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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14 : 1~40)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0

고린도전서 (14 : 1~40)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ㅇ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바울은
사랑이 제일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3:13). 그러므로 모든 다른 은사들도 사랑을 베풀
기 위하여 있는 것 뿐이니, 은사를 구하는 자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다시 말
하면, 그는 사랑을 실시함에 더욱 필요한 은사를 구해야 된다.
"구하라"는 말은 붙잡기 위하여 열심으로 좇아 감을 의미한다. 사
랑을 실행하려고 전심(專心)함이, 곧, 그 의미이다(Lenski).
"예언하려고 하라"함은, 곧 남들을 영적(靈的)으로 유익하게 지도하는데 필요한 성
령의 지시하는 말씀을 구하라는 뜻이다. 이 은사는, 더욱 사랑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이 아래 자세히 진술된다.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ㅇ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 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
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
고 하나님께"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곧, 방언(方言)은
이 세상의 어떤 외국말이라 하고, 그것을 말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 외에는 깨닫지 못
한다고 한다(그 말을 배운 자가 그 말하는 자리에 한 사람도 없는 경우).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귀절 하반에 있는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말씀을
보니, 그것이 영적 방언이고 외국어를 가리킴이 아니다.
ㅇ그런데, 이런 이적이 교회 시대에도 있을까? 교회 시대란 것은, 계시시대(啓示時
代), 곧, 사도 시대와 구분된 명칭이다. 사도 시대에는, 표준적인 이적과 계시가 있
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렇게 터를 닦는 의미의 기본적인 역사
(役事)를 하셨다. 그 시대에 있었던 이적과 계시는, 실상 주님 재림 때까지 장성할
교회의 뿌리와 터전을 이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도의 역사(役事)를 가리
켜 터 닦는 일로 비유하였다. 고전 3:10에 말하기를, 교회의 "터를 닦아두었다"하였
고, 11절에 말하기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
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 말씀 뜻은, 사도가 그리스도를 전파할 계시와 능력
을 받아 복음을 나타낸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엡 2:20;
계 21:14).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도적 역사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는 한번만 일정한 자리에 잡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돋아 나온 줄기가 질적으로는
뿌리와 같은 것이지만, 그 모습에 있어서는 뿌리와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그 능력도 여전하시지만, 그의 사역의 경륜은, 사도 시대에는 그렇게
나타내셨고, 교회 시대에는 이렇게 나타내신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
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온 다음에는 만나 내리시기를 그치셨다.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
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시대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이는
마치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와 같으니, 그 자라나는 도중에 다시금 뿌리의 형태로 자체
를 거듭 나타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는 그 뿌리를 의미하는 사도적
역사를 거듭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교회 시대에는 사
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할지라도 특별 섭리는 있다는 것이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p.68). 특별 섭리란 것이 계시사(啓示史)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하나님의 특수 간섭이기 때문에 그의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의 행한 이적과는 다르다. 가령, 병 고침 받는 실례를 들어 말하면, (1)에수님과
사도의 이적은, 취급된 병자가 모두 치료되었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神癒)라는 것은
그렇지 못하고,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는 자도 있거니와 치료되
지 않는 자도 있다. (2)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으로 고치받은 병은 재발
하는 법이 없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 병이 재발되는 경우도 있다. (3)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친 병자들의 몸은 당장 완전해졌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다.
