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그의 실수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들에게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모세의 첫 번째 설교와(1-4장), 두 번째 설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5-26장)는 신명기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생각해 본 내용은(5장-18장) 다음과 같습니다. 1) 강대한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 2) 약속의 땅을 차지한 후에 영적 자만에 빠지지 말 것. 3)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율법을 준수할 것. 4)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한 종교적인 규례들 5) 거룩한 백성을 살기 위한 영적, 정치적 규례들
오늘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마지막 부분인 (신 19장-26장)의 내용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율법 중에서 주로 이스라엘이 가정과 사회에서 거룩한 백성을 살기 위해 준수해야 할 내용들, 즉 "가정 및 사회적인 규정들"입니다.
ⅲ. 사회 법규(19:1-26:18)
1. 도피성, 경계, 및 위증에 대한 규정(19:1-21)
1-1. 도피성 규례(19:1-13) 본문에는 도피성 제도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 앞에서 무죄를 입증 받은 사람들이 은거할 수 있는 성을 여섯 개 허락해 주셨다. '부지중에' 이웃을 죽인 사람이 사면을 받는 것은, 악의가 없는 사람에게 형벌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두 친구가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도끼 자루가 빠져서 상대방을 죽인 경우와 같은 사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의로 죄를 짓고 그 사실을 변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재판을 맡은 사람들은 사실에 대해서 자세하고도 신중하게 조사해야만 한다. 만일 조사하다가 도피자가 평소에 죽은 자에 대하여 증오를 품고 있다가 그를 죽였다면 그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동기를 조사하여 그들이 과거에 불화나 분쟁이 없었는가를 알아보도록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조사 결과 만일 도피자가 고의로 살인한 것이 밝혀지면 장로들이 그를 체포하여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12). 그러면 보수자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돌로 맞아 죽게 될 것이다(13:9-10).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심판할 때에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13 절)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란 말씀(13 절)은 이스라엘의 법적 기관에 주신 말씀이고, 보수자(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법적인 기관에게 죄를 빙벌하여 공의를 세우라고 지시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지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만일 이 세상에 공의가 폐지된다면 억울함을 당한 자가 신원 받을 길이 없게 되어 불의가 더욱 더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것은 금지하셨다(레 19:18).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에게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셨다. 2. 재판관들은 신중하게 판단하여 죄 없는 자는 형벌을 면하게 해주고, 죄 지은 자는 형벌을 피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3. 그러나 개개인들은 스스로 심판하지 말고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1-2. 이웃의 경계표 변경금지(19:14) 자유주의 학자들은 본문에서 '선인'(先人)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점을 들어 본서의 기록 연대를 가나안 정복 및 분할 사건보다 훨씬 이후인 왕정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주장한다(Von Rad, Driver).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토지를 분배한 것은 여호수아 때이므로, 본 절에서 '선인'이라는 말이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서의 저자는 분명히 여호수아보다 훨씬 이후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본서는 어디까지나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게 될 때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1절). 따라서 본 절의 '선인'이라는 말은 본서가 기록된 때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 세대를 가리키는 일 뿐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본서의 저자가 모세임을 거듭 확증해 준다.
'경계표'('게불')란 토지 등기(登記) 제도가 채 발달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전답(田沓)이나 택지(宅地)의 구획, 또는 행정 구역 등을 구분, 표시하기 위하여 글을 새겨 세워 놓은 돌(landmark)을 말한다. 이러한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곧 남의 토지를 사기 혹은 강탈하는 범죄 행위였으며, 근대 법치국가가 성립되기 전에는 이와 같은 행위가 은연중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십계명 중 제 8계명(출20:15)과 10계명(출20:17)을 어기는 범죄 행위에 해당되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27:17; 잠 22:28; 23:10; 호5:10). 한편 당시 이방 국가에서도 '경계표'(지계석)는 극히 존중되어 그 임의 이동을 엄히 금지 시켰는데, 후일 로마 제국은 그러한 범법 행위를 자행한 자에 대해서 극형으로 다스렸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Pentateuch, Vol. I-iii. p. 339).
이와 같은 교훈은 사회 생활 각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가정, 학교, 직장, 기타 분야에 대한 권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따라서 강제로 남에 의해 침해될 수 없다. 정상적인 국가들은 모두 다 이것이 시행되고 있다. 이 말은 이미 분배된 남의 소유를 불법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분정해 주신 기업이나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는 것을 심히 가증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의 기업을 귀중히 여기며, 또 자기에게 주어진 기업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분량을 넘어서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소유하려는 탐심을 금하셨다(제10계명).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1-3. 위증에 대한 형벌(19:14-21)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소가 제기될 경우에 재판관들이 그것을 면밀히 검토해서 죄가 입증되면 엄격하게 보복의 법칙을 적용하라고 지시하셨다.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서 재판관들 뿐 아니라 제사장들도 개입된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 문제를 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신중하게 조사하라는 뜻이다. 은밀한 죄는 세밀하게 조사하지 않을 경우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악'('아온')이란 말은 '뒤집다', '굽게 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곧 율법에서 이탈된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의 증인은 오늘날의 법률에서 말하는 '증인'의 개념과는 약간 다르다. 현대의 증인은 자기가 보고들은 사실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진술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에드)은 피고의 처벌을 바라고 범죄 사실을 고발하는 고발 자의 역할을 했다(13:6-11).
하나님께서는 위증 자에 대해 그가 상대방을 해하려던 것과 같은 형벌을 받게 하셨다. 또한 위증(僞證)과 무고(誣告)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회는 최소한 2인 이상의 증인(證人)을 요구했다(17:6; 민 35:30). 여기서 '2'라는 숫자는 단순히 수리적(數理的)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 또는 '충분한 증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2인 이상의 증인 채택 제도는 '확실하고도 충분한 사실'(査實) 심리를 하기 위한 제도이다(13:14;17:4). 여기서 '제하다'('바아르')는 말은 '태우다', '소비하다', '먹어치우다'란 뜻으로, 곧 불로 깨끗이 소각시키거나 혹은 먹어 치움으로써 흔적조차 없애는 것을 뜻한다. 이는 거룩한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떠한 악의 모양이라도 잔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교훈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엄히 처벌할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가 되어서 두려워하여 이런 일을 다시 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동해 보복률'에 근거하여 범죄자에게 엄격히 법 적용을 시키는 이유가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처벌을 통해 범죄예방 효과를 얻자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율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관용과 용서를 베풀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공의의 실현과 질서의 유지 및 범죄의 예방을 위해 엄격히 법을 집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피의 보복법'(창9:6)이 살인 행위에 관한 처벌법이라면, '동해 보복법'은 신체 상해의 경우를 대비한 처벌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법 중 구약 이외에 동해 보복법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법전은 함무라비(Hammurabi) 법전이다. 한편 보복률 사상은 남에게 치유될 수 없는 영구한 상해(像害)를 입힌 자는 그 대가를 그대로 되돌려 받아야만 한다는 '보복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형법이 발달되지 못한 고대 국가에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복률이 필요악(必要惡)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후 역사가 발달함에 따라 이 법은 개인의 인권과 국가 인력의 낭비라는 이유에서 점차 개선되어 신체적인 보복 대신 금전적 보상 제도로 대체되었다(Josephus). 한편 구약에서 동해 보복법 규율이 언급된 곳은 본 절과 (출 21:23-25; 레 24:17-21) 등 세 곳이다.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동해 보복법의 근본 원리는 감정에 치우쳐 죄 값 이상의 앙갚음을 함으로써 계속 파생될 더 큰 보복의 악순환을 미연에 방지코자 했던 질서와 보호의 정신이었다. 따라서 훗날 이러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성취하고(마5:17) 승화시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즉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는 인간의 단순 논리를 초월하여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랑과 희생의 법'을 가르치셨다(마5:28-44).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 보복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말미암아 '오른 뺨을 치면 왼뺨까지도 돌려대라'는 원수 사랑의 법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용서의 법이 곧,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 정신이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거짓 증거를 통하여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금지 하셨으며, 이러한 일에 대한 여부는 철저히 조사하여 반드시 처벌을 하도록 하셨다. 2. 거짓으로 남의 것을 빼앗거나 죄 없는 자들을 유죄로 몰아 붙이는 일은 동해 보복의 원리에 의해 처리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반대로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남을 잘 되게 하고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신다.
2. 전쟁에 대한 규례(20:1-20)
2-1. 전쟁에서 제사장의 역할(1-4)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나라로서 지켜야 할 전쟁에 대한 원칙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신정국가의 공의는 나라 안의 형사법의 실시에서 뿐 아니라, 이스라엘 국경 너머 나라와의 전쟁 수행과정에 있어서도 지켜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할 때에도 제사장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2-). 본문에서 말하는 제사장은 제사직만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과는 달리 비느하스(민31:6)처럼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에 참여하는 제사장을 말한다. 이는 오늘날의 군목(軍牧)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대 랍비들은 이를 가리켜 특별히 '전쟁을 위해 기름 부음 받은 자'(메쉬아흐 함밀하마)라고 불렀으며, 대제사장 다음 가는 높은 작위를 주었다(Talmud, Keil). 이들의 일은 전쟁터에 나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3,4절) 용기를 북돋워주는 일이었다(Pulpit).
이스라엘의 전쟁은 자신의 영토확장이나 사적인 이권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의를 위해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원칙상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었다(1,4,13).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대적은 항상 하나님 나라의 원수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편에 서셨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대적의 군대가 많고 강해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겁내다'('라카크')는 말은 원래 '부드럽게 되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어떤 현상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상태를 말하며(왕하 22:19), '두려워하다'('야레')는 말은 어떤 대상에게 압도되어 그를 숭상할 정도로 두려움을 갖는 것을 말한다. 또한 떨다'('하파즈')는 말은 갑작스레 나타난 대상을 보고서 갖는 순간적인 공포를 의미하며, '놀라다'('아라츠')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마음이 꺾이는 상태를 가리킨다(NIV).
2-2. 전쟁 면제자에 대한 규례(5-9) 둘째로 여호와의 군대는 전적으로 그 일에 전심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전심하지 못할 사람들을 제외시키셨다. 본문에서 제시된 군대 복무 면제 자들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새 집을 건축하고 미처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5절). 2) 포도원을 만들고 미처 그 소산을 먹어 보지 못한 자(6절). 3) 여자와 약혼하고 미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못한 자(7절). 4) 그리고 겁이나 두려움이 많은 자들은 아예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8절).
한마디로 이들 모두는 전쟁을 위해 전력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수효에 관계없이 자원자들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이스라엘의 전쟁에서의 승패는 사람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이스라엘은 군사들의 수효가 적을지라도 문제도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찾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기드온의 군대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삿 7장).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예수님께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다(눅 9:62, 마8:20-22)
2-3. 일반적인 전쟁 규례(10-15) 하나님께서 주신 전쟁에 대한 세 번째 규례는 평화의 원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위해서 인간들을 심판하시기는 하지만 아무도 형벌 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뉘우치고 돌아오면 항상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대적을 치기 위하여 그 성에 갔을 때에 먼저 그들에게 전쟁을 하지 말고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라고 하셨다. 만일 거기에 적국이 화친을 청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말고 그들을 용서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제의를 거절할 때에는 그들을 치라고 명령하셨다.
