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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상

[스크랩] 열왕기상 (15 : 1~34)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14

열왕기상 15장


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제 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ㅇ여로보암 왕 제 십 팔 년에 - 여로보암의 즉위 연대는 B.C. 930년경이다. 그러므로
이 해는 B.C. 930년경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유다나 이스라엘 왕의 즉위 연대를 이렇
게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의 연대에 비교해서 밝히는 상관 방법은 열왕기의 특징이다
(9,25,28,33 절). 당시에는 이외에 달리 객관적 연대 표시 방식이 없었기 때문이다(S-
zikszai).
ㅇ아비얌 - 아비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유다의 제 2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다. 14:31
주석 참조. 그런데 대하 11:21,22에 의하면 아비얌은 원래 장자(長子)가 아닌, 단지
르호보암이 장자로 '삼은'(후계자 지명을 의미) 아들로 나타난다. 이는 아비얌의 모친
마아가(Maachah,2절)가 르호보암이 총애하는 왕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르
호보암의 행위는 조부 다윗의 행위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과거 다윗도 장자를 제껴 놓
고 총애하는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으로 후계자를 삼았기 때문이다(1:5-40). 그러나 다
윗의 경우와 달리 르호보암은 일찌감치 아비얌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함으로써 사전에
왕비를 둘러싼 경쟁 가능성을 봉쇄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2 예루살렘에서 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ㅇ삼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3년은 여로보암 재위 제 18년에서 20년 사이(B.C.913
-911년경), 즉 햇수로 3년을 가리킨다(9절). 그러므로 아비얌의 실제 재위 기간은 무
척 짧았던 셈이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이 침묵하므로 적절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ㅇ마아가 - 이처럼 왕의 즉위시 모친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은 열왕기가 유다 왕들을
취급하는 기록상의 특징이다. 14:21 주석 참조. 한편 마아가는 아비살롬(Abishalom),
즉 압살롬(Absalom)의 딸이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아비얌의 모친은 '우리엘'(Ur-
iel)의 딸(대하 13:2)로 나타나 있는데 이 같은 문제는 마아가를 압살롬의 딸 다말(삼
하 14:27)이 우리엘에게 출가하여 낳은 딸, 즉 압살롬의 손녀로 봄으로써 해소된다(K-
eil&Delitzsch Commentary,Vol.III,p.217). 그러므로 르호보암은 자기 사촌 혹은 조카
와 결혼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근친 결혼은 고대 사회에서 흔한 것이지만(창
20:12;24:48;29:15-30) 왕가 내의 근친 결혼에는 특히 정치적 목적이 왕가 내의 근친
결혼에는 특히 정치적 목적이 강했을 것이다. 즉 왕권 강화를 위해 각 지파의 유력자
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다윗(삼하 3:2-5;5:13-16)의 경우 가족내의 분란을 많이 치뤄
야 했다. 따라서 솔로몬은 그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혼인 관계로 왕가를 다
시 얽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미남자 압살롬의 딸(정확히 말하자면 손녀)마아
가는 르호보암의 총애를 받았다. 1절 주석 참조. 한편 대하 13:2의 '미가야'
는 '마아가'의 오기(誤記)일 것으로 추측된다(Dahlberg).

3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ㅇ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 - 즉 르호보암이 유다 통치 기간 중 전국에 우상숭배
를 만연시킨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14:21-24). 그런데 아비얌의 통치 역시 이 점에 관
한한 르호보암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열왕기는 르호보암에게 그러했듯 아비얌
에게도 냉정한 힐난(詰難)의 논조를 견지한다. 한편 이와 달리 역대기는 아비얌의 신
앙적 색채 짙은 연설과 여로보암에게 거둔 전쟁의 승리를 서술하고 있다(대하
13:2-18). 그러나 그런 점들조차 우상 숭배를 허용한 아비얌에 대해 열왕기기자의 냉
정한 평가가 달라지도록 하지는 못한 것이다.
ㅇ그 마음이...온전치 못하였으나 - 역대기기록에 나타나는 아비얌의 경건한 인상에
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그의 우상 숭배
행위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의 마음'이란 '하나님을 향해 전심 전력함'이라는
특성으로 요약된다(8:25;9:4). 그런데 이와 달리 우상 숭배란 부정한 배우자(配偶者)
의 소행처럼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이다(14:22). 그러므로 다른 그 무엇으로도 으뜸
가는 이 범죄를 메꿀 수는 없는 것이다(출 20:1-6;신 4:15-24).

