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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룻기

[스크랩]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2:01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룻과 엘리멜렉

룻과 나오미

룻과 보아스

룻과 다윗

타락과 회개

구원(1)

구원(2)

회복과 축복

1장

2장

3장

4장


1. 베들레헴 스타트(룻2:1-7)

필연@섭리 법칙

하나님께는 '우연'이라는 게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섭리(providence)인가?  혹은 섭리 속에 우연이, 우연 그 속에 섭리가 함께 공존하는 것인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것이 과연 '우연과 섭리'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우연의 사건들이 모여서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편집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밝히 보여진 하나님의 사건들의 결정체들이다.  그 예들을 몇 가지로 살펴 보자.


하나님 안에는 우연은 없다.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장면이다(창18:1- ).  그러나 천사의 입장(시각)에서 생각해 보자.  천사가 어떤 목적하는 바가 없이 우연히 이 땅에 현현했을까?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가 우연히 현현할 수 없겠지만, 만약 우연이었다고 가정할 때 그 우연의 우연이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만난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말 "지극히 보기 드문 현상" 곧 '우연'인 것이다.

또한 에서로부터 야곱에로의 축복 이동(shift of Grace)이 과연 우연한 사건이었는가?(창25:23)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것이 우연한 이야기인가?  요셉은 소위 뜻 밖의 기회를 잘 포착하여 자수성가한 것인가?(창45:7-8)  모세가 애굽의 바로에 의해 시행된 '유아 살인사건'을 피해서 살아 남은 것이 아무 뜻 없는 우연이었는가?  또 요나의 일생은 어떻고?  예수님의 여리고行은 우연인가?(눅19:1-10)  그렇다면 우연한 기회에 삭개오가 구원받은 것인가?  [권영삼은 {빛과소금}(1995.12, pp.72- )에서 "크리스찬의 재난, 천국의 초청장이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한번 읽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누룩과 같다.

하나님은 "보리 추수할 때"를 귀향의 때로 준비하셨다.  마침내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생각해 보라.  우연히 왔는데, 방향 없이 걸어왔는데, 우연히 베들레헴으로 오는 길을 만났고, 또 그 길을 따라 들어 온 것일까?  우연히 왔는데 그곳이 베들레헴이었는가?  

나오미는 여기서 아직 3가지의 깊은 영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누룩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그녀는 아직 아무 것으로도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수납할 만 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연약한 인간 나오미를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와 상관없이 일하신다.  그렇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하고, 거룩하고, 믿을 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는 '은혜'라는 말의 뜻이다.

사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만큼 은혜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세 가지 준비된 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첫째, 룻을 붙여주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녀를 동구(洞口) 밖에서 기다리시고 계셨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 그것은 보아스를 준비해 두신 것이다.  


2막1장 서곡

하나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세기에서부터 작정하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The Story)는 결코 변경되거나, 수정되거나, 포기되거나, 가감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다.  이 '하나님의 열심'(왕하19:31, 사9:7)이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모세와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30)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룻기를 통해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촘촘하게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섭리하시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연히, 운이 좋아서, 밤에 돼지꿈을 꾸었더니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이다.

1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하나님은 보아스를 준비하셨다.  우연은 없다.  회개하고 주 앞에 나올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은총의 통로인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고 붙여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등장하는 사람은 바꾸어질 수 있지만 -엘리멜렉에서 나오미로, 나오미에서 룻으로, 룻에서 보아스로- 그분의 계획은 결코 포기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먼저 포기하는 것은 교만이며, 가장 큰 불신앙이다.

그는 엘리멜렉의 친족이다.

그는 유력한 사람이다.  

2-3절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으나 달라진 것은 없다.  모압에 있을 때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이후나 가난은 마찬가지다.  세상에 있을 때나 예수 믿기로 하고 교회에 등록한 이후나 문제는 그대로다.  유력한 자와 먹을 것이 없어 보리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를 해야 하는 가난한 자의 대조를 보라.  이것이 베들레헴의 모습이다.  

회개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한다는 말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많은 경우 회개를 입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회개는 내가 하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꿈꾸는 경우가 그것이다.  내가 할 일은 마음과 입으로 회개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거다는 한마디로 '거지 근성'이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유력한 자'라고 성경이 소개하는 보아스는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을 주을 정도로 밭을 소유하였다.  그런데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보리 이삭이 자라 열매를 맺고, 때가 되니까 곡식이 창고에 자동적으로 쌓이게 되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다 알아서 해 주신 것인가?  아니다.  이것만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없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룻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코 혼돈하지 않았다.  그녀가 밭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보아스를 만났겠는가?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행동을 배제하지 않으며,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앞서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기초가 되어야 한다.

