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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룻기

[스크랩] 룻기(4): 룻과 다윗(4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2:01

 룻기(4): 룻과 다윗(4장)


룻과 엘리멜렉

룻과 나오미

룻과 보아스

룻과 다윗

타락과 회개

구원(1)

구원(2)

회복과 축복

1장

2장

3장

4장


1. 두 지평-기업 무를 자(룻 4:1-6)

'고엘'찾기
4막으로 넘어오면서 룻기는 고엘언약을 지킬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을 소개한다.  
그 기업 무를 자'로 소개되는 익명(匿名)의 1순위자 '아무개'와 보아스가 바로 이들이다. 과연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룻을 통해 나오미의 꺼져가는 가정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4장 서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다.  먼저 고엘제도와 관련된 구약의 언약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자.  레위기 25장으로 간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25:23-28)


그 기업 무를 자
이 말씀에 의거해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3:12)인 제1순위자 '아무개'가 갑자기 마지막 장에서 등장한다.  단역 출연자인데 진행되는 방향에 따라서는 주연 버금가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1) 그는 단숨에 축복의 문턱에 서게 된다.

이미 3장에서 그의 출현이 암시되었다.  드디어 그는 당당히 기업 무를 자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에게는 율법이 부여한 그러한 권리가 있었다.  그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서(3-4b) "내가 무르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성문에 앉아 이 말을 듣고 있는 보아스에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이어지는 5절의 부연 설명, 즉 옵션을 듣고서는 그만 생각을 바꾸고 만다.  왜 그랬는가?    

"내가 무르리라"는 말이 나중에 바뀐 것은 자신이 입을 '손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손해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그는 계산이 빨랐다.  엘리멜렉은 이미 죽었고, 따라서 이제 나이든 나오미마저 죽으면 엘리멜렉의 소유지가 모두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단히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밝았다.  그런데 이방의 땅 모압 여인 룻을 책임져야 했고, 룻에게 자식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엘레멜렉 → 나오미 → 룻 → 자식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허비하는 멍청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전혀 이득이 없는 거래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오미와 룻 따위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문제나 형편은 전혀 고려조차 않았고,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율법이 그에게 이러한 특권을 값없이 주었으나, 그는 말씀을 버리고 오직 손해와 이익이라는 경제법칙만을 따라 행동한다.  말씀은 안중에 없다.  말씀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 철저히 실패한다.  그 결과 그는 찾아온 기회를 버리고 만다.  그는 자기 것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그는 당장에는 손해가 아닌 이익처럼 보이는 편을 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당장 좋아 보이는 것, 이익이 되는 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쪽으로 줄을 선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니까 '아무개'씨는 룻의 엑스트라가 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고엘찾기'의 주연이 되는 축복을 알지 못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그러니까 자기 수에 자기가 넘어간 셈이다.  

(2) 영적 거듭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같다.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사람은 시작된 하나님의 복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는 오직 '자신'이 서 있다.  그는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몫의 복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알게 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굴러온 복을 거부해 버리고 마는 영적 무지에 있다.  지금 무엇이 '복'인지, 그리고 무엇이 '화'인지, 무엇이 손해이며 이득인지 분간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복을 발로 저 멀리 차 버리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영적으로 득이 되는 자리인지, 아니면 큰 화가 임하는 자리인지 빨리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과 점검이 필요하다.  어물거릴 여유가 없다. 지금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기회들은 쉼없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 생각에 '아니올시다'라고 그러면서 믿지 못하니까 그의 믿음대로 '아니올시다'로 끝나는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을 보라.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방주를 실물로 보여 주시면서 -마치 룻을 베들레헴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다.  거대한 방주가 그들 앞에 준비되어 있다.  이제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방주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마24:37-39).  '아무여'가 그런 사람이다.  룻이라는 축복의 통로가 있는데 그 축복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교회가 있고, 구역이 있고, 봉사할 곳이 있고, 헌신할 대상이 있는데 현대 기업 무를 자인 많은 사람들 역시 '아무개'씨처럼 축복의 문턱에서 그만 뒤돌아 서 버린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무개'와 '보아스' 중에 누가 똑똑하다고 느껴지나요?  그에게는 상식과 지식은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율법의 도를 알고 믿는 영적 지혜는 없었다.  이것이 현대의 많은 '아무개'들의 결정적인 문제다.

