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7): 모세의 고별과 죽음(31-34장) |
1. 여호수아의 임명과 율법 보관(31장) 1-1. 모세에 의해 위임된 여호수아(1-8)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서 온 이스라엘 앞에 세우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했다(7-8). 여호수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군대의 대장으로 활약했으며(출 17:9), 당시에는 어느 정도 모세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었다(민 27:18-23). 그러나 아직은 그가 모세의 지도자의 권한을 정식으로 위임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둔 모세는 이스라엘의 총회(總會) 앞에서 여호수아를 부각시키고, 그를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위임할 필요가 있었다(14). 모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할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을 강조하였다. 이 말은 모세가 당시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말의 핵심이며 전부였다. "두려워하다"('야레')는 말은 상대방을 경외할 만큼 '위압감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며, "놀라다"('하타트')는 말은 파괴나 패망을 두려워하여 '낙심한 상태'를 가리킨다(왕하 19:26;사 30:31). 1-2. 율법 낭독(9-13) 1) 도덕법: 10계명을 가리킨다. 이것은 시대를 통하여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크게 대신(對神) 계명과 대인(對人) 계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신 5:7-21).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안식년의 초막절에 회막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하라고 지시하였다(10).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것을 기념하며, 또한 1년간의 모든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는 실로(Shiloh)가 중앙 성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수 18:1; 삿 18:31; 삼상 1:3). 그러다가 훗날 다윗이 예루살렘을 종교의 중심지로 삼고(삼하 6,7장), 솔로몬이 그 곳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왕하 6장) 예루살렘이 완전한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가 되게 되었다. 이처럼 안식년의 초막절에 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여 들려주라고 명령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하였던 것을 깊이 회상케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남녀노소와 성안에 사는 타국인들 모두와, 그리고 후손들에게까지도 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12-13).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는 일에는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었다. 이 모든 규례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서 시작되며(롬 10:17),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살게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타국인'('게르')이란 말은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同化)되어 함께 살고 있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모세에게 그가 죽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고 하나님을 버리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하셨다(16).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그들에게 진노하실 것이며, 그들을 버리시고 그들에게 그 얼굴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임할 그 때에 그 재앙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해 반드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얼굴을 숨기실 것이다(17-18). '진노한다'(하라)는 말은 '빨갛게 되다', '더워지다'란 의미로서 이다. 따라서 이는 마음속에서부터 맹렬히 타오르는 극심한 분노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외면하사 그들로부터 모든 구원과 보호의 손길을 거둘 것이라는 말이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진 인간은 자신들이 재앙을 당하게 될 때에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한다. 즉 스스로 축복을 거절하고 저주를, 은혜를 저버리고 재앙을 자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들이 당하게 된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원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예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 노래를 써서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라고 지시하셨다(19). 훗날 이스라엘은 범죄한 후에 환란과 재앙을 당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이 노래는 그들이 당하는 모든 환란과 재앙이 그들의 관영한 죄악 때문임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이스라엘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게 되면, 그들은 돌이켜서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언약을 어기게 될 것이다(20). 그리하면 그때에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기 전에 이미 그들의 생각을 모두 아시고 계셨다(21). 하나님께서 '모세의 노래를 지어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 목적은 1) 이 노래가 선용된다면 이스라엘의 배역(背逆)을 방지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2) 이 노래가 이스라엘의 배역을 방지하지는 못해도 그들을 회개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증인'(에드)이란 말은 고발된 어떤 범죄 사실을 확인할 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뜻은 이스라엘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그 누군가에 의해 불리워질 이 모세의 노래(32:1-43)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증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바로 그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다(22). '노래'(쉬라)는 어떤 지식이나 사상을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노래에는 대개 그 시대의 상황이 압축되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히브리인들의 노래 역시 대부분 예술적인 표현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해 주셨다(23-24).
