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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이사야

[스크랩] 이사야 9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12

이사야 9장 주석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8:23로 매

겨져 있다. 비록 '흑암', '고통' 등의 어두운 단어들이 연속되고 있지만 내용은  정반

대이다. 흑암이 걷히고 빛이 다시 비췬다. 이 모든 변화는 한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비롯된다(6,7절). 흠정역은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불변사 '키'(*   )를 '그럼에도  불

구하고'로 번역함으로써(nevertheless)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본절에 언급된 지역들은 사사 시대

이래로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적 색채가 더 짙

었다. 게다가 최근에 자행된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년)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던 것이다(요 1:46;7:41,52;행 2:7). 그러나  새

날이 밝을 때, 흑암이 가장 깊은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췰 것이다.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빛이 비취도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앞

에 언급된 갈릴리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와 평행을 이룬다. '흑암'은 슬픔 혹은 재난으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더  넓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총체적인 불행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시 107:10,11). '큰  빛'

은 세상의 빛이요(요 8:12) 참된 빛이며(요 1:9) 의의 태양이신(말 4:2) 예수  그리스

도를 암시한다. 마태에 의하면, 이 빛은 맨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에

서 부터 비취기 시작했다(마 4:13). 그가 처음 이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였으며(요

2:11),  맨처음  가르치신  곳도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이었다(눅

4:14-17).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갈릴리  해변가였다(마  4:17;막

1:14,15). 이로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신약에 이르

러 완전하게 응하였다.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 내용은 주께 대

한 찬양과 감사로 바뀐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일 가운

데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나라를 창성케 해주신 것이다. '창성케 함'은 백성의

수를 많게 함이다. 둘째는, 즐거움을 더하게 해주신 것이다. 백성의 수의 증가와 즐거

움의 증가는 모두 메시야 시대를 특징짓는 주도적인 현상들로 간주된다(26:15;66:8;슥

14:10,11).


=====9:4

 멍에와...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 본문의 '멍에'와 '채찍'과 '그  압

제자의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멍에'

(*      , 수발로)와 '그 압제자'(*            , 하노게스 보)는 애굽에서의  속박을

연상시킨다(출 2:11). 성경적 표상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을 속박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해방 사건은 애굽에서의 구원에 그 뿌리를 두

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미디안의 날'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수

효로 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가장  분명하게

현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삿 7:2, Oswalt, Calvin).


=====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살라지리니 - 구원은 압박받는 백성에게는  해방

으로 경험되지만, 압제하는 군대에게는 패망 이외 다름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상은 기드온의 승리(Junius)나 앗수르의 전멸(Delitzsch) 보다 더 크다. 전쟁을  위

한 무장들인 '갑옷'(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군화'로 번역함)과 '군복'이 불에  태워

지리라는 표현은 적들의 패망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더 나아가 전쟁 자체의  소멸

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절에서 평

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9:6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정사'로 번역된 '미스라'(*       )는 '지도자가 되

다'는 뜻의 '사라'(*     )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통치'를  의미한다.  '정사를

어깨에 멘다'는 말은 권위의 상징으로 주어진 금고리나 열쇠를 어깨에 걸친 데서 연유

한 듯하다(22:22 참조).

   기묘자라, 모사라 - '기묘'(wonder)와 '모사'(counsellor)를 구분하여 해석할 수도

있으나(Gesenius, Rosenmuller, Delitzsch),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라

는 해석도 가능하다(28:29, Gray, Oswalt).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

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일을 이루실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신적인 계획의 수립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첫째 이름과 둘째

이름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다. '엘 깁보

르'(*            )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부를  하나님의  이름이며

(10:21),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신  10:17;느  9:32;시  24:8;렘

32:18). 따라서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神性)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

하다.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 '영존함'은 신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

점은 '아버지'에 놓인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

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22:21;욥

29:16;시 103:13). 따라서 '아비 아드'(*         )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

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평강의 왕이라 - 마지막으로 그는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로서 '왕'이라 불리

운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의 개념은  히브리적이라기보

다는 이교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평화의 왕'(*            ,  사르-솰롬)으로  불린

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  역시  평화로울  것이다(시

72:3,7;렘 33:6;미 5:4;슥 9:10 등).


=====9:7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토록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확약하셨다(삼하 7:13,16). 사실 다윗 왕국은  구약

역사에서 백성들이 동경하던 하나님 왕국의 실체임과 동시에 장차 메시야에 의해 건설

될 항구적인 평화의 왕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O.Robertson).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 그 나라의 영속성은 다윗 언약에  기초하

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부 구조는 '공평'(*        , 미쉬파트)과 '정의'(*      ,

체다카)이다. '공평'과 '정의'야말로 메시야 왕국을 지상의 나라와 구별짓는 결정적인

표지인 셈이다. '보존하다'(*     , 사아드)는 '떠받치다', '유지하다'는 뜻이다.


=====9:8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 본문에서 '말씀'(*     , 다바르)은 보냄을 받

은 자 곧 사자와 동일시되고 있다(시 107:20;147:15,18). 이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보

내졌기 때문에 일점 일획의 어김도 없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보내신  자에게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55:11). 여기에 히브리적 사고의 독특함이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는 말씀과 사건이 구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사건으로  구체

화되며, 이를 통해서 그 말씀의 진실성이 입증된다(호 6:5).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과 함께 사건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38:7;42:16;창 34:14;신  17:5;삼상

3:11). 그 말씀이 야곱에게 보내어진다. 마치 음울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전령처럼 말

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쓰였으며, 여기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

다(Alexander).


=====9: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

민'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5:3)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음에

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기보다는 교만으로 일관한다.


