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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명기(6): 모세의 세 번째 설교-언약갱신(27-30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0:50

 신명기(6): 모세의 세 번째 설교-언약갱신(27-30장)


  모세는 그의 실수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들에게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모세의 첫 번째 설교와(1-4장), 두 번째 설교(5-26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세 번째 설교(27-30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의 세 번째 설교는 신명기의 결론이며 또한 모세 오경 전체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3차 설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호렙산 언약의 갱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가나안에 들어가서 율법을 세우고 선포할 것!(27장)
 2) 순종과 축복, 불순종과 저주(28장)
 3) 율법을 잘 지켜 축복받는 민족이 될 것을 권고함(29장)
 4) 심판 때에 죄에서 돌이서면 회복될 수 있음을 일깨움(30장)


               1. 가나안 땅에서의 율법의 설치에 대하여(27장)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 반드시 행해야 할 두 가지 의식 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큰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른 후, 그 위에 율법을 기록하고, 그 곳에 하나님께 드릴 제단을 쌓을 것(1-8). 둘째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양편으로 갈라서서,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과, 율법을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선포할 것(11-26). 모세가 이러한 의식을 시행토록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백성들에게 율법에 대한 인상을 깊이 그리고 감동적으로 심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2)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가 삶과 죽음의 분기점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율법만 그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1. 가나안 땅에서 먼저 할 일(1-8)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로 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회중 전체에게 매우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통신 체계였다(출 12:21-28). 모세가 이 말을 할 때 이스라엘은 아직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다(1:1, 5;34:1).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때는 B. C. 1446년 아빕월(종교력 제 1월, 태양력 3-4월)이다(출 13:4). 그리고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때는 B. C. 1405년 아빕월(일명 니산월)이었다(수 4:19, 20). 따라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기간은 약 40년 가량이라고 할 수 있다(민 14:33, 34). 한편 여기서 '날'(욤)은 '바로 그 날'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때', '즈음', 연후'(창 2:4;민 3:1; 전 12:3) 등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Pulpit Commentary).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돌들을 세우라고 하신 것은,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책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돌에다 기념비적인 사건이나 법을 기록하여 여러 지방에 세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습관이 성행했었다(수7:26; 8:29; 24:26,27; 삼상 7:12; 삼하 18:17). 그 대표적인 것으로 1902년 몰간(M.J. Morgan, 1857-1924, 프랑스 출신의 고고학자)이 수사(Susa)에서 발굴해 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s Code)이다. 팔레스틴에는 돌이 많았으므로, 그러한 돌 비를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석회를 바르는 것은 글자를 새기는 데 편리할 뿐 아니라,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석회(시드)는 내구성(耐久性)이 강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발라서 만든 돌 비는 후손을 위한 것이기보다, 당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Keil, Lange).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15-26절에 언급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가리킨다(Josephus, Masius, Clericus).
 2) 신명기 율법을 가리킨다(J.  Gerhard,  A. Osiander, Vater).
 3) 모세 율법 전부를 가리킨다(Keil, W. L. lexader).

  세 번째 견해를 주장하는 유대 랍비들은 모세 율법의 총 항목 수는 613개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많은 돌 비에 기록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나안 땅서 돌에다 석회를 바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는 의식은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임한다는 것을 포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따라서 이 의식은 향후 가나안에서 펼쳐질 이스라엘의 역사는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흥망 성쇠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했다.

  본문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가나안 본토가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이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 '젖'은 우유나 버터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소나 양 등 가축들에게서 실제로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또한 '꿀'은 가나안의 토산품이 될 정도로 야산과 나무 그리고 꽃등에서 많이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삿 14:8; 삼상 14:25; 대하 31:5). 그러나 이 말은 자연 적인 조건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일부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사실 물이 넉넉하지 못하고 기온 차가 심하며 곳곳에 불모지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표현은 그 땅의 언약적 위치를 드러내는 말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복스럽고 살기 좋은 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이 임하는 곳이야말로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B. C. 2,000년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12:7). 그런데 B. C. 1,400년경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 정복함으로써(수 12장), 이 약속은 약 600년만에 그대로 성취되었다.

  에발 산은 이스라엘이 저주를 선포하도록 되어 있는 산이었다(13절). 율법을 기록할 돌 비와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단(5-6)을 에발 산에 세운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초래될 저주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며, 죄와 저주가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속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Keil). 사마리아 사본(Samaritan Codex)은 여기 '에발 산'을 '그리심 산'으로 대체시켜 놓고 있으나, 이는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성산(聖山)인 '그리심 산'을 부각시킬 목적에서 자의로 변경시킨 것으로 보인다. 율법을 새긴 돌 비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제단을 쌓는 것은 인간이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상징한다(Matthew Henry).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말은 외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철 연장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준(準)무기이다. 따라서 그 같은 부정한 도구로는 구원의 단이 될 여호와의 거룩한 제단을 만들 수 없다(출 20:25). 번제는 죄의 속죄 및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와 그 분께 대한 온전한 헌신, 봉사를 상징하는 제사이다. 화목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과 인간 상호 화목과 친교를 간구 하는 제사이다.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화 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 가장 먼저 번제로서 속죄와, 헌신, 봉사, 그리고 충성을 다짐했으며, 화목제를 통해 하나님과 불목 했던 관계가 회복되어 기쁨과 평화의 관계로 변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기쁨을 제사를 드려준 제사장들과 함께 같이 나누었다.

