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8:5-13, 요4:43-54 비교하라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백부장 하인의 병 고침 사건에 대해서 누가는 이방인에게 관심 있는 저자로서 흥미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누가는 이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2절 백부장 @Ekatontavrcou(헤카톤트알쿠) "백명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의 군대는 백부장(대위) 아래는 십부장(하사)이 있고 위로는 천부장과 패권자가 있었다. 대대는 여섯 중대(백 인대)로 이루어지고 한 군단(a legion)은 10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어떤 백부장이라고만 소개되어 정확히 이 사람의 신상은 알 수 없으며 주석가들의 추측은 무성하다. (렌스키는 평화로운 시기에 가버나움에는 로마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장교는 헤롯 안디바의 용병이었고, 그의 군대는 다 민족 외국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부하를 다루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행동이 신중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신약 성경에 소개된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책임자도 백부장 이었는데 눅23:47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나온다. 그리고 사도행전 10:1, 22, 21:32, 22,25, 26, 23:17, 23, 24:23, 27:1, 6, 11, 31, 43에도 나타난다. 사랑하는 e[ntimo"(엔티모스) "존경하는, 가치 있는, 덕망 있는"의 뜻이다. 종 마태는 하인 pai'"(파이스) "소자"라고 했지만 누가는 솔직하게 dou'lo"(둘로스) "노예, 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종의 신분인 이 하인은 상당히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 분명하다.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누가는 어떤 병인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마태는 중풍병(마8:6)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었다고 기록함으로 그의 병이 심각한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3-5절 장로 몇을 presbutevrou"(프로스뷔테루스)로 복수형 "장로"를 사용함으로 [장로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장로들은 백부장의 신상을 이야기했다. 5절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회당을 지었나이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미리부터 백부장은 예수께 보낸 장로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백부장의 이러한 청에 장로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백부장이 장로들을 대신 보냈던 것은 아마도 로마 군인의 신분으로 예수께 다가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유대인 장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6절 함께 가실새 백부장은 이 집에 거의 도착을 했을 때쯤 다시 친구들을 보내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했다. 자신은 이방인 군인이고 예수께서는 메시야인데 감히 자신이 예수께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기를 8절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7절 말씀만 eijpe; lovgw/(에이페 로고)은 [말씀으로 명령하소서]이다. 예수께서는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도 모두 명령으로 고치셨다. 이 백부장은 당연히 예수께서 폭풍도 잔잔케 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신 사건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럼으로 자신의 하인의 병도 예수님의 말씀(명령) 한마디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9절 기이히 여겨 ejqauvmasen(에다우마센) "놀라다"로 기대 밖의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 마태는 이 부분에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였다. 누가는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명령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10절 강건하여졌더라 uJpostrevyante"(휘가아니논타)인데 "뒤돌리다, 원래대로"란 뜻인데 여기서는 "이미 병이 낳았다"는 말이다. 마5:31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와 같은 상태이다.
* 이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상세히 관찰해야 한다. 누가는 상황적인 면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마태는 병고침에 관한 부분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 차이가 있다. 마태는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온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것은 생략이라고 보이며, 이 부분에서는 누가가 장로들을 대신 보낸 것을 자세히 다룬 것으로 보인다. 병명을 알려준 것과 마8:13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를 추가한 것은 마태가 더 상세히 다룬다.
7:11-17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림
이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언급된 기사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에 세 번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첫 번째 본문이 본 기사이고 두 번째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눅8:41-42, 49-56), 세 번째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요11:1-44) 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주요 그 자신이 생명이심을 확증하는 사건들이다. 누가는 먼저 이 사건의 상황을 조용한 곳에서 몇 명이 보는데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1절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라고 기록함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증인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장지로 가던 과부의 독자 상여를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과 상여의 무리들이 마주치게 되었다. 성의 많은 무리가 따른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의 슬픔을 함께 애도하고 죽은 독자나 이 과부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울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는 이미 마음속에서 그를 살리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이유를 몰랐다. 14절 관에 손을 대시니 율법에 의하면 관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것이었다(레22:4, 민19:11). 그러나 이미 예수께서는 그러한 율법을 초월하고 계신 분이었다. 일어나라 ejgevrqhti(에겔데티)는 말은 죽은 자를 살리실 때 모두 같은 명령을 사용하셨다(마17:7, 막5:40, 눅8:54, 요11:43).
