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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명기(7): 모세의 고별과 죽음(31-34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0:51

 신명기(7): 모세의 고별과 죽음(31-34장)


  모세는 (신 1-30장)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세 번의 설교를 통해서 새 세대들에게 율법의 핵심 내용을 모두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부터 나오는 (신 31-34장)의 내용은 율법의 결론 부분으로서, 신명기의 부록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31:1). (신 31-34장)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네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후계자(여호수아) 선정과 율법 보관(31장)
2. 모세의 마지막 찬송과 죽음 예고(32장)
3.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33장)
4. 모세의 죽음과 장례(34장)


1. 여호수아의 임명과 율법 보관(31장)

 1-1. 모세에 의해 위임된 여호수아(1-8)
  모세는 이제 120세의 고령이 되어 신체적으로 정상적인 지도자의 직무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여호와께서도 모세가 므리바 사건을 인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다(2). 이제 새로운 세대를 가나안으로 인도할 사명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수행될 것이다(3). 하나님은 새 세대들에게 요단 동편에서 시혼과 옥을 물리친 것처럼, 요단 서편에서도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4). 이러한 족속들은 당시에(B. C. 1400년경) 가나안 땅에 이미 살던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등과 같은 가나안의 후기 7족속을 말한다(7:1).

  모세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자신이 전해준 율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다(5). 모세는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을 강하게하고, 담대히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아야 한다. '강하게 하라'('하자크')는 말은 '꽉잡다', '달라붙다'는 뜻으로서 이는 맹수가 먹이를 공격할 때의 완강한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말이다. 그리고 '담대히 하라'('아마츠')는 말은 '방심하지 말라'는 말이며, '두려워 말고 떨지 말라'는 말은 신앙으로 무장을 하라는 것을 말한다. 모세는 이렇게 비슷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그들이 구세대처럼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다가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거듭해서 경고하였다(5-6).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서 온 이스라엘 앞에 세우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했다(7-8). 여호수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군대의 대장으로 활약했으며(출 17:9), 당시에는 어느 정도 모세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었다(민 27:18-23). 그러나 아직은 그가 모세의 지도자의 권한을 정식으로 위임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둔 모세는 이스라엘의 총회(總會) 앞에서 여호수아를 부각시키고, 그를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위임할 필요가 있었다(14). 모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할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을 강조하였다. 이 말은 모세가 당시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말의 핵심이며 전부였다. "두려워하다"('야레')는 말은 상대방을 경외할 만큼 '위압감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며, "놀라다"('하타트')는 말은 파괴나 패망을 두려워하여 '낙심한 상태'를 가리킨다(왕하 19:26;사 30:31).
 

 1-2. 율법 낭독(9-13)
  모세는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었다(9).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 법조문 및 교훈들로서, 그들의 종교, 개인, 사회 생활에 관련된 모든 규례들을 말한다. 모세의 율법을 그 내용에 따라 크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도덕법: 10계명을 가리킨다. 이것은 시대를 통하여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크게 대신(對神) 계명과 대인(對人) 계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신 5:7-21).
 2) 시민법: 당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바른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했던 구체적인 법조문들이다. 십계명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 법의 근본 정신은 사랑과 공의의 정신이다.
 3) 의식법: 특별히 레위기에서 많이 취급된 제사 및 성결, 그리고 절기에 관련된 법이다.  이 법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적 의식들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안식년의 초막절에 회막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하라고 지시하였다(10).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것을 기념하며, 또한 1년간의 모든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는 실로(Shiloh)가 중앙 성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수 18:1; 삿 18:31; 삼상 1:3). 그러다가 훗날 다윗이 예루살렘을 종교의 중심지로 삼고(삼하  6,7장), 솔로몬이 그 곳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왕하 6장) 예루살렘이 완전한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가 되게 되었다. 이처럼 안식년의 초막절에 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여 들려주라고 명령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하였던 것을 깊이 회상케 하기 위함이었다.
 2)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그 동안 얼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남녀노소와 성안에 사는 타국인들 모두와, 그리고 후손들에게까지도 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12-13).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는 일에는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었다. 이 모든 규례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서 시작되며(롬 10:17),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살게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타국인'('게르')이란 말은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同化)되어 함께 살고 있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1-3. 여호와에 의한 여호수아의 위임(14-23)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죽을 기한이 가까왔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여호수아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 '명을 내리다'(차와')는 말은 '지정하다', '짐을 맡기다'란 의미로서, 이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특별한 임무와 직책(직분)을 위임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회막으로 부르신 이유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 곧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정식 위임(委任)하기 위함이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섰을 때에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나타나셨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었다(15).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강림하시어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대화하신 적이 있다(출 33:7-11).  그때 온 이스라엘은 회막에서 멀리 떨어져 구름 기둥을 바라보며 경배하였었는데 이번에도 물론 그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회막에 임재 하셨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모세에게 그가 죽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고 하나님을 버리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하셨다(16).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그들에게 진노하실 것이며, 그들을 버리시고 그들에게 그  얼굴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임할 그 때에 그 재앙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해 반드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얼굴을 숨기실 것이다(17-18).  '진노한다'(하라)는 말은 '빨갛게 되다', '더워지다'란 의미로서 이다. 따라서 이는 마음속에서부터 맹렬히 타오르는 극심한 분노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외면하사 그들로부터 모든 구원과 보호의 손길을 거둘 것이라는 말이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진 인간은 자신들이 재앙을 당하게 될 때에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한다. 즉 스스로 축복을 거절하고 저주를, 은혜를 저버리고 재앙을 자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들이 당하게 된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원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예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 노래를 써서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라고 지시하셨다(19). 훗날 이스라엘은 범죄한 후에 환란과 재앙을 당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이 노래는 그들이 당하는 모든 환란과 재앙이 그들의 관영한 죄악 때문임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이스라엘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게 되면, 그들은 돌이켜서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언약을 어기게 될 것이다(20). 그리하면 그때에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기 전에 이미 그들의 생각을 모두 아시고 계셨다(21). 하나님께서 '모세의 노래를 지어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 목적은 1) 이 노래가 선용된다면 이스라엘의 배역(背逆)을 방지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2) 이 노래가 이스라엘의 배역을 방지하지는 못해도 그들을 회개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증인'(에드)이란 말은 고발된 어떤 범죄 사실을 확인할 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뜻은 이스라엘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그 누군가에  의해 불리워질 이 모세의 노래(32:1-43)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증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바로 그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다(22). '노래'(쉬라)는 어떤 지식이나 사상을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노래에는 대개 그 시대의 상황이 압축되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히브리인들의 노래 역시 대부분 예술적인 표현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해 주셨다(23-24).


