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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사기(5): 사사들의 이야기(4) (13-16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24

 사사기(5): 사사들의 이야기(4) (13-16장)


                        
 "사사들의 이야기" (참고 지도) 

  사사시대는 징계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사사들을 일으켜서 대적 자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을 받은 사사들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이러한 사사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6개의 반복되는 순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1) 범 죄 - 2) 진 노 - 3) 압 제 - 4) 부 르 짖 음 - 5) 구 원 - 6) 재 범 죄

  각 사사들의 이야기는 주인공만 다를 뿐 그 이야기의 구조는 모두 위와 같다. 사사 이야기에서 옷니엘을 사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서론으로 본다면, 나머지 6명의 사사는
A - B - C - C'- B'- A'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 에훗과 삼손(A-A'): 에훗과 삼손은 둘 다 홀로 싸워야만 했던 외로운 영웅이었다. 에훗은 베냐민 지파의 외로운 영웅이었고, 삼손은 단 지파의 외로운 영웅이었다. 다른 싸움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힘을 합쳐서 대적들을 쳤지만, 이 두 사사는 오직 자기 혼자의 힘으로 대적들과 싸워야 했다. 베냐민 지파와 단 지파는 사사 시대에 가장 곤경을 겪은 지파였다. 단 지파는 적의 공격을 받고 자기 기업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 사건으로 인해 지파 전체가 전멸할 위기에 놓였다(삿 19-21장). 또 이 두 지파는 모두 다 강력한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의 사이에 기업을 얻은 지파였다. 에훗은 동쪽에 있는 대적인 모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했고, 삼손은 서쪽이 있던 대적인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했다.     

 * 드보라와 입다(B-B'): 드보라와 입다는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 사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드보라는 그 당시 매우 천대받던 여성이었고, 입다는 창녀인 첩의 아들로서 변방으로 쫓겨났던 사람이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 기드온과 아비멜렉(C-C'):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사사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누가 이스라엘의 왕인지를 보여준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많은 미디안 군사들을 물리침으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 되심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백성들이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 이를 거절했다. 이는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스스로 세겜 사람의 힘을 빌려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 후에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간의 불화로 인해 세겜은 아비멜렉에게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러한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여호와임을 분명히 증거해주고 있다.    

서론

사사들의 이야기(반역과 구원)

타락

실패

배도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아비
멜렉

돌라야일

입다

삼손

종교적
타락

도덕적
타락

1

2    3:6

3:7-11

3:12-31


  5:16

6  
     8

9

10:5

10:6
    12

13     16

17     18

19     21

실패원인

1

2

3

4

5

6

7

이스라엘부패상

 


                 < 삼손 이야기(13-16장) > (참고 지도)

1. 삼손의 출생(13장)

 1-1. 이스라엘의 범죄와 징계(13:1)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기 시작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손에 파셨다. 주전 12세기에 팔레스타인 남서부 해안에 정착한 블레셋인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사 시대 후반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사 초기 시대에 블레셋은 단 지파를 라이스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후에 사울 때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위협 하는 가장 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삼손은 보내셨다.


 1-2. 삼손의 출생 예고(13:2-5)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삼손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마노아 부인에게 준 여호와의 약속에서 나타난다(13:4-5). 여기에서 여호와는 마너아 부인에게 1) 그녀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며, 2) 그가 이스라엘을 블레셋인으로부터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고, 3) 그가 날 때부터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첫 번째 약속은 삼손의 출생에서 성취되었고, 두 번째 에고는 14-15장에서 성취되었으며, 세 번째 약속은 16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고 하는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다. 소라 땅은 처음에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으나(수 15:33) 후에 단 지파에게로 넘어갔다(수 19:41). 그러나 왕국 시대에 이르러 유다의 세력이 강성해졌을 때 다시 그 땅은 유다 지파에게로 반환되었다(대하 11:10). 이처럼 소라 땅이 두 지파의  기업으로 왔다 갔다 한 것은 이곳이 두 지파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라(Zorah)는 현대의 '사라'(Sorah)와 동일시되는 곳으로 벧세메스 북쪽 그리고 예루살렘 서쪽 약 20km지점에 있다.   마노아의 아내는 처음부터 불임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노아 부부는 일찍부터 자녀를 생산하는 것을 단념하였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슬픔 가운데 살았을 것이다(삼상 1:5, 6). 어느 날 그 여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사사 시대에는 주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만(2:1-5; 6:11-24) 선지자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4:4; 6:8). 이러한 현상은 사사시대가 신현 시대에서 선지자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정 시대를 지나면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로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구약 성경에 언급된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적으로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이는 본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수태 고지는 삼손의 경우 외에 성경에서 4 번 더 있었다(아브라함과 사라(창 17:19; 18:10,14), 한나(삼상 1:17), 엘리사벳(눅 1:13),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눅 1:3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수태 고지는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태 고지를 통해 당신이 몸소 장차 태어날 아이의 출생을 관장하시며, 특별히 그 아이를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을 표명하셨다.

  마노아는 그 사람에게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1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아내는 나실인이 아니었으나 그녀에게 태어날 삼손만 나실인이었다(5절). 그런데도 그녀에게 삼손에게 요구되는 것과 꼭 같은 규례가 요구된 것은 태아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서이다. 이는 그녀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는 한 도구로 성별 되었다는 것을 각성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포도주와 독주는 모든 '술'을 대표한다. '포도주'('야인')은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고(레 10:9;  사 22:13), '독주'('쉐칼')는 과실주나 곡주는 물론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도수 높은 술을 의미한다. 부정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벡성에게 먹거나 만지는 일을 금하신 부정한 짐승(레 11장)이나 시체 등을 말한다. 나실인은 이러한 부정한 것들에 접촉해서는 안되었다(민 6장).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지내려면 그 기간 동안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민 6;5). 그러나 그가 다시금 일반인의 신분으로 되돌아갔을 때에는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삼손과 같이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은 평생동안 머리털을 깎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실인'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삼손 외에도 요한(눅 1:13-17)도 이러한 나실인에 속했다. 나실인('나지르')은 '바치다', '거룩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인 '나자르'의 파생어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민 9:12). 그리고 '나실인'은 포도 나무에서 나는 것과 독주를 먹을 수 없으며,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고, 시체를 가까이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었다(민 6:1-21).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친 것은 다윗 왕이 블레셋의 모성(母城) 메덱암마를 쳐서 빼앗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삼하 8:1). 따라서 삼손의 등장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서막에 불과했다(Wycliffe). 한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기간인 40년의 마지막은 다윗 때가 아니라 사무엘 때였다(삼상 7:12-14).


1-3. 마노아 부인이 남편에게 그 사실을 고함(13:6-7)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가서 이 모든 일을 고했다. 그녀는 한 사람이 그녀를 찾아 왔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와 같아서 두려워서 어디서 온 사람인지 묻지도 못했으며 그 사람도 자기 이름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호와으 사자가 그뇨ㅕ에게 말한 모든 것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들에게 붙여진 명칭으로(Cundall, Millar) 모세나(신 33:1) 엘리사(왕하 4:9, 40)와 같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야레')는 말은 공포(terror)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외심이나 도덕적인 숭배감 등을 의미한다(창 28:17).