7:18-23 세례 요한의 질문
마11:1-19, 14:1-21 비교하라 세례요한은 1년도 못되는 짧은 사역의 기간을 보냈는데 그는 갑자기 사형에 처할 위치에 있었고 감옥에서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오실 메시야가 분명하다면 자신을 구원해 주고 그가 부르짖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에게도 별로 관심이 없고 세상을 심판하실 어떤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계셨다. 자신은 감옥에 있는데 그저 병자들이나 고쳐주고 다니는 그런 예수를 보고 답답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답답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예수께 제자를 보내 질문한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옥중에 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가 밝혔다(마11:2). 19절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는 요한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했지만 흔들리고있는 증거이다. 오실 그이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다(시40:7, 시118:26, 단7:13). 21-23절 예수께서는 요한의 질문에 현재 그의 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함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소경(사29:18, 사35:5 -> 마15:31, 막10:46-52), 앉은뱅이(사35:6, 사61:1 -> 마15:31), 문둥병(사61:1 -> 마8:3, 눅17:14), 죽은 자와 가난한 자(사61:1 -> 눅8:54, 눅4:18)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다. 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o}" eja;n mh; skandalisqh'/ ejn ejmoiv(호스 에안메- 스칸달리스데 엔 에모이)는 문맥으로 보아 특정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부정적 관계의 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계속되는 "경고 성이 섞인 축복의"말씀이다.
7:24-35 요한을 칭찬하심
24절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사람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갔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야에서는 무섭게 불어 치는 바람은 잘 불지만 흔들리는 가늘 바람과 갈대는 없다. 25절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는 예수께서 요한이 왕궁에 있는 대신이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26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세례요한에 대해서 증거 하신다. 28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사람에게 있어서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는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그으셨다. 이 말이 자칫 요한 개인의 위치를 축소시키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께서는 요한과 예수 자신(하나님의 것)을 비교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훈하기 위한 비교인 것이다.
7:36-39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이 부분은 예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사건은 십자가 사건 바로 직전에 있었던(마26:6-13, 막14:3-9, 요12:1-8) 사건과 유사하다. (학자들은 같은 사건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다른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은 사건의 시기가 전혀 맞지 않는 다는 것이며 이런 일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누가는 모든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만 편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복음서에 다 기록된 이 사건이 누가복음에는 또 다른 곳에 비슷한 사건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다른 사건들에서도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견해는 언제나 그랬듯이 어느 경우가 옳다는 것에 무게의 중심을 두지 않고 다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고자 함에 있다.) 마가복음의 경우를 참고하라
7:40-50 두 빚진 자의 비유
42절 탕감하여 ejcarivsato(에카리사토) "취소하다, 무효화하다, 용서하다"의 부정 과거형이다.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행하여졌음을 말하고 있다. 원어의 단어는 눅7:21, 빌2:9에도 나타나지만 한글성경에는 비슷한 단어로 변역 된 것이 없다. 눅7:42, 43에는 "탕감"으로 엡4:32, 골3:13에는 "용서"로 나온다. 47절 많은 pollaiv(폴라이) "수많은, 허다한"의 뜻으로 모두를 내포한다. 아무리 크고 많은 죄라 할지라도 모두 사하여졌도다 ajfivetai(아페온타이)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가 사해져서 온전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 50절 구원하였으니 sevswkevn(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받은 상태를 말한다. 향유를 부은 행위에서가 아니라 이미 그의 마음에 구원을 받을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예수께서 이미 확보된 구원을 선언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