 
1-4. 언약궤 곁에 두어야 할 율법(24-29)
  모세는 이 율법의 말씀을 책에 쓴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그 율법 책을 갖다가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25-26). 언약궤(법궤) 안에는 만나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 두 돌판이들어 있었다민 17:10). 그런데 십계명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율법서는 바로 이 연약궤 곁에 두어 후손 대대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책이 되도록 해야 했다(Delitzsch). 모세는 이스라엘 자선들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도 여호와를 거역한 이스라엘이 자기가 죽은 후에는 더욱 더 패역할 것이라고 하였다(27). '패역하다'는 말은 '쓰다', '불쾌하다'는 뜻의 '마라'에서 온 말로서 인간의 패역한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반감(反感)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목이 곧다'는 말은 가축이 주인의 요구대로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가리킨다(출 32:9). 이스라엘이 이처럼 끝까지 패역하고 불순종할 경우에는 그들의 목에 오직 철 멍에가 씌워질  뿐이었다(28:48). 모세는 모든 장로와 유사들을 자기 앞에 모으라고 지시하였다. 모세는 자신이 그들의 귀에 말씀을 들려주고, 천지로 증거를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28). 장로와 유사는 재판이나 행정 등 공적(公的) 임무를 맡아 처리했던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자들이다(21:2;29:10). 모세의 노래는 아마 이들을 통하여 온 백성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였을 것이다. 천년을 두고 요지부동하는 천지(天地)를 증인으로 채택한 이유는 증거 하고자 하는 내용의 불변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모세는 자기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부패하여 율법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29).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 노래를 이스라엘 총회에게 끝까지 읽어 들려주었다(30).                  

                                    <적용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가르쳐져야 하며, 그것을 잘 준수하도록 강조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   
3. 우리의 패역함을 인해 경고나, 회개를 위한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4. 지도자들은 신앙의 유산이 보존되고 후손들에게 잘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모세의 찬송과 죽음에 대한 예고(32장)

 2-1. 서론(1-3)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1). 모세가 하늘과 땅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라고 한 것은, 곧 천지를  증인으로  채택하여 1) 그 말의 '불변성' 과 이 노래가 2) 전우주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2). 모세는 자신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메마른 사람의 영혼을 새롭고, 기름지게 만드는 단비와 이슬 같다고 선언하고 있다(Keil). 이스라엘이 옥토(沃土)와 같은 마음 밭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비유의 신선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히 6:7, 8). 팔레스타인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는데 그 원천은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다. 8-9월 중에 많이 내리는 이슬은 팔레스틴에서는 수자원(水資源)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비가 제때 안 내릴 경우 이슬은 한 해의 농사에 큰 구실을 한다. 따라서 만약 이슬이 제대로 내리지 않으면 가뭄의 피해는 가중된다. 이런 점에서 이슬은 비 못지 않게 중요한 자연의 혜택이었다. 가는 비(사이르)는 '머리카락', '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가볍게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력'을 상징한다. 단 비(레비빔)는 '풍성함', '많음'에서 파생된 단어로 '소나기'(KJV, showers), 또는 '많은 비'(NIV ,abundant rain)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눈에 현저하게 띄일 정도로 크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 '강권력'(强勸力)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힘이요, 삭막한 심령에 풍성한 결실을 보장해 주는 능력이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성품과 놀라운 역사를 전파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2-2. 신실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백성(4-9)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4). 반석이라는 말은 자신을 찾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안전하고 불변 부동(不變不動)하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심을 의미한다(Lange, Keil). 성경에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유한 구절이 많은데(삼상 2:2;시  18:2;19:14;31:3), 특히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신령한 반석'(고전 10:4)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바람에 날리는 모래와는 달리 언제나 제자리에 변함없이 우뚝 서있어, 사막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여행자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는 거대한 반석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완전하며,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불의(iniguity)가 없으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5)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패역할 뿐 아니라 강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40년 광야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사랑과 은혜를 저버린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9:6;출 32: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이러한 질책성 경고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를 향한 준열한 꾸짖음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3:7-10).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삼으셨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성하신 참 하나님이시다(사 44:2,24).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양육하시는 분이시다(10-14절; 사 43:2).
 3) 부모가 자녀에게 공경 받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당연히 경배 받으실 분이시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7).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되는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로 점철된 사랑과 긍휼의 역사였다. 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거듭 하나님께 죄악만을 쌓던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사건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 베풀어주신 갖가지 은혜를 오늘에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항상 정도(正道)를 걸으며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 드릴 수 있는 영원한 생의 찬송 제목이 된다. 가정을 중심한 히브리인들의 교육 방식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히브리 어린이들은 1차적으로 자기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그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6:7).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 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8). 열국의 기업을 주셨다는 말은 열국의 모든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강조하는 말이며(단 4:35), 인종을 분정했다는 말은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의 언어가 분립(分立)되고, 지역적으로 인류가 흩어지게 되었던 때를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창 11:1-9).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익을 염두에 두시고 세계를 분할하셨다'는 뜻이다(Calvin).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전개를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을 미리 염두에 두셨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9). 택하신 기업이란 말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토지로 측량해 놓은 것', 또는 '그의 상속 재산으로 정해 놓은 것'을 의미한다(시 16:6).