 1-4. 여호와의 사자가 두 번째 나타나심(13:8-14)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으나 그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 11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사람이니이까? 가라사대 그로라. 12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1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그녀의 남편 마노아는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 마노아는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아기의 양육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아마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가 했던 말이 너무도 심각하고 중요한 말이었기에 태어나게 될 아들을 어떻게 양육시킬 것인지 더욱 자세하게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알아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는 마노아의 돈독한 신앙을 잘 드러내 준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마노아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니다. 과거 모세도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실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었다(출 2:1-10). 이에 하나님은 마노아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셨다. (삿 13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1,8,16,23, 24,25)와 '하나님'(5,7,22)의 두 가지가 상호 교환되어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본장의 내용이 마노아의 가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 블레셋과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협의의 의미인 '여호와'와 넓은 의미인 '하나님'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된 것 갈다.

  여인이 밭에 앉아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다. 그러나 그 때에 그 남편 마노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급히 달려가서 자기 남편에게 전에 자기에게 말한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고 전했다. 마노아의 아내는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게 되자 남편의 기도하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태어날 아이의 양육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남편에게 달려가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것을 알려준 것이다. 마노아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일어나서 아내를 따라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사람이냐"고 물었으며, 그 사람은 그 말에 동의하였다. 마노아는 그 사람에게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양육하며 어떻게 해야하는 지 물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포도나무의 열매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그의 아내에게 이미 명한 모든 것을 지키면 된다고 하였다.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성취도기를 원한다는 고백이었다. '기른다'는 말('미쉬파트')은 '재판', '관습'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문자적으로 말하면 '그 아이를 (양육하는) 관습(규례)은 무엇입니까?(어떻게 해야합니까?)"라는 뜻이었다.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에게 독특하게 적용될 생활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하나님의 사자에게 물었다. 그는 아마 (민 6:2-20)에 언급된 나실인의 규례 외에 그 아이에게 적용될 자세한 내용을 더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1-5. 마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심(13:15-23)

  "15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23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마노아는 이 말을 듣고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을 위해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할 동안 그 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아직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염소를 대접하고자 한 것 같다. 아마 그는 염소를 잡아 자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을 것이다. 염소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중요한 재산이었으며(삼상 25:2 ; 눅 15:29), 염소를 잡는 것은 손님에 대한 후대(厚待)의 표시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가 준비하는 식물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번제를 준비하려면 마땅히 여호와께 드리라고 지시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아직 이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기드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도 기드온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고 번제물로 불살랐었다(6:19-21). 이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나 기드온이 바친 음식을 먹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깨우쳐 주려는 데 있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근본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취하는 것과 같은 음식을 취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해 준데 대하여 감사의 예물로 염소 새끼를 드리려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는 그 소식으로  인해 감사 받기를 거절하면서 마노아에게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사자는 자기가 전한 기쁜 소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였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노아는 그가 예고한 말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에게 왜 이름을 묻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은 기묘라고 하였다. 혹자는 마노아가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의 신분을 알고싶어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이 말은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가 지닌 신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이름만을 물은 것이다. 즉 마노아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을 수 있거나 그에게 예물을 드리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빛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었을 뿐이다(Goslinga). 마노아는 그 사람의 예언이 성취될 때 그 사람의 뛰어난 영적 능력을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널리 알려 존경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서 '기묘'라는 말('필리')은 '기묘자'에 해당하는 '펠레'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 또는 '놀라운'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이름은  구약에서 메시야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사 9:6). 따라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다(Cassel, Lange, Matthew Henry).

  이 말을 들은 마노아는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준비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렸으며, 이에 여호와의 사자는 이적을 행하였다.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보니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갔으며,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불꽃을 좇아 올라가고 있었다.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 광경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는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전에 기드온은 번제로 '염소 새끼 하나와 무교 전병과 국'(6:19)을 취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마노아가 바친 소제물도 아마 기드온이 바친 것과 유사한 종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제물로는 발효된 식품과 꿀이 섞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레 2:11).  따라서  마노아의 소제물은 본문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화덕에 구운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이었음에 틀림없다(레 2:4). 여기 사용된 '이적'이라는 용어는 역시 앞 절의 '기묘'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자의 행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만큼 놀라왔다'로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이적은 잉태하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24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또한 역사상의 이적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정녀 탄생(마 1:23), 하나님의 성육신(요 1:14), 그리스도의 부활(마 28:7 ; 고전 15:13) 등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문학적 비유 내지 신화가 아니라 엄연히 역사상으로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인 것이다. 오늘날 합리주의를 숭배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초자연적 요소들을 제외시키고 다만 자유, 평화, 헌신 등과 같은 소위 '예수의 정신'만을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코자 하는 지극히 불순한 행위이다(롬 10:6, 7).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6:21), 이적으로 번제물을 태웠다. 이때 나온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꽃을 타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승천(昇天)한 것은 그가 마노아 부부와 관련된 일을 모두 마치셨음과 또한 그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셨음을 보여준다.

  마노아는 이 광경을 본 후에 비로소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죄악에 물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경우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출 33:20). 따라서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뵈온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으며(사 6:5),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기 때문에 죽을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6:22,23; 창 32:30).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 10:19, 20).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예수님은 그 피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셨다(히 9:14,15). 본문을 보아 마노아의 아내는 상당히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공포심에 휩싸여 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남편을 위로하였다. 그 위로의 내용인즉 여호와께서는 전혀  자신들을 죽일 의향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녀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열납하셨으며, 이적을 베풀어 보이셨고, 자신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추론이다. 일전에 기드온도 하나님을 뵈었지만 죽지 않았다(6:22 ; 23).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한 목적에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취하사 그 본체의 영광을 가리우고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6:23 주석 참조. 따라서 마노아와 그 아내도 비록 하나님을 뵈었지만 죽지 않을 수 있었다.


 1-6. 삼손(태양)의 출생과 성장(13:24-25)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마침내 그 여인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대로 아들을 낳게 되었다. 마노아는 그 아들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손'이란 이름이  '태양'을  의미하는 '세메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Goslinga, Cassel, Cundall, Matteww Henry, Wycliffe). 만일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광명을 주기 시작하는 것과(5절) 연관이 있다. 그런데 혹자는 '삼손'이라는 이름이 '봉사하다'란 의미의  갈대아어 '쉐마쉬'에서 유래했다고도 주장한다(Hervey). 이 주장에 따르면 '삼손'이라는 이름은 그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도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한편 그밖에도 A.D.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나 카일(Keil)은 삼손이란 이름이 '강하다' 또는 '귀하게 여기다'란 의미를 지닌 '쉬므쉠'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앞의 두 가지 주장보다 어원적, 역사적으로 그 근거가 빈약하다(Cassel). 삼손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였다. 성경에는 사무엘이 성장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았었으며(삼상 2:26)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눅 2:52). 에스다올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 23km  지점에 있는  단 지파의 성읍이다(수

19:41). 마하네단은 문자적으로 '단의 진'이란 뜻이다. 이곳은 삼손이 활동하며 생활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이주한 것 같다(16:31). 이곳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부모들이 거주했던 '소라'(2절)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며 조그마한 성읍일 것이다. 18:12에는 이곳이 기럇여아림 뒷편,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의 지역인 것으로  나와 있다. '감동하다'는 말('파암')은 '강하게 밀다' 또는 '몰아넣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번민하다'란 의미로 두 번 사용되었던 적이 있으나(창 41:8 ; 단 2:3) 성령의 감동과 연관되어서는 본절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다. 즉 여기서는 성령께서 삼손에게 강하게 임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Goslinga). 아무튼 이로써 삼손은 그 마음과 몸을 주장하시는 성령께 사로잡힌 바 되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성령의 감동은 지혜, 예언 등 다양하게 나타나나 특히 삼손에게는 영웅적인 완력으로 나타났다(14:6,19; 15:4, 15).