  여기서 율법을 '명백히' 새기라고 했는데, 이는 '뚜렷하게  새기다'는 뜻의 '바아르'와 '자세히'란 뜻의 '야타브'가 합쳐진 말로,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뚜렷하게 기록하라'는 강조적 의미가 들어 있다. 이처럼 율법을 기록하라는 말이 3절에 이어 재차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은 돌 비에 새겨진 율법을 백성들이 심비(心碑)에 새겨서 철저히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준다(Hengstenbery). 이 명령은 후에 여호수아를 통해서 수행되었다(수 8: 30-31).

                                     < 적  용 >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항상 지켜 행할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말해보자.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성도들의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 순종하여 축복을 받은 일과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은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3. 하나님의 단은 외형적으로는 소박하고,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채로 만들어졌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드리기를 원하시며, 결코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화려하게 만든 외형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외형을 중요시 하는가? 아니면 중심을 중요시하는가?


 1-2. 두 번째 할 일-축복과 저주의 선포-(9-26)

  가. 축복과 저주 선포의 규례(9-13)
  1-8절까지의 지시는 '장로들'(9절)이 이스라엘에게 전달하였으나, 이 지시는 '제사장들'이 맡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사장들은 제사 의식을 집전할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10:8; 21:5; 민 6:23-27). 그러므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일에는 제사장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잠잠히 들으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잠잠히'에 해당하는 '사카트'는 특히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조용히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새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지고, 그 말씀을 조용히 듣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도 새 일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자,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제사장 나라이므로 그 신분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주님의 백성답게 살기 원하신다. 여기에서 복종한다는 말(솨마)은 지식적으로 '알아듣다', '경청하다', '이해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진정한 앎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그로부터 '순종하다'(30:2)란 뜻이 파생되었다. 진정한 믿음은 삶을 동반한다. '명령', '규례', '법도' 등과 같은 말은 두 단어 이상이 한 구절에 사용되어 뜻을 강조하고 있다(10:13; 창 26:5; 민 9:3; 대하 7:17; 스 7:10). 그러나 두 단어를 굳이 구분한다면, '명령'('차와')은 십계명과 같이 의무 이행이 강조되는 '핵심적인 지시 사항'을 의미하고(5:31), '규례'('호크')는 명령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은 '법규'를 의미한다(4:1).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수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 35:16-18). 그러나 그 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그리심 산은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35:22;49:4;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율법에 대한 규정을 그들의 동의에 의해 날인되도록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처럼 하나님 앞에 불러서 여기에 찬동하도록 하는 것은 나중에 쓸데없는 핑계를 전혀 내세우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과 율법 준수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굳게 하시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적 용 >
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잠잠히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2.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율법의 선포식을 통해 율법 준수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하게 하셨으며, 말씀대로 사는 것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길임을 깨닫게 하셨다.

3. 우리도 모든 일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인정하고, 생명을 다해 그 말씀을 준수할 것을 결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 축복과 저주 선포의 내용(14-26)
  본문에는 모든 죄악의 목록들이 모두 등장하지 않으나, 이러한 11개의 목록들은 10계명 전체와 그리고 613조의 모든 율법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15절은 하나님 경외에 대한 1-4 계명에 대한 언급이며, 16절-25절의 말씀은 5-10계명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계명을 언급한 후에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율법 조항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써,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모독자들, 위증자들, 안식일 파기자들, 험담가들, 그리고 간통 자들 각각에 대한 특수한 저주가 따로 따로 나오지 않고 모두가 똑같이 한 저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율법의 모든 계명 중에 하나라도 어기는 것은 같은 저주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말하는 레위인은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을 가리킨다(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 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 경우에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장색은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그리고 은밀히 세우는 자란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율법의 둘째 돌 판에 해당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기 부모에게 불효하는(impii)자들을 가리켜 저주받은 자들로 선언하고 있다. 경홀히 여긴다(칼라)는 말의 원 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평가절하 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행위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는 말의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인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Calvin).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눈을 피하는 도둑질과 간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짐승, 장모, 계모, 또는 누이와 결합하는 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죄의 목록들은 인간들의 타락한 부패성으로 인하여 범하기 쉬운 것들이거나, 아니면 현재에 가나안에서 범해지고 있는 죄들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살인자를 다 열거하지 않고 뇌물을 받고 무고한 피를 흘린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청부 살인의 흉측한 맹약은 (인간의)법의 처벌을 받을 정도로 쉽게 발각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반드시 처벌되어야만 하는 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계표'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 뜻한다(창 31:51,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 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는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롬 15:1).