1막 3장에서는 나오미가 묻고 룻이 대답했는데 2막 1장에서는 그 반대다.  룻이 한 가정이 나아가야 할 바를 주도하는 구조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룻 역시 이 일을 독자적으로, 단독적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지 않는다.  서로 나누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을 취한다.  참 아름다운 것은 나오미와 룻이 이처럼 서로 대화(dialogue)를 나누면서 지낼 수 있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4-7절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보리 추수 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도록 하시더니, 룻으로 하여금 밭에 나가 이삭줍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 많은 밭들 가운데 보아스의 보리밭으로 인도하셨다.  섭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룻이 이삭줍기를 하고 있는 시간과 장소에 마침 보아스가 나타난 것이다.

보아스 역시 매우 건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보리 베는 자들과의 대화에서 짐작하게 된다.  서로를 축복하는 사이, 그것도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임을 볼 때 보아스가 얼마나 전인적으로 건강한 사람인가를 알게 된다.


이는 뉘 소녀냐?

한편, 보아스는 섬세한 사람이다.  이삭줍기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줄 정도로 그는 아량과 넓은 마음을 소유한 점이 퍽 인상적이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고아와 과부, 그리고 극빈자들이 이삭을 줍는 일을 통해 끼니를 연명하였다.  모세는 이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 놓을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보아스의 시야에 이런 부류의 사람인 한 여인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무엇보다 2막 1장의 핫 포인트다.  사실 그냥 쓰윽 둘러보고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도 룻으로써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흉년의 고통을 제하시고 우리를 권고하사 땅의 소산을 먹도록 양식을 주셨는데 왜 하필 젊은 여인이 홀로 이삭줍기에 나섰을까?  아마 뭐 남모르는 사정이 있나보다. 그것까지야 내 알 바 아니지. 이삭줍는 것도 자존심 상할텐데 방해나 말아야지."

그러나 보아스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마침내 무엇인가 어떤 일이 새롭게 시작될 순간이다.  룻기 전체를 두고 가장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보아스와 룻의 만남이다.  만남은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다.  거기에는 기대와 바램과 소망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비하면 극적이지도 않고 뭐 특별하지도 않다.  그럴듯한 장소도 아니고 보리밭에서의 만남이다.  

우리는 흔히 이처럼 별스러워 보이지 않는 만남들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하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만남, 기념될 사건,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경험되어야 만 무슨 '느낌이 온다'는 둥 하면서 그때부터 비로소 뭔가를 시작할까,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해 보면서 최대한 실리(實利)가 보장될 때에야 행동을 개시한다.  만약 보아스가 현대인이었다면 그는 결코 보리밭 스켄들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간격만큼이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일하고,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시고, 상하고 찢긴 심령들을 싸매어 주시며, 심판 받아 마땅한 인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정도로 온 인류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처럼 세상을 보는 사람, 당신처럼 약자들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빤한 계산 속이 보이는 태도로 뭔가 얻어 보겠다는 식의 굽신거림의 사람에게 당신의 섭리를 보고 듣고 얻고 누리도록 만드시지 않으신다.  섭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점에 있어서 보아스와 룻은 분명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

룻은 자신의 이름보다도 자신의 삶이 소개된 사람이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시모(媤母)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까지 왔다.  그리고 비어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밭에 나와 이삭줍기를 하며 베들레헴의 험난한 삶을 시작하였다.  사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이미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자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볼 본문 가운데 보아스의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렇듯 그녀는 온 베들레헴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적절한 가십(gossip)거리가 없던 차에 룻은 각별한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주목하고 계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기대하는 것대로 뒤쫓아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룻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이다.  홀로 된 시어머니를 따라, 그리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 위해 모압 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셔야 한다는 식의 신앙으로 명함을 내 놓지 않았다.  


부스러기 묵상

지금 선 자리는 아름답다.
그녀를 향하신 섭리는 이미 시작되었다.  룻은 그 섭리를 따라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다.  꾸밈 없이, 뭔가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지도 않고,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서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비굴하게 타협하지도 않는다.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더더욱 그녀는 하나님보다 앞서 행동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새로 시작된 베들레헴 생활을 자신의 어떤 의도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나간다.  바로 그런 삶의 자리에서 보아스와 대면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의식하지 않고 이삭줍기에 여념이 없는 여인, 그녀가 바로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를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이방 여인 룻이라는 것, 거기까지 묵묵히 걸어왔다.  

과연 룻에 대한 소문과 그녀를 직접 본 보아스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좀 더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계속되는 룻 이야기를 어떻게 섭리해 가실 것인가?  이 일에 보아스와 룻은 어떤 모습으로 쓰임 받을 것인가?  이방 여인이라는 하나의 넘을 수 없는 변수가 이 두 사람의 만남에 어떤 변수가 될 것인가?  문제가 점점 복잡해 질 뿐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보아스와 룻, 이들은 모두 지금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한 사람들이다.  가장 기본적인 면에서 이들이 해 놓은 베들레헴 스타트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우리 역시 지금 선 자리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묵상의 주제들이다.

