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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스라-느헤미야(1): 서론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9:17

에스라-느헤미야(1): 서론


1. 희망과 절망의 변주곡

 1-1 희망은 싹터오고

  이방의 수치와 모욕거리 취급을 받으면서 불결한 이방 땅에서 불결한 음식을 먹어야 했던 바벨론 포로기는 악몽처럼 지나갔다. 포로됨의 수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도덕적이고 영적인 이상들을 포기하고 신앙을 저버린 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그러나 이제 비극적 드라마는 끝이 났다. 과거의 죄는 용서되었고, 이제 어두운 지평성 너머로 새로운 동녘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은 주전 539년에 메대-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했다. 게다가 다음 해인 주전 538년에는 고레스 왕이 바벨론 유다 포로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집을 건축해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페르시다 왕이 이러한 칙령을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태도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피정복민들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종족과 민족의 소망을 억누르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추악한 역사를 통해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레스는 무조건 억누르기 보다는 각 민족들이 자기 소망과 이상대로 살아 가도록 허용하는 것이 페르시아를 위해서 더 낫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고레스는 유다 포로들 뿐 아니라, 포로가 되었던 다른 민족들도 모두 해방시켰으며, 그들의 신들과 신전도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 고레스는 예루살렘을 확보하여 교두보로 삼는 경우에 애굽 정복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다윗 계열의 왕자인 세스바살을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하고, 유다 포로들에게 돌아가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세스바살이 예루살렘 총독이 된 것은 유다 포로민들의 신경을 잔뜩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50년만에 다시 다윗 가문의 후손이 다시 예루살렘 보좌에 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유다의 전망이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으며, 이미 바벨론에서 삶의 기반을 닦아놓은 사람들이 다시 그 폐허가 된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스바살은 페르시아인들의 도움으로 주전 538년 봄에 성전보물들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스룹바벨과 함께 포로민들을 거느리고 바벨론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은 1차 포로 귀환을 주도한 두 지도자였다. 고레스에 의해 의해 총독으로 임명된 세스바살(스 1:8, 2:2, 3:2,8)은 잠시 귀환민들을 지도했으며, 그 후에 총독에서 물러나고 그 뒤를 스룹바벨이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는 고레스의 명령을 즉시 실행에 옮겼다. 먼저 그들은 폐허가 된 왕궁 터에 서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회복했다(스 2:68-3:13). 스룹바벨은 예배 시스템이 다시 복구되게 되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전의 지대가 놓이게 되었을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도 성전 재건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스 4:1-2). 그러나 포로민들은 그들이 과거에 하나님께 불충성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들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1-2 좌절과 낙심의 나날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성전 재건은 사실상 도시의 요새화를 의미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페르시아 왕을 설득시켰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성전 재건 운동은 15년 정도 중단되고 말았다. 언뜻 보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돌아온 포로민들이 어떻게 15년 동안 성전을 재건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성전이 없이도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다 백성들은 성전보다는 자기 집을 짓는 일에 더 바빴다(학 1:1-4). 성전 지대가 놓이고 다시 성전이 제사 장소가 되었지만, 성전 건물은 지면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동안 세스바살은 역사의 뒷 무대로 사라져서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 이사야와 에스겔이 예고한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고 작은 소망조차 성취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좌절하고 절망했다. 유다는 광대한 세계 제국인 페르시아의 작은 속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호와의 "새 일"은 도대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에 대해 유다민들의 의문은 점점 더 커져가기 시작했다.
 

 1-3 새로운 활기

  그러는 사이에(주전 530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전쟁에서 죽고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잔혹한 폭군으로 알려진 캄비세스는 애굽에 3년이나 머물면서 정복 사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자기의 아우인 바르디야(또는 스메르디스)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하는 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다리오가 7인의 군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바르디야로부터 왕위를 다시 인수받게 되었다. 다리오는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바르디야와는 달리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재위 초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다. 그가 한 해에 19번이나 전쟁을 치르고 9명의 왕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은 제국 전체에 얼마나 소요가 극심했는 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페르시아 연대기

연대(주전)

비고

고레스

550-530

고레스 칙령(538)-바벨론 포로 귀환

캄비세스

530-522

성전 건축 재개(520)

다리오 1세

522-486

성전 완공(515),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490)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486-465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활약

아닥사스다1세(롱기마누스)

465-424

에스라 귀환(458), 느헤미야 귀환(445)

다리오 2세

424-404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 내의 광범위한 소요와 분쟁은 여호와의 결정적인 개입의 전주곡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은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유대인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학개는 백성들이 자기 집은 잘 지으면서도 성전은 폐허로 남겨놓은 일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일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따에 기근을 보내셨다고 말했다(학 1:9-10). 학개는 여호와께서 다시 시온을 통치의 처소로 사용실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성전 완공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을 축복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이 왕공되지 않는 한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했다. 이로 인해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휘 아래 성전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진척되어 학개가 첫 번째 예언을 한 지 한 달 후에 두 번째 예언을 하게 되었다. 학개는 두 번째 예언에서 여호와께서 열방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만국의 보배로 충만케 하여,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크게 하겠다고 선포했다(학 2:1-9).

