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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골로새서

[스크랩] 골로새서 (3 : 1~25)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1:57
골로새서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ㅇ사도 바울은 2:8-23에서 그리스도의 충족성(充足性)에 대하여 말하는 동시에, 이단
의 그릇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논술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러므로란 말로
써 그 결론을 짓는다.
ㅇ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 헬라 원문에서 직역하면, "너희
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입었음면"이니, 이것은 2:12에서와 같이,그리스도의 부
활과 그로 인해 성립된(벧전 1:3)신자들의 영적 중생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중생한 자
들은 필연적으로 말일(末日)에 부활의 복도 받게 되어 있다(요 6:44).
ㅇ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우리 신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함께 부활
하였다(롬 6:5). 우리는 영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명을 가지고 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 곧,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할 근거를 지니고 있으니, 그
것을 구함이 무리가 아니다 마 6:33;갈4:26;빌 3:20참조,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우리는 그의 계신 곳을 바라보며 거기 속한
것들을 탐구해야 된다. 이것이 곧, "우엣 것을 찾으라"는 말의 의미이다. "위엣 것"이
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중심
한 영적 사실들을 가리킨다(요 8:23; 빌3:20-21).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위엣 것을 사
모하며 그것을 찾아 거기서 살면 참 자유(고후3:17; 갈4:26)와 참 지혜(약 3:17-18)를
얻게 된다. 그것은 골로새의 이단자들이 선전하는 의식주의나 고행주의와 달라서 그리
스도의 승리에 의한 성결과 평강과 영적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단자들의 교훈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승리(2:12-15)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
이다.
"찾으라"는 말은 '계속 힘들여 찾음'을 의미하는데, 이 말을 보
아서도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사람의 노력과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다. 은혜는 하나
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는 데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된다. 노력은 진실
성이 증표이다. 마11:12;히12:4 참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과 하나님의 천국 통치에 동참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눅 20:43; 행2:35; 롬8:34;
엡1:20; 히10:12; 계3:21참조. 그가 거기 계시니 만큼 우리는 우리의 찾는 "위엣 것"
을 그의 중보사역에 의하여 얻게 된다. 그는 우리의 받을 복의 원천이시고 방법이시
다. 롬8:34 참조.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ㅇ본절은 윗절의 "위엣 것을 찾으라"는 사상을 좀 더 밝히 해명하고 또한 고조한다.
ㅇ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생각하라"란 말
은 '애착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Abbott).벴겔(Bengel)은 이것이 '즐기는 마음을 가
지라'은 의미라고 하였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염세주의(厭世主義) 사상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의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땅 위의
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고, 그것들을 오용(誤用)함이 악한 것이다(고전
6:12,10:23). 우리가 발로는 땅을 딛고 머리는 위를 향하였으니, 천상(天上)의 것을
사모하고 섭취하여 땅 위의 것들을 하늘 위의 것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들에게 복속하
는 행동들은 죄악이다(빌 3:19).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ㅇ본절은 이는으로 번역된 이유접속사로 시작하여 윗말의 첫째 이유를 보여
준다. 신자들로 하여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
인가? 그것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인 영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
ㅇ너희가 죽었고 - 신자들은 그들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와
함께 죽었으미, 그 죽음은 (1) 죄에 대하여 죽음이고(롬 6:6,11). (2) 율법에 대하여
죽음이고(롬7:4), (3)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니, 그것은 곧, 땅엣 것을 애착하여 추
구하고 의지하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갈 6:14). 기독신자는 원칙
적으로 땅엣 것에 대하여 전혀 시체적(屍體的)관계를 가진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
을 영원한 집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그곳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노
력해야 된다.
ㅇ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 그리스도에게 대표되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참 신자들은,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다
시 말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으 지체(肢體)된 참 신자들의 부
활도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는 신자들의 생명이 포함된 셈이다.
ㅇ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하나님 안에"란 말은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합된 상
태를 가리킨다(요일 3:2).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 승천하셔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천
졔(天界)에 감취어 계신 것과 같이, 그 안에 있는 신자들도 그러하다. 그리스도는 대
신 원리(代身原理)에서 우리의 생며이니(4절 초두의 해석 참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
사 감취었음과 함께 우리의 생명이다. 그렇게 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다. 어떤 학설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하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
다는 말은 다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영적 생명의 신비성을 가리킨다고 한다, 벴
켈도 역시 그와 같은 견해로 말하기를,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모른다. 그
리스도인 자신도 자기를 원만히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ㅇ사도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이 장차 나타날 것을 여기서 말함으로 그 생명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것도 2절의 둘째 이유이다(첫째 이유는 3절). 이렇게 영광스러운
생명이 위에 있으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한다.
ㅇ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 우리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부
활과 영생은 곧, 우리의 부활과 영생으로 그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부활의 원인자(原因者)이시요 또 원천이시다(요 11:25). 여기 "나타나신다"는 말은 재
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초림도 어느 정도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재
림에 비교하면, 그렇지 못한다.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인류의 일부가 보았거니와, 재림
하실 그는 온 인류가 다 보게 될 것이다(계1:7).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의 재림을 가리
켜 "나타나심"이라고 하였다. 그가 "나타나실"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한 일
들도 선악간에 다 나타나다(고전 3:13).
