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전서

[스크랩] 고린도전서 (13 : 1~13)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0

고린도전서 (13 : 1~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ㅇ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1-3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이 존재의 의의(意義)를 가지지 못한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
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은사(恩賜)를 오용(誤用)하며 사랑은 없이 그것들 자체를 중
대시하며 자랑하였다. 여기 본문에 있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것은 그때 초대 교회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은사였다(Grosheide, De Openbaring God In Het Nieuwe Testament,
p.186). 그들이 그 은사를 사랑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4장 참조. 그
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경계한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이 말씀엔, 사랑이 없이 그런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1) 심령과 인격을 결여(缺如)한 도구와 같다는 의미도 있다. 인격적(人格的)인
것은, 사랑을 예상할 수 없는 쓸쓸한 세계에도 사랑을 건설한다. 인격은 미움을 미움
으로 갚는 기계적 법칙에 예종(隸從)하지 않고 미움을 사랑으로 대하는 좋은 역리적
행동(逆理的行動)도 취한다. 현대는 기계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인간의 생활이 점점
기계화되고 마는 것은 유감이다. 인간은 기계를 초월하여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과
학은 발달하나 사랑은 식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심령상 뜨거움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에 말한 대로 기계에
반대되는 요소 곧, 인격이라는 것이 자연적 인격(自然的人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으로 거듭나 진정한 사랑을 가진 인격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
랑을 소유한 인격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 (2) 아무 의미 없는 소리라
는 뜻도 있으니 고,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맹목적(盲目的)인 것이란 뜻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
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하
나님의 은사르르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사랑을 가지고서야 그 의의(意
義)를 성립시킨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남을 위
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줄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를 위하여 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
기도 한다. 그 행하는 일이 선한 일이지마는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자 자신은 진정한 유익을 보지 못한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ㅇ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이 두가지 덕행은, 공격(攻擊)을 받거나 괴
롭힘을 당하여도 보복(報復)하지 않음이다. "오래 참고"란 헬라 원어(*
)는 화를 내는 데서 멀리함을 이름이니, 곧, 격동성(激動性)있는 감정을 피함
이다. 그리고 "온유"란 말은 친절을 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이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1)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
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여기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된다. 그뿐 아니라. (2)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때문
에 참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함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망
(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 성립시켰다. 세상을 이기신 그는 장차 두번째 오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된다. 약 5:7,8에 말하기를, "그러
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
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
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계시니라"고 하였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여
기 기록된 세 가지 말씀도 서로 연락(連絡)있는 한 뭉치이다. 이 셋은, (1) 자기와 남
을 비교하여 경쟁(競爭)하는 심리로 범하는 죄를 범치 않음이고, (2) 명예주의(名譽主
義)를 가짖지 않음이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는 것은 옳으나(빌
2:3), 나보다 우월하다고 섭섭히 여김은 투기이다. 의(義)와 선이 결핍(缺乏)한 이세
상에서, 내가 갖지 못한 의(義)와 선을 남이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것은 기쁜일이지 섭섭한 일은 아니다. 남에게 있는 의(義)와 선도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救贖運動) 곧, 사랑에서 생겼을 것이니,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움직임이
다. 그것들을 보는 나로서는 기뻐할 것밖에 없다.
그 뿐 아니라 기독자는 자기 개인 문제(自己個人問題)의 해결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대한다. 그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인(獨立人)이니 자타 비교(自他比較) 혹은
경쟁의 의식(意識)부터 가지지 않는다. 기독자인 "나"의 구원 문제 기타 문제 해결이
"나" 자신의 진실한 믿음으로 관계된 그리스도의 힘에만 달렸고, 다른 사람들이 잘
한 일에 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남의 잘한 일에 의뢰(依賴)할 것도 없거니와
간섭할 것도 없다. 투기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죄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는 독
립인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기독자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요일 4:9-11). 이와 같이 주님을 영접한
그는 주로써 자랑하나니,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갈
6:4).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다 함은, 자기는 죄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주
님으로만 광영(光榮)으로 여김을 이름이다. (1) 이와같은 자랑은 주님만 자랑거리로
아는 심리인 것이니 만큼 그것은 믿음이다.
