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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데살로니가전서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2 : 1~2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2:00
데살로니가전서 2장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ㅇ바울은 앞장의 내용을 연결하는 등위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를 사용
함로써 본장을 시작하고 있다. 이는 본장 1-16절의 내용이 1:5-10절 내용의 확대임
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본장이 단순히 동일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장에는 바울의 복음 전파 이면에 악한 동기들이 슴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적
대자들(거짓 사도들, 유대주의자들, 영적 열광주의자들 등)에 대한 그의 변호가 함축
되어 있다.
ㅇ형제들아(아델포이) - 바울이 증거한 복음을 부정하고 이를 방
해하는 자들과는 달리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
한다. 이 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4 주석을 참조하라.
ㅇ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 '헛되지 않은'이란 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1) 혹자는 '빈 손으로 오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해석
한다(Hendriksen). (2) 혹자는 '거짓 되지 않은' 혹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으로 해석
한다(Hiebert). (3) 혹자는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이 행한 사역의 결과를 가리킨다
고 본다(Best).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케네 게고넨'은 직역하면 '헛것으로 되지 않은',
'공허하거나 무익하지 않은'이란 뜻이며, 완료형으로써 그 효능(效能)이 현재까지 지
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데살로니
가 지역에 많은 개종자들이 나오게 된 사실을 시사한다. 즉 바울 일행이 열심을 품고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일은 분명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아울러 바울은 이
러한 사실에 대해서 다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전해들은 이야기로서 그것을 알고 있
으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직접 경험한 자들로서 '친히'(아우토이) 알
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ㅇ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
신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 그로 인해 수익을 얻을수 없게 된 주인에게 기이한
풍속을 전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하여 모진 매를 맞고(고난) 정확한 판결도 없이 옥에
갇혔다(능욕).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행 16:19-34을 참조하라. 바울은 빌립보에
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토록 모진 고난과 인격적 능욕을 당하고서도 곧바로 데
살로니가로 와서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빌립보는 데살로니가와 같은 마게
도냐에 있는 성이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곧바로 갔으므로 당시 바울이 겪
은 고난에 대한 소식은 데살로니가인들도 확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ㅇ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 바울은 언제 어느곳에서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용기와 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힘이었다.
ㅇ많은 싸움 중에 - 바울이 당한 고난과 능욕은 그가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에도 끝나
지 않았다(행 17:13). 거기서도 역시 전도할 때에 많은 싸움(고난)이 있었으며, 이 싸
움은 특히 유대인들로 인한 것이었다. '싸움'의 헬라어 '아고니'는 운
동 경기에서 경기자가 일등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며, 이 말에서
영어의 '고투'(苦鬪)를 뜻하는 'agony'가 파생되었다.
ㅇ하나님의 복음(유앙겔리온 투 데우) - 바
울은 1:5에서 자신이 믿음 가운데서 확신있게 증거한다는 의미로 '우리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복음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창시하셨으
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기
원한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이었다(롬 1:1;고후 11:7).
ㅇ말하였노라(에파르레시아사메다) - 이 말의 명
사형 '파르레시아'('대담한 말')는 '판'('모든')과
'레시스'('말')의 합성어로서 원래 언론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여기서는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뜻한다.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ㅇ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 바
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다른 좋지 않은 설교자들의 무리
와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복음 전파의 동기가 순
수함을 강조하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권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
시스'는 '파라'('곁으로')와 '칼레오'
('부르다')의 합성어로 '돕기 위하여 불러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격려'
의 뜻도 가지며, 여기서는 '권면'의 의미로 사용되어 궁극적으로 '복음 전도'를 나
타낸다. 즉 바울은 그릇된 것을 전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자신의 전도 내용이 결코 잘
못되지 않았음을 변증하고 있다.
ㅇ간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네스'는 '속임'(deceit)보다는
'오류'(error, NIV)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결코 오류가 없는 참
진리임을 나타낸다.
