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11 : 1~34)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49
고린도전서 (11 : 1~34)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ㅇ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
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
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
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
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 : 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
(10:33).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ㅇ개역성경 본문에는 생략되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나타내
는 접속사인 '이제'(데)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를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Meyer).
ㅇ유전 - '유전'(파라도세이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구
전으로 전해내려온 가르침으로서, 관습과 교훈은 물론 교리를 포함한다(갈 1 : 14; 골
2 : 8 ; 살후 2:15;3:6). 이것은 바울 자신의 교훈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
인들에게 전해진 복음과 같은 것이다(Grosheide).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유
전'은 교리보다는 구전(口傳)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준 교회의 관습을 의미한다
(Godet, Meyer). 왜냐하면 이후의 본문들이 여자가 공예배 때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ㅇ너희를 칭찬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경고와 질책의 말을 하기에 앞
서 먼저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교훈을 잘 지킨 데 대해 칭찬의 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깊은 상처없이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일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울
서신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증거하며 아울러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목희자로서의
바울의 세심한 볘려를 잘 보여준다.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ㅇ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바울이 전한
유전을 지킨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비판받을 점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공예배 때에 남자와 동등하게 수건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할지라도 이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창
조 원리를 통해서 논증한다.
ㅇ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
라 - 바울은 교회에서 공예배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논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세 단계
의 질서이다. 본절에서 '머리'(케팔레)는 '권위'를 의미하며, '유기체
적인 복종'을 암시한다(Edwards, Morris, Meyer). 그리고 각 질서는 연합(union)에 의
한 관계성을 나타내는데, 그 관계성은 교회의 질서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이루
어진 것이다. 첫째 질서는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인데,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한 연합
에 의해서 남자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와 남자의
연합 관계의 근거이다. 둘째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데, 남자는 결혼이라는 연합
을 통해서 여자의 머리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사상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
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에
게 복종하는 '사랑과 복종'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엡 5:22;골 3:18, 19). 비록 그리
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며, 아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속이 남
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차이가 없다 할지라도(갈 3 : 28), 지상의 다른 관계들 즉
주인과 종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섭리 아래 에서도 여자의 복종의 위치는 지속
된다(Godet, Meyer).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존재 자체의 우열이 아니라 사랑과 화합과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녀 관계 (창 3 : 16)는
지금도 존속(存續)하나 두 개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격체이다.그러나 남
녀간의 성(性)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눅
20:34-36). 셋째 질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부성
(Fatherhood)과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신인(神
人)이며 중보자(요 14:28;고전 3:23;15:24ff.)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머리
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셨다(요 5:19;고전
3:23;15:28). 특히 본절에서는 세 가지 질서 중 그리스도와 남자와의 관계가 제일 먼
저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서로의 관계
를 형성시키는 요체가 되기 때문이다.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ㅇ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 - 본절에 나타난 기도나 예언이 행해지는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혹자는 가정 예배라고 하며(Bachmann, Hofmann), 혹자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라고도 한다(Grosheide, Meyer).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
는 그 견해의 근거로서 8:1-11:1에서 가정 문제를 다루었으며 별다른 주제의 전환이
없으므로 2절 이후에도 가정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미루어 기도나 예언도 가정 예배에
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2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데'
('이제')가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또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기도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절의 기도와 예언은 전체 교회를 위한 활동으로(12:10;14:3, 4,
22) 공적인 예배에서 행해진 것이다. 더욱이 5절 이하에 나타난 본장 내용에서도 공적
인 예배를 전제로 바울의 권면이 전개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의 공간적 배경은
공적인 교회의 예배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기도와 예언'은 본서 14장에서
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서 기도는 방언을 말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다(14:
14-17).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서 말하는 기도를 방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Baur,
Edwards).