2. 보아스 스타트(룻 2:8-16(a))

일상의 신앙


룻기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그런 장면이 없다.
다른 성경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의 사자가 임하여 가라사대"와 같은 방식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 성경의 흐름을 이끌어 나간다.  그런데 룻기에는 꿈이나, 묵시나,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 같은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룻기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단 하나의 실패가 있는데, 룻기 1:1-5이다.  잘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개입은 고사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만 등장한다.  그 결과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직접적인 나타나심이 아닌, 그러면서도 묵묵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무형의 모든 환경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이 룻기가 그려주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람들의 응답이다.  

이것이 일상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잘 생각해 보면 룻기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신앙 방식이나 우리나 그리 차이가 없다.  즉,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너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일이 없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룻기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룻기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의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허락된 시간 속에서, 그리고 만나는 사건들을 통해, 나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그 속에 녹여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룻기처럼 사는 길이고, 그래서 룻기의 사람들처럼 일상의 신앙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룻기가 소개하는 하나님이며, 사람들의 모습이다.   


만남의 기준


이제 무대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하나님은 IS 백성들 가운데 보아스를 주연(主演) 가운데 하나로 택하신다.  보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룻과 결혼하라는 그런 말을 듣고 2막에 등장하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가 룻기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갑작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보아스와 룻을 이스라엘 무대 위에 올려 놓으신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너무 이질적이다.  과연 이 두 사람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

사실 룻의 케스팅은 역설적으로 IS에게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 때에 IS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Jdgs. 21:25)고 평가받았던 어두운 시대였다.  모두가 다 사사기의 어두운 영적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 여인 룻은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어간다.  외로웠을 것이다.  힘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에 대한 확신이 룻에게는 있었다.  하나님은 그 룻을 지금 절망의 세대 이스라엘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8-10절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8절)

룻은 이삭줍기를 해야 할 가난한 이방 사람이다.  그런데 보아스만이 룻이라는 감추어진 보배를 알아본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보아스는 달랐다.  그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인생을 바라본다.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 룻을 살펴보지 않았다.  

세속적인 기준, 혹은 방법들을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먼저, 상대방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익을 보려고 한다.  준 만큼 받아야 한다(Give & Take)는 식이다.  하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희생도, 헌신도, 수고도 찾아 볼 수 없다.  철저한 실리(實利)의 공식이 있을 뿐이다 : "손해 볼 장사를 왜 해!"

또한, 현재의 모습이 그 기준이 된다.  얼마나 많이 배웠고, 부모 배경이 어떻고, 그러니까 재산-직장-외모-출신(고향) 따위의 외적 요인을 먼저 고려한다.  성품이나 잠재력, 다시 말하면 내적 자질에서 비롯된 미래의 가능성은 일단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마치 도박과 같다.  몇 가지 조건들이 서로 맞아 떨어지면 계산기를 두드린다.  막연한 기대와 가능성을 품고 "잘 될거야! 잘 되어야 해!" 정도로 시작한다.  

그러니 잘 될리가 없다.  만약 보아스가 이러한 기준을 가진 현대인이었다면 그는 결코 룻에게 말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왜 이렇게 룻과 대화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그 이유는 다음 11절에서 밝혀진다.


보아스 스타트


하나님의 작품이 무르익어 간다.  
보아스는 마치 신약의 탕자의 아버지처럼 룻을 맞이한다.  룻은 '이삭줍기'로 연명해야 할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Lev. 19:9-10, 23:22, cf, Deut. 24:19-22).  

그런데 이미 소천한 시아버지의 친척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다.  하나님은 룻의 발걸음 보다 한 걸음 더 앞서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룻기의 역사는 이미 서서히 반전(反轉)되기 시작했다.  

11-13절

보아스란 이름은 '민첩', '재빠름'이라는 뜻이다.  
보아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괄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자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일에 재빨랐다.  그의 이웃 사랑은 10년이 지나도록 한결같았던 모양이다(2:20).  그것은 부자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의 부(富)는 단순히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았다.  그는 주신 부를 적절하게 쓸 줄 알았던 영육(靈肉)이 모두 부요한 사람이다.  보아스는 이처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가난한 이웃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보아스에게 가능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보아스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을 십자가로 품으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보는 높이까지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축복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고, 동시에 이웃을 보았다.  
보아스는 룻을 매우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럼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처럼 사람을 볼 수 있는가?  그가 11-12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네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렀느니라."(11절)  

사실 보아스는 아버지 살몬과 그의 어머니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안다- 기생 라합(Rahab)의 사이에서 태어났다(Matt. 1:5).  창녀인 라합은 IS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땅인 여리고 성에 거주했으며, 여호수아의 두 정탐꾼을 숨겨 준 댓가로 IS의 보호를 받았다(Josh. 2:1- ).  그녀 또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본다.  보아스는 이미 어머니에게서 탁월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여리고 전투에서 살아 남은 라합의 신앙은 아들 보아스에게 그대로 이어졌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머니 모니카의 신앙이 성자 어거스틴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룻이 모압이라는 이방의 여인이라는 것보다, 목숨 걸고 IS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던 룻의 신앙에서 자기 어머니 라합의 신앙을 보았을 것이다.  룻에게서 어머니를 보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다.  