2-4.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규례(16-18)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만은 모두 다 죽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멸종을 선언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민족들이 멸절 되어야 하는 이유는 정당했다. '기업'이란 말은 '물려받다'는 말의 '나할'에서 파생된 말로 '유산', '상속물','점유물' 등을 뜻한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언약(창12:7)을 따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유산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하신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1) 가나안 족속은 갖가지 극심한 죄악으로 인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멸망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작정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9:4,5; 창 15:16). 2) 가나안 족속은 특히 가증한 우상 숭배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둘 경우,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3) 가나안 땅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거룩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세우기로 작정한 성별(聖別)된 곳으로서, 그 곳에는 어떠한 죄악의 요소도 남겨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2-5. 필요 없는 자연 파괴 금지(19-20) 이스라엘은 성읍을 진멸시키기 위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필요 이상의 파괴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열기 속에서도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것을 금지하셨다. 비록 전쟁에 있어서는 노략질 강탈이 합법적이지만,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서도 할 수 있는 한 미래를 위해 황폐하지 않도록 배려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원수들로부터 물건은 빼앗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나무는 오래 있어야 열매를 맺기 때문에 후손을 위해서 해치지 말고 남겨두라고 지시하셨던 것이다. 또한 아무에게나 공격받도록 노출된 나무를 마치 사람을 상대하여 싸우듯이 싸워서는 안된다. '마초르'는 포위보다는 방벽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하는 나무를 칼을 들고 가서 힘 자랑하는 사람들의 우매와 광기를 간접적으로 꾸짖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과실나무가 아닌 것은 잘라서 방벽, 방어 울타리 및 포위용 기구를 만들 것을 허용하되, 일시적인 전쟁의 열기 때문에 그 땅의 과목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 하지만 필요할 경우에는 과실 나무도 베는 것을 완전히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증오와 분노의 충동에 이끌려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량하게 만드는 것을 견제하고 있을 뿐이다(칼빈).
< 교 훈 > 1.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쟁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2.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나 의를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편에 있기 때문에 대적들의 숫자나 강함을 보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3.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있어서 전심을 다해 헌신하는 자들을 원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원하는 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4. 하나님께서는 죄인도 형벌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끝내 놓쳐버리고 완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공의대로 처벌하신다. 5.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전쟁에 있어서도 필요 없는 자연 훼손을 금하셨다.
3. 다섯 가지 율례들(21:1-23)
3-1. 범인을 모르는 시체가 발견되었을 경우의 속죄법(1-9)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살인 사건의 경우 이방 국가에서는 영구 미결 사건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본문에는 실제 살인자를 찾아서 처단하는 과정은 나타나지 않고, 인근 지역의 장로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는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살인 사건을 의식상의 절차로 마무리 지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미래에 살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반드시 실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자켄)는 각 지파 및 성읍에서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아 모든 일에 대표자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이며, '재판장'(솨파트)은 당시 백성들의 분쟁을 맡아 처리하던 행정관인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및 십부장을 가리키는데(출 18:25,26), 이들은 유사시 군대 장교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한편 이들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의 인근 성읍에서 파견되어 졌다(Josephus). 이것은 물론 주검과 제일 가까운 성읍에 살인자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성읍이 피살된 시체로 인하여 가장 많이 부정함을 입었음과, 또한 피 흘린 죄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농후함을 의미할 뿐이다(Keil). 그러므로 그 성읍은 살인자의 죄책(罪責)을 책임지고 제거 할 대속(代贖)의 의무가 있었다(1-2).
피 흘린 죄를 위한 대속(大贖) 제물은 암송아지였다.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란 아직 다른 일을 해보지 않은 '흠 없고 순전한' 송아지를 의미한다. 이 송아지는 죄인들을 위해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히 4:15; 벧전 2:22-25). 물이 흐르는 좁은 골짜기에서(1:24; 수 13:16) 암송아지를 죽인 것은 살인자의 죄악(罪惡)을 흐르는 물에 떠내려보내는 것을 의미한다(Lange). 그리고 인간의 손으로 경작할 수 없는 험한 골짜기에서 송아지를 잡아 피를 흘리게 한 것은, 피가 인간이 경작할 때에 다시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송아지의 목을 꺾으라고 한 것은 대속 제물인 송아지의 피를 흘리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죄를 속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이다(히 9:22). 이와 같이 송아지의 목을 꺾어 피 흘려 죽임은,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에 대한 처형의 상징이었다(Keil). 이것은 또한 "만약 살인자가 잡힐 경우 송아지에게 행한 대로 취급하겠다는 하나의 엄숙한 선언이기도 하다"(3-4) 레위 자손들이 이곳에 입회하게 된 것은 속죄제에 대한 의식과 그 사건에 대한 재판장으로 참관한 것이다. 그들은 인근지역 장로들의 속죄의식과 무죄를 입증하는 의식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5).
엄숙한 손씻는 의식은 그들이 죄가 없고 깨끗하다고 항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죄를 비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은 것은 그들의 무관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간 때문에 온 백성이 오염되었듯이 이 한가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더 확대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장로들은 다른 사람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빌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이 이 속죄 의식을 제대로 지킬 경우 그 죄를 그들에게 전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암송아지 한 마리로 화가 풀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너는 피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백성들이 살인을 묵과하면, 백성들에게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며,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냄새를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로들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고백하게" 되어있었는데, 공동 번역은 '암송아지 위에'를 '암송아지에 대고'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로써는 어떠한 식으로 손을 씻었는지 분명치 않다. 아마 암송아지 위에 물그릇을 두고 거기에 손을 씻은 것 같다. 장로는 한 성읍을 대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대속(代贖) 죽음을 당한 암송아지의 주검 위에 손을 씻은 것은 자신의 성읍이 피 흘린 일에 대하여 무죄함을 선포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정직한'에 해당하는 '야솨르'는'기뻐하다', '공평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기뻐하는 일'로 번역함이 더 낫다. 이와 같이 하여 살인자를 모를 경우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순결한 암송아지 의식'(2-8절)을 통하여 무죄한 자를 피 흘리게 한 죄를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으로 비록 죄사함 받았다고 하여 실제 살인자의 죄 책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이러한 의식을 치른 후에 살인자가 잡혔을 경우 그는 살인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7-9).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요구하신다. 2. 세상에서 죄를 지은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된다. 3. 우리는 공동체적인 죄의 짐을 담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이 지은 죄이지만 그것을 공동체의 죄로 보시며, 공동체에서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그 죄를 공동체에 물으신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속한 단체(가정, 교회, 국가, 세상)에 대한 죄를 위해 기도하고 또 이러한 죄의 척결을 위해 싸워야 한다. 4. 인류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 앞에서 처형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피로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씻어주시도록 우리가 속한 단체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3-2. 전쟁에서 노예로 얻은 아내에 대한 대우(10-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로 중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취할 경우에 정당한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도 외국 여자가 먼저 자신의 국적을 포기하기 전에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외국 여자에게 머리를 자르고 손톱을 깎으며 의복을 갈아입고 한 달 동안 자기 부친과 가족을 두고 애통하게 한 것은 이전 국적과 생활을 포기하고 이스라엘로 귀화하라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대개 회개와 속죄를 상징하며(레14:9; 욥 1:20), 이는 종종 성결(聖潔) 예식으로도 사용되었다(민 6:18,19). 포로의 의복을 벗는 것은 그녀가 포로의 몸에서 자유의 몸으로, 이방인의 신분에서 이스라엘인의 신분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3). 하나님께서 신앙에서 벗어나는 외국인들을 아내로 삼지 못하게 하신 것은 결코 공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올무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칼빈).
하나님께서는 포로 되어 결혼한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라고 지시하셨다. 만일 그 남편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을 때에는 그녀의 인권을 보호해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하페츠'의 정확한 의미는 '마음에 들다', '좋아하다', '원하다'로서, 공동 번역은 본 절을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거든'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우 그녀를 매매할 수 있는 노예처럼 대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일단 그녀를 아내로 취한 이상, 그녀에게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욕보이다'는 말은 '모독하다', '괴롭히다', '강탈하다' 라는 뜻으로서,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거나 취하려 해놓고도 다시 버리므로 그녀에게 이중적인 상처를 입힌 것을 의미한다.
< 교 훈 > 1.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정결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원하신다. 2. 이방 여인과 결혼할 경우에는 결코 그녀를 따라가지 말고 그녀를 이스라엘인으로 귀화 시켜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한 옷(행실)을 입어야 한다. 3. 성도들은 언약을 맺은 후에 그가 천한 위치에 있게되어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일 그것을 어겨서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3-3. 장자의 권리(15-17) 앞의 규례가 전쟁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이스라엘 주인의 변덕에 대하여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본문의 규례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버지의 권리를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한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속한 것을 저 아들에게 양도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만큼, 이것은 각자의 권리는 본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질로 삼는 제 8계명의 일부요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아버지가 다른 아들을 장자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두 말 할 여지없이 도둑질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을 경우, 장자를 모욕하는 이런 부자연스런 처사는 그리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제정하는 이유는 일부 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에서 남편의 마음이 둘째 아내에게 기울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첫째 아내만을 지극히 사랑했다면 그녀로서 만족했을 것이며 둘째 아내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첫째 아내를 싫어하고 둘째 아내를 둘 경우에 둘째 아내의 감언에 녹아, 첫 번째 결혼에서 난 자식들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 마음대로 장자권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장자권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축복을 임의로 밖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장자권은 부모의 상속의 두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장자는 아버지의 으뜸가는 영광이며 부모를 모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의 상속권을 박탈할 이유가 정당했을 때는, 그 자리에 다른 후계자를 대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야곱이 르우벤에게 상속을 주지 않은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창 49:4). 그녀를 미움받는 아내라고 부르는 것은, 남편이 그녀의 원수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그녀를 가장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욕이란 증오와 같은 것이므로 부부의 애정을 나누지 않는 자는 원수로 불리우기 마련이다."(칼빈)
< 교 훈 > 1.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권리가 남용되지 않고 공정하게 사용되시기를 원하신다. 2.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자녀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인격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한다.
3-4. 패역한 아들에 대한 처벌(18-21) 앞의 것이 아버지의 권리가 남용되는 것을 제한한 것이라면, 여기에 제시된 것은 반대로 아들이 그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패역한 짓을 할 때에, 처리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패역한 아들에 대한 처벌이 매우 중한데, 그 이유는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고, 모든 인간 통치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금하지만, 자녀가 부모에게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경우도 처벌 하도록 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자녀들을 처벌하도록 명하셨다.
1)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18(상))-부모에게 오만 불손하며 그 권위를 무시하는 불효자. 2)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는 자(18(하))-끝까지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반역하는 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정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더욱이 신정(神政) 국가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십계명 속에서도 보장된(출20:1-2) 인륜(人律)의 제1법칙으로서,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5:16). 따라서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인륜을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짓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법질서를 파괴하는 신성 모독행위이다. 3) 방탕하여 술에 담긴 자(20(하))-'방탕하다'의 기본 동사인 '잘랄'은 '떨다', '흔들리다'란 의미인데(사64:1), 이는 곧 도덕적으로 비천하여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해이한 모습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술에 잠긴 자'는 단어의 히브리어 기본형 '사바'는 '들이키다','비틀거리다'란 뜻으로서, 곧 술로 고주망태가 되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추태를 부리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술의 폐해가 심했으며, 술이 도덕적인 타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창 9:21; 잠 31:5).
그런데 이런 아들을 처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부모가 먼저 그를 재판정에 이끌어 가게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공공생활 중심지인 성문(창19:1)에서 공개적으로 아들의 잘못을 재판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읍의 장로'는 한 성읍의 주민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들은 백성들간에 분쟁이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 그 사건에 대한 재판을 관장하게 되어 있었다. 죄인을 처벌하는 일은 비록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라 하여도, 개인에게 맡겨지지 않고, 공적 재판을 통해서 처벌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녀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셨는데, 패역한 아들의 죄악은 비단 그 가정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이므로 단호히 이를 징벌하여 이스라엘의 성결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심한 형벌을 공개적으로 내린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계가 되게 하여 다시는 이런 일을 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아버지나 어머니의 증거에 따라 결정하되, 그것을 공적으로 알려서 아무도 한 개인의 뜻에 따라 죽게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자녀들을 처벌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 친구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러한 절차를 규정해 놓은 목적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의 자식을 데리고 와서 재판관들 앞에서 그의 어쩔 수 없는 외고집을 호소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바로 처형이 뒤따라 기록되고 있지만 이 범죄자가 돌로 맞아 죽기 전에 재판관들은 그에 대한 판결을 내렸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판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만약에 아들이 무죄할 경우 그 죄악의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변호를 받기도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거나, 아버지가 계모의 등살에 못 이겨 아들을 고발하거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공연히 아들을 죽이기로 공모할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돌 매를 맞아 죽는 판국에 먼저 그는 심문을 받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공적인 장소에 붙들려 오게되고, 거기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문의 마지막에 본 형벌의 두 가지 목적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죄악을 제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죄를 범한 자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칼빈).
