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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데살로니가전서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4 : 1~1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2:01
데살로니가전서 4장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ㅇ종말로 형제들아 - '종말로'의 헬라어 '로이폰'은 바울의 임박한
종말관을 엿보게 하는 말이며, 서신에서 종결 부분임을 알리는 말이다(엡 6:10; 빌
4:8;살후 3:1). 바울은 '로이폰'과 아울러 '형제들아'(아델포이)라
는 애정어린 말로 편지의 내용을 전환시키고 있다. 즉 앞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원(祇願)을 언급한 것과는 달리, 이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결함을 지적하고
그들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시키고 있다(Thomas).
ㅇ주 예수 안에서...권면하노니 -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은 예수 그
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사도의 권위로 주는 것임을 나타낸다.
ㅇ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
'받았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렐라베테'는 바울이 데살
로니가에 있을 때 그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말한다(2:13). 혹자는 사도 바울의 복음 전
파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1) 복음의 요약. 그것은
설교의 형태나 신앙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인 삶.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삶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Bruce).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ㅇ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 '명령'의 헬라어
'파랑겔리아스'는 군사 용어로서 매우 권위적인 말이다.
또한 '주 예수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 투 퀴리우 예수'
는 '주 예수를 통하여'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이 전한 말은 곧 그리스도의 '명령'이었다(고
전 14:37).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ㅇ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1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
게하는 일은 그의 뜻을 준행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분이 거룩하신 것같이(레
19: 2) 그의 백성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레 11:44,45;벧전 1:15,16). 혹자
에 의하면 3:13의 '성도'의 헬라어 '하기오쉬네'는 '거룩한 존
재'를 의미하는 반면에, 본절의 '거룩함'의 헬라어 '하기아스모스'
는 '거룩하게 되어가는 과정'를 뜻한다(Lenski, Bruce).
음란을 버리고 - 음행에 관해서는 바울이 본서를 쓰기 1, 2년 전에 열렸던 예루살
렘 회의(A.D.49)에서 규정을 정하여 이방 교회에 알린 바 있었다(행 15:20). 성적인
순결이 성화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고 특히 음행이 성행
하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음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주로 '매춘부'(포르나이)와
의 성적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나 여기에서는 그 외 부정한 성관계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19:9;행 15:20, 29;21:25;고전
5:1). 기독교나 유대교에서는 '결혼'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성관계가 인정되는 것이었
으나 이교 사회에서는 결혼한 사람 이외의 사람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 허용되었다.
또한 그들의 종교적인 제의(Cult)에는 음행이 수반되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음행이
하나의 제의로서 허가된 행위였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음행에 관해 언급한 것은
바로 이 제의에서 행해지는 음행을 피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Lightfoot). 바울은 복
음이 이교도 지역에 들어갈 때 음행과 갈은 악습(惡習)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믿
었다(고전 6:12-20).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ㅇ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 혹자는 '거룩함'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존귀함'
은 아내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Lightfoot) '거룩함'과 '존귀함'은 성적인 무절제로부
터 벗어나야 가능하다(롬 1:24).
ㅇ자가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 '아내를 취할'로 번역된 헬라어 '토 헤아우투스큐
오스 크타스다이는 두 가지로 해
석된다. 이 문구가 두 가지로 번역되는 이유는 '아내'의 헬라어 '스큐오스'
의 본래 뜻이 '그릇'이기 때문이다(Vessel, KJV). (1) 고후 4:7 즉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를 근거로 하여 '그릇'을 '몸'(body)으로 번역한다
(Chrysostom, Calvin, Grotius, Bengel, Olshausen, Meyer, Bruce). (2) 벧전 3:7 즉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를 근거로 '그릇'이 뜻하는 것을 '아내'(Wife)라고 해석하
기도 하다(Augustine, Schott, De Wette, Hofmann, Alford, Thomas, Lenski, Jowett)
그러나 라이트푸트(Lightfoot)는 '그릇'을 '아내'로 해석하는 것은 단순히 남편의 성
적 만족을 충족시켜 성적인 범죄를 예방시켜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아내를 전락(轉落)
시키는 것이므로 온당한 해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브루스(Bruce)는 삼상 21:5
즉 "부녀를 가까이 아니하였나이다...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에서 '그릇'
(켈리)이 '몸'을 의미하듯이 본절에서도 같은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결국
전후 문맥상 '그릇'을 '아내'로 번역하는 것은 5절 즉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말
고'와도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므로 (1)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ㅇ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 이와 같은 표현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자주 사
용한 것이었다(갈4: 8;살후 1: 8).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삶의 지침
(指針)을 갖지 못한 자들로서 정욕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Thomas).
