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이사야

[스크랩] 이사야 7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11

이사야 7장 주석

 

=====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

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에브라임 전쟁에 대한 요약이다. 선지자는 결과

를 미리 말한 다음 세부적인 사항들을 밝히는 방식으로 예언을 진행시킨다.  '웃시야-

요담-아하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역사는 유다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서  어떻게

국제적 분쟁의 회오리와 그 참혹한 파멸 가운데로 급락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시로 - 에브라임 전쟁이었다(왕하 16장;대하  28장

참조). 구체적 설명은 강해란을 보라.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 '다윗 집'은 다윗 왕조에 속한 아하스와 그의  정

부를 가리킨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다윗 집'으란 표현을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함

축되어 있다. (1)다윗의 집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르신-베가

의 동맹군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다윗 왕조를 폐하고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6절). (2)이 위기는 다윗 왕조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결과이며(삼하 7장), 따라서 아하스가 직면한 외부적 위협은  실

은 여호와의 징계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9절에서 선지자가 다시금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왕의 마음과...흔들렸더라 - 이 불길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왕과 온 백성 곧 나라 전

체가 보인 반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두려움, 그것이었다. 선지자는 그것을  직유

법으로 표현한다:'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이는 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드려내 주고 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불신은 오직  두려

움만을 증폭시킨다.


=====7:3

  때에 여호와께서...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 이 상황에서 선지자는 '스알야숩'이

란 의미 심장한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을 만나라는 여호와의 음성

을 듣는다. '스알야숩'(*              )은 '남은 자가 돌아 온다'는  뜻이다(10:21).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협(단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 혹은 약속(적어도 남은  자는

꼭 돌아올 것이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문맥상 위로의 약속에 더 큰  비

중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스알야숩뿐만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사

야를 또한 만나야 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 있는 이사야의 이름은  스알야

숩이란 이름과 함하여 완전한 계시를 이룬다(Leupold).


=====7:4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 왕에게 보여진 것이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였다면, 본절부터는(9절까지) 청각

적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그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4개의  명령(혹

은 권유)으로 시작된다. '삼가라'(*        , 히솨메르)는 두려움에 쫓겨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용하라'(*        , 하쉬케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써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수

1:6)는 명령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믿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며, 그

러한 두려움으로부터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낙심밖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

다. 앞의 두 가지가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라면, 뒤의 두 가지는 불신앙에서

오는 전형적인 상태이다.


=====7: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이르기를 - 개역 성경에는 '때문에'(*  

       , 야안 키)란 말이 빠져 있다. 원문대로 읽으면 '아람이 너를  대적해서  악을

도모하여,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도, 말했기 때문에'이다. 언제나  아람이  먼저

거론된다(4절). 이는 원정군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아람이었음을 나타낸다.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동의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을 셋으로 나누어 표

기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운율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Alexander). 본문에서 시작한 긴 문장은 7절에서 끝난다(Gesenius, Hitzig, Ewald).


=====7: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하였으나 - 앞절에서 말한 '악한 꾀',  즉  원정군의

전쟁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그것을  곤하

게 하고':'곤하게 하다'로 번역된 '네키체나'(*          )는 '두렵게 하다', '포위하

다'는 뜻이니, 곧 유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자는  것이

다. 고대의 전쟁은 신경전이 그 승패를 좌우했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쪽이 으레  패배

하기 마련이었다. (2)'그것을 파하고':'파하다'(*            , 나브키엔나)는  '산산

이 쪼개다', '박살내다'는 뜻이니, 힘으로 유다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온 나라를 유

린하자는 것이다. (3)'다브엘의 아들을...왕을 삼자':최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

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

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

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왕상 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7: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 본문은 5절에서 시작한 긴 문장의 귀

결절에 해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절을 유도하는 상관적인 기능을 갖는다:유다를 공격하

여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6절) 르신과 베가의 악한 꾀는(5절)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7

절). 왜냐하면...(8,9절).


=====7:8,9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 여기서 '머리'(*     

,로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주권(통치)을 뜻하는 비유 언어이다. 본문의 의미는 다

음과 같이 의역 가능하다:'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

신이 다메섹의 왕이라면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

칠 수 없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

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 본문은 앞에 나온 내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아람에 대한 진술에 이어  에

브라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2)본문의 시점(아하스 왕 2년, 곧  B.C.  734년)으로부터

보면 에브라임의 패망이 불과 십 몇 년 내의 일인데 선지자가 65년이라고  말한  것은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후대에 편집되어  삽

입된 것으로 간주했다(Eichorn, Gesenius). 그러나 현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섣불리 성

경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선지자의 눈은 시종 일관 유다에 향해 있다. 주

변 국가에 대한 언급도 유다에 관련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는 아람의 한계에서 그

와 동맹한 에브라임의 운명을 읽고, 또한 에브라임의 운명에서 같은 민족인 유다의 미

래를 읽는다. 그 미래는 전적으로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 연대 문제에서 그것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B.C. 722년의 예루살렘 점령에 국한시키기보다, B.C.  669

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

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앗술 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

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17:24;스 4:2).