'아무여'씨는 '신분'은 기업 무를 제1순위자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결승전에 올라온 최종 후보가 될 수 있는지 어리둘절 할 정도로 그 '수준'은 전혀 아니다.  신분과 수준 사이의 부조화가 문제인 것이다.  신분은 그리스도인인데 수준이 세상 사람과 동일한 사람,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말씀을 붙잡고, 손해 볼 것 같으면 가차없이 말씀의 끈을 놓아 버리는 사람, 그가 바로 '아무개'씨의 후예들이 아닌가?  하나님마저도 자기 편리와 목적을 위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간 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보아스
그런데 우리는 이와는 전혀 반대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았다(1).  무엇 때문이죠?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려고?  어떤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려고?  다른 사람 골탕 먹이려고?  다 아니다.  그는 지금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성문에 앉았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 룻과의 약속(3:11), 그러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곳까지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룻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1) 그는 두 가지가 불리했다.

하나는,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제1순위 기업 무를 자가 있는데, 그는 그 '아무개'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룻과 결혼하여 엘레멜렉의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가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조금 불리해 보이는 이러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말씀'이 보아스에게 불리했다.  말씀이 이미 기업 무를 자의 순위를 결정해 주었는데 보아스는 우선순위자가 아니었다.  그것까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말씀이 보아스의 계획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 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3:12-13)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자기에게 불리한 말씀이면 모르는 척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경험, 계획, 상식, 의도, 목표에 따라 행동하며 결정하게 된다.  기도하다가, 거기까지는 참 좋다.  그런데 기도해도 안될 것 같으면 자기 방식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보아스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 일이 진행되어야 하고, 말씀의 법이 지지하는 사람이 룻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고수하였다.  보아스는 말씀보다 앞서지 않았다. 언제나 말씀 바로 뒤에 서서 말씀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고 있다.  그 역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말씀이 오히려 불리한데도 그는 말씀을 앞 세운다.  그 보아스가 무대에 서서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면서 질문한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축복된 삶을 살고 싶은가?  그럼,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말씀이 앞서면 따라가고, 말씀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말씀이 입을 열면 목숨이 경각간에 있게 되거나 혹시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입을 열고, 말씀이 침묵하면 함께 침묵하라!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성공을 보장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 자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마6:33).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라!  나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 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 전도가 필요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 복음을 만나야 할 사람, 죄사함 받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할 사람,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어야 할, 아니 회복해야 할 사람을 향해 보아스처럼 자신의 전부를 드릴 준비가 된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2) 그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룻' 중심이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정신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4)

(3) 보아스는 순리대로,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마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권세, 즉 세상적인 너절한 것들을 동원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더욱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뒷짐지고 수동적인 자세로 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살았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섭리하실 것을 믿었다.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다.  룻 보다도 룻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룻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 한 가치가 있다.  왜냐?  '나'가 아니라 '너'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직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살 만 한 가치가 있다.  그래도 교회에는 아직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보아스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비록 고독하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성도가 아직은 있다.  그래서 아직 교회는 희망이다.  

(4) 보아스는 성읍 장로들을 청하여 기업 무를 자의 증인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말씀대로 증인을 세웠다.  물론 율법에는 두 세 증인으로 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10인을 세움으로써 룻을 맞이하는 일이 결코 그 어떤 것들로도 취소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 보인다.  그는 빨리, 서두르다가 일을 망치지 않았다.


