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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룻기

[스크랩] 룻기(1): 엘리멜렉과 룻(1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2:00

 룻기(1): 엘리멜렉과 룻(1장)


Ⅰ. 서 론

  사사 시대는 가나안 거민과의 타협, 우상을 섬기는 배교, 이방인의 압제와 혼란, 무질서와 무정부 시대로 점절된 영적, 도덕적으로 암흑의 시대였다. 그러나 륫기는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도 하나님께 충성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놀랍게도 이방 여인인  룻과 그를 영접하여 결혼한 보아스였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암흑 시기에도 이러한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이어져 갔다. 어두울수록 별이 더욱 찬란히 빛나는 것처럼, 타락한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 충성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들 가슴에 밝은 빚을 던져준다. 룻기는 절기 때에 읽혀진 책들(메길롯: 5축-아가서,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그리고 에스더) 중 두 번째 책이었으며, 보리 추수와 율법 받은 날을 기념하는 오순절에 읽혀졌다.


2. 내용 요약

  사사시대의 영적 혼돈기에도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는다.  비극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어진다.  어디나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나오미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많은 이야기가 흘러간 후에 이국 땅 모압에서 이를 깨닫는다.  비극이 끝날 조짐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을 다시 찾는 나오미에게서 분명하게 발견된다(1장).

  풍족하게 나갔던 그녀가 텅 빈 모습으로 돌아와 이삭줍기로 연명하는 그림이 애처롭기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으로 입양된 며느리 룻이 있고, 다시 잃어버렸던 하나님에 대한 회상과 고백들을 통해서 회복되고 있는 나오미, 여기에 하나님은 보리 이삭뿐 아니라 그녀들의 생의 전부를 다시 채우시기 시작하신다.  이 일에 보아스가 합류한다(2-3장).

  룻은 다윗의 증조모이며,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여인 가운데 -다말, 라합, 룻, 밧세바- 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사실 그녀의 등장은 모압(이방인)이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다는 구약의 말씀들과 심각한 갈등을 갖는다(신23:3-6, 스9:1- , 느13:1-3,23-27).  하지만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죄(사사시대)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메시야 대망)를 룻기는 이미 그 속에 합력하여 선으로 품고 있다.  하나님은 사사시대에도 룻이라는 꽃을 피우신다(4장).     

룻과 엘리멜렉

룻과 나오미

룻과 보아스

룻과 다윗

타락과 회개

구원(1)

구원(2)

회복과 축복

1장

2장

3장

4장


                   < 엘리멜렉과 룻(타락과 회개) > (참고지도)

1.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타락)

1-1.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

  엘리멜렉(Elimelech)은 사사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하셨던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의 잊혀진 과거의 기록으로만 여기며 살았던 불행한 시대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 역시 이 타락한 시대를 가슴에 품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던지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 살 궁리만 했다.  철새처럼 썰물처럼 베들레헴을 빠져나갔다. 잘 보면,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없다.  참 묘하다.  하나님 없는 인생들의 이야기만이 등장한다.  그것도 가나안에서, 사사의 치리 시기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 없이 산다.  이해가 되나요?  이것이 사사시대 유다 베들레헴의 모습이다.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참담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늘 보았을 것이다.  사사시대의 흥망성쇠를 엘리멜렉 가족들은 직접 목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뒤로하고 또 다시 이방 땅 '모압'(Moab)으로 간다는 말인가?  왜 이스라엘이 실패했는가를 보고 있었고, 아니면 그것마저 느끼고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이미 영적으로 바닥을 친 것일까?  잠깐 어렵다고, 여기 있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다른 곳에서 둥지를 준비해도 되는 걸까?  단순한 '장소 이동'만이 해법인가?  이것이 룻기 초두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1-2. 모압이라는 신기루


  왜 하필이면 모압인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유다 베들레헴은 사사시대라는 영적 암흑기와 흉년(凶年)이 가져다 준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  모두가 다 힘들게 살아가는 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 땅' 모압으로 혼자 풍족하게 살아보겠다고 도피하는가 하는 점이다.  잠시 모압에 대해 살펴보자.   

 
1)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금지 명령을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받았다(신2:9, 23:3- ).  한편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결코 될 수 없는 족속이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더 적극적으로 모압의 총회로 들어간 것이다.  모압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할 사람이 스스로 모압 총회에 들어갔다.  이는 명백하게 말씀을 위반한 셈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음이 아닌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신23:3,6)

 2) 한편, 솔로몬의 몰락 배후를 보면 모압 여인이 등장한다.
  사사시대 이후의 이야기이지만 모압은 이스라엘의 가시와 올무였다.  모압은 이처럼 한 번 거기에 걸려들기만 하면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침몰하게 만드는 파괴력이 있었다.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시대의 꽃을 피운 이스라엘의 3대 왕으로 불후의 명성을 날렸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 그도 모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  성경은 더 적극적으로 모압을 금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즉, 영적 혼합주의 때문이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왕상11:1-2)