"교만치 아니하며". "교만"은 스스로 높아진 심리이다. 사라이 일단 스스로 높아지
면 낮아지는 처세를 못한다. 그가 겸손을 힘씀도 실상은 높아지기 위한 심리로 그리
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처음부터 높아지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 아들
이 적신(赤身)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낮아지심이니, 이와같은 속죄의 사랑을 받은 기
독자로서는 교만할 수 없다. 이렇게 낮아진, 사랑의 소유자가 어찌 교만하랴? 죄는 만
물 중에 제일 더럽다. 예수님은 그것을 씻는 이가 되신 셈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낮
아진 처지에서 실현된 사랑인가?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ㅇ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가지 말씀도 역시 서
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은 합당치 안헥 행함
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신
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줄을 알아야
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줄 모르는 자가, 어떻
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6).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
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
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
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 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 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
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
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행 20:35).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 두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
한 방면을 가진 한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
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
(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
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
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
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
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
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기는 또 한가
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
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
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
(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
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
(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
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우
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롬 5:10). 리차드.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건져주었다.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ㅇ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1)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이
니,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
서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사 53:4-6) 신자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3)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바로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 속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
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한다. 이 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할바(복음 진
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진리"는 여기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골 1:5;엡 1:13;갈 5:7;살후 3:13,14;요 1:17).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
(人格化)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다.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1) 그것은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하여도
유익하다. 그러나 (2)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
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 된다.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ㅇ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1) 기독신자와 모든 것. 여기 "모든"이란 말이 네번 나온다.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 "만물이 다 너희(신자들)의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
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신자들)의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3:21,22).
그러면 속죄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사람, 곧, 기독 신자는 무엇이든지 결국은 자기
에게 복될줄 아는 것인 만큼, 그는 그 모든 일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한 번은 어떤 배가 파선되어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고 한사람만 남았다. 그
가 바다물 위로 표류(漂流)하다가 필경 한 무인도(無人島)에 상륙하여 조그마한 초막
(草幕)을 지어 가지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먹을 것을 잡으려고 섬에 돌아다니던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이 불붙어 버렸다. 그러나 불붙는 연기 때문에 멀리서 다른
배가 그 연기를 신호(信號)로 알고 와서 그 외로운 사람을 건져 주었다.
끄레스.쌌스(Grace Saxe) 부인은 외국 선교사로 가기를 작정하고, 타고갈 기선을
정하고 떠날 시간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 부인은, 자기 부친이 병들었기 때
문에 정한 날자대로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후에 알려진 대로 그
타려던 배가 가다가 파선 당하여 승객(乘客)은 모두 다 죽었다.
(2) 저렇게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 기독자는 모든 역경
과 고난에 대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르다. 기독자는 평안한 일들에 있어서도 인
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키지만, 모든 역경과 고난 그자체도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 약 1:2-4참조. 기독자가 역경과 고난을 잘 이기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상
급이 오는 것을 믿는다(약 1:12). 그는, 자기를 위하여 독생자의 보혈까지 주신 하나
님의 사랑이 어디까지든지 실패하지 않을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그는 어디까지든지
참으며, 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견딘다. 그의 이 생활은 비상(非常)한 일, 곧, 큰 희생
이나 순교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만 지향(指向)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의 이 생
활은, 여기 "모든 것"이란 말이 보여줌과 같이(고전 13:7), 일상 생활(日常生活)에 실
시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 이와 같은 승리 생활을 하면, 비상한 희생이나 순교의 승
리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독자가 일상 생활에 승리를 거두지 못
한다면 비상한 생활이나 순교의 때가 와도 그 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Lenski). 일
상 생활의 모든 어려움에 있어서,
기독자인 나는 참나니, 그 참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쁜 맛 있는 일이고,
키니네 교갑을 씹지 않고 그냥 통으로 삼켜 넘김과 같은 지혜있는 일이다. 또 나는
믿나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여 주
신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로서는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복이
될줄로 믿는다. 나는 바라본다. 그 이유는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과 마찬가지
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뻐하면서까지 이약속을 바라본다(벧전
1:3,4). 나는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견디라고 명령함에 있
어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인것 같
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 나에게 유익이 될줄을 아시는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명령은 무거운 짐이 아니고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ㅇ사랑은 언제가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
리라. - 여기 이 말씀은, (1)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과
(2) 예언, 방언, 지식등(知識等)은 내세에 이르러서는 폐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친다.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할때에, 사랑이 이 세
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캄캄한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
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그의 사랑은 독생자
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다(요일 4:10). 이 속죄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그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
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 이 사랑을 체현(體
現)한다(골 1:24). 사랑은 수고이다(살전 1: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무
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은 아니다. 대속적 고난은 하나님 아
들께서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우리
가 믿는 주님을 위하여 사람들이 당해야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기독자는 벌써 천국(天國)을 그 심령 속에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의 생활을 힘쓸
수록 그는 더욱 천국 맛을 보게 된다.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인데, 그것으로 말
미암아 내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 3:10,11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
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다. 또
요일 4:16-18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
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
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ㅇ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
하리라. -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 나라의 지식이 부
분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 밝힌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1)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니,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형편에 대