인생은 언제나 두 지평 안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양분된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처럼 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해 보이도록 "보암직 하고, 먹음직 하고, 탐스러운" 것들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보아스의 지평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이것이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두 지평은 공존한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복을 1순위로 받을 수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눈으로 보고, 또한 생각해서 판단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선택한 수준이다.  당장은 좋아 보였으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그는 처음되었으나 나중 된 사람이다.

한편 보아스는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미래가 좋은 편을 선택하였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말씀을 듣고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던 베드로처럼,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갔던 바울처럼, 오늘보다는 내일을, 내일보다는 영원한 미래를 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편을 선택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무개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에 속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 사람은 축복을 피해 다닌다.  영적으로 눈먼 소경이다. 믿음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이 시간에도 보아스처럼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그리고 내 안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말씀의 지평 앞에 엎드리는 사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가는 사람,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있다.

룻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제4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아무여의 후예인가, 아니면 보아스의 후예인가?  당신의 선택은 믿을 만 한 것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가?  거룩한 것을 택하라.  손해보는 일이라도 말씀이 명하는 것이라면 웃으면서 따르라.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라 이왕이면 말씀대로여야 한다.  


부스러기 묵상
언젠가 삼성의료원 심방을 가려고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그만 농협하나로&성남 이정표를 지나쳐 버린 적이 있다.  순간 이거 대전까지 가야 하나 싶으니까 등에 땀이 났다.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분당 톨게이트로 들어가면서 통행료 내고, 1분도 되지 않아 다시 고속도로 진입하면서 통행료 내고, 그리고 20여분 늦게 삼성의료원 심방을 간 적이 있다.  이런 경우는 잠시 늦어지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선택하고 결정한 문제 때문에 발생한 인생에 대해서는 AS가 불가능하다.  인생은 AS를 할 수 있는 전자제품이 아니다.  

하나님을 따르라.  말씀을 따르라.  이것이 가장 확실하다.  아무여와 보아스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교회와 철학관 사이에서 무뭇거리지 말라.  주일성수와 들판에 계신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말씀과 내가복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성령님과 사이비 영성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복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살 길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7:3)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아직 당신의 인생행로는 선택해야 할 무수한 문제들로 가득차 있다.  아직 당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하나님의 길고 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선택했는가?  이 시간에 대면해야 할 하나님의 질문이다.  두 지평이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


                     2. 축복하며 살라하네!(룻 4:7-12)

세 종류의 사람들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보아스보다 더 우선 순위가 있었던 기업 무를 자 -그의 이름은 '아무개'다-, 보아스, 그리고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로 구성된 증인들이다.  보아스와 아무개의 이중창은 처음부터 화음이 맞을 수가 없었다.  결국 누가 되든 솔로(solo)일 수 밖에 없었고, 둘 중 한 사람으로 결정되게 된다.  성문을 무대로 한 4막 2장은 마침내 모든 백성들의 축복송이 합창으로 이어지면서 룻 드라마는 절정(climax)을 향해 이룩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그 기업 무를 자 '아무여'씨는 무대에서 퇴장한다(7-8절).  그것을 위해 까마득한 '옛적 전례' 의식을 기억해낸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7절)

'옛적'(7절)이라는 단어로 보아 이 진통은 아마 룻 시대에는 그야말로 사라진 옛 관습에 불과했는 것같다.  그러니까 그는 살아있는 율법의 특권을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전통으로 대치시킨 셈이다.  율법은 전통만큼도 되지 못하는 사람으로 무대를 내려온다.  마침내 축복의 기회를 포기한다.  사실 그는 연구 대상이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사람이요,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를 나쁘다고 탓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신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나오미, 특별히 룻에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찰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쩌면 그의 합리성이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자기 관점에서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룻을 통하여 주어질 축복의 씨너지를 몽땅 보아스에게 넘겨주고 만다.  넝쿨 채 들어온 '룻 호박'을 발로 차 버린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損害)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權利)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절)

이 짧은 6절에 '나'라는 표현이 다섯 번이나 나온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에게는 현재의 룻 밖에 보이지 않은 셈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당장 눈 앞의 결과만을 생각한다.  멀리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읽어내지 못한다.  언제나 과거와 오늘에 얽매여 살아간다.  철저히 예측 가능한 일들만을 따라간다.  이러한 판단과 결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이 서 있기 때문에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이, 더 크게, 더 많이, 더 위대하게 보지 못한다.  