< 교 훈 > 1.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완악하며, 거역하는 아들이나, 방탕하고 술에 중독 된 자녀들을 공개적인 재판에 의하여 처벌할 것을 명하셨다. 이는 부모의 권위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설명해 주는 일로서, 오늘날과 같이 부모의 권위에 대하여 순종치 않는 세대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는 말이다.
3-5. 교수형 당한 자들의 장례식(22-23) 여기에서는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주검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이었다(민 6:11). 그러므로 모든 주검은 어떤 형태로든 거룩하고 정결한 땅 가나안에서 계속 방치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가증한 범죄로 인하여 처형당한 시체는 당일 땅 속에 묻어 그 부정함을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깨끗이 제거하여야 했다(수 8:29; 10:26,27). 하늘과 땅 가운데 매달려 있는 시체는 인간의 저주는 물론 하나님의 저주 하에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죄인을 위해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이었다.
< 교 훈 > 1. 하나님께서는 저주받아 죽은 자의 시체를 그 날로 처리해서 그 시체로 인해 거룩한 이스라엘 땅을 더럽힐 수 없게 하셨다. 2.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극악한 저주의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죄악과 모든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4. 사랑, 자연 질서 준수, 성적 순결에 대한 규례들(22:1-30)
4-1. 이웃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1-4) 이스라엘은 주로 가축들을 방목(放牧)을 했기 때문에 양들이 무리를 이탈하여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삼상 9:3).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 본 체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이 말은 이웃의 곤경이나 손해를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길 잃다'(나다호)는 말은 본래 '미혹되다'는 뜻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발생하는 방황을 말한다. 성경은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을 명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성도들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이 곧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약 4:17).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돌려주라고 한 명령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모세 법전은 이처럼 적극적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까지도 성문법(成文法)으로 명시하고 있다.
만일 잃은 양의 주인을 알지 못할 때에는 그들을 집으로 끌고 가서, 보관하였다가 그 주인을 찾게되면 그때에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이 말은 가축의 주인을 모를 때에라도 가능한 원주인에게 돌려 줄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습득자는 대중이 모여드는 공공 장소에서 그 물건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너 차례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그 결과 원주인이 나타났을 경우, 그에게 습득물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해도 결국 원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원칙상 습득자가 그 물건을 소유할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 여기서 '나귀'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하고, '의복'은 생명이 없는 모든 물건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것들은 '이웃의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귀나 소는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며 수레를 끌고 기타 농사일에 사용되는 모든 가축을 대표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 적 용 > 1.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본문의 예는 그 정신과 원리가 잘 나타나있는 규례이다. 2. 하나님은 부정적으로 죄를 짓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선을 행할 줄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고 한다. 3. 하나님은 이웃들이 서로의 생명과 그 밖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관심을 갖고 서로 도우며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만일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4-2. 자연 질서 준수에 대한 규례들(5-12)
<사례 1> 남녀의 의복을 바꾸어 입지 말라(5). 남녀가 의도적으로 의복을 바꿔 입는 일은 남녀를 구분하여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이처럼 남녀가 의복을 바꿔 입는 풍습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는 없던 것으로 후대 가나안 인들의 풍습에서 영향받은 것이라 한다(Spencer). 여기에서 말하는 의복(켈리)은 '준비하다'는 뜻의 '카라'에서 파생된 말로, 곧 '준비된 어떤 것'을 의미하며 이 말은 단순히 옷뿐만 아니라 각종 장신구(accessory)나 기구, 그릇 따위 등의 모든 기물을 일컫는 단어이다. 또한 '가증하다'에 해당하는 '토에바'는 특히 우상 숭배 행위와 관련하여 몹시 혐오스러운 것, 구역질나는 것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서(7:26;18:9),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우상숭배만큼이나 싫어하고 역겨워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적 용> 1. 하나님께서는 남녀가 창조 원칙을 따라서 경건하고 구별되게 살기를 원하신다. 2. 무엇에든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리를 바꾸거나 거스리는 일은 악한 일이다.
<사례 2> 어미 새와 알을 동시에 취하지 말라.(6-7) 이것은 새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새를 지으신 것은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새에 대하여 잔인하게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으니, 곧, 이와 같은 법규는 사람들에게 자비의 덕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자연계를 정복하고 주관할 수 있는 특권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 할지라도(창 1:28),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근거하여 자연계를 관리하고 보전해야 한다(출 23:19; 레 22:18). 그러므로 본 규례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 두 가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의거해 살아가는 인간은 그 은혜를 또한 자연계에 돌릴 줄 알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인해 동물계에 형성되어 있는 어미와 자식간의 사랑 어린 애정 관계는 신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연계에 대한 자비를 베풀 때에 부모 공경을 할 때에 주시겠다고 하셨던 축복인 장수의 축복(5:16;출20:12)을 약속하셨다. 자연계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곧바로 인간의 복지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계를 잘 돌볼 때에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피조물인 우리들을 자비롭게 대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연계에 대하여 사랑과 애정으로 대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계에 대하여 자비롭게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비롭게 대해 주신다. 2.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거나 자연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와 같이 자연을 잘 돌보아야 한다.
<사례 3> 집을 건축할 때의 유의사항(8-). 팔레스타인의 가옥은 대개 지붕이 슬라브 형식으로 평평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지붕은 종종 휴식이나 취침, 또는 기도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삼하 11:2; 느 8:16; 행 10:9). 따라서 자칫 실수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떨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라고 지시하셨다. 결국 이 규례는 자신의 사소한 부주의나 태만, 또는 실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때 난간의 높이는 대략 1m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매우 귀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매사에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귀중히 여기시며, 우리가 부주의하여 남의 생명에 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피의 대가를 우리에게서 찾으신다.
<사례 4> 혼잡하게 하는 것의 금지(9-11) 하나님께서는 한 밭에 두 종자를 함께 뿌리는 것이나. 소와 나귀를 함께 겨리 하는 일이나, 양털과 베실을 섞어서 짠 옷을 입지 못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둘 다 얻기 위하여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둘 모두가 혼잡케 되어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상태가 순수하게 유지되길 원하신다. 이러한 원리는 영적으로 적용하면, 성별(聖別)된 공동체 이스라엘만이 가지고 있는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생활 속에서 원형(原型) 그대로 유지시켜 나가되, 이방의 이교(異敎)적 풍습과 타협하여 그 신앙의 순수성이 혼합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레 19:19). 혹자는 이러한 풍습은 고대 가나안인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것이라 한다(Lange). 또한 소와 나귀는 보폭과 힘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짐승을 한 멍에에 묶는다면 상당한 부조화를 초래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신자가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고전 7:14-16).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유지하시기를 원하신다. 2. 신자는 불신자와 함께 결혼하거나 귀신을 섬기는 이방인과 타협하여 같이 일을 하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사례 5> 겉옷에 술을 만들라.(12) 히브리인들의 겉옷은 대개 통으로 되어있고, 그 앞뒷면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네 개의 모서리(귀)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네 모서리(귀)에 '술'(fringes)을 달도록 지시하셨다. 이처럼 겉옷 네 귀에 술을 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일종의 의식(儀式) 행위였다. 왜냐하면 겉옷에 다는 '술'은 한 눈에 자신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임을 나타내 주며, 또한 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민 15:38-40). 한편 후대 유대인들은 8가닥의 실을 5개의 매듭으로 묶어 이 술을 만들었는데, 이는 13이라는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각 문자마다 고유 숫자(number)를 갖고 있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술'을 뜻하는 '치치트'는 그 합계 수치가 600이다. 그러므로 '술'의 모양과 '술'이란 문자가 지닌 상징적 숫자를 합한 수는 모세 율법의 총 조항수인 613과 일치한다. 이것은 분명 그 옷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맞춘 것임에 틀림없다. 훗날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술 의식'의 근본 정신을 망각한 채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옷 술을 크게 만들어 달고 다님으로 예수의 책망을 면치 못했다(마23:5).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의복의 제작에 있어서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표시를 달라고 함으로서, 매사에 여호와를 경외할 것을 잊지 않게 되기를 원하신다.
4-3. 성적 순결에 관한 규례들(13-30)
<사례 1> 처녀의 순결 확인에 대한 규례(13-21) 이 조항 역시 정절을 높이 평가하는 대목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를 모두 금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남편이 정숙하고 무죄한 여자를 부당하게 모함하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처녀가 몸을 더렵혀놓고 처녀인 것처럼 꾸며대는 경우이다. 또한 이것은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을 보살피는 데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남편이 고의적으로 자기 아내에게 누명을 씌워 이혼하려는 거짓 핑계를 댄다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호색 적인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싫어하여 갖은 수단을 다해 아내를 제거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을 바로잡아 불 경건하고 포악한 남편들의 중상모략으로부터 여자의 정직성을 보호하는 일은 꼭 필요했다. 반면에 이 규정은 정직한 남편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속인 창녀를 억지로 품고 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마음의 사람들이 그런 악명을 묵묵히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훌륭한 예방책이 한 가지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한 여자가 남편의 비난을 받을 경우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경우에는 남편은 아내가 남에게 더러워진 만큼 그녀를 자기 집에 억지로 데리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처녀의 표란 신혼 첫 날 밤에 사용한 이부자리로 장차 순결의 증거로 삼기 위해 보관하고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들은 이것을 순결하고 정숙한 처녀를 변호하기 위해 증인들 앞에 증거물로 들춰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 부모들의 말만을 증거로 내세우게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많은 재량권을 허용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것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은 당시 잘 알려진 습관이었기 때문이다(칼빈).
이런 경우에 중상모략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처벌이 따르고 있다. 첫째는 거짓으로 고소한 사람에게 매를 때리는 것이요(40대 까지 때릴 수 있었다), 둘째는 장인에게 은을 벌금으로 바치는 것이며, 셋째는 평생 그 여자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평생 버리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처녀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젊은 여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정조를 잘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행하게 여자를 포악한 남편의 지배 아래서 평생 살도록 한 것은 나쁘지 않느냐고 반대한다면, 이렇게 된 것은 그녀를 풀어 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록 남자들이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가장 오랜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원칙적으로 공정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려는 남편의 꾀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칼빈). 당시 성적(性的) 범죄가 이처럼 엄중하게 취급된 까닭은 가나안 족속들의 성도덕이 매우 문란했기 때문이다(레 18:1-3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방의 문란한 성 풍속에 물들지 않도록 이같이 엄한 규례를 세우셨던 것이다. 특히 '돌 처형 법'을 한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경각심과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레 20:17; 민 15:35,36; 13:10; 17:5). 하나님께서는 남녀간의 혼인 및 부부간의 순결을 중요시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순결을 요구하셨다.