  율법은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레 19:14). 객이나 고아나 과부는 가난하며 약한 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될 것이 선포되었는데,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계모와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누이는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 결코 정당화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데, 그 이유는 첫째로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며, 또한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 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 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누구든지 율법의 요구사항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하지 아니한 다른 모든 율법의 조항들도 역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율법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귀중한 것들이며, 만일 이들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소홀히 여기는 자들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원리 때문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갈 3:10). 제 아무리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신은 율법을 지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겠지만, 이곳이나 저곳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 가 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율법에 충실하여 그 계명을 지키려 할수록 더욱 더 자신의 나약함과 죄성을 느끼게 될 것이며,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적  용 >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들을 주의해서 지켜야 한다.

2. 범죄들 중에서 특히 우리의 환경에서 범하기 쉬운 죄들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특히 이러한 죄에 대하여 경계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동으로 지은 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은밀한 범죄까지도 모두 찾아서 심판하신다.

3. 우리는 율법을 통해(행위)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선물을 받아들일 때에만 참 의와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2. 율법 준수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 선포(28:1-68)

 2-1. 율법 준수에 따른 축복 선포(1-14)
  본문에서 복은 주로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것들을 가리키고 있는 듯이 보인다. 구약은 이러한 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내적이며 본질적이고 영적인 복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마 5:1-12). 그러나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근본적인 복의 개념은 동일하다. 곧 참된 복은 인간이 추구해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인데, 이것은 순종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시며 복 자체가 되시기 때문이다(창 15:1, 시 23:28, 요 15:5 등). 따라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축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원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찾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것이다.

  가.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심(2)

  나. 어디서나, 무엇에나 복을 받음(3-6)

  * 어디서나(성읍에나 들에서나)
  '성읍'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붐비며 각종 사건과 소문이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따라서 그러한 곳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뭇 사람들이 역력히 알 수 있는 공개적이고도 큰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들'은 사람이 매우 드문 한적한 장소이다. 따라서 그러한 곳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지라도 사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여기서 '성읍'과 '들'은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어디에 있든, 그리고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입게 되리라는 의미이다(Delitzsch, Lange).

  * 항상(들어가도, 나가도)
  들어와도 복을 받는다는 말은 일을 마치고 귀가하거나 또는 휴식을 취하러 집으로 들어올 때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입을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하여  일터로 나가는 길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그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케 되게끔 도와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 모든 것에(자녀, 소산, 짐승 새끼, 떡반죽 그릇)
  네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는다는 말은 가축의 증산(增産)이 원활히 이루어져 그 수효가 크게 번성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유목(遊牧) 민족에게 있어서 큰 축복이다(7:13). 광주리나 떡반죽 그릇은 물건을 담는 모든 것을 말한다. 한편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주식으로 삼은 것은 만나였다(출 16장). 그러나 가나안 정착 후에는 '떡반죽 그릇'에도 복이 임하리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식생활을 만족시켜 주사, 가나안에서는 개개인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도록 하시었다는 의미를 지닌다(수5:10-12).

  다. 승리(7): 대적이 한 길로 치러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감

  라. 창고와 하는 모든 일(사업)에 복 받음.(8)
  우리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결과를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점과 그의 은밀한 축복이 따르지 않는 우리들의 모든 노력은 그 자체가 단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위도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 손의 수고를 요청하지만, 우리의 수고의 결과는 자신의 것으로 돌리시는 것이다. 율법을 모두 말씀하시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핵심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상대로 시작하신 은총을 계속 베푸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지배를 계속 받아 들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청하실 뿐 아니라, 그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이것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심(9-10)

  바. 풍성함(11-12)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먹는 빵만 공급하실 뿐 아니라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해서 땅을 적시게 하실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그의 하늘 창고, 곧 보고에서 내보내신다는 말씀도 같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대기의 온도, 햇빛, 강우량이나 땅의 비옥함에 있어서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의 보고를 열어제치고 다양한 풍요를 제시하시는 징조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리고

  사.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심.(13)
  여기서 '머리'(로쉬)는 '명예'와 '존귀'를 상징한다. 그리고 '위'는 '머리'에 대한 병행구로서 강조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꼬리'(자나르)는 '부끄러움'과 '비천'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래'는 '꼬리'의 병행구로서 강조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2-2. 불순종에 따른 저주(15-68)
  여기에 나오는 저주는 시내 산에서 선포한 것에 비해 더 종류가 많은데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께서 이 백성의 태만 때문에 더 예리한 자극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절제하는 마음으로 순응했더라면 이미 그들이 들은 것만으로도 그들을 경고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타성과 망각 때문에 그들에  대한 경고를 배가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계속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가. 어디에서나 (성읍에서나, 들에서나), 언제나(들어가도, 나가도), 무엇에나(광주리, 떡반죽 그릇, 자녀, 토지 소산, 우양의 새끼까지) 저주가 임함(16-19).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집 안팎으로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요, 또 씨앗의 종자와 음식이 모두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세 가지 결실, 곧 자손, 땅의 소출, 짐승의 새끼들에 대한 저주가 따르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을 '열매'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나. 저주와 공구(큰 소동, 당황함)와 견책을 주어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심.(20)