 2-3. 이스라엘 창조에서의 여호와의 선하심(10-14)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10). 황무지와 광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40여 년 동안 방랑하던 황량하고 삭막한 땅이다. 실로 그곳은 아무런 수확도 기대할 수 없고 단지 짐승의 울음만이 스산하게 들려오던 두렵고 낯선 오지(奧地)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극진한 사상과 세심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은 결코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Herxheimer). 눈동자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쉽게 다칠 수 있는 약한 부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말은 '최우선적으로 아끼며 조심스럽게 보호한다'(시 17:8;잠  7:2)는 의미이다(Lange,  Keil, Wycliffe).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11-12).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려 날게 한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받쳐 결코 새끼들이 해(害)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독수리답게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출 19:4).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13-14). 여기서 '땅의 높은 곳'이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종종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나오는데(창 12:10; 26:2; 42:1-3). 이는 가나안 땅을 높은 곳으로 여기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타고 다니게 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을 것을 의미한다(Keil,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얻는 다는 말은 가나안 땅의 기름진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11:9). 이 말은 가장 척박한 곳에서도 가장 귀한 소산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젖 기름'('헤므아')은 '치즈'나 '버터'와 같이 절반 정도 응고된 우유를 가리킨다. '바산'(Bashan)은 갈릴리 동북쪽, 길르앗 이북에 위치한 고원 지대이다<3:1>. 이곳의 땅은 매우 비옥하고 목초지가 많아 가축사역과 밀 경작으로 유명하였다(시 22:12;사 33:9).


 2-4. 이스라엘의 번영과 배교(15-18)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15-16). '여수룬'은 '예수룬'을 음역(音譯)한 말로서 , 이 말은 이스라엘을 명예롭게 일컫는 시적(詩的) 표현 또는 별명이다(33:5, 26;사 44:2). '여수룬'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을 의미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처럼 명예롭고 존귀한 명칭이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사악(邪惡)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 즉 마땅히 그 이름의 뜻답게 의로운 길을 걸으며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 오히려 사곡한 배교(背敎)의 길을 걷고 있으므로, 이를 꾸짖기 위해 이스라엘을 풍자적으로 '여수룬'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Calvin).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였던 것이다(Luther). '경홀히 여겼다'(나발)는 말의 원 뜻은 '시들다, '마르다'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KJV, lightly esteemed), 또는  '거부했다'는 뜻이다(미 7:6).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17-18). 마귀(쉐딤)는 본래 반신 반인이란 뜻을 지닌 앗스르의 수호신(守護神) '쉐두'(Shedu)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를 '귀신'(demons)으로 번역하였다(Keil,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이방 우상들'을 의미한다. '근래에'(믹카로브)라는 말은 통상 시간적, 장소적 근접 상태를 모두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시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근래의 신들은 이스라엘이 열조 때부터 알아왔던 신, 곧 여호와 하나님과는 다른 새롭게 만들어진 신들이었다. 상관치 아니하였다는 말은 '무관심하였다'는 말이다.


 
2-5. 이스라엘에 내리신 여호와의 심판(19-27)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한 연고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19-20).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관계하지 않으시고, 그들에 대한 모든 보호와 긍휼을 중단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악하고 신실하지 못한 자녀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21). 본절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묘사한 구절이다. 즉 이는 한 남편이 음란한 아내에게 자신이 멸시 당하고 있음을 알고, 그 역시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함으로써   보복하는 질투 심리를 연상시켜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나 보복은 미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랑에 근거한 교육적 차원의 징계이다. 이 선고(宣告)는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로마 등과 같은 이방 민족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을 괴롭힘으로써 역사상 성취되었다. 한편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은 본문을 구속사적 측면에서도 이해하였다. 즉 그는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보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먼저 교회 안으로 이끄심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여 그들도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하나님의 구속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본문을 인용하였다(롬 10:19;11:11).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도 불이 붙게 하는도다"(22). 하나님의 분노를 '불'에 비유한 표현은 성경에 자주 타나난다(렘 15:14 ; 17:4 ; 애 4:11). 실제로 하나님은 불로써 이스라엘에게 분노를 표하기도 하셨다(민 11:1-3). '음부'('쉐올')는 신약 시대의 '지옥'(하데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당시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한 계시가 명확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쉐올' 곧 '음부'(陰部)는 선악간을 막론하고 일단 죽은 자들이 가서 거하는  곳으로 여겼던 '지하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23). 하나님의 재앙이 위에서부터 쏘아대는 화살에 비유되고 있다(시 7:13;슥 9:14). 이는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리쳐 없앨 대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에게 삼키울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24). 이러한 재앙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무모한지를 잘 보여 준다. 불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은 '열병'(fever)과 '흑사병'(pestilence)을 가리키며, 들짐승의 이는 사나운 야수들의 송곳니에 의해 갈갈이 찢겨 죽을 것을 나타내고, '티끌에 기는 것'은 뱀을 가리키며, 이는 각종 독사에 의해 입는 상해를 의미한다.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까지리로다"(25). 남왕국 유다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애 1:20)고 탄식했던 것은 바로 본절의 성취일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천만인이 둘러치려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나(레  26:7, 8;잠 3:6). 그렇지 못한 자들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기 마련이다(레 26:36, 37;잠 28:1). 청년 남자와 백발 노인까지라는 말은 패역한 세대, 사곡한 종류에게 임할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그 심판이 예외 없이 엄정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다마는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26-27). 흩는다는 말(파아)은 '훅 불다'는 의미로서 여기서는 강한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는 먼지와 같이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 때문인 줄로 오해하여,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하나님까지 비웃을 것을 걱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당신의 영광을 훼손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민 이스라엘을 완전한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실 것임을 시사해 준다.