ㅇ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우리 신
자들이 그와 같은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미천(微賤)하던 우
리가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롬 8:18-19; 요일3:2).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육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본절부터 9절까지는 믿음을 장성하게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죄를 끊어 버림이다. 기독교의 인간 개조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이 안니
고, (1)먼저 죄악의 뿌리부터 단절해 버림으로(5)절, (2)악한 행습들을 제거함에 이르
고(8절), (3) 선미(善美)한 덕행을 옷입듯하게 한다(12-17). 다시 말하면, 그것은 먼
저 죽고 그 뒤에 사는 것이다. 곧, 악심과 악행을 죽이고 선미한 새 생명을 가꾸어 낸
다.
ㅇ여기 "그러므로"란 말은 위의 교리론(1-4)에서 실제적 결론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
리 신자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는 것이니만큼, 세상 끝날에 그것일 완
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땅 위에서 믿음을 착실히 지켜야 한다. 이 사상은 벧
전1:3-5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누릴 자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하
다(벧전 1:5).
ㅇ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끊어 버려야 된다. 이 의미에서 사
도은 여기서부터 골로새 신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버리라고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
란 문구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이것은 불의(不義)의 병기로서의 지체들을(롬
6:13)가리킨다는 해석, 곧, 하나님보다 땅의 것들을 더 사랑하는 육신의 지체들을 의
미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채택하는 경우에는, 아랫말 "죽이라"는 것은 제어(制御)
하고 극복하라는 의미이겠다. (2) 이것은 우리의 부패한 성품의 각양 작용들을 의미한
다고 하는 해석. 하반절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란 말이 "땅에
있는 지체"란 문구의 설명인 사실로 보아도 이 해석이 적합하다."죽이라"(*
)는 것은, 악한 성품의 활동을 그것이 '아주 죽은 것처럼 영원히 정지시키라'
는 의미이겠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엣 것들을 즐겨 하
나님을 떠나 버리게 만드는 죄악들이다. 여기 열거(列擧)되 다섯 가지 죄악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음행"과 "탐심"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1) 성적 죄악.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음란,부정,사욕, 악한정욕"은 마음속에 일
어나는 음란의 충동과 욕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음란과 부정"의 차이는 무엇이며 "사
욕과 악한 정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음란"이란 말은 "부정"이란 말보다 범위가 좁은
말로서 불법저그로 취하는 성적 행동을 의미하고, "부정"은 성문제(性問題)에 대한 일
체의 불합리한 언행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정 무서운 죄악은 음란이다. 그
렇게 때문에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 열거한 죄목들에는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선두에
놓는다(갈 5:19; 엡 5:3). 글 이유는, 이 죄악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힘으로 하나님을 영구히 떠나기 쉬운 까닭이다(고전 6:15-20).
(2) 무제한의 소유욕. 이것은 "탐심"이라고 불리우는데 "우상숭배"와 같이 간주된
다. 이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악이다. 탐심의 소유자는 세상
것들에 애착하여 그것들을 추구하기에 전심 전력하고 하나님을 떠난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는 내용의 교훈은 마 6:24과 엡 5:5에도 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곧 하나님을 섬김으로)하나님의 뜻이면 물질도 받을 수 있다(마
6:33). 그런데 이 말씀을 외면하고 물질을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요
시하는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같다.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ㅇ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노라 - 이 말은 위의 권면의 이유이
다. "이것들" 곧, "땅에 있는 지체"들은 위험하니 그것들 때문에 마침내 하나
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에게
두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롬 1:18-32이 가르침과 같이, 그들을 그 범하는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심이고(롬 1:18,24,26,28), 둘째는, 끝날 대심판
때에 그들을 영벌에 처치시키는 것이다(계6:17). "임하느니라. "한역의 각주
(脚註)가 보여줌과 같이, 어떤 사본들(A,C,D,E,K,L)에는 이 말 위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식들에게"란 어귀가 있다.그러나 마이어는 이 어귀가 본래의 원본
에서 순전히 보전되어 내려운 것이라고 한다.우리가 이 어귀를 취하든지 취하
지 않든지 보절의 큰 뜻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임하느니라"란 말의 헬라 원
어는 현재 시상(現在時相)이다. 이에 대하여 라이트푸트는
말하기를, 이것이 죄인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아주 확실하다는 의미
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ㅇ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해하였으나 - 여기 "그 가운데"란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것들 가운데"란 복수로서 위에 말한
'죄악들 중에'란 말이다. 골로새 사람들이 중생하기 전에는 그런 죄악들이 그들의 방
펴이었다.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ㅇ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라 - "이제는"이란 말은 개
종하고 복음을 믿은 그 때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들"이란 말은 "땅에 있는 지체들"
(5절 상반)곧, 모든 죄를 의미한 것인데(5절 하반), 곧, 모든 죄를 의미한 것인데(5절
하반), 역시 8절 하반부터 9절 초두에 있는 죄들까지 총칭한다. "벗어 버리라"는 말은
낡은 옷을 벗듯이 이 모든 죄들을 전적으로 내버리라는 말이다.
