이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
에 위치한 때문이다.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ㅇ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모으니라 -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콜
-베네이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이다(Montgomery). 즉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12:1 주석 참조. 그런데 21
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 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본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한
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
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ㅇ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 원문에서 '두 사이에서'는 '알 쉐테
이 하세입핌',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이다.
그리고 '머뭇머믓 하려느냐'는 '파사흐', 즉 '절뚝거리다'이다. 그러므로 이
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그
해소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승배를 혼합
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Bahr, Keil). 그런
데 이세벧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
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스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던 셈이다(마 6:24; 계 3:16). 한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진
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니
우리는 스스로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중용(中庸)이라는 말로 미화시켜서는 아니될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참된 중용의 도(道)란 애매한 중간치기 내지는 비굴한 기회주의를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높고 더 경건한 제 3의 길을 따름인 것이다.
ㅇ백성이 한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
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
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
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마 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
구하시는 것은 항상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가 아닌가?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ㅇ나만 홀로 남았으나 -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이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
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 홀홀 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
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Hammond, Montgomery). 그
리고 이렇게 이해하여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절)가 그 동안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삼갈 수 있게 된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즉 19절에
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
에 참예하지 않았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벧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 )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ahr, Keil 등).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ㅇ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 번제(犧牲
燔祭)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
아들여졌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틴에
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Lange).
ㅇ각(脚)을 떠서 - 이에 해당하는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ㅇ이름을 부르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즉 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實
存)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이다. 본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 존
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
고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ㅇ불로 응답(應答)하는 신 -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 제의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
의 성의가 가납(嘉納)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
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신들' 참
조.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그
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
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
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것과 비견된다(출
7:4-12:34).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ㅇ너희는 많으니 먼저...부르라 - 본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차고한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
말해 우선권을 잡은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
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절)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셈이다.

26 저희가 그 받는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ㅇ아침부터 낮까지 - 여기서 '아침'(보케르)은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
난 직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갖은 이유는 무
더운 팔레스틴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무대 팔레스틴'
참조. 다음으로 '낮'(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오정'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
다.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르며 뛰논 셈이다.
ㅇ응답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사 랑과 관심을 갖고서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임을 알 수 있다.
ㅇ뛰놀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
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
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
도 큰 문제는 없다.
ㅇ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번째 견
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
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
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 많은 예를 찾아 볼 수있다(출
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
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절에서 보듯 이는 한갓 광란의 몸칫에 불과
하고 마는 법이다. 출 15:20 주석 참조.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ㅇ저는 신인즉 - 이처럼 '바알은 신이니까'로 서두를 연 본절은 그러나 신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
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
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ㅇ묵상하고 있는지 -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버둥치고 있는 마당에(26, 28절) 바
알은 멀찌 감치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
런 장면은 없을 것이다.
잠간 나갔는지 - '나가다'에 해당하는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잠깐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그런데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라 한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지 않
는가(사 40:28)!
ㅇ길을 행하는지 -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행'(대개 수일이 걸리는)을 의
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
(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시 139:7-12)
ㅇ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고대 팔레스틴' 참조.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
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ㅇ그 규례를 따라...상하게 하더라 - (신 14:1; 렘 16:6; 41:5; 47:5). 그런데 본절
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속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이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이 신에 이르는 길
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
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
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恣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하였다(골 2:20-23).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ㅇ진언을 하여 - 이에 해당하는 '네부아'의 문자적 뜻은 '미친듯이 예언
하다'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참된 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예언은 광란
에 찬자해 행위자들이 한숨과 신음을 토로하는 현상에 다름아니다Movers). 그리고 이
러한 예언이란 대개 비인격적인 외적 조작, 즉 주문(呪文)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주술적 성격이 짙게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의 진언은 일종의 주문, 신비한 웅얼거림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ㅇ저녁 소제(素祭) 드릴 때까지 - 요세푸스의 기록(Josephus, Antiq., XIV, 65))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 쯤(유대력의 9
시)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행 3:1). 한편 '소제'
(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 제물
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레 2:1-3 강해, '소제
에 대하여' 참조.
ㅇ아무 소리도...돌아보는자도 없더라 -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아인'
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ㅇ내게로 가까이 오라 - 엘리야가 이처럼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
과 같이 추정된다. (1)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2)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자신의 모든 행위(32-39절)에
어떠한 협잡도 없음을 명백히 증거키 위함이다(Hammond).
ㅇ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 '수축하다'에 해당하는 '예라체'# 빻#란 )는 '고
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것이 아니라 부서졌던 것을 고쳐 세
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벧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
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준다(4절; 19:10).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홈음직하다.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ㅇ열 두 돌을 취하니 - 여기서 엘리야의 행동은 약속의 땅 입성시의 여호수아의 행동
과 비슷하게 보인다(수 4:9). 그런톄 북왕국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야가 이처럼
'열 두돌'을 취하여 돌단을 쌓은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말
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12:24)) 그들 모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음을 엘리야는 바로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왕국분열 이래로 멸망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은 한번도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더욱이 앗시라아에 포로로
잡혀간 북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이스
라엘 집안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열 두 지파 온 이스라엘'을 향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열 두 사도'의 터전 위에 건축된 영적 이스라엘 곧 교
회를 통해 성취되었던 것이다(창 35:9-12; 삼하 7:16; 계 7:4-8).
