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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골로새서

[스크랩] 골로새서 (1 : 1~29)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1:56
골로새서 1장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ㅇ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 본서의 서두는 바울과
골로새 교회가 피차 처음 알게 되는 상황이므로 담담하게 바울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도'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의 의미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여기서
는 단순히 '심부름을 하는 자'의 의미가 아니라 '파견자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Vaughan).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정당한 자신의 권위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권위는 스스로 취한 것도 아니요 사람들의 추천으로 된 것
도 아니다(고후 3:1). 오직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사람이고 그리스도
의 권위와 권능을 대변하는 자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궁극적으로 하
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감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 자신에
게로 이어지는 권위의 연속성(連續性)을 주지시키고자 함이다.
ㅇ형제 디모데 - 디모데는 본서 외에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
서의 서두에 언급된다(고후 1:1 ; 빌 1:1 ; 살전 1:1 ; 몬 1:1). 이는 디모데가 여러
지역의 교회들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서에서 바울이 디모데의 이름
을 거론하는 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디모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를 자신과 함
께 소개함으로써 친근감을 주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뜻이 있
었을 것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처음 만났고 바울과 동행하면서 함께 사
역하였다(행 16:1 ; 고후 1:19).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ㅇ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 '성도들'(하기오이스)이란 말은
'신자'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며, 여기에는 구약적 배경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들을 성별하여 선택하였고, 이렇게 '성도'로 불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높은 지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요청받았던 것이 전제된다. 골로새 교인들도 '성도'로서의 자의식
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다(O'Brien).
ㅇ그리스도 안에서 - 이는 성도의 영적 위치를 강조하는 말로 성도는 한 육체의 지체
들로서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Vaughan).
ㅇ신실한 형제들 - 만약 골로새 교인들이 인격적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투철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면 그들은 마치 바울
과 디모데의 관계처럼(1절), 바울과 영적 형제가 될 것이다.
ㅇ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 바울의 편지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생략한 채
아버지의 이름만을 언급한 것은 본 서신이 유일한 예이다(Lightfoot). 한편 헬라어 서
신 형식에서 발신인은 '...로부터'에 의해 드러나는데 본문에서는 '...로부터'가 '아
버지 하나님'에 붙어 있다. 이것은 본 서신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ㅇ은혜와 평강 - '은혜'(카리스)는 하나님에게서 흘러 넘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값없이, 자격을 묻지 않고 주시는 것이
다. 즉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을 가리킨다. '평강'(*
,에이레네)은 '은혜'에 의하여 귀결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한편 여기까지는 당시의 헬라적 서신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신자의 이름, 수신자의 이름, 그리고 인사와 기원이 이어지는 형식은 전형적
인 헬라식 서신의 서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편지의 서문에 그치지 않는다.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하는 시간에 온 회중들에게 낭독되었다(4:16). 예배시
간에 회중들에게 들려진다는 의미에서 이 편지의 서문은 단순한 인사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정 사실화하는 구약성경의 축복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O'Brien).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ㅇ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 바울의 편지 서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같
이 언급되는 경우에도 감사의 부분에서는 '내가'라는 단수형으로 서술되는 것과 달리
본문에서는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표현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저자 문제의 관점에
서 설명하고 있다(Bruce). 즉 전자의 경우에는 바울이 단독 저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
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공저자(共著者)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 공저자
라면 그는 디모데일 것이고 이는 디모데가 실제적으로 서신 집필에 참여했다기 보다는
곁에서 심정적으로 함께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도할 때마다'는 바울이 늘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서 언제나 기도
하고'라고 번역하여 이 의미를 살리고 있다. 이는 바울이 비록 골로새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 계속해서 골로새 교회에 대한 사도직을 수행해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ㅇ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돌려진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
을 '우리의 아버지'로 묘사했는데(2절) 여기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서술하고 있다(요 14:6).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
이다(요 20:17).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ㅇ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 바울은 직접 골로새 교회를 방문해보지 못했
지만 이야기를 들어서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알고 있다. 아마 에바브라를 통해
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7절 ; 4:12). 바울이 들어서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여기서 언
급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표현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일 수도 있고
(Calvin),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Bruce). 이 둘은 서로 별개
의 것이 아니다. 바른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곧 그리
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ㅇ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은 성도들간의 폐쇄
적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도들간의 사랑이 더 긴밀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복음이 땅 끝가지 전파되면 이 사랑은 온 인류의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은
믿음과 긴밀하게 결합된다. 사랑은 믿음의 구체화(具體化)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믿음의 열매요 참증거인 것이다(Carson).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ㅇ하늘에 쌓아둔 소망 - 본절의 '소망'은 앞절의 '믿음', '사랑'과 밀접하게 결합된
다. 이 '소망' 때문에 믿음과 사랑이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소망은 하늘에
대한 소망이다. 그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산 결과 하늘에서
받게 될 영광스러운 보상 즉 하늘의 축복에 관한 소망이다.