4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ㅇ원문 초두에는 '그러나'(키)가 있다. 그리고 본절은 '다윗 계약'(삼하 7:8-1
6)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 따라서 3절에 지적된 바와 같은 결함에도 불
구하고 아비얌의 남왕국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윗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라는 것이다.
ㅇ등불 - 뒤이어 나오는 '후사'(後嗣)와 동의어로 곧 '자손'을 상징하는 말이다(삼하
21:17;욥 18:5,6;시 132: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36 주석을 참조하라.
ㅇ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 여기서 '세워'(* ,쿰)는 약속이 확립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는 곧 우상 숭배를 허용한 아비얌(3절)이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확립하셨기 때문임을 의
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북왕국의 우상 숭배자들이 자주 대(代)가 끊기는 멸문지화(滅
門之禍)를 입은 것에 비해 남왕국 왕들은 비교적 무사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14:10;16:2;왕하 10:11). 한편 북왕국은 약 250년동안의 존속 기간 동안 무려 아홉
왕조의 교체를 겪었으나 반면 남왕국은 약 400년 동안 다윗왕조의 통치가 계속되었음
을 알 수 있다(Hammond). 본서 서론, '12.열왕기서의 참조 도표'참조.

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ㅇ국가에서는 어떤 권력자도 법의 제한에서 제외될수 없듯, 신정 국가(神政國家) 이
스라엘의 왕 역시 하나님의 법에 의해 제한당하고 비판당하여야 했다. 그러나 실제 열
왕의 역사는 그러한 이상이 자주 무시당했음을 보여준다. 즉 왕들은 자신의 권력이 무
엇으로든 제한되거나 비판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는 대개 무시당했고 도리어 예언자 자신이 위협을 받곤 하였다(22:13-28).
이러한 열왕들의 횡포와 부당성이 이스라엘 역사를 그릇되게 족쇄채웠음을 아는 열왕
기 사가(史家)는 바로 그 점에서 다윗의 탁월함을 또 하나 발견한다. 즉 다윗은 우리
아의 일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비난했을 때 그를 벌하기는 커녕 자신의 죄악을 철저
히 시인하고 통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삼하 12:1-23).
ㅇ어기지 - 이에 해당하는 '수르'는 '빗나가다','돌이키다'는 뜻이다. 즉 이
는 마치 임무를 띤 군인이 그 임무에서 임의로 이탈하듯 자신의 본분에서 이탈하는 것
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6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ㅇ이미 14:30에서 언급된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구절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14:3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ㅇ사는 날 동안 - 14:30의 '항상'(콜 하야밈)은 문자적으로 '모든 날
들에'란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사는 날 동안'(칼 예메 하야요)은
'생명의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즉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본절에서는 좀더 강조된
부사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강조 효과는 다음 7절과 연계될 때 보다 적절히
발휘된다. 즉 이는 '선대에도 줄곧 전쟁이 있더니 후대에도 그러했다'는 지적인 것이
다.

7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 본절과 달리 대하 13장은 이 두 왕
이 벌인 큰 전투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아비얌이 이끄는 남왕국
유다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승리한다. 즉 이때 유다군은 북왕국 군대의
협공을 받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투를 계기로 그때까지의 균형은 허물어지고 남왕국
의 경계는 벧엘 훨씬 북쪽의 여사나(Jeshanah)지역까지 북상하게 된다(대하 13:19).
한편 결과적으로 이 승리는 아비얌의 다음 왕인 아사 시대의 10년 평화에 영향을 주었
음이 틀림없다(대하 14:1). 왜냐하면 북왕국이 이 전투에서 꺾인 세력을 회복하는 데
그만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R.D.Patterson).
ㅇ유다 왕 역대 지략 - 14:19,29 주석 참조.

8 아비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아사 - 혹자는 '아사'란 이름의 뜻이 '치료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Gese-
nius). 그러나 분명치는 않다. 한편 유다의 제 3대 왕인 아사(Asa)는 종교 개혁을 단
행한 업적(11-15절;대하 14:1-5) 때문에 열왕기가 높이 평가하는 왕 중 한 명이다. 그
래서 부친 아비얌이 불과 3년 밖에 재위 하지 못한 사실을 그보다 훌륭한 아들 아사의
길을 빨리 열어 놓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이도 있다(Mattew Henry).

9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 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ㅇ여로보암 제 이십 년에 아사가 유다왕이 되어 - 그러므로 북왕국의 초대왕 여로보
암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남왕국 3대 왕(르호보암,아비얌,아사)을 상대한 셈이다.
그런데 대하 13:20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아비얌과의 전투 이후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사가 즉위할 무렵 여로보암은
패전의 후유증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로보암은 아사의 통치에
별 위험이 되지 못했다. 바로 이 점이 아사가 비교적 안정된 정세속에 눈을 내부로 돌
려 종교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11-15절).