보아스
보아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는 '아무여'씨의 입을 주목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될까?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도 없다.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그였던지라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는 일이었다. 보아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과연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가 입술로 말한 6절에서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8절에서 그가 증인들 앞에서 행동으로 최종적인 결단을 끝내기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8절)

그는 성급하게 열매를 따려고 아직 설익은 과일을 탐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성숙해 있었고, 일이 마쳐지기 전까지는 행동하지 않는 책임있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8절로 제1순위 기업 무를 자는 축복의 반열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이때가 행동할 때이다. 보아스는 서서히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룻 프로젝트'(Ruth project)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 날이 오기까지 그는 무수한 시간들을 인내했다. 그렇다. 좋은 것을 얻으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소중한 것 일수록 쉽게 처리해서는 안된다. 경솔하게 행동했다가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보다 앞서다가는 될 일도 그만 꼬이고 만다. 이런 경우는 우리 인생살이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보아스가 10명의 증인으로 채택된 장로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베들레헴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은 크게 둘로 되어 있다(9-10절). 그것은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룻과의 혼인을 청첩하는 결혼 기자회견으로 되어있다. 엘리멜렉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살 것이다(9절).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아내가 되어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10절).


증인들
사사시대에도 "여호와께서"(11,12절)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대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다. 그래서 말인데 "믿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방학했다.", 더 나아가 "교회 졸업했다."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핑계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가서 섰는데 그게 통할 리가 없다. 아무리 영적 암흑기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일지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깨닫도록 하신다. 한 사람 건강한 보아스를 통해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한 사람이 바르게 서면 한 시대를 축복할 수 있다.

이어지는 증인들의 '축복송'은 참 아름답다.  보아스의 솔로(solo)를 이어 받아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의 코러스(chorus)로 화답하는 본문의 축제마당을 상상해 보라.  인생은 이처럼 아름답다.  아니, 이렇게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은 참 아릅답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아가던 시대에,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우선권이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 역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어두운 시대에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것이 축복이다.   

(1) "우리가 증인입니다!"(9,10,11절)

줄을 잘 서십시오!  남을 못살게 하고, 상대방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 한 사람을 패가망신(敗家亡身)하게 만드는 쪽에 손을 드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짧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이 아닌가!  인생을 마이너스로 살지 말고 플러스로 살자!  남은 우리 인생 행로를 이처럼 넉넉하게 살아가기 바란다.  축복하는 반열에 서라.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박수 쳐주며 살자.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지켜보는 그런 사람이 되자.  "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더니 복 받았습니다"라고 간증하며 살자.

(2) 축복송(11-12절)

베들레헴 사람들은 라헬과 레아, 그리고 다말을 다시 기억할 정도로 영적으로 회복되었다. 한 사람이 바르게 살면 그 시대가 바르게 살게 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마음껏 축복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축복하며 살자.
  룻이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한 가문을 세우기를!
  보아스 당신도 유력하고 유명하게 되기를!
  룻이 다말처럼 쓰임 받기를!

(3) 사람은 입술의 열매대로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기한 법칙'이라 말하고 싶다.  놀랍다.  그래서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입으로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다(눅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비운의 가수들은 한결같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노래를 불렸다.  "간다, 간다" 부르던 김정호는 그렇게 갔구요, -내가 영생 얻기 이전이라면 한번 불러볼텐데(?)-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가수 역시 어느 날 그렇게 갔다.  "인생은 나그네 길",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고 노래했던 그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밝고, 긍정적이고, 박수 치면서 흥겹게 부르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은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다.

링컨(A. Lincoln)은 "자기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심성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대략 알 수 있다.

