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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룻기

[스크랩]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2:01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룻과 엘리멜렉

룻과 나오미

룻과 보아스

룻과 다윗

타락과 회개

구원(1)

구원(2)

회복과 축복

1장

2장

3장

4장


한 밤의 청혼 식장(룻 3:1-9)

더 이상 방황은 없다!  
1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의 영적 방황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 "방황하는 신앙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마침내 변화된 사람만이 고백하고, 느끼고, 맛보며 살아갈 수 있는 영적 세계가 나오미에게 힘있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2:19b,20a)  얼마나 감사한가!  사람은 본시 입술의 열매대로 산다던가?  그랬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실패를 비관하는 나오미가 아니다(1:13c, 20-21).  과거로부터의 출애굽(Exodus)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사실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그대로다.  진정한 변화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변화는 내부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자신이 변하니까 세상이 달리 보인다.  문제는 자신이다.  이 모든 일이 룻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지난 2장이 주는 교훈이다.  룻은 축복의 통로다.  그녀는 환경에 제약받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이삭줍기에 연연할 만큼 가난과 싸우며, 또한 아직은 실의(失意)에서 회복되지 못한 시모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외적 요소들이 룻의 '영적 기상도'를 흐리게 만들지 못했다.

나오미의 꿈이 시작되다.

먼저 살펴볼 것은, 나오미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던 적이 있다.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이민을 갈 때가 그랬다.  그러나 그 꿈은, 나오미의 '모노드라마'는 모압에서 상영되다가 거기서 그만 문을 닫고 말았다.  그녀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실패의 두려움 뿐이다.  다시 일어서기에는 너무 지쳐 있다.  다시 일어나 돌아왔을 때 베들레헴의 관객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빈정거렸다.  이쯤이면 그녀의 가치는 그것으로 끝난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새 꿈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것이 서두(序頭)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3장의 나오미는 어떻게 1장과 다른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이 부분을 좀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1-4절

추수는 끝났다.  남은 것은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는 일이다.  나오미는 추수를 마치기까지 변함없이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를 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보리를 까부는 일은 어쩌면 첫 번째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가 아닌가.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 모두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조용하고 은밀한 시간과 장소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룻을 부른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1) 나오미의 '고엘' 승부가 시작된다.

룻은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1:22) 왔고,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2:23) 지낸 걸로 보아 최소 3개월 정도의 추수기 동안 더 많은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낸 셈이다.  이 기간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이삭줍기를 위해 집을 나서는 며느리를 아마도 나오미는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말은 나오미 역시 그 시간만큼 홀로 보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고백(1-4절)은 지난 3개월 이상의 긴 묵상과 회상에 따른 후속 조치에 해당한다.  나오미의 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생각해 보면 지난 10년, 모든 것을 다 잃은 줄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나님은 룻을 주셨다.  드디어 나오미는 룻을 인하여 뛰기 시작하는 가슴, 내일에 대한 소망, 무엇인가 룻에게 시작되어야 할 소중한 것, 그것들을 꿈꾸며 이삭줍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룻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나오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오미는 긴긴 하루하루를 홀로 지내면서 룻을 위한 아름다운 계획을 여러모로 생각했을 것이다.
 
  -왜 고향으로 돌아온 때가 추수 때였을까?(1:22)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밭들 가운데 친족 보아스의 밭이란 말인가?(2:3- )  
  -룻의 과거를 잘 아는 보아스가(2:11-12) 그녀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는 이유는 무엇일까?(2:14-16,21)
  -그것도 기업을 물을 자격이 있는 미혼(未婚)의 나이 많은 청년이 아닌가?(2:20b)

바로 이 부분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보아스와 룻은 오직 말씀, 그러니까 '기업 무를 자'(고엘, 구속자, redeemer)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안식'(1절)을 소망하고 있다.  룻기에는 고엘과 관련하여 수혼제도(신25:5-6)와 구속제도(레25:23-25)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나오미와 룻은 오직 말씀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구했고, 두드렸고, 찾았다.  이제 후로는 말씀만을 붙들고 살기로 작정한다.  오직 희망을 말씀에서 캐내기를 열망하는 나오미의 변화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자신이 말씀의 빛에 비추어 세상을 보니까 이미 보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영혼이 잘 된 건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룻에게 그처럼 은혜를 베풀리 만무하다.  나오미는 이걸 깨닫는다.  말씀의 빛이 마침내 나오미의 생각과 마음과 심령을 바꾸어 놓았다.