ㅇ위의 세 가지 사실은, 교회 시대의 신유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
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시대에 이르러서 약해지셨다는 것이 아니다. 하
나님의 권능은 여전히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사역 경륜의 이와 같은 차이점은, 특별
히 교회의 터가 되는 계시 시대(예수님과 사도 시대)의 표준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다. 우리 신앙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및 사도적 전도 내용(성경)을 표준으로
하고, 거기서 안식해야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 시대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표준적인 이적을 행한다면, 그들도 역시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 있는 계시(啓示)도 받는 다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성경만 기초로 한 기독교의 성격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을, 사도들의 역사로 나타났던 그 시대의 방언과 같
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 운동에는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
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전 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될 줄 생각한다.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ㅇ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사도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였
다(행 11:28,21:11). 그러나 그들(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도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계시 역사를 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기도 하였다(롬
12:6). 그들의 역사도 사도들의 역사와 함께 신약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엡 2:20;고
전 12:28). 이점이 방언하는 자와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고, 은사
의 미말(尾末)에 속한다(고전 12:10,28). 그러나 예언 역사는 사도의 역사처럼 계시
시대(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 교회 시대에는, 예언의 후신
(後身)으로서 설교가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기능이 같기
때문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 한 것처럼(고전 14;3), 설교도 그
러하다. 다만 예언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
왔으나,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나아가야 한
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란 말이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에 임
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다(고전 4:1,2;딛 1:7).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기독교
의 터를 닦는 자가 아니고, 사도와 선지자가 닦아 놓은 터(고전 3:10-11) 곧, 그리스
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1) 맡기
운 터와 자재(資材) 곧, 성경을 그대로 보수할 책임이 있고, (2) 또한 그 터와 그 자
재를 가지고 집 지을(교회 세울) 책임도 있다. 그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에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현대 교회에도 예언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만일 예언 같은 것이 오늘날도 나타난
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 (1) 그 예언이 맞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배
척하기 쉬운 일이다. 그러나 (2)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
부하기가 곤란할 듯하다. 그 이유는, 그 예언이 맞아도 그것이 거짓된 예언일 수
있으니(신 13:2), 하나님의 명령대로(요일 4:1) 착실히 영들을 시험하며 지내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내보는데 오랜 세우러이 지날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에 빠
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신 13:1-3에 말하기
를,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
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
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사단이 사자도 복음을 높이는
체 하며(행 16:16-17), 또한 도덕이 있게 사람을 대할 수도 있다(고후 11:14-15;마
7:15).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의 "예언"이란 것을 시험해 봄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이 권위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롬 15:4).
"덕을 세움"은 "세워 나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신자들의 산앙
사상을 증진 시킴이다. "권면"은 경계하여 양심과 의지로 옳은 데로 움직이게 함이고,
"안위"는 난관과 핍박을 당한 신자들에게 소망을 보여 주어 그들의 정서(情緖)로 하여
금 기쁨과 용기를 취하도록 하여 줌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예언"은 하필 성령의 특종 예고(特種豫告)를 전달함에 국한
한 것이 아니고, 광범위의 영적 교훈과 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ㅇ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방언하는 자의 말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인 만큼, 듣는 자들에게는 유익이 없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영적(靈的) 깨달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온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여 유익을 받도록 한다.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ㅇ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
바울의 논조는 그때의 방언 은사를 전연 불필요하다고 함이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한
과대 평가(過大評價)를 막는 것 뿐이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남들에게 별로 유익
을 주지 못한다. 방언은 벌써 위에 해석한 바와 같이(2절), 영감(靈感)으로 말하는 것
이다. 그것이 영감과 동반(同伴)되지 않는 순간부터는 효능을 잃는다고 생각된다. 그
러므로 통역하는 자도 영감 중에서 하여야 된다(Hodge). 방언하는 자 자신이 통역의
은사까지 겸한 자가 있으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언의 효능에 대하여는 위의 3절
에 기록되었다.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ㅇ바울은 자기로서 방언하는 것으로는 남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하여, 앞서
말한 논조를 강화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그가 남들을 실례(實例)로 드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실례로 들어 말한 것은, 그의 겸손이 라고 할 수 있다.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ㅇ생명 없는 악기(樂器)같은 것들도 곡조의 분별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듣는 사람들
에게 그 소리의 뜻을 알려 주지 못한다. 알아 듣게 하기 전에는 듣는 자들에게 무익한
소리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생명 없는 도구들의 소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이것은 차라리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야 된다. 곧, "저를 분 것이 무엇인지 거문고를 탄 것이 무엇인지 어찌 알려지
랴?"라고 함이다(Hodge). 이 말씀 뜻은, 곡조를 분변 있게 내지 않은 "저"소리나 "거문
고" 소리는 무의미 하다는 뜻이다.

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ㅇ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 전쟁 때엔 나팔
소리로써 군인들에게 경고를 준다. 그것은 곡조로써 뜻을 표시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
금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ㅇ"허공에다 말함" - 은, 효과 없이 말한다는 뜻이다

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ㅇ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 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 여기 "소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포네- 니 목소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방언들
을 의미한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것을 동물들의 소리로 해석하였으나 문맥으로 보
아서 사람들의 언어를 가리킨다(Hodge).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 곧 피차간 야
만의 관계란 뜻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ㅇ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 곧, 신령한 은사를 구하여야 되나, 남들
에게 유익 끼치기를 목표하라는 뜻이다. 그리 하려면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는 은사도
받아야 된다.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ㅇ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가 있다. (1) 방언은 지능(智能)으로 하
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높은 층계에 속하는 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자 자
신도 지능으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2) "나의 영"은 정서(情緖)를 가리키
는데 지능과는 관계없다. 그러므로 정서에서 되어지는 방언을 인하여 지능면(智能面)
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 (3) "나의 영"이란 것은 성령의 지배하(支配下)에 있는
영(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의 영의 방언하는 바를 가지고 나의 지능(나의
영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곳)이 남들에게 유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적당하다고 하지(Hodge)는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나의 영"과 나의 "마음"을 엄격히
구분하여 이 아래서도 말하고 있다(15절). 그러므로 위의 첫째 해석이 옳은 듯하다.