1-3.
엘리멜렉 그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께는 눈멀고, 세상을 향해서는 눈이 밝았다. 엘리멜렉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탕자처럼 아주 '풍족'하던 아버지의 집인 베들레헴('떡집')을 떠나 버린다.  떡집인데 흉년이 들어 빈집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풍족했다(21절).  모든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데 그는 풍족했다.  사사시대라는 영적 IMF 시대에도 풍족한 사람은 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풍족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풍족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실패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엘리멜렉의 인생은 전혀 다른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의 이런 면모를 보면 영락없이 현대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그럼 왜 그가 모압으로 내려갔을까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영적 패배주의자이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의 회복을 일지감치 포기해 버렸다.  그것도 하나님보다 먼저!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포기하는 것은 가장 고도의 교만이다.  영적 무기력이요, 시련과 싸워보지도 않고 사탄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해 버린다.  겉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속은 하나님 없는 이방인이었다.  이렇듯 엘리멜렉은 거듭나지 못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표상이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연단하여 가시지만 사탄은 영화 속에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완전히 죽게, 패배하게 만든다.  사사시대에 작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언행하며 살던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회복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패배주의자들이다.

 
2) 모압을 피난처로 선택한 오만과 교만의 몽상가이다.

  그는 두 주인을 섬기고야 만다.  모압이면 될 줄 알았다.  모압이라면 흉년이라는 고난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자만했다.  그렇기 때문에 풍족하게 나가는 것이 자신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21절).  흉년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 안되지만 풍족은 자신의 능력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용품(代用品)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몰랐던 것은 모압은 절망의 세대의 또 하나의 종착지이라는 것이다.  

 3) 실리를 선택한 현실주의자다.

  엘리멜렉은 영적인 안목에서 보는 것에 철저히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평안이라도 좋다는 것이다.  흉년만이라도 면해 다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변화의 시기에 매우 발빠르게 적응하는 유연한 사람이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사양산업(斜陽産業)이 되었는데 하루라도 빨리 발을 빼고 잘 나가는 유망한 업종으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그런 선택이었다면 이야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런데 지금 엘리멜렉이 선택한 것은 선민으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이방업종으로 말을 바꿔 탄 것이다.  그러니까 호프집이나 나이트클럽이 유망하다고 그런 업종을 오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준이 없고, 신앙도 없는 사람이다.

 
4) 자기(ego)만을 생각한 이기주의자다.

  "동족 이스라엘의 고난이야 어떻든 나(우리 가족)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짐으로 열매 맺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제물'로 헌신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살길을 선택했다.  오직 자기 살기에 바빴을 뿐이다.  공동체의 영적 목마름에 대해서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궁핍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유다가 당면한 삶의 모든 숙제를 다 남겨 놓고서 오직 자기 가족만 살길을 찾아 出유다 베들레헴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흉년이 몰고 온 삶의 모든 숙제를 유다 베들레헴에 남겨놓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했다 :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모압까지 닫겠네!"   

 
5) 하나님의 법을 거역한 범죄자다.

  모압에는 그모스(chemosh, 왕하3:27)라는 이름의 모압신이 있다(15절).  이방,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모압에 내려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그런 불경죄였다.  만약 성도가 불국사 목탁소리가 들리는 옆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생각해 보라.  엘리멜렉이 이 경우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세대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룻기는 사사기의 연속편이며 후속편이다.  


1-4.
모압은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다.

  모압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곳이다.  처음에는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파라다이스인 것처럼 다가오지만, 그래서 이곳이 유다 베들레헴인줄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이 유혹이라는 미끼에 걸려들기만 하면 모두 다 상처뿐인 영광을 얻을 뿐이다.  나는 예외일거라고 착각하지 말라!  오늘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덜' 거듭난 사람은 현대의 모압이 손짓하는 유혹에 시선을 빼앗긴다.  모압은 늪일 뿐이다.  늪 위에 아무리 그럴듯한 것들이 놓여있을지라도 속지 말라!  그것을 붙잡는 한 침몰하게 되어 있다.

  작가 헤밍웨이는 20세기 미국과 인류 문명을 {노인과 바다}라는 그의 작품에서 형상화한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앙상한 뼈 뿐이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작가는 인간 실존의 허무를 노인을 통해 고발한다.  그는 자신의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것이 엘리멜렉이 선택한 모압의 실상이다.  모압의 환상에 속지 말라.  하나님은 {엘리멜렉과 모압}이라는 짧은 작품 속에서 엘리멜렉이라는 인간 실존의 허무를 모압을 통해 고발한다.  헤밍웨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엘리멜렉과 다를 뿐 인간의 항구에 정박하였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죽어 있는 자신의 앙상한 시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위기는 영적으로, 생활 면에서, 그러니까 삶의 전 영역에서 찾아온다.  바로 그때, 이러한 때에 진실로 깨어 있는 자라면 다음과 같아야 한다.  흉년이라는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더 통찰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흉년은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예수 안에도 고난(십자가)은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신앙공식'을 떠올리면 어려울 게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작하실 때 뺄셈부터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렇게 무게를 달아 보실 때 "아, 하나님이 뭔가 또 일을 시작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뛰어야 한다.  많은 경우 뎃셈만을 기대하고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끝내 버리기 때문에 은혜의 샘이 곧 말라 버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너진 이스라엘의 제단을 보며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한다.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버린 앙상한 이스라엘의 소망 없음을 보며 목놓아 울었어야 한다.  민족을 가슴에 품는 사람, 교회를 심령에 끌어 안는 사람이 되라.  우리의 눈에는 모압이 들어와서는 안된다.  비록 흉년으로 휘청거리고 있을지라도 유다 베들레헴이 우리의 영적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의 심정(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어야 했다.  그리고 회개했어야 했다.  하나님과 눈높이를 맞추면 역사는 이루어진다.  유다 베들레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아야 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철부지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을 헤아려야 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네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37-38)