ㅇ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히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
헬라 원문에는 "분"이란 말바로 위에 "노함과"란 말이 있
는데 ,한역에는 그것을 빠뜨렸다.그러면, 헬라 원문대로 여기에 여섯가지 죄악이 역거
되어 있으니, 처음 두 가지가서로 관련이 밀접하고, 다음 네 가지 역시 서로 관련이
밀접하다. 처음 두 가지 곧, "노함과 분"에 대해 말하자면, "노함"은 외부에 폭발된
거이고, "분"은 마음 속에 불타듯이 잠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네 가지에 대하여
말하자면, "악의"라는 죄악은 기타 모든 것들에게 원인(原因)관계를 가
진다. "악의"란 것은 남을 해하려는 독한 마음을 말함이니, 이것이 원인이 되어 (1)남
을 훼방하며, (2) 남을 대면하여 욕하며(본문에 "부끄러운 말"은 대면해서 버릇 없이
말함을 의미한다), (3) 혹은 남을 속임이다. "훼방"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不敬)하게 말함을 의미하는 때도 있으나, 여기서는 이웃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를 비방함을 의미한다.(롬 3:8,14:16;고전 4:31;딛 3:2). "부끄러운
말"은 시약성경 중 여기에만 한 번 사용되었다. 이것은 부
정한 말(음탕한 말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버릇없는 말)을 의미한
다.
ㅇ옛 사림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여기서부터는 골로새신자들이 위의 모든 죄를
끊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 때에 원칙적으로는 벌써 옛사람
과 그 악행을 벗어 버렸으니만큼 그들로서는 그 죄악을 습성을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이
다. "옛사람"은 무엇인가? (1) 성령으로 중생되기 전의 사람이므로 옛사람이고, (2)
타락하요 파상되었고, 또 부패해진(엡 4:22) 인성(人性)이므로 옛사악한 행습을 의미
하는데, 일시적이 아니고 상습적으로 기탄 없이 행하는 것을 갈리킨다. "벗어 버리
고." 8절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ㅇ새 사람을 입었으니 - 이것은 위에 기록된 악행을 버릴 이유이다. 기질상(氣質上)
죄악 곧, 노함과 분을 제거하고, 또 언어상(言語上)죄악들 곧, 훼방, 욕설,거짓말을
끊어 버려야 할 이유는 어디있는가? 그것은 이 문구들이 보여줌과 같이, 믿는 사람들
은 원리상으로 그 믿는 순간부터 옛사람 (부패한 본성)을 삽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새
사람(중생된 사람)을 입은 사실을 인식하는 까닭이다.(롬 6:6). "새사람"이란 말은 성
령을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아(自我)를 가리키는 바, 고후 5:17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갈 6:15; 엡 4:23-24).
ㅇ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적
에 채택하신 모형이니(창 1:26-27),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역시
그 모형을 취하셨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큰가
를 알 수 있다. (1)그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그 이상 더 할 수 없
는 지극한 사랑이요, (2) 그리스도 안에서 제 2차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또 그
같은 모형을 취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사라의 불변성(不變性)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가라키는가? 그것은 엡 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 잘 밝혀 주낟. 여기 "의
와 진리의 거룩함"이란 말
을 개역하면, "진리의 의(義)와 진리의 거룩함"이나, 곧, 진리가 소유
한(혹은 산출하는)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복음의 진리는 죽은 해골과 같은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고, 그것을 참으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의와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 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름이고, 거룩하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말한다.
ㅇ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면, "지식
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심"이니 곧, 인간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 개조(靈的改造)를 말한다. 그러면 이것을 그 바로 윗말과 연락시켜 볼
때에, 그 뜻은 이러하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로 지으심에 있어서 (1) 그 모형은
자기의 형상인데, (2) 그 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지식(복음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그 시령을 새롭게 하심이다. 복음 진리를 참으로 아는 데 이른 사람은 필연
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곧, 의와 거룩)으로 변환한다. (핫지의 주석, 엡 4:24에 대한
해석 참조). "지식"이란 가은 통속적 의미의 지식이 아니고, 성
령의 역사로만 받을 수 있는 영적 통찰이다. 이 말에 대하여 화란 주석가 반류웬(Van
Leeuwen)은 말하기를 , "여기 '지식'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론상 지식이거나 자역
적 지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생활에서 흘러 나오는 신앙적 지식 곧,
영적 통찰이다"라고 하였다.여기 "새롭게 하심을 받는"이란 말
은 "새로워져가는"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진행형(進行形)으로서 (현재분사
이니만큼)그 새로워짐이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자의 성화(聖火)가 단번
성취가 아니고 점진적이고 계속적임을 말해 준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자가
악행을 끊은(8-9절 상반) 결과로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이 더욱 새로워진다는 것이
다. 신자가 악을 떠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만 그가 악을 떠날 때에 새 힘을 얻는
것도 확실하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행해야 그것이 축복의 원천으로 임한
다. 진리를 순종함은 믿음의 진실성이다.
ㅇ본절은 윗절의 계속으로서 "새사람"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다.