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ㅇ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
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 이 말씀 뜻은, 방언(方言)하는 자들이 자기만 알 수
있는 기도나 찬송을 할 것이 아니라 남들도 알아 듣도록 해야 된다는 뜻이다(Hodge).
그러므로 그는 통역하는 은사까지 받아야 된다.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ㅇ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
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 여기"축복"이란 말(*
은 하나님께 감사함을 의미한다.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란 말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닌 평신도(平信徒)를 가리킨다(Lenski). "아멘"이란 말은, 여기서는 예배에 참석한
자로서 공석 기도자(公席祈禱者)의 감사에 동조(同調)하여 "그렇습니다"하는 뜻이다
(느 8:6). 이 말은 히브리어의 음역(音譯)이다. 그 말은 "진실함", 또는 "그렇습니다"
등을 의미한다.
ㅇ공석 기도가 끝나자 회중이 "아멘"하는 것은 구약의 예배 풍속에서 왔다(민 5:22;
신 27:15).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ㅇ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이것은,
남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기도한 것이, 공동 예배자(共同禮拜者)들에게 유익을 주
지못할 것임을 지적한다. 예배는, 단지 신비적(神秘的)인 느낌만 위주하지 않고, 지식
성품을 통하여 받아질 진리에 해한 심령의 반응(反應)을 보다 중요시한다.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ㅇ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신자들 중
받은 은사를 잘못 쓰므로 폐단이 있는 때에, 그것을 교정시킬 만한 자격자는 같은 은
사를 받은 자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의 은사를 더 많이 받았으므로, 이 은사를
폐단 있게 사용하는 자들을 경계할 권위(權威)를 가졌다. 오늘날 불건전한 신비주의
(神秘主義)의 폐단을 교정시킬 사람은 누군가? 그는 참된 신비주의를 체험한 사람이
다. 기독교는 냉랭한 지식 종교(知識宗敎)가 아니고 역시 건전(健全)한 신비주의를 하
나의 요소로 가지고 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
의 사랑을 실감(實感)하게 되나니, 이것이 건전한 신비주의이다.
바울은 방언하는 은사를 그 자신이 받은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은사 자체를 귀히 여긴 것이 분명하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ㅇ남이 아는 말로 가르쳐 남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남들이 모르는 방언을 말
함보다 교회에 유익하다고 바울은 역설(力說)한다. 기독자가 받은 은사는, 자기의 독
점 사용(獨占使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바
울은 교회 앞에서는 언제나 방언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말할 바엔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방언을 위주할 수 없다. (1) 예수님께서도
친히 방언을 하였다는 말이 없을 뿐더러 그들은 물론 방언을 위주하지 않았다. (2) 방
언을 위주하면, 결국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한 것을 탐한다.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을 가지고 기독 신자들에게 은혜
를 끼친다 할지라도, 그 부근에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의 마음이 거
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
였다(고전 1:22-23). (3) 방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성경 이외의 어떤 예
고)도 고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필경 저마다 계시를 보려고 하여 꿈을 숭상
하고, 기타 여러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다. 예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마침내 그릇된 예언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어 마귀 역사의 온상을 이루게
된다. 마귀는 언제든지 교훈의 불건전한 틈을 타서 역사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은, 교
훈의 건전성을 많이 주장하였다(딤전 1:10,6:3; 딤후 1:13,4:3; 딛 1:9,2:1). 이 귀절
들 중에서 그가 주장한 "바른 말", 혹은 "바른 교훈"이란 것은, 건전한 교훈을 말함이
다. "건전한 교훈"이란 것은, "건강한 교훈"(*
)을 말함이다. 사람의 체격이 건전하다고 하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여
러 지체들이 제 자리에 있는 질서 정연한 체격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바뀌지 않고 각기 제 위치
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그 교훈이 건전한 교훈이다.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ㅇ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
이 되라. -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통역 없이 방언을 회중
(會衆)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지혜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하나의 호기심(好奇心)과 자랑거리로 구경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더러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뒤이어 어린 아이에게서 본받
을 것만은 본받으라고 말한다. 곧, 악에 있어선, 그것을 경험해 본 일이 전연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상반절에 있는 "아
이"란 말과 다른 단어이다. 이것은 실상 유아(乳兒)를 의미하는 네피오이이다.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방언하는 자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 지혜이다.
