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베드로후서

[스크랩] 베드로후서 (1 : 1~2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28
베드로후서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ㅇ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 -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자신을 두 가지
호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
는 당시 사회에서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노예'를 가리킨다. 본
문은 베드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존재이며 동시에 수신자들과 동
등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으로 베드로 자신의 겸손을 시사한다(Blum, Green). (2)사도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문자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
미로 베드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대리인임을 시사한다
(Lenski, Blum). 이 것은 베드로 자신의 사역과 권위를 강조한 표현이다(Kelly,
Bauckham). 한편 '시몬 베드로'로 번역된 헬라어 '쉬메온 페트로스'
에서 '쉬메온'은 '쉬므온'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며,
'페트로스'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케파스'와 동일한 것으로 '반석'을 의
미하는 별명이다(서론참조).
ㅇ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문이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
도'라는 두 위격(位格)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Plumptre, Mayor, Windisch,
Kasemann). (2) 혹자는 '하나님과 구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것으로 한 위격
(位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auckham, Blum, Bigg). 두 가지 견
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하나의 관사인 '투'
에 의해서 수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란 칭호는 비록 드물게 사
용된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으며(요 1:1,18;20;28;히 1:8,9) '구
주'또한 기독론적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11절;2:20;3:2,18;눅 2:11;요 4:42; 행 5:31;
13:23;엡 5:23;딤후 1:10;딛 1:4;2:13;3:6). 한편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
쉬네'는 '동일하게 보배로운'과 연결된 것으로 (Bigg,
Bauckham) 믿음을 힘입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라기보
다는 (Spicq, Stoger)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공정함을 의미한다
(13절;2:5,7,8,21;3:13, Green, Bauckhanm, Bigg).
ㅇ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 - '동일하게 보배로운'의 헬라어
'이소티몬'은 '이소스''('동등한')와 '티메
('명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같은 특권을 가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
와'와 대조된 것으로 혹자는 베드로와 같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대조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나(Plumptre, Mayor, Leaney)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과 사도
가 아닌 그리스도인을 비교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Moffatt, Spicq, Zahn,
Lumby,James). 왜냐하면 본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
문이다(Bauckham).따라서 본문은 본서의 수신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과 동등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에 동참하였음을 시사한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ㅇ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 본절의 '앎'은 일반적인 지시를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가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이다. '에피그노시스'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원을 얻는데 꼭 필
요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말하는 반면에(3절;2:20, Bultmann), '그노시스'는 기
독교적 생활 과정에서 획득되어지고 발전되어지는 지식을 의미한다(5절,6절;3:18,Bau-
ckham).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에피그노시스'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다 깊고 참된 지식을 소유하게 되며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된다(Green).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ㅇ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신령한
능력'의 헬라어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
는 '희한한 능력'(행 19:11)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말한다(수 22:22;시 50:1;사 9:6;겔 10:5). 그러나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를 수
식하는 '그의'가 가장 가깝게 언급된 것이 '그리스도'이며 1절에서 '우리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문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Green, Bauckham, Bigg).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제2위격이신 하나
님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신기한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
력을 공유한 자이심을 시사한다(Fornberg, Bauckham).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의 신적인 능력을 통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생명'은 인간
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원동력, 즉 예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의미하는 것
으로(요 1:4;요일 5:11, 12) '영생'을 암시한다. 또한 '경건'은 변화된 자가 지니게
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 3:12;딤후 3:5)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순종함으로 누리게 되는 도덕적인 생활을 시사한다(Bauckham).
ㅇ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영광과
덕'의 헬라어 '독세 카이 아레테'는 신적인 능력의 현시
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LXX 사 42:8, 12)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과 덕'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
시키며 회개토록 역사하신다(Blum). 한편 본서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
므로(8절;2:20) '부르신 자'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
하다(Bigg, Green, Bauckham).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ㅇ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
다.
ㅇ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
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
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
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ㅇ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
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
에서 헬라어 '데이아스'('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
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
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
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
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
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ㅇ이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아우토 투토'
는 문자적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for this very reason)라는 의미로 3,4절
전체를 받는다(Bauckham).
