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16: 1~24)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0

고린도전서 (16 : 1~24)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ㅇ행 11:28에 보면 글라우디오 때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이 전해지고
있고, 갈 2:10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비참한 빈궁 속에 빠져 있음이 나타나 있다. 이
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도운 것처럼 고린도 교인
들도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연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게이아'는 여기에서만 쓰였는데
후대에 이 말은 세금과 관련되어 쓰여졌다(Barrett). '로게이아'의 이러한 용법 때문
에 혹자는 바울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예루살렘 성전에 비친 유대인들의 세금과 유
사한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다(J. Jeremias).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세금은 강제성이 부여된 징수인데 반해 연보는 사랑에 기초하여 어려움을 당
한 교회를 돕기 위한 자발적인 헌납이기 때문이다(Kittel). 연보는 (1) 대가 없이 주
는 '선물'(카리스, '은혜')이며(3절;고후 8:4ff.), (2) 서로 나누는
'교제'(코이노니아, '동정')의 방편이며(롬 15:26). (3) '섬김'
(디아코니아)의 진정한 표현이고(롬 15:31;고후 8:4;9:1), (4)다
른 사람에게 복을 기원해 주는 것(율로기아, '축복')을 합당하게
구체화 시키는 것이다(고후 9:5).
ㅇ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권면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본문은 갈 2:10에서 결정된 '가난한 자
들을 생각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많은 교회들은 예
루살렘의 결정에 따라 연보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전체 교회의 전체 운동은 단순한 구
제 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1) 교회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고취시켜 유대 그리스도인
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합을 도모하며, (2)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랑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한편 갈라디아는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당시 개척한 안
디옥, 마게도냐 지방을 통틀어 생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Barrett). 여기에 대한 근거
는 고후 8:1이하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궁핍한 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풍성한 연보를 하
여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한 사실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소개할 때, 마게도냐 지
방을 넓은 의미에서 갈라디아 지방으로 해석한 데 있다 하겠다.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ㅇ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 '매주일 첫날에'에 해당하는 헬라
어 '카타 미안 삽바투'는 '매 안식 후 첫날
에'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주일'(Lord's day)에 해당한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주로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으나(행 15:21;18:4),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것
을 기리며 '안식 후 첫날'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행 20:7). 이처럼 초기에는 주일
과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지만 유대교임의 기독교 박해로 두 종교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4세기 초부터 기독교는 주일을 정규적인 교회의 집회일(集會日)로 정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를 드리는 세 가지 원칙을 말하고 있다. (1) 연보
를 드리는 시기가 '주의 날'임을 밝힌다. (2)연보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이는 연보를 하는 사라들이 어
떤 특정 부류의 계층에만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이 연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두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3) '이를 얻은'에 해당하는 헬라
어 '우오도타이'는 '유오도오'의 현재 수동형
으로 '번영된다', '바르게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며(롬 1:10;요삼 2) 모두가 수동태를 취했는데, 이는 70인역(LXX)의 영향을 받
은 듯하다(TDNT). 이로 보아 이 말이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시는 대로' 또는 '기
회 주어지는 대로' 연보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겠다. 또한 '호 티 에안'
은 '...하는 대로'라는 의미로 자신의 수입 정도에 따라서 연보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ㅇ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도착한 후 연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지만, 바울 자신이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고 고린도 교회에서 추천한 사람
이 가져가도록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교회 재정을 취급함에 있어 호리라도
의심을 살 만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너희의 은혜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린'은 '즐거움을 주
는 어떤 것', '친절한 호의' 등을 뜻한다. 만약 '카리스'가 죄와 허물과 연관해서 쓰
이면 언제나 '공로 없이 받는 은혜'를 뜻한다(TDNT).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낼 선물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연보'를 가리키며(Lenski), 이러한 구제의 연
보는 대가를 전혀 생각지 않는 선물이다.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ㅇ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 바울의 계획은 불확실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고린도 교회가
드린 연보의 액수가 크면 그 분배(分配)를 위해 전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것
이라고 밝힌다. 사실 나중에 살펴보면, 고린도 교회가 연보한 금액은 상당히 많은 것
이었으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동행하여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나타난다(행 20:4;
룸 15:25).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ㅇ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 바울의 원래 계획은 본서를 쓰고 있던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고린도로 갔다가 마게도냐 지방을 방문하고 난 연후에 다시 고린도로 돌아
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었다(행 19:21;고후 1:16). 하지만 바울은 이 계획을 변
경하여 마게도냐를 먼저 방문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부끄러운 사건을 전해듣고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었
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로는 간음, 음행, 우상숭배 등이 있었는데 교회
는 이것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성을 날로 상실해
가고 있었다. 바울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쳐주고자 고린도 교회를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칫 감정적인 분노때문에 성도의 덕을 상할까 염려하여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방문을
연기했거나 변경하게 된 것으로 본다(Farrar). 하지만 고린도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모르고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박한 인물이라고 비난하였
다.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고린도후서에서 변호하고 있다(고후 2:13;8:1;9:2,
4;12:14;13:1).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ㅇ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 바울이 과동(過冬)하려는 구체적인 시기는