ㅇ거기는 - 이 밀은 새 사람의 세계에는 아무러 다계습이나 차별이 없나
니, 누구나 그리스도께 속하여 구원을 얻는다(갈 3:27-29).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 "헬라인"은 희랍 민족을 가리킬 뿐 아니라. 희랍 문화를 받
은 모든 다른 민족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Zaha, R merbrief, p. 66). 다시 말하면
"헬라인"은 성경에서 문화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고전 1:22). 그리고 "유대인"은 구
약 종교의 특혜를 받은 이스라엘 민독을 가리킨다(롬 3:1, 9:1-5). 그리스도 안에 있
어서 헬라인도 그 문화의 특수 지위를 자랑할 수 없고, 유대인도 그 소유했던 종교상
특권을 인하여 이방인들을 멸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원은 문화상 발달이
나 종교상 특권으로 말미암아 받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
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ㅇ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 이것은 종교의 외부적 특권과 관련된 자들과 또한 그것과
관련되지 않은 자들의 차이를 가리킨다. 외형적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
니라, 심령으로 중생하여 새 사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롬 2:29).
ㅇ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 "야인"이란 말은 말이 어눌(語訥)
하고 명료하지 못한 자란 의미이다. 본국인은 외국인의 언어를 그런 불명료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헬라 문화를 받아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헬라 문화
권 밖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자들을 볼 때에 그들은 "야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
구디아"란 말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을 의미하는바, 그 윗말 "야인"보
다 더 미개한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스구디아"는 본래 흑해 북편 칼파디아 산
(Mt, Carpathians)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아시아에도 구라파의 스구디아인과 같은 민족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동
쪽 구라파와 중앙 아시아와 북 아시아 전부가 스구디아인의 땅이었다고 추측하게 되었
다. 그들은 문명에 낙오됨이 심하였으므로 그들의 부족 이름은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
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는 특권은, 문화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
르렀던 것이다. 하나님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들과 야만의 야만인들까지도 똑같
은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미개한 민족에 속한 신자들은 이 특권을 누림에 있
어서 외축하거나 자포자기할 바 아니다.
ㅇ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 이 말은 바울이 그 당시의 사회 형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당시 사회는 노예를 학대했으므로 그들의 인권이 인정되지
못했다. 그런 사회제도 아래 있는 노예들에게 있어서, 사도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복
음이었겠다. 갈 3:28을 보면, 새 사람의 세계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의 차별 대우도
없다.
ㅇ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문화
의 특권이나 종교상의 외형적 특수 관계도 아니며, 민족적 우수성이나 사회상 지위도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도 구언을 얻게 할 부속조건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일에 있
어서는, 그르스도께서 "만유"(전부)이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
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원인이시니만큼, 그가 이 원인의 전부란 말이다. 그리고 그가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한 말은, 피조물 중에 그리스도의 주관과 권고(眷顧)를 벗어
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는 "만유"곧, 헬라인, 유대인, 야만인, 스그디아인, 노
예, 자주자 할 것 없이 모든 인류에게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구원자로 계신다는 말
이다. 롬 10:12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
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가"라고 하는 말씀이 이 뜻을 잘 설명
한다. 고전 12:13; 갈 6:15 참조.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ㅇ그러므로 - 이 말은 골로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마
땅히 이행해야 할 바가 있다는 결론을 소개하는 말이다.
ㅇ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 - 이 문구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하심을 입는 자들"이다. 이들은 물론 그리스도 신자들이
니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었다. 그 택하심을 입은 결과로, (1) 그들은 거룩하게 되었
고, (2)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영원히 입는 것이다. 기독신자는 자기도 남과 다름 없이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감겨함에 넘쳐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봉사하려는 동기를
품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남달리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신자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방심하지 않고 도리어 열심을 품어 선을 행한다. 자기도 성
도(聖徒)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불의를 행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계
속적으로 받는 부요(富饒)한 자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이 세상 것들 때문에 남과 다툴
수 있으랴?
ㅇ처럼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로서"라고 개역되어 '사실 그대로'라는 의미
를 나타내야 된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로서"라고 번역하는 것
이 합당하다.
ㅇ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긍휼"이란 말
은 직역하면, "긍휼의 감정"이니 인격의 속에서부터 솟아
나는 불쌍히 여기는 열정을 말한다. 영적으로 부요한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사람의 가
련한 정형(情形)을 살피는 데 민감하다. "자비"란 말은 성격의
인자함을 의미하는 바, 엄위(嚴威)에 정반대되는 것이다(롬 11:22). 이런 성격은 위에
서 말한 긍휼을 근원으로 하고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
게 관련되었다. "겸손"은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
는 태도를 말한다(빌2:3).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면, (1)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심
각하게 인식해야 하며, (2) 높고 낮은 것을 판결하시는 때는 현재가 아니고 그리스도
께서 재림하시는 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남보다 우수
한 줄로 자인(自認)하고 머리부터 상석(上席)을 택하는 것은 너무도 외람된 일이다.
눅 14:8-10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대로, 현세에 있는 교회의 복음 전파는 사람들을 연
회에 초청함과 같다. 이 교회 생활(연석을 차지하는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스스로 자
신을 높인다면, 그것은 연회에 초청된 객으로서 연주(演奏)인 하나님의 하실 일을 월
권하는 무례한 행동이다. 우리는 차라리 말석(末席)을 차지하는 것이 예법에 정당하
다.