ㅇ더욱 힘써...공급하라 -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은 구원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모
든 영적 자원을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원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성숙을 향
하여 진보해가야함을 권면한다. '공급하라'의 헬라어 '에피코레게사테'
는 무대 공연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된 것으로 풍부
하게 공급하고 지원하라는 의미이다(Green, Blum).
ㅇ믿음에 덕을 -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엡 2:8,9)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응답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며 세상과 썩어질 것을 피하
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4절). 따라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
탕이 된다(롬 5:1; 히 11:1;유 1:20). 베드로는 이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권면
한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텐'은 '디카이오쉬네'
('의')와 동일한 것으로 도덕적인 탁월성을 의미한다(Bauckham,
Green).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덕을 말하는 것으로(3절)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도덕적 탁월성을 배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빌 4:8;벧전 2:9).
ㅇ덕에 지식을 - '지식'은 기독교인이 덕있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 또는 '통찰력'을 말한다(롬 15:14;고전 13:2;벧전3:7, Bauckham).이
것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진다.
ㅇ지식에 절제를 - '절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에서 높이
평가되는 덕목이다. 신약성경에서 절제는 육체적 욕망의 지나친 방종과 이방 세계의
성적 남용(濫用)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23).
ㅇ절제에 인내를 - '인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소망
하는 가운데 고난과 악에 대항하여 용기있게 지속적으로 참는 것을 가리킨다
(Bauckham). 이것은 믿음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세상 체계의 압박에 저항하는 능력으로
(눅 8:15;롬 5:3;히 12:2) 환난에 직면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견디어서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ㅇ인내에 경건을 - '경건'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헌신하여 하나님의 성
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Green, Blum). 특별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하나
님의 뜻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도덕적 생활방법을 나타낼 때 사용하
였다.
ㅇ경건에 형제 우애를 - '형제 우애'는 베드로전서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으며(벧전
1:22;3:8)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덕목이다(롬 12:10; 살전 4:9;히
13:1; 요일 5:1). 이방 세계에서는 이 단어가 혈육을 나눈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Bauckham).
ㅇ형제 우애에 사랑을 - '믿음'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사랑'으로 완성된
다. '사랑'은 모든 덕목들 가운데 으뜸이며(고전 13장),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께서 아
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세상에 보여주신 것으로 남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
하는 행동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요 3:16;롬
5:5; 요일 3:16;4:8). 이와 같은 덕목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맺어야 하는 열
매로서 바울이 언급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하나님의 사람'(딤전 6:11)이 갖
추어야 할 덕목과 내용이 유사하다. 위의 모든 덕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점진
적으로 얻을 수 있으며, 각 덕목은 다른 덕목들과 상호 관계 속에서 생성되며 발전된
다.이러한 덕목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사랑으로 완성되어가야 한다(Bengel).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ㅇ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앞서 언급한 덕목들의 목적이요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Mayor, Reicke, Green, Spicq). (2)혹자는 그리스도을 아는 지식이 앞서 언급한 덕목
들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Bigg, Kelly, Bauckham).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시며(3절) '알기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그노신'
이 2절에서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인의 전
생활에 기본이 되는 구원얻는 지식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Bauckham).