자기 어머니가 IS과 아버지 살몬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서, 그리하여 자신이 오늘 존재하게 된 것처럼 자신의 가까운 친척 나오미의 뒤를 따라 아무 것도 보장이 없는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룻 또한 자기 어머니 라합처럼 보호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보아스는 자신의 아버지 살몬이 라합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자신 또한 이방인 룻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차원 높은 신앙의 소유자였다.  보아스에게는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Gal. 3:28)라고 하는 복음이 있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는 능력이다.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12절)  

이처럼 철저히 은총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아니 일원이 되려고 처벅처벅 빈 손 들고 회개하며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마치 룻기 1장의 룻처럼 교회(그리스도) 밖에 있던 어떤 사람이 룻기 2장의 룻처럼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떻게 그를 맞이해야 할까요?  오늘 무대는 이러한 통찰을 우리에게 갖도록 한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 대해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정작 교회의 도움이 필요해서 곡식 베는 밭에 찾아 온 이삭줍는 사람들에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대해서는 안색하거나 단호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본다.  
보아스를 보라.  그는 룻을 멸시하지 않았다.  보아스는 룻을 지역감정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용납하고 있다.  


축복의 통로


나는 강도 만난 이웃을 지나친 레위인인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인가?  그런데 현대인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 아무도 사마리아인이 되려고는 하지 않고, 사마리아인을 만나기만을 소원한다는데 있다.  

14-16절

   "식사할 때에."(14절)

그러나 보아스를 보라.  섬세하고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보아스의 모습은 단순한 동정 그 이상이었다.  왜냐?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14절)에서처럼 룻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식사의 교제 안으로 과감하게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 점은 더욱 확실하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Matt. 25:40)   

한편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표현을 살펴보면 우리는 보아스의 룻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높고, 깊은 차원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언젠가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Matt. 15:21-28)에서 그녀를 향하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 = 개'라는 식으로 말씀한 완벽한 경멸의 언어였다.  어떻든 이방인은 상종하는 것 자체가 금기(禁忌)시 된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을 '식탁공동체' 안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아스는 OT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그림자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아름다운 만남을 원하는가?   
보아스만 만나려 하지 말고 룻처럼 준비하라!  룻만 만나려 하지 말고 보아스처럼 준비하라!  그러나 사랑하는 것만큼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많은 경우에 "어떤 배우자를 원하십니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 "다른 것 다 보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자수하여 광명 찾자.  아니죠?  믿음은 기본이고,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추가시키죠?  아닌가요?  사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많이 소개했는데 아니더라구요.  그래 이제는 속지 않아요.  우리의 관심은 보아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아스로 세워가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니까 룻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아스를 보라.  그리고 룻을 보라.  이들은 겉 포장지를 보지 않았다.  이들은 속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큼 상대방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도 이런 사랑이 주님과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3. 사랑교향곡(룻 2:8-16(b))

축복의 통로

보아스와 룻은 각각 상대방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일구어 낸다.  
보아스는 룻을 받아 들인다.  인간(세속)적인 사랑이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방인이요, 가난한 거지요, 어떠하든 이미 결혼에 실패한 과부인 룻을 말이다.  이것은 보아스의 깊이다.  하나님이 그 중심에 서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보아스는 룻을 주목한다(11-12).  
우리는 여기서 먼저 보아스의 높은 신앙을 엿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올바른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을 통해 룻과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까지를 내다 보았다.  따라서 저급한 사랑이 비집고 들어올 일말의 틈도 없었다.  보아스는 철저한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였다.  그렇다.  그는 멋진 사나이다.  인간 룻만이 아닌, 그녀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후자를 더 비중 있게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11a, 1:16-18, 2:2)  

룻은 효성(孝誠)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이었으나 -우리도 이방인이었다- 결혼 이후 시모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괄시하지 않았다.  그렇다.  룻은 이미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셨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6)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Ep. 6:1-3).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11b)  

우리는 룻에게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발견한다(Gen. 12:1- ).  하나님은 룻을 이처럼 변화시키셨고, 그녀를 통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셨다.  룻은 시모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왔다(vs. 19,22)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7)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앞서 보아스의 보호가 보이지 않게, 또한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8-9절)  

이는 성(性)적인 순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렇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고도 순결한 하나님의 작품이 무르익어 간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하여 룻을 축복하셨고, 룻을 통하여 보아스를 사랑하셨다.


만남은 점진적이다.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을 통하여 구속사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들은 잘 박힌 보석과 같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Matt. 1:1)에 우뚝 서 있다.
 