2.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함(14장)

 2-1. 삼손의 결혼 요청(14:1-4)

  "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2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성인이 된 삼손은 어느 날 블레셋의 딤나에 내려가서 그 곳에서 마음에 드는 블레셋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삼손은 이스라엘로 돌아 와서 부모에게 그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딤나는 원래 단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이었으나(수 19:34),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난 후에 블레셋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곳은 현재의 딥네(Tibne)로 소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소라가 딤나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사기 저자는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다"고 말하며 딤나에서 이스라엘로 "올라왔다"고 말하고 있다. 삼손은 자신의 혼인 문제를 부모님과 상의했다. 나실인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자란 삼손이 결혼 문제를 두고 부모와 상의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신부를 데려오려면 결혼 지참금이 필요했으며, 이것은 주로 신랑의 아버지가 지불했다. 삼손이 블레셋 땅을 자유스럽게 왕래하고 블레셋 처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했으나 인간적인 교류는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손의 부모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했다(출 34:15,16; 신 7:3,4). 특히 삼손은 나실인이었기 때문에 그 부모는 더욱 반대해야만 했다(13:5). 그러나 삼손은 그 여인이 자기 눈에 들기 때문에 그 여인을 데리고 와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삼손이 그 여인을 고집한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기 눈에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의 시대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사사 시대는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행동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삼손도 이 정신을 따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아내를 골랐다. 그러나 삼손이 이렇게 자기 뜻대로 행동한 반면에 하나님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블레셋에게 심판을 행하시려고 하셨다. 삼손은 불성실하게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블레셋을 심판할 기회(빌미)를 찾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능력으로 불레셋을 심판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세운 사람(삼손)을 통해서 그 일을 수행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블레셋을 치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로 나온 계획이었으나, 삼손이 이방 여인과 혼인을 한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후에 삼손은 이 선택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다(16:21,30).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그릇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레셋을 심판하시고야 말았다.


 2-2. 사자를 죽인 삼손(14;5-9)

  "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지르는지라. 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구약 시대에는 팔레스틴 지역에 사자가 자주 출몰했다(삼상 17:34; 삼하 23:20; 사 30:6; 렘 49:19).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서 만난 사자는 포도원에 굴을 파고 사는 여우를 쫓고 있는 사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문에 언급된 '사자'는 짐승을 사냥할 만큼 자란 사자였다. 삼손이 백수의 왕으로 부르는 강한 사자를 맨 손으로 찢어 죽인 것은 그가 장차 블레셋을 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삼손의 엄청난 힘은 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특별한 힘이었다(13:25). 삼손은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로 가고 있을 때에 사자를 만나게 되었다.  삼손이 사자를 죽인 일은 부모와 잠시 떨어져 있을 때였으며, 그는 사자를 죽인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여인과 이야기하며 그녀를 기뻐하였다. 여전히 삼손은 그 여인을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동했다. 삼손은 다시 이스라엘과 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딤나로 내려갔다. 삼손은 길을 가던 중에 지난번에 자기가 죽인 사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 사자의 시체에는 벌과 꿀이 있었다. 벌은 썩은 시체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자의 시체는 가죽과 뼈가 바싹 마른 상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손이 딤나를 다시 찾은 때는 지난 번 찾은 때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였을 것이다. 삼손이 지난번에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간 것은 약혼을 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번 방문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 위한 방문이었을 것이다. 삼손은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취하여 걸어가면서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그 꿀을 가져다가 부모에게 드렸지만 그 꿀의 출처에 대해서는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죽은 시체를 만지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민 6:6, 7)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부모에게 숨겼을 것이다. 2) 삼손은 잔치 중에 수수께끼를 내기 위해서(14)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모에게 숨겼을 것이다.


 2-3. 수수께끼 사건(14:10-17)

  "10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15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로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17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어느 날 삼손의 부친이 여자가 있는 곳을 방문하였다. 본문에 사용된 '여자'('이솨')는 결혼한 여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히브리어로 처녀는 '베툴라'란 말을 사용한다). 이 여인을 '이솨'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처녀가 아니라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나 이혼녀였을지도 모른다. 삼손의 아버지가 삼손의 결혼을 위해 딤나로 내려간 것은 이 결혼식이 블레셋의 풍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 지참금을 지불한 후에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와서 결혼식을 올리기 때문이다(창 24장, 마 25:1-13, 마 22;2-10). 그러나 블레셋인들은 반대로 신랑을 위해 신부집에서 결혼 잔치를 베풀었다(R. D Vaux P. Cassel). 신부의 집에서는 30명의 젊은 블레셋 사람들을 초청해서 삼손의 친구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초대하여 7일 동안 잔치했던 점으로 보아 신부 측은 블레셋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손은 잔치 도중에 그 친구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는 자기가 수수께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친구들이 그 문제를 맞추면 자기가 그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 문제를 맞추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내라고 했다. '수수께끼'('후드')는 '어려운 문제'(왕상 10:1), '오묘한 말'(시 49:4; 잠 1:6), '은밀한 말'(민 12:8)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 이 말은 연회의 흥을 더욱 돋우기 위해 제출된 '문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베옷'('세디님')은 일상적인 옷. 또는 '세마포 속옷'을 말하였고, '겉옷'(,베가딤)은 특별한 행사나 축제 때에 입는 고급의상이었다(창 45:22 ; 왕하 5;5,22,23).

  블레셋 사람들은 30명이 함께 머리를 짜내면 충분히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삼손의 제안을 동의했다. 삼손이 제출한 수수께끼의 내용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히브리 시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즉 '먹는 자'와 '강한 자'는 같은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그리고 '먹는 것'과 '단 것'도 같은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이를 도표화해서 기호로 풀면 그 해답은 비교적 쉽게 드러난다. 즉 짐승을 잡아먹는 동물 중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무엇이며, 음식 중에서 가장 단 음식은 무엇인가? 가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18절).