ㅇ이 야곱은...하신 자더라 -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케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헐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된
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앨'(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리은 것(창
32:24-28)에서는 이스라엘(Israel)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
된다. 즉 이스라앨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
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출 19:5, 6).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 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ㅇ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 원문 '브쉠 여호와'는 단순히 '여호와
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hovah)라는 뜻이다. 즉 '의지하여'는 해석상 추가된
말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굳이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 엘리야의 단 쌓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단이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임
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케 해주
는 기능을 한다. 24절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은 단은 다른 어떤것과
도 동일시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된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본절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다.
ㅇ곡식 종자 두 세아 -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
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1세아는 1/3에바(Hphah)로서 약 7.6리터 이
다. 그러므로 '두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ㅇ용납할 만한 -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결정하기 어렵다. 즉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어도 될 만큼
이라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前者), 즉 용량을 의미하
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Bahr, Hammond 등).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ㅇ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 레 1:3-9에는 소(혹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 관해 수록되어 있다. 즉 그때에는 제단에 장작을 펴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벌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야는 그 같은 율법의 규정
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ㅇ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부으라 - 여기서 말하는 '통'(카드)이 얼마 만한
용량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괄팔스틴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음절까지 살펴 보면, 번제물과 나무위에는 무려 열 두
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된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하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인위적인 협잡의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인
상지우려 향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점화시키
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이다(38절).
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한다(Pul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49).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ㅇ세 번 그리하라 - 한글 개역은 자칫 두 번 물을 부은 뒤 다시 세 번, 즉 도합 다섯
번의 물붓기가 행해진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원문은 '솰로쉬'
(three), 그러므로 '쉈리쉬'(third)이다. 그러므로 물붓기는 도합 3회 실
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레아는 3명의 아들을 낳자 비
로소 야곱의 완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창 29:34). 또한 전장(前章)에서 엘리
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린 것도 3회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한 물 붓기는 3회로 그 의미롤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한편 이와 관
련 혹자는 4통씩 3회의 물 붓기로 도합 열 두 통의 물을 사용한 것도 이스라엘 12지파
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Bahr). 3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하튼
극심한 가뭄 중에(17:1, 7) 이러한 열 두 통의 물은 과연 어디서 길어 온걸까? 혹자는
이를 지중해에서 길어 온 바닷물로 추추하지만(Mattew Henry), 그보다는 갈멜산 옆을
통과하는 기손 시네(Kishon Brook)에서 길어 왔으리라는 추측이 더 유력하다. 19절 지
도 참조. 왜냐하면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공급받는 기손은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
는 물줄기이기 때문이다(Beek).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ㅇ단으로 두루 흐르고 - 원문에는 '단 으로'란 말에 '주위', '주변'을 의미하는 '사
비브'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단 주위에(물이) 두루 흐르다'
는 뜻이다.즉 많은 물을 들이부은 결과(꼬, #줘) 돌로쌓은 제단(33, 34절)이 온통 물
이 줄줄 흐르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는 이교 제사장들이 제단
밑에 한 사람을 숨겨 불붙이는 것과 같은 속임수는 참으로 불가능하다(Stanley).

36 저녁 소제 드릴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ㅇ저녁 소제 드릴 때에 -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말이다. 29절 주석 참조. 그런데
29절에서의 시점이 본절에 중복되는 탓에 독자들은 약간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30절 이하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모든 행동이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이 계속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별 무리가 없다.
ㅇ아브라함과...이스라엘의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
라 할 조상들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
가 의미 심장하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다(출
3:6).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
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
기(破棄)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
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31절 주석참조.
ㅇ주께서...알게 하옵소서 - 엘리야의 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으로 구성
되어있다. 즉 (1)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2)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 (3)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띤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크게 부
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
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절
에서 사용한 '종''빡 , 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
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
준다 하겠다(Mattew Hanry).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ㅇ여호와여...내게 응답하옵소서 - '응답하옵소서'는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
한 것과 같은 '아나'이다. 그런데 본절은 '아나'가 두 번 반복되어 기도의 간
절함을 보여준다. 사실 바알 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26-29절)에 비하면 엘리야의 기
도는 서운할 정도로 짧다. 그러나 그 간명(簡明)한 기도 속에는 진실되고 순전한 정열
과 굵직한 뚝심이 들어 있다. 아무튼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은 아니시
다(마 6:7).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
리의 간단한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깃들어
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본절의 엘리야의 기도는 중인 부언하지 않고 하나
님께 꼭 아뢸 것만 진실하게 구한 기도였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상 1:9-18
강해, '기도와 기도의 응답'을 보다 참조하라.