<적용 질문> 2. 모세의 찬송과 죽음에 대한 예고(32장) 2-1. 서론(1-3)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2). 모세는 자신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메마른 사람의 영혼을 새롭고, 기름지게 만드는 단비와 이슬 같다고 선언하고 있다(Keil). 이스라엘이 옥토(沃土)와 같은 마음 밭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비유의 신선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히 6:7, 8). 팔레스타인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는데 그 원천은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다. 8-9월 중에 많이 내리는 이슬은 팔레스틴에서는 수자원(水資源)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비가 제때 안 내릴 경우 이슬은 한 해의 농사에 큰 구실을 한다. 따라서 만약 이슬이 제대로 내리지 않으면 가뭄의 피해는 가중된다. 이런 점에서 이슬은 비 못지 않게 중요한 자연의 혜택이었다. 가는 비(사이르)는 '머리카락', '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가볍게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력'을 상징한다. 단 비(레비빔)는 '풍성함', '많음'에서 파생된 단어로 '소나기'(KJV, showers), 또는 '많은 비'(NIV ,abundant rain)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눈에 현저하게 띄일 정도로 크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 '강권력'(强勸力)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힘이요, 삭막한 심령에 풍성한 결실을 보장해 주는 능력이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성품과 놀라운 역사를 전파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5)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패역할 뿐 아니라 강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40년 광야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사랑과 은혜를 저버린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9:6;출 32: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이러한 질책성 경고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를 향한 준열한 꾸짖음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3:7-10).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삼으셨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성하신 참 하나님이시다(사 44:2,24).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7).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되는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로 점철된 사랑과 긍휼의 역사였다. 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거듭 하나님께 죄악만을 쌓던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사건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 베풀어주신 갖가지 은혜를 오늘에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항상 정도(正道)를 걸으며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 드릴 수 있는 영원한 생의 찬송 제목이 된다. 가정을 중심한 히브리인들의 교육 방식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히브리 어린이들은 1차적으로 자기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그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6:7).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 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8). 열국의 기업을 주셨다는 말은 열국의 모든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강조하는 말이며(단 4:35), 인종을 분정했다는 말은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의 언어가 분립(分立)되고, 지역적으로 인류가 흩어지게 되었던 때를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창 11:1-9).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익을 염두에 두시고 세계를 분할하셨다'는 뜻이다(Calvin).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전개를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을 미리 염두에 두셨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9). 택하신 기업이란 말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토지로 측량해 놓은 것', 또는 '그의 상속 재산으로 정해 놓은 것'을 의미한다(시 16:6).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11-12).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려 날게 한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받쳐 결코 새끼들이 해(害)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독수리답게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출 19:4).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13-14). 여기서 '땅의 높은 곳'이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종종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나오는데(창 12:10; 26:2; 42:1-3). 이는 가나안 땅을 높은 곳으로 여기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타고 다니게 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을 것을 의미한다(Keil,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얻는 다는 말은 가나안 땅의 기름진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11:9). 이 말은 가장 척박한 곳에서도 가장 귀한 소산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젖 기름'('헤므아')은 '치즈'나 '버터'와 같이 절반 정도 응고된 우유를 가리킨다. '바산'(Bashan)은 갈릴리 동북쪽, 길르앗 이북에 위치한 고원 지대이다<3:1>. 이곳의 땅은 매우 비옥하고 목초지가 많아 가축사역과 밀 경작으로 유명하였다(시 22:12;사 33:9).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17-18). 마귀(쉐딤)는 본래 반신 반인이란 뜻을 지닌 앗스르의 수호신(守護神) '쉐두'(Shedu)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를 '귀신'(demons)으로 번역하였다(Keil,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이방 우상들'을 의미한다. '근래에'(믹카로브)라는 말은 통상 시간적, 장소적 근접 상태를 모두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시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근래의 신들은 이스라엘이 열조 때부터 알아왔던 신, 곧 여호와 하나님과는 다른 새롭게 만들어진 신들이었다. 상관치 아니하였다는 말은 '무관심하였다'는 말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21). 본절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묘사한 구절이다. 즉 이는 한 남편이 음란한 아내에게 자신이 멸시 당하고 있음을 알고, 그 역시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함으로써 보복하는 질투 심리를 연상시켜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나 보복은 미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랑에 근거한 교육적 차원의 징계이다. 이 선고(宣告)는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로마 등과 같은 이방 민족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을 괴롭힘으로써 역사상 성취되었다. 한편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은 본문을 구속사적 측면에서도 이해하였다. 즉 그는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보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먼저 교회 안으로 이끄심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여 그들도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하나님의 구속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본문을 인용하였다(롬 10:19;11:11).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도 불이 붙게 하는도다"(22). 하나님의 분노를 '불'에 비유한 표현은 성경에 자주 타나난다(렘 15:14 ; 17:4 ; 애 4:11). 실제로 하나님은 불로써 이스라엘에게 분노를 표하기도 하셨다(민 11:1-3). '음부'('쉐올')는 신약 시대의 '지옥'(하데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당시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한 계시가 명확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쉐올' 곧 '음부'(陰部)는 선악간을 막론하고 일단 죽은 자들이 가서 거하는 곳으로 여겼던 '지하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23). 하나님의 재앙이 위에서부터 쏘아대는 화살에 비유되고 있다(시 7:13;슥 9:14). 이는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리쳐 없앨 대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에게 삼키울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24). 이러한 재앙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무모한지를 잘 보여 준다. 