1-5. 부
스러기 묵상

도피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아무리 베들레헴이 타락하며 예루살렘의 성전(교회)이 세속화되었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예루살렘의 풍성했던 은혜를 기억하며, 점점 그 빛을 잃어가는 베들레헴의 영광을 목숨 다 하여 지켜가야 했던 그였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심정으로 베들레헴에 뼈를 뭍을 각오를 했어야 한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사랑과 은혜 가운데 부흥하는지 아나요?  엘리멜렉처럼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 흉년'을 만나도 그곳에서 생명을 건 신앙의 승부를 해내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한다.  떠돌이 엘레멜렉, 떠돌이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없다.  베들레헴은 우연히,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1-6. 도피자의 행로

  문제는 피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또한 그냥 그대로 덮어두거나,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도 역시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 해결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이다.


1-7.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을 보라.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발걸음의 당당함을 보라.  주저함도 없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  자기가 가는 길이 옳다고 박박 우긴다.    

 
1) 흉년(凶年)의 베들레헴을 버리고, 풍족과 짝하여 모압으로!  
  이스라엘은 흉년이었지만 그는 풍족했었다(21절).  보이는 흉년은 피할 줄 알았어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징계는 계산하지 못했다.  흉년은 정복할 수 있는 문제요,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까 흉년을 만난 유다 베들레헴의 백성들에게 '풍족'한 것을 나누며 살 수 있는 그런 기회의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흉년 앞에 풍족의 모압신을 의지했고, 급기야 하나님 없는 세상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온 유다는 흉년인데 엘리멜렉과 그 가족은 보란 듯이 "풍족하게"(1:21), 그리고 당당하게 모압으로 갔다.  

  육적인 판단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며, 제사 드리는 삶의 터전을 매각하고 하나님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옳기는 '뻔뻔함'을 보라.  이것은 '영적 간음'이다.  모압으로의 도피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장이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스스로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불행의 서곡(序曲)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면 사람은 언제나 세상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은 방자하게 행동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과도 같은 수순이다.  

    *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창12:10).
    * 광야에서 다시 애굽을 그리워한 이스라엘 백성(민14:4- ).
    * 니느웨를 거부하고 다시스로 내려간 요나(욘1:1- ).    
    *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딤후4:10).

  베들레헴에 있을 때는 베들레헴의 소중함을 모른다.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교회 안에 있을 때, 믿음으로 살 때는 은혜와 축복의 고귀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2) 하나님을 떠난 사람, 그는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 도피'는 더 큰 비극을 이미 품고 있었다.  모압의 풍요 앞에 나아가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라.  실로 참담한 몰락이 왔다.  이방 여인이 며느리가 되다.  이스라엘 + 이방 = 더욱 이방 속으로!  생각해 보라.  이방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하나님을 떠나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완패(完敗)다.  하나님의 징계가 점점 구체화되어진다(1:21).  하나님을 버린 모압 10년은 처음에는 괜찮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사람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으며, 마침내 회복 불능의 '영적 공항'에 빠져들고 말았다.  해결책은 모압에 있지 않다.  이것이 엘리멜렉을 통해 보여주시는 영적 교훈이다.  엘리멜렉은 숫한 숙제만을 남기고 떠나 버린다.

 
3) 당신은 하나님을 떠난 경험이 있는가?
  당신의 선 자리는 안전한가요?  혹시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모압이었을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다가 오셨나요?  하나님이 행동하고 계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다음 셋 가운데 하나다.

  첫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징계는 신앙의 선택 사양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그렇다면 과거든, 지금이든 시련과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기회의 시간표'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둘째,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 그러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총 밖에 서 있다.  그렇다.  지금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노크하고 계신다.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죠?  그것만큼 영적으로 어린아이요,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셋째, 더 큰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손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엘리멜렉처럼 끝날 수 있고, 나오미(Naomi)처럼 시작될 수 있다.  동시에 오르바(Orpah)처럼 끝날 수 있고, 룻(Ruth)처럼 시작될 수 있다.  


1-8. 10년 결산서

  모압 경험은 엘리멜렉만으로 충분하다. 잘 살아보려고, 뭔가 성공해 보려고, 눈앞에 있는 고통과 고민을 좀 해결해 보려고 생각하고 결단한 결정이 고작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을 버리는 것, 축복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리는 것, 베들레헴 없이도 충분히 승리하며 살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실패의 전주곡(前奏曲)이었다.  하나님은 지금 엘리멜렉을 샘플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행복해 질 수 없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인정해야 할 인생의 결론이다.  엘리멜렉이 보여준 것은 이것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엘리멜렉의 10년사에는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이 없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부재중!(不在中)  이것이 모압 10년사다.  그게 인간의 역사다.  인생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말라.  엘리멜렉이 그랬다.  그러다가 망했다.  이것이 인간을 추적하는 성경의 집요한 고발이다.  