  한편 스가랴는 스룹바벨로 인해 여호와의 신의 도움으로 성전이 완공될 것이며(슥 4:6-10), 기다리던 다윗 가문의 후손이 스룹바벨이라고 선언했다(슥 3:8, 6:9-15, 학 2:20-23).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는 효력을 발휘했다. 다리오 왕은 사마리아인들의 고발을 접하고 조사하던 중에 고레스의 칙령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허락했으며, 이로 인해 성전 건축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진 지 거의 25년이 지난 뒤인 주전 515년에, 성전의 마지막 돌이 기쁨 중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성소가 하나님의 에배 장소로 벙헌이 되었으며, 유월절을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스 6:14-22). 이로 인해 포로후 공동체는 성전을 중심의 예배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민족 재건의 일단계 사업은 성취되었다.


 1-4 왕정 복구 희망의 몰락

  그러나 이런 기쁨의 순간이 지나고 성경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다. 이 후의 성경 기록에는 학개와 스가랴가 선포한 소망이 실현되었다는 이야기나 예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역대기 역시 희망이 성취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고통과 희생의 힘든 기간에 유대민족을 인도해 왔던 에스라서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스룹바벨의 이름은 다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그를 둘러싼 높은 기대도 가을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성전을 완공한 후에 예루살렘 총독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무명으로 돌아감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들의 꿈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는 학개와 스기랴의 요구를 받아들여 왕전 복구로 방향을 틀다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실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슥 12:10)을 근거로, 포로 후 공동체가 내분을 일으켜서 스룹바벨이 친 다윗 파에게 살해되었다고 추측한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많은 이들이 회복된 다윗 성에 대해 가졋던 빚나는 꿈과는 달리 다윗 계열의 어느 후손도 이 성 위에 앉아 통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5 정체성 상실과 낙망

  다윗 왕조의 부활이 무산되자, 페르시아 제국 도처에 흩어져 살더 유다인들은 재건 사업에 관심을 잃게 되었으며, 대부분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눌러 사는 데 만족했다.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의 귀환자 명단을 보면, 고향으로 돌아온 당시의 유다 총 인구가 약 5만명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유다는 스룹바벨 이후 유프라테스 강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아바르 나하라"(강 서편) 속주의 일부로서 임명직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최근에 발굴된 도장, 관인, 직인이 찍힌 단지의 손잡이 등,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 당시에 유다 출신의 총독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각 속주들은 직접적인 페르시아 문제를 제외하고는 자치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총독은 왕실 재원을 위한 징세의 임무를 맡았다.

  성전이 완공된 때부터 주전 458년에 에스라가 귀국할 때까지 약 60년간 포로 후기 유다 공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히브리 왕정 시대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그 당시의 거대한 제국들로부터 많은 역사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궁정 기록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아시아의 다른 작은 왕국들의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페르시아 시기에 이르면 우리는 실제로 당시의 역사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왕정 시기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많은 자료를 제시해주고 있지만, 페르시아 시대에 대해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그리고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는 몇 가지 언급이 전부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관한 배부분의 역사적 결론은 임시적인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라기와 에스라-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성전 건축 이후 60년이 지난 포로 후 공동체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자. 성전의 완공으로 집회 장소가 마련되었고, 이로써 유다인들은 예배 공동체로서 그 위치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공동체의 영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자기 직무에 싫증이 난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병들고 흠이 있는짐승들을 바치면서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말 1:6-14). 또한 율법을 집행할 때에는 편파적인 처신을 함으로써, 성직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말 2:1-9). 이것은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안식일을 무시하고 버젓이 장사를 했다(느 13:15-22). 평싱도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직무를 버려야만 했다(느 13:10-). 이들은 신앙에 충실해 봐야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말 2:17, 3:13-15).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말 3:14)."