            ┌────┐       ┌────┐         ┌───┐

            │먹는 자 │   =   │강한 자 │    ---> │사 자 │

            └────┘       └────┘         └───┘

            ┌────┐       ┌────┐         ┌───┐

            │먹는 것 │   =   │ 단  것 │    ---> │  꿀  │

            └────┘       └────┘         └───┘

  블레셋 친구들은 삼손의 수수께끼를 3일 동안 풀지 못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제 칠 일(제 4일)에 삼손의 아내를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학자들은 제 칠 일이란 말이 필사자의 실수로 쓰여진 글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삼손이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그녀에게 수수께끼의 의미를 풀어 준 것이 제 7일이기 때문에(17절) 블레셋 사람들이 제 7일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그 해답을 받아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70인역 시리아 역본은 이를 '제 4일'로 고쳐서 번역하였으며, 영어 성경도 이를 따라 이 말을 "제 4일"로 번역하였다. 히브리어에서 '7'(쉐비이)과 '4'(레비이)는 첫 자음 하나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에 필사자가 실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Goslinga). 블레셋 친구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주지 않으면 그녀와 그녀의 아비의 집을 불지르겠다고 협박했다. 그들은 여인을 협박하여 삼손으로부터 해답을 얻어내려고 했다(Matthew Henry).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으나 삼손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와 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답을 요구했다. 그녀는 삼손이 자기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앙탈을 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삼손의 아내는 같은 의미의 말을 바꾸어 반복함으로써 삼손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강조했다. 삼손은 수수께끼의 뜻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항의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난처해졌다. 그러나 삼손은 자기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을 어찌 네게 말하겠느냐? 고 대답했다. 삼손의 말을 보면 그가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블레셋 여인은 사랑에 호소하여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려고 했지만, 삼손은 그녀보다 부모를 더 앞세웠다. 그러나 삼손의 아내는 잔치할 동안 계속해서  울며 그 문제의 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 일 동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14절), 제 4일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부터 제 7일까지 계속해서 그 답을 알기 위해 날마다 삼손에게 간청했다. 그리하여 삼손은 제 7일에 자기 아내에게 그 문제의 답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블레셋 사람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답을  블레셋인들에게 고하였다.  


 2-4. 삼손의 분노(14:18-20)

  "18 제 칠 일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으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게 된 블레셋인들은 삼손에게 와서 그 해답을 말하였다, 그러자 삼손은 블레셋인들이 자기 아내를 협박해서 그 답을 알게 된 것을 눈치챘다. 왜냐하면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와 아내뿐이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비유로 비꼬았다. 본문에서 '내 암송아지'는 자기의 아내를 비유한 것이다. 이때에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게 되었다. 그는 강한 힘을 가지고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그 곳 사람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탈취하여 블레셋 친구들에게 주었다.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중요한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딤나(1절) 남서쪽 그리고 가드(Gath) 서남쪽 해변가 곧 지중해에서 약 40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의 땅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성읍이었다. 삼손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수께끼를 푼 블레셋을 징계하기 위해서 그들의 동족을 죽이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옷으로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삼손은 심히 분노하여 자기 아비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삼손의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그 날 초대된 30명 친구 중에 한 사람에게 아내로 주어버렸다. 삼손의 장인은 화가 나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삼손을 보고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삼손이 다시 블레셋을 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게되었다(15:3-5절).


 2-5. 삼손의 보복(15:1-8)

  "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가로되 내가 침실에 들어가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를 다시 찾아갔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밀 추수는 대개 양력 5월경에 했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추수기는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보리는 유월절(양력3-4월)에, 밀은 오순절(양력 5-6월)에, 그리고 무화과, 포도, 올리브 등은 장막절(양력 9-10월)에 추수했다. 그러므로 삼손이 다시 그의 아내와 동거하기 위해 딤나(14;1, 5)로 돌아온 시기는 5-6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염소는 유목민들에게 귀한 재산이었다. 그러므로 염소는 화해나 약속, 또는 처가에 찾아갈 때의 선물 등으로 종종 이용되었다(창 38:17,20,23). 이를 보면 삼손의 결혼은 사디카 결혼(데릴 사위)을 했던 것 같다. 이 혼인은 1) 결혼 후에 신랑이  신부집에서 계속적으로 거주하는 비나(beana)혼인과, 2) 신랑이 신부집에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모타(Mota) 혼인이 있었다(R. de Vaux). 삼손은 장인에게 가서 "침실에 들어가서 아내를 보기 원한다" 말했다. 이로 보아 삼손은 아내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과거 그녀와 동족들이 저지른 잘못(14:15-18)을 용서하고,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려고 결심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장인은 "네가 그녀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네 동무에게 주었다." 고 말하면서 삼손이 들어오는 일을 금했다. 이러한 장인의 행동은 삼손의 급한 성격 때문에 임시 조치로 급하게 제시된 방안이거나, 아니면 삼손으로부터 다시 혼수 감을 받기 위한 잔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삼손의 마음은 블레셋 족속 전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다시 불타오르게 되었다. 만일 삼손의 장인이 삼손과 그의 딸이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맺어진 사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변명은 도저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삼손으로부터 병폐를 받고 그의 딸을  내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분노한 삼손을 본 장인은 그녀의 동생이 더 아름다우니 동생을 대신 아내로 취하라고 제안했다. 얼핏 생각하면 삼손 장인의 이러한 제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손의 권리를 인정한 데서 나온 제의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 라반이 레아를 라헬인 양 꾸며 야곱을 속이고 그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한 것과 같은 행위였다(창 29:15-30).  이러한 제의는 삼손에게 또 다른 병폐를 얻기 위한 탐욕이 내포된 제안이었다. 그러므로 삼손은 이를 알아차리고 그 제의를 거절했다(Pulpit).

