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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베드로후서

[스크랩] 베드로후서 - 저자,대상,내용 및 특징,기록연대와 장소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27

베드로후서(2peter)


Ⅰ. 저 자

본 서신의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1:1 전반)라고 밝혀 주고 있다. 그는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주의 모습을 직접 본 사실(1:16-18)과,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주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것(1:14)과, 본서가 자신의 두 번째 서신이라는 것(3:1)과, 바울이 자기의 동료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참으로 사도인 베드로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 W. Barclay, p. 288. A. E. Barnett, p. 164. J. N. D. Kelly, pp. 292-293. W. Schrage, p. 117. A. E. Barnett, p. 164. B. Reicke, pp. 143-144. A. R. C. Leaney, pp. 100-101. S. J. Case, p. 1345. J. B. Mayor, The Epistle of St. Jude and the Second Epistle of St. Peter, in S. W. Paine, p.1455. 김철손, p. 230. )이 내세우는 주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켈리(J. N. D. Kelly)와 슈라게(W. Schrage)는 앞서 언급한바 지나치게 열렬한 주장들이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고 하였다.( J. N. D. Kelly, p. 291. W. Schrage, p. 124. ) 홀츠만(Holtzman)은 "그 저자는, 거짓되이 그 서신이 베드로의 저작이라는 간판을 얻기 위하여 각양 수단을 다 썼으니, 자기는 시몬 베드로라 하며(1:1), 또 바울의 동역자라 하며(3:15), 변화산의 사건을 목격한 자라고 한 것이다(1:17, 18)."( in 박윤선, p. 302. )라고 하였다.

2) 유세비우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 3. 1-4, 25. 3-4."(in E. A. Blum, p. 258). )와 제롬(Jerome)( "Scriptorium Ecclesiasticorum 1, Letter to Hedibia(Epist. 120. 1 1)."(in E. A. Blum, p. 258). )은 이 서신에 대한 어떠한 전승도 자기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3) 이 서신은 아주 늦은 시기, 즉 4세기 후반에 가서야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플루머(A. Plummer)와 렌스키(R. C. H. L-enski)는 이 서신이 라오디게아 회의(The Council of laodicea:약 360년. cf. 렌스키:약 370년)와 히포 회의(Th e Council of H-ippo:약 393년)( A. Plummer, p. 438. R. C. H. Lenski, p. 242. )와 칼타고 회의(The Council of Carthage:397년)( R. Tuck, p. 169. )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와 켈리(J. N. D. Kelly)는 초대 교회가 한동안 본서를 받아들이기를 무척이나 주저하고 꺼린 것은 베드로의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W. Barclay, p. 285. J. N. D. Kelly, p. 292. ) 바클레이(W. Barclay)와 슈라게(W. Schrage) 는 주후 2세기의 문서 어디에도 본서가 인용되지 않았고, 3세기에는 의심과 의혹의 대상이 되었으며, 4세기 후반에 가서야 겨우 받아들여졌다고 하였다.( W. Barclay, p. 286. W. Schrage, pp. 124-125. )

4) 본 서신의 내용 자체가 베드로의 것이라고 믿기 어렵게 만든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참된 이스라엘인 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꺾일 줄 모르는 소망과 신뢰의 결 합인 믿음에 관한 언급이 없다. 성령과 기도 그리고 세례에 대한 언급이 없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모범을 따르도록 하는 열렬한 요구도 없다. 만일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진술을 베드로전서에서 빼 버린다면, 남는 것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본 서신에는 그러한 진리들에 대한 진술이 전혀 없다."( W. Barclay, p. 286. )라고 하였다. 김철손 교수는 "이 서신의 주제는 이단 사상과 대결하는 그리스도교의 '지식'()의 문제이다(1:2, 3, 2:20, 3:18)."라고 하였다.( 김철손, p. 232. ) 슈라게(W. Schrage)는 "그리스도론 역시 기이한 인상을 준다. 예수의 형상 변용에 대한 전승(1:16 이하)은 오로지 저자가 보고 들은 증인이었다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주의 내림을 부인하는 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된다. 베드로전서에 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리스도론적인 신앙 고백문들과 송가들이 이 서신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얼마 안 되는 그리스도론적인 진술들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공식구나 가현론적인 진술과 같은 인상을 준다. 저자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과 놀라운 힘(1:3, 16-17) 그리고 그리스도가 사도인 저자 자신에게 계시를 전달했다는 것(1:14)과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을 통해 인식되었다는 것(1:2-3:8, 2:20, 3:18)만을 강조한다. 저자는 예수의 십 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바울로 서신과는 달리 여기에서 하느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어주는 하느님의 공의이다(1:1). 이 서신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는데 이 종말론에도 그리스도론이 현저 하게 결여되어 있다. 종말에 대한 우주적인 드라마 전체는 결국 응보론을 보편적으로 실증한 것이며 인간의 상벌에 대해 진술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참조:1:11, 2:5 이하, 3:7, 11-12). 그리스도의 승리와 권리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될 주 님의 내림 대신 믿는 자들이 '신적인 성품'을 함께 가지게 된다는 말이 나온다(1:4). 바로 이러한 자연적이고 이원론적인 범주들의 체계는 이 서신에 헬레니즘적인 요인들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도덕적인 행위로서 저자가 요구한 것도 헬레니즘적인 이상과 일치한다(참조:1:4-11). 저자는 구원이라는 선물을 담보로 하여 도덕적인 요구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수고와 노력(참조:1:10 등등)과 '전승된 거룩 한 계명들'(2:21)과 그것의 준행이 경건한 자들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보증해 준다고 한다(1:11). 이것은 또한 유다교 사상의 유산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거의 독자적인 도덕에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말론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이 서신의 종말론에는 비교적 많은 묵시문학적인 신화들이 나오는데 미래의 내림 기대를 변호하는 3:5 이하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참조:2:4 이하)."( W. Schrage, pp. 118-120. )라고 하였다.