아브라함 → 이삭 → IS → 유다+다말 → 베레스 … 살몬+라합 → 보아스+룻 → 오벳 → 이새 → 다윗 → 그리스도(1 Chr. 1:1-2:15)

완성품으로의 만남이 아니었다.  한사람은 보리를 베고, 또 한사람은 이삭을 줍는 그런 상태에서부터 시작된 만남이었다.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주례하신 것도 아니다.  서서히,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 앞선 그런 '3류 소설'과 같은 사랑놀이가 아니었다.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핑크빛 환상을 좇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평범했고, 또한 정직했다.  이 두 사람은 그 중심에 하나님을 세웠다.  마치 삼각형의 양 꼭지점(보아스 對 룻)처럼 위의 중심점(하나님)을 향해 절묘하게 서 있다.  그들은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이것이 삼각형의 사랑 원리이다.

사실 보아스에게 있어서 룻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것이었다.  개의 이빨을 빼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개를 시장하시게(?) 만들어 놓고서 뜨거운 감자(무우)를 찬물에 잠깐 담근 후에 그것을 던져 준다.  그러면 마치 이빨이 보석처럼 무우에 순서대로 박혀 있단다.  그랬다.  보아스에게 있어서 룻은 혹시 잘못 건드렸다가는 벌집을 건드리는 격이 되는 그런 폭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사랑을 무기로, 다시 말하면 이 땅의 어설픈 풋사랑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각각 상대방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일구어 낸다.  보아스는 룻을 받아들인다.  이방인이요, 가난한 거지요, 어떠하든 이미 젊은 나이에 가정을 잃어버린 과부인 룻을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의 영적 수준(건강)을 본다.  그는 포장지를 보지 않았다.  내용을 본 것이다.  
-오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포장지를 보고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만남이라는 승부수를 던지기 때문에, 남-녀의 만남 그 자체가 이미 그 속에 불행의 씨앗을 품고 출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룻기 스케치

마침내 하나님의 작품이 그 형체를 들어내기 시작한다.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삶의 양식을 따라 살아 왔던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안에서 조우한다.  한사람은 추수하는 밭의 주인으로, 또 다른 한사람은 단 사이에서 이삭(부스러기)을 줍는 관계에서 말이다.  이 구도(構圖)가 처음에는 불균형이었다.  어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완전히 한 쪽으로 기우는 -보아스가 손해 보는 만남(교제)이다- 관계였다.  이것은 세상이 언제나 실수하는 부분이다.  


천생연분(天生緣分)

이 두 사람의 중매를 친히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주례(主禮)도 역시!  관객은 IS 백성들이다.  사실 교회에서 곱게 자란 청년들은 교제의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너무 순진하다 보니까 전혀 아닌 사람과 기를 쓰고 교제하겠다는 고집을 부리기가 일수다.  조금만 잘 해 주면 그저 "뿅 간다."  생각해 보라.  한 번 무엇엔가 씌우게 되면 어떻게 되죠?  '막가는 인생'처럼 "내가 좋은데 뭔 말이냐?"는 식으로 차고 나온다.
또한 세속적인 기준에서 소위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려는 욕심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좀 더 좋은 사람"을 선택하려는 그릇된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다가는 '노'(老)총각-처녀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게 될 뿐이다.  요즘 이것이 각 교회마다 문제꺼리가 되었다.

이제 사랑 좀 합시다.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 있으면 사랑이 보인다.  보아스만 만나려 하지 말고 룻처럼 준비하라!  룻만 만나려 하지 말고 보아스처럼 준비하라!  그러나 사랑하는 것만큼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많은 경우에 "어떤 배우자를 원하십니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 "다른 것 다 보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자수하여 광명 찾자.  아니죠?  믿음은 기본이고,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추가시키죠?  아닌가요?


부스러기 묵상

사랑의 그릇을 키우라!
쫀쫀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의 모습만을 보지 말고, 미래의 모습까지를 바라 보라!  이것은 말이 쉽지 대단히 어렵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4. 룻 스타트(룻 2:8-16(c))

축복의 통로


룻은 IS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인 셈이다.  
우리는 룻에게서 바울의 영적 통찰을 발견한다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Rom. 10:14-15,17)

그렇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모압에 선교사로 파송하셨다.  룻은 나오미에게서 하나님을 알았고, 신앙을 배웠다.  그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10년동안 단 한사람을 구원시킨다.  이는 노아와 비교해 볼 때 대단한 것이다.  노아는 120년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8명의 가족 외에는 한사람도 구원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라.  온 모압은 룻을 비웃었을 것이다.  마치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행복과 모든 것을 버리고 고생의 인생길을 자원해서 선택한 룻을 경멸했을 것이며, 옹기종기 모일 때마다 룻은 입가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룻의 편이었다.  소돕과 고모라가 그랬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사위들은 소돔의 멸망을 농담처럼 여겼다.  역사는 사위들의 편이 아니었던 것처럼 결코 시어머니를 버리고 모압에 남은 오르바 편이 아니었다.
 