ㅇ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 본절에서 '머리'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신체적인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다(Erasmus, Beza, Bengel, Meyer). 본절의 앞에서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라고 말함으로 신체적인 머리를 말하며, 5절에서
도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로 해
석한다(Hofmann, Maier, Osiander, Ruckert). 3절에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
고 한 것은 본절에서 머리를 그리스도로 해석하기 위한 선언이었다고 본다. 이 두 견
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상
징을 헬라 관습처럼 이중적인 알레고리(allegory)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
질서 속에서 남자에게 여자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는데, 만약 남자가 여자에 대한 순종
의 상징인 수건을 머리에 쓴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다. 또한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한 남자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주권을 부여한 영
적인 머리 즉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ㅇ무릇 여자로서...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여자가 공예
배시에 수건을 써야 하는 이유를 당시 관습을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여자가 공예배에
서 머리에 무엇 인가를 쓰지 않으면 머리를 민 것과 같다는 것은 당시 헬라 여인들이
나 유대 여인들에게 있어서 긴 머리는 여성다움을 표현하는 장식과 같은 것이었으며
짧은 머리는 매춘부와 같은 부도덕한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Grosheide,
Meyer). 여기서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동일시된다고 본다(15절).

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ㅇ만일 여자가...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서는 '왜냐하면'
(가르)이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5절에 대한 원인절로서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
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본절에서 바울의 권
면은 당시 기존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범주 안에서 공예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당시 기존 관습에서 여자가 머리가 짧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
다(신 21:12). (2) 조신(操身)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이다. 그래서 매춘부
는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본문에는 해당되지 않
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
이나 헬라인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여자다운 우아한 장식으로 여겨졌으며(Meyer), 여
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이 당시의 기존 관습을 인정한 이유
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한 나라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때 그 관습이 인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ㅇ본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 써야 하고, 남자가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창조 질서에서 찾고 있다.
ㅇ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 하나님이 사
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하셨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
스리는 주권을 주셨다(창 1 : 26-28).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形狀)'이라 함은 여러
의미를 갖지만 그 중에 하나는 자연에 대한 사람의 '주권'을 포함한다(Edwards,
Godet).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의 절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시
8편). 또한 남자가 '하나님의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는
창조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며 그를 존귀케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지위를 소유하고, 창조주를 세
상에 밝히 드러냄으로 존귀케 하는 존재인 남자가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
며 '마땅히'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땅히'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이'
는 '의무가 있다', '해야만 한다'는 뜻을 갖는다(ought, NIV).
ㅇ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본절은 여자가 당시의 습관대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절과 순결, 그리고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남자를 존귀케 하며 또한 자신을 성별(聖別)하
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창 1:26-28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을 받았으나, 바울은 여자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혹
자는 여자가 남자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
한다(De Wette).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지(8, 9절)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은 아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다(Edwards.
Godet, Meyer).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ㅇ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 본절은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는 논증에 대한 근거
로서, 여자의 기원을 말한다. '...에게서'의 헬라어 '에크'는 '기원'이나 '근
원'을 의미하는 전치사로서, 아담의 갈비뼈를 통한 여자의 창조를 암시한다(창 2:21).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ㅇ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 본절은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목
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을 통해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자신의
순결과 사랑의 복종을 표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시사한
다. 창 2 : 20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창 2 : 18에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
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되어 있다. 물론 이 말씀들은 남자에 대한 여자
의 종속성(從屬性)이나 여자에 대한 남성 우위론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혼
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주권을 발휘할 수 없다(창 1 : 28). 그 주권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복종의 관계에 있을 때 온전하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ㅇ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
'이러므로'는 본절이 8, 9절을 전제로 이제까지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나타낸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창조 때에 함께 일하였으며(욥 38:7),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을 기뻐하며(눅 15:7, 10), 성도들을 보호하기도 한다(시 138:1;엡 3:10;히
12:22). 또한 천사들은 사람들을 섬겨서(히 1 : 14) 성도들의 삶과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천사들을 인하여'
(디아 루스 앙겔루스)는 해석이 다양하다. (1) 그리스도인
의 예배를 지켜 보게 하기 위해서 이교도가 보낸 스파이로 생각한다(Storr, Flatt).