A.D. 57년 말에서 58년 초까지 약 3개월 간을 가리킨다. 바울은 실제로 고린도에서 머
무르게 되었는데 고린도에 체류한 이 기간 동안 로마서를 집필하였다(행 20:1-3). 당
시 근동지방에서는 겨울에 여행하는 것을 꺼려하였다. 바다는 얼어서 배를 이용할 수
없게 되고 육지는 추위로 여행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이미 세웠지만, 한편으로는 여행할 수 없는 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Morris).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함이라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머
무는 목적은 교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
이 전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의 생필품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
어 있었다(Barrett, Lenski). 한편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
금 자신의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일이 바울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전체 교
회가 해야 할 사명임을 시사해준다.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ㅇ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가려는
또다른 목적을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잠깐 거쳐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능한 한 일정기간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본
문에서 '이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를 해석함에 있어 학자들 사
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아르티'를 '팔린'('다시'), 혹은
'아르티팔린'('이제 다시')으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사실이 두번째임을 주장한다(Reuss). (2)혹자는 '아르티'를 수사(數詞)
로 볼 수 없고 단순한 부사에 불과하기에 바울의 두번째 방문을 증거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Lenski, Godet). 문맥상 두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전에 계획하
기로는 잠시 들렀다 가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생각이 바뀌어 고린도 교회에 한
동안 머무르길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 바울은 주님의 종이라는 인식을 항상 갖고 있다. 본절에
서도 바울은 생각과 뜻을 고집하지 않고 그의 삶과 계획 가운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주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였다.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ㅇ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 본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오순절이 되기 전,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Robertson). 바울이 에베소에서 오순절
까지 머물러 있으려 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가지려 했기 때
문이다(행 14:27;고후 2:12;골 4:3). 하지만 예기치 않게 발생된 데메드리오의 소동으
로 바울은 급하게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행 20:1).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ㅇ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 - '공효를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게스'
는 '활동적인', '효과적인'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라'는 주님께서 널리 사용한 수사법 가운데 하나로서 제자들
도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행 14:27;고후 2:12;골 4:3;계 3:8). 이 말이 주는 뉘앙스
는 눈에 보이는 형상적인 '문'보다는 '기회', '통로'를 의미한다. 본절에서 이 말은
비유로 사용되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다
(Hodge).
ㅇ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 바울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행 19장의 내용으로 보아 '대적자'가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이었고, 특히 아
데미의 은감실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데메드리오가 주동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리
라고 짐작할 수 있다.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ㅇ디모데가 이르거든 -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성(城)의 재부 담당 에라스도와 함
께,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 교회로 가서 바울의 방문을 준비하도록 보냈다(행
19:22). 디모데의 임무는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쟁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당시에 고
린도 교회는 헬라 철학의 영향이 만연되어 있었고 항구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세상의
헛된 지혜가 팽배해 있었다. 이에 바울은 데모데를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지혜, 곧 십
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
를 향해 출발하고 나서 바울은 여행 계획을 바꾸어 직접 방문하는 대신 편지만을 전했
다. 한편 디모데는 여러 교회를 들러 고린도 교회로 간데 반해, 바울이 쓴 편지는 해
상도를 통해 직접 고린도 교회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디모데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것
같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편지를 통해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못하
게 되는 경위와 앞서 보낸 디모데를 기쁘게 영접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두려움이 없이 - 디모데는 이 때에 비교적 젊고 경험이 적은 목회자였다(딤전
4:12). 이에 반해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매우 심각해져서 디모데가 지닌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Lenski). 오만한 궤변가와 논쟁적인 분파주의자들이 연소(年少)한 디모데
를 위협하거나 조롱하여 그가 임무를 감당하면서 지극히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특별한 배려로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다. 이는 디모데가 천성적으로 겁
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Groscheide, De Wette,
Alford), 디모데의 소심함 보다는 연소함 때문에 바울이 염려하는 것이다(Meyer). 사
실 디모데는 현재와 같은 어려운 직무 외에도, 이후에 아시아 전지역을 전도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할 만큼 대담하고 능력있는 인물이었다.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소심하고
유약해서라기보다는 디모데가 연소하다는 빌미로 그가 전하는 복음까지도 그릇되게 받
아들여질까봐 이를 경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ㅇ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인물이었다. 디모데만큼 바울과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바울
의 칭찬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아볼로나 디도가 독자적으로 사역하였던 것에 반해 디
모데는 바울과 함께 평생을 동역(同役)하였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헌
신적으로 사역한 자로서(롬 16:21;빌 2:20ff.)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낼 수 있는 가
장 적합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ㅇ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 바울는 자신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를 위
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의 연소함과 겸손함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권
면한다. '멸시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데네오'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대하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삼다'라는 뜻이다(Kittel).