김철손 교수는 본서에는 예수의 중심 교훈인 산상 설교나, 교회 설립과 베드로의 관계나, 그리스도교의 중심 문제가 되어 있는 선교와 현재적인 종말론에 대한 것이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김철손, p. 231. ) 이어서 그는 예수의 변화산의 사건 에 대한 기사(1:17-18)가 복음서들의 기사(마 17:1-6, 막 9:2-8)와 차이가 있는데, 이는 '영광의 주'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서의 기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Ibid. ) 또, 그는 베드로전서가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이 서신은 바울의 사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아니며, 오히려 비판한다고 하였다.( Ibid., p. 232. ) 베드로전서에는 직접, 간접으로 구약성경을 31회 인용했으나, 이 서신에는 불과 5회밖에 인용하지 않았다.( C. Bigg, p. 230. )

5) 본서는, 베드로가 죽은(64년경) 뒤인 70년대 초에 기록된 것으로 짐작되는 유다서를 개작한 것이다. 더욱이 유다서의 기록 시기는 더 늦은 시기일 수도 있다. 켈리(J. N. D. Kelly)는 "본 서신의 중심 대목은 유다서의 개작이며, 그 나머지 부분의 여기저기에는 유다서가 참고했을 법한 자료로부터 빌려 온 다른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유다서가 기록되었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연대는 (우리 가 앞에서 생각해 보았듯이) 네로(Nero)의 반기독교적인 학살(주후 64년경)로 베드로가 죽은 후인 70년대 초이다."( J. N. D. Kelly, p. 291. )라고 하였다. 슈라게(W. Schrage)도 이 서신에 대해, 유다서를 전거로 삼아 사도적인 교훈 전승과 그 전승의 규범적인 타당성을 매우 강조한다고 한다.( W. Schrage, p. 117 ) 또, 그는 그 구체적인 예들을 장황할 정도로 열거하고 있다.( W. Schrage, pp. 120-122. )

6) 이 서신에는 어부 출신인 베드로가 소유했을 것 같지 않은 헬라의 철학 및 종교적 교양이 나타난다. 켈리(J. N. D. Kelly)는 "유대인의 하가다(haggadah)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그가 유대파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거의 확 실하게 하지만, 그는 또한 이전의 갈릴리 어부가 거의 소유했을 것 같지가 않은 헬라 풍의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교양에 매우 친숙하였다."( J. N. D. Kelly, pp. 291-292. )라고 하였다.

7) 이 서신의 문체는 베드로전서의 문체와 같지 않다. 켈리(J. N. D. Kelly)는 "대체로 베드로후서의 문체는 베드로전서보다 더욱 수상쩍고 과장되며 호화롭다. 이 서신은 즉시 단장격 운율 형식(iambic rhythms)으로 들어가며, 이 서신 의 낱말 선택은 학구적이면서도 조작적이며, 문장 구성은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연결 불변화사와 히브리어식 표현들과 분사들이 훨씬 드물게 나오는데 비하여 관사는 더욱 빈번히 나오며, 단 한 번만 나오는 낱말의 비율이 다른 성경보다 현저하게 높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높다.) 또한 두 서신간에는 중요한 신학적인 상이점들이 있으며, 두 서신의 주제들이 겹치는 곳에서는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예:베드로전서는 재림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 실 때'라고 표현하고, 후서는 '강림' 혹은 '주의 날'이라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9에는 구원을 '너희 영혼의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베드로후서 1:11에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이라고 말한다)."( J. N. D. Kelly, p. 292. )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도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서신은 베드로전서의 성격과 문체와 전혀 다르다. 이 점들은 일찍이 '시몬 베드로는 일반 서신(Catholic)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서신들을 썼는 데, 두 번째 서신의 확실성은 첫 번째 서신과 문체가 다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었다.'라고 쓴 제롬(Jerome)에 의해서 파악되었다. 본 서신의 헬라어 문체는 매우 어렵다. 클로그(Clogg)는 본서의 문체를 야심적이며 기교적 이고 모호한 부분이 흔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신약성경 중에서 번역에 의해 개선되어야 할 유일한 책이라고 논평하였다. 체이스(Chase) 감독은 '이 서신은 얼마간의 뇌꼴스런 수사적 기교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도처에 자의식적인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저자는 자신의 문장력 이상의 문체로 쓰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썼다. '그는 이 서신의 문학적 특성과 베드로가 이 서신을 썼다고 하는 가정을 조화시키기는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W. Barclay, p. 286. ) 모펫(Moffatt)은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보다 더 도미문이며 야심적이지만, 그 언어학상의 노력과 문체상의 노력은 그러한 것들의 주체스러운 모호성에 의해서 결정적인 개념의 조악을 드러낼 뿐이며, 이 점은 베드로후서와 구별되는 것이다."( in Ibid. )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순수하게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베드로전서에는 있고 베드로후서에는 없는 말이 369개나 되고, 베드로후서에는 있고 베드로전서에는 없는 말이 230개나 된다. 그러나, 문체상의 차이 이상의 차이가 있 다. 저자란 독자와 상황에 맞도록 자신의 문체와 어휘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두 서신 사이의 분위기와 태도의 차이가 매우 크므로 같은 사람이 둘 다 썼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Ibid., p. 287. )라고 하였다.