(2) 교회의 예언자로 해석한다(Beza). (3) 가장 신실(信實)한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본
다(Clement). (4) 악한 천사로서(창 6:2) 예배 때 수건을 쓰지 않은 여자를 보고 색욕
을 일으킨다고 본다(Tertullian). (5) 선한 천사로서, 예배 때 함께 참석해서 지켜보
는 것으로 해석한다(Hodge, Morris, Meyer, Ruckert). 이런 해석들 가운데 가장 타당
한 것은 마지막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선한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보기 때문
에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는 헬라어로 '엑수시아'로서, 본문에서 머리
에 수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엑수시아'가 되
는 이유는 당시 헬라의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것으
로 여자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자가 자
신의 머리에 이런 권세있는 표식을 함으로, 창조 때에 함께 사역하고 성도들과 함께
현존하여 예배를 지켜보는 천사들에게 창조 질서에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며, 천사들
을 예우(禮遇)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세울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
는 것이다.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ㅇ이제까지 바울은 창조 질서를 통해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며, 예배시에도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주
안에서 서로 하나인 것을 밝힘으로 여자의 지위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ㅇ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렌'은 앞서 진술된 내용에도 '불구하
고' 라는 의미이다. 비록 본질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순결과 복종을 표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이다.
ㅇ주 안에는 - 여기서 '주'(퀴리오)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Godet). 왜냐하면 12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며 살
아간다는 뜻이며(갈 5:6;엡 1:7)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라는 의미이다(갈
3:28).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이제까지 논증한 여자의 순종성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본절은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감을 말
하고 있는 것이다.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ㅇ'가르'('왜냐하면')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한다.
ㅇ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 '남자에게서'(에크 투 안드
로스)에서 '에크'는 '...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 사물의 기원과 근원을 표시한다.
본문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임을 말한다. 이것은 8절의 반복으로서, 하와가 아담의 갈
비뼈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킨다(창 2 : 21).
ㅇ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아'로서 본절은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의 '일반적인 출생 과정'을 말하고 있다(Morris).
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에크) 태어났고,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디아) 태어났다고
하는 구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과 질서를 바울이 염두에 둔 것임
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본절에서 바울이 지
적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ㅇ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기서 '...에게서' 역시 '에크'라는 의
미로서 기원과 원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
른 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
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두 존재의 기원은 결국 하
나님이다(창 1, 2장).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동등하며, 독립적
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ㅇ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 바울은 이제까지
여자가 하나님께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논증을 마친 후, 이런 논증
들이 틀렸는가를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면한다.
'마땅하냐'(프레폰)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이제까지 논증한 것의 적절성
과 타당성에 대한 것으로 당연히 수건을 써야 한다는 호소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
음 절에서 여자는 긴 머리를 가지거나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
말하고 있다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ㅇ바울은 앞절의 질문에 대한 반어적인 답을 주고 있다.
ㅇ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철학자들
이 머리를 길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남자들이 긴 머리를 하는 예는 극히
부분적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의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
치고 있다.
ㅇ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본성'(퓌시스)은 크게 두 가
지로 해석된다. (1) 본질에 대한 천성적인 감각과 인지를 말한다(Meyer). 그래서 남자
는 본성적으로 긴 머리를 갖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안다.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
자의 본래적인 신체 구조를 암시한다(Godet). 이는 15절에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남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부끄럽게 느낄 뿐만 아니라 신체 구조상 긴
머리는 여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긴 머리를 소유
한다면 그것은 남자의 권위와 명예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
데 나실인(민 6:5;겔 44:20)이다.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긴 머리는 하나님에게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행 21:17-16 주제 강
해 '나실인제도' 참조).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ㅇ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
과 동일시되며,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에게만 허락하신 권세이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갖
는 것은 본성이 아름답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남자와 구
별된다. 또한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여자의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다.

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ㅇ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 - '변론 하려는'(필로네이코스)은
'사랑하는'(필로스)과 '싸움'(네이코스)의 합성어로서, 진
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하는 것은 헬라인들의 국민적 특
성인 변론이 무익하며 잘못된 습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ㅇ하나님의 모든 교회 - 단순히 '모든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라는 것을 부
가하여 수식하는 것은 모든 교회들의 거룩성과 존귀함을 나타낸다. 이는 헬라인들이
교회의 관습에 대해서 경솔하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교회에 대
한 존경을 강조한다.