  다. 질병 (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한재, 풍재, 썩는 재앙)(21-22), (애굽의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 미침, 눈멂, 경심증(27-28),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나게 하심.(35)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계속 완강하게 불경건을 고집할 경우 여러 질병을 그의 선발대로 보낼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염병을 보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일단 밀착되면 떼어 낼 수 없게 만들 것을 선언하고 있다. 곧 이 염병이 그들에게 척 달라붙어서, 아니 풀칠해져서 성지에 있는 그들을 전부 소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질병이 나열되고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재앙을 집행하기로 준비태세를 갖춘 숱한 사역자들(satellites)이라는 이야기이다. 폐병(솨헤페트)은 '여위게하다', '소모하다'란 뜻의  '솨하프'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몸의 정력을 소진시켜 사람을 죽게 하는 병으로서 일명 '결핵'(tuberculosis)으로도 불리운다. 열병(달레케트)은 '불붙다'는 뜻의 '달라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심한 열을 발생시키는 '염증'(inflammation)을 가리킨다(Delitzsch, Keil, Lange). 종기(쉐힌)는 부스럼(Living Bible, boil)이나 염증, 독종 따위를 가리킨다. 치질은 '항문의 질병'이며, 괴혈병은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인해 빈혈이나 출혈 증상이 생기고, 전신 피로 혹은 무기력 증세가 따르는 병이다(레 21:20). 개창은 애굽, 수리아 등 고대 중.근동 지역에 흔한 질병으로서 일반적으로 피부가 마르므로 인해 생기는 '가려움증'(KJV, itch)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현기증과 광기로 후려치셔서 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경심증(타마)은 '간담이 서늘하도록 놀라다'는 뜻으로, 터무니없이 자주 깜짝깜짝 놀라는 증세를 가리킨다.

  라. 자연 재해 : 비 대신 티끌과 모래를 내리심(23-24)
  한재(헤렙) 는 '황폐하다', '파멸하다'란 말에서 온 단어로 '칼'이나 '예리한 도구'를 가리키기도 한다(13:15;창 27:40;수 5:2).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 극심한 가뭄'을 의미한다. 풍재(쉬다폰)는 '말라 죽게 하다'는 뜻의 '솨다프'에서 파생된 단어로 마르고 시드는 '고조병'(枯凋炳)을 가리킨다. 이는 농작물을 시들게 하는 건조한 바람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므로 공동 번역은 '열풍'으로도 번역하고 있다(창 41:23). 썩는 재앙(예라콘)은 '창백'이란 뜻의 '예레크'에서 온 단어로서, 찬이슬로 젖어 있는 잎사귀가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나 태양열로 인해 썩어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Keil). 한편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곰팡이'(mildew)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너를 치신다는 말에서 '치다'에 해당하는 '나카'는 '살해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한 적대 행위를 의미한다. 하늘은 놋이 되고 땅은 철이 될 것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땅이 쇠 덩이처럼 굳어 버리는 극심한 한발(旱魃) 현상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레 26:19). 팔레스타인은 비교적 우기(10-4월)와  건기(5-10월)가 명확히 구분된다(11:14). 따라서 우기(雨期)에  적당한 양의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기 쉽다.  또한 건기(乾期)에는 이따금씩 내리는 비와 이슬만이 식물에게 수분을 제공하는  공급원이 될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때 가뭄이 들게 되면 초목들은 말라죽고 땅은 메말라 갈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비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표현이라면(12절), 본 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말이다.

  티끌과 모래는 황폐한 토양에 바람이 급하게 불 때 일어나는 흙먼지를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뜨거운 바람인 '시로코'(sirocco)  때문에 이러한 먼지가 자주 일어난다(Robinson, Thomson). 그러므로 이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안질이나 오한(惡寒) 등의 병에 걸리기 쉽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내왔던(8: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탓에  결국 가나안 땅에서  이러한 현상에 시달리게 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마. 패배(25-26)-한 길로 치러 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함. 온 땅에 흩어짐. 그들의 시체가 새나 짐승의 밥이 되나 그들을 쫓아 줄 사람이 없음.
  율법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누리게 되는 축복과는 정반대 되는 저주이다(7절).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한다는 말에서 '흩음을 당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자아와'의 기본형 '제와아'는 '진동하다',  '움직이다'란 의미이다. 여기서부터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란 의미가 파생되어 결국 본 절의 의미는 땅의 모든 나라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공의 신세가 될 것이란 뜻이다. 그들이 '세계 만국 중에서 따돌림감'(a remoring)이 될 것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것을 우리가 남을 모욕할 때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보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나라에 유배되어 방랑자와 유랑자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

  바. 영적 어둠, 압제와 노략 당함, 구원자가 없음(29)
  네가 백주에도 더듬는다는 말은 인간사(人間事)에 있어서든 영적 구원 문제에 있어서든 올바른 지향점이나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방황하는 것을 의미한다(Delitzsch).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란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품을 떠나 불순종의 패역한 길을 걷게 될 때, 그들은 치료의 하나님이시요(출 15:26), 구원의 하나님이신(대상 16:35;시 18:46) 여호와께 버림당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이다.