바울이 디모데를 위하여 이처럼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이유는 바울 자신이
겪었던 고린도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고린
도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중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 그들이 디모데를 함부로 대할까 염려하며 권면하는 것이다(Lenski).
ㅇ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 '평안히 보내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펨프
사텐 엔 에이레네'는 단순히 관용적인
작별인사가 아니다(Edwards). 문맥상으로 보면 이 말은 '아무런 근심이 없거나 두려움
이 없게 하라'는 소극적인 권면이라기 보다는 '위협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라'는 것으
로 강조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 되었다.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디
모데의 임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가 떠날때에는 어떠한 문제나 분쟁이 없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Lenski).
ㅇ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 본구절은 자주 논쟁이 되는 부분이
다. 즉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테코마이 가르 아우톤
메타 톤 아델폰'
에서 '메타 톤 아델폰'('형제들과 함께')이 '아우톤'('저를')을 수식하는지 아
니면 '에크 테크 마이'('오기를')를 수식하는지에 대한 계속되는 논란이 있어왔다. 만
약 전자의 견해를 따라 해석하면 '바울이 형제들과 함께 디모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
다. 이러한 해석상의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해석
이 지배적이다. 즉 헬라어 어법상 위치하고 있는 그대로의 순서를 우선적으로 따르는
방법으로 '아우톤'과 '메타 톤 아델폰'을 연결시켜 '형제들과 함께 한 디모데를'이라
고 해석하는 것이다(Lenski). 물론 여기서 '형제들'이라고 지칭된 사람들은 에라스도
를 비롯하여 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을 가리킨다.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ㅇ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 '대하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데'
는 고린도로부터 보내온 질문에 대해 설명하는 상용구로서 본서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다(7:1,25;8:1;12:1;16:1). 본절의 답변으로 미루어 보아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적지 않은 존경을 받은 듯하고, 그리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아볼로를 초청한것 같다.
ㅇ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 '권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칼레사'는 원래 '간청하다', '호소하다', '초대
하다'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권고(勸告)'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아볼로에
게 고린도 교회에 가길 권유함에 있어서 이 단어를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점으로 미루
어 바울과 아볼로가 경쟁적이거나 명령적인 관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바울과, 아볼로파, 베드로파로 나뉘어
분쟁이 성하였기에 자신도 연루된 점을 고려하여 가기를 꺼려했다고 추정한다
(Montefiore).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가설에 불과할 뿐 사실을 증명할 근거는 없다
(Barrett). 실제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 못하는 직
접적인 이유는 당파 싸움때문이라기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때문이다. 왜냐하면 '기
회가 있으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레세'는 동사 '유카이레
오'에서 온 것으로 '시간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다. 만약 이와 같이 번역한다면 '시간이 있다'는 의미로 '스콜라조'
라는 더 분명한 뜻의 단어가 있는데 왜 바울이 이 단어를 안쓰고 다른 단어를 사용했
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스콜라조'라는 헬라어가 바울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고 A.D.
2C 이후 유세비우스 때에야 비로소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로서는 부
득불 '유카이레오'라는 단어로 두 의미를 모두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Edwards,
Kittel).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ㅇ깨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이터'는 현재 명
령형으로 일시적인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이
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세상의 끝날에 있을 징조를 설명하면서 사용하신 바 있다(마
24:42;25:13).
ㅇ믿음에 굳게 서서 - '굳게 서서'의 헬라어 '스테케테'는 '흔들
림 없는', '확실한', '의심없는' 등의 의미로 본절에서는 믿음의 상태가 견고함을 가
리킨다. 한편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테이'는 그리스도의 죽
으심과 부활하심을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fides quae creditur)과 역
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관적 진리로 확신하는 것(fides que creditur)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권면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위에 든든히 서라는 것이다(Lenski).