<사례 2> 유부녀와의 통간(22) 하나님께서 간통에 대해서 사형을 내리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성결케 하게 하신 언약인 만큼, 이것을 더럽히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부부간의 믿음이란 너무도 신성한 것이어서 이것에 대한 침해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남자의 품에서 그의 생명과 다름없는, 아니 그의 반쪽인 아내를 낚아채는 일은 무지하고 포악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간음 자를 우는 말에 비교하고 있는데(렘 5:8), 이는 그런 색정의 지배를 받는 남자는 짐승과 같은 상태로 타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만일 어떤 남자가 창녀와 관계함으로써 자기 아내와의 신의를 파괴하는 것은 사형 죄가 아니지만, 어떤 남자가 비록 독신일지라도 남의 아내와 간통할 경우에는 그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남편이 크게 상처를 입을 뿐 아니라, 불명예가 그 자손에게까지 미치며, 적자 대신에 불의의 자식이 들어서는가 하면, 상속이 타인에게 넘어가 사생아가 불법적으로 가족의 이름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있기 전부터 이방인들은 이것 때문에 간통을 엄하게 처벌했다. 유다와 다말의 기사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창 38:14). 뿐만 아니라 간통의 처벌은 이방인 세계에서 시행되는 보편적인 법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도 삼가고 있는 일들을 행한다는 것은 더 없이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법정에서는 부부간의 불성실이 동일하게 처벌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쌍방이 모두 서로에게 얽매어 있는 만큼, 쌍방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따라서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 7:4-5)"는 바울의 선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효력을 발휘한다(칼빈). 이스라엘은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택함 받은 거룩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열방과는 구별되는 순수성, 즉 순결성을 보존해야 했다. 따라서 만일 이스라엘 중에 이러한 공동체의 순결성을 깨뜨리는 자가 있다면,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해서 가차없이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공동체의 순결성을 계속 유지시켜야 했다.
<사례 3> 약혼한 여자가 성폭행 당했을 때의 규례(23-27)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처녀가 약혼하면 결혼한 여자와 동일하게 간주되었다(20:7). 따라서 약혼하기 전에 행한 불미스러운 일(28,29절)보다 약혼 이후의 범죄가 더 큰 중벌로 다스려졌다(Keil). 남녀가 둘 다 자의적(自意的)으로 간음 행위를 한 경우에는 둘 다 처벌을 받았다. 공동 번역은 이것이 '자의적인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성읍 안에서 만나 같이 잤을 경우'라고 번역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충분히 요청할 수 있는 상황 중에서도 여자가 침묵하였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소극적이나마 승낙한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녀는 이미 약혼한 여자이면서도 혼인의 순결을 스스로 저버렸으니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레 20:20). 약혼한 여자를 범하는 것은 십계명 중 제 7계명(간음죄, 5:18; 출 20:14)과 10계명(이웃의 아내를 탐한 죄, 5:21; 출 20:17)을 동시에 어긴 행위이니 만큼 가중 처벌되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있어서 순결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자 또한 그들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殿)이기 때문이다(고전3:16,17).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을 피하라...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고 엄히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강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들'은 여자가 아무리 소리쳐도 듣고서 달려와 구원해 줄 사람이 없는 장소이다. 따라서 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혹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상황을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 여자가 강간당한 것은 자의(自意)가 아니라 순전히 타의(他意)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규례는 모든 법의 적용에 있어서 단순히 나타난 결과만을 갖고서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게 된 동기까지 십분 고려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구절이다. 즉 본 절은 여자가 들에서 강간을 당한 경우, 그것이 불가항력적 상황이었는지를 조사하여, 사실로 판명되면 연약한 여자의 한계를 인정해 주는 것이 근본 법 정신임을 보여준다. 비단 들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여자의 한계 상 강제적으로 강간을 당했을 경우, 그 처녀에게는 책임을 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처럼 모세 율법은 모든 범죄의 단호한 척결과 인간 생명의 존중이라는 두 목적이 서로 상치(相馳)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고 있다.
<사례 4>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가 강간당한 경우(28-29) 여기서는 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처녀와 함께 통간한 사건에 대한 처리 방법을 말해준다. 그들은 사형하지 않고 서로 결혼하도록 특별한 수속을 밟게 하셨다. 본문은 한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욕보인 경우, 두 사람이 법적 처벌은 받지 아니하였으나, 남자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는 규례이다. 즉 남자는 결혼 지불금 조로 은 50세겔을 처가에 지불한 후, 그 처녀를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이때 남자는 그 여자가 부정(不貞)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평생 그녀를 내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규례는 결코 혼전 성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는 당시대의 저급한 성 윤리를 충분히 감안한 상태에서 여자에 대한 남자의 책임의식을 강조하고, 또한 두 남녀를 긍휼히 여겨 적극적으로 그들의 앞날을 위한 해결책을 모색해 주려는 규례일 뿐이다. 그 해결책이란 곧 죽음이 면제된 두 남녀로 하여금 합법적인 결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둘 다 성적 순결을 지키며 살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다. 여기서 '은 오십 세겔'은 처녀를 범한 남자가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주는 결혼 지참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처녀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내주기를 거절하면, 그 남자는 배상금 조로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한 후, 결혼은 포기해야 했다(출 22:16,17).
<사례 5> 아비의 후실을 취하지 말라(30) 계모(繼母)와의 성 관계 및 혼인을 금한 규례이다. 이런 근친상간의 범죄는 인간의 모든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동물적인 행위이므로, 이스라엘 중에서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다(레 18:6-18; 20:11-21). 한편 성경에 나타난 바 아비의 하체를 드러낸 경우로는 야곱의 아들 르우벤의 경우(창35:22)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경우(삼하16:22)가 있다. 모세는 여기서 계모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 한가지 사실을 들어 지금까지 상세하게 언급했던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기억시켜 주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한 가지 죄만 금한다고 해서 다른 죄는 저질러도 된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다. "아버지의 치마를 벗기지 말라"는 표현은 의붓아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계모에게 들어 가게되면 아버지에게 욕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마 함이 자기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낸 죄를 두고 빗대어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창 9:22)(칼빈).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관계가 순결하게 지켜지길 원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남의 아내를 범하거나 탐하는 것을 금하신다. 3. 오늘과 같이 성도덕이 문란한 세대에 성윤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바른지침이 된다.
5. 각종 시민법-회중에 관한 규례들-(23:1-25)
5-1. 총회 참여권에 대한 규례(1-8)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호와의 총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여호와의 총회'는 이스라엘 공동체이이며, 본문에 금지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섞여 살 수 없다고 함. 그러나 비록 생식기에 이상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임엔 틀림없으니(사56:3,4),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2) 본문에 규정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할 수 없다는 뜻으로 봄(Patrick). 그러나 이는 8절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타당치 못하다. 3) 본문에 규정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歸化)할 수 없다고 함. 그러나 이 역시 첫 번째 경우와 같은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 4) 본문에 규정된 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나 회합에서 어떠한 직책(職責)도 맡을 수 없다고 함. (Mattew Henry, Dake). 그러나 이 역시 8절에 의거하면, 이방 족속도 3, 4대가 지나면 직책을 맡을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부자연스럽다. 5) 본문에 규정된 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국적인 공식 집회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함(Calvin, Wycliffe). 즉 생식기에 이상이 있는 자나, 사생자, 암몬과 모압 족속 등은 개인적으로는 여호와 신앙에 귀의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만의 거국적인 공식 예배나 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일정 기간, 또는 영원토록 금지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견해는 8절의 내용과도 아무런 하자가 없기 때문에 가장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자격 미달자의 성격으로는 신체적 조건(1절), 윤리적 조건(2절) 및 역사적 조건(3-8절) 등이 고려되었다(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p.186).
1)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 성기(性器)는 남녀를 구별하는 중요한 상징(symbol)이니, 그것이 거세되었거나 있더라도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남자는 더 이상 남자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규례는 마치 몸에 흠과 결함(欠缺)이 있는 자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윤리적으로 불결한 자(사생자: 맘제르) 사생자는 원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유대학자들은 이 말을 '근친 상간에 의해 태어난 자식'으로 보고 있으며(Mishna), 70인역(LXX)과 벌게이트(Vulgate)역은 '음행의 자식'으로 번역하였다. 칼빈은 이것을 '간음으로 인해 태어난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여기서 '사생자'란 비합법적인 결혼이나 불법적인 성(性) 관계를 통해서 태어나는 모든 자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10대까지라도 참여할 수 없었다. 이는 문자대로 '10대 후손까지'가 아니라, '영원히'라는 뜻이다(Keil, Dake, Lange). 왜냐하면 '10'은 '완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3) 부도덕하고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악하게 대한 자(암몬, 모압인) 이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두 딸간의 근친상간으로 인해 태어난 족속(창 19:36-38)이었다. 혹자는(knobel) 그들이 이스라엘 총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근친상간을 통해 난 자손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적대적인 행위 때문에 이스라엘 회중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두 족속이 이스라엘의 형제국이므로 이들과 화친할 것을 명하셨다(2:9,19). 그러나 이 두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갈 때에 발람(Balaam)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을 뿐 아니라(민22:1-24:25),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방해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는 것이 영원토록 금지되었다. '발람'의 뜻은 '멸망시키는 자', 또는 '탐닉자'인데, 그는 그의 이름대로 물질의 탐욕에 못 이겨 이스라엘을 음행의 꾀로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를 축복하지 아니하고 저주하는 자들은 그 저주를 자신이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축복하신 교회가 저주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행하는 자들의 평안과 형통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는 여호와의 변치 않는 약속(창12:3)에 의거한 행위이다.
4) 에돔인과 애굽인 에돔인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의 혈통을 이어 받은 후예들로서 이스라엘과는 형제 국이다(창 36:9). 하나님께서는 다른 족속(3-6절)과 달리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셨다. 이는 이 족속이 열방 중 이스라엘과는 가장 가까운 친형제 족속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명령이며, 동시에 최소한의 선을 베풀만한 이유가 있거든 최대한 호의를 베풀라는 명령이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애굽인들이 자신들에게 가했던 400년간의 혹독한 압제를 쉽게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출 1:8-22;2:23).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명하신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 이스라엘은 억지로 끌려서 애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려간 것이다(출 1:1-7). 따라서 애굽인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한 일이었다. * 당시 가나안 전역에 몰아 닥쳤던 대 기근에 비추어 볼 때에 애굽은 한때나마 이스라엘의 따뜻한 안식처였다(Calvin).
여기서도 우리는 증오보다는 사랑을, 분쟁보다는 화평을 더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본 속성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 족속과 애굽 사람들은 형제 국과 한때 그들의 도피처가 되었던 것을 이유로 하여 그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행한 악을 반드시 갚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베푼 가장 적은 의라고 잊지 않으시고 갚아 주신다. 따라서 그들은 삼대 후에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단 이때 준수되어야 할 전제 조건은 먼저 할례를 받고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이었다(창 17:9-14). 따라서 그들의 3대 후손이라도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기 위해서 이러한 예식을 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은혜는 당연히 철회되었다.
< 적 용 > 1.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선택받은 만큼, 그 회중의 자격들이 제사장의 조건으로 승화되고 있다. 신체적인 조건이 비정상적이고, 윤리적으로 부정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지 못하였다. 2. 비록 형제 국들이라 하여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호의를 베풀지 않거나, 그들을 대적하고, 저주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회중으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베풀지 않고, 대적하며,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은 그들이 행한 대로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게된다. 3.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축복하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신다. 4.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선하시며,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조금이라고 은혜를 베푸실 근거가 있는 자들에게는 은혜로 갚아 주신다.
5-2. 군대 야영시의 성결 규례(9-14) 본문은 이스라엘이 전쟁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위하여 조심해야 될 것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진지를 깨끗하게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종교, 윤리적으로 악을 멀리 할 것을 요구하셨다(9 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불의한 행실을 버리라는 것을 말한다. 어느 나라든지 전쟁에 승리를 거두려면 먼저 의(義)를 소유해야 된다. (잠 14:34)에 말하기를,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외부적인 불결을 막을 것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몽설이나 변 같은 것을 잘 처리하여 의식적(儀式的)으로 순결을 지키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외부적인 정결도 원하신다. 그 이유는 외부적인 불결은 영적 불결을 상징하며, 외부적 불결을 처리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태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태만을 극히 미워하신다(마 25:26).