1-9.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런데 이상하다.  여기서 끝나 버리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인간은 끝났으나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신다.  참으로 신기하고 기가 막힌 역전(逆轉)이다.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는 역사가 시작된다.  어디서?  예, 인간 실패의 자리에서.  그것도, 유다 베들레헴이 아니라 모압에서.  누가?  하나님이 친히 먼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은혜라 말하지 않는가.  마침내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이방의 땅 모압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6절).  기적은 마침내 시작된다.  하나님을 떠나 실패한 인생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놀라운 일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모압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찾아가셨다.  오늘, 바로 이 시간도 하나님은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못난 인생들을 찾아오신다.  아, 은혜가 아닌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송가 410장 1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내가 확실히 아네

  마음의 문을 열라.  내 마음의 창이 모압과 같이 황무한 땅임을 고백하라.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하나님께서 시작하고 싶어하심을 깨닫으라.  엘리멜렉의 10년 결산서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이제 엘리멜렉의 가문에 남은 것이라고는 나오미와 두 자부뿐이다.  그러니까 숙제만 남겨진 셈이다.  인간으로서는 절망이요 비극의 연속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거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실패하여 깨져버린 바로 거기에서 다시금 불씨를 일으키신다.  


1-10.
부스러기 묵상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엘리멜릭의 계산에 의하면 베들레헴 에브랏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을 떠났고, 이방 땅에서 보란 듯이 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방 땅에서 외롭게 죽고, 소망 없다고 판단했던 베들레헴 바로 거기에서는 보아스(Boaz)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성장하고 있었다.  인간은 결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버리고 자기 살길을 찾아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버리고 탕자처럼 먼 나라로 갔지만, 하나님은 그가 포기한 그 땅에 보아스를 준비하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넘어 설 수 없는 간격이요, 역설의 지점이다.  인간이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아직 내 인생의 결론은 '이거다'라고 말 할 때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도 당신 안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이야기 그 여백(餘白)은 있다.

  하나님은 10년의 역사를 보란 듯이 역전시키고 계신다.  그렇다.  에브랏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사사시대의 어려움과 흉년이라는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회복의 그날을 포기하고서 이방의 땅으로 내려가는 것, 그 가운데 누가 과연 최종적으로 웃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희망은 베들레헴인가, 모압인가? 이 비밀의 질문은 처음부터 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숙제다.  마침내 그 답안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기 시작하신다.  계속해서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자.

2.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나오미와 룻(회개)  (참고지도)

  두 종류의 성도가 있다. 거북이형이 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를 말한다.  그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서 "삼일 길"을 그냥 앞으로만 갔던 사람이다. 다른 한 부류는 토끼형이다.  요나처럼 하나님을 떠나 자기 길로 나아가는 자를 말한다.  그는 니느웨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해야 할 사명을 버리고 다시스로 도피한 사람이다.  룻 이야기에는 이 두 종류의 성도들이 함께 등장한다.


2-1. 귀향의 길목

  엘리멜렉은 모압이 자기 인생의 끝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든 꿈은 모압에서 사라져 버렸다.  엘리멜렉은 모압을 짝사랑했으나 모압은 엘리멜렉을 배신했다.  모압이라는 소망은 마침내 비극의 종말로 막을 내린다.  


2-2.
하나님의 초청장(VISA)

  인생이 기록하는 룻기는 여기서 끝이다. 엘리멜렉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그가 버렸던 소망없는 땅 베들레헴은 10년이 지난 지금 소망의 땅으로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소망의 땅이라 생각했던 모압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버리지 않았으며,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가나안에서 마침내 새 일을 시작하신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는 말은 진리이다.  이것이 룻기 1막1장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6a)

  베들레헴의 회복의 열쇠(key)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응답의 서곡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곳 모압에까지 들려왔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소리를 모압이라는 이방에서 듣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모압으로 갔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없는 모압까지 그 인생들을 찾아가셨다.  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1)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집 나간 자식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품에 품는 것처럼 자기백성들을 돌아보신다.  비록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곳까지 찾아오신다.  우리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찾아오셨다.  가나안을 앞에 두고 광야에서 배신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갈4:4) 죄악된 세상을 찾아오셨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고통을 아시고(출3:7) 애굽으로 친히 찾아오신 것처럼 모압까지 찾아 오셨다.
  