ㅇ색욕을 좇지 말고 - '색욕'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도스'는 '격렬한
감정'(passion, NIV)을 뜻한다. 혹자에 의하면 '파도스'란 억제할수 없는 욕구로서 인
간을 압도하여 수동적으로 끌려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Findlay). 또한 '좇지'의 헬
라어 '에피뒤미아스'는 문자적으로 '강한 욕망'(violent
desire)을 뜻하며 여기서는 '파도스'의 격렬한 욕구를 실행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리
킨다.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ㅇ이 일에 - 혹자는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티'는 상
업적 용어로서 '장사', '거래'를 의미한다고 본다(Lenski). 또 혹자는 '프라그마티'를
'법률적인 문제'로 해석한다(Baltensweiler). 그 근거로는 당시 아테네(Athens)와 그
밖의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여자가 상속자(heiress)가 될 때 그녀와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 한 명이 그 재산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요구할 수 있었는데, 이때에
종종 법적인 소송이 일어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본절의 '프라그마
티'가 오직 한 가지 일만을 가리키는 단수임을 생각할 때 이것은 성적인 관계를 가리
킨다고 볼 수 있다(Thomas, Bruce, Morris).
ㅇ분수를 넘어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바이네인'
은 '경계선을 넘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결혼이라는 허락된 경계선을 벗어나
는것'이라고 해석한다(Jerome). 이와 같이 본문은 '결혼'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서 성적
인 범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ㅇ형제를 해하지 말라 - 이에 대해 (1) 이웃의 아내를 성적으로 범하는 행위로 보는
견해(Schmithals)와 (2) 결혼하지 않은 여인을 범하는 행위로 보는 견해(Thomas)가 있
다. 그러나 결국 두 견해 모두 형제인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임을 감안한다면, 본
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ㅇ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 성적인 문졔에 관한 윤리적인 지침은 바
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이미 그들에게 구두(口頭)로 교훈한 것이었다(2: 11). 그
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를 권면하
였다(2:12).
ㅇ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 '신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디
코스'는 명사로서 '공의(公義)를 행하는자', '행악자를 심판하는
자'의 뜻을 갖는다(롬 13: 4). KJV는 이를 '보수자'(報樹者, avenger)로 번역하고 있
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루시아'(parousia) 즉 그
의 강림 때 실현된다(고전 4:5;살후 1:8).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ㅇ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 혹자는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가 하
나님의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Morris). '부르심'의 헬라어
'에칼레센'은 능동태로서 그리스도인으로의 회심은 인간의 결단
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의
초기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2:12;5:24;살후 2:14).
ㅇ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하심이니 - '부정'(아카다르시
아)의 언급은 6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바가 상업적 문제가 아니라 성적 문제였음
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부정' 앞에 있
는 전치사 '에피'는 '...에로'의 뜻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나타낸
다. 갈 5:13에서는 '자유를 위하여'(unto liberty, KJV),엡 2:10에는 '선한 일을 위하
여'(for good works, KJV)에 이 단어가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사용되었다. 반면
'거룩' 앞에 있는 전치사 '엔'은 '...안에'의 뜻으로서 이미 데살로니가 교
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거룩함 안에 거하는' 즉 '성화되어가는 성도들로 부
르심을 입었음'을 나타낸다(롬 1:7; 고전 1:2).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ㅇ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
림이니라 - '저버리다'의 헬라어 '아데테오'는 '취소하다', '무시하
다'를 의미한다(갈3: 15). 한편 혹자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
에, 영지주의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성윤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라고 한다(Schmithals, Paul and Gnostics, PP. 157, 158). 바울은 이
에 대해 자신의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반박한다.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ㅇ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 '형제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라델피아스'
는 '필라델포스'('형제지간의 사랑')에
서 파생된 말이다. '아가페'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
을 향한 보편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 '필라델포스'는 혈연으로 맺어
진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본 단어가 영적인 의미의 형
제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형제 자매가 된 신자들간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
되었다.