ㅇ부정 - 이것의 헬라어 '아카다르시아스'는 당시 이교 사상
들에게 만연하였던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바울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
이라고 비난받았음을 암시한다(Morris).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결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은 물론 복음을 전하면서 그러한 행위를 조장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하
고 있다.
ㅇ궤계 - 이말의 헬라어 '돌로'는 당시 소피스트(Sophist)나 마술사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마술적 속임수로써 부정한 이욕(利慾)을 채우던 행위를 가리킨다. 그
러나 바울은 거짓된 종교의 대부분은 어떤 열광적인 긴급성을 띠고 메시지를 선포하며
이로 인해 많은 이득을 취하나, 자신은 결코 거짓이나 부정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만을 전파함을 강조하고 있다.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ㅇ오직(알라) - 이 말은 바울이 앞절에 열거한 것과 같은 이교도들의 중
상 모략에 대하여 더욱 강한 어조로 상세하게 변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ㅇ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 '옳게 여기심'으로 변
역된 '데도키마스메다'는 금과 은의 제련에 사용되는 말
로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1:7). 바울은 자신이 하나
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에 합격하여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위임되었음을 강조한다
(행 9:1-31).'부탁을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
는 보통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
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한다. 분명 복음은 신적 기원을 가진것이기에(2절) 오직 하나님
께서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의 사신(使臣)을 선택하실때에만 복음의 위임이 가능하다.
ㅇ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위임받은 복음 전도자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가리킨다(갈 1:10). '기쁘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레스콘테스'
에는 '남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인기와 명예에 영합(迎合)하여 사람을 의식하며 복음을 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음
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기를 기뻐
하였다(롬 1:1;빌 1:1). 한편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복음 전도가 진실된 것임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감찰하
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존티'는 앞의 '옳게 여기
심을 입어'와 같은 어군의 동사로서 '시험하다', '시험을 통해 인정하다'란 뜻이며,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적(全人的)인 감찰의 의미를 갖는다.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ㅇ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이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 '아첨의 말'(콜라케이아스)은 단순
히 타인을 의식해서 하는 말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미리 계산에 넣어 하는 말을 뜻
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는 그럴듯한 말을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
을 말한다. '탐심의 탈'에서 '탈'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파세이'
는 '프로'('앞에')와 '파이노'('나타남')의 합성어로서
사물의 진상을 가리우기 위한 '가면'을 뜻한다. 즉 겉으로는 복음 전파라는 허울좋은
구실을 내세우나 안으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위선적인 행위를 말한다. 전자(前者)
가 외적 행위에 관계된 것이라면 후자(後者)는 내적 동기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 두 가지는 전도자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표준이다'라
고 말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이 언제든지 영적 선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결코 악을 자행하지 않았음을 말하며 이에 대하여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
우고 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바울의 탐심없음을 증명할수 있음을 신뢰하는 것
으로서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죄악된 세
상에서 때때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
나의 확고한 보증이라 할 수 있다.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ㅇ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자신과
같이 사도에 포함시킨다. 이는 본 서신의 서두에서(1:1) 이 세 사람이 다 같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임을 밝힌 것처럼 동역자들을 향한 바울의 진실성을 보여준다. '사도'
(아포스톨로이)는 '보냄을 받은 자','대리자'의 뜻으로 신약 시
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이다. 성경에서 '사도'란 말은 (1)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같이 한 자 (행 1:21),(2) 주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마
3:14),(3) 주의 부활을 목격한 자(행 1:21)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때때로
바나바(행 14:4,14), 주의 형제 야고보(고전 15:7;갈 1:19) 등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
었다.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ㅇ오직 -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의 순전함과 진실성을 본절에서 더욱 적극
적으로 설명한다.