"온유"란 말에 대하여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그것은 베는
듯하고 쏘는 듯하고 찌르는 듯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며, 남에게서 손해와 방해를 받
고도 격부되거나 원한을 품거나 반동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이고, 대인 접물(對人接
物, 예를 들면 사람을 교훈하거나 사업을 경영함과 같은 것)에 있어서는 조급, 경솔,
조포(粗暴), 열광, 잔인, 속단, 흥분등과 정반대되는 인내, 시중,화순(和順), 조절,
포용, 유화(柔和), 침착으로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오래 참음"
은 나를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로 인하여 변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 있지만, 특히 남이 해하거나 혹은 은혜를 배반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노하지
않고 변함 없이 덕행(德行)을 계속함을 의미한다. 구약의 잠언에 오래 참는 덕을 칭찬
하여 말한 귀절이 많다(잠 14:29,15:18,16:32,17:27). 하나님께서 이간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은 롬2:4, 9:22; 벧후 3:9에서 볼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을 대하여 오래 참
으라는 권면은 딤전 1:16; 딤후 4:2에 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5:22)에서
오래 참는 덕의 필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단은 그가 시험하는 사람을
폭력으로 정복할 수는 없으므로 같은 시험을 오랫동안 계속함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질그릇과 같아서 계속적 시험에는 넘어가는 줄 그놈이 알기
때문이다. 그놈은 이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이와 같이 장기적 시혹(試
惑)을 이기려면 우리는 오래 참는 덕을 소유해야 된다"(의역).
"옷 입고"우리의 행습(行習)은 옷과 같이 남의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남의
평판을 받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행습들은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이 나타나서
그의 판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로운 행실의 소유자를 깨끗한 옷을 입은
자라고 한다.(계 19:8). 마 22:11-12 참조.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ㅇ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본절은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미덕(美德)의 실제적 적용을 말한 것이니, (1)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적용으로서의
"용납"과, (2) 긍휼, 자비의 적용으로서의 "용서"이다.
"혐의"는 "원망"을 의미한다. "서로 용납하여." 교회 안의 원망이
나 다툼의 책임은 한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선 양편에 다 있는 것이
다. 원망을 받는 자 편에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망 거리를 묵과하지 않고 불
평을 일으키는 자도 사랑의 표준에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측에서는 용납하
는 정신을 가져야 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회에서는 잘못된 자의 짐을 져주는 의미
에서, 혹은 자기 역시 그 사람에게 허물됨이(같은 종류의 허물의 아니며, 혹은 같은
정도의 허물은 아닐지라도)없지 않음을 자인하는 의미에서 그 범과자에게 용납을 청하
는 것과 근사(近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갈 6:1-2).그러므로 서로 용납을 청할 필요
가 있음도 사실이고, 서로 용납해야 될 것도 사실이다. "피차 용서하되"란 말
은 어떤 번역에 의하면,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
되"라고 한다. 이 번역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뜻은, 한 신자가 다른 신자를 용서하면
그것은 실질에 잇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함과 같으르로 "네가 남을 용서하라"고 함보다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라"고 하는 재담식(才談式)문구를 사도가 썼다는 데 있다. 이
번역이 옳다면, 사도의 이 권면은 모든 신자들이 다 한 몸과 같다는 성경적 의미를 포
함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이 번역을 지지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골
로새신자들은 서로 용납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 걸
음 더 나가서 서로 용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거니, "용납"은 피동적이요 소극적이고,
"용서"는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다, 용납은 12절에 열거된 다섯가지 미덕 중 겸손, 온
유, 오래 참음의 산물이고, 용서는 긍휼과 자비의 열매로 볼 수 있다.
ㅇ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우리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를 반역하고 그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
에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는 우리에게 대하여 불평을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큰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를 책 잡
으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만한 최대 이유의 소유자는 그리스도였다"라고 하였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ㅇ본절은 12절의 다섯 가지 덕(德)에 연속하여 모든 덕행의 근본인 사랑에 대하여 언
급한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있다(요 13:34-35;
롬13:8-10; 고전 13:1-13;갈 5:13-15;엡 4:2-3;요일 4:7-21).
ㅇ이 모든 것 위에 사라을 더하라 -12절에 열거된 다섯 가지 덕도 중요하지만, 그것
들 이상으로 더 중요하여 그것들의 기초를 차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ㅇ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완전의 띠"란 말이니 곧,
도덕 생활의 완전을 성립시키는 근본적 용소하는 말이다. 누구든지 사랑만 붙잡으면
모든 다른 덕행들은 거기에 따라온다(롬 13:8,13:1-13).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되라

ㅇ교회 생활에 있어서 피차간의 용납과 용서를 생산하는(13절)다섯 가지 미덕(12절의
긍휼,자비,겸손,온유, 오래 참음)이 사랑의 띠로 결속(結束)되면(14절), 교회 안의 평
화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골로새교회에 대하여, 본절에서는 평화
를,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內住)를 희망한다. 그 논리적 단계를 도시(圖
示)하면 다음과 같다.