불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은 '열병'(fever)과 '흑사병'(pestilence)을 가리키며, 들짐승의 이는 사나운 야수들의 송곳니에 의해 갈갈이 찢겨 죽을 것을 나타내고, '티끌에 기는 것'은 뱀을 가리키며, 이는 각종 독사에 의해 입는 상해를 의미한다.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까지리로다"(25). 남왕국 유다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애 1:20)고 탄식했던 것은 바로 본절의 성취일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천만인이 둘러치려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나(레 26:7, 8;잠 3:6). 그렇지 못한 자들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기 마련이다(레 26:36, 37;잠 28:1). 청년 남자와 백발 노인까지라는 말은 패역한 세대, 사곡한 종류에게 임할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그 심판이 예외 없이 엄정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다마는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26-27). 흩는다는 말(파아)은 '훅 불다'는 의미로서 여기서는 강한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는 먼지와 같이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 때문인 줄로 오해하여,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하나님까지 비웃을 것을 걱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당신의 영광을 훼손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민 이스라엘을 완전한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실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29-30).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만일 지혜로운 마음을 품어서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대적에게 내어 주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징계의 채찍을 맞고 돌아오기 전에,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히 축복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기교적인 지식이나 사변적인 학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언약 백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그 관계를 올바로 유지시켜 주는 총명함과 명철함, 도덕적인 성실함, 영적인 온전함을 총체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호크마'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시 111:10).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31-33). '대적의 반석'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믿고 의지하는 이방의 각종 신들을 가리킨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지 않을 때에, 물질, 재산, 권력, 심지어 허탄한 우상 신까지 자신의 반석으로 의지하게 된다. 애굽 군사들의 경우(출 14:25), 이방의 술사 발람의 경우(민 23:23), 가나안에 거했던 라함의 경우(수 2:9, 10), 그리고 블레셋 족속 아스돗 사람들의 경우(삼상 5:7) 등이 스스로 여호와를 자신들의 신보다 능하다고 판단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84).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 말은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을 좇는 타락한 백성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있는 말이다. 쓸개포도는 '독초와 쑥의 뿌리'라는 말로, 우상 숭배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온갖 죄악된 행위를 의미한다. 후일 선지자 이샤야도 "이스라엘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사 5:2)라고 탄식했다. '뱀'('탄닌')은 코브라 종류를 가리키며, '독사'('페텐')는 살모사와 같이 치명적인 독(毒)을 지니고 있는 뱀들을 가리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치명적임을 말한다(Cavin).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36). '판단하다'(딘')는 말은 '재판을 집행하다', '심판하다'라는 말이며, '그 종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자기 백성)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후회하다'(나함)는 말도 원래 '한숨을 쉬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동정하다', '긍휼히 여기다'(시 135:14)란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갇힌 자와 놓인 자'란 표현은 '모든 사람' 또는 '온갖 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격언이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중에 남아 있는 자들이 거의 없을 때를 가리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더 이상 멸망 중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마침내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 중에 '거룩한 씨'를 계속 보존시키실 것이다(사 6:13).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던 것들,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로 일어나서 너희를 돕게 하라. 너희의 보장이 되게 하라"(37-38). 여기서 '그들의 신들', '그들의 피하던 반석',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던 것들', 그리고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정성스럽게 제사 드리며 의지하였던 '헛된 우상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환난 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그것들을 섬겼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준엄하고 꾸짖고 있는 말이다. 이방의 우상들은 고기를 먹지도, 술을 마시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4:28) 나무와 돌덩이이기 때문이다(2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들이 마치 복이라도 주는 것 인양 지성껏 섬겼으니 이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는 풍자적 질책이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39). 나와 함께 있는 신이 없도다는 말은 '나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로서 이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천명해 주는 말이다. 천지간에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神)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인류 역사의 통치자인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밖에는 없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40). '손을 들다'란 말은 사람들이 맹세할 때 관습적으로 손을 들고 맹세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4:22). 대개 맹세는 자기보다 높은 자를 걸고서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높은 자가 있을 수 없는 지고자(至高者)이신 까닭에 불가불 자신을 걸고서 맹세하실 수밖에 없다(히 6:13).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41-43). 여기서 '화살'과 '칼'은 의인화(擬人化)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심판 당할 대적의 처참함을 잘 보여 준다. 실로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하듯, 이처럼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역시 철저하다. '장관'(파르아)는 '머리털'이란 의미를 지닌 '페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열방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대적들에게 행하신 공의로운 심판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더불어 기뻐하고, 또한 주께 영광 돌려야 했다. '속죄하다'('카파르')는 말은 '덮다' 또는 '화목하다'는 뜻이다. 심판이나 징계는 비록 죄에 대한 경고는 될지언정 결코 회복이나 화목의 방편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리는 속죄 행위'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히 9:22). 따라서 이 말은 장차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을 위해 이 땅위에 속죄제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케하는 메시야적 메시지(Messianic Message)로 이해할 수 있다.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44). '호세아'는 여호수아를 가리킨다(민 13:8,16). 그런데 여기서 '여호수아'란 이름 대신 '호세아'란 이름을 쓰고 있는 이유는 본절은 모세의 말에 제 3자가 주(註)를 단 형식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Keil, Pulpit Commentary). 여하튼 호세아(여호수아)가 모세와 함께 백성들에게 노래를 들려준 것은 회막에서 위임식을 가진 이후(31:14) 여호수아가 이제 당당히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45-46).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최대 의무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재차 그 교육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47). '허사'('다바르 레크')는 '무익한 말', '빈 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참으로 적절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히 4:12) 영혼을 소성케 하며(시 19:7),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딤후 3:16).