 2-6. 이스라엘의 분별력 부족(28-33)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28). 모략이 없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Lord)로 깨달아 아는 지각(知覺)이나 분별력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Lange).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29-30).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만일 지혜로운 마음을 품어서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대적에게 내어 주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징계의 채찍을 맞고 돌아오기 전에,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히 축복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기교적인 지식이나 사변적인 학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언약 백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그 관계를 올바로 유지시켜 주는 총명함과 명철함, 도덕적인 성실함, 영적인 온전함을 총체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호크마'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시 111:10).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31-33). '대적의  반석'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믿고 의지하는 이방의 각종 신들을 가리킨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지 않을 때에, 물질, 재산, 권력, 심지어 허탄한 우상 신까지 자신의 반석으로 의지하게  된다. 애굽 군사들의 경우(출 14:25), 이방의 술사 발람의 경우(민 23:23), 가나안에 거했던 라함의 경우(수 2:9, 10), 그리고 블레셋 족속 아스돗 사람들의 경우(삼상 5:7) 등이 스스로 여호와를 자신들의 신보다 능하다고 판단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84).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 말은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을 좇는 타락한 백성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있는 말이다. 쓸개포도는 '독초와 쑥의 뿌리'라는 말로, 우상 숭배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온갖 죄악된 행위를 의미한다. 후일 선지자 이샤야도 "이스라엘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사 5:2)라고 탄식했다. '뱀'('탄닌')은 코브라 종류를 가리키며, '독사'('페텐')는 살모사와 같이 치명적인 독(毒)을 지니고 있는 뱀들을 가리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치명적임을 말한다(Cavin).


 2-7. 하나님의 연민과 심판(34-44)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34-3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죄악은 그들의 마음 판에 금강석 끝 철필(鐵筆)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렘 17:1), 회개하지 않는 죄악은 어떤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36). '판단하다'(딘')는 말은 '재판을 집행하다', '심판하다'라는 말이며, '그 종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자기 백성)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후회하다'(나함)는 말도 원래 '한숨을 쉬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동정하다', '긍휼히 여기다'(시 135:14)란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갇힌 자와 놓인 자'란 표현은 '모든 사람' 또는 '온갖 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격언이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중에 남아 있는 자들이 거의 없을 때를 가리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더 이상 멸망 중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마침내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 중에 '거룩한 씨'를 계속 보존시키실 것이다(사 6:13).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던 것들,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로 일어나서 너희를 돕게 하라. 너희의 보장이 되게 하라"(37-38). 여기서 '그들의 신들', '그들의 피하던 반석',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던  것들', 그리고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정성스럽게 제사 드리며 의지하였던 '헛된 우상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환난 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그것들을 섬겼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준엄하고 꾸짖고 있는 말이다. 이방의 우상들은 고기를 먹지도, 술을 마시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4:28) 나무와 돌덩이이기 때문이다(2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들이 마치 복이라도 주는 것 인양 지성껏 섬겼으니 이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는 풍자적 질책이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39). 나와 함께 있는 신이 없도다는 말은 '나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로서 이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천명해 주는 말이다. 천지간에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神)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인류 역사의 통치자인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밖에는 없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40). '손을 들다'란 말은 사람들이 맹세할 때 관습적으로 손을 들고 맹세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4:22). 대개 맹세는 자기보다 높은 자를 걸고서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높은 자가 있을 수 없는 지고자(至高者)이신 까닭에 불가불 자신을 걸고서 맹세하실 수밖에 없다(히 6:13).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41-43). 여기서 '화살'과 '칼'은 의인화(擬人化)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심판 당할 대적의 처참함을 잘 보여 준다. 실로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하듯, 이처럼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역시 철저하다. '장관'(파르아)는 '머리털'이란 의미를 지닌 '페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열방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대적들에게 행하신 공의로운 심판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더불어 기뻐하고, 또한 주께 영광 돌려야 했다. '속죄하다'('카파르')는 말은 '덮다' 또는 '화목하다'는 뜻이다. 심판이나 징계는 비록 죄에 대한 경고는 될지언정 결코 회복이나 화목의 방편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리는 속죄 행위'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히 9:22). 따라서 이 말은 장차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을 위해 이 땅위에 속죄제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케하는 메시야적 메시지(Messianic Message)로 이해할 수 있다.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44). '호세아'는 여호수아를 가리킨다(민 13:8,16). 그런데 여기서 '여호수아'란 이름 대신 '호세아'란 이름을 쓰고 있는 이유는 본절은 모세의 말에 제 3자가 주(註)를 단 형식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Keil, Pulpit Commentary). 여하튼 호세아(여호수아)가 모세와 함께 백성들에게 노래를 들려준 것은 회막에서 위임식을 가진 이후(31:14) 여호수아가 이제 당당히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45-46).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최대 의무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재차 그 교육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47). '허사'('다바르 레크')는 '무익한 말', '빈 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참으로 적절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히 4:12) 영혼을 소성케 하며(시 19:7),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딤후 3:16).


 2-8. 모세의 죽음 준비(45-52)

  "당일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산에 올라 느보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48-52).

  아바림 산은 사해(死海) 북 동편, 모압 평원에 위치한 산맥으로서, 요단 강과 사해를 동쪽으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민 27:12). 느보 산은 아바림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해발 802m이다. 이 산은 팔레스틴 전역을 살펴보기에 최적의 장소로서, 가시(可視) 거리가 약 100km에 달해 청명한 날에는 헤스본과 예루살렘까지도 볼 수 있었다(Lange). 호르 산은 모세의 형 아론이 임종을 맞이했던 산으로 확실치 않지만 가데스 근처 에돔 변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모세의 삶은 호렙 산에서 시작하여(출 3:1-17) 느보(Nebo) 산에서 끝나게 된다. 그동안 그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 사건은 여러 산들과 밀접히 연관되었었다. 모세가 단지 가나안 땅을 바라볼 뿐 그곳에 들어가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할 운명에 처한 이유는 므리바 물 사건(민 20:2-13)으로 인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한 어원은 이러한 성경의 범죄 개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음 도표는 주요 범죄 어원 도표이다.                                                         