ㅇ복음 진리의 말씀 - 복음과 진리는 서로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진리' 곧
'복음'은 사람들을 하늘의 소망에로 인도하며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인도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복음에서 비롯된다(롬 10:17). 또한 복음의 진
리는 참다운 가르침과 사이비 교훈을 구별해 주는 척도가 된다.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ㅇ하나님의 은혜 - 복음이 말 그대로 좋은 소식인 것은 그것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
님의 은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핵심으로 한다(Carson).
ㅇ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 복음은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골로새 교
인들에게 이르렀고 온 천하에도 이르렀다. 여기서 '온 천하'는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당시 복음이 다메섹, 다소, 안디옥, 고린도, 에베소뿐만
아니라 로마에까지 전파된 것을 염두에 두고 '온 천하'란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O'Brien). 즉 바울은 복음이 끊임없이 그 영역을 확대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발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Vaughan).
ㅇ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복음은 열매를 맺게 하고 자라게 하는 능력을 지닌다.
열매를 맺는 것과 자라는 것은 각각 복음의 내적 활동과 외적 팽창을 나타낸다. 또한
이 두 동사가 현재 중간태분사로 되어있는 것은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복음의 역동적
활동을 암시한다(Vaughan).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ㅇ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 - 바울이 에바브라를 '함께 종 된'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것은 바울이 그를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인정하였음을 뜻한다. 본문의 '에바브라'
는 빌립보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었던 '에바브로디도'(빌 2:25 ; 4:18)와는 다른 인물
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태생으로(4:12), 그곳뿐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서도 큰 활약을 한 사역자로 보이며 어떤 혐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때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했다(몬 1:23).
ㅇ배웠나니 -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아 열매를 맺게 된 것은 바로
에바브라의 선교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울러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인들이 받은 복음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ㅇ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 '너희를 위하여'는 '우리를 대
신하여'(공동번역)로 볼 수 있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사본들도 많다. 물론 에바브라
의 복음 사역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골로새에 갈 수 없는 바울을
대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바브라는 바울의 동역자(同役者)라고 할 수 있다. 그
렇기 때문에 에바브라의 일꾼 됨은 바울에게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소급
되는 것이다(Carson).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ㅇ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자니라 - 에바브라는 바울을 대신해서 골로
새를 방문해 복음을 전했고 바울에게 되돌아와서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적 상황을 이야
기해 주었다.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열매를 맺으며 자
란다는 것의 한 가지 증거는 그들에게서 사랑이 생겨났다는 것이다(4절). 이 사랑은
그 동기와 출처가 인간에게 있는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의 사랑 즉 '아가페'이다. 칼빈(Calvin)은 이것을 '영적인 사
랑'이라고 해석하였다. 한편 본 서신 전체에서 성령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본문이 유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은 '너희 사랑'이라는 말의
본질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골로새 교인들이 지니고 있던 사랑은 다
름 아닌 성령께서 일깨워 준 것이었다(Vaughan).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사
랑이 넘쳐나는 곳, 그곳이 바로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이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ㅇ이로써...우리도 듣던 날부터...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여기서부
터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에바브라의 귀
환과 골로새에 대한 소식의 청취에서 강하게 동기지워진 것이다.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상황,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
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다소 불안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래서 혹자는 본절에 대해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불만이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
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Scott).
ㅇ신령한 지혜와 총명 - 공동번역은 이를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분명 '지혜와 총명'은 성령의 역사의 산물이다.
ㅇ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성령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
의 뜻'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아는 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피그노신'에서 '알다'는 피상
적인 인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을 뜻한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요구,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온전한 지식이다(O'Brien).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ㅇ주께 합당히 행하여 - 본문은 당시 교회들에서 사용되었던 정형화된 격언과도 같은
것이었다(엡 4:1 ; 빌 1:27 ; 살전 2:12). '주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필연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다(9절). 이것은 기독교의 지식이 지식 그 자
체를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신앙적 행실을 지향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
다(Lightfoot).