룻 스타트


룻의 축복이 점점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나오미를 따라 IS 공동체 안으로 편입될 때부터 예고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컨버스에 스케치를 시작할 때는 몇 개의 선과 점이 불규칙적으로 나열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스케치에 이어서 서서히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룻에게 이처럼 보응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 안으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Rom. 8:30).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품으로 향하는 결단의 순종이다.  아무나 이러한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믿는 자만이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다.  결단의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여는 열쇄와 같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Jen. 12:1- ).  생각해 보자.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리려 3일 길을 가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자(Gen. 22:1-14).  아브라함이 한 것은 끝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수풀에 한 숫양을 준비하셨다(vs. 13).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둔 숫양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 숫양이 있는 곳까지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숫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의 믿음, 바로 그것이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러했다(Luke. 5:1-11) :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vs. 11)  또한 바울이 그러했다(Acts. 20:24)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2 Tim. 4:8)  그 누구보다 또한 예수님이 그러했다(Phil. 2:5-11, Jn. 1:1-14).

아직 나에게 룻과 같은 축복이 없는 것은 먼저 그녀와 같은 결단(순종)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복이 없다고 아우성 하지 말고, 순종(결단)의 믿음 없음에 눈물 흘리며 회개의 탄식을 해야 한다.  이 둘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룻의 프로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고향 모압과 그 문화, 부모, 친척, 삶의 양식, 등등-- 나모미와 그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자신의 삶을 U-tern 했다.  이러한 결단이 옳은 (선한, 정당한) 결정이라고 보아야 할 그 어떤 미래의 보장이 확실치 않았다.  시계(視界)가 완전 제로(zero)였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미래가 불확실하면 할수록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겼다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1 Pet. 5:7)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 없는 모든 것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택했다.  이것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아무 장래의 보장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빈 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찬송가 188장 3절),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축복으로 응답하셨다.  오직 하나님, 오직 믿음, 오직 시모 나오미의 편에 설 때부터 이것은 충분히 예견되는 결코 역류할 수 없는 거대한 축복의 물줄기였다.

비록 룻의 결단은 훗날 하나님의 큰 은총으로 보상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복된 미래가 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미래를 조건으로 축복을 도적질(도박)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이 믿음이 서는 자리이다.  무명시절 다윗이 그러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택하셨으나, 그는 묵묵히 준비했고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1 Sam. 16:1- ).

룻은 이방인이었다(vs. 10).  그렇다면 그녀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룻의 한계다.  그녀는 은총 밖, 그리스도 밖, 구원 밖에 있었던 소망없는 사람이었다(Ep. 2:1).  인생은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됨,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란 결단코 없다.  그렇다면 룻이 구원받은 것은 그녀의 선행, 즉 시모를 봉양한 효도의 반대급부(or 논공행상)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그녀는 이때 고집 부리지 않았다.  동양식 사고방식에서 볼 때 이때는 자존심이 상한 때요, 창피한 때다.  그래서 흔히들 다시 일어선 다음에, 그럴 듯 하게, 보란 듯이 입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룻과 같은 형편에 있을 때에는 예수님 식으로 표현하면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 할 일 많아 지금은 아니올시다!"(Luke. 14:20)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장가 가고, 소도 사고" 했는데 소식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인생의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바로 그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Eccl. 12:1).

룻은 전 삶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보다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자세로 자신을 둘러싼 한계상황들을 돌파해 나아갔다.  하나님은 바로 그 룻에게 보아스를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은 룻의 고백(Ruth. 1:16-17)을 보아스의 화답(Ruth. 2:12)으로 하모니를 이루셨다.  보아스는 룻에게 있어 '여호와 이레'였다(Gen. 22:14).  아브라함이 3일 길을 걸어 가서 여호와 이레를 만났던 것처럼, 룻은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고 거기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보아스'를 만난다.  이것은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다.

보아스와 룻은 어느 날 갑자기 <가면무도회>에서 첫 눈에 반한 그런 저급한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  축복은 결코 우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났더니 밤 사이에 유명해 지는 것, 그런 것은 없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Ps. 126:5-6).  이것은 오늘까지 진리이다.
보아스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룻으로 준비하라.  마찬가지로 룻을 만나고 싶은가?  예, 그렇다면 먼저 보아스가 되라!  룻이 아닌데 보아스를 만날 수 없고, 보아스가 아닌데 룻을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우연은 결코 없다.

이제 룻이 만났던 외적인 요인으로 일어났던, 아니 만났던 고통의 창(그늘)이 서서히 아침 안개처럼 걷힌다.  아니다.  보다 깊게 생각해 본다면, 외적인 환경이 --가난, 고향에의 향수, 낮선 땅, 외로움, 혈혈단신, 잃어버린 가정, 등등-- 룻을 결단코 넘어뜨리지 못하자 --이것이 넘어야 할 영적 고비(분수령)다-- 그 안개 뒤로 태양이 힘차게 떠 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본문의 밑그림이다.  