 1) 하타(히), 하마르티아(헬)-"죄"(Sin): 레 6:3, 신 1:41, 삿 10:10, 사 1:4
  가장 보편적인 단어, 구약에 700번 나타남. '과녁을 빗나가다', '표적을 맞추지 못하다'란 뜻의 '하타아'에서 유래.
 2) 아본-"불의"(Iniquity): 창 15:16, 시 32:3: 구부러지고 비틀어짐
 3) 페솨-"위법"(Transgression): 사 1:2, 시 51:13, 잠 29:6, 겔 14:11, 단 8:12, 왕상 12:19.-'어기다', '반역하다'란 뜻의 '파솨'에서 유래. 고의적으로 법규를 파기함, 반역.
 4) 라아(히), 포네로스(헬)-"악"(Evil): 창 2:9, 사 45:7
  라아-부서져 망가짐, 질병이나 지진 같은 재앙, 포네로스-더럽다, 오염된 상태          
 5) 아바르(히)-파라바이노, 파라노미아, 파라바시스(헬)-"범죄"(Transgression):
  * 아바르-창 12:6, 호 6:7, 단 9:11,
  * 파라바시스-롬 5;14, 히 2:2, 9:15,
  * 파라바이노, 파라노미아--벧후 2;16, 마 15:2-3-한계를 넘어서 건너감. 언약을 어김, 율법의 함계를 넘어섬.
 6) 아노미아-"무법"-법이 없음, 요일 3:4
 7) 파랍토마(헬): 롬 4:25, 5:15, 갈 6:1, 골 2:13)-실족, 넘어짐, 죄를 범함. '옆으로 떨어지다', '옆길로 새어 나가다'란 뜻의 '파라핍토'에서 유래.
 8) 쉐가가(민 15:22)-'부지중 그릇 행함', '바른 길을 벗어난다'는 뜻인 '솨가그'에서 유래


3.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33장)

 3-1. 서론(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1).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는 모세에 의해 선포되는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선포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이란 칭호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사자(使者)로 고용된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이나(삼상 2:27; 9:6; 왕상 12:22; 왕하 1:9), 다윗(대하 8:14),  사무엘(삼상 9:6)등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칭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소유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게 되었다(딤전 6:11). 모세가 죽기 전에 선포한 이 축복은 장중함과 엄숙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모세의 유언적 축복은 일종의 기도로서 예언적 성격을 띤다. 한편 이 모세의 축복은 노아의 축복(창 9:26), 이삭의 축복(창 27:27-29), 야곱의 축복(창 48:15, 16; 49:2-27)과 비슷하다.


 3-2. 모세의 여호와 찬양(2-5)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2). 여기서 '시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영광 중에 강림하신 곳인 '시내 산'(Mt.Sinai)을 가리킨다(출 19:18). 그리고 '세일 산'(Mt.Seir)은 이스라엘이 모압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통과 했던 에돔 인의 산지를 가리킨다(1:2). 마지막으로 '바란 산'(Mt. Paran)은 바란광야의 고지대를 가리킨다(1:1; 민 10:12; 13:3). 따라서 이 표현은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현(顯現)이 어찌나 장엄하고 장중한지 그 영광의 빛이 시내 산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세일 산과 바란 산까지 퍼져 나갔다는 시적(詩的) 표현이다. 성도(거룩한 자)는  천군 천사들을 가리킨다(Calvin, Keil, Matthew Henry). 이 말은 율법이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임을 나타낸다(행 7:53; 갈 3:19). 그리고 '오른 손'은 하나님의 권능이나 통치권을 상징하는 말이다(출 15:6; 시 17:7; 애 2:3). 그리고 '불 같은 율법'(에쉬다트)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주신 율법'(4:33; 출 19:16)이란 뜻이거나, 혹은 '불같은 역할을 하는 율법'(롬 3:19)이란 뜻이다(Matthew Henry).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3). 여기서 '백성'이란 시내 산에서 주의 율법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켜, 성도는 천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 수중에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이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란 말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던 장면(출 19:8;20:19)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4-5). 모세 자신이 스스로를 '모세가'라고 제 3자로 칭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율법을 전달하는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야곱의 총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31:30).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칭(別稱)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의로운 특성을 지닌 이상적인 민족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 '여수룬의 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함으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신정(神政)국가인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사 33:2;시  47:6).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3일간의 정결(淨潔) 의식을 거친 후 시내 산기슭에 모였다(9:10).


 3-3. 모세의 축복의 내용(6-25)

  가. 르우벤(6)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도다"(6). 르우벤(Reuben) 지파에게 내려진 축복은 '종족 보존'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비록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창 35:22)로 인해 장자권(長子權)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곱도 그의 축복에서 르우벤은 결코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창 49:4).모세의 이 축복은 1) 르우벤 지파가 요단 강 동편 제 일선에 위치한 지파로서 항상 대적들의 위협 속에 살 운명을 지녔다는 점과, 2) 곧 치를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선봉을 담당해야 할 지파(민 32:16-32)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유다(7)                      
  "여호와여 !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7). 유다(Judah)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여호와께 대한 기도의 형식으로 선포되고 있는데, 그 축복 내용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왕권(王權)에 관한 것이다. 그 백성에게로 인도해 달라는 말은 유다 지파가 다른 지파들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운다는 말에서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Lange). 따라서 이 말은 유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대적들과 싸우게 될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유다가 원수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달라는 간구하고 있다.