사실 그녀는 이미 지난 10년 전에 말씀을 우습게 알았던 적이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말씀을 거부하는 자에게 약속된 그 말씀대로 철저하게 취급 당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고통과 좌절, 그리고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베들레헴으로 귀향한 지난 3개월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룻을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깨닫고부터다.  이것은 들어나지 않은 룻이야기의 결정적인 전환 부분이다.  나오미는 이를 말씀 안에서 깨닫고 발견하였다.

마침내 나오미는 룻에게 말씀을 근거로 한 인생의 승부를 요청하였고, 룻 역시 시모 나오미와의 말씀 나눔에서 이를 결단하기에 이른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시모의 말에 순종하는 효도를 담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요 희망이다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5절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나오미의 말에 대한 룻의 응답이다.  룻는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한다.  참 복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룻이 이렇게 할 수 있기까지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을 나오미에게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모압은 그것을 룻에게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에게 우리 주님의 구원과 은총이 무엇인가를 알게 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던 것이다(1:16-17).  지금 그 거룩한 빚을 룻은 나오미에게 갚고 있고, 또한 나노미는 룻에게 갚고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게 본문 속에 흐르고 있는 맥(脈)이다.

한 밤의 청혼식이 시작된다.

이제 무대의 장면은 타장마당으로 바뀐다.  보아스는 노적가리에 곁에 누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참 행복한 보아스를 보라.  급박한 나오미와 룻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여유와 웃음이 있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이다.  그의 노래를 들어 보라 :    

   행복하여라!
   수 없는 바람과 가뭄, 그리고 뜨거운 태양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빼앗지 못했구나.
   감사하여라!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받으소서!
   주여, 타작마당은 당신의 것이나이다.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다.  때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넘치게 부어 주신다.  본문에서 보아스가 맛본 타작마당의 밤은 이와 같다.  그는 보이는 노적가리를 통해 만족해하며 기뻐하지만, 바로 그 뒤에 예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작품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 행복과 기쁨은 또 하나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리요.
이제 기쁨과 환희의 시간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떠들썩하던 타작마당은 잠시 고요한 정적이 감돈다.  잠시 전과 대조되는 깊어 가는 밤은 또 다른 무엇인가가 시작될 것이다.  노적가리가 만들어 준 기쁨이 하나의 시작이라면, 이제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될 제3막은 꺼지지 않은 불이 되어 보아스의 심령에 타오를 것이다.  

6절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1) 그런데 청혼이 불가능한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녀는 다음의 이유만으로도 보아스 앞에 나아가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약점(disadvantage)들을 가지고 있었다.  청혼 이후에 룻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전무(全無)하다.

그녀는 이방 모압 여인이다.  모세의 법대로 하면 모압은 IS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Deut. 23:3).  이러한 금기를 깨면서까지, 그것도 정상적이게 보이지 않는 밤에, 더더욱 홀로 잠을 자고 있는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룻은 세속적인 동기에서 -신분 상승, 재산, 쾌락 등-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면 자칫 잘못하면 음란한 여인으로 고발되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Lev. 20:10).

7절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한계와 위험을 무릅쓰고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룻은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든 비난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룻은 배수진(背水陣)을 친다.  마치 홍해 앞의 모세처럼(출14:13-14), 에스더처럼(에4:16), 예수님 앞에서 필사적으로 구원을 간청했던 무수한 병자들처럼(마8:2,8, 9:20-33, 15:27) 오직 하나님의 처분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1) 시모의 명령대로 따른다는 것은(3:1-5) 대단한 결단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룻은 믿음 안으로 들어온 이후 두 번째 결단을 해야 할 때를 맞이했다.  

첫째는, 본토-친척-아비 집인 이방의 땅 모압을 떠나 시모와 함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축복의 땅,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거지의 모습으로, 마치 NT의 탕자처럼 베들레헴으로 왔을 때가 바로 첫번째 결단이었다.  그녀는 신앙(믿음)을 택했다.  둘째는, 오늘 본문의 결단이다(vs. 6-9).  바로 구혼(求婚, proposal)이다.  이 구혼(청혼)이 진행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 보라(vs. 1-5 → 6-9).  룻으로서는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시모 나오미의 명대로 다(all) 순종한다.  