 
2)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인생의 기회다
.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시작하신 유다의 회복에 대한 소식은 이방의 땅 모압의 나오미에게까지 들려왔다.  하나님은 나오미보다 먼저 일하시기 시작하셨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시각이다.  나오미가 모압생활 10년만에 처참하게 추락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 하나님은 유다 베들레헴의 회복을 이미 시작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듣는가?  응답하라!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기회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비록 하나님 없는 이방일지라도 그곳에까지 전파되었다.  하나님은 찾아가신다.  나오미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셔야 할 사람들, 하나님이 아니면 영원한 생명없이 점점 죽어가는 인생들에게도 하나님이 찾아가시도록 기도해야겠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 귀울이는 영적 갈급함이 점점 사리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적 목마름이 없다.  영적 '기아현상'이요, 심각한 영적 무정부시대인 것이다.  여기 한 목말라 부르짖는 시인의 몸부림을 보라.  그는 지금 이방의 땅 바벨론 강변에 앉아 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런데 지금은 포로가 되어 끌러와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이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온 민족이 슬피 울며 탄식하는 절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6, cf. 겔1:1-3)

  여기 애통해 하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보라.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보라.  지금 모압에서 유다를 기억하고 있는 나오미의 현실이 그러하다.


2-3.
갈림길 인생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6b,7b)

  전환점이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마침내 무대의 막이 1막 2장으로 바뀐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모습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있을 때에는 시련의 연속이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았다(창12:10-13:13).  창12:1절을 아직 순종하고 있지 못 할 때였다.  그러나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창13:14),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하자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축복하셨다.  그 이후에 의롭다함을 얻는다(창15:6).  본문은 아브라함처럼 인생의 전환점 앞에 서 있는 여러 인생들을 소개한다.  

  먼저, 나오미와 함께 출모압 앞에 서 있는 두 자부들을 만나보자.  자부들은 나오미와 함께 일어나(6b)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는 것까지는 잘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일을 두 자부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다.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8a)  

  우리네 인생은 이처럼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갈림길들로 가득하다.  

 1) 룻 : 모압 → 베들레헴(14절).   
룻기가 계속되면서 앞으로 룻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그러나 룻은 눈에 빤히 보이는 암울한 현실들(11-13절) 보다는 나오미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가는 것을 선택한다.

 
2) 오르바 : 모압 → 모압(14절).
 
그러나 다른 한 자부 오르바는 결국 모압신에게로 돌아갔다(15절).  그녀는 거기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녀는 우리가 여기서 잠시 주목할 사람이다.  오르바는 나오미를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기회가 주어졌다.  10년동안 그녀는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웠다.  그 흔적은 본문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룻기 1장 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나오미의 모압 회고록은 기본적으로 신앙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라는 면에서 이처럼 생각하는 것는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녀가 나오미와 결별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떠났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결실할 수 있는 싹이 나는가 싶더니 세상의 염려와 일락의 기운에 막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만다.  마치 엘리의 두 아들처럼,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처럼, 첫사랑을 버린 에베소교회처럼(계2:1-7) 시작만 좋았을 뿐이다.


2-4.
나오미의 고백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나오미는 변화되기 시작한다. 오늘 본문은 모압 10년을 결산하는 나오미의 회고록이다(8-13절).  나오미의 깊은 영적 통찰(spiritual insight)인데 그 분위기는 '단조'(短調)풍의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풍긴다.  "포카리스웨트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가 아니라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그녀를 깨어나게 했다.  이처럼 하나님 외에 인생으로 하여금 인생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나오미는 신앙의 재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재기의 선언과 출발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모압에서였다.  그러므로 오늘 혹시 모압에서 방황하는 성도가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다시금 베들레헴을 향한 신앙의 재기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5.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13절).

  마침내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날이 오기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자신의 일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드디어 깨닫는다.  "우연히, 자신의 실수로, 누구 때문에, 재수가 없어서 …"가 아니다는 것을 인정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1) 나오미 : 베들레헴 → 모압 → 베들레헴.  
  고향 땅을 기억하는 나오미를 만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루터기처럼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가슴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오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가 최종적으로 서는 곳이 하나님인 사람은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나오미는 구약의 탕자다(눅15:11- ).  도피 → 징계 → 회개 → 회복의 순환(cycle)이 같다.  여자니까 탕자가 아니라 탕녀라고나 할까.

 
(2)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으므로
."
  문제의 본질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10년이 필요했다.  남편 탓으로, 아들들 탓으로 실패의 원인을 전가하지 않는다.  탕자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다시 귀향 길에 올랐던 것처럼 나오미 역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귀향을 시작한다.


2-6.
부스러기 묵상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라 함께 가자!"(아2:10).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신다(욜2:12-13, 말3:7).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하여 룻을 구원하시고, 룻을 통하여 나오미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이렇게 쓰시고 싶어하신다.  당신의 나오미를 발견하라!  또한 당신의 룻을 발견하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저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2)

어서 돌아오오 | 찬송가 317장 1-2절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우리 주는 말마나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나오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나오미는 모압이 가져다 준 10년동안의 고통을 청산하고 드디어 하나님 앞에 항복한다.  모압은 그녀에게 실패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러나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바라볼 때, 아니 하나님을 기억할 때 그녀의 인생을 다시금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모압이 아니다.  그 일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가능하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지금도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아직 상거가 먼데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인간은 하나님을 포기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때다.  나오미처럼 귀향 준비를 서두르자.