  다. 레위(8-11)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8). '둠밈'(Thummim) '온전함'을 그리고 '우림'(Urim)은 '빛'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 대제사장이 사용하던 도구였다. '경건한'('하시드')는 원래 '자비한 것'을 가리키나, 여기에서는 '구별된 것' 또는 '거룩한 것'(시 16:10)을 의미한다. 여기 '경건한 자'란 넓은 의미로는 '레위 지파'를, 좁은 의미로는 그 중에서도 특히 '대제사장'을 가리킨다(Matthew Henry). 모세와 아론으로 대표되는 레위지파는 맛사 생수 사건(출 17:1-7)과 므리바 반석 사건(민20:2-13)이 가장 어려운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행적에 상관없이 거룩한 직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모세와 아론 뿐 아니라 전체 레위 지파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거룩한 직무를 받았다.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9). 이 말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시,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그 형제에게 칼을 빼든 의로운 열정 및 전적 헌신을 언급하고 있는 말이다(출 32:25-29). 결국 이 어려운 결단으로 인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중 나뉘고 흩어지리라(창 49:7)던 야곱의 저주를 축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별된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 하는 일이 부모와 형제와 자녀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보다 더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예수께서도 부모나 자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마 10:37; 19:29; 눅 14:26).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10-11) 레위 지파의 영광스러운 직임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말씀 교육의 직임과,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예배봉사의 직임이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위한 이 두 직임(職任)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민 35:1-8). 하나님의 성막 봉사를 의해 구별된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기업을 받지 못했다(10:9;18:1).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十一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란 말은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라는 의미도 되는 셈이다. 모세는 레위 지파의 손을 통해 행해지는 모든 일, 즉 말씀 교육과 예배 봉사를 기쁘게 열납하시고, 레위 지파가 수행하는 일을 반대하는 자를 징계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라. 베냐민(12)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12). 베냐민(Benjamin) 지파를 향한 축복은 '안전한  보호'였다. '그 곁'은 '여호와의 곁'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1) 베냐민 지파의 영토가 하나님께서 거하실 예루살렘 성전 곁에 위치하였고(수 18:28), 2) 남북 왕국 분열시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결속하여 다윗 가문 및 하나님의 성전을 파수하므로서(왕상 12:21) 성취되었다.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등에 업은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서(Keil, Pulpit Commentary), 곧 '품에 안아 주신다',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마. 요셉(13-17)  
  "원컨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옛 산의 상품물과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과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13-15) 여기서 말하는 '요셉'은 요셉의 두 후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창 41:51,52)를 말한다.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차지한 땅은 요단 서편의 아주 기름진 땅들이었다(수 16:1-17:18). 특히 그들이 기업으로 할당받은 땅은 가나안 전 영토의 1/4에 해당할 정도로 광활하였다.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물은 농경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축복이다(32:2).  본문에 나오는 '보물'('메게드')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은 태양열과 달빛에 의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는 각종 땅의 소산물(所産物)을 가리킨다. 여기서 '옛산'이란 에브라임 산지로 대표되는 요셉 지파의 영토를 가리키며, '상품물'이란 그곳의 특산물을 가리킨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옛날부터 밀과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다. 모세의 노래(32:1-43) 가운데 나오는 '지극히 아름다운 밀', '포도즙의 붉은 술'(32:14)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영원한 작은 산'이란 야곱의 축복 중에서 인용한 말로서(창 49:26), 요셉 지파가 거주할 낮은 지대의 영토(언덕)을 가리키며(MatthewHenry), 그 산의 '보물'은 그 땅의 특산물을 의미한다.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민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16-17).  모세는 요셉 지파의 축복이 40년 전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을 강조하였다. 은혜(라촌)의 원 뜻은 '즐거움', '기쁨'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한다. 축복이 머리에 정수리에 임한다는 말은 당시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할 때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던 관습(창 48:14-16)을 회상시켜 준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요셉 지파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풍성히 축복하실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요셉 지파가 받을 축복은 다른 지파들보다 특별히 구별되게 뛰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첫 수송아지는 힘과 위엄을 지닌 장자(長子)를 상징한다(Keil, Lange). 요셉은 근친 상간 죄로 인해 박탈된 르우벤의 장자권을 이어 받았다.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다는 말에서 '뿔'은 '힘'을 상징한다(삼상  2:10; 시 18:2; 75:10; 112:9). 따라서 요셉 지파는 겁과 두려움을 모르는 강하고 용맹스런 지파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사사 드보라, 기드온 등 뿔 달린 들소 같은 용사들이 요셉 지파에서 많이 나왔다.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란 말은 요셉 지파의 번영과 영예에 대한 축복으로,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인 에브라임을 더 앞세워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의 축복과 같다.