아바림 산은 사해(死海) 북 동편, 모압 평원에 위치한 산맥으로서, 요단 강과 사해를 동쪽으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민 27:12). 느보 산은 아바림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해발 802m이다. 이 산은 팔레스틴 전역을 살펴보기에 최적의 장소로서, 가시(可視) 거리가 약 100km에 달해 청명한 날에는 헤스본과 예루살렘까지도 볼 수 있었다(Lange). 호르 산은 모세의 형 아론이 임종을 맞이했던 산으로 확실치 않지만 가데스 근처 에돔 변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모세의 삶은 호렙 산에서 시작하여(출 3:1-17) 느보(Nebo) 산에서 끝나게 된다. 그동안 그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 사건은 여러 산들과 밀접히 연관되었었다. 모세가 단지 가나안 땅을 바라볼 뿐 그곳에 들어가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할 운명에 처한 이유는 므리바 물 사건(민 20:2-13)으로 인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한 어원은 이러한 성경의 범죄 개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음 도표는 주요 범죄 어원 도표이다. 1) 하타(히), 하마르티아(헬)-"죄"(Sin): 레 6:3, 신 1:41, 삿 10:10, 사 1:4 3.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33장) 3-1. 서론(1)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3). 여기서 '백성'이란 시내 산에서 주의 율법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켜, 성도는 천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 수중에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이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란 말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던 장면(출 19:8;20:19)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4-5). 모세 자신이 스스로를 '모세가'라고 제 3자로 칭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율법을 전달하는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야곱의 총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31:30).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칭(別稱)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의로운 특성을 지닌 이상적인 민족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 '여수룬의 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함으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신정(神政)국가인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사 33:2;시 47:6).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3일간의 정결(淨潔) 의식을 거친 후 시내 산기슭에 모였다(9:10).
가. 르우벤(6) 나. 유다(7) 다. 레위(8-11)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9). 이 말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시,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그 형제에게 칼을 빼든 의로운 열정 및 전적 헌신을 언급하고 있는 말이다(출 32:25-29). 결국 이 어려운 결단으로 인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중 나뉘고 흩어지리라(창 49:7)던 야곱의 저주를 축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별된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 하는 일이 부모와 형제와 자녀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보다 더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예수께서도 부모나 자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마 10:37; 19:29; 눅 14:26).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10-11) 레위 지파의 영광스러운 직임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말씀 교육의 직임과,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예배봉사의 직임이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위한 이 두 직임(職任)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민 35:1-8). 하나님의 성막 봉사를 의해 구별된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기업을 받지 못했다(10:9;18:1).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十一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란 말은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라는 의미도 되는 셈이다. 모세는 레위 지파의 손을 통해 행해지는 모든 일, 즉 말씀 교육과 예배 봉사를 기쁘게 열납하시고, 레위 지파가 수행하는 일을 반대하는 자를 징계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라. 베냐민(12) 마. 요셉(13-17)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민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16-17). 모세는 요셉 지파의 축복이 40년 전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을 강조하였다. 은혜(라촌)의 원 뜻은 '즐거움', '기쁨'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한다. 축복이 머리에 정수리에 임한다는 말은 당시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할 때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던 관습(창 48:14-16)을 회상시켜 준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요셉 지파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풍성히 축복하실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요셉 지파가 받을 축복은 다른 지파들보다 특별히 구별되게 뛰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첫 수송아지는 힘과 위엄을 지닌 장자(長子)를 상징한다(Keil, Lange). 요셉은 근친 상간 죄로 인해 박탈된 르우벤의 장자권을 이어 받았다.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다는 말에서 '뿔'은 '힘'을 상징한다(삼상 2:10; 시 18:2; 75:10; 112:9). 따라서 요셉 지파는 겁과 두려움을 모르는 강하고 용맹스런 지파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사사 드보라, 기드온 등 뿔 달린 들소 같은 용사들이 요셉 지파에서 많이 나왔다.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란 말은 요셉 지파의 번영과 영예에 대한 축복으로,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인 에브라임을 더 앞세워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의 축복과 같다. 바. 스불론과 잇사갈(18-19) 사. 갓(20-21) 아. 단(22) 자. 납달리(23) 차. 아셀(24-25)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27). 