원수를 치기 위해 진(陳)에 야영하고 있을 때는 평상시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던 행위들이 곧잘 저질러지기 쉽다. 즉 평상시에는 법과 질서가 잘 준수되던 사회에서도 전시(戰時)가 되면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기 쉬운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하셨다. 특별히 여기서 '악한 것'은 10-13절에 나타난 바 의식적(儀式的)인 불결을 말한다. 성도가 성결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은 어떠한 구실이나, 핑계로써도 결코 용서될 수 없다(Calvin). 이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몽설한 자는 진 밖으로 나간 후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다. 이는 남자들은 밤에 성적(性的)인 꿈을 꾼다거나 기타 다른 사유로 인해 무의식 가운데 발생하는 정액(精液)의 유출을 가리킨다. 오늘날 이러한 일은 의학적으로 인체에 아무런 해도 없는 남성의 생리상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구약 시대의 정결 법적(淨潔法的)인 차원에서이다(레 15:16-18). 이는 한 사람의 의식적(儀式的) 부정이 진영 전체의 병사들에게 오염되는 것을 금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정액의 유출로 인하여 부정해진 자는 반드시 물로 온 몸을 씻어야 하며, 그러고도 저녁까지 부정하다는 모세 율법에 근거한 규례이다(레15:16). 그런데 이처럼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이 몸을 성결케 하고, 성적 관계를 멀리하는 것은 당시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보편화된 현상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군대는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군대였으므로 더욱 삼가 성결 규례를 지켜야 했다.
이스라엘 진은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이므로, 항상 성결을 유지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생리적인 문제를 진 밖에서 해결했다. 이처럼 야영생활에 있어서의 생리적인 배설 문제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들의 의식적인 성결을 유지할 뿐 아니라, 진중에 임하여 계시는 하나님(14절; 민 9:15-23)께 대해 충분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본 규례는 여러 사람들이 합숙하는 진영(陳營)에서 공중위생을 유지키 위한 규례이기도 했다. 여기서 '기구'에 해당하는 '아젠'은 '무기'나 혹은 삽, 곡괭이 같은 '장비'(裝備)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상황이 전쟁을 앞두거나 전쟁 중인 상태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는 대변을 보러 나갈 때에 자신의 '무기'외에 작은 삽을 가지고 나가거나(KJV, RSV), 군인으로서 갖추고 있는 '장비'중에서 삽으로 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나가서 대변을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NIV, Living Bible). 그들은 몸을 돌이켜 변을 보지 않고 흙으로 덮어야 했다. 이것은 부정한 배설물을 눈으로 봄으로 인해 의식적 혹은 정신적 부정(不淨)을 입지 않기 위함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이 대적과 싸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친히 대적을 치고 구원해 주시리라는 언약(20:1-4)에 근거한 행위이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성격의 명령이다. 그런데 이처럼 진중(陳中) 성결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기에 앞서 먼저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시사해 준다. 즉 이스라엘은 눈앞에 보이는 적군과 싸우기에 앞서 먼저 그들 자신의 부정 및 죄와 싸워야 했던 것이다(막 7:20-23).
'불합한 것'은 '발가벗다' 또는 '발가벗기다'는 뜻의 '아라'에서 유래한 말로 곧 '수치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율법이 이처럼 정액, 대변, 월경 등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까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의식상(儀式上)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게 함으로써,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성별(聖別)된 공동체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상 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식케 하여, 그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고 정결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적 용 > 1. 이스라엘은 전쟁시에도 그 성결함을 유지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다. 2. 성도들의 싸움은 혈과 육보다는 사탄과 죄와의 싸움이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거룩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3. 이스라엘로 도망 온 노예에 대한 규례(15-16) 여기서 의미하는 종은 모든 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혹독한 학대를 못 이기거나 기타 정당한 사유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로 도망쳐 온 이방 족속 노예를 가리킨다(Onkelos). 고대 사회에서는 일단 도망쳤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온 노예는 대부분 사형에 처하거나 두 발이 잘리는 등 중벌에 처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the Hammurabi Code). 따라서 주인의 부당한 압제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온 노예를 다시 그 주인에게 인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비인도적인 행위가 된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여 이를 금지시키고 있다. 도망쳐 온 이방 족속 노예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도피성(수20:1-6)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그들에게 신변 안전과 안식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사유로 인해 도망쳐 나온 종들에게 해당되는 규례일 뿐(15절), 도둑질이나 간음, 살인 따위를 저지르고 도망쳐 나온 이방 노예들에게까지 해당되는 규례는 아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러한 도망자들까지 보호해 준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법과 공의를 파괴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Calvin). 이 점은 마치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가 무죄한 오살자(誤殺者)들에게만 혜택을 부여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민 35:16-25).
< 적 용 > 1. 교회는 약자를 압제자의 부당한 횡포로부터 보호할 책임이 있다. 만일 약자가 부당한 횡포를 피하여 교회의 도움을 청할 때에는 도피성과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로서는 마땅한 도리이다. 2. 우리 주님과 교회는 어느 누구든지 찾아오는 자들에게 넓은 문을 열고 환영할 수 있다.
5-4. 창기와 남창금지(17-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에 창기나 미동(남자 창기)을 용납지 말라고 하셨다. 창기나 미동의 제도는 가나안 민족들의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당 부근에는 창기의 거처가 부설되어 있었으며, 음행은 우상 숭배의 한 순서에 속했다. 그런 악한 제도는 신정 국가(神政國家)에 용납될 수 없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참 종교는 어디까지나 윤리적 성격을 근본적 요소로 가진다. 창기(케데솨)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자인 '조나'와는 달리(22:21), 주로 우상의 신전(神殿)에 소속되어 우상 숭배의 한 행위로써 종교적인 매춘 행위를 하는 창녀를 가리킨다(창 38:21). 그리고 미동(카데쉬)도 성소에서 몸을 파는 남자, 즉 '남창'(男娼)을 가리킨다. 다른 곳에서는 '남색(男色)하는 자'로 번역되어 있는데(왕상 14:24; 15:12; 22:46), 성경 기록으로 보아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성(性)의 여신 '아스다롯'(Astarte)을 섬기는 예배 의식에서 창기와 미동을 통한 매음 행위가 널리 성행하고 있었다고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깨끗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녀의 일을 해서 번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금하셨다. (잠 21:27)에는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물질을 바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바쳐야 된다. 하나님께서 창녀의 삯뿐 아니라 개를 판돈까지 거절하는 것은 제단의 성결성이 부정한 예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개는 다른 짐승과 비교할 때 경멸하는 뜻에서 배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돼지를 죽이는 것도 개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잘못이었지만, 돼지를 판돈은 예물로 바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개는 단지 부정한 짐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추하고 경멸스런 짐승으로 배척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전과 제단에 돌려야 할 올바른 경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칼빈).
'개 같은 자의 소득'이란 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문자적 의미대로 '개를 판돈과 같이 부정하고 추잡한 거래에서 생긴 소득'(계22:15)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Calvin, Matthew Henry), '개'를 남창으로 이해하여 '남창의 소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Dake, Lange). 그런데 17절에 의거해 볼 때, 일단은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는 포괄적으로 '음란하고 사악한 짓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수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결코 부도덕한 행위나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같은 헌금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각종 부정이나 죄악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그릇되고 부정한 수단이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증한 것('토에바')은 '심히 꺼리다', '구역질나다', '강력히 거부하다'란 의미를 지닌 '타아브'에서 파생된 말로, 곧 '지독히 싫어하는 것', '혐오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거룩성'(코데쉬)과 정면 배치되는 것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되고 있는데(7:26; 13:14), 주로 우상 숭배나 성적(性的) 문란 행위 등에 적용되었다.
< 적 용 > 1.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자들이 음란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에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2.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이나 헌물들은 의로운 것이어야 한다. 목적과 의도가 선해도 방법이 그릇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신다. 3. 하나님께서는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도 중히 여기신다.
5-5. 고리 대금업에 대한 규례(19-20)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족에게 돈을 꾸어줄 때에 이식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규례는 약자보호 및 이웃사랑의 정신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서, 돈을 빌려 가는 자들은 물론 극빈자들이니 만큼, 이스라엘은 약한 동족을 돕고 사랑하는 의미에서 이식을 면제하여 주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동족끼리 서로 도울 때에 그들은 서로 친목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강력히 단결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도움을 받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흥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올바로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해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범사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국인에게는 돈을 꾸일 때에 이식을 취하는 일을 허용하셨다. 이 제도는 결코 민족 차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꼭 같이 사랑하신다. 그 때에 타국인은 아주 이스라엘 땅에 와서 동화되어 사는 자, 곧, 나그네가 아니었다. 그들은 본국에 국적을 가지고 경제적 기반을 가진 자들이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지 않아도 되었다.
이 규례는(출 23:25, 레 25:35-38)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규례로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무역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경우 상거래(商去來)상에 있어서 금전 대여에 따른 이자 소득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타국인'(노크리)들은 율법밖에 있는 자들로서 율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생계를 위한 가난한 자들의 차용과 달리,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상업상 이유로 돈을 꾼 자들이기 때문이다.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형제를 보호해 주시며, 그들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해를 끼치지 말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5-6. 서원 이행에 대한 규례(21-23) '서원한다'는 말(나다르)의 원 뜻은 '약속하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드리거나 어떠한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서원 하는 것은 자발적 행위이지, 결코 억지로 강요에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원한 후에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키지 못할 서원은 애초부터 하지 않고, 일단 서원 했으면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충실히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서원을 의무로 규정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성도들이 쓸데없이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약속해놓고 죄 책을 느낄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원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삼가 조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함부로 서원 하게 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그것을 억지로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시 66:13,14)에서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라고 고백하였다. 이는 시편기자가 환난 중에서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그때에 서원한 것을 이행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규례를 통해 성스러운 예물에 있어서 무분별한 열정을 금하시길 원하셨다(칼빈).
< 적 용 > 1.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의 입으로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2. 자기가 한 말에 대하여 그것이 손해가 될 지라도 지켜야 한다.
5-7. 긍휼의 원리(24-25) 이 규례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하여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잊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는 규례 중 하나이다. 본문은 굶주린 이웃이나 길 가던 빈한한 나그네가 비록 남의 포도원이나 곡식 밭에 들어가서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규정이다. 이 규정은 후일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사실에서도 나타난다(마 12:1; 눅 6:1).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아랍권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인정되고 있다(Robinson, Thomson). 만일 다른 사람의 과일이나 곡식을 따 그릇에 담거나 혹은 여타 기구를 사용하여 거두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주린 배를 채우는 단계를 넘어서 남의 소유를 제멋대로 반출(搬出)해 내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금지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공의가 좌로든 우로든 전혀 치우침이 없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입는 것을 핑계 삼아 남의 소유를 필요 이상으로 취하는 일은 금하신다. 하나님의 규례는 사랑과 공의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6. 각종 사회법-약자보호에 관한 규례들-(24:1-22)
6-1. 이혼법(1-4) 모세는 아내가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수치 되는'('에르와트')이란 말은 '부끄러운', '발가벗은' 의 뜻이다. 예수님 당시에 힐렐(Hillel) 학파는 (마 19:3)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것을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이유'로 해석하였으며, 샴마이(Shammai) 학파는 여자의 음탕함, 즉 '간음'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당시 율법에 의하면, 유부녀(有夫女)가 간음을 하게 된 경우에는 곧바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었던 점을 생각해 볼 때에(22:22) 이 해석 역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치 되는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객관적이고도 충분한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법을 제정해 주신 이유는,
1) 이혼 당한 여인이 다시 결혼할 수 있도록 법적인 보호를 해 주려는 것이었다. 한번 결혼하였다가 이혼 당한 여인이 재혼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따라서 여기 '이혼 증서'(세페르 케리투트)란 그 같은 점을 고려하여 여자에게 재혼(再婚)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 주는 문서라고 볼 수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2) 또한 이혼 증서를 써주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녀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고, 이 일에 있어서 경거 망동 하거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심사 숙고 할 것을 바라는 것 때문에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예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모세가 '이혼증서'(離婚證書)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인한 시대적 조처였으며, 그것이 결코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주신 법이 아님을 명백히 하셨다.(마19:8).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한번 하나님 앞에서 결혼서약으로 맺어져서 결혼한 부부는 그 의무를 책임 있게 이행하시기를 원하신다. 2. 그러나 만일 결정적으로 결혼이 유지되기 어렵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될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차선책으로 그들에게 이혼을 허락하셨는데,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평생을 미움과 학대를 받아가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 남편이 그 여자를 책임질 수 없을 경우에 정당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게 하여 떳떳하게 재가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한번 이혼하면 다시는 결합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함으로써, 이혼하는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도록 이 규례를 주셨다.