ㅇ돌이키게 - 이에 해당하는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
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지시하는데 자주
쓰인다(대하 29:6). 본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
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ㅇ알게 - 이에 해당하는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외에도 보다 폭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참신이든 우상이든 신과 간련될 때는 '관계'에 역점
이 주어지는 말이다(신 13:3; 삼상 2:12; 렘 4:22). 따라서 본절에서 이 말은 이스라
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ㅇ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
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한편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
을 내리셨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
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
를 열납하실 때(레 9:24)등이다.
ㅇ번제물과...흙을 태우고 - 여호와의 불에 의해 살라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
럼 나무, 돌, 흙까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점을 강조해 준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2) 동시에 거기애는 어떠한 협잡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협잡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3주석 참조.
ㅇ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여기서 '핥은지라'(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
러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준다.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ㅇ본절에는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당시 백성들의 경악과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두가지 있는데 (1) 즉각 엎드린 점. (2)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
는 명쾌한 시인을 거듭 반복한 점이다. 이러한 백성의 모습을 21절과 비교하면 그 차
이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한낮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의
광음을 듣는 충격과도 같다.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ㅇ바알(Baal)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 시냇가에서 죽여 버렸다. 이러한 행위는 일견 지
나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 필요 불가
결하였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계명(신 13:6-9; 17:2-7)에 대한 순종 행위였던 것이
다.
ㅇ저희에게 이르되...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
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엘리야로부터 달
아나려 했을 터인데 이들을 막기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의 무리를 동원하고있는 것
이다.
ㅇ기손 시내 - 여기서 '시내'(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른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00m 이하의 작은 강이된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 ; 17:1-7)을
고려하면 '시내'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하다(삿 5:19-21).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ㅇ올라가서 - 이 말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기손 시내에서 갈멜 산 어디 쫌엔가 설치되
어 있을 왕의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아합은 갈멜
산상의 대결 현장과 기손 시내의 바알 선지자 처형 현장에 내내 동참했던 모양이다.
ㅇ먹고 마시소서 -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
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Pulpit Commentary).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
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 동안 아합에게 직접
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이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
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한것이다.
ㅇ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 여기서 '소리'(콜)란 말은 원래 '음성' 헉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이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절은 엘리야가 믿음
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43-45절).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 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ㅇ땅에 꿇어 엎드려 - 야고보는 본절과 관련, '엘리야는...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
를 주고'(약 5:17, 18)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지
면에 내리리라'(1절)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금 기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행동(롬 4:19, 20)과 기도함
으로써 그 실현을 응답받은 행동의 두 가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ㅇ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 엘리야는 이처럼 땅에 무릎을 꿇는 정도에서 지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풀이한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꿇음과 겸손
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
동이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에
로 몰입해 가기 위한 행동이다(Bahr).

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 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ㅇ바다 편 - 갈멜 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Gate). 여기서
'바다 편'이란 바로 그 지중해 쪽을 의미한다.
ㅇ일곱 번 -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
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차인확인해 보라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ㅇ사람의 손만한 - '손'(KJV, RSV, NIV,Living Bible; hand)으로 번역된 '카프'
는 오히려 '손바닥'(palm)으로 번역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손'을 가리키는 단어는
'야드'이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손바닥 만한'으로 적절히 번역하고 있다.
ㅇ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 '막히다'에 해당하는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
은 그만치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
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
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
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고들을 위
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
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
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르렀다(22: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가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케된다(롬 2:4, 5).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ㅇ조금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아드 코 웨아드 코'는 '손이 앞뒤
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안'이라는 뜻이다(Ewald). 이는 곧 큰비가 올 것에 대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의 손바닥만한 구름(44
절)이 얼마나 급속도로 폭우로 변했는지 알 수 있다.
ㅇ이스르엘 - 과거 솔로몬의 다섯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
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동남방
20여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다(Beek).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
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음으로 더욱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21
장). 4:12 주석 참조.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ㅇ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 원문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즉 원문에는 '여호와의 능력'이란 말이 '여호와의 손'
(야드 예호와)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
를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으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Modern
Language). 그러나 Living Bible은 의미를 충분히 살려 본절을 '주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the Lord gave special strength to Elijah)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손'이란 다름아닌 엘리야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
게 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ㅇ허리를 동이고 -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래부분을 묶었다는 말이다(출
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
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ㅇ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면밀히 주시하기위해서였던 동시에 이세벧의 격
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합이 홀로 도회하기에 급급한데서 우상 숭배 정책
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가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그는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엘리야
를 마차에 동승시켰을 것이다(행 8:31).
ㅇ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km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
서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본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
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롤 떠나서 이스라앨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
만 기능하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에 앞세웠다면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이심이 판결났다
는 뜻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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