ㅇ남자답게 강건하여라 - '남자답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리제스데'
는 '성인 남자'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르'에
서 온 말로 때로는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을 가리키기도 했다(TDNT). 이 단어는 부사
처럼 번역되었으나 동사로 '남자다워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동사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남성다움', 또한 '강건함'과 연관짓는다. '강건하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
라타이우스데'는 수동태 명령형으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힘이 타고난 육체적인 힘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것임을 보여준
다(Morris).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ㅇ사랑으로 행하라 - '사랑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가페'
는 '사랑을 가지고'(with charity)로 번역하기보다는 '사랑안에서'(in love)라고 번역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전치사 '엔'이 '도구' 혹은 '기구'의 용
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범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Lenski, Morris). 그
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그들의 행동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이어야 한다. 바울이 마지막 권면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랑을 최고의 것으
로 본 동시에 최종적인 열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ㅇ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 스데바야의 회심은 바울이 아덴에 복음
을 전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행 17:34). 행 17:34의 누가의 기록이 스데바나
의 회심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면 본절과 지명의 차이의 보이는 문제가 생기지만, 본절
에서는 스데바나 개인만을 언급하지 않고 그의 가족 전체를 가리켜 아가야의 첫열매로
지칭한다고 보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키안'
은 라틴어의 '파밀리아'(familia)와 마찬가지로 '가족들'뿐만 아니라 '노예들'
까지도 포함하였다(Boice). 따라서 스데바나가 아덴에서 회심한 이후에 아가야에 돌아
와 그의 가족들을 모두 회심시켰다고 볼 수 있다.
성도 섬기기로 - 바울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기 때문에 스데바나의 가족
이 어떤 종류의 봉사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둘로 나눌 수
있다. (1)혹자는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돕는 일, 자기 집을 집회장소로 내어 놓는 일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Godet). (2)혹자는 스데바나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
에 많은 연보로 봉사했다고 본다(Edwards, Hofmann).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1)의 견
해가 보다 더 옳은것 같다. 왜냐하면 (2)의 견해를 따르면 스데바나가 연보를 시작한
것은 바울이 연보에 대해 가르친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행했다는 뜻이 되는데 연
보를 시작한 것이 시기상 그렇게 이르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작정한 줄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태산 헤아우투스'
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라는 의미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헌신
적으로 봉사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또한 그들이 교회에서 섬기는 직무로 선출(選
出)되지도 않았음을 추측케한다(Morris).

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ㅇ복종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탓세스데'는
'휘포탓소'의 명령형으로 '휘포탓소'가 능동태일 경우에는 '밑
에 두다', '밑에 첨부하다'등의 의미이지만 본절처럼 중간태로 쓰이면 '자신을 복종시
키다', '주(主)로 인식하다'(acknowledge as lord)등의 의미로 쓰인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순종을 본받아 자신들을 낯춰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에 힘쓰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서신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이나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을 천성적으로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의 이러한 결점은 바울의 서신보다 약 35년 늦게 보내어진 로마
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에도 나타난다(Godet).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ㅇ브드나도와 아가이고 -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등장한다. 브드나도는 바울
의 편지가 있은 지 약 35년 뒤에 기록된 로마의 클렌멘트의 편지에는 종종 등장하지만
동일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런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고, 시간적으로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아가이고는 다른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브드나도
와 아가이고는 노예였거나 노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그들이 스데바나
의 노예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고(Godet, Grosheide), 혹자는 1:11을 근거로 하
여 글로에의 종들이었다고 추정한다(Edwards, Lenski). 이 견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분명치 않다.
ㅇ너희의 부족한 것 - '너희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메테론'
은 공인 본문을 비롯하여 오래된 사본들(P, A)에서는 '휘몬'으로
되어 있지만 이들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부족한 것'에 해당하는 '휘스테레마'(*
)는 적은 재산을 가리키기도 하고(막 12:44) 물질적 궁핍을 의미하기도 한
다(고후 8:14). 또한 믿음의 교훈이 부족하다는 것(살전 3:10)과 사랑을 나눔이 부족
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빌 4:10ff). 본절에서는 물질적인 부족함보다는 사랑의
나눔의 부족함을 가리킨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고린도 교인들을 행한
바울의 충고와 애정을 대신 전해 주었고 또한 바울에게도 그를 향한 고린도 교인들의
애정을 전해줌으로 바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은 고린도 교인들과 떨어
져 있는 바울에게 그들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다.