수 십 년 고행 끝에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法語)를 남겼으며, 8년동안 드러눕지 않고 장자불와(長坐不臥)의 초인적 극기수행을 함으로써 성불(成佛)의 경지에 이르렀다던 성철(性撤, 1912-1993)이라는 분 여러분 다 아시죠?  그런데 그 양반이 {여원}(1987.  월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는 그가 조계종 종정으로 있을 때인 1987년 '석탄일' 법어인데 제목 하여 "사탄이여 오소서!"이다.  으시시 하죠?  읽어 보겠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님입니다

그가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열반송(涅槃頌)은 불교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볼 때 그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쳤을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한 획이라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열반송을 들어보자.

  열반송(涅槃頌)
  生平欺 (생평기광) 男女群(남녀군) -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하였으니
  彌天罪業(미천죄업) 過修彌(과수미) -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活焰阿鼻(활염아비) 恨萬端(한만단) -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 된다
  一輪吐紅(일륜토홍) 掛碧山(괘벽산) -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부스러기 묵상
축복하며 살라하네!
한 사람이 바르게 서면 한 민족을 축복할 수 있다.  이것이 룻기가 보여주는 우리네 인생을 향한 영적 교훈이다.  우리는 자칫 룻기를 효성 지극한 효녀 룻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효도했더니 복 받았더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끝내 버릴 가능성이 많다.  물론 룻이 축복의 반열에 선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극진히 섬기고 효도했던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룻이 룻된 것은 꼭 효도 때문만은 아니다.  이렇게 성경을 풀면 성경이 매우 가난해진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을 한 지붕 안에 묶어 주심으로써 영적으로 곤고한 사사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로 하여금 서로 믿음으로 격려하고, 축복하며, 소망 가운데 내일을 바라보도록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혼돈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의 눈을 돌리신다.  그리고 그들을 주목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어떻게 당신의 신실하신 역사를 계속 이어가시는가를 목도하도록 하신다.  

마침내 참담했던 1막의 분위기는 2-3막을 지나면서 반전(反轉)을 시도하더니 마지막 4막에 와서 완전히 바뀌고 만다.  어둡고 칙칙한, 실패와 좌절의 사람 이야기로 막을 열더니 감사와 축복으로 역전되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반전되었다.  하나님이 부재중이시던 1장은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도록 그분께 겸손히 왕좌를 내어드린 4장은 희망과 새생명으로 뻗어나가는 새순의 싹을 보게된다.  

이제 우리는 보아스가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한 약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기대해 보자.


                    3. 족보가 주는 몇 가지 교훈들(룻 4:13-22)

회 복

룻기의 1장과 4장은 극적 대조를 이룬다.
죽음으로 시작하더니 출생으로 맺는다.  장례식으로 막을 열더니 결혼식으로 막을 내린다. 하나님이 부재중인 비극으로 출발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희극으로 마무리된다.  한마디로 '회복'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여호와께서'(11-14절)로 계속 이어지는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부재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 없이 살았고, 또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인생들의 결론, 그것은 참담한 실패였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나, 택한 선민이지만, 언약의 백성이지만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룻기 시대 '여호와'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이 부재중인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여호와께서 이루신 영광을 볼 수도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룻기의 교훈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를 '마라'(고통, 슬픔)라 칭하라."(1:20-21)  이것이 나오미가 1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한 고백이다.  그녀는 탄식과 절망의 비가(悲歌)를 불렀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서 이웃들로부터 '찬송하리로다'(14절)로 화답을 받는 자리까지 나아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한 사람들은 이처럼 살아간다 : "찬송할지로다!"  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나요?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룻기는 그 하나님이 임재하신 바로 이 지점까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갔다.   


족보 이야기

하나님의 부재를 통한 고통은 10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영광은 대를 이어가고 있다.  짧은 13절이 1년의 세월을 요약하고 있고, 17절은 무려 3대(代)에 걸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어준다.  룻기의 저자는 매우 간결한 족보를 드라마가 끝나고 난 자막에 타자기가 만들어주는 활자기법과 같은 방식으로 비추어 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먼 미래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성경를 연구해 보면 참 많은 족보들이 발견된다.  그런데 모든 족보가 다 룻기의 것처럼 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는 마라와 같은 족보도 있다.  이처럼 두 종류의 족보가 다 등장한다.