(2) 마침내 가슴 뛰는 급박한 위기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무엇인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남녀가, 그것도 밤에, 더더욱 한 이불 속에서, '지금'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호흡을 다시 한번 가다듬는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어떻게 '그 다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것인가를 숨죽이고 지켜본다.  

두 사람은 지금 가장 큰 '시험' 앞에 서 있다.  생각해 보라.  아무도 없다.  단 둘 밖에는. 무엇인들 못할 손가?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환경을 지배했다.  이들은 은밀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밝아오는 아침을 희망과 소망으로 맞이하게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 밤인가?

사랑에는 밤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물(生物)에 그 눈이 어두워져서 그만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버리고 만다.  이처럼 죄악의 밤은 종종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다윗은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찾아온 밧세바라는 시험에 넘어진다.  그는 은밀하게 범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밝히셨다.

사랑에는 아침이 있다.  사랑에는 '미래'가 담겨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창세기로 간다.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Gen. 39:10a)  요셉은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vs. 11-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분명 오늘 때문에 내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vs. 9b)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룻과 보아스는 이 시험을 어떻게 이겼는가?  
이들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냄비 사랑'이 아니라 '가마솥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사는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것에 취해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을 하나의 사랑이야기로만 이해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최소한 룻기는 솔로몬의 아가는 아니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룻기의 숨은 그림이다.

8-9절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의 '고엘' 승부

룻은 주저하지 않는다.  룻이 사용한 '옷자락'(9절)은 이미 보아스가 사용했던 '날개'(2:12)와 같은 단어다.  보아스는 룻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왔다고 말했었다.  룻은 이 말을 지금 3개월 후에 그대로 받아 보아스 당신의 '웃자락'(날개)으로 자신을 덮어주는 그런 보호받기를 원한다는 뜻의 청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어머니는 4절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으나 룻은 더 적극적으로 정면승부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이어지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이것은 오직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믿음의 선언이다(2:20).  시모 나오미의 말씀 위에 서 있는 믿음을 룻이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순종은 말씀(율법)에 명시된 기업 무를 자를 통한 가문의 보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cf, Lev. 25:25).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9b).  룻의 순종은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그녀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이끈다.  

(1) 말씀에 대한 믿음은 곧 시모 나오미에 대한 순종을 낳았다.
 
한치의 갈등도 없이 시모와 며느리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호 신뢰와, 그 말씀대로 살고야 말겠다는 깊은 신앙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전혀 상식(풍습, 관습,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모의 요청을 어떻게 룻이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이처럼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둘러싼 한계상황들 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더 깊었기 때문이다.  룻이 결혼을 둘러싼 자신의 환경을 극복했다면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는가?

(2) 룻은 시모 나오미로부터 충분한 리허설을 말씀을 따라 준비했다(3:1-5).

지금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소한 풋사랑에 목숨 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 현숙한 룻이 놓칠 리가 만무하다.  보아스 또한 언제나 그가 서 있는 곳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은 입술로만이 아닌 하나님을 앞세우는 영적 무장이 항상 그를 따랐다(2:4,11-12,20, 3:10,13).  

이 두 사람은 말씀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오늘 본문이 빛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언뜻 보면 남녀간의 사랑이야기 정도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본다면 사랑의 핵심에 하나님의 섭리와 임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그리하여 나약함과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밖에 사랑을 이해하는 그런 사람일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은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의 사랑만들기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믿음은 사랑이라는 기차가 탈선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렇듯 남녀간의 사랑은 '믿음'(신앙)이 그 기초에 자리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결과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통해 '자기만들기'에 성공해야 한다.  이와같이 믿음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기차가 레일을 탈선하는 것을 막아준다.  