10 예루살렘에서 사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ㅇ예루살렘에서 - 북왕국 왕들의 즉위기사가 단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25절)
에서' 통치하였음을 각별히 밝힌다(2절;14:21). 여기에는 열왕기 사가(史家)의 특수한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난 뒤에 다시금 국가 재건을 하
게 된다면 그때 가서 회복하여야 할 '국체(國體)의 요체가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문제에서 '예루살렘'은 신앙적.정치적 구심체로서 국체의 요체로 제시되는 것
이다. 이러한 전망하에서 본서 기자가 과거 사실을 수집,정리할 때 '예루살렘'은 각별
한 주목을 받게 된다. 즉 국체의 연속성, 정통성의 요체로서 예루살렘은 지속적인 관
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 및 대상 11:4-9 강해, '예루살렘'을 보다 참조하라.
ㅇ사십 일 년을 치리하니라 - 아사는 유다의 역대 왕들 중 세번째로 장기간동안 통치
한 인물이다. 유다 왕들의 통치 연대를 살펴보면, 선한 왕들의 통치는 대체로 길고 악
한 왕들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오래도록 왕위가 존속되었
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였던 것같다(출 20:12). 한편 아사 통치 기간(B.C.
910-869) 중 북이스라엘의 왕위는 무려 여섯 차례(나답,바아사,엘라,시므리,오므리,아
합)나 바뀌었다.
ㅇ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 마아가(Maachah)는 아사의 선왕인 아비얌의 모친이다
(1,2절). 그런데 본절에선 마아가가 아사의 모친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은 제각기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1)여기
서 '모친'(엠)이란 말은 결코 '조모'의 뜻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사는 아비
얌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였을 것이다(Mac Lean). (2) 아비얌은 자신의 모친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Hammond,Lange,Ewald). 이상의 제 견해 중 두번째 주장은 상식적으로 수
긍하기 어렵다. 대신 본절에서 '모친'이란 말은 태후로서 섭정을 한다든지 하는 지위
와 기능의 명칭으로 이해한다면, 세번째 주장이 비교적 타당할 것이다(Keil등). 왜냐
하면 마아가는 태후로서 아들인 아비얌이 죽고 난 뒤에 어린 손자 아사를 대신해 섭정
을 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13절).

11 아사가 그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ㅇ그 조상 다윗같이...정직하게 행하여 - 유다의 3대 왕 아사는 모처럼 긍정적 평가
를 받은 왕이다. 그런데 그가 '다윗'이라는 열왕(列王)의 표준에 부합되는 까닭은 두
말할 나위없이 종교 개혁 때문이다(12-15절). 사실 우상숭배를 공격하는 것은 곧 여호
와 신앙에 전심전력하는 표현과 증거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열왕기는 여호
와의 율법에 순종하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는 신명기적 역사관(2:3,4;3:14;11:38)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도 하나님께 대한 거역의 구체적 표현이 언제나
우상 숭배에 대한 태도는 곧 율법 순종 여부의 시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ㅇ남색하는 자 - 단순한 동성 연애자(homesexual)가 아닌 음란한 이교 의식(異敎儀
式)에 동원되는 남창(男娼)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24 주석을
참조하라.
ㅇ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하고 - 이스라엘인들이 틈틈이 숭배해 오던 우상들에
는 아세라(14:23), 아스다롯,밀곰,그모스(11:5-7),바알(18:18) 등이 있다.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 참조. 그런데 아사가 이처럼 우상 숭배를 공격한 것은 모든
종교혼합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여호와 유일 신앙이라는 전통 노선으로 회귀한다는 의
미를 지니고 있다(Dentan). 그리고 역대기에 의하면 그러한 종교 개혁은 오뎃의 아들
아사랴 같은 선지자의 격려를 힘입었다고 한다(대하 15:1-9). 그러므로 왕국 내에는
언제나 옛 국시(國是), 즉 소박 강건한 신정 국가의 이상을 옹호하는 세력이 있는 왔
었음을 알 수 있다.

13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ㅇ그 모친 마아가가...태후의 위를 폐하고 - 이 사실은 아사의 단호한 개혁 의지를
보여 준다. 즉 철두 철미한 우상 숭배 공격에 있어 태후라고 해서 그 예외일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얽매이기 쉬운 사사로운 혈통상의 정분(情分)을 극복하고
오직 진리 수호만을 위한 가치를 높이 든 아사 왕의 태도는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모본이 아닐수 없다(마 10:37,38). 한편 본절은 마아가가 태후로서 국가의
정책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 아
비얌(1,2절) 때로부터 종교 혼합주의세력의 주동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아비얌
이 일찍 죽고 손자 아사가 아직 어린 동안 실권자로서 섭정을 실시하였을 것이다. 10
절 주석참조. 그러므로 아사가 마아가를 폐위한 것은 (1)신앙 개혁,(2)종교 혼합주의
노선의 거부, (3) 왕권의 회복이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ㅇ기드론 시냇가 - 기드론(Kidron)은 예루살렘 성과 감람 산 사이에 있는 길이 약5Km
의 골짜기 이름이다. 그런데 우기(雨期)에는 이곳에 물이 넘쳐 흐르니 곧 기드론 시내
가 되는 것이다. 2:37주석 참조. 한편 기드론 시냇가의 인접 지역에는 솔로몬 말기 왕
실의 우상 숭배신당이 몰려 있던 멸망 산이 있다(11:7;왕하 23:13). 그래서 이곳은 여
호와 신앙과 이교신앙의 빈번한 투쟁 장소가 되었다(Barrois). 추측컨대 태후 마아가
의 아세라 우상도 이 멸망 산의 어디엔가 세워졌을 것이다.