  바. 스불론과 잇사갈(18-19)
  "스불론이여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18-19). 모세가 이처럼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를 함께 축복하는 까닭은 두 지파가 한 어머니(레아)의 출생이며(창 30:17-20),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도 인접한 지역에 거할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수 19:10-23).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는 말을 혹자는 '노동'과 '휴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Graf, Keil). 그러나 이 예언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예언과 관련하여 생각하여야 한다(창 49:13-15). 그리할 때 여기서 '나감'(going out)은 바다로 나가는 것 즉 무역 활동을 의미하고, '장막에 있음'은 평온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Lange). 이 예언은 후일 스불론 지파가 해변까지 그들의 영역을 넓혀(사 9:1) 해로를 개척함으로서,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조용한 농경생활을 영위하는 지파가 됨으로서 성취되었다. 혹자는 19절에서 말한 산'을 스불론과 잇사갈의 경계에 위치한 '다볼 산'(Mt. Tabor)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Herder). 그러나 '의로운 제사'와 관련해 볼 때 여기서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주의 기업의 산'(출 15:17), 즉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이 두 지파가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불러모아  성소(聖所)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볼 수 있다. 모래에 감추인 보배는 해변가 모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귀한 물산이나, 혹은 해상 무역으로 인한 번영(Keil)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사. 갓(20-21)                                     
  "갓을 광대케 하시는 자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 갓이 암사자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법 세운 자의 분깃으로 예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두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20-21). 모세는 갓(Gad) 지파에게 광활한 영토를 주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20절에서 '팔'은 '힘'을, '정수리'는 '지혜'를 상징한다(Matthew HEnry). 따라서 이 말은 갓 지파가 매우 용맹스러워서 대적들의 힘과 모략을 능히 격파하리라는 예언이다(창 49:19). 먼저 기업을 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땅을 정복하자, 갓 지파가 므낫세 반(半) 지파 및 르우벤 지파와 더불어 그곳의 땅 분배받기를 적극극적으로 원해서 그 땅은 먼저 할당받은 것을 말한다. 여기서 '법 세운 자'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세운 모세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여호수아에 의해 땅을 분배받았던 다른 지파와는 달리(수 14:1) 갓 지파는 모세에 의해서 직접 땅을 분배받은 사실을 의미한다. 모세는 갓 지파가 가나안 정복 전쟁시 선봉(先鋒)이 되어 싸우겠다는 약속(3:18-22;민  32:16-27)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아. 단(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22). 야곱은 그의 축복에서 단(Dan)의 교활함을 뱀에 비유했었다(창 49:17). 그러나 모세는 단의 용맹성을 들어 사자 새끼에 비유하고 있다.  결국 이 비유들은 단 지파가 전쟁에서 뛰어난 계략과 용맹을 떨칠 것이라는 예언이다.  후일 사자같이 힘세고 용감했던 삼손이 바로 단 지파 출신이었다.한편, '바산'은 레바논과 헤르몬 산지 지역의 고지대로서, 사자를 비롯하여 각종 맹수들이 들끓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아 4:8). 단 지파는 본래 가나안 땅의 남부 해안 지방을 기업으로 받았으나(수 19:40-46), 아모리인들에 의해 산지로 쫓겨나 유리하게 되자(삿 1:34;18:1), 바산 지역에 속한 갈릴리 호수 북부의 라이스에 침입해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였다(삿 18:7-31).

  자. 납달리(23)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 너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지로다"(23). 빌하의 막내 아들인 납달리(Naphtali) 지파가 받을 축복을 '풍요로움'이었다. 이 예언대로 이 지파는 가나안 땅의 젖줄인 갈릴리 호수 일대의 비옥한 지역을 차지했다. 한편 야곱의 축복(창 49:21) 때에는 이들이 놓인 암사슴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자로 묘사되었다. '서방과 남방'에 해당하는 '얌 웨다룸'은 '바다와 남방'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후에 납달리 지파가 기업으로 차지한 땅은 갈릴리 바다를 끼고 있었다.

  차. 아셀(24-25)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24-25). 아셀 지파는 1차 인구 조사 때에는 41,500명이었으나(민 1:41), 2차 인구 조사에서는 53,400명으로 늘어났다(민 26:47). 모세는 이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들을 축복하였을 것이다. 모세는 아셀의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을 예언하였는데, 이 것은 야곱이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창 49:20)라고 한 축복과 일치한다. 이는 아셀 지파의 땅이 비옥한 옥토(沃土)일 것임을 강조한 표현인데, 실제로 훗날 솔로몬 왕은 아셀 지파의 기업인 갈멜 평원에서 나는 곡식을 두고(Tyre)왕 히람에게 공급한 적이 있다(왕상 5:11). 25절에서 말하는 '문 빗장'('미느알')은 '매다', '꼭 잠그다', '둘러싸다'란 뜻의 '나알'에서 온 단어로, 요새'나 '성채'(城砦)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이다(Pulpit Commentary).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아셀 지파의 거주지가 마치 철과 놋으로 지은 요새처럼 튼튼하고 안전할 것을 말한다(Keil). 모세는 아셀 지파가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축복하였다.


 
3-4. 축복 받은 이스라엘에 대한 찬양(26-29)     
  "여수룬이여 !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26). 여수룬은 '의로운 백성'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의 별칭이다. '하늘을 타고 오다', '구름을 타고 오다' 등의 표현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시 18:10; 68:33; 사 19:1). 이처럼 천지의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27). 이 말은 결코 힘이 다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항상 이스라엘의 안전한 처소가  되어 그들을 돌보고 붙드실 것을 말한다(Keil). 이스라엘이 모든 대적들을 담대히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곧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 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지휘하시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28). 야곱의 샘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족장 야곱으로부터 출생하게 될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말한다(keil). 가나안은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땅,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며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땅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하늘이 이슬을 내린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다(창 27:28).

  "이스라엘이여 ! 너는 행복자로다 !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9). '행복한'('아쉬레')이란 말은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는 지극히 행복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높은 곳을 밟는다'는 말은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으로서, 이 말은 싸움에서 고지(高地)를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 된데서 연유된 말이다.  

                                    <적용 문제>                                     
1. 믿음의 선조들(또는 부모)은 자녀들을 축복해 주어야 한다.
2. 각 자녀들의 미래는 그들의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에 따라 달라진다.
3. 성도들은 하나님께 선택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4. 성도들은 그들의 특성과 은사에 따라 적절한 축복과 임무가 주어지게 된다.   


4. 모세의 죽음과 장례(34장)