ㅇ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 '게으르지'
(아르구스)와 '열매 없는'(아카르푸스)은 본서에서 동의어로 사용
된다(Bauckham). 이 두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윤리
적 노력과 관계되어 쓰여졌다. '게으름'은 '행함이 없는 믿음'(약 2:20)을, '열매없
음'은 윤리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삶을 나타낸다(마 3:8;막 4:20;갈 5:22;골 1:10;
약 3:18).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ㅇ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 5-7절에서 언급한 덕목들을 갖추지
못한 자들에 대한 묘사이다. '소경'의 헬라어 '튀플로스'는 신약성경
에서 진리 보기를 거절하거나 보지 못하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어졌다
(마 15:14;23:16;눅 6:39;요 9:40,41;롬 2:19). 또한 '원시치 못하고'에 해당하는 헬
라어 '뮈오파존'은 '근시'라는 의미로 본절에서는 '튀플로스'
와 함께 결합하여 장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Bauckham). 앞서 언
급한 덕목들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의 빛을 잃어버려서 영적 안
목이 어두워진 자들이다(계 3:17, Bigg). 이들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인간적인 탐욕
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ㅇ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 본절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세례에 대한 언급이다. '옛'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라이'로 미루어 볼
때 베드로는 본절에서 과거에 행한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죄가 청산된 것을 잊어
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을 전제로 언급하고 있다(Blum, Bigg). 또한 '깨끗케
하심'의 헬라어 '투 카다리스무'도 역시 정결케 하는
세례를 가리킨다(행 22:16;고전 6:11;엡 5:26;딛 3:5). 본래 세례는 죄 용서와 더불어
이제까지의 죄된 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믿음을 세례에만 국한시킨
나머지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옛 죄악의 상태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다(2:20). 이에 베드로는 죄악된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경고하면서 세례가 죄
를 씻을뿐만 아니라 더이상 죄에 머물지 않고 성결한 삶을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
음을 상기시킨다(Bauckham).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ㅇ택하심을 굳게 하라 - 본절은 5절의 반복으로 부지런히 애쓰라는 권
면이다. '굳게 하라'의 헬라어 '베바이안...포이에이스다이'
에서 '베바이안'은 의사(意思)를 확인할 때 사용하는 법률 용어로 무엇
을 '확실히 한다'는 의미이며, '포이에이스다이'는 중간태로서 수신자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시사한다(Blum, Bauckham, Bigg).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하
나님의 '부르심'(벧전 1:15;2:9,21;3:9;5:10)과 '택하심'(벧전 1:2)에 관계되어 있음
을 밝히고 있다(Richardson). 그런데 베드로가 본절에서 '부르심'을 먼저 언급한 것은
인간의 응답에 강조점을 두기 위함이다(Blum). 즉 복음에 합당한 윤리적 삶을 강조하
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하며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Blum, Bauckham).
ㅇ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 '실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타이세
테'는 원래 말(馬)이 '디딤돌에서 미끌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프타이세테'에 대해서 혹자는 '범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11:11;약 2:10;3:2,
Blum, Green). 그러나 본절의 '프타이세테'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원
얻지 못하는 것을 시사한다(유 24:Bigg, Richardson, Kelly, Lenski, Grundmann). 왜
냐하면 다음 절에서 영원한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노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다(Bauckham).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ㅇ이같이 하면...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주시리라'의 헬라어 '에피코레게데세
타이'는 7절에 언급된 '공급하라'와 같은 단어
로, '넉넉히'(플루시오스)와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께서 거룩한 관
대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도록 하실 것임을 시사한다
(Bauckham). 비록 베드로가 앞절에서 궁극적인 구원을 얻는데 인간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였으나 본절에서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3절).
ㅇ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진술한다(눅 1:33;계 11:15).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본 단락(3-11절)에서 언급된 기독론적 관심과 일치시키기 위함일 것이
다(Bauckham). 이러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
으로(눅 22:30)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며(마13:41;16:28;눅 23:42;요 18:36) 미래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3:13)가리킨다. 한편 '우리 주 곧 구주'의 헬라어 '투 퀴리
우 헤몬 카이 소테로스'는 문
자적으로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이신'이란 의미로 기독론적 칭호이다(2:20;3:2,18).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주(主)이시다.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ㅇ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 '진리'는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
로(갈 2:5,14;5:7;엡 1:13;골 1:5;살후 2:12,13;딤후 2:15;약 1:18;요이 1:4) 전반적
인 사도적 가르침을 시사한다(Green, Blum, Bauckham). 한편 '섰으나'의 헬라어 '에스
테리그메누스'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형제를 굳게 하
라'고 권면할 때 사용하신 단어와 동일한 것으로(눅 22:32) 수신자들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굳게 서있기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의 위험에 쉽게 넘어지지 않
을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사도적 진리를 바탕으로 굳게 선
그리스도인들임을 인정하고하고 있다.