결혼을 앞 둔 마혼 청년들은 룻처럼 먼저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결혼은 세속적인 여러 조건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혼합물이 아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결혼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중요시하는가를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닌 다른 부스러기들을 붙들고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혼을 시켜야 할 부모들도 시모 나오미처럼, 또한 룻처럼 무엇을 가장 우선순위로 놓고 혼인을 계획하고, 또한 이루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먼저 믿음의 등불을 준비하라.  그래야만 우선순위에 그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  

사랑은 한순간 타다 마는 장작개비가 아니다.  진실한 사랑을 원하나요?  그렇다면 기다리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에는 그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이 서 있다.  하나님 없는 사랑은 미래가 없다.  왜냐?  당장 눈앞의 달콤한 것 때문에 보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룻과 보아스는 이처럼 우리가 걱정하는 남녀 사이의 위기를 글자 그대로 하나의 걱정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선다.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그 무엇을 한 순간의 그 무엇으로 날려버릴 사랑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이 그만 공수표(空手票)로 돌아가 버리도록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은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님보다 먼저 결정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님보다 앞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님을 앞세우며, 하나님 뒤에서 행동하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며 거기에 발맞추어 걸어가는 것이다.  룻이 그랬다.  보아스가 그랬다.  나오미가 그랬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이 희미하나요?  그럼 기다려 보세요.  그리고 생각하세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세요.  그런 다음 말씀대로 움직이십시오,  그럼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룻 이야기 제3막 1장이 주는 교훈이다.

자, 이제 룻의 청혼은 끝났다.  공이 보아스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어떻게 룻의 청혼(求婚, proposal)을 이어갈 것인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의 앞길을 섭리하실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자.

룻 3:9-13 | 한 밤의 약혼식장

룻은 이름 없는 들꽃처럼 피다가 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려면 하나의 전제(前提)가 필요하다.  만약 모압에 그대로 남아 있었거나, 아니면 이삭줍기를 하는 들판에서 피어 버렸다면 말이다.  어두운 들판,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둘만의 만남, 서로 마음이 오고가는 사이, 이 정도면 기회이자 위기의 순간이 동시상영되고 있다.  

일찍 핀 꽃이 일찍 진다.


그러나 보라.  룻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룻이라는 꽃이 노적가리 곁에서 피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지고 말았을 것이다.  타작이 끝나고 아침이 밝으면 하루 밤 사이에 피었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그만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모압에서 피다 지는 꽃이나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룻에게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절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작마당에서 또 하나의 시작을 감행한다.  그것은 결단이요, 도전이요, 하나의 승부수다.  

마치 동족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b) 결심했던 에스더의 심정으로 타작마당으로 나아간 것이다.  말씀만이 희망이었다.  룻은 타작마당 이후의 자신의 전부를 철저하게 보아스를 통해 이루어질 말씀에 맡겨 버린다 : "당신은 기업 무를 자입니다!"

네가 누구뇨?

이미 제3막이 시작되었다.
과연 룻과 보아스의 은밀한 만남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룻은 지금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익숙한 카피(copy)를 생각하게 한다.

9절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자신의 이불 속에 들어와 함께 잠을 자고 있는 그 순간에도 -룻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자신의 무게 중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 "네가 누구뇨?"  그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도 '너'를 본다.  보아스는 자기 방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비열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 이 사건을 약용하지 않았다.  룻을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불리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부도덕한 여인이라고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어야만 하는 그런 생사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룻이다.  그런 그녀에게 보아스는 "네가 누구뇨"라고 묻는다.

때로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부르실 때 쓰시는 표현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한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그것은 일명 '야곱의 씨름'이라 부르는 장면이다(창32:22-32).  본문과 창세기의 장면은 서로 유사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구조 비교 - 야곱 vs. 룻

       창세기 32장                                룻기 3장
 *밤에(22)                                   *밤중에(8)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9)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   
 *네 이름이 무엇이냐?(27)             *네가 누구뇨?(9a)
 *야곱이니이다(27)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9)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생사를 건 만남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무엇인가?  주님은 지금도 이처럼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물으신다 : "네가 누구뇨?"  도대체 나는 누군가?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는가?  오늘 이 예배와 말씀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날이 밝으면 형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죽음보다 더 무섭고 떨리는 문제 앞에서 천사의 옷자락을 붙들고서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며 절규하고 있는 야곱, 또한 보아스의 이불을 덮고 누워서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9)라며 청혼하는 룻, 그러나 만약 두 사람 모두 이 요청이 거부되는 순간 날이 밝으면 야곱은 형의 칼 앞에, 룻은 음란한 여인이 되어 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룻은 생명을 건 실존의 모습 앞에 서 있다.  

바로 이들을 향해 "네가 누구뇨?"라고 말씀하는 소리,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네가 누구뇨?"  이와같은 주의 음성을 듣는 이 시간이기를 바란다.