ㅇ범사에 기쁘시게 - '주께 합당히 행함'은 구체적으로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
으로 나타난다. '기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스케이안'
은 거의 아부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미리 알아서 행
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모종의 반대 급부
(給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ㅇ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 '열매를 맺게'
(카르포포룬테스)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도의 삶이 계속해서 열매맺는 것
임을 말해준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과 더불어 '주
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의 구체화이다.
ㅇ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 '하나님을 아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있으나 전자가 후자보다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ㅇ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께 합당한 삶, 그리고 열매 맺는 삶을 넘어 하나님의 권능을 골로새 교인들
이 체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본문의 '능하게 하시며'
(뒤나무메노이)는 현재형으로, 성도에게 발휘되는 능력은 하나
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영광의 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더듬어 올라갈 수 없는 초월적 영역에서 오는 하나
님의 능력으로 무덤의 예수를 일으킨 능력이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다.
ㅇ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 '견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
포모넨'는 정해진 목표 지점을 향해 고난을 무릅쓰며 정진하
는 것을 뜻하는데, 경주자가 총력을 기울여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이다
(히 12:1). 결국 '견딤'은 유혹과 저항을 물리치고 한 곳 목표만을 향하여 묵묵히 달
려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오래참음'(마크로뒤미안)
은 무거운 짐에 눌리거나 실패를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불굴의 투지
(鬪志)를 가리킨다. 분명 '견딤'과 '오래 참음'은 즐거움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바로 '영광의 힘'을 좇아 오는 하나
님의 능력에 기인한다.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ㅇ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 '기업'에 대한 언급은 옛날 이스라엘 백
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영토를 분배받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하나님의 옛 백
성들에게 주어진 '육적인 기업'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분깃은
'영적인 기업'이라고 할수 있다. 한편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산티'
는 근본적으로 '충분하게 하다', '적절하게 하다'는 뜻으
로 갖추어진 자격을 의미한다. 이 자격은 인간이 자생적으로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것인 바 자격없는 자를 회개시켜 빛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Vaughan).
ㅇ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의 요지는 '감사'이다. '감사'는 '열매 맺음',
'자라남', '능하게 됨'에 이어지는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성도의 필연적인 삶의 양
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격을 주며 장차 받을
영적 기업까지 허락하셨으므로 감사는 그 은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ㅇ흑암의 권세 - 이는 앞절의 '빛 가운데서'와 대조된다. 이러한 대조는 조로아스터
교의 이원론에 나오고 쿰란의 문서들에서도 발견되는 개념이나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개념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악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흑
암'과 '선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빛'의 대조는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흑암의 권세'는 일찍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직전에
체포되셨을 때 예수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바(눅 22:53), 그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성도들을 탄압하거나 오도하는
인간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비가시적인 사단의 세
력이라고 할 수 있다.
ㅇ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사랑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이란 뜻이며 '나라'(바실레이안)는 종말론적이고 영토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요 3:3-5) 인간
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장차 기업으
로 받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전혀 배제할 수도없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미래
적인 것이며 반드시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것에 머
무르지 않고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지금 성도들
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Vaughan).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ㅇ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구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
폴뤼트로신'은 '값을 지불하고 어떤 대상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 성도들을 그
리스도의 피값으로 취하였음을 말해준다(롬 3:24, 25 ; 엡 1:7 ; 히 9:14, 15). 성도
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ㅇ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고후
4:4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했고 예수 자신은 '나
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선언하기도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불가
시적인 하나님의 분명한 현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이거나 신체
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
것은 실체, 본성, 그리고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와 그리스도가 완전한 동등성을 갖는다
는 것을 의미한다.
ㅇ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최초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
리우스(Arius A.D. 256-336)는 본절을 근거로 그리스도도 피조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본문과 조화를 이루
지 못한다(요 1:1, 2 ; 8:58 ; 히 1-3 ; 10:5-9). 본문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시
간적으로 만물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고 그런 만큼 만물에 대한 우월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준다(Carson).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ㅇ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그에게 창조되되'에서 '그에게'
(엔 아우토)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실재적 주역임을 말해준다. 본절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리스
도는 창조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에게서 나왔고 그를 위하여 존재하
며 그를 향하고 있다(요 1:3 ; 히 1:2).