긍 휼 용 서 - 그리스도의 평강
사 자 비 (혹은 그리스도의 평화)
랑 겸 손
의 온 유 용 납 -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內住)
띠 오 래 참 음

ㅇ그리스도의 평강의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된다 - 여기 "그리스도의 평강"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평화이다(빌 4:7). 이 평화를 마음에 소유한 자는
곧,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니 분토(墳土)와 같은 땅 위의 것 때문에 이웃과 다툴 필요
는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에 참 평화가 있는 자는, 다른 사람과도 늘 평화의 관
계를 가진다. 그런즉 남들과 평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참된 평화(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소유해야 된다(요 14:27; 엡2:14). "주장하게 하라"란 말
은 경기 지휘자(競技指揮者 = Umpire)의 역할을 하라는 말이다. 경기장에서
혹시 분쟁이 일어나는 때는 두 말할 것 없이 그 지휘자의 결정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경기는 진행되는 법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신자의 마음에도 어떤 대외적 원한(對
外的怨恨)이 있어서 암투(暗鬪)가 일어날 경우에는, 지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펴화적
지휘에 순종해 나아갈 뿐이다.
ㅇ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 고전 7:15참조, 기독신자들
이 얻은 구원의 최후적 목표는 "영원한 평강"이니(계7:14-17,21:1-7, 9-26,22:1-5),
그것을 성취하시는 방도로서의 "부르심"도 그것에 해당(該當)하여 아무 분쟁 없는 한
몸 같은 교회(고전 12:12-27)를 이루게 하는 부름이다.
ㅇ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곧, 너희는 너희를 한 몸이 되도록 부르사 평강
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 감사의 표는, 그들이
이 부르신 목표(한 몸이 되게 하는 것)에 순응하여 서로 화합하는 것이겠다. 칼빈은
여기 "감사하는"이란 헬라 원어를 "유화(柔和)하는"(anabiles
sitis)으로 번역했으니, 그것은 친목적 화합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보절의 문멕
에 아주 적합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평강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너
희를 한 몸처럼 합일(合一)하는 조직체인 교회가 되도록 부르셨으니, 너희도 거기에
순응하여 너희끼리 유화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다. 에디(Eadie)는 이 점에서 있어
서, 이 말이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유화"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
서는 그렇게 쓰인 실례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감사"의 의미를 채택하였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ㅇ사라의 띠를 띠는 것으로 모든 미덕(美德)을 생산하여 지속할 수 있게 된 교회는
(14절), 논리적으로 평화의 덕을 소유할 수 있으니마큼, 사도의 평화를 희망했다(15
절). 그리고 또한 그런 교회에는 논리적으로 진리의 부요한 내주(內住)가 있을 수 있
기 때문에(2:2), 본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내주하기를 희망한다.
ㅇ그리스도의 말씀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라이
트푸트는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현시적(現時的) 영적 임재(靈的臨在)를 의미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문맥으로 보아서 이 둘째 해석이 합당하다.
ㅇ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 신자들 사이에 사랑이 풍성하여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
의 말씀도 풍성히 내주한다. 그 이유는, 합심된 신자들의 단체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시는 까닭이다(마 18:19-20). 이와 같이 사도는 사랑을 권면한 후(14절)에 그것
(사랑)의 첫 열매로서 교회의 화평을 희망하고(15절), 또 그것의 둘째 열매로서 그리
스도의 말씀의 내주을 희망한다. 신자가 서로 사랑 안에 연합하여야 그리스도의 말씀
을 이해하여 얻는 지혜의 부요에 이른다(2:2 해석 참조).
ㅇ모든 지혜를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르 부르며 - 여기 말
한 "가르침", "권면"."찬미"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말
씀"의 내주가 없으면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찬양이 참되이 나타나지 못한다. "가르침"
은 영적 지식을 전달함이고, "권면"은 도덕 실행의 동기와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다.이
둘은 "모든 지혜"를 방법으로 한다. 지혜의 방법을 가지지 못한 가르침은 언제나 실패
한다. 권면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브르며." 여기 있
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는 악기에 반주되는 가곡을 가리킨 것이
지만, 역시 반주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가(聖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학설
에, 이것은 구약의 시편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찬미"는 단순히 목소
리로 부르는 종교 음악이니,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도들이 영감(靈感)으로 지은 성가들
이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위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든지를 가리킬 수 있는 일반
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떤 특종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윗말 "시
와 찬미"를 총괄하는 명칭이다(엡 5:19).
ㅇ마음에 강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이 문구는 윗말과 밀접한 연락을 가졌으니
그 연락을 따라 약술(略述)하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서 마음에 감사함으
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이다. 신자가 모든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주요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고, 교회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감사함으로"란 말은 한역의
각주와 같이 "은혜로"라고 번역할 수 있으니, 그것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은혜를 받은 마음으로 하라는 의미이겠다. 그러나 첫째 번역이 자연스럽다.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ㅇ이 귀절에서 바울이 12-16절의 결론을 짓는 의미에서, 기독신자의 행동 원리의 요
령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함과 또한 그 이름으로 감사함이다.
ㅇ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이 문구에는 이중 의미가 포함되었
다. (1) 그 언행(言行)이 그리스도 자신의 언행답게 하라는 것이니, 신자가 그 언행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모본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를 위하는 언행을 의미한다.