2-7.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나오미는 인생의 전환점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더 없는 부담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압 10년이라는 과거와 결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미 그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그는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남편은 땅에 묻고, 두 아들은 가슴에 묻었다.  그러나 모압을 떠나며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나오미의 고백들은 '어두운 추억들' 뿐이다.  나오미는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바로 그것과의 결별을 시작한다.  

15절


  모압을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나오미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만감(萬感)이 교차된다.  무엇보다 나오미는 모압의 잔재를 다시 베들레헴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다시 시작하는 베들레헴은 모압의 재판이지 않기를 깨닫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10년의 고통을 분명하게 고백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한 여인의 처절한 통곡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온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오르바는 단순히 모압이라는 지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백성에게로, 거짓 신(영)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오르바에게 회개의 기회를 10년이나 주셨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사랑하여 모압에 그대로 남았다.  동일한 10년이 이렇듯 서로에게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오르바와 룻이 선택한 길은 극과 극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람이 과거라는 지난 역사를 여행하듯이 미래로의 여행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나쁜 쪽에 줄을 서는 그런 일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라는 시간표를 동일하게 걸어간다.  동일한 시간이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한번 연습해 보고 다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번 살아보고 잘못되었으면 과거에 잘 살았던 부분에서 벌어 놓은 보너스 점수를 실패한 부분에서부터 사용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으로 설래이는 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전영록이 부른 유행가의 일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19절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10년 전과 10년 후가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게 또 있을까.  비웃음과 조롱, 멸시와 천대, 그리고 모욕과 비아냥거림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실패한 인생을 두고 벌이는 언행 치고는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베들레헴 백성들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을 형편이 못된다.  이들 역시 사사시대를 살아가며 타락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 입음을 반복하면서 "가나안이 이처럼 초라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밖에는 잘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과거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곰탕 국물처럼 고아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오미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실패하면 인생은 꼭 다른 사람을 향해 눈을 돌린다.  그것도 잘 한 것에 대해서 박수하고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패한 사람에 대하여 하는 언행치고는 가혹하기 그지 없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해 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 인심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가.  죄인들, 약한 자들, 세상 사람들이 우선순위(優先順位)로 놓고 있는 소위 학벌이나 생활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함께 하기에는 영 아니라고 괄호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세상에서 상처받고 갈 곳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나오미처럼 취급하는 공동체는 성경이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런 곳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곳이다.  교회는 누구나 다 올 수 있고, 또 와야 한다.  생각해 보면, 나오미가 위로 받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땅은 오직 베들레헴 뿐이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를 정죄하기에 바빴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실패한 인생이 갈 곳은 어디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탕자의 아버지이시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고 영접해 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배역을 맡아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교회는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피난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한 시대를 심판하실 때 그때는 반드시 교회가 타락하였을 때였다는 것을 교회사(敎會史)는 증언하고 있다.  교회가 소망의 빛을 잃으면 그 시대는 소망이 없다.  나오미가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으로 믿었던 메들레헴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주인이신 교회여야 한다.  나오미를 용납하고 그로 하여금 새사람됨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이다.

20-21절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귀향함에 있어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과거보다 현재가 철저하게 초라하고, 무너졌으며, 실패한 인생이었다는 공개적 선언인지도 모른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인생의 결론을 하나님은 나오미를 샘플(sample)로 이스라엘 앞에 보여주신다.  철저하게 애통해 하는 나오미를 보라.  

  "나는 지난 날의 나오미가 아니오. 나오미는 죽고, 마라라는 이름의 여인이 여러분 곁에 왔다오. 나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요. 베들레헴은 나를 나오미로 기대했지만 모압은 나를 마라로 만들었다오. 내 인생의 결론은 마라라오. 무슨 얼굴로 나오미이기를 고집하겠소. 나를 기쁨이라 부르지 마시오. 나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내 이름은 슬픔입니다."

  자신이 '마라'라는 이름의 여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은 그녀는 고백한다.  나오미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그녀가 결단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과, 동시에 지난 10년의 모압 생활을 한마디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납하신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생활의 기회를 주신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37-3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그럼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나오미의 고백을 계속 들어보자.  나오미는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다.  변명하지 않는다.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직 죄인인 자신을 홀로 세운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단독자로 -계속되는 '나'(일인칭 I)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외롭게 심판대 앞에 선다.  "빈 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찬송가 188장 3절)라고 눈물로 회개하는 외롭고 처절한 솔로(solo)로 회개의 찬송을 부른다.  객석에는 오직 자신의 죄를 정죄하는 청중들로 가득 차있다.  그녀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이것이 죄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아닌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세우신다.  바로 그 때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이다.  이 때가 구원의 날이다.  이 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할 때이다.  인생은 죄를 범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은혜를 받는 기회로 만드신다.  하나님을 만날 기회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을 찾아야 만 하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순간이다.  나오미는 '하나님-나'의 신앙법칙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진단한다.

 
1)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는 고백이다.  여기 "인생은 괴로움이다"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한 여인을 보라.  그런데 그 괴로움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채찍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잉태된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시간표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은 희망의 모압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괴로움의 모압으로 그녀의 선택을 만드심으로써 그녀의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알게 하셨다.