  이러한 태도는 사회 윤리와 개인의 도덕적 문란을 초래하였다. 이혼이 성행하였으며(말 2:13-16), 부자들이 임금을 착취하고, 악한 이들을 이용했다(말 3:5). 가난한 이들은 가뭄으로 인해 세금을 내기 어려울 때에 자기 밭을 저당잡혔다가 강매당하여, 자녀들과 함께 노예로 전락했다(느 5:1-5). 더욱이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유다인 공동체의 순수성 보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느 13:23-27). 따라서 공동체가 스스로 개혁하여 영성을 회복하고 방향성을 찾지 않으면, 공동체가 붕괴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만간 그 성격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유다인들은 다윗의 제도와 신학, 국경, 궁전, 성전, 그리고 수도를 가진 유다 라는 국가에 속한 국민이었다. 그러나 이런 국가적 제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공동체의 미래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야만 했다. 포로 후 공동체가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지 않으면, 이웃 민족들과 사회-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사라져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상태로는 아주 위험하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길을 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정체성을 정림해여 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2.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의 성격

 2-1 율법과 성전 중심의 공동체

  이때에 등장한 두 개혁자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지도 아래 개혁과 부흥을 시도함으로 포로 후기 공동체가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런 점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될 암흑이 오기 전에 예루살렘의 삶의 모습을 비춰줄 두 줄기의 빛이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율법을 회복하고, 기존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이후, 수세기 동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집(성전)과 율법 중심의 공동체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업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집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안에 예루살렘은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남의 나라의 속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선 예루살렘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의 손에 넘어갈 때까지 페르시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의 원정과 그의 헬라화 프로그램에 따라 유다 공동체는 헬라인들의 이상과 관습과 씨름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은 지 150여 년 후에 유다인들은 그의 후계자들인 셀루시드 왕조에 반역하였으며, 마카비 가문의 지도 아래 독립을 쟁취하여, 나름대로 60년 이상 독립을 유지했다.  이 용감한 시기 동안 다윗 가문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었으며, 오히려 마카비 제사장 가문에게 모든 것을 맡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로마 군단의적수는 되지 못했다. 주전 63년 예루살렘은 폼페이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정복했다. 유다의 독립의 마지막 불길은 깨졌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은 또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스룹바벨의 성전은 솔로몬의 제1성전 터 위에 든든하게-비록 장엄하지는 않지만-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예배 장소와 때로는 피신처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외양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고 있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제2 성전이 허물어진 지 20년 후에 베들레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 이렇게 본다면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나오는 포로 후 공동체는 평범한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 공동체로서 이방 열강들의 각축 속에 겨우 존속해 온 여백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에스라-느헤미야서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에스라의 율법 개혁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저 유다 민족의 생존과 유지의 역사 기술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란 말인가?


 2-2 개혁될 필요가 있는 공동체

  게다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과 부흥은 현실의 문제를 다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으나, 이로 인해 현실이 급격하게 호조건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느헤미야 9장의 기도에는 이미 개혁의 과정을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땅 안에서의 자유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방 왕에 복종하는 현재 상황 사이에 참을 수 없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열조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의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한고로,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열왕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저희가 우리의 몸과 육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느 9:34-37)...."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도 현실에 변화가 없다면 도대체 무슨 소망이 있는가? 실제로 느헤미야 13장을 살펴보면 포로 후 공동체는 부흥을 경험한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혁될 필요가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 마지막 결론장을 살펴보면 느헤미야서의 각 관심 분야에서 실패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레위 사람들이 받을 봉급을 못 받자 전리로 도망한 일이 있었음은 물론(느 13:10), 안식일에 물건을 사고 팔면서 안식일을 범하는가 하면(느 13:15-22),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과 결혼한 유다 자녀들은 아스돗 방언은 하면서 유다 방언은 하지 못하는 타락상을 연출하고 있었다(느 13:23-27).


 2-3 실현된 종말론적 공동체

  그렇다면 도대체 에스라-느헤미야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포로 후기 공동체의 이러한 초라하고 안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 의도는 무엇인가? 성경 기자는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진행되어 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기자 뿐 아니라,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확고한 확신이기도 하다. 비록 기대반큼 완벽한 영광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포로 후기 공동체는 회복의 영에 의해 포로됨과 버림받음의 고통을 치유 받은 회복된 공동체였다. 제사와 희생과 성전 예배와 제사장직이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경험한 공동체였으며, 성령의 임재를 몸으로 느낀 성령 공동체이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에스라-느헤미야의 부흥 운동은 이어질 긴 침묵의 4세기 동안을 버티게 해 줄 마지막 부흥 운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면 구약 이스라엘의 천년 역사를 마무리하고 신약 시대로 나아가는 전이의 성격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국 교회 가 포로 후기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올바른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반 게메렌은 포로 귀환부터 예수님까지의 기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의 철저한 단절을 외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한국 교회는 구약의 역사를 주로 이스라엘의 실패와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왔다. 그러나 에스라-느헤미야서를 보면 포로에서 귀환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회복의 축복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반 게메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새 언약의 시대는 이미 포로 후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대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이해하고, 동시에 오늘 날의 한국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는 그 동안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메시지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에스라-헤미야서의 신학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구조를 중심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3. 에스라-느헤미야 구조