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ㅇ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뉴마'
로 바울이 여기에 '프쉬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스데바나와
함께 온 형제들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원함을 준 것은 단지 감정상의 위로만
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혼에까지 영향을 끼쳐 참안위를 주었음을 가리킨다
(Godet).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ㅇ본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
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특별한 이유로는 (1) 원래 빈민층이 많았고, (2) 여러 차례
에 걸친 팔레스틴 지방의 흉녕으로 인해 기근으로 처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시아의 교회들 - 바울이 말하는 '아시아'는 현재의 터어키 지역에 위치한 당시의
로마령 아시아를 가리킨다. 바울이 본 서신을 쓴 장소는 에베소였으나 아시아의 교회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에베소가 소아시아에 속해 있기는 하나 아시아 지역에는 라오디
게아, 골로새, 히에라볼리(골 4:13)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본절에서
아시아 전교회를 대표해서 인사를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1) 비록
바울이 소아시아 전지역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의 교회 대표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기에 그들을 대표하여 인사했다는 견해이다(Grosheide, Lenski). (2) 에베소가 소
아시아 지역의 수도이고 에베소 교회는 그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교회이기에 대표성을
띠고 인사했다는 견해이다(Godet, Edwards, Robertson, Plummer). 이상의 두 견해는
모두 타당성을 갖는다. 본 구절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모든 아시
아의 모든 지역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사역하였음을 보여준다.
ㅇ아굴라와 브리스가 - 이둘은 부부로서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가가 아내이다.
'브리스가'(프리스카)는 헬라어 표현이고 라틴어 표현으로는 '브리스
길라'(프리스킬라)였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세울때 많은 도
움을 주었고(행 18:2)바울과 함께 고린도를 떠나(행 18:18) 에베소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Boice). 또한 그들은 신앙의 깊이가 있어서 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였다(행 18:26).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이들 부부에 대한 기록이 신약성경에 6번
정도 나오는데 4번이나 아내인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남편 아굴라보다 아내인 브리스가가 더 열심히였던 것으로
추측된다(Morris).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ㅇ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번역된 헬라어 '필레
마티 하기오'는 동양사람들에게 있어서 화합, 애정,
존경의 표시로 이마나 볼에 입맞추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말씀이 신약 성경의 서
신서에 많이 나오고 있다(롬 16:16;고후 13:11;살전 5:26;벧전 5:14). 하지만 '입맞
춤'이 단순히 동양의 문화 양식만을 따른 의미로서 행해진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깊고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초대 교회에서 이 의식이 행해지는 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1) '평화'의 표시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화
해가 이루어졌듯이 교회와 교회, 신자와 신자 사이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가 이
루어졌다는 의미이다(Edwards). (2) '하나됨'의 표시로 이제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외인이나, 혹은 비록 복음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배도한 형제들에 대하여 그들
의 회개에 따라 한 형제로 받아들임을 다시금 허락하는 표시였다(Lenski). (3) '부활'
의 표시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상기하여 굳세게 믿음을 지켜 나가자는 격려의 표
시였다(Robertson, Plummer).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ㅇ친필로 - 바울은 보통 자신의 편지를 구술하여 대필자로 하여금 적게 한 것이 대부
분이다(롬 16:22). 하지만 맨 마지막 문구나 인사말은 친히 바울이 기록하였다(갈
5:11;골 4:18;살후 3:17).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 편지가 바울 자신의 것임을 확
인시키기 위함이었다(Robertson, Plummer, Edwards).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ㅇ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
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
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
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
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 다'는 아랍어 '마라나 타'
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 아다'로 되
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 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
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
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
('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
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
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
(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ㅇ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 '은혜'의 헬라어 '카리스'
는 아무런 공로없이 주어진 주님의 선물을 가리킨다. 바울이 이 문구로 고린
도 교회에 문안인사를 끝맺는 것은 고후 13:13에서도 나타난다.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
인들의 미숙한 신앙행동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1:4)가 더욱 깊어지고 속되길 소원하는 바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찌어다

ㅇ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그리스도 예수
의 안에서'에 해당하는 '엔 크리스토 예수'가 '나의 사
랑'(헤 아가페 무)을 수식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너희 무리와 함께'
(메타 판톤 휘몬)를 수식한다고 보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너희 무
리'라고 할 수도 있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하나, 의미상 '엔
크리스토 예수'는 문장 전체를 수식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는 헬라어
구분상으로서가 아니라 의미상으로 볼 때 본서 전체에까지 적용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Barrett). 바울은 본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록하였고, 그리스도의 사
랑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성도에게 쏟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너희 무리'(판톤 휘몬)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를 대
적하고 따르지 않는 모든 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orris).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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