  사. 약혼자가 다른 남자와 자고, 새로 산 집에 타인이 거하며, 포도를 다른 사람이 먹음.(30)
  여자, 집, 포도원을 빼앗긴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소유가 하나도 남김 없이 원수들에게 약탈당하리라는 경고이다. 특히 자신과 약혼할 처녀를 원수에게 빼앗기거나, 자기 품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가장 가슴 아프고도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신랑인 남편을 저버린 데 대한 가장 합당한 처벌임에 분명하다.

  아. 자녀, 소, 나귀, 양을 빼앗기고 약하여 힘이 없어짐.(31-32)
  소, 나귀, 그리고 양은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산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대적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곧 경제적 파산(破産)을 의미한다(4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는 그러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고 그 자녀들을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넘기겠다고 경고하셨다. 특히 자식은 한 가정의 기쁨일 뿐 아니라, 한 국가의 미래이니 더욱 그러하다. 눈이  쇠하여지다 에서 '쇠하여지다'에 해당하는 '칼라'는 너무도 간절하고도 애타는 마음으로 인해 눈이 극도로 피곤해지거나 상한 상태를 가리킨다(시 119:81;사 38:14).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란 말은 대적들의 노략질에 대하여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고 앉아서 당하기만 해야 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무능한 상태가 될 것이란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열방의 머리가 되고(13절) 또한 세계 만민이 보고 두려워 떨게 될 것이라는 말(10절)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자. 토지 소산과 수고한 것을 타인이 먹음. 압제와 학대당함. 이 일로 인해 미침.(33-34)

  차. 왕이 포로가 됨(36)-이방인은 점점 높아지고 이스라엘은 점점 낮아지며, 그들은 꾸어 주나 이스라엘은 빌리고, 이방인들은 머리가 되나 이스라엘은 꼬리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지고 이스라엘은 점점 낮아지게 될 것이다. '이방인'을 가리키는 '게르'는 '나그네','손님', '타국인' 등과 같은 뜻으로, 이스라엘에 귀화(歸化)하지는 않았으나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同化)되어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는 이방 잡족(雜族)을 의미한다(10:18). 표적(오트)의 원뜻은 '깃발', '신호'(sign)를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어떤 사실에  대한 '증거'(사  19:20)를 뜻한다. 본문에서는 이 말이 이스라엘의 파멸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니  '경고' 또는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감계(모페트)는 '증표', '징조'(omen)란 뜻인데 사실상 '표적'과 같은 말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한 이스라엘은 모든 재앙을 맛보게 될 것이다. 철 멍에는 매우 견디기 힘든 무겁고도 견고한 속박을 의미한다. 사실 목이 굳을 대로 굳은 이스라엘(왕하 17:14)에게 있어 그 같은 철 멍에의 속박(대하 36:17-20)은 아주 적합한 형벌이었다. 원방에서 한 민족이 치러 온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패역할 때마다 그들을 괴롭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든 열방을 가리킨다.

  카. 모든 것이 풍족할 때에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에는, 먼 곳에서 잔인하고 사나우며, 용모가 흉악한 민족을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함.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녀를 몰래 잡아먹게 될 것이다.(47-57)
  이들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그들이 방심하는 것을 막는 뜻에서 이들이 독수리처럼 잽싸게 날아와서 그들을 덮칠 것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폭풍을 그의 진노의 사역자로 비교하시는 말씀 그대로다. 모세는 이 민족은 '철면피'여서 노약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광포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뒤에 이어지고 있는 약탈과 노략질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란 것은 외형적 모습을 묘사한 말이 아니라, 노약자나 어린아이도 무자비하게 해칠 정도로 '성질이 매우 거칠고 포악한 것'(잠 21:29)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의뢰하는 성벽을 다 헐 것이다. 이 예언은 B. C. 586년 남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 성읍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 있다가 결국에는 함락되고 만 역사적 사실(왕하 24:20-25:12; 대하 36:13-21)로 성취되었다(25절). 실제로 당시 유다 왕국은 하나님보다도 자신들의 견고한 성읍과 높은 성벽을 더 의지하고 이로써 충분히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었다(사 25:12;렘 50: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아 자녀의 고기를 먹게될 것이다. 이때에는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도 질시하여 자녀의 고기를 자신만 먹으려고 싸울 것이다. '질시하여'(테라)란 말은 '악한 눈으로 보다' 또는 '~에 대하여 악한 눈을 가지다'란 의미이다. 이는 자녀를 더 이상 자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먹을 고기 덩어리로만 보는 극악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가족끼리도 서로 자녀의 고기를 혼자만 먹겠다고 질시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만큼 야만적이며 야수화(野獸化)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 준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의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배고픔이 그 극치에 이를 경우, 평소 우아한 품위를 자랑하던 귀부인들조차도 모든 품위와 자제력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심지어 자기 태의 자녀까지 식용으로 잡아먹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타. 만일 끝까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멸망할 때까지 칠 것이라고 하심(58-61).

  파. 포로된 땅에서 평안함을 얻지 못하고 발바닥 쉴 곳도 찾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하게 하심(65).

                                    <적 용>
1. 성도들의 미래는 말씀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달려 있다.

2.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실 때에 모든 일에 형통케 해 주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말씀에 불순종할 때에 모든 일에 징계를 내리실 것이다.  