=====9: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대신하리라 하도다 - 자만으로 가득 찬 에브라임의 말

이다. 벽돌과 뽕나무는 둘 다 값싼 건축 자재들인데, 빈약한 건물이나 서민들의  집을

지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서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고급품들로서  권세자들

의 거처나 호화로운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이용되었다(왕상 5:6;대하 1:15;2:3;스 3:7;

암 5:11).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

상을 입을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진다고 호언하고 있는 것이다.


=====9:11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 에브라임은 그들의 교만의 대가를  경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르신의 대적'(*             , 차레 레친)은 언어 유희를 이용

한 수법으로 앗수르인들을 가리킨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르신과 동맹을 체결했었다. 그러나 르신이 죽고 앗수르에 의해 수리아(아람)가 정복된

이후(왕하 16:9)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아람에 의해 침략을  당하게

된다(12절-'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9: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 '앞'(*      , 케뎀)과 '뒤'(*

     , 아호르)는 오히려 동과 서로 이해함이 자연스럽다(11:14;창 2:8;욥 23:8 등).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 그러나 실제로 블레셋은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적이 없고 남유다만을 괴롭혔을 뿐이다(대하 28:18,19). 따라서 여기 언급된  '이스라

엘'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itzsch).


=====9:13

  이 백성이...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 '돌아오다'(*     , 슈브)는 완전

한 전환을 뜻하며, '찾다'(*      , 다라쉬)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물어 옴, 혹은 전심

으로 구함'을 뜻한다(출 18:15;신 4:29). 그러나 이들 동사 위에 부정사(不定詞) '로'

(*   )가 놓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백성은 반역적인 태도를 고집하였다.


=====9:14

 종려가지와 갈대 - '종려가지'(*      , 키파)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으로  인해

대단히 고귀한 식물로 평가되었으며, 후일 로마 동전에 유대의  상징으로  새겨지기도

하였다(시 92:12;아 7:7,8, Alexander). 이와 대조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갈대'(*  

      , 아그몬)는 '습지', '늪', 혹은 '시궁창'(*     , 아감)에서 자라는  식물(풀)

로, 대단히 천하게 여겨졌다. 이 둘은 아마도 고귀한 자와 천한 자를 암시하는 듯하다

(19:15).


=====9:15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 이사야가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꼬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 '꼬리'(*      , 자나브)에는 본래 사악하고 가증

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그들이 마치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권세있는 자들의 편에 빌붙어 부끄러운 말과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

기 때문이다(E.J.Young).


=====9: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하니 - 3:12의 탄핵과  유사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특히 무겁게 취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은 자신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9:17

 이 백성이 각기 설만(褻慢)하며 -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이는'(*   , 키)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시며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설

명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 모두가 부패했다. '설만하다'(*     , 하네프)

는 '모독하다', '불경건하다'는 뜻이니,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심  대

신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모독하는 불경건만이 가득함을 나타낸다(시 14:3).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다(1:17;출 22:22;신 10:18;14:29). 그러나 그들에게까지도 주께서 평상

시 베푸시던 긍휼이 거절될 것이다. 이는 주의 진노하심과 크기가 어느 정도이며 또한

백성들의 죄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전자는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후

자는 이어지는 진술에서 명확히 표현되고 있다.


=====9:18

 대저 악행은 불태우는 것 같으니 - 죄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선지자는 그것을

'불'에 비유한다. 이 불은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타오른다(창 4:7 참조). 물을 부어

꺼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이 불을 끄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은 끝없이

타오르는 악행의  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라고  말한다(롬

1:28-32).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같은 것이라 - 선지자의 묘사는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

을 연상시킨다. 죄악의 불길은 먼저 가시나무를 삼키고 - 질려와 형극은 보통  사악한

사람의 상징어로 자주 쓰인다(삼하 23:6;미 7:4) - 이어서 큰 삼림에까지 옮겨 붙어 -

혹자는 이를 죄악의 집단에  참여한  온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Vitringa) - 대 초원 위에 지천으로 타올라 마침내 온 하늘을 연기로 가득 채운다. 이

러한 일련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어떻게  온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16절).


=====9: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 죄악의 불길 위에 또 하나의

불길 곧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오버랩 된다. 이 둘은 다르지 않다. 대초원을

태웠던 죄악의 불길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임을 알게 된다. 화마(火魔)

가 핥고 지나간 그 땅은 검게 그을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한다. '소화된다'(*    

  , 네으탐)는 말은 '빨갛게  달아  오르다',  '타서  검게  되다'는  뜻이다(Luther,

Calvin, Virtringa, Lowth).


=====9:20

  우편으로 움킬지라도...먹을 것이며 - 무정부 상태하의 내란, 즉 동족간의  무자비

한 살육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굶주림에 비교되고 있다. 그들은 탐욕에 지배되고 있으

며 아무것도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런 자기 파멸적인 탐욕은 선지자의 다음

말, 곧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팔'(*     

    , 제로아)은 비유적으로 '힘', '원조', '도움'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상부

상조해야 할 이웃을 가리킨다(Gesenius, Rosenmuller, Maurer).


=====9: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 서로 보호하고 위해  주

어야 할 이웃(혹은 지체)이 오히려 서로 물고 뜯는 원수로 변할 때 거기에는  '완전한

파멸' 밖에 남지 않는다(갈 5:15).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간 길이 바로 그 길이

었다. 북왕국 안에서 두 형제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를 질시하고  다툼으

로 일관하더니(삼상 10:27;삼하 20:1;왕상 12:16;15:27;16:21;왕하 9:14 참조),  그것

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유다를 공격하여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빚기에  이르른

것이다(왕하 15:13-16,25,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충족되지 아니하였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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