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죄는 곧, 어두움이다.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별 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 이해(全的理解)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하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진다. 그는 하늘 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 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쓴다. (2)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
님께서 거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를 지도하시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을 때에, 베
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불
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지식으로 인하여
유해 무익(有害無益)한 반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별세할 날자를 알고
살기가 좋을까? 차라리 그 날자를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
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은 때문에 가리워져 있다. "하나님은 가
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하였으니(딤전 6:16),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
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어
떤 방면은 지금 땅위의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병아리가 바깥 세상의 공기에 견
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 껍질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바깥 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 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3)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
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24에 말
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
가 바라리요"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고전
13:13), 신자로서는 땅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
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
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ㅇ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
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이 귀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 어떤 것임
을 밝혀 준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 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된다. 그
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
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
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내
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 실체
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
한가? (1) 그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
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
이다. (2)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
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뿐이
다. 계시록 4-5장에만도 하나님의 "보좌"란 말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사
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저렇게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
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
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요컨데 어린아이는 그 현재(現在) 그 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
은 모른다. 그들은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
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그들
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다. 그들
도 신령한 것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다.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ㅇ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
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옛날의 거울은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나타냈다.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
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
고도 또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약 1:23,24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
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
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못과 같다. 더러운 못에
는 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림에 있어서
셀바리우스(Cervurius)란 짐승과 같이 건망증이 있다. 셀바리우스는, 무엇을 먹다가
도 머리를 뒤로 돌이키면 자기 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물을 찾
기 위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
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기독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 아
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벧전 2:2). 그 이유는, 그는
,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독자는 캄캄한 때에 더욱 빛을
사모하여야 될 자이다. 잎속에 감추인 꽃을 더욱 보고 싶어함과 같은 심리(心理)로,
그는 희미한 중에 가리운 내세를 사모하여 들어가고자 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된다. 요일 3:2,3에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
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
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고후 3:18에 말하
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
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
다. 조금 맛만 보고 전체는 소유되어지지 않는 그 심리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리일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좁은 창문을 통하여 바깥 세계를 내다볼 때에 그 마음이 얼마
나 바깥 세계를 사모하게 될까? 진실한 성도들은 모두 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9,10 절의 해석 참조.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
하여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세에 우리의 아는 것이 부분적인 것이지만 믿기에 부
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바울이 "부분적으로 아는것"의 가치(價値)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주석가 슐라테르(A.Schlatt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현
세에 우리가 아는 바를 바울이 무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그것이 멸절된
다는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Was wir
jetzt erkennen, heisst Paulus nicht und unnutz; es erfallt aber der
Verganglichkeit, weil es nie etwas ganzes und vollendetes ist.-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1909, Zweiter Band p.117).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이런 부분적인 진리 지식에 의하여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하는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예화를 하나 들면, 이
태리사람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같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아침 여덟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
洋)을 건너가던 중 8월 17일엔 선원들이 콜롬부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
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월 7일에 철물(鐵物)에 붙였던 작대기 한 개와 판
자조각 한개와 또 나뭇가지를 물에서 건졌다. 그것이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다. 과연 그 날 밤
11시에 콜롬부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륙(新大陸)
을 발견하였다. 그 때에는 전에 콜럼버스의 발 밑에 엎드리어 자복하며 울면서 용서
를 빌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다 흙에 입맞추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
(Encyclopaedia Britanica VI, 742-743).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
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곧 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
할 수 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고 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못 가질 수는 없다.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ㅇ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
라. -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
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곧, (1) 소
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
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
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
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
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
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
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
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
(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
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
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
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
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
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
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
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
(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
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
(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
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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