ㅇ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급례'(規例)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
다. (1) 변론하는 것이다(Calvin, De Wette, Edwards, Meyer).(2) 여자가 머리에 수건
을 쓰지 않는 것이다(Bengel, Godet, Maier).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변론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관습(custom)이라고 하나(Mey-
er), 그것은 무익한 습관(habit)에 불과한 것이다(Godet). 더욱이 이제까지 바울이 공
예배 때에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의 정당성에 대해 논증해 왔기 때문에 본절
은 그런 논증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ㅇ내가 명하는 이 일에 - '이 일'(투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2-16절에서 언급한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
한 논증 전체를 가리킨다(Grosheide). (2) 바울이 다음 절에 이어서 명령하는 성만찬
(聖晩餐)에 대한 것을 가리킨다(Godet).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16
절에서 이미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완전한 결론을 맺
었다. 따라서 '투토'를 16절 이전의 내용에 연결시킨다는 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
는다. 도리어 그것은 이어서 논할 성만찬에 대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다수의 영역본들은 본절을 '다음의 명령에서'(in the
following directives, NIV) 혹은 '이어지는 교훈에서'(in the following
instructions, RSV)라고 해석하고 있다.
ㅇ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공예배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점을 권하기 전에, 먼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했던 2절의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
은 이제부터 명령할 성만찬의 규례를 고린도 교인들이 경솔히 생각하고 행함으로 범죄
하였으며,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책망
하려고 한다.
ㅇ이는 저희의 모임이...해로움이라 - 본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지 않은
이유를 드러낸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
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예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
지 못하였다.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ㅇ첫째는 - '첫째'(프로톤)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처망하는 논증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둘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간에 분분
하다. (1) '둘째'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다(Hofmann, Morris). 따라서 '프로톤'은 '첫
째로'(firstl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주로'(principally)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프로톤'만 본문에 사용된다면 타당하지만, 본문에서는
'멘'('진실로')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기에 타당치 않다(Godet). (2) 34절 내
용으로 이해한다(Edwards, Grosheide). 왜냐하면 34절에서 바울이 더 하고 싶은 말들
을 가서 하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둘째 책망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에는 구체적인 책망의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책망하기
를 원했다면 아마도 책망의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이다(Godet). (3) 20절에서 둘째 책
망이 시작된다고 본다(De Wette, Olshausen, Ruckert). 그러나 20절의 '그런즉'
(운)은 새로운 내용을 말한다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Grosheide), 앞
의 내용과 지속적이고 확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 또한 적절치 못
하다. (4)12-14장을 둘째 책망으로 이해한다(Heinrici, Meyer, Osiander). 바울은 본
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 대해 소홀히 하는 문제를 책망하고, 12 : 1에서
부터는 새로운 주제, 곧 은사의 문제에 대해 책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은 12 :
1에서 '데'('그러나')를 사용해서 11장과 연결된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주
제로 화제를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 진다는 것이다(Meyer). 이상의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ㅇ교회에 - '교회에'(엔 테 엑클레시아)에서 관사 '테'
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삽입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A,B,C,D)에는
생략되어 있으므로 관사 '테'는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관사 '테'가 없을 경우, '교회
에'는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장소의 문제
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Edwards, Godet).
ㅇ분쟁 - '분쟁'(스키스마타)은 본서 1 : 10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그것은 본절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편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분쟁은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서 생겨난 대립
을 가리킨다.
ㅇ대강 믿노니 - 바울은 들었던 분쟁에 관한 소문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소문
들의 진위(眞僞)를 가려볼 때 분쟁의 사실들이 분명하기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소문의 진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ㅇ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 '편당'(하이레세이스)은 어원적으로
'선택'(choice) 혹은 '좋아함'(preference)에서 유래된 것으로,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differences, NIV) 혹은 '파벌'(fractions, RSV)을 가리킨다. '있
어야'(데이)는 존재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을 의미한다.