6-2. 신혼 부부의 징집 면제 규례(5) 하나님께서는 신혼(新婚) 생활 중에 있는 남자에게는 병역(兵役) 의무 및 각종 공무(公務)를 특별히 면제해 주라고 지시 하셨다(20:7). 가정제도의 창시자도 하나님이시며, 결혼은 두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임만큼(창 24; 마 19:5), 하나님께서는 결혼 생활의 기쁨과 신성성(神聖性)을 보호해 주신다.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정생활에 대하여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혼의 첫 번째 해를 온전히 같이 보내면서 부부 사이의 유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여기에서 1년이란 기간을 설정한 것은 1년이 대(代)를 이을 자녀를 출생시키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남녀 결합의 가장 큰 목적이 자녀 출산에 있었고, 별다른 피임법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1년이란 기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상적인 신혼 부부가 첫 자녀를 출산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2. 하나님께서는 신혼 1년간의 가정생활을 보호하시기 위해 병역 및 다른 어떠한 직무도 부과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6-3. 약자 보호 규례(6) 하나님께서는 대부(貸付) 관계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정도로 담보물을 요구하는 잔인한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와 관련이 되는 것을 담보로 취하는 일을 금하셨다. meta와 catillus란 맷돌의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을 말하며, 이것은 일하는 사람이 일용할 빵을 만들어 먹는데 없어서는 안될 모든 기구를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농부에게서 쟁기, 납, 써래, 기타 다른 도구를 강제로 빼앗거나, 구둣방, 도공, 기타 가게에서 그 도구를 빼앗았을 때에, 그들이 생업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서 "그의 생명을 저당 잡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에게서 그의 생계 수단을 담보로 잡는 것을 마치 그의 생명을 저당 잡는 것과 같이 악하게 보신다.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기본생계 수단을 빼앗는 자들에 대하여 그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이 대하시고 심판하신다.
6-4. 인신매매 금지(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파는 일을 금하셨다. '후린다'('가나브')는 말은 '훔치다' 또는 '속이다'는 뜻으로, 사람을 꾀어 유괴(誘拐)하는 것을 가리킨다(공동번역).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물건들을 훔치거나 탐내는 것을 금하셨는데, 하물며 형제의 생명을 몰래 납치해서 노예로 파는 일은 하나님 앞에 크나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유괴범을 이처럼 살인범에 준하여 처형하는 까닭은 1) 유괴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인격과 자유를 박탈하는 살인행위와 같고, 2) 남의 생명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준(準)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죽여서 그들 중에서 이런 극악한 죄악을 제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1:16, 신 22:21,22 참조).
< 적 용 > * 사람의 생명을 도둑질하여 자기 이익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납 받지 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생명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6-5. 문둥병 규례 준수(8-9) 본문의 8절에 "네가 그들에게 명령한대로"라고 번역된 부분은 "내가(모세가) 그들(제사장들)에게 명한 대로'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규례대로 문둥병자에게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 규례는 소수의 문둥병자들의 전염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치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생명과 건강 보존을 위해서는 문둥병을 다루는 하나님의 처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신 24:8, 레 13:-14:). 문둥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미리암의 경험으로부터 예증되었다(신 24:9, 민 12:10)(위클리프 주석). 이 문둥병은 영적으로 죄악의 해악 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성경에서 문둥병은 주로 저주를 받아서 발생하였으며, 그 증상과 전염성은 죄악의 증상과 전염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문둥병이 회중에게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문둥병의 처방책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한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온 교회와 회중이 해악을 당하지 않도록, 죄를 지은 사람을 제거하며, 성경 말씀을 따라 대처해야 한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회중들의 생명과 건강 보존을 위하여 각종 문둥병에 대한 처방책을 주셨으며, 이것을 삼가 주의하여 지킬 것을 명령 하셨다. 2. 우리는 아간의 경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소수의 범죄로 인해 온 회중에게 해가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말씀에 기록된 대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6-6. 가난한 자의 저당에 대한 주의 사항(10-13) 하나님께서는 채권자가 자기 형제의 집과 가구를 습격해서 자기 멋대로 담보물로 뽑아 내는 일을 금하셨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한이 만약에 탐욕스런 부자들에게 허용된다면 그들은 절제하는 마음을 내팽개치고, 마치 가난한 자의 창자를 뒤지듯이 제일 좋은 것만 마구 긁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부자들은 가난한 자의 집을 온통 뒤질 것이요, 가난한 자가 그것을 반대할 경우 그는 강제로 그것을 빼앗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채무자가 담보물을 자발적으로 편리한 때에 내놓기 전에는 아무 것도 그의 집에서 꺼내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채권자 생각에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담보물로 취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령 그가 잠자는 침대나, 침대 덮개, 외투나 망토 같은 것은 담보로 잡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추위에 떨 정도로 그를 발가벗겨 놓거나 그 물건이 없을 때는 불편한 물건을 빼앗아 가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의복을 되돌려 주어 따뜻하게 잘 수 있게 하는 인정 있는 행동을 하면 가난한 자들이 그들을 축복할 것이며, 그 행동이 의로 여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되 갚을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에게 보상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곧 그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동정을 베푸는 가난한 자들이 배은 망덕하고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다 해도 우리의 친절은 하나님께 소리쳐 외칠 것이다. "의로움이 되리라"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거나 그에게 만족한 행동이 된다는 말과 같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에게 긍휼히 대해 주시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연약한 사람들에게 긍휼히 대해 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대하실 것이다. 2. 만일 우리가 연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악하게 대한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고, 그 호소는 우리에게 화가 되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6-7. 품꾼에 대한 인격적 대우 요구(14-15) 품꾼을 고용해 놓고 그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그를 학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품꾼'(사키르)은 오늘날의 '일용 근로자'에 해당하며, 객(게르)은 '구르'(체류하다)에서 온 말로 이스라엘 사회에 섞여 사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대개 그날 벌어서 그날 생계를 이어가기 때문에, 만약 당일의 품삯이 지체되면 본인에게 뿐 아니라 그 가족 전체에게까지 고통이 돌아가게 된다. 하루의 품삯은 고용주가 보기에는 하찮은 것이지만 품꾼에게 있어서는 생명 줄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더디 지급 될 경우, 품꾼의 마음은 애가 타고, 그것이 빨리 지급되기를 학수 고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본 규례의 근본 정신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 대하여 좀더 따뜻한 마음으로 인격적 대우를 해주라는 것과, 또한 없는 자의 딱한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임금 지불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이웃사랑'의 정신이다(레 19:13). 그러나 이 규례는 주인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마치 노예를 대하듯이 거만하거나 인색하게 다루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품꾼이 주인을 위해 봉사하면서 최소한 검소하게나마 살 수 있는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주인에게 크나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이 일군들에게 생계의 수단을 주지 않아도 지상 법정에서는 죄로 여기지 않지만, 이것이 하늘에서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정치적인 법이 아니라, 영적인 법으로,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묶어 놓고 있다.
6-8. 죄에 대한 책임 규례(16) 인간 개개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독립된 인격체이므로, 각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원칙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당시 고대 이방 국가에서는 중 범죄일 경우 당사자는 물론이요, 자녀 및 가족, 심지어 친족들까지 몰살시키는 연대(連帶) 처형법이 성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정(神政)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공동체적 책임감만 강조하고, 개인적인 책임이 망각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도 이 점에 대하여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고 천명하였다(렘 31:29; 겔 18:2-4,19,20). 이 규례는,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 자로서 행동하고 책임질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 적 용 > * 모든 개인은 각자 자기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임있게 처신하고, 공동체와 함께 개인적인 면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6-9. 약자 보호 촉구(17-18) 객이나 고아나 과부는 사회적으로 내세우거나 의지할만한 것이 없고, 자기 권리마저 주장할 힘도 없는 약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종종 사회로부터 소외와 무시를 당하거나 이유 없는 학대를 당하기 쉽다. 본문은 특히 이러한 사람들의 권익을 옹호해 주도록 촉구하고 있다. 약자들에 대한 보호와 사랑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10:18,19; 출 22:21,22; 레 19:33,34). 특히 이스라엘은 지난 날 애굽에서 압제 당하는 자로 생활하였으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의해 속량 받은 민족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에 감사하면서 은혜를 입은 자답게 남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마 18:21-35). 한편 이 점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처럼, 성도들도 역시 남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레 19:33,34).
< 적 용 >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10. 가난한 이웃의 생계를 위한 법(19-22)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이미 베어 놓은 곡식 단을 잊어버리고 가져오지 않은 경우나 혹은 타작 마당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밭에 흘린 곡식을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셨다. 뭇(오메르)이란 말은 '쌓아 올리다', '곡식을 모으다'는 뜻인 '아마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곡식 더미'를 가리킨다. 그러나 점차 도량형 단위로 사용되어 본 절에서처럼 곡식의 '단'이나, 부피 단위인 '오멜'(Omer)을 가리키게 되었다(출 16:16,36). "감람나무를 떤 후에"란 말에서 '떨다'('하바트')는 말은 '두드리다', '타작하다' 라는 말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감람 열매를 수확할 때 주로 나무를 흔들거나 장대로 가지를 쳐서 열매가 떨어뜨렸다(사 17:6). 팔레스타인에서는 포도를 종교력 6, 7월(양력 8-10월경)에 수확했다. 본문은 그와 같은 수확기를 넘기고 난 다음, 그 후에 익게 되는 포도를 수확하지 말고 그냥 두어 가난한 자들의 몫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따다"(알랄)는 말은 '지나치게 하다', '철저하게 하다'는 뜻으로, '따라'(레19:10)는 의미보다는 '남김없이 줍다'(렘6:9), 즉 일차 수확 후 다시 경작지를 점검하는 몰인정한 행위를 의미한다.
<적 용> *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수고하여 번 재산 중에서 일부를 가난하거나 연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연약한 중에서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은혜 받을 조건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마땅히 은혜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손을 펴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돕지 않으신다.
7. 각종 사회법(25:1-19)
7-1. 태형에 대한 규례(1-3) 재판상의 부정과 재판관이 돈에 매수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대표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재판관이 공의(公義)에 따라 재판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출 23:6-8). 유대에서는 태형(笞形)의 집행 시에 수석 재판관이 입회하여 (신 28:58, 59, 29:9)을 큰 소리로 봉독하였으며, 마지막에는 "그러나 주께서 자비가 충만하셔서 저들의 죄를 사하셨느니라"는 말로 끝냈다고 한다(Mishna). '여수히'(미스파르')라는 말는 '세다', '기록하다'는 말에서 온 말로서 '일정하게', 또는 '적당한 수로'라는 의미로서, 이 말은 범죄자가 저지른 죄에 알맞는 형벌을 가하라는 의미이다. '4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심판'과 '연단' 또는 '시험'을 의미한다(창 7:12; 출 24:18;민 13:25; 마 4:2; 행 1:3). 그러므로 40대의 매를 때리는 것은, 곧 죄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선한 길로 인도하려는 연단의 방편을 의미한다(Keil).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태형을 집행할 때 39대까지만 때렸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계수(計數)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40대의 매를 초과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Keil & Delitzsch, Pulpit).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던 중 다섯 번이나 이러한 매를 맞았다(고후 11:24).