8) 이 서신 속에 기록된 시기가 늦은 때임을 지시하는 기사들이 있다. 바우어(Baur)와 그의 학파는,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바울의 엄한 책망을 들은 뒤에 이 서신을 썼을 리가 없다는 결정적인 근거로 바울의 서신들이 언급된 부분(3:15-) 을 내세우고 있다.( in A. T. Robertson, p. 142. ) 켈리(J. N. D. Kelly)는 "그는 첫 그리스도인 세대가 지나갔고(3:4), 바울의 서신들이 수집되던(3:15) 때에 살았음을 무심코 드러낸다."( J. N. D. Kelly, p. 292. )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바클레이(W. Barclay)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 서신 속에 있는 어떤 기록들이 늦은 시기를 지적해 준다는 것은 거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재림의 소망을 버리기 시작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3:4). 사도들은 과거의 인물들로 말해졌다(3:2). 그리스 도교 신앙의 설립자들인 선조들은 거의 희미하고 먼 과거의 인물들이다. 즉, 본 서신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첫 출현 사이에는 수 세대가 들어 있다(3:4). 여러 해가 지나갔다는 점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언급들이 있다. 베드로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언급은 요한복음 21:18-19에 있는 예수의 예언에 대한 언급과 아주 같은 것 같은데, 요한복음은 주후 100년경까지는 기록되지 않았 다. 베드로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기의 교훈을 지속시킬 어떤 것을 남겨 두고자 한다는 진술은 마가복음의 언급과 아주 같은 것 같다(1:12-14). 무엇보다도 바울의 편지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3:15-16). 이 언급들에 의하면, 바울의 편지들이 모든 교회에 알려지고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즉, 그 서신들은 공적 재산이며, 더욱이 성경으로 간주되었고, 또 다른 성경들과 같은 수준으로 간주되었다(3:16). 바울의 편지들은 적어도 주후 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수집되어 공표되었고, 정경의 지위를 얻기까지는 꽤 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2세기 중엽까지 이와 같은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증거는 본 서신이 늦은 시기에 씌어진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집중된다. 본 서신은 3세기에 비로소 인용되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본 서신의 유용성을 문제삼지는 않았지만, 베드로의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베드로후서의 가장 흥미 있는 점은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늦게 씌어져서 제일 늦게 신약성경에 편입된 책이라는 사실에 있다."( W. Barclay, pp. 287-288. )

9) 이 서신의 신앙 및 신학은 초대 교회의 것이라기보다는 천주교의 교의를 연상하게 한다. 켈리(J. N. D. Kelly)는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1:20, 3:15)과 사도들의 전통(2:21, 3:2)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첫 세대의 기독교 신앙보다는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가톨릭교의 교의를 연상시킨다."( J. N. D. Kelly, p. 292. )라고 하였다. 또, 슈라게(W. Schrage)는 "이 서신이 확고하게 절대화하고 있는 신학 적인 관점이 신약성경의 핵심 진술 및 개신교의 기본 입장과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상충한 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W. Schrage, p. 117. )라고 하였다.