  삼손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친다고 해도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다." 삼손은 장인의 간악한 처사(2절)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블레셋 사람의 일반적인 태도로 간주하고 장인의 가족들 뿐 아니라 전 블레셋 인들에게 복수할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독한 족속들에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민 32:2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삼손을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시작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4 삼손이 나가서 여우 삼 백 마리를 잡아왔다. 그리고 그 여우들의 꼬리와 꼬리를 묶어 매고 그 묶은 꼬리에 홰를 달고, 그 홰에 불을 켠 채로 그 여우들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았다. 그러나 그 불로 인해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여우'로 번역된 '슈알'은 '승냥이'를 가리킨다(Wycliffe, Hervey, Keill, Delitzsch). 왜냐하면 여우는 보통 함께 살지 않고 단독으로 다니며, 곤충, 과일,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지만, 승냥이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 생활을 하는 여우를 300마리나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삼손이 잡은 300마리 짐승은 승냥이임에 분명하다. '홰'는 흡수력이 강한 나무에 기름을 듬뿍 묻혀서 불에 잘 타게 만들어 놓은 막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우 수가 300마리였기 때문에 두 꼬리에 홰를 하나씩 달려면 최소한 150개의 홰가 필요했다. 고래(古來)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역사성(歷史性)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나 본 사건은 상식적인 견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즉 약 150개의 홰에 불이 붙자 300마리의 여우들은 뜨거움에 놀라서 내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우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불바다를 이루자 여우들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만을 찾아내 숨어들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곡식 밭은 순식간에 전소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곡식 단을 불사르는 것은 고대 농경 사회에서 흔히 있던 보복 방법이었다. 이러한 보복 행위는 한 지역의 한 해 경제를 송두리째 날리게 하는 치명적인 방법이었다. 일부 번역본은 감람원('케렘 자이트')은 '포도원과 감람원'이라고 번역하고 잇는데, 당시 딤나 지방에 포도원이 많았던 점(14:5)에 비추어 보면 무리한 번역은 아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재난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들은 딤나 사람의 사위인 삼손이 그 일을 저질렀으며, 그 이유는 그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동무에게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딤나로 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에 태워 버리고 말았다. 삼손의 보복 행위로 말미암아 한 해 수확물을 몽땅 잃은 블레셋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정작 삼손을 잡아 처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의 처가 식구들을 처벌하는 것이 쉬웠으므로, 이에 그들은 삼손의 장인과 그의 아내를 잡아 불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불로 태워 사형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성경에서도 간음한 자를 화형 시킬 것을  명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창 38:24; 레 20:14; 21:9). 삼손의 아내와 장인은 자기 동족들의 손에 의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이는 그들이 일신상의 안일만을 도모하여 삼손을 배신하고 간음죄를 저지른 데 대한 당연한 형벌이다. 특히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 청년들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남편을 배신하고 동족의  편에 붙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공의로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삼손은 그들이 행한 일을 보고 "너희가 나에게 이렇게 대한다면 나도 너희에게 이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처가를 징벌한 것은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는 오히려 삼손의 증오심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여기서 '도륙한다'는 말은 '넓적다리 위의 다리(엉덩이)'를 쳤다는 뜻이다. 이 말은 히브리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삼손은 이 말을 한 후에 에담에 있는 바위틈에 거주했다. (대하 11:6)에는 베들레헴 근방에 위치한 에담(Etam)이나온다. 그러나 그곳은 딤나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본절의 사건과  무관한  것같다. (대상 4:32)에 따르면 시므온 지파내에도 에담이란 곳이 있었는데, 본문의 에담은 바로 이곳인 것으로 보인다. 9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시므온 지파가 함께 거하고 있는 유다(수 19:1)에 진을 친 것으로 보면 그곳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로 보아 삼손은 자기 고향 소라에서도 안전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아니면  자기로 인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곳 에담으로 피신한지도  모른다.


 2-6. 동족에게 체포된 삼손(15:9-13)

  "9 이에 블레셋 사람이 올라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편만한지라. 10 유다 사람들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오기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려고 이제 내려왔노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친히 나를 치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13 그들이 삼손에게 일러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붙일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당한 일을 보복하기 위해서 삼손이 숨어 있는 유다 지역을 공격하려고 레히(Lehi)에 진을 쳤다. 레히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으나 딤나나 소라, 에담 그리고 블레셋 접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블레셋인들은 삼손을 결박하여 보복하기 위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블레셋의 압제 하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삼손으로 인해 어려움이 닥칠 것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유다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갈렙이 살았을 때에 보여준 유다 지파의 용맹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유다 지파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갖는 전형적인 실태이다. 이 말을 듣고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에 있는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러자 삼손은 그들에게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블레셋 군대는 약 1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15).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보다 세 배나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삼손을 잡으러 나섰다. 만일 유다 사람들이 삼손과 힘을 합쳐 블레셋에 대항했더라면 유다 자손은 그 날 블레셋을 쳐서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수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동족을 잡아 서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일을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행위도 하게 되는 것이다(마 12:30).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저항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현실 안주 내지는 무사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백성으로의 사명을 망각해 버렸다(출 19:6).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블레셋으로부터 해방하려는 삼손의 궐기를 불편한 만용으로 여겼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주려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삼손은 그들에게 너희가 친히 나를 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하였다. 유다 자손들은 삼손에게 그를 단단히 결박하여 블레셋에 넘기고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유다 자손들은 결국 삼손응 두 개의 새 줄로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내렸다. 삼손이 동족들의 손에 묶임을 당해 이방 대적에게 넘기어지게 된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그런데 이는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 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삼손을 묶어 블레셋 인에게 넘긴 유다 자손의 모습은 세상과 타협하며 안일하게 살면서 진리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성도들의 모습과도 같다. 삼손은 이러한 유다 자손의 비열한 태도에 분노하여 그들을 책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의 손에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것은 삼손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블레셋 인들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힘을 소유한 삼손은 마치어린 양처럼 순순히 동족에게 포박되어 블레셋 사람에게 끌려갔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유대인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체포되어 로마인의 손에 넘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같다(행 8:32; 롬 8:36).


 2-7. 라맛 레히(15:14-17)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 천명을 죽이고 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 천명을 죽였도다. 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 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밧줄에 묶여서 레히에 이르게 되자 블레셋 사람이 그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힘센 삼손이 동족들에게 묶여서 끌려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으며, 그를 묶었던 줄이 불에 탄 삼과 같이 되어 끊어져버렸다. '여호와의 신'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원수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고, 포박된 줄은 불탄 삼과 같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죄의 사슬을 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히 2:14). 삼손은 옆에 놓인 나귀의 새 턱뼈를 발견하고 그 턱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그 자리에서 죽여 시체로 큰 무더기를 쌓았다. '나귀의 새 턱뼈'는 것은 죽은 지 얼마 안된 나귀의 턱뼈를 말한다. 이것은 오래 되고 마른 턱뼈보다 더 단단하여 잘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했다(Lange). 포박된 삼손을 보고서  환호하며 뛰어오던 블레셋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삼손에 의해 고통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죽고 말았다. 삼손은 혼자 몸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무찌르고 나서 2행 시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이 시에서 '나귀'(하모르)와 '더미'(하모르)는 동의어로서 언어 유희를 담고 있다. 삼손은 승리를 기념하여 그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다. '라맛 레히'는 '턱의 산'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그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다.


 2-8. 엔학고레(15:18-20)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싸움을 하던 삼손이 매우 많은 힘을 썼기 때문에 심히 갈증을 느꼈다. 이로 보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 1000명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유다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1000명을 혼자 상대하여 싸운 삼손은 지치고 갈증이 나서 기진 맥진하고 말았다. 이렇게 갈증으로 인해 죽음 직전에 이른 삼손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의 삼손은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을 이기고 이스라엘 광야로 도피했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 하던 심정이었을 것이다(왕상 19:4).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1) 삼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위대한 구원의 체험을 상기하며, 동시에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시30:10; 39:4). 2) 그는 자기를  종이라 부르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고 계신다고 고백했다. 3)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그는 자기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등의 손에 죽으면 라맛 레히에서 빛나던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삼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그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해주셨다. '한 우묵한 곳'('함마크테쉬')은 '절구' 또는 '절구형태로 된 구멍'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나귀 턱뼈와 같이 생긴 절벽 사이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여 삼손의  갈증을 해갈해 주셨을 것이다(Keil, Lange).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위를 가르셔서 물이 흘러나게 한 사건은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출 17: 6; 민 20:8,11). 이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하는 이적들이다. '레히'에서 대승리를 거둔 삼손은 이제서야 동족의 냉대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사사기의 기록은 엄격하게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기 보다는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연대별 순서를 무시하고 있다. 특히 사사들의 활동 범위가 국지적이었기 때문에 연대적으로 둘 이상의 사사들이 동시대에 활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활동 연대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삼손에 관한 기록들과 본문을 참고하면 삼손의 사사직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과 결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B. C.1080-1060년에 걸쳐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Cundall). 이렇게 볼 때 삼손은 입다와 동시대인이면서 사무엘의 활동 시기와도 상당 부분 겹치는 시기에 살았다. 그의 활동 반경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에만 국한되었다. '레히'에서 블레셋족을 격멸한 일로 인해 삼손은 약 20년 동안 사사로서의 공적 활동을 하였다.