=====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앞절과 본절 사이에 짧은 휴지(休止)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는 선지자의 전언(傳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앗수

르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

의 음성은 계속된다.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

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다. 그것은

때로는 이적(38:7,8;출 4:8)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 가능한 상징들

(8:3,4,18;겔 12:6)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

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써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

진 최후의 기회였다.


=====7:12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

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

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

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

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

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7:13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하려느냐 - 개역 성경에 단수로 나와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사람들'(*         , 아나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

기보다는(Bultema) 아마도 권세자들에 의해 압제받는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

면 선지자의 책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7:14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

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르신-베가의 멸

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

녀'(*       ,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

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

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

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

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Lindblom,  Steinmann):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

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

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

(Clements):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  

       , 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        )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

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Kaiser).  이

경우에 정관사 '하'(* )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어떤 주장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다만 이제까지 주어진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우선 징조로서의 이  아이는

아하스 당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성장 기한과 르신-베가 동맹군의  몰

락이 결부되어 있다는 15,16절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또한 이 징조는 아하스 당대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이 다윗의 집에 주어졌고, 더욱이 이 임마누엘의 위로가  앗수르

의 위협과 더불어 소멸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된다. 선지자의 예언이 궁극적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아이의 어머니는  선

지자와 동(同)시대 사람으로서 다윗 가문에 속한 한 처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 임마누

엘은 위기의 순간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때에 미쳐 - 영아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

악을 분별한다 함은 영아의 상태를 넘어섬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그  아이

가 자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는 대략 3세

정도로 추정된다.


=====7:16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미워하는'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

하는'이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수리아와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

며(왕하 15:29;16:9;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이다.


=====7:17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 비록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의한 위협은  소멸된다

할지라도 유다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

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앗수르로부터 올 것이다.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심

판의 위협으로의 이 돌연한 변화는 실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자초한  것이다(10-13

절). 불신앙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앗수르는 그 손의 막대기에  불과하다

(10:5).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 앞으로 당할 환난의 무서

움과 그 비참함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그 분열의 역사에 비견된다. 민족의 분

열은 모든 비극의 뿌리요 모태였다.


=====7:18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 - 유다를 괴롭힐 침략군에는 앗수

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첨가된다. 선지자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하고

있다. 나일 강을 끼고 있는 애굽에는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많은 종류의  곤충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가 많았다. 반면에 많은 산과 숲으로 우거진 앗수르에는  벌떼가

많았다. 본문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황의 전후 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

애굽 군대가 유다 땅을 유린하게 된 것은(왕하 23:28-30) 훨씬 후대의 요시야 왕 때였

다(B.C.609년).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느고가 이끄는 애굽 군대와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벧론군대가 격돌한 저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전투에서  애굽이  패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바벧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B.C.605년).

앗수르 군대에 의한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 가장 극심하였다(36,37장).


=====7: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  선지

자의 비유는 계속된다. 파리와 벌로 비유된 애굽과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신호에 따

라서 유다 땅 전역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 언급된 네  장소

를 각각 파리와 벌의 서식지로 파악하여, 거친 골짜기와 가시나무  울타리는  파리에,

바위틈과 모든 초장은 벌에 연결시켰다. 또한 클레리커스(Clericus)는 이들  장소들이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스발트(Oswalt)는 이들이  곤충들

로 비유된 외국 군대로부터 유다 백성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이라고  하

였다.


=====7: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애굽은 유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다시 앗수르에게 향한다. 18절에서 벌로 비유된 앗수르가 여기서 다시 삭도로  비유된

다. 그것은 '세내어 온 삭도'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

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왕하 16:7,8).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수염도 깎으시리라 - 1:6에서 전신에 상처입은  패전

(敗戰) 군인으로 그려진 유다 백성이 여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깎여진,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삼하 10:4,5).


=====7: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 벌거벗은 상태 곧  황무지로

변하고 만 유다의 비참함을 선지자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유물은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젖을 뽑아낸들 얼

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현저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그 젖이 오히려 남아돌 것이라고

한다.


=====7:22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꿀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Delitzsch).


=====7:23

  그 날에는 천(千) 주(株)에 은 일천 개의 가치되는 포도나무...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

복된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한

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

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7:24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

이 서식하게 될 그곳에 살과 활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 땅이 쓸모가 있다면 어쩌면 사냥터로나 적합할지도 모른다.


=====7:25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

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

습이다(G.W.Groga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메모 :

'구약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사야 9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이사야 8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이사야 6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이사야 5장 주석  (0) 2015.02.08
[스크랩] 이사야 4장 주석  (0) 2015.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