ㅇ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 - 이는 골로새 교회 이단자들의 사상 체
계에서 뚜렷이 부각되었던 천사 계급에 관한 암시인 듯하다. 본문을 천사들 중에도 등
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
은 천사들의 계급이 아니라 천사들 조차도 그리스도의 창조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며,
이로써 당시에 퍼져 있던 천사 숭배가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해주
는 데 있다(Vaughan).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ㅇ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이는 다소 철학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만물의 통일의 원리이며 모든 창조물을 유지하는 분임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온 우
주에 혼돈 대신 조화를 가져다 주는 응집의 원리이신 것이다(Lightfoot).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가 피조된 세계의 외적 질서의 중심이 되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때 본질적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ㅇ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성도들 상
호간의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와 통일성을 강조하곤 했다(롬 12:4, 5 ; 고전
12:12-27).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몸으로서의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
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사면받고 성
도가 된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본질적으로 설명해준다. 성도들은 교회를 이루고 그 교
회는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갖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첫째, 그리스도와 교회
는 매우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더불어 그의 생명
을 공유한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음으로써만 삶을 얻을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권자로서 절대적 지배권(支配權)을 갖는다는 것이
다. 교회는 주권자인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에 복종함으로써만 생명의 길을 갈 수 있
다.
ㅇ그가 근본이요 - 그리스도가 '근본'이 된다 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보다는 그리스
도의 부활과 깊은 연관이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또
한 성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존해서만, 그리스도에 근거해서만 존재한
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시다.
ㅇ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으뜸'(케팔레)이라는 말은
만물과의 차별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인 바, 이 차별성은 상대적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차이이다.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ㅇ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 본절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본문의 주어가 '하나님'이냐 '충만'이냐 하는 것과 '충만'이라는 단어가 뜻
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하나님'을 주어로 취하고 있는 반
면, RSV는 '충만'을 주어로 삼고 있다. 적어도 문법적인 것으로만 본다면 '충만'을 주
어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다음절(20절)의 '화목케 되기를 기
뻐하다'에 대한 주어도 '충만'이 되어야 하는데 바울의 신학에서 화목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충만'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어로 보는 것이 문맥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충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마'는 그 의미가 여러 가지
로 사용되기 때문에 해석이 분분하다. (1) '의와 지혜와 권능 그리고 모든 축복의 충
만'이다(Calvin). (2) '은혜의 충만,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모든 부요함'이다
(Eadie, Alford). (3) '매우 충만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Moule).
(4) '하나님의 온전하신 본성'이다(Phillips, Lightfoot). 이러한 견해들은 서로 상치
(相馳)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성
을 보인다. 2:9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속성과 권능의 충만'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ㅇ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충만하게 임
했다는(19절) 그 충만함은 하나님과 만물을 화해하게 할 수 있는 자격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예수의 단순한 중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바쳐 피
흘림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 '화평을 이루사'의 헬라어 '에이레노포이에사스'
는 과거분사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루신 평화가
단번에 되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ㅇ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생긴 화
해의 효력은 무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어떤것도
예수의 희생이 가져다주는 화해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동적으로 화해에 참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예
수 희생의 효력이 무제한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거역하던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고 화해의 은총을 거부한다면 그는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다.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ㅇ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 앞에서는 예수의 희생으
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의 우주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면 본문에서부터는 그것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
문은 먼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다. 예전 골로새 교인들의 실존은 '멀리 떠나'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거
리가 먼 것으로 규정된다. 그 멀어진 거리의 공간에는 악한 행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다. 여기서 '악한 행실'과 '마
음으로 원수됨'의 순서에 유의해야 한다. 즉 악한 행실의 결과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
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됨으로 해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악한 행실'이었
다는 것이다(Vaughan).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ㅇ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 '이제는'이라는 전환 문구로
인도되고 있는 본절은 '하나님과의 원수됨'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로의 변화를 말한
다. 바울은 이 전환의 중심에 예수의 피 흘림이 있었음을 이미 말한 바 있다(20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피흘림'을 '육체의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육체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골로새 교회에 유입되거나 주변
에 유포(流布)되었던 이단적 사상들 가운데 영지주의자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육체를
입은 존재가 아니라 천사에 비견되는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만 매개될 수 있다고 주장
했기 때문인 바, 바울은 그들을 겨냥해서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Bruce). 아울러 바울은 본문을 통
해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시고 십
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그런 이단
사상에 말려들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Martin).