부스러기 묵상

작품 no. 1
우리는 룻에게서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을 따라 결단하며 헌신할 때 하나님이 시작하사 이루(완성하)시는 작품을 보게 된다.  룻은 비록 오늘은 고달프고, 가난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외롭고, 험했을지라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Heb. 11:1)라는 말씀을 따라 살았다.  

그녀는 오늘 때문에 내일을 버리지 않았다.  어제가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된다.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없다.  처참하게 짓뭉개졌던 성 금요일의 십자가 죽음의 어두움은 안식 후 첫날의 찬란한 부활의 아침으로 밝아 왔다.  이것이 기독교다.  영광의 부활의 아침은 죽음의 골고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룻은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고통에도 뜻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통이라는 장애물 앞에 넘어진다.  여기까지는 성도나 불신자나 비슷하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일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고통(시련)은 또 하나의 기회다.  이것만 넘어서면 축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룻는 Gal. 6:7-10절 말씀의 구약적 성취이다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5. 나오미 스타트(룻 2:17-23)

전환점


본문은 나오미의 일생에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을 소개하고 있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를 산 여인 나오미!  모압으로 도피한(1:1-5) 구약성경의 탕자다.  그런 그녀가 10년만에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한다(1:6-22).  마침내 회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일은 보아스를 만나는 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2:1- ).

나오미의 생애를 보면 결정적인 사람 둘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본다.  며느리 룻이다.  그리고 다른 한사람은 아들 같은 사위, 사위 같은 아들 보아스다.  며느리와 결혼하게 되니까, 분명 보아스는 아들이다.  그런데 나오미는 보아스를 낳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아들이 아니다.  혈통으로는 아들이 아닌데 아들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혈통적 아들이 아니다.  순전히 은혜다.  그러면 보아스와 나오미 모두에게 이러한 만남은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보아스는 누구인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입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압(세상)이 아니라 베들레헴(교회)이라는 은총의 언덕에 선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베푸신다.  

그러나 이것은 며느리 룻의 이삭줍기라는 헌신에서부터 비롯된다.  룻은 '축복의 통로'였다.  당신은 룻처럼 '축복의 통로'인가?  그렇다면 나오미가 보아스를 통한 은총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며느리 룻 때문이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  룻은 오늘도 묵묵히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을 믿으며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를 희망으로 일구어간다.

바로 이점이 비록 고아와 과부와 객의 몫인 이삭줍기를 기쁨으로 감당하게 한 기초였다.  그녀는 가장 낮아졌음에도 절망, 자포자기, 비관, 불평, 의무감, 한숨쉬는 그런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왜냐?  바울의 신앙고백에서 도움을 받아 보자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1-14)   


룻의 효(孝)


룻기와 동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사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17:13)

배경을 이야기하면 길고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에는 감히 하나님과도 거래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한다.  바로 사사기와 룻기의 시대가 그러하다.  기복적이며, 타산적인, 그리고 이기적인 시대였다.  

그런데 룻은 그런 삶을 처음부터 포기한다.  그리고 이삭줍기를 하면서 가난하게 살지라도 바른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추수 벌판으로 나아간다.   

17-18절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아주 작은, 마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와 같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보리 한 에바'로부터 시작된다.  한 20㎏ 남짓한 보리 자루였다.  하나님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조그마한 것으로부터 대단한 이야기를 전개해 가신다.  


(1) "그것을 가지고 … 그 주은 것을 보이고."(18a)  
하나님은 룻의 손에 들려진 볼품 없는 '보리 한 에바'를 통해 받으실 영광의 몫을 서서히 들어내시기 시작하신다.  아무도 그녀의 손에 들려진 조그맣고 초라한 '그것'을 통해 한 영혼이 다시금 소생케 되는 일을 위해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줄 알았으랴!  룻은 "그것을 가지고"(18a) 시모 나오미에게로 간다.  룻이 시모에게 가지고 간 것은 보리 한 에바였다.  룻은 최선을 다했다.  이삭줍기로 연명해야 할 밑바닥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시모 나오미 곁에 있었다.  


(2) "그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18b)
룻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기 위해 시모에게 은혜의 분깃을 드린다.  종종 이러한 헌신은 놀라운 역사의 시작이 된다.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각박하다고 생각했던 베들레헴, 자신의 생각처럼 이기적일 것이라 믿었던 베들레헴에도 이처럼 이웃을 생각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나오미에게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 사람의 변함없는 효도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지 기대가 된다.


나오미 스타트


나오미의 변화는 점짐적이다.
그녀가 모압을 떠나 올 때만해도, 그리고 다시 베들레헴에 정착할 때만해도 그녀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룻이 가지고 간 '그것'을 통해 시작된다.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19)  나오미의 변화된 심령과 믿음의 고백을 보라!  생을 비관하고, 슬픔에 잠겨서(1:20-21) 쓰러져가던 한 여인의 회생은 무엇인가 깊은 메시지가 그 속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룻은 나모미의 영혼을 깨어나게 한다.