ㅇ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 '유순한'(에피오이)은 종에
대한 주인의 태도나 신하에 대한 왕의 태도,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와 같이 하급
자에 대한 상급자의 관대(寬大)한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 일행
이 존경받을 권리와 지배력의 행사를 버리고 마치 자녀를 앙육하는 어머니와 같은 사
랑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ㅇ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 '유모'(트로포스)는
'자기'(헤아우테스)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강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식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고 특별한 사랑과 노력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그러한 사랑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지도하였음을 가리킨다.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ㅇ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 '너희를 사모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호메이로메
노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동사로서 간절한
마음의 깊이를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가 현재 분사형인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이 복음 전할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ㅇ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 바울은 그가 데살로
니가인들에게 권해준 선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말한다. 본절의 '목숨'에 해당하는 헬
라어 '프쉬카스'는 '생명', '영혼'을 의미하나 이는 한 사람의 전인
격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RSV는 본절의 '우리 목숨'을 '우리 자신
을'(our own selves)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한 바울
일행이 일심 단결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전도하였음을 보여준다.
ㅇ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 바울은 그의 일행이 생명을 내어
놓고 븍음을 전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온화한 어조로 말한다. 사랑은 기독교가 추
구하는 가장 고귀한 덕으로서(고전 13:13),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
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요 15 :13). 한편 '즐겨함'의 헬라어 '유도쿠멘'
이 미완료 과거형인 점은 바울 일행의 희생적인 사랑이 현재에도 계
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ㅇ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가억하리니 -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전
파하는 동안 자신들이 많은 고생과 고난을 겪어가며 자활(自活) 생활을 한 것을 회상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바울이 목숨까지 주
기를 기뻐하였다(8절). 물론 목숨을 준다는 것은 크고도 먼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증거로 가깝고도 쉬운 문제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였다. '수고와 애쓴
것'(톤코폰 카이 톤 모크돈)은 자
신들을 희생함으로써 초래한 피로와 그러한 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외적인 많은
고난들을 강조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밤낮으로 손수 노동을 하여 자급
전도를 하였으니, 그의 일은 장막 만드는것이었다(행 18:3). 바울의 이러한 솔선 수범
하는 자세는 교인들에게도 정당한 근로를 가르칠수 있었던 모범이 되었다(4:11).
ㅇ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 이것은 사도 바
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으려 한 사실과 그의 사역에
추호의 이기심이나 탐심도 개입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뿐 아니
라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자급 전도하였다(행 20:34, 35;고전 4:12;고후 11:8). 한편
바울은 전도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였으나(고전
9:14), 그는 결코 전도함에 있어서 이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회심자들
로부터 선물을 받기도 했고(고후 11:8)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는 빌립보의 형제들에
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빌 4:16). 그러나 그는 어떤 선물이든지 복음의 확장에 도
움이 될 때에만 받아야 함을 중요시하였다. 종일토톡 복음을 전파한 바울은 피곤함에
도 불구하고 남은 시간을 손수 노동함으로써 그의 회심자들이 자신의 생활비를 보조
하는 부담을 갖지 않게 하였다.
ㅇ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 '전파하였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
케뤽사멘'은 전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최선을 다해 그대로 전달하였다. 여기에 복음전도자로서의 바울의
확고한 사명 의식이 깃들어있다.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ㅇ우리가...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 데살로니가인들이 바울 일행
의 순수성을 이해하고 그들이 들은 복음에 계속 확고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바
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과 실라와 디모데의 수고를 말한다. '거룩하고 옳
고 흠없이'(호시
오스 카이 디카이오스 카이 아멤프토스)의 해석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거룩하고'는 하나님을, '옳고'는 사람을, '흠 없이'는 양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극적
언급이다(Findlay, Frame, Clarkem, Gloag). (2) '거룩하고'는 하나님을, '옳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흠 없이'는 그들 자신의 행
동 자체를 의미한다(Bengel). 이와 갈은 해석들은 커다란 차이를 지니지 않으나 가장
유력한 지지를 받는 것은 (1)의 견해이다(F.F. Bruce). 이렇게 볼 때 '거룩함'이란 하
나님을 향한 자세를, '옳음'이란 사람에 대한 올바른 행위를 가리키며, '흠 없이'란
이 두 가지의 소극적 측면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망할 바 없는 단정한 생활을
가리킨다.