ㅇ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 본절은 교회 내에 편당이
존재하는 목적을 긍정적으로 나타낸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견해의 차이와 파벌은 때
때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지만, 그런 위기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리를 드러
내는 역할을 하게 되며, 그 위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ㅇ그런즉 - '그런즉'(운)은 앞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앞절과의 연
관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앞절의 편당은 주의 만찬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론할 수 있
다.
ㅇ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우
크 에스틴 퀴리아콘 데이프논 파게인) -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는 주
의 만찬을 먹을 의도가 없이 모였다는 해석이 있다(Alford). 그러나 29, 30절은 고린
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함께 모였다"는 것을 암시하므로 이 견해는 타
당 하지 않다고 본다. (2) "너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해석이 있다(Meyer).
이 해석은 '에스틴'('...이다')에 부정사(infinitive)가 뒤따라 올 때 가
능하다. (3)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해석이 있다(De Wette,
Maier). NIV에서도 "너희가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it is not Lord's Supper
you eat)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세 견해 중 첫째 견해는 본문상
의 내증(內證)에 위배되기에 타당치 않지만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
닌다. 당시 주의 만찬은 '애찬'(love-feast)과 '성만찬'(Eucharist)이 결합된 형태
였던 바, 교인들은 집에서 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공동 식사
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다(행 2:46;고후 8:14). 이런 애찬 후에 성만찬이 행해졌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에서부터 교제를 나누지 않고 먼저 먹고 취함으로(21절)
애찬과 성만찬을 일반 식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만찬이 주의 만
찬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한편 '주의'(퀴리아콘)는 그리스도와의 관
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만찬을 제정(制定)하고, 만찬에 초대하며 주관한다
는 것을 나타낸다.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

ㅇ이는 먹을 때에...어떤 이는 취함이라 - '이는'(가르)은 앞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행한 만찬을 부정한 이유를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함께 모일 때까
지 기다려서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만찬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거룩한 주의 만찬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바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이 나눈 만찬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책망한 것이다.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ㅇ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서 행한 모습들은 마
치 집에서 먹는 일반 식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그런 식으
로 참여할려면 집에 가서 하라고 책망한다.
ㅇ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모임으로서(15: 9;빌 3:6), 그 모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명하신 그
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자
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육신적인 만족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있어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ㅇ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 '빈궁한 자'는 단순히 '가난한 자'의 차원이 아
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
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부자들은 보이는 것에만 치중함으로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백성을 분리하고 구별지어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열등감
과 굴욕감에 빠지게 하였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ㅇ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본절의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두 가
지를 말하고 있다. (1) 성만찬에 대해서 이미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고
린도 교인들이 성만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런 죄를 범하였다고 변명할 수 없음
을 암시한다. (1)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께 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성
만찬의 규례가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성만찬 규례
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인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이 있어 왔다. 반대의 이유는
본절의 '주께'(아포 투 퀴리우)에서 직접적인 전달을 의미
하는 전치사 '파라'를 사용하지 않고 간접적인 전달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
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사도 전통(傳統)이나 사도
들에게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Beza, Hofmann).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아포'가 단순
히 간접적인 전달의 경우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저에게서 듣고'
(앞 아우투)라는 말을 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요일 1:5). 또한 바울
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아포칼
립세오스) 것이라고 말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갈 1: 12). 이로 보아 성만찬의 규
례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서(Bengel, Calvin, Meyer, Olshausen),
바울이 전한 성만찬 규례의 권위의 확고성(確固性)을 내포한다.
ㅇ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잡히시던'(파레디데토)은 예수께
서 유다에 의해 배반당한 것을 의미한다. '파레디데토'는 '파라디도미'
('내어주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그 배반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의도
된 계획의 성취임을 시사한다. 예수는 배반 당하시던 그날 밤에 유다가 함께 있는 상
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셨다.