3. 계명의 결론(29-30장)

 3-1. 언약의 갱신(1-17)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세대들과 함께 호렙 산에서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들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모압 평지에 진치고 있는 세대는 그 당시 20세 미만이었던 새로운 세대들이었다. 따라서 모세는 새 세대들에게 호렙 산 언약을 새롭게 갱신해 줄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1).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 즉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목도한 일을 상기시켰다(2-3).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늘날까지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하였다(4).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친히 목격하고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강퍅하고도 굳은 마음(출 32:9;34:9)을 경책(警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인도로 인해서 사십 년 동안 거친 사막 가운데에서도 별 불편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은 40년 동안 옷이 낡지 아니하였으며,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다(5).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농사를 금하여 떡이나 포도주, 그리고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그 이유는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사는 것이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6).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전진할 때에 그들의 길을 가로막았던 아모리 족속의 두 왕국, 즉 시혼과 바산 왕을 치고 그 땅을 두 지파 반에게 준 일을 상기시켰다(7-8).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앞으로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시켜 준 사건이었다. 모세는 이 사건을 목격한 이스라엘에게 마땅히 율법을 지켜 행할 것을 권면 했다. 지키다(솨마르)는 말은 '주의를 집중시키다', '세심히 보다'란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을 '주의를 기울여 순종하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모세는 율법 순종만이 이스라엘이 형통케 되는 길임을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9). '형통하다'('사칼')는 말은 '깨닫다', '지혜롭게 행하다', '신중하다'는 뜻이었으나, 점차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 따르게 되는 '번창'과 '성공'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절은 '너희가 이 언약의 말씀을 주의하여 순종하면 너희가 모든 일에 신중해지고 지혜롭게 되어서 결국 번창하게 될 것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모세는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서 두령과 모든 이스라엘 지파, 즉 장로들과 유사(공직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 뿐 아니라, 백성의 계수에 들지 못하는 유아들과 아내들, 그리고 진중에 있는 객과,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하였다(10-11). 이들 모두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계수(計數)되지도 못한 자들이었으나, 모세는 이들도 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언약의 대상자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곧 여호와께서 세우신 언약은 남녀노소, 신분, 계급, 민족이나 혈통 등에 관계없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거하는 모든 자에게 그 효력이 미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장차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8:6)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례당이나 무할례당, 야인(野人)이나 스구디아인 그리고 종이나 자유인이나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골 3:11;롬 4:23,24; 10:11-13)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으신 이유는 그들을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12). '참예하다'('아바르')는 말은 원래 '분할하다', '통과하다', '들어가다', '넘어가다'는 뜻으로서, 이 말은 원래 고대 사회에서 언약 체결 시, 언약의 당사자들이 언약의 담보로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갠 후 그 사이로 통과하면서 만일 어느 한쪽이 언약을 어길 시에는 그 짐승이 당한 것처럼 처참하게 보복 당할 것을 다짐한 데서 유래된 용어이다. 따라서 본 절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결단코 파기(破棄)할 수 없는 언약을 체결한 상태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었다(13).           

  모세는 이 언약이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있을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해당한다고 하였다(14-15). 이 말은 여호와의 언약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무한히 확대됨을 강조하고 있다. 혹자는 이 말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후손'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표면적(表面的) 유대인 뿐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 즉 영적 이스라엘 백성된 모든 신자(롬 2:28, 29)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Sange).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장차 그 후손들이 참여하게 될 여호와의 언약은 이미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과 본질상 동일하므로(롬 4:11, 16),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된 우리 성도들도 통시적(通時的)으로 이미 그 언약의 동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뭏든 본절은 여호와의 언약 신앙이 편협한 민족주의 신앙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우주적(universal) 신앙임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광야를 여행하면서 아말렉 족속과도 싸웠고(출 17:8-16), 아말렉과 가나안의 연합군(민 14:45), 아랏족(민21:1-3), 아모리 왕 시혼(민 21:21-25), 바산 왕 옥(민 21:33-35)과도 싸웠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미디안 족과 싸우기도 했다(민 31:1-12).

  이스라엘은 이 모든 전투에서 훈련도 받지 않은 엉성한 군사력으로 연전 연승하였다. 본절에서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백성들에게 회상시키면서 그들 이방 족속의 우상들은 모두 헛것이며, 단지 쇳덩이, 나무토막에 자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여호와 하나님만 천상 천하에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다(16). '우상'('길룰')은 '굴리다'는 뜻의 '갈랄'에서 온 말로서, 본래는 굴려서 운반하기에 편하도록 토막낸 '통나무'를 가리킨다(Gesenius). 그러나 점차 이것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상'을 뜻하게 되었다. 즉 이는 우상이 헛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경멸어이다(Lange)(17).

                                 < 적 용  질 문 >
1.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한 후에 깨닫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도 소경 된 마음으로 불순종하며 살고있는가? 불순종하고 있다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다른 음식을 금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3.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4. 하나님의 언약에 남녀 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참여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는가?
5. 본문은 하나님의 언약이 후손에게까지 유효하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가?