3. 나실인 삼손(16장)

 3-1. 가사와 삼손(16:1-3)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의 문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어느 날 삼손은 가사에 가서 한 기생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사'(Gaza)는 가드,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과 더불어 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그 중에도 가장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가사에는 애굽에서 서아시아로 통하는 상업로가 있는 중요한 전략 도시이다. 이 도시는 가나안 정복 때에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었으나(1:18), 해안에 있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곧 블레셋에 의해 재탈환되고 말았다. 한편 가사는 삼손의 주요 활동 지인 소라에서(13:2) 약 60Km가량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해서 삼손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추측컨대 레히에서의 삼손의 활약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몹시 두려워하였고 삼손도 어느 정도 자신의 힘을 믿고 교만해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땅을 맘대로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15:14-17). 이것이 삼손을 실족케 하고 비참한 종말을 가져오게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삼손은 또 다시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14:1) 죄의 늪에서 헤메게 된다. 여기서 기생으로 번역된 '조나'는 '매춘부'를 뜻한다(창 38:15 ; 수 2:1). 그런데 아람 탈굼 역에는 이 '조나'가 '여관의 여주인'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손은 기생으로 인하여 음욕에 사로잡혀 그녀와 동침한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유숙한 것이 된다(Cassel). 그러나 '조나'는 분명히 '창녀', '매춘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삼손이 가사에 어떤 일로 갔다가 매춘부의 유혹을 받고 그녀와 동침하였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삼손의 이러한 행위는 1) 분명히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었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도저히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2) 이러한 삼손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사사의 일반적 풍조가 매우 문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손이 가사에 왔다는 소식은 곧 가사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자 가사 사람들은 그를 포위하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였다가 새벽이 되면 그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삼손은 이를 눈치채고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밤중에 일어나서 성의 문과 두 기둥과 문빗장을 빼어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버렸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을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여겼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사 사람들은 삼손의 출현 자체를 거리낌과 해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삼손을 죽이려고 했다. '에워쌌'는 말('사바브')은 '주위를 돌다', '주위에 포진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블레셋 인들이 성문 입구에 복병을 배치하고 또한 삼손을 감시하기 위해 기생집 부근에 파수꾼을 파견한 것을 의미한다. 블레셋 병사들은 삼손이 있는 기생집을 에워싸며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새벽을 기다렸다. 그들은 삼손이 두려웠기 때문에 정면대결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기습 공격할 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삼손이 성문을 나설 때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하려했을 것이다(Pulpit). 한편 본절 문맥의 전후 상황을 볼 때 이 기생집은 가나안 정탐시의 기생 라합의 집과 같이 성벽 위나 성문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수 2:15). 삼손은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과 병사들의 눈을 피해 성문 전체를 뽑아 메고 헤브론까지 가버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문은 그 성읍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민족의 국력(國力)을 상징한다(창 22:17; 24:60). 따라서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유다의 중심지인 헤브론으로 옮겼다는 것은 블레셋의 권세가 유다에게 복속(服屬)될것을 상징한다(Lange). 헤브론(Hebron)은 가사에서 동쪽으로 약6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이다(수 15:13). 따라서 삼손이 성문들을 메고 약 62km나 되는 먼 거리를 옮겼다는 것은 그의 힘이 얼마나 엄청났는가를 가히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카일(keil) 등과 같은 학자들은 삼손이 그 성문을 메고 실제로 헤브론까지 간 것이 아니라 가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꼭대기까지 간 것이라고 주장한다(Cundall, Hervey). 하지만 삼손이 성문을 그런 언덕으로 옮길 수 있었다면 헤브론까지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삼손은 헤브론이 유다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유다 사람(15:10, 11)과 더불어 완전한 승리를 만끽하려고 가사 성문을 헤브론 앞산까지 옮겨 놓았을 것이다(Cassel).


 3-2.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16:4-5)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 천 일 백을 네게 주리라."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이 그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제의를 하였다. "삼손을 유혹하여 그 큰 힘의 비결을 알아내고, 어떻게 하면 그를 결박하여 괴롭게 할 수 있는지 알아 보라. 그러면 우리가 각각 은 일 천 일 백을 네게 주리라." 가사에서 기생집에 들렀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던 삼손(1-3절)은 이처럼 또 다시 육신의 정욕에 빠져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마도 들릴라는 기생이거나, 정숙한 여인은 아닌 것 같다. 들릴라가 블레셋 여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없다. 단지 '들릴라'라는 이름은 '음탕하다' 또는 '연약하다'는 뜻의 샘어이고(Cundall), 그녀의 거주지가 삼손이 사는 소라에서 가까운 소렉 골짜기인 것을 보면 유다인 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당시 블레셋 치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통혼이 횡행하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과 결혼한 여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그녀가 블레셋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던 것(5절)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소렉 골짜기는 '좋은 포도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 곳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약 21km 떨어진 지중 해변의 서북 방향으로 약 32km나 뻗어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서 '방백들'은 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방백을 말한다. 블레셋 족속은 삼손의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삼손의 초자연적인 힘이 호신패나 부적과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를 설득하고 은 1100 세겔로 계약을 체결했다.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간의 품삯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 돈은 노동자가 십 년 동안 쓰지 않고 벌은 돈을 모아야만 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러므로 들릴라는 이 재물을 탐내어 그 계약을 동의했다. 여기서 '곤고케 한다'는 말('아나')는 '억압하다', '비천케 한다'는 뜻이다.


 3-3. 들릴라의 유혹과 삼손의 거짓말(16:6-14)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았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8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9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칡 끊기를 불탄 삼 실을 끊음같이 하였고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2 들릴라가 새 줄을 취하고 그것으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내실에 매복하였었더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14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내니라."