  여러분은 어떠시나요?  지금 당면한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풀어가고 있나요?  문제는 '나'에게 있다.  이것이 나오미가 고백하는 첫마디이다.  여러분이 괴로워하는 문제의 탓을 어디에 맞추고 있나요?  하나님께 따지는 식의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것 말고, 나의 실패의 근원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구나 라는 겸손으로부터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라고 인정할 때에만 문제는 해결된다.

 
2)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이여! 이제 나는 빈 손 입니다.  이 손을 채울 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는 고백이다.  참으로 인생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풍족할 때는 하나님을 떠나더니 모든 것이 없어지자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실패마저도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가 아닌가.  어렵고, 망하고, 문을 닫고, 질병이 찾아와 시한부 인생이 되고, 하는 일마다 안되고, 바로 그 때가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시는 때라는 것을 빨리 눈치채야 한다.  

 
3)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하나님의 징계임을 고백하고 있다.  죄인은 자존심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것이 바로 죄(Sin)다.  나오미는 모압 10년의 타향살이는 하나님의 징벌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가문이 멸문(滅門) 앞에 선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모압을 택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죄의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하면 해답은 없다.  죄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쉬운 일 또한 아니다.  따라서 죄와 관련하여 '일인칭 I 용법'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와 관련하여 나를 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위대한 시작이다.  나오미는 마침내 새로운 시작 앞에 선다.  


2-8.
하나님의 회복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나오미의 회개를 하나님은 회복으로 이어가신다. 하나님은 모압의 잔재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모압과 결별하는 것만이 나오미의 살 길이다.  이것을 나오미는 회개를 통해 정리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오미는 자신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함께 베들레헴 귀향 길에 나선 자부 룻에게 모압과 베들레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명한다.  나를 따르려면 나처럼 모압과 완전히 결별하라.  이것이 룻을 향한 나오미의 최후통첩(最後通牒)이었다.  여기에 대한 룻의 태도는 매우 특별하다.  우리는 룻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이야기의 빛을 보게 된다.  

16-18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등장한다.  우리는 룻의 출현을 보면서 하나님이 마침내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나오미가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입게 된 배후에는 룻을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한 사실 때문이다.  룻은 모압 10년을 그래도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  그는 며느리 룻을 전도하는데 성공한다.  룻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룻에게 바른 신앙을 뿌리 내리도록 할 정도로 나오미는 경건생활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22절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온다.  이방 여인 룻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1:6) 듣는 때를 기가 막히게 섭리하셨다.  아니, 나오미가 회개하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는 길목을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 벌판으로 예비하셨다.  

 
1)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出베들레헴일 때는 흉년이었는데 추수기에 入베들레헴을 하게 된다.  나오미의 가족들이 볼 때 소망 없던 땅이었던 베들레헴에도 추수의 기쁨이 넘쳐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허망하고 착각일 수 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찬송가 205장 1절)며 돌아온 나오미에게 이처럼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되는가를 보여 주신다.  탕자가 회개하고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잔치가 배설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인생들을 실망시키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 뺄셈부터 하신다.  나오미가 모압의 모든 죄악들을 다 회개하고 그 잔재를 완전히 빼버리자 하나님은 그 빈 부분을 축복으로 더하신다.  이처럼 일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2)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하나님은 그들의 발걸음 앞에 서셔서 그들을 인도하신다.  신자가 서야 할 땅은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이 살아있는 베들레헴 뿐이다.  베들레헴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성도의 소망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비록 지상의 교회는 천상의 교회에 비해 볼품 없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 무리를 더 하시는 일을 기뻐하신다.  무너진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방의 백성들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바로 당신에게 부탁하신 명령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아2:15)고 명하신다.


2-9.
부스러기 묵상

  지금은 다시 돌아올 때다. 아직은 기회의 시간이 남아있다.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노아의 방주문이 닫히기 전에, 소돔성이 멸망하기 전에, 광야교회(행7:38)에서 다 멸망 당하기 전에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모압에서의 나오미는 심히 미약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의 일생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시고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다시금 기회를 주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바로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1막 3장이 주는 메시지다.

찬송가 290장 1절 |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편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 갈 내 고향 하늘나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권고하시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직은 희망이 있다.  오늘도 나에게 본향의 소리를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희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앞으로 전개될 나오미의 인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지켜보도록 하자.  

  모압에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다시 기억하는, 그리고 그 품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회개라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려는 사람, 그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베들레헴은 아직 희망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문 밖에 서서 당신의 사랑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 버린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모압에서 실패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다시 본향으로 귀향한 나오미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셨다.  "추수 때"를 어떻게 위대한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 가실지 2막 1장을 기다리자.  과연 베들레헴은 희망의 땅, 아름다운 땅인가?  다음 시간에 계속 추적해 보도록 하자.


2-10. 하나님의 부재(不在)

  룻1:1-5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 없는 10년이다.  어두움이요, 영적 수면 상태이자 영적 침체의 교과서다.  인간이 선택한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침체를 10년으로 마감시키셨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밟으실 때 '그 뜻'을 깨닫아야 한다.