 3-2. 언약을 어길 때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18-2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날 두 가지를 크게 염려하였다. 첫째는 이스라엘 중에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나서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는 일이었으며(18), 둘째는 독초와 쑥의 뿌리 같은 악한 생각이 생겨서, 율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을 강퍅케 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은 멸망해도 자신만은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19). 여기서 염려한다(펜)는 말은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어떠한 일을 하지  말라고 엄격히 금지하거나 강하게 경고, 또는 충고하는 말이다(Gesenius). '독초'('로쉬')는 본래 뱀의 독(욥 20:16)을 포함한 일반적인 '독'(poison)을 가리키는 말이다(Keil). 독초와 쑥은 모두 자생력(自生力)과 번식력이 왕성한 야생(野生)식물을 가리키는 바, 이것들은 독성이 강할 뿐 아니라 매우 쓴맛을 낸다(Kitto). 따라서 여기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패역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를 주장하는 자들(호 10:4;암 6:12;히 12:1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들은 군중의 마음 밭에 죄악의 독을 퍼뜨려 순식간에 그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넣는 독초와 쑥의 뿌리 같은 자들이기 때문이다(Keil). '젖은 것'(KJV, drunkenness)과 '마른 것'(KJV, thirst)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혹자는 '젖은 것'이란 '우상 숭배나 정욕에 흠뻑 빠진 자'를 의미하며,  '마른 것'이란 '끊임없이 우상 숭배나 정욕을 갈망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Knobel). 반면에 공동 번역은 이를 각각 '물이 콸콸 솟는 동산'과 '메마른 사막'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너무 여자적(如字的)인 해석에 치우쳐 있다.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에 '젖은 것'과 '마른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인들의 격언으로 이해함이 가장 무난하다(Baumgarten). 그러므로 이 말은 저주가 임하여 모든 것이 멸망해도 자기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강퍅하고 화인(火印)맞은 마음(렘 6:14,15)을 묘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부으시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결국 그의 이름을 세상에서 없애버리실 것이다(20-21). 여기서 '분노'란 죄를 혐오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질투'란 택한 백성들에게 쏟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6:15). 이스라엘은 이미 광야에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을 경험하였으니(민 11:1-3;16:1-35), 본 절의 경고는 그들에게 실제적인 두려움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권 하에서 완전히 제외시킨다는 뜻이다(25:19; 출 17:14). 모세는 이러한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과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은  앞에서 언급된 질병들을 가리킨다. 즉 염병과 폐병, 열병, 상한, 학질(28:21, 22)그리고 애굽의 종기와 치질, 괴혈병, 개창, 미침, 눈멂, 경심증(28:27, 28), 또한 종기(28:35)등을 말한다. 그리고 온 땅이 유황과 소금이 되고, 또 불에 타서 심거나 거두지 못하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2-23). 아드마는  '붉은 흙'이란 뜻으로 소돔 근처에 있던 성읍 중의 하나이며(창 10:19), 스보임은 '영양'(羚羊)이란 뜻으로 소돔, 고모라, 아드마, 소알과 더불어 사해 싯딤 계곡의 다섯 성읍 중 하나이다(창 14:2).

  이스라엘의 재앙은 너무나 커서 이방 사람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열방 중에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24). 그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스라엘이 자기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25). 이러한 일은 빛과 소금이 되야 할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치욕거리가 아닐 수 없다(2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반역과 범죄한 이 땅을 향하여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 내셔서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게 하실 것이다(27-28). 훗날 바벨론의 1차 침공 시(B.C. 606)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당시 이스라엘이 당하는 저주와 포로 생활 등이 분명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증거 하였다(단 9:11).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는 구체적으로 28:15-68;레 26:14-39에 기록된 저주 내용을 가리킨다.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이란 말은 그 어떠한 죄악도 결코 용납하시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중언법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들을 던지실 것이란 말('아쉘리켐')은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영원히 뽑혀나갈 것'을 말한다. 뽑아낸다(나타솨')는 말은 '철저히 파다', '뿌리째 뽑다'란 의미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할 것을 말한다.

  '오묘한 일'은 인간에게 계시(啓示)되지 않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신적(神的) 계획이나 섭리를 말한다. 그리고 '나타난 일'은 말씀이나 예언, 기적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하여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은 일은 성도들이 겸손히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이며, 계시해 주신 것(율법)은 성도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 지켜 행하라는 것을 말한다(29). 따라서 성도들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피조(被造)물 된 자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며,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적용 질문>
1.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찾거나, 독초와 같은 악한 생각에 빠질 것을 염려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러한 일이 없는지 살펴보고 대책을 이야기해 보자.

2. 성도가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면 불신자들 사이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

3.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것을 계시해 주시지 않고, 일부만을 계시해 주셨는가?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왜 유익이 되는가?   