10) 이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라고 자기 소개를 한 것은,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내세워 글을 쓰는 고대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켈리(J. N. D. Kelly)는 "우리는 베드로후서가 수석 사도인 베드로에 대한 흠모에서 비롯된 풍부한 수확물이 라고 생각되는 위(僞) 베드로 문헌들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J. N. D. Kelly, pp. 292-293. )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베드로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고의로 붙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우리에게는 기이한 것 같 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평범한 관습이었다. 플라톤(Plato)의 편지들은 플라톤이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을 내세워 쓴 것이다. 유대인들도 반복해서 이러한 방법으로 글을 쓰곤 하였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중간 시대의 책들 은 솔로몬, 이사야, 모세, 바룩, 에스라, 에녹 등의 이름을 붙여서 쓴 것이다. 또, 신약성경 시대에도 베드로의 이름을 붙여서 쓴 일련의 문학 작품들인 '베드로의 복음',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의 계시록' 등이 있다."( W. Barclay, p. 288. 참조:E. A. Blum, P. 261에는 '베드로의 계시 록'(135년경), '베드로 복음'(150-175년경), '베드로 행전'(180-200년 경), '베드로의 교훈'(200년경), '야고보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200 년경), '베드로의 설교'(80-140년경) 등이 열 거되어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11) 이 서신은, 베드로를 추종하던 몇몇 사람들이 베드로가 죽은 후에 편집한, 베드로의 유언이다.( 참고:G. Barker, W. Lane, and J. R. Michaels, The New Testa- ment Speaks(New York:Harper & Row, 1969), pp. 32, 349-52.(i -n E. A, Blum, p. 156. )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견해 에 대해, 실루아노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대필된 베드로의 저작설을 지지하는 학자들( M. Henry, p. 1036. J. Wesley, p. 316. A. Barnes, p. 1438. E. A. Blum, p. 156. C. R. Erdman, 1321. B. C. Caffin, p. xii. S. W. Pa- ine, p. 1456. A. T. Robertson, p. 144. R. C. H. Lenski, p. 246. M. Green, p. 35. D. H. Wheaton, p. 1250. M. Bentley, p. 182. C. S. Ball, p. 284. B. C. Chapman, p. 705. 黑崎幸吉, p. 229. 米田豊, p. 556. 박윤선, pp. 301-303. )이 내세우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저자가, 사도인 베드로임을 너무 강조하는 점들 때문에 베드로의 작품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후대의 사람이 베드로의 이름으로 쓴 것이라면, 그가 의심받을 정도로 사도 베드로임을 지나치게 강조하 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서신의 주된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단 사상에 미혹 당해 멸망의 길로 끌려가지 않도록 교훈하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하면 저자인 베드로가 특별히 자신이 사도 베드로임을 강조한 이유 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본서의 목적은, 이단을 방어키 위한 것이니만큼, 베드로는, 자기의 사도적 권위와 예수님의 원제자격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있었다."( in 박윤선, p. 302. )라고 하였다.

2) 이 서신에 대한 오랜 전승의 결여에 대해, 블럼(E. A. Bl-um)은 "이 서신의 간결성과 초대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와 고대 세계의 어려운 통신 문제 때문에, 이 서신에 대한 오랜 전승의 결여는 놀랄 것이 못 된다. 이 서신이 주요 여행로에 있지 않은 곳으로 보내졌거나 갑자기 박해가 자행되는 지역으로 보내졌다면 정상적인 서신의 유통로는 제한을 받았을 것이다."( E. A. Blum, p. 258. )라고 하였다. 또, 그는 "초대 교회의 많은 문헌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오리겐(185?-254년?)의 작품 대다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수의 작품들이 남아 있지 않다. 2세기의 문서들이 없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많았다."( E. A. Blum, p. 259. 참조:B. C. Caffin, p. xiii. )라고하였다.

3) 초기의 모든 교부들과 모든 문서들이 다 이 서신을 소홀히 여기거나 생략해 버린 것은 아니다. 블럼(E. A. Blum)은 "오리겐(185?-254년?)은 처음으로 이 서신이 베드로의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문제에 대한 의문은 4세기까지 계 속되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의 글[95년경]과 바나바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약 80년경]), 그리고 비정경인 베드로의 문헌들에 반영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참조:Int, pp. 387-89). '진리의 복 음'(The Gospel of Truth)과 '요한의 외경'(The Apocryphon of John)들이 십중팔구 베드로후서를 인용하거나 암시하는데, 이 점은 2세기에 베드로후서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참조:R. H. Gundry, A Survey of the New Testament(Grand Ra -pids:Zondervan, 1970), p. 353. ) 또한 P72이라고 불리는 아주 초기(3세기) 의 보드머 사본(Bodmer papyrus)은 베드로후서가 정경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주는데, 그 이유는 그 사본에는 베드로후서가 신성한 책들의 독자들을 축복하는 베드로전서 및 유다서와 같이하며, 게다가 그 두 서신보다 더 정교한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Ibid. )라고 하였다.( E. A. Blum, p. 257. )

로벝슨(A. T. Robertson)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 us), 이그나티우스(Ign-atius),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등의 글에는 베드로후서의 구절들에 대한 암시가 있다는 것이 분 명하다."( A. T. Robertson, p. 139. )라고 하였다. 카핀(B. C. Caffin)은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약 140년)에는 이 서신에 대해 3∼4가지의 분명한 암시 가 있다."( B. C. Caffin, p. ii. )라고 하였고, "갑바도기아 가이사랴의 감독인 퍼밀리안(Firmilian:약 270년)은 이 서신에 대한 명백한 암시를 하였다."( Ibid., p. iii. )라고 하였다. 플루머(A. Plummer)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ii. 5, iii. 4), 폴리캅(Polycarp:iii. 4), 헤르마스(Hermas:ii. 13, 15, 20, iii. 5),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2:1, iii. 8), 멜리토(Melito:iii. 5-7), 테오필루스(Theophilus:i. 19, 21), 히폴리투스(Hippolytus:i. 21) 등의 글에 그럴싸한 암시들이 있다고 하였고, 심지어 베드로의 저작설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도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약 140년)에 베드로후서의 구절들에 대한 암시가 있는 것이 확실 하다고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였다.( A. Plummer, p. 438. )