보아스의 약혼사(約婚辭)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7a)


(1) 보아스 역시 타작마당이 절정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서곡에 불과했다.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밤'(어둠)이라는 도화지에 아주 멋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왜 이러한 풍성한 삶이 가능했을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삶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출을 많이 하게된 부자이면서도 보아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한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명 '어리석은 부자'로 명명된 사람이다(눅12:16-20) :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6,17-18).  

그러나 이 소리로 그의 일생은 끝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풍성한 소출이 오히려 멸망의 서곡이 되었다.  


(2) 그러나 보아스는 달랐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교만하지도 않았고, 한 밤의 불청객인 룻을 의심하지도 않았고, 다른 흑심을 품지도 않았다.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타날 때만 해도, 특별히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떻게 진행될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분과 긴장이 룻과 보아스를 돌러 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이미 구상이 다 되어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아무 막힘 없이 척척, 그러니까 룻을 모델로 하는 아름다운 사랑, 행복한 결혼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곧바로 이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간다.  이것이 보아스의 다른 점이다.

10절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역시 보아스는 큰그릇이다.  그는 사람들이 복을 받아 사는 것을 이야기할 정도로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자연 사람을 보는 눈도 달랐을 수 밖에 없다.  룻의 청혼에 대한 보아스의 약혼을 위한 언약은 참 건강한 영성에서 비롯되었다.

(1) 한 사람의 영적 수준은 그 사람의 영적 파워를 결정한다
.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흐름을 빨리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어두운 밤에 이불 속에 알 수 없는 -최소한 그녀의 목소리나 이름을 듣기 전에는- 사람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9절처럼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고 청혼할 때 우리는 긴장, 당황, 혼란스러움, 정리되지 않음, 혼돈 때문에 정신차리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보아스는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나는 어떤가?  어떤 문제 앞에 몇 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는 문제는 혹시 없는가?  하도 많이 풀어보아서 이제는 척척 풀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조금만 변형된 어떤 문제를 만나면 여지없이 두손 바짝 드는 경우는 없는가?  아직 어떤 문제 앞에 도대체 무엇이 옳고, 어떻게 해야 바르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지를 빨리 정돈할 수 있어야 그 문제가 풀리게 된다.  그런데 그 이유조차도 파악이 안되고 있으니, 해결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성도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평소 연습은 잘하는데 어떤 사건을 통해 벌어지는 실전에는 매우 약한 경우를 종종 본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성경이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이 일을 만나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 일을 만나면 이렇게 담대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이처럼 살면 하나님의 큰복을 받게 된다.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크게 얻어터진다."  뭐 그밖에도 많다.  그런데 정작 실전에 나가면 여지없이 패하고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타령만 Dr. 위콤처럼 '무한반복' 한다.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도덕시험 100점과 신호등을 지키는 것이 전혀 상관 없는 것이나, 성경을 아는 것과 그것대로 사는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어찌 거기에 소망이 있겠는가?   

(2) "네가 빈부를 무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룻의 기준은 빈(貧), 부(富), 나이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그런 것들이 불필요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룻은 더 중요한 것을 보았다.  그것이 룻의 영성이었다.  룻은 나오미를 끝으로 꺼져가는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았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조금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이것이 자기가 만들어 가는 복의 몫(size)이다.

당신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할 때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가?  보아스와 룻은 결혼의 기준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빈, 부, 나이가 결혼의 기준이 아니었고, 또 그러한 것이 아닌 룻의 진짜 아름다움을 귀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볼 수 있는 보아스 역시 뛰어난 신앙의 소유자이다.

(3)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처음 모압을 뒤로 하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올 때는 미약할 때 그지없는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약한 시작을 오늘처럼 풍성한 것으로 이끈다.  이것이 룻의 잠재력이었다.  점점 더 풍성한 삶, 더욱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스런 삶의 한 부분이다.  점점 더 복되고, 긍정적이고, 풍성하고, 발전하고, 부흥하는 삶, 점점 나아지고, 탄탄해 지고, 커지고, 미래(내일)가 있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11절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의 존재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인'이라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룻은 비록 짧은 3개월 정도의 베들레헴 생활이었지만 인정받는 사람으로 우뚝 선다.  "현숙하다"의 뜻은 "강한, 용감한, 남자다운, 능력, 수완"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룻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힘과 지혜가 있는 여인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가정, 친구, 학교, 직장, 교회 등등-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가?  나는 타인들의 기억 속에 어떤 사람인가?  골치 아픈 사람인가, 기억하기 싫은 사람인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드는 요주의(要注意) 인물인가?  아니면, 당신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기억) 속에 훈훈하게 살아있는 따뜻한 사람인가? :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다'(all) "룻은 현숙한 여인이다"고 인정할 만큼 지정의(知情意)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실 불과 3개월 전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할 때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1:19b)였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반대로 온 성읍이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12-13절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 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보아스는 타작마당을 약혼식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보아스는 룻의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본대로의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는 것으로 그녀의 청혼을 수락한다(10-11).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아스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앞세우지 않았다.  모든 일을 순리대로 풀어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10-11),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12-13)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그것만큼 그의 타작마당은 깨끗하고, 정결하고, 아름답다.