 4-1.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봄(1-4)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1) 느보 산이나 비스가 산은 모두 아바림 산맥(32:49)에 있는 봉우리들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느보 산을 비스가 산의 꼭대기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가 느보 산을 경유하여 비스가 산에 오른 것처럼 번역한 개역 성경의 번역은 합당치 않다. 이 비스가 산 정상은 가나안 땅을 조망(眺望)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32:49). '길르앗 땅'은 사해 위, 얍복 강 유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유향(balm)의 산지로 유명하다(렘 8:22). 이곳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되었다(3:12-17; 수 13:24-31). 그런데 여기서 '단'(Dan)은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만일 이곳이 단 지파가 차지한 가나안 최북단 헤르몬 산기슭의 단(수 19:47;삿 20:1)을 가리킨다면, 본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비스가 산에서 헤르몬 부근의 단까지는 거리가 무려 160km 정도나 된다. 따라서 모세가 아무리 시력이 좋고, 또 서 있는 곳이 높다고 할지라도 정상적으로는 그 곳까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모세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셈이 된다(Matthew Henry).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가리키는 '단'을 헤르몬 부근의 단으로 보지 않고 길르앗 부근에 위치하였던 어느 한 성읍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있다(Lange,  Keil,  Pulpit). 만일 본절이 모세가 일반적인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지역을 가리킨다고 하면, 이들의 견해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모세의 임종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약속에 근거한 가나안 전경(全景)을 보이시고자 하셨다면, 전자의 견해 역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2-3) 이제 모세는 그의 시선을 서서히 서쪽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요단 서편 땅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고 있는 땅들의 순서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초기 여정(旅程)과 일치한다(창 12:1-9). 한편 여기서 '서해'(西海)란 가나안 서편에 위치한 바다인 '지중해를 가리킨다. 남방은 가나안의 남쪽 사막 지역인 '네게브'(Negeb)를 가리키며,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편, 요단 골짜기 남단에 있던 큰 성읍이다. 그런데 이곳을 '종려의 성읍'이라고 부른 것은 그곳이 종려나무의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알(Zoar)은 '벨라'(창 14:2)로도 불리웠던 사해 남단, 요단 평지에 위치한 고대 가나안 성읍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해 서부의 연안 지대'를 보이셨다는 뜻이 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4)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창 12:7;13:15;17:8;29:13;35:12)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지금까지 약 600년간 약속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약속이 바로 눈앞에서 성취되려는 순간에 와있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영웅이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는 그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일차적 이유는 물론 므리바 물 사건(민 20:12) 때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31:2;32:51>.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보다 깊은 교훈을 던져 준다. 1)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자였던 바, 이는 율법이 결코 인간을 하늘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지 못함을 보여 준다. 2) 천국은 결코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 준다.


 
4-2. 모세의 죽음과 여호수아의 계승(5-9)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5-6). 여호와의 종(에베드 예호와)은 모세의 신실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즉 그는 애굽의 왕자로서 세상의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었다(히 11:24, 25). 모세는 생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랐지만, 죽을 때에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죽게되었다. '벧브올'(Beth-peor)은 모압의 신(神) 브올을 예배하던 산인데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 한때 이스라엘도 이곳에 거한 적이 있었으며(3:29;4:46), 후에는 르우벤 지파의 소유가 되었다(수 13:20). 많은 학자들은 모세가 장사된 모압 땅의 골짜기가 느보 산(비스가 산) 근처의 어느 한 골짜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Hengstenberg, 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장사하였기때문일 것이다. 유 1:9은 이러한 사실의 근거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어 모세의 시신(屍身)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곳에 장사하도록 명하셨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무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를 위험 때문이었을 것이다(Calvin, Stanley). 한편 혹자는 모세가 엘리야와 더불어 변화산상에 나타난 사실(마 17:3;막 9:4;눅 9:30)에 의거하여 모세가 부활, 에녹과 엘리야처럼 승천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Matthew Henry).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 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7). 이때는 B. C. 1407년 11월 말경으로 추정된다(1:3). 그런데 그가 120세를 향유했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왜냐하면 모세 자신의 관찰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0세였고 강건해야 80세였기 때문이다(시 90:10). 따라서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갈 나이인 80세에 하나님께 부름 받아 40년 동안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서 봉사하였다. 이삭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고(창 27:1), 야곱도 또한 마찬가지였다(창 48:10). 그러나 모세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사40:31).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8-9). 히브리인들의 장례 풍습에 의하면, 대개 죽은 자를 위한 애도(哀悼) 기간은 7일이었다(삼상 31:13). 그러나 아론과 모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30일간을 애곡하였는데(민 20:29), 이는 초대 이스라엘 대제사장과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예우(禮遇)였다다. 자신의 죽음을 고지(告知)한후 모세는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명령하셨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에게 안수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았다(31:14, 15;민 27:15-23). 따라서 모압 평지에서 베푼 모세의 안수(按手) 예식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지금까지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도자적 권한을 후임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두 넘긴다는 의미를 지닌 공식적인 위임(委任) 의식이었다. 따라서 이제 이러한 여호수아의 등장은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를 자연스럽게 이어 줄 뿐 아니라,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임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시사한다. '지혜의 신'이란 '지혜의 영'(the sprit  of wis dom)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덧입혀 주신 '참된 지혜' 곧 '호크마'를 가리킨다(32:29). 따라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그에게 지혜가 충만히 임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4-3. 모세의 비문(10-12)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10-12).

  모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에 있어서 특별한 선지자이자, 이스라엘 모든 선지자 중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하나님과 가까이 지냄에 있어서(10절)
  이것은 미리암의 문둥병 사건(민 12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즉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마치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까이 대면하여 말씀하셨으며(출 33:11), 자신의 영광스런 임재도 목격하게 하셨다(출 33:18-23). 또한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모세와 단 둘이서 오랜 시간 지냈다. 따라서 모세는 실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보았고 직접 체험한 자였다. 본문에서 '알다'(야다')는 말은 단지 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고, 깊고 오랜 교제를 통해 인격적, 경험적, 영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킨다(고전 8:3).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주 친밀하게 지내신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나타냄에 있어서(11-12절)
  하늘의 비상 대권을 위임받은 자 모세는 출애굽 시에 바로와의 대결에서 여호와의 10대 재앙을 이스라엘 목전에서 애굽에 베푼 자였다(출 7:14-11:10). "실로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로서 율법의 창시자요 중재자였다. 이 율법이 지속되는 한 이스라엘 중에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명예를 누릴 자가 있으니 곧 모세를 그 충실한 종으로 두고 있는 하나님 집의 장자(長子)로서(히 3:2-6), 우리의 대사도요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새 언약의 창시자 및 중보자가 되시는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적용 문제>
1.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2.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3.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세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지극히 작아진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 보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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