이 말은 결코 힘이 다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항상 이스라엘의 안전한 처소가 되어 그들을 돌보고 붙드실 것을 말한다(Keil). 이스라엘이 모든 대적들을 담대히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곧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 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지휘하시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28). 야곱의 샘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족장 야곱으로부터 출생하게 될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말한다(keil). 가나안은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땅,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며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땅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하늘이 이슬을 내린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다(창 27:28). "이스라엘이여 ! 너는 행복자로다 !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9). '행복한'('아쉬레')이란 말은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는 지극히 행복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높은 곳을 밟는다'는 말은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으로서, 이 말은 싸움에서 고지(高地)를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 된데서 연유된 말이다. <적용 문제> 4. 모세의 죽음과 장례(34장) 4-1.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봄(1-4)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2-3) 이제 모세는 그의 시선을 서서히 서쪽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요단 서편 땅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고 있는 땅들의 순서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초기 여정(旅程)과 일치한다(창 12:1-9). 한편 여기서 '서해'(西海)란 가나안 서편에 위치한 바다인 '지중해를 가리킨다. 남방은 가나안의 남쪽 사막 지역인 '네게브'(Negeb)를 가리키며,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편, 요단 골짜기 남단에 있던 큰 성읍이다. 그런데 이곳을 '종려의 성읍'이라고 부른 것은 그곳이 종려나무의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알(Zoar)은 '벨라'(창 14:2)로도 불리웠던 사해 남단, 요단 평지에 위치한 고대 가나안 성읍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해 서부의 연안 지대'를 보이셨다는 뜻이 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4)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창 12:7;13:15;17:8;29:13;35:12)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지금까지 약 600년간 약속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약속이 바로 눈앞에서 성취되려는 순간에 와있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영웅이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는 그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일차적 이유는 물론 므리바 물 사건(민 20:12) 때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31:2;32:51>.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보다 깊은 교훈을 던져 준다. 1)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자였던 바, 이는 율법이 결코 인간을 하늘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지 못함을 보여 준다. 2) 천국은 결코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 준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 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7). 이때는 B. C. 1407년 11월 말경으로 추정된다(1:3). 그런데 그가 120세를 향유했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왜냐하면 모세 자신의 관찰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0세였고 강건해야 80세였기 때문이다(시 90:10). 따라서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갈 나이인 80세에 하나님께 부름 받아 40년 동안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서 봉사하였다. 이삭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고(창 27:1), 야곱도 또한 마찬가지였다(창 48:10). 그러나 모세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사40:31).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8-9). 히브리인들의 장례 풍습에 의하면, 대개 죽은 자를 위한 애도(哀悼) 기간은 7일이었다(삼상 31:13). 그러나 아론과 모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30일간을 애곡하였는데(민 20:29), 이는 초대 이스라엘 대제사장과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예우(禮遇)였다다. 자신의 죽음을 고지(告知)한후 모세는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명령하셨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에게 안수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았다(31:14, 15;민 27:15-23). 따라서 모압 평지에서 베푼 모세의 안수(按手) 예식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지금까지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도자적 권한을 후임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두 넘긴다는 의미를 지닌 공식적인 위임(委任) 의식이었다. 따라서 이제 이러한 여호수아의 등장은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를 자연스럽게 이어 줄 뿐 아니라,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임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시사한다. '지혜의 신'이란 '지혜의 영'(the sprit of wis dom)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덧입혀 주신 '참된 지혜' 곧 '호크마'를 가리킨다(32:29). 따라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그에게 지혜가 충만히 임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모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에 있어서 특별한 선지자이자, 이스라엘 모든 선지자 중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하나님과 가까이 지냄에 있어서(10절) 2)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나타냄에 있어서(11-12절) <적용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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