ㅇ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 바울은 자신들의 선교 사역의 순수성과
진실성에 대한 확고한 증인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하나님을 내세운다. 즉 데살로
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의 외적 행동의 증인이요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의 내적 동기
의 증인이 되심을 밝힌다(Lightfoot). 실제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진실된 전도의
모습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목격한 바이며,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신실하게 복음만을 증거하였
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ㅇ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 이미 앞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
실을 상기시키고 있다(1, 2, 5, 9, 10절).
ㅇ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어머니 상(象)에서 아버지
상으로 바뀌 말한다. 앞에서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을 복음으로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의 모습을 말했으나 여기서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의 상태를 바르게 교육하는 아버지로
서의 모습을 강조한다(Chrysostom). 한편 모성(母性)과 부성적(父性的) 측면은 이스라
엘의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시 103:13;사 66:13).
ㅇ권면하고 위로하고 - 두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권면하고'
(파라칼룬테스)는 특별한 행동 지침을 충고할 때 사용되
며 '위로하고'(파라뮈두메노이)는 그러한 행동 지침
을 계속해서 따르도록 격려할때 사용된다(Lightfoot). 바울 서신에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아 사용되고 있다. 바울이 두 단어를 병행해서 쓰는 이유는 독자들에게 강하게
권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ㅇ경계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메노이'
는 보다 권위적인 어조가 담겨있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한다.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ㅇ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장차 다가올 나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과 더불어 성취될 나라이다(살후
1:5).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사이에 있게 되는 기간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기간이다. 죽음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고, 시 110:1에 기록된대로 사단이 그리스도
의 발 앞에 굴복하게 될 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고전 15:23-28).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자녀들이 유업으로 물려받게 되며 불의한 자들은 제외된다(갈
5:21;엡 5:5).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 그의 영광도 함께 나타나게 되며
그의 자녀들은 그 영광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 바울은 롬 5:2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며, 롬 8:18에서는 '현재 고난이 장차 그들
앞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ㅇ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행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
인'은 문자적으로 '돌아다님'을 뜻하는 말로서 NIV에서 '생
활하다'(to live lives)로 번역되었다. 이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과 관련된다. 즉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符合)해야 한다는
것이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ㅇ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가'와 '하
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사이에 '또한'(카이)이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이 단어는 '감사'를 강조하기 위한 말일 수도 있고(Bruce) '우리편에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Thomas). 후자를 택한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바울 일행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가 된다.
ㅇ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 '받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라본테스'
는 특별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언이나 가르침이 다음 세대
에 넘겨질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고전 11:2;살후 2:15).
ㅇ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맡씀으로 받음이니 - 앞에 나온 '받음'은 객관적인
받아들임을 나타내는데 반하여 여기에 나오는 '받음'의 헬라어 '에덱사스데'
는 주관적인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열렬히 받아들이
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말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 하여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의 말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
로 곡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바울에게 대단한
용기를 심어주는 일이었다.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ㅇ너희가...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되었으니 - 1:6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도
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나타내
는 하나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본절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
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다 확고히 해준다. 그것은 유대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
을 지킨 일이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족에게 핍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개
종함으로 인해 이전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방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
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서 온갖 수난과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딤후 3:12).
ㅇ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크리스토 예수'
는 개별적인 교회들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부활
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생명이 하나가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속 공급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해 핍박받는 자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주시고 보호하시고 견고케 하신다(롬 8:26;히
2:18).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ㅇ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
도를 죽이고 구약의 예언자들을 죽였다.바울은 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내쫓았다고 말
함으로써 자신과 그 일행을 예수와 선지자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자신들의 사도성(使徒性)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과 그 일행이 쫓겨난 일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것(행 17:5-10)과 베뢰아에서 쫓겨난 것(행 17:13)을 말한다.
ㅇ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 바울이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박해할 때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
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고 교회를 박해한 유대인들의 죄악은 바로 그와 같
은 종교적 완고성 및 편협성에 기인한다. 특히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대한 병적 우
월감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을뿐 아니라
급기야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복음 전도자들을 훼방하고 개종자들을 박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자행하였다(행 16:19). 이처럼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은
불신자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게 된다(마 11:22).