 3-1 명단 집착증?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성격의 문서들이 많이 나온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매우 복합적인 성격의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첫째로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구약 오경이나 역사서의 다른 내러티브와는 달리 1인칭으로 된 자서전 성격의 내러티브가 나온다. 성경 문헌, 특별히 역사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인칭 내러티브와는 다른 이 1인칭 내러티브를 흔히 "에스라 비망록"(Esra Memoire; 스 7:12-9:15)과 "느헤미야의 비망록"(Nehemiah Memoire; 느 1:1-7:73, 12:27-43, 13:1-31)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여러 가지 서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고레스의 칙령을 히브리어로 풀어 쓴 서신(스 1:2-4)을 비롯해서 아람어로 쓴 서신이 6개나 기록되어 있다.

 

서신목록

본문

1

아닥사스다 1세에게 보낸 유대 대적들의 편지

스 4:9-16

2

아닥사스다 왕의 답장

스 4:17-22

3

유대 대적들이 다리오 왕에게 보낸 편지

스 5:7-17

4

고레스 칙령의 문서 창고에 남은 기록

스 6:3-5

5

다리오 왕의 답장

스 6:6-12

6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

스 7:12-26

  셋째로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명단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재략적으로 책의 1/4이 명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명단은 대부분 백성들의 명단이다.

 

명단목록

본문

1

세스바살에게 들려준 성전 기명의 목록

스 1:9-10

2

최초 귀향자들의 명단

스 2:1-70

3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족장들의 명단

스 8:2-14

4

이방여인과 이혼한 자들의 명단

스 10:18-43

5

성벽건축자들의 명단

느 3:1-32

6

최초 귀향자들의 명단

느 7:6-73

7

언약에 인을 친 자들의 명단

느 9:38-10:27

8

예루살렘 밖에 사는 귀향민들의 등록 명단

느 11:20-36

9

느헤미야 시대까지 귀향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

느 12:1-26

10

공동체의 행렬 멤버의 명단

느 12:32-42

  그 동안 이러한 명단들은 골치 아픈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우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에 지루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명단을 길게 나열하는 이유와, 이 명단들이 갖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명단이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반복되는 이유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이들은 성경 기자가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그냥 옮겨 적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의 설득력이 없었다. 과연 전승에 대한 단순한 종경심 때문에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기자가 지루하고 단조로운 인물 명단들을 책의 1/4이나 차지하도록 만들었을까? 만일 그들이 전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명단을 기록했다고 해도, 동일한 포로 귀환 자 명단이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란 말인가?     


 3-2 명단은 해석의 열쇠

  그러나 최근에 와서 에스라-느헤비야서의 가장 골치 아픈 요소처럼 보이는 명단들이 사실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구조와 의미를 여는 중요한 열쇠임을 주장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명단들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전체 모양을 형성하고,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주제를 잘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에스케나지(Eskenazi)는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의 귀환자 명단의 반복을 통해서 "에스라-느헤미야서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이 두 개의 명단이 "그 사이에 놓인 장들을 통일시키고,(스 2장)부터 (느 7장)까지를 하나의 중앙 단락으로 형성하는 인클루지오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귀환자 명단의 반복이 갖는 구조적 기능을 살펴보도록 하자. 명단 반복에 의해 형성된 틀 가운데 놓인 중앙 단락인 에스라 2장부터 느헤미야 7장까지의 본문은 가장 긴 단락으로서  에스라-느헤미야서의 핵심이며 중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거대한 단락 안에서 세 개의 하부 단락이나 세 개의 스토리를 찾을 수 있다.

