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1장 주석
=====51:1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 - 이들은 바벧론 포로 생활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본국으로 귀환할 때를 고대했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를릉 다
포로 생활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던 자들이었다. 본문에서 이들은
'의를 좇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칫하면 형식적 율법 준수에 집착
하는 것으로써 선민(選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구
절들은 바로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려고 하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반석 ... 구덩이 - 이 둘은 석수장이가 돌을 떠내서 움푹 패인 자리를 가리킨다.
무엇인가 암시하는 이미지인데, 그 내용은 2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 곧 하나님이 그 주
권적 의지에 따라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언약 백성이 출현하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가 포함된 문장과 2절 상반절은 공히 '생각하여 보
라'로 끝맺고 있기 때문이다.
=====51:2
너희 조상 ... 생각하여 보라 -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의'(5절 참조) 설명함에 있어서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되어 많은 수의
민족으로까지 불어난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
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약속을 부여하시되 인간
의 안목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 곧 노인 사라를 통한 자손 출생을 통하여 그 약속
을 이루어 나가셨고,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큰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위로를 받은 남은 자들은 구원에 관한 절대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의로워질 수 있는 근거를 이 소망 위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51:3
그 광야로 에덴 같고 - 여기 '에덴'은 하나님이 인간의 거주지로 정하셨던 최초의
장소인 에덴 동산을 가리키는데(창 2:8,9), 구약에서 이 호칭은 이상적인 목초지 혹은
농경지의 상징이 되고 있다(창 13:10;겔 31:8,9). 그러나 겔 36:35과 마찬가지로 본
호칭은 미래에 다시 회복될 처소를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본절은 종말
론적 관점에서도 이해 가능하다. 1차적으로 본절은 혼자였던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
족을 만드셨던 하나님이 포로지의 남은 자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재건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고 그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완료형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는 '에덴'이란 호칭으로 미루어 볼 때, 본절은 메시야
를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 그리고 더 나아가 메시야의 재림 때에 있을 완전한 구속 사
역의 성취에 따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까지 그 시야를 확산시키고 있다 하겠다.
=====51:4
내 백성 ... 내 나라 - 각각 '암미'( ), '레움미'( )이다. 어떤 학
자들은 이 두 용어를 각각 '민족들'이란 뜻의 '아밈'( )과 '나라들'을 뜻하는
'레우밈'( - )으로 바꿈으로써 본 구절의 청중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까지 포함한 만민들인 것으로 보려 하나 '만민'에 관한 언급이 따로 나오므로 원문 수
정까지 해가면서 굳이 그렇게 해석할 필욕는 없을 것이다.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 원문에 입각한 직역은 '나의 심판은 만민의
빛이 되리라'이다. 문맥상 본절의 '율법'과 본문의 '심판'은 동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과 5절 내용은 여호와의 날에 되어질 상황을 그린 2:3,4과, 이방에 공의를
베푸실 '종'의 노래에 해당하는 42:1 내용과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의 예언 역시 바벧론 포로 귀환뿐 아니라 메시야 시대에 되어질 일들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라 하겠다.
=====51:5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 계속해서 복합 성취를 겨냥한 예언이 나오
며, 특히 종말론적 색채가 짙은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와 이스라엘의 죄의 해결을 동시
에 만족시킬 대속주이신 메이야의 대속 사역을 암시한다. 한편 메시야의 대속 사역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2차적으로는 이방의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팔 -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
님의 '능력'(롬 1:26)을 가리킨다.
=====51:6
하늘이 연기같이 ... 죽으려니와 - 만물의 일시성,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묘사이지
만 종말에 되어질 어떤 징조에 대한 암시가 정혀 담겨 있지 않다고 볼 수도 없는 구절
이다. 이 같은 묘사가 갑자기 나오는 것은 앞서 언급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톨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
와 이방의 선택받은 자의 구원은 결국 성취되고 말 분명한 사실이다 : "천지는 없어지
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시 102:26;히 1:11,12).
=====51:7
의를 아는 자들 ...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 - 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여호
와의 구원을 사모하여 율법대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뜻한다. 이제 바벧론 포로 사건을 놓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어떻게 구원받겠느냐'라고 조롱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위기 때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신하는 이들은 결코 위축되지 않을 것이
다(마 10:28).
=====51:8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 좀이 의복을 갉아먹어버리듯이 무기력하게 멸망당하
고 말 악인들의 허망함과 유약함을 나타낸다(Fausset). 이처럼 유약한 인간이라면 그
가 내뱉는 조롱조의 말은 생명력도 없고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하나
님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해(害)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며 따라서 그분에게서 나온 말
씀, 구원의 계시는 생명력이 있다.
=====51:9
깨소서깨소서 - 하나님의 과거의 전능 사역을 회고하며 아뢰는 이 호소는 '공동체
적 애가'(corporate lamentation)의 특성을 보여준다(시 44:1-3, 23;80:2). 하나님의
구원을 재촉하는 듯한 이 호소는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긴박
한 현실 상황으로부터 한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말이다.
라합 - '애굽'의 시적인 이름이다. 이미 본서 저자가 사용한 바 있다 :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30:7).
용( , 탄닌) - 문자적인 뜻은 '악어'인데 악어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애굽 정복 뒤에 애굽의 동전에 새겨진 그림을 통해 확인하였듯이 애굽을 상징하는 동
물이다. 특히 그 왕 바로를 가리킨다(27:1;시 74:13,14;겔 32:2). 선지자는 여기서
기적적인 출애굽 사건 중 바로의 항복기사를 회상하고 있다.