 3-3. 회개에 대한 회복의 약속(30:1-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했을 때에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그들을 이방에 포로가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1). '기억하다'(슈브)는 말은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다'(3:20), '원상태로 회복되다'(삭 15:19)라는 뜻으로서, 이 말이 마음에 적용될 경우에는 '뉘우치다'(렘8:6)란 의미를 지닌다. 이 구절은 참된 회개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 먼저 자기의 잘못을 겸손히 깨닫고 뉘우치며, (2) 과감히 그 죄악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3)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다(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포로된 곳에서 흩어졌던 자들을 다시 모아 고국에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3-4). 여기서 '흩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선민(選民)의 자격이 상실되는 것을 뜻한다. 반면 다시 '모아진다'는 것은 선민의 자격이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무리 먼 곳에 끌려가 살고 있다해도 그들을 다시 불러모아 자신의 소유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후에는 조상들보다도 더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5).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어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생명'('하이')이란 말은 '신선한 생명', '힘있는 생명'이라는 뉘앙스(nuance)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15, 19, 20). 따라서 본 절에서 말하는 '생명'을 단순한 육적인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고로 말하면 구약 시대 당시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참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었다(시 27:1). 그리고 신약 성경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요 3:16).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을 욕하고 박해하던 대적들에게는 저주가 임하게 하실 것이다(6-7).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핍박했던 모든 대적들은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들어 쓰인 도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이스라엘보다 의로와서 선택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자신의 죄 값에 대하여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적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행하게 될 것이다(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율법에 기록된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그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하시고, 자녀와 육축의 새끼와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며,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9-10).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깨닫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 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생명의 등불'이며(시 119:105; 잠 6:23), 그것을 행함으로 복을 받게되는 '축복의 방편'이다(28:1-14; 출 19:5, 6). 이 구절은 집을 떠났던 탕자라 할지라도, 돌아오면 각양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눅 15:22-24).

                                   <적용 질문>
1.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진정한 회개는 1) 자기 죄를 뉘우치고, 2)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3)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회개를 하였는지 반성해 보고, 무엇이 부족한지 이야기해보자.

2. 하나님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후에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를 어떻게 대해 주시는가?  


 3-4. 축복과 저주의 길(30:11-20)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어렵거나,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다(11). '어려운'('팔라)이란 말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삼하13:2) '기이하거나', '놀라운 일'(잠 30:18)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은 너무 어려워서 인간이 그 도(道)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Keil, Schultz, Knobel).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밝히 계시(啓示)되어 있는 것이다(29:29). 그러므로 누구라도 쉽게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요일 5:3). 물론 이는 상대적이긴 하다.  왜냐하면 심령이 완악한 자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13:13).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와 같은 가난한 심령이 필요하다. 실제로 율법은 성도들의 얻기 어려울 만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 율법은 하늘 위나 바다 밖과 같은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독자들의 입과 마음에 있어서 쉽게 행할 수 있었다(12-14). 율법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다(딤후 3:16, 17).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저기 저곳'(over there)에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곳'(here)에 있다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읽을 수 있으며 강론(講論)할 수 있다는 말이다(Lange).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늘 묵상하여 자기 마음속에 담아 둘 수 있다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6:6)라고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빈부 귀천이나 남녀 노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 말씀을 순종함으로 가는 생명과 축복의 길을 예비하셨고, 또한 불순종으로 갈 수 있는 죽음과 저주의 길을 예비하셨다(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이 두 가지 중에서 그들이 양자를 똑똑히 주목하여 살펴 관찰한 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예비해 놓으신 길은 '생명 및 복(福)의 길'과 '사망 및 화(禍)의 길'이라고 하는 단 두 갈래 길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좁은 문'과  '넓은 문'으로 비유하셨다(마 7:13, 14).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벗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더 늦기 전에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따르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약 4:8).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그들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고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서 복을 받게될 것이다(1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연스런 외적(外的)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5:3). 그러나 만일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17-18).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시 1:4),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아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약 1:6, 8). 우상 숭배 행위는 사망과 저주에 이르는 치명적 단계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질투의 하나님이시다(6:15;출 20:5). 그러므로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다른 헛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결단코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밀로 인하여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순종하여 축복과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고 권하셨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맺은 축복과 저주의 언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모세가 천지(天地)를 증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1) 지금 맺고 있는 언약이 마치 언제나 요지부동한 천지처럼 확실하고 불변하며 영구하다. (2) 또한 이 언약 체결이 전 우주적인 관심사가 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과 저주를 원하지 않고,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참 생명과 참 행복을 향유(享有)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그것은 곧 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시  27:1), 그리고 참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시 16:2)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생명의 도(道)를 따라 걷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마땅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그에게 부종 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부종(附從)하다'('다바크')는 말은 '굳게 연합하다', '착 달라붙다', '밀접히 결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각별한 애정이나 우정을 나누는 사이를 의미한다. 이는 곧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함을 말해준다(10:20).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께 가까이하여 그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이 모세 설교의 핵심으로서, 곧 축복과 생명을 길이 누리는 참된 비결임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19-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이 복 받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만가지로 가르쳐 주셨다(호 8:12).

                                    <적용 질문>
1. 본문 말씀은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지키기 어려워서 행할 수 없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와 같이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2. 하나님께서는 운명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길을 모두 정해 놓으셨는가? 아니면 축복과 저주의 길을 놓고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는가?   

3. 본문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을 친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가?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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