ㅇ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이미 진리에 서 있
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권고하는 이유가 수신자들로 하여금 항상 진리를 상기하고 부
지런히 애써서 진리 가운데 굳게 서있게 하기 위함임을 역설한다.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줄로 여기노니

ㅇ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 '장막'의 헬라어 '스케노마티'
는 문자적으로 고대 근동의 유목 민족들이 임시적인 거주지로 사용했던 '천막'을 가리
킨다. 본절에서 이것은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문은 '목숨이 살아 있을 때까지'를 의
미한다. 이는 베도로가 자신의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을 예감하였음을 암시한다(14절,
Blum, Bauckham, Green).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ㅇ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 본절은 베도로가 자신의 죽음
의 임박함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해주고 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지시는 요 21:18을 가리킨다(Plumptre, Bigg, Lumby, Green, Zahn, Bauckham,
Lenski). 요 21:18은 예수께서 친히 베드로가 노년에 당할 순교에 대해서 예고하신 것
으로 베도로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그 예고를 알고 있었으며
(Robertson) 당시 초대 교회에서도 요 21:18의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가 베드로의 순교
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대부분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다(Bauckham). 따라서 요 21:18
의 베드로 순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은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암시가 되며
본서의 수신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ㅇ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 베드로는 그의 죽음이 가까와옴을 깨
닫고 있었다. 여기서 '임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키네'는 베드로가
사용한 독특한 용어로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2:1). (1)'곧'(사 59:7), '신속한'
(약 1:19)을 의미한다(Bauckham). (2) '갑작스런'을 의미한다(2:1, Green, Zahn,
Plumptre). 이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한 견해를 선택하기는 어려우나 두 가지 의미 모
두가 베드로의 죽음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순교의 임박함을 암시한다(Meyer,
Bengel, Bigg).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ㅇ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 '이런것'은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행한 '교훈'이나 '권면'을 가리키는 것으
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이런 것'이 미래 즉 베드로의 죽음 후에 주어진
권면을 가리키며,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로서 베드로의 설교를 근거로 마가복음을 기
록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마가복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Irenaeus, Plumptre,
Bigg, Mayor, Green). (2)혹자는 '이런 것'이 본서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Knopf, Chaine, Windisch, Kelly, Grundman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
냐하면 본서내에서 마가복음과 상관 관계를 맺는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본서
전체와 12-15절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Bauckham).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언급한 모든 교훈과 권면이 자신의 죽음 후에도 보존될 뿐만 아니라 수신자들에게 계
속적으로 상기되어서 수신자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 굳게 설 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하
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나의 떠난 후'는 '나의 죽음 후'를 의미한다. 여기서 '떠
난'의 헬라어 '엑소돈'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은유적 표현으로 '죽음', '임종'을 시사한다(눅 9:31).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ㅇ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 본서에서
'능력'과 '강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안'
은 일반적으로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24:3,27,37,39;살전 3:13;4:15;약 5:7,8;요일 2:28). 혹자는 이
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Spicq, Chase) 본절의 '파루시아'는 미
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Bauckham, Green, Blum). 왜
냐하면 베드로는 본 서신 전체에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
호하기 위하여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
기 때문이다(3:4,12). 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민'은 '파루시아'
와 연결되어 '영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마 24:30;막 9:1;13:26;눅 21:27,
Bauckham). 그리스도의 능력은 재림하실 때 온 세계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마
26:64;막 14:62;행 1:11;히 9:28). 그의 능력은 재림을 통해서 불법한 자와 적대자들
을 심판하시고(살후 2:8;계 19:11-16) 그 나라를 온전히 완성하심으로(계 11:15-18)
드러나게 된다.
ㅇ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자라 -
'공교히 만든 이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
는 '지어낸 말', '허구', '우화', '신화', '거짓말'을 뜻
하는 고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진리와 대조되어 항상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
었다(딤전 1:4;4:7;딤후 4:4;딛 1:14).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하여준 종말론적 교훈들
이 거직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당
시 거짓 교사들은 사도들의 종말론적 권면이 수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도덕성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종말론적 권면을 사실적이고 문자
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Bigg, Bauckham, Blum). 그래서 베드
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
등 사도들이 전하여 준 교훈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한다. 한편 베드로는 그
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보았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엄'은 신적인 권위와 장엄함
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목격한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을 가리킨다(Green, Bigg).