14 오직 산당은 없이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ㅇ오직 산당은 없이하지 아니하니라 - 아사의 철저한 개혁 의지를 감안할 때 그가 이
처럼 산당을 남긴 일은 석연치 않아 보인다. 그러므로 아사의 눈에 이 산당은 심각한
우상숭배의 처소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추리할 수 밖에 없다(Matthew Henry's Comment-
ary,Vol.II,p.658).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전까지는 이스라엘인들이 산당에
서 여호와께 예배드린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12:31 주석참조.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사는 산당을 남기므로서 우상 숭배 부활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왜냐하면 본래 산
당은 가나안인들이 자신들의 우상 신을 숭배하던 곳이었는바 언제든지 이교(異敎)의
영향이 투영될수 있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의 진행을 아는 열왕기 사가(史
家)로서는 아사가 산당을 남겨 놓은 사실이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한편 이러한 산
당에 대한 대대적 파괴 작업이 비로소 실시된 때는 훗날 요시야(Josiah,B.C. 640-609)
왕에 이르러서이다(왕하 23:4-20).

15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이더라

ㅇ구별한 것 - 여기서 '구별한 것'(카드쉐이)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
이란 뜻이다. 즉 이는 보통의 물품 중에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따로 떼어 둠으로써
거록하게 된 물품을 의미한다.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된 물품을 의미한다. 역대기 기
록에 따르면 아사 왕은 그의 부친 아비얌이 여로보암과 싸워서 취한 전리품(대하
13:8)과 자신이 구스인들과 싸워서 얻은 전리품(대하 14:15) 중에서 은과 금과 그릇들
을 모두 하나님께 바쳤음을 알 수 있다.

16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ㅇ아사와...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 '일생'(칼 예메헴)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이는 앞서 14:30의 '항상'과 15:6의 '사는 날 동안'
이나 마찬가지의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 왕국 초기부터 남북간에 전쟁이 있더
니 각각 3대 왕에 이르도록 전쟁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대기는 아사
즉위 후 십년 동안 평화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대하 14:1). 즉 여로보암의 말기 2
년, 나답의 2년, 바아사의 6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은 전쟁이 없었던 것이다. 본서
서론, '12. 열왕기서의 참조 도표'참조. 그 이유는 스마라임 전투에서 아비얌에게 패
전한 이후(대하 13:1-22) 미처 세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정권이 교체되는 등 불안정한
북왕국내부의 정정(政情) 때문이다. 그러나 바아사는 어느 정도 정국이 수습되자 다시
남왕국고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분열 왕국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끝없는
전쟁의 악순환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시대의 한 표징으로서 열왕기는 이 점을 자주 지
적하고 있는 것이다(14:30;15:6).

17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ㅇ바아사가 유다를 치러...한지라 - 본절에는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 침공 원인
이 밝혀져 있다. 라마는 원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수 18:25) 예루살렘 북방 약
6Km 지점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바아사는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
고자 했던 것같다. (1) 백성들의 남하(南下) 제지: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유다 왕국
이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소문은 북 이스라엘 곳곳에까지 전해졌고, 그 소문을 들은
자들 중 대거 월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대하 15:9). 그러자 포악한 바아사왕은 여로
보암과 동일한 염려(12:27)에 사로잡힌 나머니 라마를 기반으로 하여 남하 무리들을
강제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2) 유다 정복을 위한 전초 기지 확보:라마는 유다의 정
치,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으므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따라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유다의 아사왕은 황급한 나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비책을 마련하였던 것이다(18-22절). 한편, 바아사의 침공 연대
를 역대기는 아사 왕 36년이라고 말한다(대하 16:1). 그런데 열왕기는 바아사가 죽고
아들 엘라가 즉위한 때가 아사왕 26년이라고 한다(16:8). 따라서 이러한 연대의 문제
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교적 유력한 견해는 '아사 왕 36년'이란 '왕국분
열 이후 36년'으로 보는 견해이다(Liley,Pulpit Commentary).
ㅇ라마 - '라마'는 '높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엘람'(er-Ram)으로 불려지
고 있는데 본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남북 왕국 국경의 주요 분쟁 지역에 속한
다. 그런데 바아사는 이곳에 요새를 건축하여 남왕국을 압박하였다. 이로 보아 바아사
는 이전에 에브라임 북방 여사나까지 밀렸던 영토를 거의 회복한 듯하다. 7절 주석 참
조.