본 규정은 이방국가와 같이 인간을 무자비하게 때려서 불구로 만들거나, 죽게 만드는 일을 금지시킨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40대 이상의 형벌이 가해질 정도로 중한 범죄이면, 재판관은 차라리 그를 처형시켜야 했다. 칼빈(Calvin)은 여기서 '천히 여김을 받게 하다'는 말을 '너무 심한 매질을 하여 흉측한 불구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 해석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본 절은 범죄에 대해 징벌하는 경우라도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 범죄자도 기본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 적 용 > 1.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정당한 권리를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죄를 지은 사람을 법에 따라 공정히 처벌하되, 인권을 모독하는 일이 없게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벌하는 중에도 그 영혼을 귀중히 여기신다.
7-2. 일군에게 먹을 것을 주라(4) 여기서 '곡식을 떤다'는 것은 곡식의 타작을 가리킨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개 두 가지의 타작법(打作法)이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편편한 널판지에 구멍을 많이 뚫고 그곳에 날카롭고 단단한 돌을 박은 타작기를 당나귀나 소로 하여금 타작할 곡식 위로 끌고 다니게 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평평한 바위나 고르게 다진 타작 마당에 곡식 단을 펴놓고 막대기나 도리깨로 두들겨 타작하는 방법이다(삿 6:11). 소를 이용하여 탈곡할 경우, 소가 곡식 낟알을 주워 먹는 사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짐승이라도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쳐 준다. 이는 보상의 일반 원칙을 언급한 일종의 격언인데, 예수께서 "전도자가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10:10)고 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교회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응분의 대가를 제공받는 것이 마땅하다"(고전 9:9-14; 딤전 5:18)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회교권 국가에서는 오늘날에도 이 같은 가르침에 입각, 탈곡 작업에 동원되는 가축의 입을 망으로 씌우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두고 있다(Robinson)(칼빈).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로부터 얻어지는 수익 중에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 마땅함을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원리는 심지어 짐승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것이며, 교역자에게도 적용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통하여 양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7-3. 계대 결혼법(5-10) 계대결혼은 결혼한 형제가 후사(後嗣)없이 죽은 경우 다른 형제가 형제된 의무로서 죽은 형제의 과부된 아내와 결혼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와 고대 근동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풍습이었으나(창 38:8-11), 모세 시대에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다. 계대 결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대(代)를 이어줄 후사를 낳아 줌으로써, 그 형제의 이름과 기업을 가문(家門)과 지파 내에서 보존해 주기 위함이었다. 2) 이스라엘 여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3) 홀로 남아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펴 주기 위함이었다.
후사를 '잇게 하다'에 해당하는 '쿰'은 '지탱하다', '성립하다'(잠 15:22), '일어나다'(17:8)등과 같은 다양한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쓰러진 가문(家門)을 다시 '일으키다'는 의미로 쓰였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와 같은 역할은 계대 결혼에 의하여 태어난 첫아들이 수행하였다. 즉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아들로 간주되어 족보에 대신 이름이 올려졌으며 또한 그 기업을 상속하였다 한다(talmud). '성읍 장로'(8절)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스라엘 각 성읍에서 개정(開廷)되는 법정의 재판관을 가리킨다(21:1-9). 한편 이스라엘의 재판 제도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각 마을에서 열리는 일반 법정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 성소에서 열리는 고등 법정이다. 그런데 각 마을에서 열리게 되는 일반 법정의 장소가 바로 마을 성문이며(17:5), 그 재판을 주관하던 자들이 마을 장로들이었으므로 '성문 장로'라 불렀던 것이다(신 16:18).
만일 계대결혼을 해야 할 사람이 그것을 회피할 경우, 결혼을 거절당한 미망인은 그 사실을 법정에 정식으로 고발할 수 있었다. 계대 결혼을 거절당한 여자의 고발이 접수되면, 재판관들은 곧 법정을 개정한 후 피고를 소환하여 고발 내용의 사실 여부를 심문하였다. 이때에 피고가 결혼을 거절한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재판관들은 다시 한번 그 남자에게 계대 결혼이 갖는 목적과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거기에 따를 것을 종용하였다 한다(Keil). 본문의 규정들은 형제의 가문과 기업을 보존시켜 주기를 거절하는 자에 대하여 '사회적 제재를 가하기 위한 규정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형사 처벌이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 계대 결혼은 '도덕적 사랑의 의무 규정'이라고 보아야 한다(Keil). 자신의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자는 자신이 신고 있던 신을 벗어 상대방에게 건네주었다(Keil & delitzsch). 따라서 계대 결혼을 거절한 남자의 신을 벗기는 것은 이제 그가 더 이상 형제의 기업을 이을 자격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상징적 행위(룻 4:7,8)였다(F.J. Dake, Hupfeld). 그리고 여기에는 여자가 상대방 남자를 조소하고 경멸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성경 상에서 맨발의 상태는 치욕과 조소 및 비천한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삼하 15:30; 사 20:2,3). 이 경우 그 여인은 그의 '면전에서' 침을 뱉았다(Keil, Talmud). 이는 계대 결혼을 거절함으로써, 형제 된 의무를 기피한 자에게 모욕과 수치를 가하는 일종의 공개적 징벌이었음에는 분명하다(레 15:8;민12:14;욥 30:10; 사 50:6). 그리고 나면 그 집은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는 오명이 붙게 되었다. 이 말은 그 집이 '별 볼일 없는 집안', 도는 '하찮은 가문'이란 뜻이다. 이처럼 계대 결혼을 거부할 경우, 일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집안 전체에까지 불명예가 돌아가는 것은 크나 큰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 적 용 > *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먼저 그 집안 사람들이 도와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만일 그 가족들이 형제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심히 못 마땅해 하실 것이며, 온갖 불명예로서 그에 보답하신다.
7-4. 여인의 추잡한 행동에 대한 처벌(11-12) 성기(性器)는 그 사람의 상징이자,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이며, 치명적인 급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무리 곤경에 처한 자기 남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할 지라도, 다른 남자의 성기를 잡아당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커다란 모독임과 동시에 생명에 대한 위협 행위이다. 또한 성기는 자손을 생식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기가 위해(危害)를 당한다는 것은 곧 생식 기능이 위협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가문(家門)의 계승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던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타인의 성기를 공격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손을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중벌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일 랍비들은 손을 찍는 대신 벌금형을 내렸다(Commentary).
7-5. 공정한 상거래에 관한 법(13-16) '같지 않은 저울추'(에벤 와아벤)라는 말은 직역하면 '한 돌과 또 한 돌'이란 뜻이다. 히브리인들은 무게를 달 때에 돌로 만든 저울추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부정직한 자들은 서로 같지 않은 두 개의 추를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다가, 물건을 살 때에는 큰 추로 무게를 측정하여 정량보다 많은 양을 거두어들이고, 물건을 팔 때에는 작은 추를 사용하여 정량보다 적은 양을 줌으로써 부당 이득을 취하였다(Keil). 따라서 공정한 상거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도량형기(度量衡器)의 정확성이 요구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성경도 누차 강조하고 있다(레 19:35, 36; 잠 20:10; 21:6; 암 8:5).
이스라엘은 또한 같지 않은 도량형기는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해서도 안되지만, 집에 그런 것을 두고 유혹의 소지를 안고 있어도 안된다는 강한 경고이다(Lange). 우리는 이처럼 그릇된 길로 빠질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철저히 배제시켜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거래를 하면 네 날이 장구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비단 일개인을 향한 축복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대한 축복으로 보아야 한다. 서로 공정한 도량형기(度量衡器)를 사용하여, 이웃간에 상호 믿고 화목할 수 있는 사회가 구현된다면(레 19:35,36), 그 자체가 축복일 뿐 아니라, 그 사회가 장구(長久)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래에 있어서 진실과 성실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2. 우리가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양심을 속이고 남을 속여 가면서 행동하는 일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7-6. 아말렉에 대한 정벌 명령(17-19)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 근처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기습하였다(출 17:8-16).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손들로서(창 36:12), 이들은 팔레스틴 남쪽 광야에서 시내반도 사이를 배회하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특히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괴롭혔다(출 17:8-12; 민 14:45; 삿 3:13;삼상 30:1). 아말렉 족속의 잘못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도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애굽의 권세를 꺾고 홍해를 갈라 마른땅이 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출 7-14장)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듣고도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모독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가 되었다.
여기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는 이스라엘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행군 후미에 처진 유약자(幼弱者)들을 기습 공격하여 무참히 살륙하였다(18절; 출 17:8-16). 뒤에 떨어진 자들을 폈다는 말은 직역하면 '꼬리를 자르다','꼬리를 치다'는 뜻으로, 비겁하게도 상대방 행군 대열의 가장 뒤쪽을 기습적으로 습격하여 무자비하게 살륙하는 행위를 가리킨다(Keil).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을 간과하실 수 없었으며, 영원한 저주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대적이 되게 하실 것을 선언 하셨다. 이는 마치 뱀이 사람들의 뒤꿈치를 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공격하는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을 제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싸움에서 모세가 두 손을 들고, 여호수아와 군대들이 나가서 싸워 이겼던 것은 영적 전쟁은 기도와 순종과 신앙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이름'에 해당하는 '제케르'는 '자카르'(기억하다, 표하다)에서 온 말로 '기념물','회상' 또는 '기억'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말렉 족속을 모조리 멸절시켜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세상에서 없어지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 명령은 후일 사울 왕에 의해(삼상 15장), 그리고 시므온 자손에 의해(대상 4:39-43), 그리고 마침내는 에스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에 3:1; 7:9,10; 8:11-13) 성취되었다.
< 적 용 > 1.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신다. 2.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신다. 3. 우리가 연약해지는 틈을 타서 우리를 공격하는 죄의 세력들과, 육의 세력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힘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8. 2차 설교의 결론(26:1-19) 본문은 모세가 4장 이후에서부터 계속해왔던 두 번째 설교의 결론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이 장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1) 가나안에 들어가서 토지의 첫 소산을 하나님께 봉헌할 것(1-11)-하나님 공경- 2) 제 3년마다 십일조를 이웃을 구제하는데 사용하라(12-15)-이웃 사랑- 3) 이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과 순종할 때의 축복(16-19)
8-1. 토지의 첫 소산을 드리는 규례(1-11)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축제의 예식이 나타나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는 그 땅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며, 또한 그 해에 추수한 소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와,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대와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그 해에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고백>(1-3)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미상 하나님의 소작인들이었다. 그 모든 땅과 그 산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의 사용을 허락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대와 압제로부터 건져내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으로 인도해 들이셨으며, 그 땅을 기업으로 허락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세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하신 땅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그 땅에서 처음 익은 열매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지시하셨다. .
여기에서 '맏물'(레쉬트)이라고 한 것은 시간이나 장소, 서열 그 밖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첫째' 또는 '시작'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최초의 첫 열매(first fruits),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민 18:12). 그리고 이러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헌납한다는 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 및 통치권과 토지 소산이 하나님의 힘에 의해 추수할 수 있게 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주리에 해당하는 '테네'는 본서에만 나오는 고대 광주리(4절;28:5,17)로서, 버들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을 꼬아 짠 듬성한 바구니를 가리킨다.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를 가리키는데(12:5),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한 곳을 지정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도록 규정하셨다. 이는 중앙 성소에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으로 훈련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종교와 규례와 법도를 준수케 하심으로써, 각 지방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풍습에 물들지 않게 하고, 신앙 정신이 해이해 지거나,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토지 소산의 맏물을 중앙성소로 가지고 가서, 그 날에 제사와 기타 직무를 맡아 수행하던 당직 제사장에게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Keil, Pulpit). 그는 제사장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3)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그 땅의 소유권이 여호와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서 자신들이 이 땅에 있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한번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시는 선하고 신실하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며, 지금 자신들이 이 땅에 살게 된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백하는 자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반드시 중재자인 제사장을 통해서만 나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열매를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크신 은혜를 고백하였다.