ㅇ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헬라어 '데오디다크토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사용되었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에 따라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1) 성령
에 의한 것으로 직접 계시받은 것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전달받은 가르침이
다(Lenski). (2)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서 성령에 의한 것이
다. 이것에 대한 근거는 8절이다(Morris, Thomas). (3)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
령의 내적(內的) 역사를 다 포함한다. 여기에 대한 근거는 예수께서 막 12:31에서 가
장 중요한 계명 중 두번째 것으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으며, 요 13:34에서는 서로 사
랑하는 것을 지상 대명으로 주셨다는 점에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 5:22에서 '사랑
은 성령의 열매'라고 증거하였으며, 롬 5: 5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
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증거하였다(Bruce).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성령의 역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앞의 세 견해가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친히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하겠
다(요 13:34 주석 참조).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하고

ㅇ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 마게도냐 지역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 세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혹자에 의하면 이 지역의 '엠피폴리스'(Amphipolis)
와 '펠라'(pella)등의 대도시에 위에서 말한 세 개의 교회이외에 다른 교회들도 세워
졌을 것이라고 한다(Lightfoot).
ㅇ더 많이 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릿슈에테 말론'
은 1절의 '폐릿슈에테 말론'('더욱 많
이 힘쓰라')과 동일한 뜻의 어구이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일반
적인 모든 삶에 관하여 언급한 반면, 여기서는 '형제 우애'
(필라델포스)라는 특정한 사랑을 더욱 많이 하라는 훈계이다.

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ㅇ종용하여...힘쓰라 - 이에 해당하느 헬라어 '필로티메이스다이 헤쉬카제인'
은 '조용하기를 열망하다'(to be
ambitious to be quiet)의 뜻이다. 여기서 '필로티메이스다이'는 활동적이며 정열적인
행동을 뜻하며 '헤쉬카제인'은 반대로 '조용히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상호 반대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연결하여 조용하기를 강력히 권면하는 것은 '영리한 바보'와
같이 일종의 수사학적(修辭學的)인 모순 어법이다. 혹자는 '조용하기를 힘쓰라'는 바
울의 권면에 대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후 영지주의자들이 침입하여 소
란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살후 3:6-13을 위시하여 목회 서
신 가운데 여러 구절을 제시한다(Schmithals, 딤전 5:13-15;딤후 3:1-9;딛 1:10, 11).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동요(動搖)는 과도한 종말론적 분위기에 기인한 것으로 추
측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견해이며(Morris, Bruce), 바울은 이와 같은 소란에 대하
여 종용할 것을 권면하였다.
ㅇ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
음을 알려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일
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있었다. 또한 헬라인들은 노동하는 것을 노예들이나
하는 천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바울은 노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엡 4:28)
친히 모범을 보였다(2:9).

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ㅇ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 '외인'이란 복음을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지
칭한다(고전 5:12, 13;골 4:5;딤전 3:7). 또한 '단정히'의 헬라어 '유스케모노스'
는 '보기 좋은', '존경할 만한'의 뜻을 갖는다. 바울은 그리
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함을 교훈한
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자신들의 게으름을 몰아내고 부지런히 일하는 자세를
견지(堅持)하여야 했다.
