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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이사야

[스크랩] 이사야 6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11

이사야 6장 주석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

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

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

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

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

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

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

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

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

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

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

냐'이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

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        )은  웅장하

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

(요 12:41).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

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

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                      , 오메딤 밈마알 로)

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          , 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

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      )이다

(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

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

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

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

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            , 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      , 카라)는  목

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

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

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       , 카도쉬)과 '영광'(*        , 카보드)

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

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

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

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

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

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6:4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

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

여준다.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

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

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

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

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

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

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

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

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

었다(약 3:2 참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

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

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

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6:6,7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

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

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

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

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

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절의  신비

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

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

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

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것을 암시

하는 것이다.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뵈었던

선지자는 이제 사죄함을 받은 이후에 영적인 귀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향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Jerome).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선지자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

에서 그곳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왕상  22:19,20  참

조). 그것은 헌신의 열정에 의해 자원하여 일하러 갈 사람을 구하는 음성이었다.  '우

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

으로 인하여 '엘로힘'(*         )이라고까지 불리웠다(창 6:2;시 8:5).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입술이 정결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

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로 이렇

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

니)란 말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

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씻음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로는 시 51:12-15에 언급되어 있다.


=====6:9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말하라'는 두 개의 동사로 집

약된다(출 3:16;7:15;삼하 7:5;18:21;왕상 18:8;대상 17:4). '이 백성'이란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6:10;8:6,11,12;9:13;28:11,

14; 29:13;미 2:11;학 2:14).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상실하고 그 행위로  하나

님을 배반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

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할 것이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

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혹은  영적인

불감증)은 예레미야가 말한 바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렘 7:24-26) 백성들의 상

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그의 사역의  결

과를 묘사한 말로 4복음서에서 인용되었으며(마 13:13;막 4:12;눅 8:10;요 12:39), 바

울에 의해서 두번 인용되었다(행 28:26,27;롬 11:8).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 앞절의  명령

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라면, 본문의 명령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깨닫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리라'로 단언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지  못지않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삼중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1)'둔하게 하라'(*       , 하쉬멘):이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

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2)'막히게 하라'(*        , 하크베드):이는 '무

디게 하라'는 뜻이니,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3)'감기게 하라'(*     , 하솨):이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이니,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에서 이 같은  결과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

라 '발의 등처럼, 길의 빛처럼'(시 119:105) 사람을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

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칼빈(Calvin)이 잘 말한 것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

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판의 제1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다. 그위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는  버려둠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롬

1:24,26,28).


=====6:11,12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궁극적

인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주여, 이 백성들의 눈

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시 90:13 참조). 이 같은 물음의 배후에는  하

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

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대답하시되...많을 때까지니라 -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이 너무 깊어서 완전한 파멸을  목

도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온 나라가  황폐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전국가적인 재난으로 실현되어지리라는 사실이다.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 본문은 내용상 앞절에서  말

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  할

지라도 - 1/10은 극히 적은 수를 가리킨다 - 그마저 계속되는 파멸의 와류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인 마침

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

임을 당한 나무의 표상에서 이러한 사상이 암시되고 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남아 있는 것같이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

는 상록수에 가까우며 완전히 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선택된 듯하다(Delitzsch).  '그루터기'라

고 번역된 '마체베트'(*        )는  '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

(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Alexander).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최후까지 보존되어질 이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            , 제라 코데쉬)이다. '거룩한 씨'는 '행악의 종자'(*              

    , 제라 메레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1:4),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

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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