이 서신이 비교적 늦은 시기에, 그것도 꺼림하게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더욱이, 늦은 시기에 꺼림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한 논의 끝에 결정되었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참조:D. H. Wheaton, p. 1249. ) 블럼(E. A. Blum)은 "정경성과 저자의 문제가 같은 문제는 아니지만 흔히 연관되어 있다. 초대 교회에서 어떤 책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그것이 권위 있는 사도의 저작인가 아닌가 하 는 문제이다.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베드로의 저작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E. A. Blum, p. 257. ) 그렇다면, 베드로후서가 신중한 논의 끝에 결국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의 저자일 가능 성을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4) 이 서신에는 베드로전서에 있는 중요한 내용들인 초대 교회의 핵심 교리 및 윤리적 교훈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주장(참조:앞서 논한 반대설 중 네 번째.)은, 이 서신의 저자와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다르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는 반면에 같다는 근거도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같은 저자라 하더라도, 저작 동기와 목적 그리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내용을 달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서신의 저자는 베드로임을 밝혔고, 또 이 서신이 같은 독자들에게 두 번 째 보내는 것(3:1)이므로, 전서와 똑같은 내용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린(M. Green)은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의 주제가 전혀 다른데, 그 까닭은 두 서신이 전혀 다른 상황에 대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는 핍박을 당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쓴 것이고, 베드로후서는 영지주의적 냄새를 풍기는 거짓 교리에 직면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쓴 것이다. 따라서, 전자의 기조는 소망이고, 후자의 기조는 참된 지식이다. 전자는 독자들에게 대항과 위로를 위해 그리 스도의 위대한 생명의 사건을 생각하게 하고, 후자는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하고 흔드는 자들에게 도전하도록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강조하고 있다."( M. Green, p. 19. )라고 하였다.

칼빈(J. Calvin)은 "동시에, 이 서신은 베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용은 없고, 곳곳에서 사도적 정신의 힘과 은총을 보여 준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J. Calvin, p. 325. )라고 하였다. 벵겔(J. A. Beng-el)은 "이 서신의 성격은 현저하게 베드로전서와 일치하고, 또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의 말들과 일치한다."( J. A. Bengel, p. 760. )라고 하였다. 카핀(B. C. Caffin)은 "이 서신의 진정함을 증거해 주는 요소는 서신 자체의 고유의 힘과 아름다움이다."( B. C. Caffin, p. xiii. )라고 하였다. 그린(M. Gr- een)은 "종말론적 교훈은 두 서 신의 저자를 분리시킬 수 없는 원인으로서 주장된다. 두 서신 다 종말론적 교훈이 많다."( M. Green, p. 21. )라고 하였다. 비그(C. Bigg)는 "실제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후서가 전서와 거의 일치한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적이다."( C. Bigg, p. 233. )라고 하였고, "모든 면에서 베드로전서의 교훈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Ibid., p. 234. )라고 하였다.

5) 블럼(E. A. Blum)은 "베드로후서[특히, 2장]가 유다서에 문학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가 유다서의 중요한 부분을 인용하거나 이용했다 하더라도, 베드로후서의 베드로 저작설이나 영 감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E. A. Blum, p. 259. )라고 하였다. 실상 베드로후서가 먼저 쓰인 것인지 유다서가 먼저 쓰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인용하거나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설령 유다서가 먼저 쓰인 것이라 하더 라도, 베드로후서 속에 있는 유사한 내용들이 유다서를 인용 또는 이용했거나 개작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두 서신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서신들을 비롯한 모든 책들은 같은 교회의 전승과 교훈을 다룬 것이므로 서로 유사한 부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선후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그(C. Bigg)의 설명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루터(M. Luther)는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보다 먼저 쓰여졌다고 하였다. 그는 그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 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크호른(Eichhorn) 이래 반대 견해가 지반을 얻었고, 따라서 아주 자신 있게 주장되었다. 홀츠만(Holtzmann)은 '베드로후서가 먼저 쓰여진 것이라는 가설은 다시금 논박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에는 실제로 버려진 가설이다.'라고 하였다. 바이스(Weiss)는 '유다서가 먼저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하였다. 하르낙(Harnack), 류스(Reuss), 율리헤르(J licher), 본 소덴(von Soden), 살몬(Salmon) 등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루터(M. Luther)의 견해는 지지자들이 없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루터(M. Luther)의 견해는 최근에 룸비(Lumby:in the Speaker's Commentary), 만셀(Mansel), 플루머(Plu- mmer:in Ellicott's Commentary), 스피타(Spitta), 자안(Zahn) 등에 의해 방어되었다."( C. Bigg, p. 216. ) 비그(C. Bigg)는 그 문제를 매우 자세하게 연구하여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보다 먼저 쓰여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Ibid., pp. 216-232. ) 파이네(S. W. Paine)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S. W. Paine, p. 1454. )