그렇게 행함이 장성한 사람다운 자의 소위(所爲)이다.

21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ㅇ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
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 하리라 하였으니. - 이것은 사28:11,12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에 기록된" 것이라고한 이유는, 그 때에 구약 전
서를 가리켜 "율법"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요 20:34;롬 3:20 참조.
그러면 여기 인용된 사 28:11,12의 예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장차 외국인들(앗수르 사람들)이 유대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지배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여기 이른바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
할"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이다. 여기 "다른 방언하는 자"란 말은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다른 방언하는 자가 유대인에게 온 것은, 그들을 벌하시는 일이었
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
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면 그것은 그 회중에게 대한 일종의 벌이다. 그것은 유익을 주
는 일이 아니다.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ㅇ그러므로 방언을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 "방언은 믿는 자
들을 위하지 않고". 이 말씀 뜻은, 남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결과적
으로 듣는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23절).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침내 다른 방언하는 자(앗수르 민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음과 같은 일이다(21절).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곧, 방언하는 결과는, 그 듣는 사람들의 불
신앙을 고쳐 주지 못하고 그냥 믿지 않는 자들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 뿐이란 뜻이다.
이것은 방언의 결과가 어떠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
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 이것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
언을 하면 그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믿는 데로 나아가진다는 뜻이다.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ㅇ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신자들이 방언을 통역하지 않
고 말하는 경우에, 그 듣는 불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방언하는 자들을 미
쳤다고 할 것이다. 통역없이 방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바울이 이 말로
써 역설(力說)한다.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ㅇ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
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찬송시"란 것은 원시 교회에서 성령의 감
동을 받은 회원들이 부를 수 있었던 시가(詩歌)였는데(엡 5:19;골 3:16), 구약 시편을
말함이 아니다. 눅 1:46, 68, 2:14 ,29 ;딤전 3:16; 계 4:8, 5:9, 7:10, 11:5, 12:10,
15:3, 19:1, 6 참조. 벤드라드(H.D.Wendland)도 이와같은 뜻으로 해석하였다(Die
Briefe an Korinther, p.114).
"가르치는 말씀"이란 것은, 교리(敎理)나 도덕면(道德面)에서 교훈을 베푸는 것을
말함이다.
"계시도 있으며". 이것은, 그때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있었던 직접 영감(直接靈感)
에 의한 진리 섭취를 말함이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신자들은, 위에 열거(列擧)된 무슨 은사든
지 오직 건덕(建德)을 위하여 행용(行用)하여야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
는 자도 다만 건덕(남들을 유익하게 함)을 위하여 할 뿐이다.건덕은 결국 사랑을 의미
하는 행위이다.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ㅇ방언을 하는 자들은, (1) 공중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씩 차서(次序)있게 할
것이고, (2) 또한 회중이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하는 방언을 통역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시한 것은, 후대 교회보다 그 때 초대 교회의 실정에 맞추어
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대 교회의
방언이 사도들의 역사(役事)로 나타났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삼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말하기를,
"방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한 것이다. 그
것은, 하늘 방언인데(천사의 방언은 아님), 죄악의 영향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
다. 그는 계속하여 또 말하기를, "방언의 이적이 오순절에는 완전하게 나타났으나 그
후에는 불완전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엔 중생의 강한 것
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는 비교적 현저하지 않은 영력(靈力)만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오순절에는 완전한 방언의 이적이 나타났고, 그 후에 지방 교회에서는 비교적 약한 분
량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134-135).