떡을 가지사 - '떡'은 성만찬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
과정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였기 때문에(마 26 : 17-19 ; 눅 22:7-20) 아마도 무교병이
었을 것이다(Godet, W.H.Mare).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만찬의 의미는 '떡'이나
'포도주'가 어떤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Grosheide).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ㅇ성만찬 규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본서에 나타난다(23-25절;마
26:26-29;막 14:22-25;눅 22:17-20). 본서에 나타난 성만찬 규례는 세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예를 들면, '기념하라'(24절 ; 눅 22 : 19), '새
언약'(25절;눅22:20)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마도 누가가 바울의 추종자였으
며,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던 때문일 것이다(Edwards).
ㅇ축사하시고(유카리스 테사스) - 본절에서는 누가복음의 경우와
같이(눅 22:19) '사례하다'(to give thanks)의 뜻을 가진 '유카리스테오'
가 사용되었으나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사용된 것은 '축복 하다' 혹은 '찬양하다'
의 뜻을 가진 '율로게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양자가 구분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 관습의 일부인 봉헌(奉獻)
의식을 반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서 일반적인 떡을 성만찬의
떡으로 바꾸셨다(Grosheide).
ㅇ떼어(에클라센) - 이는 '떡을 쪼갠다'의 의미로 공동 식사의 한 모
습이다. 떡을 떼는 행위는 유월절 식사의 경우 애굽에서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의 규례에서는 고난을 당해서 찢길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 개역성경에는 '찢긴'(클로메논)
이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사본상의 문제이다. 고대 사본(A,B,C)에는 이것이 빠
져 있기때문에 혹자는 이것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Hort,Lachmann,Tischendorf).
혹자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나 비잔틴 사본에 기록 되어 있음을 근거로 제시
하면서 삽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De Wette, Hofmann, Reiche). 문맥상 그것은 '떼
어'와 연관되는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찢긴'
을 삽입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너희를 위하는'은 성만찬의 목적으
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직접 행한 것임을 시사한다.
ㅇ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이것을 행하여'는 성만찬이 영구한 제도로서 사
도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까지도 영원히 행하여야 할 규례임을 시사한다. '나를 기념
하라'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눅 22 :
19). '기념하라'는 '상기시켜 기억하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유월절 규례를 기념
하라'(출 12 : 14)신 명령을 상기시킨다. 이런 그리스도의 명령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규례를 계속 지켜왔던 것처럼 성만찬 규례를 기억하고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신 명령은 새로운 성만찬 규례를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아마도 "너희가 성만찬을 기념할 때, 어린양의 피로 조상을 구원한 것을 기억하
지 말고 너희를 구원할 나와 내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눅
22:1-23 주제 강해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ㅇ식후에 - 본절은 만찬이 다 끝난 후가 아니라 떡을 다 먹은 후를 의미한다.
ㅇ이와 같이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잔을 가지사 사례 하시고'로 성만찬의 두
번째 의식을 언급한다(마 26 : 27 ; 막 14 : 23). 그러나 누가복음과 본서에서는 '이
와 같이'라는 어구로 그와 같은 축사의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ㅇ이 잔은 - 혹자는 잔이 없이는 포도주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본문 '잔' 그 자체
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Grosheide). 그러나 본문에서의 '잔'은 잔에 담겨진 '포도
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진술함으로 포도
주 마시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ㅇ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본절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동일하다(눅 22:20). 단지
누가복음에는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가 부가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막 14:24)고 되어 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혹자는 바울이 원시 사도 교회(Primitive Apostolical
Church)에서 사용되었던 원형(原形)을 말한다고 주장한다(Holsten). 그러나 마태복음
과 마가복음의 표현은 유대계 기독 교회에서 사용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Godet).
한편 본절의 '새 언약'은 '모세의 언약'(출 24:8)과 대조된다.모세의 언약에서는 언약
을 체결하는 과정이 다섯 단계이다(출 24:3-11). (1) 언약 체결을 위한 준비 작업.
(2) 여호와의 언약서 낭독. (3) 백성들의 준행 서원. (4) 언약의 피를 뿌림. (5) 70
인 장로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체결 완료를 의미하는 공동 식사를 나눔.