(1) "기업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는 모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규례를 정확하게 밝힌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룻의 청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의 빛 아래서 이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2) "아침에 …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욕심,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열심이 앞서지 않았고, 자기 감정이나 기분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 혹은 흥분을 앞세움으로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릇 우리의 신앙이 그래야 한다.  환경에 너무 민감하거나,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변하는 신앙은 깊은 신앙이 아니다.  또한 보아스의 지혜로운 신앙을 보게 된다.  그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전에 미리 차단한다.  좀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것들을 절제하고, 구별할 줄 아는 넓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신앙에 있어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다.

(3)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 네게 행하리라."
 
보아스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신뢰만큼 자유하게 된다.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하기를 원한다.  사사로운 일을 말씀 앞에 두지 않았다.  자기 목적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았다.  

부스러기 묵상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
보아스의 영적 실력을 보라.  보아스의 통찰은 아름답고, 감격적이며, 룻이라는 보석을 알아볼 수 있을만큼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이었다.  그는 룻이라는 한 알의 밀알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알아보았고, 발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그러나 보아스는 모든 것을 룻의 입장에서 해결하기를 원한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이었다.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 앞에서는 단 1원이라도 분명하고 냉정한 현대인의 이기적인 모습에서 보자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다.  이점은 룻이나 보아스가 다 같았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살았다.  모압을 떠났고, 이삭을 주웠고, 시모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으며, 그리하여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다.  이 점은 보아스도 마찬가지다.  이방인이요,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요, 가난했고, 말하자면 모든 면에 있어서 룻은 소위 '깜'이 아니었다.  함량 미달이다.

그렇다.  그것만큼 보아스의 영적 통찰(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보아스는 분명 '오늘' 속에서 '내일'을 보았다.  겉모양이 아니라 속사람을 볼 줄 알았다.  시시껍절한 '조건들'이 아니라 '룻 그 자신'을 볼 줄 알았다.  그것만큼 보아스는 건강한 삶을 살았고, 영육간에 청청한 삶을 살아가는 복있는 사람이었다.   

보아스와 룻은 역시 신앙의 명콤비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상호 신뢰가 보장된, 서로에게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영성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볼 때 사소한 것에 목숨걸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길목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겠다.

나에게도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며, 세워주며,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어져가는데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앙의 영적 동반자가 있는가?  그런 가정(家庭)이고, 부부(夫婦)인가?  그것을 서로 목표하는 교제요 만남인가?  두 사람은 과연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어떻게 될까?  다음 시간에 생각해 보자.   

새벽을 기다리며

'밤'은 깊어만 간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룻은 사랑을 고백한 그 밤부터 타작마당을 떠난 새벽까지 무엇을 생각하며 긴 밤을 지새웠을까?  

14절

   "룻이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시간들이 지났다.  꿈 많던 소녀 시절에는 백마(白馬)를 탄 기사의 손에 이끌리어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짖고, 밤이면 가든에서 파티를 여는 젊은 날을 꿈꾸었을 법도 하다.  

아마 그때는 이방 땅 모압 태생이었기에 하나님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니 하나님 없는 자기 자신의 꿈의 날개를 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들레헴이 고향인 젊은 청년 나오미의 아들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기 앞에 나타났고, 룻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하지만 룻에게는 여러 가지가 걸렸을지도 모른다.  우선 타국인이다는 점이 서로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결혼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꿈 많던 신혼시절이었다.  그러나 꿈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시어머니 한 분 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현실이 그랬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랬다.  이러 자고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룻의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깨어났다.  무슨 말인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소리 없이 자기 곁을 떠났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녀의 마음에 각인(刻印)되는 것, 오직 하나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룻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반전(反轉)시켜 버리고 말았다.  