ㅇ궁핍함이 없게 - 이에 대한 원어적인 뜻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not be
dependent on anybody, NIV)로 경제적인 독립을 의미한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ㅇ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잠자다'는 표현은 '죽는 것'에 대한 완곡 어법으로 고대
에서나 헬라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었다. 그 증거로 왕상 2:10에는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고 기록되었고 호머(Homer)는 자신의
글 중에 전쟁에서의 죽음을 표현할 때, '코이메사토 칼케온 헤프논'
('그는 청동같이 잠들었다')이라고 죽음을 표현
하였다(Iliad 11, 241). 한편 헬라인들이나 다른 이교도들은 '죽음의 잠'을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잠'으로 인식한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깨어날 것
으로 믿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Bruce). 본절에서도 '자는자들'은 죽은 그리스도
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교인
들은 죽은 자들의 장래의 운명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문은 디모
데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바울은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ㅇ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 이런 어투는 바울이 중요한 주제를 다룰
때, 독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였다(롬 1:13;11:25;고전
10:1;12:1;고후 1:8).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파루시아'('그리스도의 강림') 때
죽은 신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했었다.
ㅇ소망 없는 다른 이 -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총칭한다. 그 당
시 이교도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가졌던 생각은 그들의 문학 작품이나 비문(碑文)에 잘
반영되어 있다. 데오크리투스(Theocritus)는 그의 글에서 "희망은 산 자를 위한 것이
며 죽음에는 희망이없다" (엘피데스 엔 조오이신 아넬피스토이 데 다논테스)라고 말
하였다(Idyll 4, 24).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ㅇ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 바울은 신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코이마
스다이'('자다')라는 말을 사용한 반면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죽다'는 의미를 지닌 '아포드네스케인'
을 사용한다. 이에 관해 혹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죄를 지는 대속적 의미를 갖
기 때문이라고 하며(Thomas) 혹자는 그의 죽음의 실제성(reality)을 강조하기 위함이
라고 한다(Bruce).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죽음은 그의 부활이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신자들의 부활을 가능케 한 것이다(고전 15:20).
ㅇ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 '예수 안에서'의 헬라어 '디아 투 예수'
를 직역하면 '예수를 통하여', '예수로 말미암아'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이란 의미이다. 이에 대한 해석이 용이하지 않다.
(1) 혹자는 예수를 통하여 신자들의 죽음이 잠으로 변하였다고 하며(Morris), (2)혹자
는 이 말이 죽은 신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Askwith). 후자의 견해는 전자의 견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다 포괄적
인 후자의 견해를 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ㅇ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혹자는 '저와함께'에 대하여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광
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Frame).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
서 '파루시아'때 예수와 함께 죽은 성도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
력하다(Morris).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ㅇ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 바울이 말하는 권위는 '주의 말씀'에
있다. '주의 말씀'(로고 퀴리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
해서는 다양한 견해가있다. (1) 예수의 묵시적인 가르침(apocalyptic teaching)을 총
칭한다(Rigaux). (2) '주의 말씀' 앞에 전치사 '엔'('안에')이 있으므로 '주
의 말씀으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 안에'로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그리스도
께서 그의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리킨다(Lenski). (3)
예수의 이름을 빌어 말한 바울 자신의 예언적인 발언이다(Calvin). (4) 정경에 기록되
어 있지 않고 교회를 통해 구전(口傳)되어 오는 예수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거
나 혹은 예수로부터 바울이 직접 계시를 받은 말씀이다(Thomas). (1)과(2)의 견해는
예수께서 '파루시아' 때 죽은 성도들이나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바가 없으므로 타당성이 적다고 할 수 있다.
ㅇ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에 대
하여 (1) 바울이 자신이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고
보는 견해(Grotius, Olshausen, Baur, Alford)와 (2)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살아 남
아 있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Chrysostom, Calvin, Hofmann,
Ellicott)가 있다. 혹자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고전 6:14절의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와 고후 4:14의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
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를 제시한다(Bruce). 또한 본절에서는 살아 있는 자로서
2인칭 복수 주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지칭하는 것은 바울을 포함
한 그리스도인 전체를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ㅇ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은 살
아서 '파루시아'를 목격은 하겠지만, 참여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영광은
얻지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죽은 자들에게도 살아 있는 자
들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영광이 하늘 나라에 간직되어 있음을 말한다
(Calvin).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이런 확신에 찬 말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
움을 버렸을 것이다.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ㅇ주께서... 친히 - '친리'는 '주께서 직접오신다'는 것의 강조이다. 행 1 :11에는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로 그리스도가 친히 오심을 강조하였다. 70인역(LXX)의 사
63:9에는 '대사(ambassador)나 전령 없이 주께서 친히 그들을 구원하였다'
(우 프레스뷔스 우데 앙겔로스 알아우토스 퀴리오스 에소센 아
우투스)라고 기록되어 있다.