  자, 1막 2장으로 넘어온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있다.  구구절절 하나님이 고백되어지고 하나님이 숨쉬고 계신다.  그것은 나오미가 6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렇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은총 앞에 서기를 원하자 마자 일이 너무도 쉽게 풀리는 것을 본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여기에는 깊은 어떤 섭리가 있는 것인가?

  1장의 자막처럼 흐르는 22절, 그러나 거기에는 무엇인가 긴장이 있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 보여지리라는 흥분이 기다린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事(史)가 그렇다.  나오미와 룻은 훨씬 이후에 이 신비스런 하나님의 활동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신앙은 진행형( -ing)이다.  이것이 1막 3장이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반전한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베들레헴에 들어서자 말자 보아스가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 가능한가?  


2-11.
베들레헴 서곡

  인간이 몸부림치던 10년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마치 연어가 머나먼 길을 떠나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다시 자기가 자라던 곳으로 귀향 -귀소본능(歸巢本能)- 하듯이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코 살 수 없음을 나오미는 확증한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던 화려한 외출, 제1막은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21절)는 독백(자막)을 남기고 10년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만다.  


2-12.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당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야 하는 여백을 보셨다. 10년만의 귀향(歸鄕), 10년만에 밟아 본 은혜의 땅 베들레헴, 하나님의 체취와 은총의 기억들을 부둥켜 안고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붙잡고 귀향한다.

  참담하게 무너졌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압에서의 여정, 바로 그 속에 우리 주님은 한 사람 '룻'을 준비하셨다.  나오미는 실패했으나(1:20-21)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모압으로 향했던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이었는가를 '룻'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밝히신다.  이것은 룻이 전면에 등장하는 2장부터의 이야기에서 확증된다.

  한편 나오미는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21)라고 고백한다.  아직까지 그녀는 며느리 '룻'을 통해 그려 가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  나오미가 벌써 하나님이 펼쳐가실 룻 이야기를 알 길이 없다.  나오미에게 있어 룻은 아직 베일에 가려있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주와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여 네 눈을 얼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시119:18)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현재 시간표에도 이런 하나님의 무수한 섭리들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미처 내가 우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는 두 여인의 발걸음에 축복의 양탄자를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은총, 그것은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1:22) 두 여인을 통해서 거두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내다 보셨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모압은 회개의 자리요, 베들레헴은 축복(회복)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철저히 '모압'에서 깨닫게 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paradox)이다.  이 은총이 어느 날 갑자기 베들레헴에서 확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압'에서 주어지고 '베들레헴'에서 열매 맺는다.  

  이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의 시각(perspective)이다.  '모압'은 하나님의 연단과 시험(test)이라는 리트머스 용지(paper)였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뺄셈(-)부터 시작하셨다.  이것은 모압이 갖는 이중성(dualism)이다.  영적인 안목이 있는 자만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법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절망하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바로 그 자리가 베들레헴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시작이다.  베들레헴은 고통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산고(産苦)의 고통 후에 자녀를 낳은 어머니는 건강한 자녀를 보는 순간 그 고통을 잊는다.  따라서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식의 영적 패배주의는 베들레헴의 가장 큰 적이다.


2-13.
원점행진

  인생이 망쳐 놓은 제1막 1장의 모압 이야기를 하나님은 룻을 무대에 세우심으로서 베들레헴 이야기를 새롭게 하신다.  참담했던 모압의 과거사(過去事)를 은총과 축복의 예루살렘으로 보상하셨다. 하나님은 모압을 기억하시지 않았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기억하지 않으셨다(시103:12, 사43:25).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회개의 발걸음, 그것이면 족하셨다.  모압은 '무'(암흑, 실패)였으나, 베들레헴은 '유'(광명, 은총)이다.

  이렇듯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9:17).  10년 전 하나님의 품을 떠나 탕자처럼 살았던 자기의 모든 것은 헌 부대다.  '하나님'까지 과거 속에 묻어 버리고, -마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딤후4:10) 갔던 것처럼- 먼 땅 모압으로 것은 헌 부대다.  그러나 다시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고 귀향했을 때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었던 돌아온 나오미는 새 부대다.  그녀는 아버지의 백성으로 거듭난 새사람이다.

  모압에서는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는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시며 저자(著者)이시다.  이제 직접 하나님이 그들의 이야기를 집필하신다.  나오미가 쓴 제1막의 스토리는 실패史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펜을 잡으시고 써 내려가시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파노라마가 펼쳐 보여지기 시작한다.  


2-14.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베들레헴이 시작되는 동구 밖에 하나님은 그녀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인생이 자신들의 인생에 플러스(plus, +) 한 것은 '모압'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고 긴 사랑의 역사를 준비해 놓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 사람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오미가 모압에 있을 때부터 베들레헴의 은총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한 마리 '어린양'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모미 곁에 '룻'을 붙여 주셨다는 점이다(1:16-18).  나오미는 모압에서 불신앙을 플러스(+) 했으나, 하나님은 모압의 환상을 마이너스(-) 하셨고, 또한 그러한 오염된 죄악의 본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인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모압을 플러스(+) 했으나, 하나님은 축복의 룻을 플러스(+) 하셨다. (김충만 목사)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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