18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ㅇ남은 은금을...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 당시 성전과 왕궁의 곳간에는 르호보암
당시 애굽의 시삭(Shishak)에게 약탈당하고 남은 것들 이외도(14:26) 아비얌이 여로보
암과의 싸움에서 탈취한 보물들과(대하 13:18) 아사가 구스를 물리치고 탈취한 물건등
(대하 14:15)이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었던 평화 시기 동
안 유다 왕궁에는 많은 은금 보화들이 축적되었을 걸로 짐작된다. 따라서 아사가 이
많은 보물들을 '몰수히' 벤하닷에게 바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은, 바아사의
침공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체험한 하나님
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더라면 그렇듯 심각한 공포와 낭패감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15).
ㅇ손에 붙여 - 이는 곧 어떤 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ㅇ다메섹 - '동방의 진주'라고 별명을 가진 다메섹(Damascus)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팔레스틴 북방 두로 동편에 위치한 아람족의 국가이다. 한편 과거 다윗은 이
다메섹을 포함하여 많은 아람 부족 국가들을 이스라엘에 합병시켰었다(삼하 8:5,6).
그러나 르손의 독립 운동(11:24,25)과 이스라엘의 왕국 분열(12장)등이 아람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력을 무산시켰다. 그러므로 아람은 다메섹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키
워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바아사의 유다 공격 당시 북왕국
과 다메섹은 서로 동맹을 체결한 상태이다(19절). 그래서 바아사는 배후를 염려하지
않고 마음놓고 유다를 공격할 수 있었다.
ㅇ헤시온의 손자...벤하닷 - 헤시온(Hezion),B.C.940-915)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
나 다메섹에서 아람왕이 된 르손(Rezon)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분명치는 않
다. 한편 본절에서 가리키는 벤하닷(Benhadad)은 벤하닷1세(B.C.900-860)를 말한다.
그는 그의 아들인 벤하닷 2세(B.C.860-841)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그런데 벤하닷 1세
에서 벤하닷 2세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이들의 정책은 서진(西進)정책이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1) 남동쪽의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도 (2)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기도 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펼쳤다(Bow-
ling).

19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ㅇ나와...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 이로 보아 벤하닷 1세는 정책상 이스라
엘 남북 왕국 모두와 동맹을 체결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동맹은 매우 가변적이어서
그때그때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파기와 재동맹이 거듭되었음이 분명하다
(20:1-24;22:34-36).
ㅇ깨뜨려서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라르'는 '깨다','취소하다','무효로
하다'란 뜻으로 인간 사이에 맺어진 약조의 배반, 즉 동맹의 일방적 파기를 의미한다.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 바아사의 북왕국 군대는 잘 준비된 강병(强兵)이었다. 이
들의 공격에 수세로 몰린 아사는 벤하닷을 매수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한것이다. 즉 전
선(戰線)이 남쪽 라마로 치우친 동안(17절) 아사는 무방비로 노출된 후방을 공격하여
이스라엘군을 당황케 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 작전은 주효했다. 그러나 아사는 이로
말미암아 선격자 하나니(Hanani)의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아사가 하나님
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벤하닷)을 의지했기 때문이다(대하 16:7-10).

20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온 땅을 쳤더니

ㅇ벤하닷이...듣고 - 벤하닷으로서는 아사의 제안에 솔깃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
면 그 제안은 (1) 막대한 금품 수수가 따르는 것이기도 하려니와(18절) (2) 그 내용
자체가 무방비 상태의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영토 확장 및 무역로 확보를 꾀할 수 있
는 호기(好機)를 의미했기 때문이다(19절).
ㅇ이욘과...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 본절에 열거된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
에 해당한다. 벤하닷에게 이 지역은 다메섹에서 갈릴리를 경유하여 지중해에 이를 수
있는 대상로(caravan route)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확보는 다메섹으로서는
두로와의 교역 뿐 아니라 지중해 무역이 보장되는 의미를 띤 것이다(Bowman).
ㅇ이욘 - 아벧 벧마아가에서 북쪽으로 약 14Km 지점, 훌레(Huleh) 골짜기에 위치한
납달리 지파의 성읍이다. 오늘날의 '텔 디빈'(Tell Dibbin)으로 알려져 있는데 벤하닷
에게 침략당한 후 또다시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다(왕하 15:29).
ㅇ단 - 본래 지명은 라이스(Laish)였던 이스라엘 최북단의 단지파의 성읍이다. 삿
18:29 주석 참조.
ㅇ아벧벧마아가 - 북부 갈릴리 위쪽의 훌레 계곡에 위치했던 납달리 지파의 성읍이
다. 이욘(Ijon)에서 남쪽으로 약 14Km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본래 아벧(Abel)과 벧마아
가(Beth-Maachah)는 서로 인접한 두 마을이다. 그런데 두 지명을 하나로 합쳐 '아벧벧
마아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삼하 20:14 주석 참조.
ㅇ긴네렛 온 땅 - 성경에서 긴네렛(Chinnereh)은 대개 다음 3가지 용례로 쓰이는데
곧 (1)갈릴리 바다의 옛 지명(민 34:11), (2)납달리 자손의 한 성읍(수 19:35), (3)갈
릴리 호수 일대의 게네사렛 땅(마 14:34)등이다. 여기서는 3번째 경우를 가리킨다.