교회 시대(특별히 현대)의 방언 운동에 대하여 한가지 주의 해야 될 것은, 위에 카
이퍼(A.Kuyper)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사도적 역사의 완전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는 것이다. 사도적 이적은, 병자를 고칠 때 그 취급된 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
나 오늘날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여 어떤 병자는 고치나 어떤 병자는 못고치
는 정도이다. 오늘날 참된 방언이 있다면, 그것이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된
다. 사도의 직접 지도가 없는 지금(교회시대)에 있어서 방언의 성격의 진위(眞僞)를
참으로 알 분이 누구이기에 교회에서 방언을 통역에 의하여 공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까?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ㅇ이 부분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직접 계시(啓示)를 받은 일이 있음을 보
여 준다. 그들이 예배 석상에서 그 받은 계시를 회중(會衆)에게 전달할 자유가 있었
다. 그러나 이것도 공중 질서(公衆秩序)를 무시하지 않고 전달되도록 할 것이었다. 한
집회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예언하지 않도록 할 것과 하나씩 하도록 한 것은, 질서 있게
하므로 유익을 받도록 한 것이다.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ㅇ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 여기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란 말은, 예언하는 자가 받은 성령의 감화를 말함이다. 이 감화력(感化力)은 그
예언자의 의식(意識)의 자주성(自主性)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언자는 의식 없
는 사람처럼 난동(亂動)하게 될 처지에 있지 않다. 그는, 위(29-31)에 기록된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정상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

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ㅇ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예언을 주
시는 하나님 자신이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신 만큼, 예언 자들이 질서를 지켜야 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ㅇ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
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
과 같이"란 말씀은, "모든 교회의 풍속과 같이"란 뜻이다. 이는, 교회의 아름다운 규
례를 배경으로 내 세우는 말씀이다. 교회의 규례도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면,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된다. 바울은 이 규례가 성경게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율
법"의 교훈에서 인용(引用)한다. 그러면,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됨(남자를 지배
하는 公敎訓을 하지 못함)은 율법의 말씀(창 3:16)에 근거한 것이다.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ㅇ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니라. - 여기 이른바 "부끄러운 것"
이란 말은, 보기 싫은 것(ugly, deformed)을 의미한다(Hodge). 여기서 여자의 교회에
말하는 것을 금한 것은, 그들이 거기서 무슨 말이든지 금지 당한 것이 아니고, 다만
남자들을 주장하는 의미의 공교훈(公敎訓)에 관한 것이다.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ㅇ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 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 이것
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꾸짖는 말씀이다. 그 교회는, 그때에 스스로 모든 다른
교회들의 모체(母體)인 듯이 교만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의 교회에만 임한 듯이 자만하였다. 이런 주제넘는 태도는 오늘날 교회들 가운
데도 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저희에게만 전속한 듯이 남들을 무시하며 교만하게 행하
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는 동안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약 4:6 참조.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ㅇ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은사(恩賜)를 받은 자들이 바
울의 편지를 표준하여 시정(是正)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들이 은사를 받았으
나 그것을 오용(誤用)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바
울의 서신을 보고 고쳐야 할 것이다.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ㅇ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 이 말을 개역하면, "만일 누
구든지 알지 못하거든 그는 인정되지 않는 자니라"고 할 것이다. 곧, 바울의 편지를
주님의 명령인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 곧,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이다.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ㅇ"예언하기를 사모하라" - 고 하였으니, 이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함이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고 하였으니, 이는 그것을 그저 용인(容認)하는 정도이다.
이 권면은, 위(6-28)에 기록된 모든 규례에 의하여 교회의 공적 질서(公的秩序)에 해
를 끼치지 않는 방언(方言)을 할 때에는 금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방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한 말씀을 지켜야 된다. 성경은 성령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존중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화를 참되이 보존하는 길이다. "영들을 시험하
라"고까지 하였으니,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가? 시험해 보기까지 분변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경건이
다. 우리가 방언을 아무 분변 없이 받아 들일 때, 거기에는 마귀의 역사도 받아 들이
게 되어지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변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성경을
표준해야 된다. 성경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할 수 있으랴? 진
리 판단의 표준은 오직 성경이다. (1) "이적"을 행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반드시 언
제나 진리를 바로 분변할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마귀도 어느 정도 이적을 행한다
(마 24:24). (2) 누가 병을 고친다고해서 그는 언제나 진리를 옳게 분변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기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을 고치
셨고, 그들이 전도한 말씀은 진리이다.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병 고침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 기도나 안수로 병 고치는 일이 있
다고하여, 모두 다 신임할 수는 없다(그 중에 혹시 신임할 것도 있지만).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 7:6, 17, 25, 35, 36 참조. 공식 예배(公式禮拜)
가 어느 시대에나 질서 있게 실행되어야 할 것은, 본장을 읽는 자마다 깨달을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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