6) 이 서신에는 어부 출신인 베드로가 소유했을 것 같지 않은 헬라의 철학 및 종교적 교양이 나타난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 31-33쪽에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물론, 베드로후서의 필경자는 실루아노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7) 이 서신의 문체가 베드로전서와 다른 것에 대해 제롬(Jer-ome)은, 두 서신 사이의 문체의 차이는 필경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in W. Barclay, p. 286. )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동일한 저자의 글이라 하더라도, 문체가 항상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브루스(F. F. Bruce)는 바울 서신집에 있는 문체의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으로서 개성과 주제 그리고 필경자의 자주성의 상호 작용을 논하고 있다.( F. F. Bruce, The Letters of Paul:An Expanded Paraphrase(Gr- and Rapids:Eerdmans, 1965), pp. 10-11, in E. A. Blum, p. 258. ) 훼아톤(D. H. Wheaton) 은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문체 의 차이에 대해 대필자가 다르고, 또 다른 문제에 대해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D. H. Wheaton, p. 1249. ) 실제로 두 서신의 문체의 차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두 서신의 문체는 서로 같거나 유사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비그(C. Bigg)와 카핀(B. C. Caffin), 로벝슨(A. T. Robertson)과 훼아톤(D. H. Wheaton)은 이 서신과 베드로전서의 문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떤 학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하면서 유사한 문체의 예를 들고 있다. 또, 그들은 베드로전서 곳곳에 나타나는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이 서신에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C. Bigg, pp. 233-234. B. C. Caffin, p. vii-ix. A. T. Robertson, p. 141. D. H. Wheaton, p. 1249. 특히, 카핀(B. C. Caffin)과 훼아톤 (D. H. Wheaton)은 전서와 후서의 유사한 점들을 많이 열거하고 있다. ) 특히, 비그(C. Bigg)는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만큼 유사한 문서는 없다고 한 바이스(Weiss)의 주장에 동의한다."( R. C. H. Lenski, p. 245. )라고 하였다. 또, 몰톤(A. Q. Morton)은 컴퓨터에 의한 종합적인 분석을 기초로 하여 두 서신은 실로 언 어학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A. Q. Morton, The Authorship and Integrity of the New Testa- ment(1965), in J. N. D. Kelly, p. 292. )

8) 이 서신이 늦은 시기, 즉 베드로가 죽은(주후 64년 혹은 67년)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블럼(E. A. Blum)은 "재림의 지연에 관한 문제는 2세기에는 물론 가장 확실하게 1세기에도 있었다. 요한복음 21:20-23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때에도 당면한 문제였음을 보여 준다. 다른 성경의 분문들도 이른 시기에 유사한 관심을 보여 준다(참조:마 25:1-13, 행 1:6-11, 살후 2:1-4, 히 9:28)."( E. A. Blum, p.259. )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언급(1:14)은 주후 100년경까지는 기록되지 않은 요한복음(21:18-19)에 있는 예수의 예언에 대한 언급과 아주 같은 것 같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베드로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서신 속에 있는, 바울의 편지들에 대한 언급(3:15-16)을 근거로, 안디옥에서 바울의 엄한 책망을 들은 베드로가 그의 편지들을 언급했을 리가 없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로벝슨(A. T. R-obertson)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 주장은 베드로의 충동적인 성격 속에 있는 한 요소와, 그가 예수께 대해 했던 것처럼 돌아온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안디옥 사건 이후 바울은 베드로에 대해 친절하게 말하였다(고전 9:5). 베드로도 바울도 주의 일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악감을 품지 않았다."( A. T. Robertson, p. 142. ) 언급된 바울의 편지들에 대해 블럼(E. A. Blum)은, "완성된 집성본으로 볼 필요가 없고, 다만 저자에게 알려진 일부 구절들로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의 편지들이 집성된 것은 교회나 몇몇 영향력 있는 사람이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시 작되었을 것이다. 편지를 돌려보라거나(참조:골 4:16) 모든 형제들에게 읽어 주라는(살전 5:27) 바울의 요청은 바울 서신들의 수집을 촉진하였을 것이다."( Ibid. )라고 하였다. 베드로후서 3:2을 근거 삼아 사도들이 과거의 인물들로 말해졌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비약적인 해석이다. 9) 이 서신에 나타나는바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1:20, 3:15)과 사도들의 전통(2:21, 3:2)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선행에 대 한 교훈 등은 초대 교회의 사상이 아니라 초기 카톨릭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블럼은(E. A. Blum)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베드로라고 해서 정통적인 성경 해석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라고 해서 전통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바울은 전승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11:2, 15:3)." 그리고 선행에 대한 교훈은 이 서신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담고 있는 바이며, 특히 초기의 작품인 야고보서는 선행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이란 일반 윤리·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를 의미 하는 것이다(약 2:17, 20-26).