ㅇ호령과 - '호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캘류스마티'는 군
사 용어로서 본문 외에 70인역의 잠 30:27에 한번 나타난다. 본절의 '호령'은 '자는
자'들을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이다(요 5:25).
ㅇ천사장의 소리와 - '천사장'(아르캉겔루)이 하나의 개별
적 천사장을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미가엘'이나 그 밖의 다른 천사들을 일컫는 것인
지는 확실치 않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일곱 종류의 천사장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도
들의 기도를 받아 하나님께 드리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서 시위(侍衛)하는 역할
을 하였다(계 8:2, 3). 그들의 이름은 '우리엘'(Uriel), '라파엘'(Raphael), '라구
엘'(Raguel), '미가엘'(Michael), '사리엘'(Sariel), '가브리엘'(Gabriel), '레미
엘'(Remiel) 등이다(위경 에녹상 20:1-20). 위경 에스라 사서 4:36에 나오는 천사장
'예레미엘'(Jeremiel)은 '레미엘'과 동일한 천사로 간주하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ㅇ하나님의 나팔로 - 본절은 사 27:13에 '그날에 큰 나팔 소리가 울려'라는 구절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온다(욜 2:1, 15;슥 9:1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고전 15: 51에 '마지막 나팔 소리'와 마 24:31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리고 계 11: 15에 '천사가 나팔을 불매'등이 있
다. 이상의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천 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은 같은 역할
을 하는 두 가지 표현임을 알 수 있다.
ㅇ그리스도인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혹자는 본구절을 근거로 두 가지 부
활을 주장한다(Wohlenberg).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의인들이 먼저 부활하고 천년이
지난 다음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악인들의 두번째 부활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계
20:4, 5).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Lenski).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죽은 성도들이 파루시아 때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자들보다 먼저 부활
하게 된다는 것이다(살후 2:13-17 주제 강해, '천년 왕국을 중심으로 본 종말론의 3대
견해' 참조).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ㅇ구름 속으로 - '구름'은 들림받은 성도들을 운송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
시(顯現時) 늘 동반되었던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 속에서 비쳐졌다가
다시 구름속으로 사라졌었다. 예컨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을 때 시내 산에 빽빽한 구름이 있었으며(출 19:16), 모세가 계시를 받
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출 24:15-18)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였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었었다(출 40:34).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하셨
을때(막 9:7)와 승천하실 때(행 1:9) 구름이 등장했었다.
ㅇ공중에서 - 본절의 '공중'에 대해서는 두가지 개념이 있다. 즉 '아래 공중'
(아에르)과 '윗 공중'(아이데르)이 있는데, 본절에 쓰여진 '공중'
은 전자이다. 신약성경에서 '공중'은 사단의 거처로 인식되었다(엡 2:2). 따라서 혹
자는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성도를 만나는 것은 그의 완전한 주권(主權)의 회복을
나타낸다고 한다(Morris).
ㅇ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 '영접하게'의 헬라어 '아판테신'
는 헬레니즘 시대에 고위 공직자가 시(市)를 공식적으로 방문할 때, 시민들이
마중나가서 호위하고 들어오는 행위를 가리켰다. 기원전 49년에 율리우스 시이저
(Julius Caesar)가 이탈리아를 경유해 올 때, 시세로(Cicero)는 본 단어를 사용하여
그를 영접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마 25:6에서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을 표현할 때 본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행 28:15에서 교인들이 바울을 맞이할 때 본
단어가 사용되었다.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ㅇ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 바울이 언급한 '이 여러 말'은 실제로 '주의 말씀'
을 지칭한다(15절). 따라서 이 말씀은 그들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견고한 기초
가 되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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