하나님은 생명을 다 해 헌신하며, 자신의 모든 수고의 댓가를 아낌없이 시모에게 주는 한그루 나무와도 같은 룻을 통해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소생시키신다.

19-23절

(1) "여호와의 복이 그(보아스)에게 있기를 원하노라."(20a)  
먼저 나오미의 변화를 보자.  나오미가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향할 때 그녀의 입술에 있었던 고백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나를 '마라'라 칭하라! 전능자가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21a)
   "여호와께서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괴롭게 하셨거늘."(1:21b)

그런데 보라.  이제 그녀의 입술에 "복이 있기를"(19), 그것도 "여호와의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20)는 영적인 깨어남이 발견되어 진다.  놀라운 변화다.  우리는 앞에서 이러한 나오미의 변화의 원동력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예,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며느리 룻의 '그것'에서부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룻의 헌신과 사랑을 사용하셨다.  그렇다.  룻은 시모 나오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서도록 쓰임 받는 '축복의 통로'인 것이다.  

그녀는 이제 영적으로 회복되었다.  잃었던 신앙을 다시 찾은 것이다.  어디까지 성장했는가?  예, 하나님의 복을 말하는 자리까지다.  인생의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드디어 나오미는 깨닫고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좀 복을 만들어 보겠다고 -아니, 만들 수 있다고- 몸부림치던 모압에서의 10년이 얼마나 불신앙이며, 죄악이었는가를 지금 나오미는 보고 있다.  여기까지 그녀의 영혼이 잘 된 것이다(요삼1:2).  나오미의 이어지는 고백을 보라.


(2) "그가 생존한 자나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b).  
원문에 보면, 여기 '그'는 하나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번역본 가운데 KJV, NASB, 현대인을 위한 성경은 이 해석을 취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압으로 이사를 가기 전부터 모압 기간을 포함한 지금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변함없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은 나오미로 하여금 드디어 신앙의 재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오미가 어디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확장시키고 있나요?  지난 세월까지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은혜 받은 자의 특징은 주신 복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점이다.  동일한 면을 누가복음에서 만날 수 있다.  5장으로 가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8절)

이처럼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부스러기에서도, 한 에바의 보리자루에서도 은혜를 본다.  베드로의 일생을 놓고 볼 때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된 고기는 부스러기였다.  나오미 역시 보리자루와 먹다 남은 음식을 보고 "수고 했구나. 내일은 또 얼마나 주워올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까지 나아간다.  베드로가 죄인임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3) 보아스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다(20b).
→ 다음 시간에 하자.  한가지 생각하자면, 율법을 버렸던 자리에서 율법을 사모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말씀을 자신의 문제 해결의 근본으로 삼기 시작한다.


(4)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하라(22-23)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엇인가 무르익어 가는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하루하루 이삭줍기와 자부 룻을 기다리는 두 모녀였지만 그들에게는 꿈(희망)이 있었다.  보아스와 그의 밭은 사람들에게 '희망'이다.  이처럼 당신은 만나기만 하면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인가?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23)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있다.  고난도 함께, 축복(영광)도 함께!  이것이 가정과 같은 교회며, 교회같은 가정의 모습이다.  그녀들은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참담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이 비 그치면 저 선 너머로 찬란하게 드러나는 무지개, 바로 이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본다.

룻은 서서히 회복되어져가는 시모 나오미의 신앙을 보며 함께 한다.  또한 시모 나오미는 룻을 통해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회복을 꿈꾼다.  되가는 가정이다.  되가는 교회다.  하나님이 이들을 깨어나게 하신다.  생각해 보자.  아들이 죽으면 며느리는 어떻게 되죠?  그런데 그 며느리가 새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또 그 며느리는 더더욱 어떻게 되죠?  그런데 룻은 계속해서 시모와 함께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부스러기 묵상

이 사람을 보라!  
아무 것도 가진 건 없어도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축복을 아무 대가 없이 그저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면 룻을 만날 수 있을까, 나에게도 보아스 같은 사람이 나타났음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보라.  이 사람들을 만나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이 사람이 되기 위해 값진 댓가를 지불하라!  백마(白馬)를 탄 기사를 기다리지 말고 자신을 준비하라.

   시어머니의 신앙이 회복되는 것을 위해 쓰임 받는 며느리가 되십시오!
   자녀들의 일생을 영적으로 짚어 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십시오!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가 되십시오!  

세상은 보아스, 룻과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룻이기 때문에 보아스를 만났다.  그러니까 보아스를 만나서 룻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보아스이기 때문에 룻을 만난다.  자, 이처럼 영적으로 회복되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계속해서 3막을 기대해 보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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