10) 베드로의 이름으로 된 책들이 있었고, 또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블럼(E. A. Blum)은 "어떤 영지주의적 문서들에 베드로의 이름이 나타남으로써 초대 교회가 베드로후서를 받아들이는 데에 얼마 동안 주저했다는 것은 사실적인 근거가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름을 가진 가짜 문서들의 유포에도 불 구하고 초대 교회가 베드로후서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베드로전·후서와 베드로의 이름을 가진 다른 문서들 사이의 성격상의 차이를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E. A. Blum, p. 259. )라고 하였다. 고대의 이교 사회에서 유명한 사람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의 진실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의 이름을 내세워 글을 쓰는 거짓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훼아톤(D. H. Wheaton)은 "최근의 보수적인 학자들은 위조 문서설이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초래한다는 사실 에 유의해 왔다. 교회의 후기 세대는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글을 쓰는 계책을 정죄하였는데, 그러한 계책은 신약 시대에 이단들이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미 바울에 의해 탄핵되었다(살후 2:2, 3:17). 진실한 작가가 거룩과 참을 강조하는 서신(1:3, 4, 12, 3:11, 17)에 거짓된 개인적 언급(1:1, 16-18, 3:1)을 포함시켰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다. 그러한 기만은 교인들에게 다른 모든 일에 대단히 높은 표준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D. H. Wheaton, p. 1250. )라고 하였다. 발드윈(J. Baldwin)은 "우리는 구약성경에 익명의 저자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없고, 그 반대의 증거는 풍부하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Joyce Baldwin, "Is there pseudonymity in the Old Testament?" Themelios 4(September 1978):12, in E. A. Blum. p. 260. )라고 함으로써 구약성경의 익명의 저자에 관한 연구를 결론지었다. 그트리(D. Guthrie)는 익명이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Introduction, 3rd ed.(Downers G -rove, Ill.:1970), pp. 671-84, in E. A. Blum, p. 260. )

11) 이 서신은, 베드로를 추종하던 몇몇 사람들이 베드로가 죽은 후에 편집한 베드로의 유언이라고 하는 견해는, 흥미 있는 견해이긴 하나 설득력이 없다. 유언치고는 너무 장황하고, 몇몇 사람들이 편집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일관성이 있다.

12) 로벝슨(A. T. Robertson)은 이 서신의 내용이 2세기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1세기에 쓰여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하나의 강력한 반론을 펴고 있다. 베드로후서 3:8에는 2세기에 천년 왕국설로 전환된 시편 90:4 이, 어떤 천년 왕국설로도 전환되지 않은 채로 천년에 관하여 인용되었다. 그 구절에 대한 베드로의 용법은 2세기가 아니라, 1세기에 적합한 것이다. 사실상, 베드로후서에 기술된 가짜 교사들은, 갈라디아와 고 린도의 유대주의자들 그리 고 골로새와 에베소의 영지주의자들로 말미암은 바울의 고통들을 회상하면, 분명히 1세기의 사람들이다.( A. T. Robertson, p. 143. ) 비그(C. Bigg)는 가짜 교사들과 조롱하는 자들에 대한 기술의 모든 특색은 사도 시대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in Ibid., p. 143. ) 블럼(E. A. Blum)은 "이 서신에는 군주적인 주교나 고도로 발달한 영지주의 또는 몬타니즘(Montanism) 등과 같은 2세기의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암시가 없다."( E. A. Blum, p. 261. )라고 하였다.

13) 블럼(E. A. Blum)은 "이 서신은 오리겐(Origen, 240년경)에 의해 성경으로 인정되었다. 오리겐은 '베드로는 ..... 하나의 정평 있는 서신을 남겼다. 그것은 아마 베드로후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심을 받고 있다.'( Ecclesiastical History 6. 25. 8. )라고 말하였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후서를 위작들 사이에 놓기보다는 오히려 논쟁적인 책들 사이에 놓았다.( Ecclesiastical History 3. 3. 1. ) 예루살렘의 시릴(Cyril) 시대(315-386년경)에, 베드로후서는 정경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어거스 틴(Augustine), 제롬(Jerome) 등과 마찬가지로 시릴(Cyril)이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이 초기 교회에서의 논쟁을 해결하였다."( E. A. Blum, p. 261. )라고 하였다.