'친히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타이'는 신비 종교들에서 사용된
전문 용어로서 가장 높은 경지의 신비를 경험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다(Kelly,
Green).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와 어휘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거
짓된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다(Blum).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ㅇ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 '지극히 큰 영광'은 변화산
상사건의 구름과 연결된 히브리적 표현으로서(출 16:10;민 14:10;겔 1:4) 하나님의 초
월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변화산상의 사건은 물론(마
17:1-9;막 9:2-10;눅 9:28-36)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 24:16)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본절에서 베드로는 시내산 사건이 아니라 변화산상 사건의 독특성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변화산상 사건에서 계시된 예수를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 예언자로
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왕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보고 있다(Bauckham, Blum).
ㅇ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내 아들'은 유대주의에서 메시야
에 대한 진술로 해석한 시 2:7의 인용이다. 시 2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
은 메시야는 '아들'이라 불리며(7절) 시온산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거
부하는 모든 적대 세력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8,9절). 초대 교회는 이런 시 2편을
예수께 적용시켜 예수께서 재림 때에 종말론적인 심판을 행사할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내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가페토스 무'
는 메시야의 칭호로서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유일한
자' 혹은 '독자'라는 해석으로(창 22:2, 12, 16)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시
사하며, 다른 하나는 '선택된 자'라는 해석으로 (사 42:1) 예수께서 메시야 직분을 수
행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자이심을 시사한다(Bauckham). 한편 '내 기뻐하는 자'는 사
42:1의 인용으로 메시야 직분을 수행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선택하셨음을
시사한다(Green, Bauckham).
ㅇ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편 '존귀와 영광'
의 헬라어 '티멘 카이 독산'은 일반적으로 한 짝을
이루고 있는 단어이다(시 8:5;히 2:7, 9;벧전 1:7). '존귀와 영광'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igg,
Windish).(2)혹자는 하늘 음성에 의하여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Grundmann, Chase, Muller). (3)혹자는 '존귀'는 음성을 통해서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하며, '영광'은 가시적인 변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yor, Wand,
Green, Kelly). 그러나 '존귀와 영광'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이중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에 아들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시는 존
귀를 부여하셨다는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Blum).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
성한 영광을 입으셨으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왕으로서 종말론적인 심판과 통치를 수행
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Bauckham).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ㅇ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
'거룩한 산'은 구약성격에서 시온 산을 의미하나 역사적으로 시온 산에서 예수께서 변
형하셨다는 근거가 없다(Green). 그래서 오늘날 그 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
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 헤르몬 산이나 다볼 산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 산이
어느 산이든지 간에 베드로가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
히 그 산에 영광 가운데 임하셨고 예수의 신적 영광이 그 산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Bigg).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ㅇ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 본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은 구약 전체에 나타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Blum,
Bauckham, Spicq, Kelly, Grundmann).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들이
자신들이 체험하고 전하고 행한 일들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변화산상 사건
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리 예상했던 예언의 성취로서 미래에 나타날 파루시아(재림)
를 확실히 보증해줌을 진술한다(RSV, NIV, Bauckham). 한편 베드로는 '예언'을 '어두
움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한다. '어두운 데'는 빛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의미
한다(사 9:2;엡 6:12). 그 예언의 말씀은 등불로서(시 119:105)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
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Blum).
ㅇ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
라 - '날'은 재림의 날을 가리키며(Blum, Green)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다(계 22:16). 따라서 '날이 새어 샛별이...떠오르기 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까지'를 의미한다. 한편 '너희 마음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일어나는 계몽을 의미한다
고 주장한다(Plumptre, Spicq, Grundmann, Kasemann). (2)혹자는 본절이 종말론적인
진술이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elkle, Kelly, Green). (3)혹자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의 때에 초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Bauckham).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ㅇ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베드로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들
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사로이 풀 것'의 헬라어 '이디아
스 에필뤼세오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람이 개인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NIB, RSV, KJV,
Blum, Bauckham). (2)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다
(Calvin, Plumptre, Lumby, Green, NIV).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베드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성경을 임의로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2:1;3:16).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ㅇ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
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
아야 되는 근거로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성령의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즉 원저자이신 성령
께서 영감을 통해서 성경 기록자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고전 14:37;딤후 3:16;딤후 3:10-17 주제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구약의 제자들
도 역시 자신들의 예언이나 말씀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
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삼하 23:2;렘 1:7,9). 그러나 당시의 거짓 교사들
은 재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표적이나 꿈, 환상을 통하여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6
절).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본절에서 구약성경의 예
언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