  이에 들릴라는 삼손에게 그의 힘의 근원과 그를 결박하여 곤고하게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으로 질문한 것으로 보며 그녀는 상당히 우둔한 여자였던 것 같다.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이 그 당시 블레셋 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눈치 채고 그럴듯한 미신적인 투로 대답을 하였다. 삼손은 그녀에게  마르지 않은 푸른 칡 일곱으로 자기를 결박하면 자기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칡'('예테르')은 현악기의 현이나 활시위(시 11:2), 또는 동물의 심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확히 어떤 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미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들릴라나 블레셋 방백들에게는 삼손의 대답이 신빙성 있게 보였던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블레셋  방백들은 마르지 않은 푸른 칡 일곱을 여인에게 갖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였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킨 후에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으러 왔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삼손은 그 칡을 불에 탄 삼 실을 끊는 것처럼 끊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들릴라는 자기가 삼손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삼손이 자기를 희롱하고 거짓말을 했다고 항의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무엇으로 그를 결박할 수 있는지 말하라고 재촉했다. 삼손은 이번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 줄로 자기를 결박하면 자기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이 될 거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들릴라는 새 줄을 가지고 삼손을 결박한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을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손은 실을 끊는 것처럼 그 줄을 끊어버렸다. 이 때에도 삼손을 잡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들 내실에 매복하였었다. '희롱하다'는 말('헤탈르타)은 '엉덩이를 치켜세운다'는 뜻의 '탈랄'의 사역형 능동태로서 '속임수에 의해서 심한 모욕감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 속에서 들릴라의 우둔함과 여성으로서의 귀염성을 느낄 수 있는데 아마 삼손은 이러한 들릴라의 매력에 매료되어 더욱 죄악 속 깊이 빠져 들어간 듯하다. 여기서 '줄'은 비틀어 꼰 밧줄을 가리킨다. 삼손은 자신의 강함을 믿고서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들릴라를 희롱하고 있었다. 삼손의 비참한 종말은 바로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대적의 계교에 무방비 상태로 안일하게 자신의 힘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삼손은 실족케 되고만 것이다(15-22절).

  들릴라는 자기가 또 삼손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그를 묶을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삼손은 그녀에게 자기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자기를 묶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들릴라는 바디로 삼손의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다시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으려고 왔다고 하였다. 그 소리에 잠을 깬 삼손은 직조 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삼손은 들릴라의 계획적인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그도 역시 농담로 답변하였다(7절).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결박사건으로 미루어(8, 9절) 삼손은 여인의 간청 속에 블레셋인들의 계교가 담겨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들릴라의 질문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정욕에 빠져 삼손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유 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들릴라는 끈질기게 유혹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세 번째 대답은 이전의 두 대답에 비해 더욱 사실에 가까워졌다. 즉 삼손은 나실인의 특징이자 자신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인간의 본질 저 밑바탕을 잠식함으로써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짠다는 것은 베틀에 있는 선 사이에 머리털을 집어넣고 옷을 짜듯이 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하고 나면 삼손의 머리털은 모두 일곱 가닥씩 가지런히 짜여지게 될 것이다. '바디'(야테드)는 대나무로 바늘처럼 만들어 베를 짤 때 베실을 낱낱이 꿰어 짜는 데 사용하는 제구(製具)이다. 당시에 애굽을 중심으로 하여 베짜는 기술이 베니게 해안 지역에 널리 유행하였다. 이와 관련, 애굽의 한 비문은 베 짜는 여인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Cassel)


 3-4. 눈이 뽑힌 삼손(16:15-21)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를 밀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8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 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삼손에게 세 번이나 속은 들릴라는 삼손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따졌다. 그녀는 세 번이나 자기를 희롱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그녀는 날마다 삼손에게 그의 힘의 비결과 그를 묶을 수 있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재촉했다. 이에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삼손에게 세 번씩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제  최후로 사랑을 빙자한 간책(奸策)을 동원한다. 딤나 여인의 간청에 있어서도, 삼손은 본절의 경우와 똑같이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수께끼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14:16). 눈물과 사랑에 호소하는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이제 삼손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16절). 아무튼 이상으로도 우리는 삼손이 얼마나 들릴라에게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첫 번째 아내를 떠난 후 아직 혼자 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15;1-8). 삼손이 이처럼 번뇌한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그래도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구별 받은 나실 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는 양심의 힘으로도 악의 손길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법이다(고전 8:7,12 ). "번뇌하였다"는 말('카차르')은 '잘게 자르다', '찢다'는 뜻이다. 이는 삼손이 극심한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마치 그 마음이 찢어질 듯한 상태임을 잘 나타내준다. 결국 삼손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날 때부터 나실인이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만일 자기 머리를 밀면 자기 힘이 사라지고 보통 사람처럼 될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들릴라는 삼손이 진실을 말하는 것을 보고 블레셋 방백들을 불러 한 번만 더 올라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이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 올라왔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게명을 끝까지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욕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즉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일 만큼 강하였으나(14:6) 사랑의 유혹에는 약했다. 그는 일 천명의 블레셋인들을 나귀턱 뼈로 쳐죽일 수 있었으나(15:15) 사랑의 올무에서는 빠져 나오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싸움에서 삼손은 육에게 지고 만 셈이다(롬 8 :3-11). 세 번의 실수로 인해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에게 거의 신임을 잃고 말았으며, 블레셋 방백들은 더 이상 삼손의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인은 이번 한 번만 더 올라오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으며, 그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은을 가지고 올라왔다.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을 누이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삼손을 괴롭게 하여 보니 과연 그에게서 힘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릴라는 이번에도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으려고 왔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잠을 깬 삼손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려고 했다. 그는 이미 여호와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햇다. 결국 이렇게 해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은 삼손은 체포한 후에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로 갔다. 그리고 그를 놋 줄로 매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들릴라는 삼손이 가르쳐 준 대로 그의 힘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스스로는 한번도 정말 그의 힘이 없어 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또 한번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삼손을 시험하여 그의 힘이 없어졌는가를 확인하는 신중성을 나타냈다. 삼손의 힘은 외적인 머리카락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실인으로서의 성별(聖別)의 상징이며 증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이 힘이 사라진 때는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들릴라에게 진정을 토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때에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구약 성경에서 이보다 슬픈 장면을 묘사한 구절은 없다.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을 깎인 삼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도 더 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위기에 처한 삼손은 예전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해진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과 회한 가운데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케 만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성도들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 불신자들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방 나라 백성들보다 더 높은 도덕 수준의 행실이 요구되었는데 특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2)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나서 자라고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리심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시 51:5 롬 3:23). 그러나 죄인들을  대신 하여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로 인정받게 되었다(마 27:46 ; 빌 3:20). (3)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식으로 구습(舊習)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잠 26:11 빌 3:13).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승리자가 패한 자에게 눈을 빼는 잔인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민 16:14; 왕하 25:7).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Zedekiah)도 느부갓네살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을 뽑혔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일이 있다(왕하 25:7). 한편으로 삼손이 당한 이런 형벌은 그가 눈으로 여인을 '보므로' 죄악에 빠진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4:1; 16:1).  이와 관련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롤 죽이라"(골 3:5)고 하셨다. 본래 조그마한 맷돌은 가정에서 여인들이 돌렸다. 그러나 가축을 사용하여야만 돌릴 수 있는 정도의 큰 맷돌을 돌리는 일은 대개 노예가 맡아 하였는데 이는 노예의 사역 중에서도 가장 고된 일로서 천히 여기던 것이었다.