이런 과정을 거친 옛 언약은 희생의 피를 필요로 하며 피를 뿌림으로 언약 당사자들간
의 책임을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언약 의식은 매년 유월절 만찬 때 상기(想起)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옛 언약은 애레미야에 의하여 선포된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렘
31 : 31-34). 예레미야는 모세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괴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
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를 맺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죄를 기억지 않게 하겠다는 내용임을 소개한
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새 언약'에
대한 예표로서, 더 이상 동물의 희생의 피로 맺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
을 통해 영원히, 단번에 이룬 새 언약임을 암시한다. 본절의 '새 언약'은 바로 예레미
야가 예언한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의 명령에 따라서 성만찬을 통해 이를 기념한다.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ㅇ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 하면')가 생략되어 있으나 헬라어 사본에는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가르'를 보존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
다. (1) 본절이 예수의 강화(講話, discourse)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Ewald). (2) 22
절의 '칭찬하지 아니하노라'의 이유로 생각한다(Hofmann). (3) 앞절의 '나를 기념하
라'와 연관성을 갖는다(Godet, Hodge). 이런 견해들 중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
다. 왜냐하면 본절이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성만찬을 행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ㅇ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오실 때까지'
(아크리스 후 엘데)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
다. 그러므로 '기념하는 행위'는 주가 재림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처럼 본절은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기간만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
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확신이다(Edwards, Godet). 한편
'전하는 것이니라'(카탕겔레테)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한다(Edwards). '말'로 알리는 것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바울이 역설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2) '카탕겔레테'가 '알리다' 혹
은 '선포 하다'라는 뜻으로, '말'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두 견해가 나름대
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고백과 대중적인 선포는 물론 성만찬 의식을
통해서 증거하고 대대로 전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Godet).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ㅇ바울의 관심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는 성만찬에 대한 그리스도
의 말씀(23-25절)과 자신의 견해(26절)를 밝히고, 이런 규례를 고린도 교인이 처했던
상황에 적용시켜 고린도 교인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Grosheide).
ㅇ그러므로(호스테) - 이것은 이제까지 말한 성만찬의 규례를 적용시켜
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니타낸다.
ㅇ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 '이나'(에)는 '그리고'
(an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or)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Meyer).
그것은 떡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두 가지 행위 중에 어느 하나라도 합당치 않게 행하
면 범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당시의 성만찬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아니
었다. 식사 동안에 떡을 먹고 그 후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떡을 합당하게 먹는다
할지라도 잔을 합당치 않게 마실 경우도 있다. 반면에 카톨릭은 본절의 '에'를 근거
로 해서 둘 중의 하나만을 행하고도 성만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Godet). '합당치
않게'(아낙시오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회개하지 않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Olshausen, Theodoret). (2)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참여하는 것이다(Billroth, Chrysostom). (3)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
는 것이다(Luther). (4)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Bengel). (5)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
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다(Flatt). (6) 죄인을 구원하신 그
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Godet). 이런 견해들
중 (5)와 (6)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고
난과 성도들간의 교제로 생각지 않고 단지 헬라인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ㅇ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했을 때 범죄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그래서 카톨릭과 루터교는 본절이 그리
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임재를 의미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상징'에
대한 범죄는 곧 상징이 나타내는 대상에 대한 영적(靈的) 범죄이기에(Godet, Meyer)
그들의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ㅇ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보다 진보된 내용
을 다루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 즉 성만찬을 합당하게 참여하기 원한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ㅇ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 '살피고'(도키마제토)는 예수의 인격에 관
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Godet). 그래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지에 대해서 스스로 살펴
야 함을 의미한다.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ㅇ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앞절에서 밝힌
내용, 즉 자기 자신을 살피고 먹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ㅇ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 '분변치'(디아크리논)는 두 가지로 해
석된다. (1) 혹자는 물질적인 떡과 주의 몸을 구별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Beza,