< 예물을 단에 드림>(4-10(상)) 이와 같이 고백하기를 마치게 되면, 당직 제사장은 바구니에 담아 가져온 첫 소산의 열매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취하여 여호와의 단 앞에 올려놓았다. 이는 하나님의 소작인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소작료가 정당하게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상들을 연약한 가운데서 택해 주시고, 또한 애굽의 고통과 압제 아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셨음과, 그들을 현재의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음을 인정하는 감사의 신앙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내 조상은 유리 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5-10)
뒤이어 나오는 하반 절을 볼 때, 여기서 '내 조상'이란 이스라엘 12지파의 직접적인 조상인 야곱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람(Aram)은 셈의 다섯 아들 중 한 사람(창 10:22)일 뿐, 야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야곱은 셈의 아들 중에서도 아르박삿의 후예이기 때문이다(창 11:10-26). 그런데도 야곱을 가리켜 '아람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아람 지방 곧 '밧단아람'에서 20년간이나 생활하였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아람 사람 라반의 딸인 레아, 라헬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아 가문을 형성했기 때문인 것 같다(창 28-31장). 이밖에도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 역시 밧단 아람 출신이란 점은 그 의미를 더해 준다(창 25:30).야곱의 집사람으로서 애굽에 이른 자는 모두 70명에 불과했었다(창 46:27). 그러나 그들이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떠날 때에는 어린아이와 여자, 레위 지파를 빼고도 60만 명이 넘었다(출 12:37;민 1:46,47). 이스라엘이 애굽에 체류하는 400여 년 동안 유아 살해 등과 같은 각종 박해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와중에서도 70명의 인구가 60만 명으로 불어났다는 것은 실로 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열조들에게 약속한 자손 번성의 축복이 온전히 성취된 결과이다(창 12:2; 15:5; 22:17; 26:4; 28:14).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칠 때,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뼈저린 과거를 고백토록 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생활하는 동안 애굽인 들로부터 받은 갖가지 고난과 학대를 3중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이를 보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통'에 해당하는 '오니'는 주로 정신적인 고통, 고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역본 KJV, RSV 등은 이를 'affliction'으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신고'에 해당하는 '아말'은 '심하게 일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대개 혹독한 '육체적 노고'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압제'에 해당하는 '라하츠'는 '누르다','강제하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로, 인간의 자유로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를 'oppression'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 그리고 이적과 기사'로 그들을 구원해 내셨다. 그리고 '위엄'에 해당하는 '모라'는 '두려운 것'또는 '공포'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렸던 10대 재앙을 의미한다.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연 법칙과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시면서 까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가리킨다(신4:33,34).
가나안 땅의 토지 소산의 '맏물'을 여호와의 단에 바칠 때, 그 헌물과 더불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신앙고백(5-10절, 내 조상은...가져왔나이다)을 하도록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비록 그들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에서 기름진 열매를 풍성히 맛보며 평안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결코 자신들의 과거 비참했던 처지와 또한 그 처지를 권고(眷顧)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즉 출애굽의 감동을 생생히 재현시키며 계속 보존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한편 이 신앙고백의 내용은
1) 과거 비참했던 애굽 생활에 대한 겸손한 회고(5-6), 2) 바로의 권세를 꺾으시고 이스라엘을 그 손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찬양(7-8). 3)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9) 등이 담겨 있다.
우리도 이와같이 우리가 잘 될 때에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옛적에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가를 기억하고, 그렇게 보잘 것 없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 것인가를 상기하며,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기뻐함>(10-11) 여기서 '여호와 앞'이란 구체적으로 제물을 놓는 제단 위를 가리킨다(4절). 이러한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마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이러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축복을 인하여 그 소산물들을 가지고 당시에 기업이 없었던 레위인들과 또 그들 중에 거하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함께 불러서 같이 잔치를 열어 그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었다(11). 여기서 '복'에 해당하는 '하토브'는 직역하면 '그 좋은 것들'(NIV,the good things)이란 뜻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기름진 땅 가나안에서 생산되는 오곡백과(五穀百果)를 가리킨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첫 열매들(4절)은 레 2:1-3의 규정에 따라 소제물(素祭物)로 사용되지 않고, 레위인 및 객과 더불어 감사 잔치를 여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표시로 당신께 봉헌된 자기 백성의 소출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이웃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나눠 주는 용도로 사용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 헌금 역시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구제사업이나 복지사업에 중점적으로 사용되어야 마땅함을 교훈 받을 수 있다(Matthew Henry).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추수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경배하며 또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심으로서,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이 절정에 달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적 용 > 1.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산과 수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며 청지기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2. 우리는 우리가 잘 되었을 때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고, 그 은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일이 필요하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첫 열매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 4. 우리의 첫 예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8-2. 제 삼 십일조 규례(12-15)
<제 3의 십일조 규례>-구제의 십일조-(12-) 이스라엘은 한 해 총수입 중, 1/10을 '제 1의 십일조'로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위해 내야 했으며, 그 나머지 9/10에서 다시금 1/10을 '제 2의 십일조'로 구별하여 축제와 절기 때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안식년을 기준으로 하여 매 3년째인, 제 3년과 제 6년에는 '제 2의 십일조'를 중앙 성소로 보내지 않고, 자기의 성에 사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3의 십일조'로 이스라엘의 예배 생활을 돕는 레위인들을 공궤(供饋)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기업이나 분깃이 없는 자들로, 오직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십일조(十一條,tithe)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른바 이스라엘의 3대 약자 계층으로서 하나님께서 객과 고아 과부 역시 돕도록 명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객'(게르)은 귀화한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인정은 받았어도 떳떳하게 기업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곤궁하고 빈한한 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고아와 과부'(야툼 웨 알마나)는 뒤에서 그들을 돌보아 주는 자들이 없는 약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고아의 아버지로, 과부의 재판장으로 자처하시고 그들을 돌보신다(시 68:5).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러한 불우 이웃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후 9:8,9;약 1:27).
<정당한 십일조 이행에 대한 양심선언>(13-14)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문서에 적거나 고지서에 따라서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인 만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드린 그 예물이 조금도 잘못됨이 없는 정당한 것임을 하나님 앞에서 먼저 고백해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거짓으로 드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양심 선언을 하게 하셨으며,(13-14) 축복을 간구 하게 하셨다.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때(5-10절)에는 그분의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큰 소리로 고하여야 했지만, 자신의 떳떳함을 밝힐 때(13,14절)에는 개인의 공덕이 강조되지 아니 하도록 낮은 음성으로 고하도록 했다고 한다(13). 여기서 '범하다'에 해당하는 '아바르'는 단순히 법률 따위를 '어기다'는 뜻 뿐 아니라, 정도를 넘어서서 '지나쳐 달리다'란 뜻도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과도하게 만용을 부리는 것도 역시 잘못임을 깨우쳐 준다.
그들은 먼저 그 십일조의 양식을 애곡 하는 날에 먹지 아니하였음을 고백하였는데, 이 말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고백을 한 뒤에 자신들이 드리는 십일조의 제물이 조금도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며, 잘못 사용됨이 없이 '온전하게 드리는 십일조'임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했다.은 십일조를 결코 사적(私的)인 일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여기서 '애곡 하는 날'이란 초상(初喪) 기간을 가리키는데, 히브리인들은 대개 7일 정도의 장례 기간을 가졌으며, 이 때에는 조문객들을 위해 많은 음식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행여 하나님께 구별해 놓은 십일조를 유용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 고백은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건드리지 아니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정한 몸으로 십일조의 예물을 떼어두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고백했는데, 이는 시체나 기타 이유로 의식상(儀式上) 몸이 부정해진 중에는 성물(聖物)을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였다는 뜻으로서(민 19:11-19), 그 까닭은 몸이 부정(不淨)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것은 율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22: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예물들은 그 예물 자체가 성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드리는 사람은 가장 정결한 상태에서 예물을 드려야만 그 예물이 하나님께 '성물'로서 열납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사적으로 유용 하는 것도 죄가 되지만, 그 마음에 죄악을 품고 드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드리는 예물도 거룩하고 온전해야 하며, 또한 그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인격이 먼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십일조를 죽은 자를 위하여 쓰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는데, 공동 번역은 "그것을 죽은 혼령에게 바친 일도 없습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죽은 자(故人)의 기일(忌日)을 맞이하여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데 여호와께 구별된 십일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하여 예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양심상 조금도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행하였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만일 이러한 경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짓으로 고백할 경우도 생길 수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단에게 유혹을 받아 성령을 속이며, 사도들을 속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아서 죽었던 것 같이 이러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예를 선지자 말라기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러한 십일조와 관련하여 과부와 고아 및 나그네 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행위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말 3:5-10),이는 가난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십일조 정신이며(호 6:6), 형식적으로 바치는 십일조는 무의미함을 교훈해 준다.
<축복의 기원>(1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십일조 이행에 대하여 양심 선언을 한 후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모두 이행했으므로 이제 주님께서 거룩하신 처소인 하늘에서 그들을 보시고,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주께서 선택하여 주신 가나안 땅에 복을 주시기를 간구 하였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여기에서 사용된 '하감하다('솨카프')는 말은 7절의 '하감하다'(라아)와는 어감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말인데, '라아'는 의도적으로 '보다', '주시하다'는 뜻이지만, '솨카프'는 은밀하게 '지켜 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사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은밀히 지켜보시고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분시다(마 6:3, 4).
< 적 용 > 1. 제 3 십일조 규례는 이웃 사랑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사례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구제를 위하여 구별한 예물도 '성물'로 간주하신다. 3.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을 자신에게 한 것처럼 간주하신다. 4. 부정하게 번 것은 구제에 사용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것을 사적으로 횡령하면 안된다.
8-3. 율법준수의 촉구(16-19) 이제 우리는 신명기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있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신적인 탁월한 법을 만들어 주셨으며, 이제 그것을 지켜 행하라고 명하고 계신다. 사람이 만든 법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친히 입안하신 율법은 귀중히 여겨져야 하며, 동시에 전심을 다해 지켜야 한다. 이 말씀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지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이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명하였다. '마음과 성품을 다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전 인격과 모든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부분적인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전적인 헌신과 순종을 요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자신의 보배로운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보배로운'에 해당하는 '세굴라'는 '특별한 소유'를 의미한다(출 19:5).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특별히 구별해 놓으사, 그리스도의 피로 인(印)치신 특별한 소유이다(요 17:6-10).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명령을 지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민족들 위에 칭찬과 찬미 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며, 높은 위치에 있게 해 주실 것이고, 그 영광을 아름답게 해 주실 것이다. 여기서 '칭찬'(테힐라)은 '찬미'와 '찬송'을, '명예'(쉠)는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광'(티프아라)은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어휘들은 본래 하나님께만 합당한 수식어이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높이 드사 다른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게 만들고 찬송과 영광과 명예를 취하도록 허락하신다(렘 13:11;33:9; 습 3:19,20). 그리고 성민(암 카도쉬), 즉 거룩한 백성은 '구별하다'(카도쉬)와 '백성'(암)이 합쳐진 말로서, 곧 '보배로운 백성'(18절)과 같은 의미이다(출 19:5,6)
< 적 용 > 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율법대로 살 것임을 맹세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며, 그 율법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약속대로 율법을 성실히 준수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든 민족 위에 높이 들어서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다.
2.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였으며, 주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살 것을 고백하였다. 만일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서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성실히 대해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택하신 보배로운 왕 같은 제사장 백성이라고 부르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간구 하기만 하면 그 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힘도 성령 안에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