=====51:10
바다를 ... 주가 아니시니이까 - 여기서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43:6;출
14:21). '당신은 홍해 기적 사건을 일으키신 바로 그 전능자가 아니십니까?'라고 묻
고 있지만 이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의 질문이다.
=====51:11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 1차적으로는 넓게 펼쳐진 광야를 지나 바벧론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귀환민들에게 찬양과 감격이 가득할 것을 서술한 것
이다. 한편 본절이 9,10절의 애가적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하여 본절의 화자(話者)
를 하나님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으나, 원문상 9-11절과 12-16절은 서술 시점 및 사용
된 인칭에 있어 분명한 구별성을 보이고 있다.
=====51:12
나여늘 나여늘( , 아노키 아노키) - 보기 드물게, '아노키'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참위로자, 구원자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반복되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슬
퍼하는 그의 백성에 대한 답답한 심정의 표출이기도 하다.
=====51:13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 원문 직역은 '너를 멸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이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표적을 정하고 활시위를 뒤로 잡아당긴 상태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시 7:13;11:2;21:12, Maurer). 사실 이와 같은 상태 속에 있다면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절은 그와 같은 상태 속에 있더라도, 우주 안에 되어지
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
르친다. 사람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더 의지할 것인가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
며 날마다 부딪혀야 하는 심각한 질문이다.
=====51:14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 여기 '결박된 포로'( , 초에)의 문자적인
뜻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것' 혹은 '기운 것'으로 담은 액체를 쏟기 위해 기울인 그릇
따위를 연상케 한다(헴 48:12). 그렇다면 이것은 포로로서 그 헐리를 구부린 모습으
로 바벧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회화적 표현이라 보면 적절하다. 이제
그 포로 상태에서 속히 놓인다면 본절의 시점은 포로 시대 말기 쯤이 될 것이다. 이
표현을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승리할 신약 교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Fausset).
=====51:15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고 흉용케 하는 자 - 원문 직역은 '그 물결이 뛰는 바다를
나눈자'이다. '꾸짖어 뛰는 파도를 잠잠케 한 자'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다. 이 같은
번역들을 종합할때 본 구절은 파도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흉용한 바다를 명령하셔
서 잔잔케 하시고 둘로 나누어 그 사이에 길을 내심으로 이스라엘로 무사히 건너게 하
셨던 홍해 도보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51:16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
러나 본문이 세 번째 종의 노래를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 때(49:2), 이는 본
서에서 줄곧 암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을 통한 신기원적인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49:2;50:4,5;59:21;신 18:18;요 3:34, G.W. Grogan).
=====51:17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 - 당시 바벧론의 포로로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상
태를 분노의 잔을 마신 자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담긴 잔을
마신 자는 전적으로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비유는 그리스도에 대속적 죽음
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바 있다(막 10:38). 한편 9절에서 사용된 '히트오레리'(
) 곧 '깰지어다'가 여기서도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1차적으로 진
정 깨어나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인 것
같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회복될 것을 강력히 암시
하고 있다.
=====51:18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을 회복할 존재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바벧론으로부터의 귀환은 바사 왕 고레스의 개입에 의해 실현되었다. 아울러
본문은 영적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적 존재 곧 메시야를 통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51:19
이 두가지 일 - 정확히는 '이 두 가지일들'이다. 말하자면 두 쌍, 곧 네 가지 일
들을 가리키는데, 먼저 한 쌍은 땅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황폐와 멸망이며 또 다른 한
쌍은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기근과 칼, 곧 전쟁이다. 한편, 이를 내적 사건과
외적 사건으로 구분하는 견해(Aben Ezra, Kimchi), 혹은 기근으로 인한 황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멸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Clark).
=====51:20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 여기 '모퉁이'( , 로쉬)
란 그 문자적인 뜻이 '머리', '꼭대기'인데 거리의 '머리'(꼭대기)란 당시 한 도시의
모든 거리와 도로의 출발점이자 중심지였던 성문을 가리킨다. 당시 성문은 밤이 되면
폐쇄되었는데 문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자로서 밤이 되어 그 문이 폐쇄되면 그 문
앞에 모여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모습 곧 여럿이 성문 앞에 모여있는
모습을 저자는 그물에 걸린 영양떼에 비유하고 있다. 어쩔 도리없이 그 발이 묶인 나
그네와 같이 이스라엘은 바벧론의 포로로 잡혀 있다.
=====51:21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 - '포도주 없이 취한 자'이다.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으로 비틀거리고 쓰러진 이스라엘의 형편을 지적으로 표현이다(29:9;애
3:15).
=====51:22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 문자 그대로는, 다시는 바벧론 포로와 같은 시련
과 재난을 허락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
냐하면 예루살렘은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귀환 후에도 로마의 침공으로 동일한 시련과
재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제 경
건한 참이스라엘 백성, 곧 남은자들은 세상에서는 시련과 재난을 겪으나 결국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결코 동일한 고통을 겪지 않고 살게 될 것이다.
=====51:23
그들의 앞에 ... 하였느니라 -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잔혹하게 대하였던 사실에 대
한 생생한 묘사이다. 정복자들이 문자 그대로 그 피정복 국가 왕의 목을 밟았던 관습
은 성경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수 10:24;6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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