룻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드디어 룻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할 말이, 정리할 것들이, 기억되는 것들이, 감사할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룻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남아 있는 여백을 새롭게 만들도록 섭리하시기 시작하셨다.  

(1) 받은 은혜(복)를 세어 보아라.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날들, 부모님과 고향산천(故鄕山川)을 떠나 온 이후 이처럼 여유 있는 시간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깊어 가는 밤을 지새우면서 룻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마저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모압을 떠나올 수 있었던 힘, 홀로 되신 시모를 따라 패가망신(敗家亡身)하다시피 무너져버린 엘리멜렉의 가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야 했던가에 대한 밀려오는 숫한 질문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하나님의 섬세하신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기가 막히게 진행되어 온 지난날들을 그녀는 추억했을 것이다.  

점점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섭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처럼 찾아오신 하나님의 섭리에 기꺼이, 또한 믿음으로 순종(응답)해야 한다는 결단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지금까지도 그랬다면 앞으로는 더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갈 것인가?  룻의 가슴은 이처럼 강렬하게 뛰고 있었다.

(2) 삶이 무절제하지 않았다.  

룻은 동이 트기 전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우리는 지금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지샌 밤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지금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산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시선을 보아스의 풍성한 타작마당이 압도해 버릴 수도 있다.  혹은 "보아스는 좋겠다. 나는 언제나 보아스처럼 될꼬?"라며 부러움에 취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타작마당이라는 그림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룻을 보아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어떤 것들을 무기로 해서 보아스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룻은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데렐라처럼 살지 않았다.  룻은 시모 나오미, 보아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향해 일하시기 시작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다 맡겨 버린다.  그 밤부터 새벽까지 룻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긴다.  이것은 룻의 '믿음'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무절제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었다.  보아스만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보아스 뒤에 누가 있는가?  예, 하나님이 계신다.  그렇기에 룻은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통과하고 있는 밤의 그림이다.

자기를 지키며, 절제하며, 조절하며,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룻이 그랬다.  그녀는 오늘 때문에 내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내일 때문에 오늘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다.  

(3) 약속을 지켰다.  
룻이 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룻은 보아스가 말 한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14a) 정확하게 일어났다.  단잠에 빠져버림으로 말미암아 크나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룻은 시작도 지혜로웠지만 끝은 더 지혜로웠고 만족스럽다.  자신이 소중하다면 상대방 역시 소중하다.  긴 밤이었지만 보아스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정도로 그녀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아 있는 여백

룻, 보아스, 나오미는 다 한결같이 자신들의 능력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일이 진행되면 될수록 자신들이 결코 채울 수 없는 무엇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백'을 자신들이 채워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의 여백(餘白)을 하나님께 드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수 없는 '여백'을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수단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욕망을 일지감지 포기한 것이다.  그것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좋은 여건이 또 있을까?  

이쯤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태풍이 쓸고 간 황량한 들판처럼 볼품없는 사람들로 전락한 룻과 나오미가 걸어 온 인생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잃었으나 두 여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작은 불꽃과도 같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절규를, 오직 소망이 주께 있음을 믿으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들었던 두 여인의 인생을 버리시지 않았다.

그들은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두 여인이 실패한 인생의 너덜너덜한 파편들을 부둥켜 안고서, 아무도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던 아직은 실낱처럼 남아있는 그들의 '여백'을 바라보셨다.  

우리는 여기서 신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할 정도의 패인이었다.  아름답던 모습은 온대 간대 없고, 완전히 거지가 되어 귀향하고 있었다.  그의 소생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보라!  아버지는 달랐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아버지는 일그러진 아들을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탕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은 아들을 보았고, 우리는 실패를 만들었으나 하나님은 잔치를 만들었다.  모든 인생은 이처럼 제로 포인트에서 시작한다.  

15,17절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보아스의 여백은 15절이다.  아무도 이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본 사람도 없다.  증인이 없는 셈이다.  마치 지난 밤의 일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들 그 누가 이 일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보아스는 지금 룻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지난 밤이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서 산 것이다.  그는 이미 지난 밤 룻과의 약속을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13b)라고 말했었다.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우리가 보아스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정직할 수 있고,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의 행복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쁨의 몫까지를 지혜롭게 배려한다.  분명 보리 여섯 되를 룻이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나오미의 것이다는(17) 보아스의 말은 룻과의 약속이 룻만의 것이 아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즉, 나 보아스는 룻 뿐이 아니라 나오미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의 여백이기를 원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여백을 보셨다.  