 * 제 1단락(스 3-6장): 성전 재건-스룹바벨이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명에 의해
 * 제 2단락(스 7-10장): 공동체(거룩한 자손) 재건-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의 명에 의해
 * 제 3단락(느 1-6장):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명에 의해

  각 단락의 스토리는 특정한 인물들과 분명한 임무가 나타날 뿐 아니라, 나름대로 분규와 해소의 플롯적 요소도 지닌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된 세 개의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에스라-느헤미야서 기자는 귀환자 명단을 이 세 단락의 앞과 뒤에 배치함으로 하나의 통일되고 연속된 이야기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에스라 5장의 사건과 6장의 사건 사이에는 약 60년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느헤미야 6장의 사건들을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명단을 반복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단일한 거대 사건, 즉 "하나님의 백성이 칙령에 따라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건"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복은 에스라-느헤미야서의 형태를 보게 함으로써, 중앙 단락 앞에 있는 것은 서론이요, 뒤에 나오는 것은 결론임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명단 반복이 갖는 주제적인 기능은 무엇인가? 에스케나지는 (에스라 6:14)에서 그 대답을 찾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이 포로 귀환자 명단의 반복이 구조적으로 말하고 있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스 6:14)...." 에스케나지는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기자가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집 건축은 단순히 성전 건물 완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율법으로 재건되고, 또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포로 귀환자 명단의 반복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여러 차례에 걸쳐서)이 하나님의 집을 완성한 자들이며, 그들은 포로 전 공동체의 연속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한 도구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에스케나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스라 2장의 귀환자 명단은 독자들에게 거대한 공동체를 소개한다. 4만 2천명의 백성이 전면에 나타난다. 따라서 이 군중이 주요 관심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독자들이 이를 잊어버릴까봐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이 명단을 느헤미야 7장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현재의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최종 분문 형태 가운데에서 명단 반복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3-3 전체 구조

  위의 에스케나지의 통찰에 근거하여 에스라-느헤미야서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명령: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스 1장)-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와 고레스의 명령

  2. 하나님의 집 재건(스 2장-느 7장)
    1)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스 2장)
       2) 하나님의 집 재건(스 3장-느 6장)
          가. 성전 재건(스 3-6장): 스룹바벨이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명에 의해
          나. 거룩한 자손 재건(스 7-10장);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의 명에 의해
          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느 1-6장):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명에 의해
    1)'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느 7장)

  3. 지속적 회복과 갱신(느 8-13장)

  위의 구조를 보면 에스라-느헤미야서의 기본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고레스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유다 포로민들에게 원하는 자는 누구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집을 지으라는 명이 떨어지자(1번), 포로 귀환민들이 그 명을 따라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2번), 그리고 그 후에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집의 완공을 축하하는(3번)이야기로 끝이난다. 특히 중앙 단락에는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민들-1)과 1)'-이 권위 있는 문서(왕들의 조서와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건설했는지-2)번-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집건축은 세 명의 페르시아 왕(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통치에 걸쳐서 일어났으며, 예루살렘 성전(가)과 거룩한 자손(나)과 예루살렘 성벽(다)이 재건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집이 궁극적으로 완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3-4 한 권의 책

  위에서 살펴본 구조적이고 주제적인 근거에 의해 우리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한 권의 책으로 인정하고 다루고 있다. 이런 근거가 에스라-느헤미야서를 한 권의 책으로 다루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유대교와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한 권의 책으로 다루어진다.우성 요셉푸스와 유다인 탈무드가 에스라서를 언급하지만, 느헤미야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히브리 전통에 따르면 구약 성경은 모두 24권인데,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한 권으로 계산해야 이 숫자가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70인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도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전 2세기의 사르디스의 멜리토(Melitto of Sardis)가 작성한 구약성경의 목록에도 한 권으로 나온다. 게다가 주후 15세기까지 모든 히브리 사본들에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한 권의 책으로 나타난다. 맛소라 학자들은 성경 각 권의 책의 말미(이를 맛소라 미주라고 한다)에 그 책 안에 쓰인 전체 단어 수나 글자의 수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에스라의 말미에는 이 숫자가 나오지 않고, 느헤미야서의 말미에 에스라-느헤미야서 전체를 합해서 계산한 숫자가 나오고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서를 둘로 분리한 것은 2세기의 오리겐(주호 185-253년)이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에스라 1,2서로 불렀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제롬이 라틴 벌게이트를 만들면서 느헤미야를 에스라의 두 번째 책이라고 명명한 것이었다. 이것이 1448년에 처음으로 히브리 사본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후의 모든 역본들에 흘러 들어가서 오늘날에는 마치 두 권의 책처럼 읽혀지고 있다. 이렇게 둘로 구분된 것은 아마도 (느 1:1)에 제목처럼 보이는 듯한 표현("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이 있고, 처음에 귀환한 이들의 명단이 반복되면서( 스2장, 느 7장), 에스라서는 에스라의 1인칭 비망록을, 느헤미야서는느헤미야의 1인칭 비방록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명단의 반복은 두 권의 책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한 권의 책임을 보여주는 문에적 기법임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에스라-느헤미야서를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하고 살펴보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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