자신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모들의 대에서 물려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식들의 대에로 물려 주어야 할 몫까지 자신의 대에서 거덜내 버리고 영적인 거지로 전락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그 동안의 족보가 끝나 버리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대표적인 몇 사람의 예를 들어 보자.

(1) 고라당의 가문이다(Num. 16:1-35).

  *레위 → 고핫 → 이스할 → 고라 → 음부 | 단절             
  *르우벤 → 엘리압 → 다단·아비람·벨렛 → 온 → 음부 | 단절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라 일당은 레위·르우벤 지파의 자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레위 족속들은 같은 족속이면서 지도자로 있는 모세를 시기하였고, 이스라엘의 장자인 르우벤 족속을 뒤로 하고 셋째인 레위 족속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시도하였다.  결국 이들은 땅이 갈라져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체로 음부에 빠지며"(16:32-33a) 완전히 패망하는 가문이 되고 말았다.

(2) 아간의 족보다(Josh. 7:1,16-18,25).

  *유다 족속 → 세라 족속 → 삽디 → 갈미 → 아간 → 끝 | 단절
  
역시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여리고성을 정복하면 모든 물건을 다 여호와께 바칠 것을 명하였으나(6:17-18), 사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감추었기 때문이다(7:21).  즉, 불순종 하였기 때문에 유다 족속의 한 가문이 패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간은 내일보다는 오늘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소망이 없을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3) 엘리 제사장의 가문이다(삼상1:9, 4:12-22, 왕상2:27).
 
  *아론 → 이다말 → 엘리 → 홉니와 비느하스 → 이가봇 → ?

한 때는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의 사사로, 또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았지만 엘리의 집안은 완전히 패가망신(敗家亡身) 하게 된다.  불레셋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은 이 전투에서 사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으나 시부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이라 부르고서는 숨을 거둔다.   

(4)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가문이다(1 Sam. 9:1, 31:6, 2 Sam. 4:1- , 9:1- ).

  *베냐민 지파 → 아비아 → 베고랏 → 스롤 → 아비엘 → 기스 → 사울 → 요나단 → 므비보셋 → 역대상 8:33-40
  
그는 목회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13:13-14)는 선지자의 선언과 함께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왕권을 넘기실 것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는 요나단의 아들 장애인 므비보셋 뿐이다.  다윗은 요나단과의우정을 생각하여 그를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로 살아가는 은혜를 베푼다(2 Sam. 9:13).  그에게 젊은 아들 미가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의 족보는 역대상 8:33-40에 기록되어 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면 그의 후손들이 다윗의 신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이다.  그의 족보는 명맥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전혀 새로운 스타트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 끝난 인생이 아니라 시작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그렇게 사라져버린 잡초들이 아니다.  1년생, 혹은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라 오고오는 세대에 영롱하게 빛나는 한 알의 밀알들이다.  그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다 죽었으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고, 오늘보다 더 확실한 미래를 개척해 내는 한줄기 빛이었다.  이들의 족보는 이처럼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  죽었으나, 그러나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다윗으로, 또한 그리스도에게로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연결 고리들로 쓰임 받았다.  오늘 본문에 이처럼 쓰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다말, 라합, 룻이다.  

(1) 다말 :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18a, 마1:3a)

야곱의 손자이며 유다의 맏아들인 엘의 아내 다말은 계대결혼법의 우여골절을 따라 시아버지 유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형제인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된다(창38:1- ).  그녀는 가나안 여인으로 추정되지만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는 것 이외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2) 라합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21a, 마1:5a)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여리고 정탐 때 그곳에서 기생으로 살아가던 여인이다(수2:1- ).  그녀 역시 '믿음'으로(히11:31)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을 받았으며, 유다 자손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수2:13)와 함께 약속의 계보에 참여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

(3) 룻 :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21b, 마1:5b)

모압 여인이었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은총을 받고 메시야의 계보에 당당히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룻기를 산책하면서 깨닫게 된 묵상의 부스러기들이다.