ㅇ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여기 "그를 힘입어"란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그리스도
신자는 일반 언행에 있어서나, 하늘의 하나님을 송영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힘
입어야만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는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하
시기를, "나도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
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ㅇ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부간의 도덕을 거론하였
으니, 그 이유는, 부부가 가정의 기초인 까닭이다(창 2:18). "남편에게 복종하라."가
정의 화평은 주로 아내된 자의 온유한 덕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온유와 복종은 서로
유사한 덕이다. 벧전 3:4-5 참조. 구약의 잠언에 복종의 덕을 소유하지 못한 아내의
불해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경계한다(잠 11:22,12:4 하반. 21:9,19,25:24, 27:15). 잠
11:16,12:4,31:10-31 참조.
ㅇ이는 주 안에사 마땅하니라 - 이 문구는 주 안에 있는 자가 마땅히 실행할 책임이
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책임이 있는 이유는 성경에 밤히 기록되
었다. (1)남자가 먼저 창조된 까닭(딤전 2:13), (2)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까닭
(고전 11:9), (3) 여자는 남자에게서 난 까닭(고전 11:8), (4) 여자가 솔선하여 범죄
한 까닭(딤전 2:14), (5)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그릇임으로 남자의 지도와 보호를
요구하는 까닭(벧전 3:7), (6)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벧전
3:7), (6)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창 3:16;고전 11:3)이다.그
러나이 복종은 예종(隸從)이 아니고 여자의 천직(天職)이다. 인권(人權)에 있어서는
남녀가 동등이다(거전 11:12;벧전 3:7).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ㅇ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며 - "아내를 사랑하며." 엡5:25에,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
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어떠한가? (1) 그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고, (2) 우리
가 사랑하기 전에 그가 솔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고, (2)우리가 사랑하기 전
에 그가 솔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고, (3)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사랑이고 (4) 영원한 사랑이고, (2) 우리를 셩결하게 하시려고 사랑하신 것이다(엡
5:26-27). 남편된 자가 그 아내된 자에게 이렇게 큰 사랑의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ㅇ괴롭게 하지 말아 - "괴롭게"한다는 말은 '쓰게 군다'는
의미이다. 남편된 자는 그 아내를 주관할 천직을 가졌으나, 그것은 독재적 압제를 의
미하는 것이 아니고,오직 사랑으로써 보호하고 부양하며 지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
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남자는 이 권리의 성질을 오해하고 아내의 가정상 권리를
무시하고 전자(專恣)를 일삼는다. 크리소스톰은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강해하였다.
"남편된 너는 네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여 아내에 대하여 전자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아
내된 너는 남편이 사랑한다고 하여 교만해지지 말아라, 아내된 너는 남편에게 종속하
기를 서슴지 말아라. 너는 사랑하는 그에게 종속함이 고역이 아니니라. 남편된 너는
네 아내 사랑하기를 서슴지 말아라. 그 이유는, 네 아내가 네게 종속되어 있는 까닭이
다"라고 하였다. 남편된 자는 언제든지 그 아내에게 오직 사랑에게 순종해야 할 본분
을 가지고 있다.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ㅇ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 출20:12; 레19:3; 신5:16; 잠23:22; 눅
2:51-52; 엡6:1-2 참조. "모든 일"이란 말은 그렇게 엄밀하게 볼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은 부모가 명하는 것들 중에 악한 것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일"이 아니
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에게 순종차 않는 것은 성경 말씀이 엄히 정죄한다. 자
30:17에 말하기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다. 롬 1:30과 딤후 3:2을 보아
도 부모를 순종하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순종하라"는 말
은 18절의 "복종하라"는 말과 다르다. 18절의
것은 통솔(統率)에 종속함을 의미하고, 본절의 것은 교훈에 청종(聽從)함을 의미한다.
ㅇ이는 주 안에게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도덕
표준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다(Lightfoot).신자들의 도덕 표준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본(寫本)은 이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여기 "주 안에
서"의 헬라 원어를 "주에게"란 말로 고쳤다. 기
독신자는 세상의 안목(眼目)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에게 부
합하도록 행함이 필요하다.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ㅇ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 이 귀절의 의미는 엡 6:4이 더 상세하게 밝
혀으니, 그것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부모된 자들이 그 자녀를 격노케 하는 원인 어디 있는가? 그것은, (1) 그들이
자녀들을 훈계하되 자기들의 권위와 자기들의 방법과 자기들의 표준을 고집하면서,
(2) 만알 그 자녀들이 잘 순종치 않는 경우에는 혈기와 울분에 끌리어 강박(强迫), 악
담(惡談), 폭력까지 사용하는 데 있다.
ㅇ부모가 그 자녀에게 대한 자기들의 권한을 남용하여 지도하는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런 실패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를 교양함에 있어서 자기들의 권위나
방법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만이 주인공
이시니 그리스도만이 그 권위와 방법을 가지셨디.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하신
교양과 훈계를 그 자녀에에 전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엡 6:4참조. 그들은 그 자녀
의 잘되고 못되는 문제를 일체 주님께 의뢰해야 된다. 그리고 혹시 그 자녀가 불순종
하는 때에도 그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온유하게 지도해야 된다. 우리가 한 가지 명심
할 것은, 부모가 그 자녀를 옳게 지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노여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그 부모에게는 잘못이 없다.