 3-5. 삼손의 마지막 승리(22-31)

  "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가로되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자기 신을 찬송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감옥에 있는 동안 삼손의 머리털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블레셋 방백들은 자기 신이 삼손을 체포할 수 있게 했다고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모여서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블레셋 백성들도 삼손을 보고 그들의 토지를 헐고 많은 백성을 죽인 원수를 그들의 신이 체포할 수 잇게 했다고 하며 자기 신을 찬송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삼손의 머리와 함께 하나님의 영감도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눈을 잃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중에 삼손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곤(Dagon)은 블레셋의 주신(主神)으로서 '날씨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곡물의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명칭은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온 것이다(Philo). 그런데 중세 율법학자들은 가사(Gaza) 지역이 해안 지방인 것으로 보아 다곤은 '바다의 신'이며, 그 명칭은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그 같은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바 오늘날에도 이런 견해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다(Hervey, Cassel, Keil).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삼손(15:4, 5)을 다곤 신이 자기들의 손에 붙였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곤은 곡물 신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 다곤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널리 유행되었는데 벧산(삼상 5:2-7) 지역에서 특히 많았고 다곤의 이름을 딴 도시도 있었다(벧다곤, 수 19: 27). "즐거워했다"는 말('사마흐')은 '원기를 돋게한다'는 뜻으로 대개 종교적 축제와 연관된 말이다. 이로 보아 블레셋인들은 다곤에게 제사를 드린 후에 축제를 베풀었을 것이다. 블레셋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골치거리였던 삼손이 잡혔기때문에 블레셋에는 거국적인 감사축제가 열렸다. 이것을 볼 때 그동안 블레셋 족속이 삼손으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삼손을 불러다가 그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게 하여 삼손에게 그들을 위해 재주를 부리게 만들었다. 대개 큰 축제에는 많은 술이 제공되어 흥청거리기 마련이다. '마음이 즐겁다'는 말('토브 리밤')은 흔히 '술에 취해 마음이 흥분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18:20 ;19:6). 블레셋인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때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삼손을 끌어내어 재주를 부리게 하여 즐기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 재주를 부리게 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희롱하자'(잠 26:19)는 뜻이다. 그러나 (삼상 18:7, 삼하 6: 5)에서는 이 말이 노래와 악기에 맞춰 춤을 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로 볼 때 블레셋인들은 앞을 못 보는 삼손으로 하여금 음악만 듣고 춤을 추게 하고선 그것을 보고 즐긴 것으로 보인다(Pulpit).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다. 그때에 삼손은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 집을 버티고 있는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기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삼손이 춤을 추다가 기둥 사이에 세워지게 된 것은 그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거나 아니면 블레셋인들이 삼손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그 곳에 세웠을 것이다. 본문을 보면 삼손은 이전부터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는 잠깐의 휴식 시간을 통해 옆에 있던 소년에게 그 건물전체를 바치고 있는 기둥을 찾아서 그것에 의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의지한다'는 말('솨안')은 '조용히 쉬게 한다'라는 뜻이다(Living Bible). 삼손은 피곤한 체하면서 버팀 기둥에로 자연스럽게 접근해 갔다.

  그 때에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 차 있었다. 그 곳에는 블레셋 방백도 모두 모여 있었으며, 지붕에 있는 남녀만도 삼천 명 정도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모여서 삼손이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본서 기자는 당시 그 건물의 구조를 대충 묘사해 보임으로써 삼손이 행한 이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옥의 형태는 대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단층의 가옥일 때는 거실 위에 평평한 지붕이 있다. 그리고 2층 이상의 가옥일 때는 거실은 2층에, 아래층은 하인들의 방과 창고로 되어 있다. 반면 그보다 더 큰 회당의 경우에는 지붕이 넓어서 3천명 이상이 올라갈 수도 있었으며 지붕은 대개 목재로 된 두 개의 버팀대로 받쳐져 있었다. 따라서 이 버팀대를 빼버릴 경우에 지붕의 가운데 부분은 파괴 되어 위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 삼손이 단번에 수많은 블레셋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29, 30절)도 바로 이와 같은 구조 덕분이었다.

  그때에 삼손은 여호와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삼손은 '엔학고레'(15:19)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본문에 기록된 삼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세 가지 명칭이 사용되었다. 1) 주(아도나이):-이것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주장하시는 분은 곧 주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슬로 맨 블레셋이 주(主)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영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이심을 보여준다. 2) 여호와(예호와)-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분은 여호와뿐임을 말하는 삼손의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3) 하나님(하엘로힘)-여기서 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신들 중의 신임을 나타낸다. 이로 볼 때 삼손은 이 싸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숭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를 생각하옵소서란 말에서 '생각한다'는 말('자카르')은 '기억하기 위해 표를 해둔다'는 말이다. 삼손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구별해 주신 것(13:2-5) 에 의거, 다시금 자기를 권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의 장중(掌中)에 다시 한번 사로잡히기를 소원하는 삼손의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삼손의 기도는 자신의 두 눈을 위해서 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고통을 준 원수들인 블레셋 족속에 대하여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삼손은 집을 버틴 두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안고 의지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소리치고 힘을 다해 몸을 굽혔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 집이 무너져 내려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을 덮어버렸다. 이로 인해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 삼손은 이처럼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완력으로 그 건물의 버팀대를 두 팔로 하나씩 끌어안고 밀기 시작했다. 기도 후에 잇따른 이러한 즉각적인 행동 개시는 확신에 찬 믿음의 발로이다. 자기 한 몸을 던져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는 이러한 삼손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라고 말한 에스더의 정신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이 된다. 한편 이와 관련 우리는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전사(戰死)였다. 즉 삼손은 최후의 장렬한 죽음으로써 블레셋의 신 다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 것이다(Keil). 삼손이 죽은 소식을 들은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모두 내려가서 삼손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왔다. 와그리고 그 시신을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였다. 이렇게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게 되었다. 삼손은 독자였다(13:2,  3). 때문에 여기서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라 함은 이스라엘 동포나 삼손의 부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Cundall). 한편 고대에는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왕이나 지도자가 죽은 뒤 그 시신을 처치하는 태도나 방법에 따라 생전의 업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을 당대의 지도자로 예우를 다하기 위하여 가사(Gaza)의 무너진 블레셋 신전으로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갔음을 보게 된다. 한편 본문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무너진 선전에서 블레셋 인들의 시신들과 섞여  있는 삼손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당시 그 주변의 블레셋 인들은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두 도망가 버린 것 같다. 이렇게 삼손은 실수를 반복하고 죽어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들어 쓰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파란 만장했던 삼손의 생애는 끝이 나고 말았다.

                                 * 적용 및 교훈 *

1. 삼손의 이야기는 3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 이스라엘의 구원자 삼손의 출생
 2) 삼손이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함
 3) 나실인으로서의 삼손

2. 하나님은 삼손을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나실인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3. 삼손은 육체의 정욕에 빠져서 구별된 자로 성실하게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의 일에 사용해 주신다.

4. 들릴라에게 속아서 머리를 자르고 힘을 잃은 삼손은 성령을 소멸한 성도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패배하여 영적인 소경이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로 전락되고 만다. 성도들은 사단의 유혹에 빠져 성령의 힘을 잃은 무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5. 그러나 하나님은 눈 빠진 삼손의 기도를 다시 들어주시고 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셨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면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해 주신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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