14) 이 서신의 저자는 예수와의 접촉, 특히 그리스도의 변화(막 9:2-8=마 17:1-8=눅 9:28-36)를 직접 겪은 것을 사용한다(1:17-18). 지금까지 베드로후서는 실루아노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대필된 베드로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바 익명의 대필자에 의한 베드로의 저작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논해 왔 다. 그 결과 우 리는 대필된 베드로의 저작설이 훨씬 더 유력한 내적·외적 증거가 있고, 또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Ⅱ. 대상

이 서신의 대상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1:1 후반)로 되어 있고, 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3:1 전반)로 되어 있는데, 1:1 후반의 내용만 가지고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대상에 대한 표현이 막연하다는 점을 미루어 모든 교인들로 볼 수도 있고, 또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대상, 즉 같은 사람이 같은 대상에게 편지를 거푸 보내는 경우로 볼 수도 있다. 이 서신의 대상 문제는 "이 둘째 편지"(3:1 전반)에 의거해서 고찰할 수밖에 없다. 즉, 첫째 편지가 무엇을 지시하는가에 따라 밝혀질 것이다. 이 점은 또 이 서신의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서신 의 저자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논의하였고, 그 결과 베드로가 저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보다 앞선 베드로전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로 그 서신의 저자 역시 베드로임을 밝혔다. 결국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에 이은 베드 로의 두 번째 편지이므로, 베드로후서의 대상 역시 베드로전서의 대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벧전, pp. 37-40을 보라).

Ⅲ. 내용 및 특징

이 서신의 내용 및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시대에도, 교회는 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 민중들의 박해를 받고 있었고(행 8:1-3), 내적으로는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와 율법 행위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혼합한 교리(특히, 갈라디아 교회)와 율법주의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에,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들 역시 외적으로는 그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고,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영지 주의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이교들의 교리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거의 모든 신약성경 기자들이 교회에 대 한 박해와 핍박을 언급하고, 또 교회에게 이단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특히, 로마에서는 대대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로마에서의 박해에 대해서는 W. Barclay, pp. 146-150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주로 박해 아래 있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강하게 할 목적으로 베드로전서를 썼던 베드로는, 이 제는 주로 이단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교인들의 실족을 막고, 주의 교훈을 좇아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하고, 또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의 부당성을 지적해 주어 교인들로 정통 신앙에 입각한 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견지해 나가도 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쓴 것이다. 이 서신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례의 제2부 내용 분해에 자세하게 썼고, 또 본문을 상세하게 주석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이 서신의 특징만을 설명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1) 이 서신은 내용이나 문체 또는 용어나 사상 등에 있어서 부분적이기는 하나, 유다서와 매우 비슷하다. 그 예로 '거짓 선지자'(벧후 2:1-3과 유 4), '범죄한 천사'(벧후 2:4과 유 6), '소돔, 고모라의 멸망'(벧후 2:6과 유 7), '천사와의 비교' (벧후 2:10-12과 유 8-10), '발람의 길'(벧후 2:15과 유 11), '물 없는 샘'(벧후 2:17과 유 12), '사도의 말을 기억할 것'(벧후 3:2과 유 17), '기롱자'(벧후 3:3과 유 18), 그리고 '동사들에 있어서 명백한 유사절들'(벧후 1:1, 5, 12, 3:14, 18과 유 1, 3, 5, 24, 25) 등을 들 수 있다.

2) 가짜 교사들에 대한 경계를 주로 다루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을 의식하여 재림에 대해 강조하여 교훈하고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우리는 베드로후서가 읽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교리를 몰래 손상시키는 사람들에게 쓴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들의 진리 왜곡에 의해 파멸되기 전에 그러한 왜곡을 그만두어야 할 사람들에게 쓴 것이기 때문에 일급의 중요성이 있는 책이다."( W. Barclay, p. 289. )라고 하였다.

3) 주의 교훈과 그에 따른 사도적 정통을 강조하고 있다.

4) 이단의 위험을 의식하여 참된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5) 주를 따른 성결한 삶을 강조한다.

6) 공동 서신에 속한다.( 공동서신은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등이다. 공동 서신(Catholic Epistles)이란 명칭 은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사용되었다. 이 명칭 외에도 정경 서신 (Canonic Epistles), 사도 서신(Apostolic Epist les), 일반 서신(Gen- eral Epistles) 등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 켈리(J. N. D. Kelly)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는(베드로전서와 함께) 보통 '보편 서신'(catholic epi-stles) 혹은 '공동 서신'(general epistles)이라 불리는데, 특별한 공동체나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들과는 달리 기독교계 전체에 보내진 회람형 서신이라는 뜻이다."( J. N. D. Kelly, pp. 282-283. )라고 하였다.

Ⅳ. 기록 연대와 장소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본서의 저자가 베드로냐 아니냐에 따라서 기록 장소, 특히 기록 연대가 달라질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충분한 논의 끝에, 이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대필자는 실루아노가 아닌 다른 사람)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따라서, 이 서신의 기록 연대는 대충 베드로의 순교 전, 베드로전서를 쓴 이후로 볼 수 있고, 기록 장소는 베드로가 만년에 있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미 베드로전서의 기록 연대와 장소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의하였으며, 그 결과 베드로전서는 대충 62-64년 이전에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pp. 49-56을 보라). 그러므로 베드로후서의 기록 연대는 63-64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고, 기록 장소는 로마로 추정할 수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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