21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ㅇ바아사가 듣고...디르사에 거하니라 - 당시 바아사의 전투 병력은 거개가 라마 부
근으로 집중 투입되어 있었다(17절). 그런데 벤하닷 군대는 오히려 후방을 공략, 질풍
노도(疾風怒濤)와 같이 납달리 지명을 허물어 뜨리고(20절) 그 기세를 몰아 디르사(T-
irah)를 향해 계속 직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바아사는 수도(首都)방위를 위해 급히
라마에서부터의 퇴군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ㅇ디르사 - 디르사는 북방 전략에 치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여로보암이 세겜에
서부터 천도한 도시이다(14:17). 요단 강 동편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특히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데 오므리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기 전까
지는(16:23,24) 계속 북왕국의 수도였다.

22 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ㅇ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 이는 아사가 전국에 부역 총동원령을 내렸음을
말한다. 특히 '모면하지'에 해당하는 '나키'는 '깨끗하다'는 뜻도 있지만 여
기서는 '자유롭다'는 뜻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아사가 내린 동원령은 자유스럽지 못
한, 속박된 강제동원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역대기는 아사의 통치 일면에
포학스러움이 없지 않았음을 암시한다(대하 16:10).
ㅇ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 - 바아사는 다메섹 침공의 급보에 접하자 뒷수습도 제
대로 못한 채 황급히 철군하였다(21절). 그래서 라마에 건축 자재들을 아사가 탈취해
오히려 자신의 국경 성읍들을 요새화한 것이다.
ㅇ게바 - '게바'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라마의 동쪽 그리고 예루살렘 북동
쪽 9.6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로서의 유다 왕국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로
간주된다(왕하 23:8;슥 14:10;느 11:31). 또한 이곳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
요성을 띤 곳이기도 한다(삼상 13:3,16;14:5;삼하 5:25;따항 14:16). 한편 간혹 게바
(Geba)는 기브아(Gibea)와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기브아는 게바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성읍(수 18:24)이다(Mortn).
ㅇ미스바 - '미스바'(미치파)는 '바라보다','정탐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름이 암시하듯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8Km지점에 위치한 고지대이다. 그런
데 이곳은 게바와 마찬가지로 북왕국과의 경계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베냐민 지
파의 성읍이다. 또한 이러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 또한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 외에도 미스바는 예로부터 종교적 처소이기도 한다(Muilenburg,삿
20:1;21:1,8;삼상 7:5-11;10:17-27). 한편 라마에 남겨 놓은 건축 자재로 도리어 국경
을 강화한 아사는 이로써 바아사의 남진(南進)을 좌절시켰다. 즉 예루살렘 북쪽 6Km
지점인 라마까지 깊숙이 남하하여 유다를 압박하려던 바아사의 의도(17절)는 무산될
것이다. 그러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을 치게 한 아사의 전략은 선지자하나니의
비난거리였다. 즉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국 군대를 의지한 탓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대하 16:7,8).

23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무릇 그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것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저가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더라

ㅇ아사의...모든 권세 - '권세'(게부라)는 특별히 왕권을 가리키는 말로써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신 3:24;대상 29:11;욥 12:13 등).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의 강력한 왕권 행사를 가리키고 있다. 즉 이는 아사가 강력한
왕권을 지녔었음을 지시하는 말이다. 이후에도 우리는 오므리, 여호사밧 등에게 이 단
어가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16:5,27;22:45;왕하 10:34 등).
ㅇ발에 병이 있었더라 - 아사는 대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은 왕이긴 하지만(11-15
절) 그렇다고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벤하닷을 끌어들여 북왕국을 공격하
게 한 일외에도(18-21절) 그가 이처럼 발에 병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고 역대기는 서술한다(대하 16:12). 이는 곧 아사가 처음과 달리 세월이 흐를수록 점
차 여호와에게서 멀어져 갔음을 의미하는 한 증거이다(H.J.Austel,Keil&Delitzsch).
한편 본절의 '병'에 해당하는 단어(* ,하라)는 '문질러 없애다'란 뜻에서 온 말
이다. 이로 보아 아사의 발에 난 병은 가려움증이 아주 심한 피부병이었던 듯하다.