Grosheide, Hofmann). (2) 혹자는 떡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라 주장한다(Godet).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견
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죄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하
며 동참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만찬의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인
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ㅇ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마'
는 '심판'을 의미한다(Judgment, NIV).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
다. 영원한 심판을 의미할 경우에는 관사 '토'가 부가된다(Godet, Meyer). 더
욱이 다음 구절들에서, 바울이 합당치 못한 성만찬의 참여에 대한 결과로서 일시적인
심판을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30, 31절). 그러나 회개와 개종이 뒤따르지 않
는다면 일시적인 징계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전조(前兆)이다(32절).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ㅇ이러므로 - 이 말은 본절이 앞절에 대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ㅇ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약한자'
(아스데네이스), '병든자'(아르로스토이), '잠자는자'
(코이몬타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혹자는 영적인 측면으로만 해석
한다(Eichhorn, Krause, Morus). 그러나 영적인 차원 에서라면 '약한 자'나 '병든
자'는 의미상 같은 것이기에 꼭 그렇게만 해석되지 않으며 '잠자는 자'는 '죽은 자'
를 나타내는 용어이다(Edwards). 따라서 오히려 본절은 성만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
함이 영적 병약함과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초래하게 됨을 시
사한다.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ㅇ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개역성경에는 '데'('그
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사본에 따라 '데'가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A,B,D), '가
르'('왜냐하면')로 대체(代替)되기도 한다(C 사본). 그러나 '데'가 더 신빙
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Godet) 문맥상으로도 알맞다. '데'는 논쟁에 귀한 논리적인
진보롤 나타내는 것으로, 성만찬과 하나님의 징계 문제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살폈으면'(디에크리노멘)은 29절과 상관성을 갖는데, 그것은 주
의 몸과 피의 가치를 분명히 이해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
는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Godet). '판단을 받지'(에크리노메다)
는 29절의 '죄를 먹고 부시느니라'와 연관된다. 29절에서 '죄'가 하나님의 징계나 심
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본절에서도 '판단'은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한다.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ㅇ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 대한 대조적
인 개념을 소개한다.
ㅇ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 본문에서도 '판단을 받는 것'
과 '징계를 받는 것'은 동일시 된다. 본절의 '하나님의 징계'는 잘못한 자식을 회개
케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수단이다(딤전 1 : 20 ;딤
후 2: 25;딛 2:12;히 12:6).
ㅇ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징계는 영원한 심판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심판의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Edwards). 한편 바울은 앞절과 본절에서 세 가지 용어를 통해 세단계의 '판단'에 대
해 논증한다(Godet). 첫 단계는, '디에크리노멘'으로서(31절) 그리
스도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크리노메노이'
('판단을 받는 것')로서(32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회
개케 하고 세상과 함께 정죄(情罪)받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셋째 단계
는, '카타크리도멘'('죄정함을 받은')으로서(32절) 마지막 심판
때에 영원한 심판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ㅇ그런즉(호스테) - 이것은 이제까지 성만찬에 대해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
임을 시사한다.
ㅇ형제들아 -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권속(眷屬)들을 향해 자주 사용하
는 애정어린 표현이다. 바울은 본장 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책망과 유사한 강력한 권면
을 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애정어린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Godet).
ㅇ서로 기다리라 - '기다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데케스데'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환영하다'(to welcome) 혹은 '용납하다'(to receive). (2) '기
다리다'(to wait). 혹자는 전자로 해석해서 '만찬에 서로 용납하라'는 의미로 이해한
다(Hofmann, Ruchert). 그러나 본절에서는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Edwards, Godet). 왜냐하면 본절은 21절의 '프롤람바네이'('취함
이라')와 대조되기 때문이다.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ㅇ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 본절은 22절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
것은 어떠한 형편의 사람이든지 간에 먹고 마시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갖고 성만찬에 참
여하려면 집에 가서 먹으라는 의미이다.
ㅇ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허기를 메우려고 성
만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잘못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29-32절) 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만찬의 목적을 분명히 이
해하고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ㅇ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 '그 남은 것'(타
로이파)은 성만찬 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리라, 성만찬에 대
해서 지금 말하지 못한 세부적인 사항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본절은 성만찬
의 규례에 대한 설명을 맺으며 바울이 부언하는 내용이다. '귀정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탁소마이'는 '정돈하다'라는 의미하며(Edwards,
Hodge) 아울러 사도 바울의 권위를 암시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모든 규례를 제정하고
정비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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