ㅇ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 '대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난티온'
은 '얼굴을 맞대고 대적하여'라는 뜻을 지닌 고어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 민족을 증오하여 적대시하였다. A.D. 1세기 경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는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 이외의 모든 이방인들을 증오하여 적대시 하였다'고 말한
다(Historiae, 5권, 5장, 2절). 또한 타키투스 이전에 바울과 동시대에 살았던 이집
트인 에이피온(Apion)은 말하기를 "유대인들이 모든 이방인들을 증오하며 대적할 것
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적대의식은 궁극
적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대항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ㅇ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함을 저희가 금하여 -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
시야라는 사실과 구원의 역사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하
였다(행 13:45-50;14:2, 19).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하여 반대한 것은 그것
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ㅇ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 이것과 유사한 구절이 마 23:32에 나온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을 둔 자들로 그들의 조상들
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고 있는 셈이었다. '채우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플레로사
이'는 이미 그들의 죄악의 잔(盞)이 가득 차서 그 한계
에 도달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항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테'
는 하나님의 종들 곧 선지자들, 그리스도, 사도들을 차례대로 핍박하는 박해의 계
속성을 강조한다.
ㅇ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노하심'이란 종말의 진노를 가리키는것
으로서 보통 장차 오게 될 진노를 뜻한다(1:10). 그러나 본문에는 부정 과거 시상인
'에프다센'('임하였다')이 쓰여 노하심이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실
로 묘사된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예수께서 마 12:28과 눅11:20등에서 하나님의 나
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말씀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그 나라를 경험하지 못했
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아직 경
험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ㅇ너희를 떠난 것은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르파니스덴테스 아프 휘몬'
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로
부터 고아가 되었다'이다. '아포르파니스덴테스'는 합성 동사로서 '고아가 되었다'는
뜻의 동사 '아포르파니조'의 부정 과거 수동 분사이다. 바
울은 자신을 고아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그리워하고 있
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Morris).
ㅇ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
는 '감성적인 마음'이나, '감정 혹은 애정의 소재지'를 뜻한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는 비록 떨어져 있으나 그의 마음과 애정은 언제나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함께 있었
다.
ㅇ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 '열정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폴레 에피뒤미아'
에서 '에피뒤미아'는 '열렬히 갈망하다'는 뜻이
다. 또한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스소테로스'
는 '페리스손'에서 유래한 비교 부사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떠나
기 이전보다 더욱더 힘썼다는 뜻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가 데살로니가를 떠나있음으
로 인해 고조된 감정을 열렬한 애정이 담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ㅇ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 바울은 두 번에 걸쳐 데살로니가에 가려
는 계획을 세웠으나 두 번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 '하였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델레사멘'은 '원하다', '결심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데
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열망을 강하게 나타낸다.
ㅇ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열망을 가로막은 것
은 사단의 방해였다. 사단의 활동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로부터의 방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울
의 몸에 있는 질병일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한 바 있
다(고후 12:7).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세운 계획들에 대한 차질이 단순히 사단의 방
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성령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
실을 바울은 인식하고 있었다(행 16:6-10).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ㅇ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 소망이라 함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신앙이 성숙하게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온 것이며, 기쁨이라 함
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眞正性)에서 나온 것이고, 자랑이라 함은 그리스도 앞에 그
들이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 것이다. '자랑의 면
류관'이란 말 속에는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가 받았던 월계관의 뜻이 있다(Bruce).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운동 경기 용어
를 자주 사용하였다(고전 9:25;갈 2:2).
ㅇ그의 강림하실 때 -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날'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이
란 말을 쓰고 있다. '강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루시아'는 고
위 관리가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거의 신적(新的)인 존재로 추앙
받는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방문할 때 쓰여졌다. 바울은 '파루시아'를 쓸 때에 이와
같이 황제의 방문을 연상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더 크고 화려한 영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ㅇ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가르'('참으로')
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19절의 '무엇이냐'에 대한 확답임을 나타낸다. 바울
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확신하였
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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