24 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그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그 열조와 함께...장사되고 - 아사의 장례(葬禮)장면을 언급하는 본절은 좀 특이하
다. 즉 본절에는 '열조와 함께'라는 문구가 거듭되고 있다. 그리고 장사지(葬事地)도
그저 다윗 성이 아닌 '그 조상 다윗의 성'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다
음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1) 잦은 정변으로 왕조 교체가 빈
번했던 북왕국에 비해 다윗 왕조가 일관되게 통치했던 남왕국의 연속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본서 서론, '12.열왕기서의 참조 도표'참조. 그런데 이 점은 곧 약속에 신실
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즉 이는 다윗의 후손이 계속해서 왕위를 잇도록 하
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삼하 7:11-16)이 실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2) '조상 다윗'이란 표현은 특히 정통성의 소재 문제에서 중요한 의미
가 담겨 있다. 즉 다윗은 신정 국가의 이상적 군왕으로 제시된 인물이다(11:34). 그러
므로 다윗과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혈연적 계속이 아니라 가치 판단에서의 계승성 문
제이다. 이 점은 북왕국의 왕들에게도 다윗이라는 표준과 척도가 적용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14:8). 그러므로 아사가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었다는 각별한 표현은 신
앙적 가치 판단으로서의 정통성이 그에게 있었음을 의미한다. 11절 주석 참조.

25 유다 왕 아사 제 이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ㅇ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이 년을...다스린라 - 이처럼 여로보암 왕조의 북왕국통
치는 여로보암 통치 22년(14:20) 그리고 그 아들 나답 통치 2년 도합 2대로 약 23년간
에 그쳤다(B.C. 930-909). 그런데 남왕국 유다가 다윗 왕조 통치하에 내적 안정을 이
루었던 데 비해, 여로보암 왕조의 이 같은 단명(短命)은 분명코 우상 숭배에 대한 하
나님의 징계의 결과라는 것이 열왕기의 시각이다(14:6-16).

26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중에 행한지라

ㅇ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 즉 여로보암이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조차
타락케 만든 우상 숭배죄(12:28-33)를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16
주석을 참조하라.

27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ㅇ바아사가...저를 죽였으니 - '바아사'란 이름은 '바알이 듣는다'는 말
의 단축형이다(MacLean). 그런데 그가 여로보암 가문을 멸하고 정권을 잡지만 그의 이
름이 암시하듯 바아사 또한 우상 숭배에 몰두한 여로보암의 아류(亞流)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 역시 훗날 여로보암과 똑같은 징벌을 받아 아들대 제 2년에 가서 멸족을
당하게 된다(16:8,9). 한편 잇사갈 출신 바아사가 이처럼 에브라임 출신 여로보암 왕
조를 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 의미를 지닌다. (1) 이로써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점(14:10,11), (2) 당시 북왕국 내의 지파간 결속이 확고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ㅇ깁브돈 - '깁브돈'은 '산마루'란 뜻이다. 본래 블레셋의 한 성읍으로 가
나안 정복 당시 단 지파에게 배분되었으나 단 지파는 이곳의 점령에 실패한 듯하다(수
19:14). 아무튼 이곳은 애굽과 수리아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이스라엘은 이
를 줄 곧 차지하려 들었다. 그런데 아이로니칼(ironical)하게도 바아사가 나답을 모반
했던 시기도 깁브돈 공략시이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시므리에게 모반당한 시기도 2
차 깁브돈 공략시이다(16:9,15,16).

28 유다 왕 아사 제 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ㅇ아사 제 삼 년에 - 이는 곧 나답의 통치 제 이 년째 되는 해이다(B.C.909). 이로
미루어 나답은 만 이년을 채 통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25절).
ㅇ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 깁브돈(Gibbethon)포위 공략 중 바아사가 쿠데타를 일으
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실질적으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이로 보아 아마도 그는 나답의 군대장관이었던 같다(Hammond). 그런데 이처럼
무력에 의한 유혈 쿠데타는 북왕국 왕권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실추시키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와 같은 반란은 북왕국 역사에 꼬리를 물고 발발하여 하나의 악순환
을 이룬다(16:19,20;왕하 9:11-10:36;15:10-31).

29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ㅇ온 집을 쳐서 - 여기서 '쳐서'(나카)는 '살해하다', '쳐죽이다'는 뜻으로 구
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사이다(출 21:12;신19:4;수10:26;삼하2:23 등). 이 동사가 특
히 신학적 중요성을 띠는 경우는 하나님이 심판(또는 징계)의 주체가 되실 때이다(신
28:22,27,28,35). 본절 역시 여로보암 일족을 멸절시키는 바아사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임이 명시되어 잇따. 즉 이는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성취된 사건인 것일(14:6,11).
ㅇ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이 역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일에 있어서의 바아사 자신의 동기는 전혀 다른 데 있
었다. 즉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보복당할 가능성을 말살하려 했을 뿐이다. 왜냐하
면 여로보암 가문 중 한 명이라도 남게 된다면 그는 바아사에게 피의 복수를 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민35:16-21). 이는 바아사로서는 큰 후환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바
아사는 여로보암 일족을 철저히 진멸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복수 가능성을 봉쇄
해 놓고도 그의 운명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바아사 왕조
로 하여금 여로보암 왕조의 말로와 같게 하신 것이다(16:11-13).