ㅇ낙심할까 함이라 - 이 문구에 대한 벴겔의 강해를 보면, "낙심은 청년의 패망이다"
라고 말했다.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ㅇ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
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바울 당시에는 노예 제
도가 사회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 신자의 가정 도덕
을 진술함에 있어서 역시 이 부분을 제외할 수 있는 대로 그 주인을 속여 가면서 맡은
일을 게으르게 하고, 주인은 노예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주인을 속여 가면서 맡은 일
을 게으르게 하고, 주인은 노예를 학대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문제의 도덕적 해결책을 여기에서 진술하였다.
"육신의 상전" 바울은 이 말로써 노예들의 인격적 가치의 고귀함을 설명하여 그들
의 눌린 심령을 위로한다. 곧, 이 말은 노예들이 육신상으로만 노예된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믿는 한(限), 남들과 같이 영생의 복을 누릴 자유가 있음을 암시한
다. 이 문구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은 강해하기를, "바울의 이 말은 노예들의 인격의 더
좋은 부분(영혼)은 자유한다는 것이며, 노예로서의 그들의 고역은 잠간임을 밤힌다"라
고 하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누 가림만 하지말고." 그리스도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로 그 일을 성실히 감당해야 할 종교적 의미인 것이다.
그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니, 그의 직업도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마음 속과 모든 은밀한 것을 밝히 보시는 하나
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행함이 마땅하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려면 거짓
됨이 없이 중심으로 그 직무에 충성해야 된다. 그의 수고가 그 주인된 인간을 기쁘게
할 목적이면, 그것은 하나의 무의미한 고역(苦役)과 비애(悲哀)일 것이다. 그러나 성
경대로, 노예의 수고도 주 안에서 행한 것이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봉사를 목표
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영원한 상극을 받게 될 천국 노동이다. 고
전7:17-23 참조.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성실한 마음으로"란 말
은 '단순한 마음'곧, 거짓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노예도 모든 다
른 직무를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끝날에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
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갖게 되는 성실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된다.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ㅇ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 보절은
앞절의 내용을 이어서 노예 봉사의 또 한 가지 태도를 부가한다. 앞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오는 성실한 마음(거짓이 없는 마음)으로서의 봉사 태도를 말하고,
본절에서는 그 봉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실행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마음을 다
하여"란 말을 자역(字譯)하면 "영혼에서부터"라고 할지니 이것을
보면, 마음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감심(甘心)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아무리 노고가
심하고 비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향기롭고 영
예로운 것이다. 그런 일은 누구든지 마음을 다하여 할 만하고 또 감심으로 할 만하다.
이런 감심적 봉사는 어언간 노예의 속박을 떠나 자유의 경역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고상해 지고 또 영화롭게 된다.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노예가 그 봉사를 할때에 주님을
위하는 의미로 할 것이고, 인간을 위하는 의미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ㅇ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 이 귀절과 다음절은 노예가 주님을 위하
는 의미로 그 책임을 성실히 해야 될 이유를 보여준다. 곧, (1)노예된 자도 그 믿음으
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서 영생의 기업을 은혜로 받으니 그 은혜가 감사한 가닭이
며, (2) 그의 수고는 궁극적 의미에서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내용을 가진다. 그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하면 끝날에 보응을 받겠기 때문이다(25절).
"유업의 상." 이 문구 역시 노예들을 상대한 말이다. 노예들이 "육신의 상전"에게
서는 종의 대우를 받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녀의 명분으로 장차 유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받는 자는 그 집 노예까 아니고 언제나 그 집 자녀일
것이다(마 21:35-38; 롬8:15-17; 갈 4:1,7). 신자가 내세에 들어가서 받게 되는 영생
과 그 영광을 가리켜 "기업"혹은 "유업"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거저 받는
영생이기 때문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자녀의 처지
에서 받는 영생의 복은 그의 어떤 공로와의 교환 조건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께서 내세에 그 성도들에게 주실 영생은 불변하는 것이다(벧전 1:4-5). 자식이 그 아
버지에게서 받는 기업은 일시적 상급이 아니고 영구한 것이다(요 8:35).
ㅇ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한역의 각주(脚注)에, "종노릇하느니라"라는
번역은 "섬기느니라"의 문자역으로서 글뜻을 더 밤히 보여준다.
이 문구는 노예들의 봉사의 의의(意義)를 결론적으로 밝힌다. 그들의 봉사가 직접으로
는 인간을 상대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상대한다. 어떤 학자는 여기 "섬
기느니라"를 "섬기라"란 명령사로 번역한다.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ㅇ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
라 - (1)본절은 내세의 심판이 공정할 것을 예고하여, 노예된 자들로 하여금 책임에
추성케 하려 하려 함이라고 한다. (2)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노예들의 나타(奴
隸)와 불성실을 경계하라고 이 말을 하였다기보다, "상전들"의 노예 취급의 불공정함
을 염두에 두고 노예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3)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은
두 계급(주인과 노예)을 함께 경성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한다.
"불의의 보응." 이것은 그 행한 불의에 해당한 벌을 가리킨다. "주는 외모로 사람
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여기 "외모"는 모든 외형적 차별들이 인종, 지위, 빈부, 귀천
등의 차별이다. 끝날의 심판 때에는 지위가 높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받을 형벌을 면할
것이 아니며, 혹은 낮은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써 마땅히 받을 정죄에서 방면(放免)
될바도 못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각 사람의 소행을 따라서 실행될 것이다. 롬
2:6;고후 5:10;엡 6:8-9 참조.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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