ㅇ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 예수
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화해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
이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은 실제적인 변화라
기보다는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해의 실질적 효력 발생으로 하나님의
'칭의' 선언이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현재적인 것이냐 미래적인 것이냐 하는
것은 양자 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적이나 미래의 완성을 지향하는 개념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Bruce).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ㅇ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
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물론 여러분은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인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신앙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본문을 미래적인 것에 대한 조건문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저자 바울의 확신에 찬 표현으로 보고 있다
(Nicholson, Radford).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앞절(22절)에서 말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위해서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바로 서는 일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굳건히 지키는 일이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 된다. 여기서 '믿
음'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요, '복음의 소
망'은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모든 믿는 자들이 소유하게 될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구원
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ㅇ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 '천하 만민'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본 구절은 복음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
서 본 구절이 수사적 과장의 표현도 아니다. 오히려 본절은 6절에 표현된 것처럼 당시
복음이 계속하여 널리 전파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O'Brien). 즉 에
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고립된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또한 복
음이 하나님께 기원(起原)하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진정한 것임을 말해준다(Bruce).
ㅇ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 이것은 거짓 복음의 전파자들과 바울 사이
에서 혼동하고 있는 과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골
로새 교인들에게 전한 '소망의 복음'(23절)과 만민에게 전파된 보편적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도요 일꾼이었다.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ㅇ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가 당
한 고난의 불충분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당
연히 받아야하는 고난인 바 유기적인 관계에서 머리가 당하는 고난을 몸의 각 지체가
필연적으로 느껴야 하는 고난이다(Lightfoot).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ㅇ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 바울은
자신의 '일꾼'됨의 기원이 하나님께로 소급되어 올라감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사도직의 진정성 및 권위를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경
륜'(오이코노미안)은 '청지기'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
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로 해석하고 있다(by the
commission God gave, NIV). 바울의 이 청지기직은 바로 '너희' 즉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부여된 것임을 골로새 교인들은 인식하여야 했다.
ㅇ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 '이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사이'
는 문자적으로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완성하다'는 의
미이나 본문에서는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전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delivering, JB, O'Brien). '플레로사이'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신약의 용례는 롬
15:19이다('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전파하였음을 밝히고 있다(Carson).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ㅇ이 비밀은...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비밀'
(뮈스테리온)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과 상응한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예정 가
운데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왔던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나타났었다(단 2:19,
28, 2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민족뿐만아니라
하나님의 택함받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드러났다(Carson).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ㅇ하나님이...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
라 - 본절은 비밀인 복음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부연 설명한다. 바
울은 '풍성함'(플루토스)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길
이 참으심의 풍성함'(롬 2:4), '영광의 풍성함'(엡 1:18 ; 빌 4:19), '지혜의 부요함'
(롬 11:33), '은혜의 풍성함'(엡 1:7 ; 2:7) 등으로 자주 사용했다. 또한 바울은 '놀
라울 만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풍성함'이란 말을 사용했다(Caird). 이와 같이 바울
서신 중에 나오는 '풍성함'은 신적인 것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Scott). 본절에서
바울은 '풍성함'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이방인들의 회개, 곧 그리스도와의 한 몸됨의
신성한 경이(驚異)를 표현하고 있다.
ㅇ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
을 '이 심오한 진리는 곧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
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이 그
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것 즉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된 것을 말해줌과 동시에(25
절)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가질 소망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ㅇ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 '우리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이스'
는 일인칭 복수 강조형으로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는 적대자들과 바른 진리를 전파했던
바울, 디모데, 에바브라를 분명하게 구별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광의 소망'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전했다.
ㅇ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
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권면과 가르침'은 바울의 사도직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
다. 사도의 전도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으로(27절)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22절) 설 수 있도록 신앙의 진보가 있어야 한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
여 수행하는 직무는 궁극적으로 성도의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ㅇ이를 위하여 -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했던 바, 성도들을 권면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ㅇ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 -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능력의 원천이 자기
밖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다.
ㅇ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 바울이 사도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그리스
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사도의 수동성 즉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기계처
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진가를 드러내는 것은
바울 자신의 사도적 소명 의식의 철저성과 전적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
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수행하면서 괴로움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교회를 위해 헌신한 것은(24절), 그리스도의 능
력주심과 아울러 바울의 사도적 충성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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