16,18절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그 사람의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고,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한편, 나오미의 변화는 눈부시다.  자기 뜻과 계획대로 살았던 지난 세월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모압으로 끝낸다.  이렇듯 나오미는 3장까지 오면서 분명한 변화와 성숙 앞으로 나아간다.  

  1:6 - "여호와께서 … 들었으므로"
  1:13 -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1:20 -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1:21 - "나로 비어 … 나를 징벌하셨고 … 나를 괴롭게."

  2:19 - "복이 있기를"
  2:20 - "은혜 베풀기를"
  3:1 - "안식 … 복되게"

나오미는 자신이 기록한 인생 10년史를 전후한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  하나님보다 조금 더 앞서 갔던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야 할 몫의 여백까지를 넘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아스를 통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이어가시는가를 볼 것이라고 말한다.  나오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여백을 맡겼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믿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고, 기다리며, 인내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도리이기에 그렇다.

이러한 사례는 출애굽의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앞은 홍해요, 뒤는 애굽의 군사들이 밀고 올라오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 때에 모세는 이렇게 선포했다.  이것은 일명 '출애굽의 여백'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  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인가?  나오미는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일을 이루어 가실지를 숨죽이며 지켜 볼 것이라고 말한다.  인위적으로,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직 남아 있는 여백을 발견하라.

"내 인생의 빈 노트에 무엇을 그려(채워)야 하나!"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꿈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는 열심히 쌓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맞추기도 하고, 도려내기도 하고, 오려 붙이기도 한다.  제각기 자신이 기대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대로 만족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인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도대로 오늘 여기까지 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인생은 AS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그려 놓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바로 거기서 멈추어야 한다.  남은 여백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도록 하라!  

(1)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여백(달란트)을 발견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다.

(2) 가정, 배우자,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라.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없는, 그리하여 아빠나 엄마의 말이 곧 법(法)인 가정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여백이 없는 경우다.  자녀들은 자동 인형이 아니다.  부모의 계획(꿈)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는 수단이 아니다.

(3) 교회가 크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가 해야 할 사명을 깨닫는 것만큼이 그가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사람이 일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감된다.  아직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백이 남아 있다.

남은 여백만큼 그는 행복하다.


아직 여백(餘白)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것만큼 꿈이 있고,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점(點)이 아니라 하나의 선(線)이다.  거대한 하나의 진행형(ing)이다.

그 여백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는 자는 '더' 행복하다.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왕좌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당신의 여백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채워가시는 여백을 보고 있는가?    

여백(餘白) 없는 사람들

소위 말하는 '중년의 위기'가 왜 찾아오는가?  
더 이상 삶의 여백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뒤치다꺼리하다 황금 같은 20-30대를 보내 버렸다.  이제 자녀들은 더 이상 자신의 품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주장만 늘어 놓는다.  세대차이라고 말하거나, 구식(舊式, 구닥다리)이라고 놀리고, '쉰세대'라고 일축한다.  남편도 예전 같지 않다.  자기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 목표에 매달려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늘어가는 것은 몸무게요, 허리 둘레요 -'배둘레헴이 많아진다-, 얼굴에는 기미에 주름살이 늘어가고, 그 곱던 손은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졌고, 옷장에 있는 20대에 입던 원피스는 다리를 집어 넣을 때 벌써 걸려서 들어가지 않고, 모두 들 다 앞서 가는데 자신만이 뒤로 후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기 시작한다.    

부스러기 묵상

여백의 하나님 앞에 선다.
아직 남아 있는 당신의 여백을 보라.  무엇으로 채워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자.  나오미는 자신의 남은 모든 여백이 제로 포인트였음에도 그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워내고 있지 않은가?  아직 남아 있는 은혜의 부스러기들일지라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하나님보다 먼저 나의 남은 인생의 여백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교만함이다.  아직 당신의 것은 남아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날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어 있다.  아직 나의 여백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것만큼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은 유효하다.  이 밤이 새면 아직 남아 있는 룻의 여백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다음 시간에 생각하기로 하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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