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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14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53

예레미야 14장 주석

 

=====14:1

  가뭄에 대하여 - 팔레스틴 땅에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원래 가뭄이  잦기는  하였으

나, 성경에서 가뭄은 기근과 함께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예가 많다(신  28

:23, 24 참조). 본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겠다(R.K. Harrison).


=====14: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애통하니 - 여기에서는 네 가지의 짤막한  서술들

이 등장하고 있다. '성문의 무리'의 문자적 번역은 '성문들'로서  유다의  전도시들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소리가 백성들  중에

서 올라온다. 우리는 민족 재앙 때에 볼 수 있는 민족적 애도의 장면을 소개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애도의 장면은 대개 곤경, 가뭄, 적의 침략과 그에 대한 패배 등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2-9절을 시편에 등장하는 애도가들과 같은, 예배석

상에서의 애도가로 이해하고 있으나(시 70, 74편 ; 욜 1, 2장) 근거가 불확실한  견해

이다. 클라크(Clarke)는 '애통하니'에 해당하는 '카다르'(*        )를 '검다'라고 번

역하며, 슬픔과 재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머리에서 발까지 검은 옷을       뒤집어쓰

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Clarke).


=====14:3

  그 머리를 가리우며 - '가리우며'의 히브리어 '하파'(*        )는 '덮다',  '가리

우다'는 뜻이지만 브라이트(J. Bright)는 본문을 '고개를 떨군  채'라고  번역하였다.

어쨌든 이는 당황과 비탄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4절 끝부분에도  나온

다. 70인역(LXX)에는  4절 후반부에 이것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한 어구를  반

복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14: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 '갈라지니'(*        ,  하타)는  '낙담하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메마른 땅이 쩍쩍 쪼개짐으로 인한 농부들의

비통한 심경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말이다(Feinberg). 한편 심한 가뭄시에  팔레스틴

땅의 균열은 어떤 곳에서는 폭이 한 규빗 정도 되는 곳도 있으며, 또  때로는  깊이가

사람의 키만큼 이를 때도 있다고 한다(Clarke).


=====14:5

 가뭄으로 인해 들의 야생  동물들도 고초를 격는다.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지만  새

끼를 먹일 풀이 없으므로 그 새끼를 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4:6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 '사랑'으로 번역된 '탄님'(*         

     )은 때로는 하마와 같은 물 속에서 사는 짐승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물 속에 있다가 건조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하였다.   그리고  들

나귀는 갈증이나 굶주림을 오래도록 견뎌내는 강한 체질을 가진  짐승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재앙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여

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본문의 '들 나귀'는 굶주림에 지쳐 있음은  물론  뜨거운

열기로 인해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7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  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

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Thompson). 히브리인에게  있어

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

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J.  Bright).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

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

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

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 주께서는 이 백성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이라는  호소이다

(Clarke).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이  곤궁한

때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손처럼 이 땅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지를 묻고 있다. '행인'

이라 하는 것은 밤중에 잠시 투숙하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급히 떠나가야 하는 여행자

를 가리키는 것 같다.


=====14:9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자이오니 - 여호와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다시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사안은 갈대아인의 진군에

의한 임박한 재난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구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영원

히 관심이 없는,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 멀리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괴

리를 자초한 측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주권을  거부하였으며

또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던 이런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

롭고 용서하시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같은 소외의  감

정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며, 설령 그들이  이론적으로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로 국한될 것이다.


=====14:10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        )는 '흔

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한  방황과  변덕의

구체적인 예는 그들이 이방 열국이나 이방의 우상들을 의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위

기가 닥쳐올수록 이 백성은 사 30:15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

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정반대로 행동하였다(Calvin).


=====14:11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 7:16;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

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

(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

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14:12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 형식에  치우

친 종교 제사의 무익함이 재강조되고 있다. 순종이 결여된 '금식', '번제', '소제' 등

은 여호와께 수납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칼', '기근', '염병' 등의 세 항목은  전쟁

때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들이었으며,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5:12;14:15

;29:18;삼하 24:13 등). 이러한 재난들은 B.C. 586년 예루살렘 파괴 때 적나라하게 임

했다.


=====14:13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

다 : '오, 여호와여. 그들은 참으로 지나치게 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

자들에게 속아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완화해주옵소서.'


=====14:14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 여호와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

을 밝히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설교했었지만 그들이 설교한 것은 모두  거짓

이었고 아무런 가치없는 복술, 혹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했다. 예레미

야와 같은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구별은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에 비

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Thompson).


=====14:15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자들은 제일 먼저 '칼'과 '기근'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불충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며,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의를 두다가 묻어줄 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동댕

이쳐질 것이다(16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14:16

 그들의 악을 그 위에 - '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      )는 도덕적인  악이

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다 가리킨다.


=====14:17

  내 눈이 밤낮으로   - 본문의 1인칭 주어인 '나'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다.  여기서

선지자는 반대 감정 병존 상태(ambivalence)인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멸 선고를

받은 백성들의 대표자인 입장에서는 가슴이 녹아 내리는 듯한 비애감을, 아울러 그 백

성을 징벌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D.R.

Jones). 한편 '파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        )는 단순한 부상(wound,

NIV) 정도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분쇄', '파멸', '파괴' 등의 뜻인 바, 개역 성경

의 번역이 정확하다 하겠다.


=====14: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상

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뿐이다. 죽은 자를  묻어

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줄 자도 없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그 성읍들을  떠

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닌다(Clarke).  블레이

니(Blayney) 박사는 이 어구를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행상들처

럼 거짓 교리나 잘못된 예언을 퍼뜨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라고  이해하였

다.


=====14:19

  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

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창 18:23-33) 모세의(출 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

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

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버리지 마옵소

서'(9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절), 그리고 '버

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절)라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14:20

 우리가 우리의 악과  인정하나이다 - '우리 조상의 죄악'이란 말 속에는 여러 세대

에 걸쳐 지금까지 축적된 민족 공동의 죄가 포함된다. 선지자는 지금 이 백성을  대신

해서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하여 죄악을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선지자의 고백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Clarke). 이처럼 당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을 인식

하는 것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식을 반영한다(레 26:40;시 79:8,9; 106:6, D.R. Jones)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이 언약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듯이(창 18:1-8).  그것

을 상실하게끔 만든 죄악과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양자에게 속하는 것이다(3:24;7:26

;11:10;16:12,13 참조).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 이 백성의 곤경에 대한  묘사와  자비를

구하는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열방은 여호와를  유

다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의 신용과 명예

가 땅에 떨어지고 말것이라는 호소이다(Thompson).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오해와 목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주의 영광의 위 -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란 뜻이다(J. Bright). 여호와는  성전

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보좌가 유다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 실체가 결여된 채 형식적 종교 행사만 치르

어지는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었다(마 24:2 참조).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 이 '언약'은 출 24:7, 8에  언급되어  있

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

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Clarke).


=====14:22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 예상되는 심각한 기근 상황과 관련되는 호소

인 듯하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비를 주시는 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할 수 있

는 능력과 권한인 것이다(Clarke).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 이 어구는 '우리는 주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

고도 번역된다(J. Bright). 따라서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철저히 망하

고 말 것이라는 애절한 탄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면

서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린다고해도 이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황되고 속이 빈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뿐이었다(Thompso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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