30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을 인함이었더라

ㅇ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 '노를 격동시킨'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화나게
하다', '분노를 불러 일으키다'는 뜻이다. 이는 특히 마음의 내적 상태가 점차로 격심
한 분노와 흥분 상태에 이르게 됨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
性論的)으로 표현해서 하나님께서도 언약의 백성이 당신에게 불성실한 경우 그와 같이
상처입고 분노하신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와 상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출34:14;겔16:42). 이와 관련해서는 삼하22:4-20 강해, '신인
동형 동성론'을 보다 참조하라.

31 나답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무릇 행한 일 - 2년이 채 못되는 나답의 재위 기간(25절) 중 나답의 행적으로서 우
리에게 알려진 단 하나의 사실은 그가 깁브돈을 포위, 공격하려 했다는 것 뿐이다(27
절). 그리고 역대기는 아예 나답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둘러싸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 여로보암 말년의
패배(7절;대하13장)와 실정(失政, 14:1-20)은 북왕국 내의 여로보암 왕조의 왕권을 인
정치 않는 반발의 기운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사실 사사 시대부터 군사적, 정치적 성
공을 지도자 승인의 요긴(要緊)이엇다. (2)그런데 나답은 이러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한 듯하다. 왜냐하면 바아사의 왕위 찬탈(27,28절)은 세습 왕권보다는 카
리스마(Charisma)적 지도자 선택이라는 성향(性向)이 작용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번은 군대의 인기를 독점한 바아사라는 인물이 세습 왕권의 나답을 능가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는 바아사의 출신이 미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
서도 엿볼 수 있다(16:2).
ㅇ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 - 북왕국의 국정 일지에 해당되는 책이다. 본서 기자나 역
대기 기자가 성경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이를 참조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4:19 주석 참조.

32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ㅇ아사와...전쟁이 있으니라 - 왕들이 거듭 바뀌어도 남북의 적대 정책에는 이처럼
변함이 없었다. 한편 아사와 바아사 사이의 인상적인 전투는 16-22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원래 바아사는 무인(武人) 출신이라 전쟁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공적
으로 남왕국을 공략해 예루살렘 턱밑 6km 지점 라마까지 진출하였다(17절). 그런데 아
사의 책략으로 인해 동맹을 파기하고 북왕국의 후방을 급습한 벤하닷 때문에 바아사는
라마에서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18-21절). 그러나 이 일 후에도 남북왕국은 항상 전시
(戰時) 상태에 놓여 있었도 상호 적대감은 증가하였다. 따라서 분열 왕국 시대(B.C.
930-586)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깊은 골이 가로놓여 있었던 암울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33 유다 왕 아사 제 삼년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 사년을 치리하니라

ㅇ앞서 바아사에 대한 언급이 두 번(16-22,23절) 나왔지만, 그것은 유다 왕 아사의
통치(9-24절) 및 이스라엘 왕 나답의 통치(25-32절)를 서술하던 중간이다. 반면 이제
본절은 정식으로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를 서술하는 첫 문장이다. 아마도 이는 16장
에서 바아사의 행악(行惡)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그 도입부로 바아사의 통치
기간 및 통치 성격을 소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ㅇ디르사에서 - 디르사(Tirzah)에 관해서는 21절과 14:17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북왕국의 수도가 세겜(Shechem)에서 디르사로 옮겨진 것은 여로보암 때지만, 명시적으
로 북왕국의 수도로서 등장하는 것은 본절이 처음이다(21절).
ㅇ이십 사 년을 치리하니라 - 바아사의 재위 기간은 B.C. 909-886년이다. 그런데 이
기간은 북왕국 북편의 아람 동맹국들이 다메섹의 주도하에 북왕국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던 시기이다. 즉 이들은 지중해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이스라엘과 분
쟁을 일으켰다(19-21절). 또한 이때는 유브라데 강 동편에 있는 앗수르가 서서히 강대
국으로 힘을 키우고 있던 시대이다. 이러한 북방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응하고 위한
정책의 일환이 곧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등의 디르사 왕도화(王都化)이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바아사가 24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강한 군사력을 키우는 데 치중했으리
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아사가 남침에 힘을 쏟자 아사조차도 위급하여 벤하닷을 매수
치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16-22절).

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중에 행하였더라

ㅇ여로보암의...죄 중에 행하엿더라 - 바아사에 대한 열왕기의 간명한 평기아다. 신
앙 공동체와 그 순수성에 관심하는 열왕기의 관점에서 볼 때 바아사는 단지 왕국 분열
과 타락의 골을 깊게 한 인물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가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대로
북방의 성소(제멋대로의)를 유지해 나갔음(12:28-33)은 곧 예배의 단일한 중심지(예루
살렘)가 지켜 줄 예배의 순수성을 해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의 통
일성이 지켜 줄 민족적 단일성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12:4-14 강
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보다 참조하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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