(4) 이들은 다 한결같이 이방인들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다들 초신자들이다.  또한 제1대 신앙의 사람들이다.  먼저 믿은 우리로서는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긴장으로 수납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  자칫 정신 차리지 못하면 그럴 수 있다.  주님은 언제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날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결국 영적으로도 도태(淘汰)될 수 있다.  잠히 위에서 살펴 보았던 사람들처럼, 아니 룻기에 등장하는 '그 기업 무를 자, 아무요'씨처럼 말이다.


부스러기 묵상

당신의 족보는 건강한가?
당신으로 끝나 버리는 족보인가?  즉, 당신이 최고의 정점(정상)에 선 족보인가?  그리하여 당신 이후에는 서서히 내리막 길에 들어서는 몰락해 가는 족보인가?  아니면, 마치 다말과 라합과 룻처럼 새롭게 시작되는 축복의 밀알인가?

  유다와 살몬과 보아스처럼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런 계산되는 방식으로 살아서는 이러한 역사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이 룻기가 주는 거대한 영적 교훈이다. 이 사람들처럼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처럼 영적 안목과 깊이가 있어야 한다.
나보다 자식들의 대(代)에 더 소망이 있는 족보여야 한다.  다음 대에서 더욱 빛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축복된 족보를 만들어 갑시다.  이것이 룻기 앞에 서 있는 우리가 깨닫는 하나님의 복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믿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내가 축복의 정상이 아니라, 그것의 시작이 되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나를 한 알의 밀알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죽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이를 위해 아낌 없이 희생하고, 기도하고, 인내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개인과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게 된다.

당신은, 여러분의 자녀들은 지금이 더 좋은 영적 족보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보다는 당장 지금이 좋은 편을 택하고 만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배짱이처럼 말이다.  부모보다 자녀의 신앙이 더 좋은 가정(家庭)이 소망이 있다.  "부모는 그럴듯한데 자녀는 영 아니다"라면 그것은 아주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크게 회개해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대에서 아주 끝나 버리는 족보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이 족보를 물려 줄 가정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교회도 지금이 5년 후보다 더 좋은 것은 진정한 의미의 축복일 수 없다.  

물론 지금도 좋고, 미래도 좋아야 한다.  우리 교회 역시 과거나 지금'만' 좋으면 안된다.  그러면 아무 소망이 없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더 좋은 시절이 될 때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앙은 오늘만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미래보다 더 좋은 교회는 소망이 없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다.  일개 가정도 자녀들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책상, 의자, 책들, 에어컨 등등을 기본적으로 갖춘다.  그러므로 교회도 역시 교육관 시설은 아주 기본이고, 교사들의 영성 훈련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시설과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 또한 않았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면 그는 회개해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이 부분이다.  심방을 해 보면 자녀 공부방은 으리으리하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교회 교육관에 가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 -저는 신앙의 가책이라고 하지 않았다- 도 느끼지 않는 것같다.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사실을 믿으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  분명 베레스의 가문은 갈수록 더 좋은 가문이다.  베레스에서 보아스로, 보아스에서 다윗으로, 다윗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메시야의 가문을 우리는 주목한다.  분명히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복된 가문이 아닌가.  

당신의 가계에 흐르는 영적 기상도를 분별하라.  혹시 여러분이 가문의 제1대 믿음의 계보인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조상들의 죄와 완전히 단절하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밀알이 되라.  룻처럼, 나오미처럼, 보아스처럼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 한 사랑의 사람이 되라.  

우리 남서울교회가 20세기에 세워진 가장 복된 교회임을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시작된 새시대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된 교회로의 영적 유산을 이어가는 교회를 향한 꿈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기도하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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